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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무인정권기 2
- 심양왕의 이러한 큰 야망은 오직 대칸과 자신만이 아는 것이었기에 대원제국의 나머지 실력자들도 역시 돌아가는 정세가 이해가 안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이제는 심양왕의 견제세력으로 떠오른 바얀 등은 당시 탈탈 대승상을 움직여 심양왕을 고려로 환국시켜 고려왕의 임무를 다 하게 해야 한다고 대칸에게 건의했으나 대칸은 오히려 '심양왕'의 작위를 '심왕'으로 격상함으로써 이들의 불만을 제어했다.
- 이제 '심왕'이 된 선왕은 더욱 더 자신감이 생겨 고려의 신하들에게 대도로 와서 고려의 정사를 아뢰라는 이른바 '전지정치'를 실행하도록 한다. 이는 물론 여러모로 무리한 정치라는 점은 그 누구보다도 심왕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국적으로 볼 때 이는 어디까지나 과도기적인 정책으로 자신이 중심을 잡고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굳게 심왕은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단기적으로는 고려 조정을 큰 혼란으로 밀어넣었다.
- 특히나 심왕의 개혁정책을 지지하고 있던 고려 대신들은 심왕의 이런 행동에 크나큰 배신감을 느꼈다. 이들 중 한 명이었던 전승 최유엄은 직접 대도로 찾아가 심왕과의 독대를 청했다. 그를 만난 심왕은 일단 온화한 미소로 대했다.
"먼 길을 수고스럽게 오게 해서 미안하오."
"전하, 전하께서는 고려의 전하가 맞사옵니까?"
다짜고짜 극언을 퍼붓는 최유엄에게 심왕은 약간 당황했지만 대답했다.
"물론이오."
"그럼 왜 고려에 아니계시고 이곳 대도에 계시는 것이옵니까?"
"내가 조서로 이미 신하들에게 자세히 설명했을텐데...?"
"신 등은 이해가 안되옵니다. 물론 대칸이 전하에 대한 신망이 두터워 요동 일대를 관할하는 직책을 부여하셨음은 우리 고려로서도 크나큰 경사이고 어찌보면 태조 폐하 이래로 국시였던 북벌의 완성이기도 한 실로 천 년의 쾌거이옵니다. 그러나 개경에 계시면서도 얼마든지 심왕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하실 수 있사옵니다. 그런데 고려의 지존께서 이곳 대도에 계시다니요? 이건 신 등이 일찌기 들은바 없는 괴이한 행동이십니다."
"대칸께서 이곳에 머물러 고려와 요동을 동시에 관할하라 간곡히 부탁하시어 어쩔 수 없이 그리 되었소. 그러나 대도에 머무르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오. 과인도 다 생각이 있어 이러는 것이니 경 등은 부디 제발 과인을 이해해주기 바라오."
"전하가 고려에 아니계셔서 그동안 전하의 개혁이 전부 다 물거품이 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백성들에게 헛된 희망만 잔뜩 넣으시고 오히려 더 큰 좌절감만 안겨 주었습니다. 이것은 한 나라의 군왕이 취할 행동이 못되는 것입니다."
"과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개혁은 여기 대도에서도 얼마든지 교지를 내림으로써 계속 추진될 수 있다고 보오. 오히려 과인이 대도에 있음으로써 고려의 안녕이 더욱 더 보장받는 것이오. 지금 현재 세상의 힘의 중심은 여기 대도요. 그리고 여기 대도에서 과인은 고려에 있을때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고 결국 그 혜택은 고려에게 돌아가는 것이오. 그러한 이치를 경은 진정 이해 못하겠소?"
그러자 최유엄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또 하나의 독설을 내뱉었다.
"지금 고려에서는 이상한 말이 돌고 있사옵니다."
심왕은 아무 대답도 안한 채 최유엄을 노려보기만 했다.
"전하께서 실은 경왕 전하의 소생이 아니라는 소문입니다."
이 말을 듣자 아무러한 심왕의 얼굴에 노기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뭣이?"
"물론 신 등은 그런 참담한 말을 믿지 않습니다. 분명 이는 개혁에 반대하는 무리들이 지어낸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계속 대도에 머무르시면 이런 참언이 더욱 더 설득력을 가지게 될 것이옵니다. 몽골인이기 때문에 고려에 아무런 미련이 없어 돌아오지 않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 최유엄의 무엄함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자 심왕 주변의 측근들이 최유엄에게 달려들려고 했으나 심왕이 만류했다. 그는 가까스로 노기를 가라앉히고 최유엄을 내쳤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의 말이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 1년이 지나도록 심왕이 고려로 귀환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고려 조야의 여론은 더욱 악화되어 나갔다. 심왕이 경왕의 소생이 아니라는 유언비어는 이미 백성들까지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로 널리 퍼져나갔다. 심지어 왕이 대도에서 급사했는데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까지 돌았다.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하자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이 흉흉해졌다.
- 처음에는 이런 유언비어가 심왕의 정적이었던 권문세족들이 지어낸 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권문세족들 입장에서는 심왕이 대도에 있어서 개혁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는 현 상황이 오히려 좋기 때문에 일부러 심왕을 자극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면...
(고려의 개혁파들이...?)
- 심왕은 고려에서 돌고 있는 불경한 소문들은 자신의 귀국을 강제하기 위한 개혁파들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라면 내가 돌아와 헛소문을 잠재우고 개혁을 계속 추진하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에 이런 무리수를 두기에 충분하다고 여겼다. 이에 대한 대책이 나름 시급했지만 제국의 정사를 대칸과 함께 돌보기도 바쁜 몸이었기 때문에 잠시 이를 미루어두기로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것은 심왕 인생의 최대 실수로 남게 된다.
- 이제 '고려심왕'이라는 직책으로 대원제국을 대칸과 동등하게 다스리는 지위에 오른 심왕은 그야말로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권력이 그만한만큼 각종 대소사를 챙기느라 정말 하루가 짧은 것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또한 새로운 대칸 이후 그를 지지했던 분파들간의 정쟁 또한 중재하거나 무마하는 역할도 그의 몫이었다. 그런 심왕에게 고려에서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개혁파들의 불만 소식은 그야말로 그에게는 지엽적인 관심사에 불과했던 것이다.
- 대원제국의 중심에 있는 심왕에게는 사소한 일이었지만 고려의 입장에선 이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심왕의 복위로 그토록 염원하던 고려개혁 나아가 몽골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개혁파들의 배신감은 이로 말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심왕이 고려로 돌아와 정상적으로 고려를 통치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알자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 그들은 고심끝에 심왕이 고려의 정사를 대행시켰던 제안군 왕숙에게 접근했다. 그들은 왕숙에게 먼저 넌지시 심왕에게 아뢰어 고려왕의 자리를 양위해달라고 하면 안되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왕숙은 펄쩍 뛰었다. 왕숙은 개혁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왕이 어떤 사람인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숙은 이 사실을 대도의 심왕에게 고할까하다가 그래봤자 한층 고려의 혼란만 가중된다고 생각하고 이들 개혁파 신료들을 넌지시 타이르고 없던 일로 했다.
- 왕숙에 대한 공작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이들은 심왕의 장남인 왕감에게 접근했다. 그때 왕감은 심왕이 다른 가족들과 함께 대도로 데리고 가지 않았다. 가뜩이나 자신이 고려를 비워두어 여론이 안 좋을 것을 미리 예견한 심왕이 장차 자신의 뒤를 이을 왕감을 고려에 남겨두어 그나마 불만을 최소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 그런데 개혁파들이 본격적으로 접근하기 이전부터 왕감은 이미 부왕이 고려를 비워두는 것에 나름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10대의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그는 여러 위기상황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이다. 고려의 개혁파들은 심왕의 귀국을 바라는 다른 신료들과 힘을 합쳐 왕감을 고려왕으로 내세우는 작업에 돌입했다. 어차피 자기 핏줄이니 고려왕으로 세우고 심왕은 대도에서 계속 권력을 휘둘러도 괜찮을 것이라 그들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에 보듯이 그들은 심왕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 이들은 부왕의 정책에 비판적인 왕감을 보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자신들이 찾던 고려왕의 재목이었던 것이다. 만에 하나 왕감이 고려왕이 되어 제대로 개혁을 완수하지 못하더라도 대도의 심왕이 자신의 맏아들을 지도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왕감을 데리고 고려 백성들의 처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비교적 궁궐에서 곱게 자란 왕감은 막상 바깥세상의 지옥도를 보자 더욱 충격을 먹었다.
"이것이 고려의 현실이옵니다. 저하..."
"그렇다면 이런 고려를 놔두고 아바마마는 도대체 대도에서 뭘 하신다는 말인가...?"
"소신들의 말이 그말이옵니다. 고려왕이신 전하께서는 마땅히 환국하시어 못다한 개혁을 완수하셔야 하는 것이 순리이옵니다. 그런데 대도에서 고려왕으로서 다른 일에만 몰두하고 계시니 이것은 이치에 맞지가 않습니다. 전하께서 너무 완강하시기 때문에 소신들은 대신 고려를 다스릴 새로운 왕을 저하께서 맡아달라 굽어 통촉하는 것이옵니다."
"부왕이 계신데 어찌 내가 감히 고려왕의 자리를 탐하겠소? 일단 대도로 가서 내가 직접 아뢰어보리다."
- 이렇게 해서 대도로 부왕을 찾아간 왕감은 고려의 참혹한 현실을 자세히 아뢰며 환국을 종용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하는 아들의 모습을 쳐다보던 심왕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 또한 그런 고려의 현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때가 있음을 알기에 인내하는 것일 뿐이었다.
"네가 아직 세상을 잘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세상사는 네 생각처럼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란다. 때로 군왕이란 멀리 보고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해 희생을 겪어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나도 고려로 돌아가지 못하고 장차를 대비하는 것이다."
"하오나 아바마마...지금 고려는 반드시 아바마마가 계셔야 하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고려의 백성들이 아우성을 치며 죽어가고 있사옵니다. 아바마마가 안계신 고려는 탐욕스러운 권문세가들이 그야말로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고 있습니다. 제안공 왕숙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더 이상 고려를 방치하지 마옵소서!"
"내가 한 말 못 들었느냐? 못난놈같으니...그렇게 안목이 좁아서야 내가 어떻게 대사를 장차 너에게 맡길 수 있겠느냐? 못난 놈 같으니...!"
- 심왕의 꾸지람을 들은 왕감은 한숨을 내쉬며 대도를 떠나 고려로 돌아왔다. 그러자 개혁파 신료들이 물어왔다.
"뭐라 하십니까?"
"아바마마께서는 그저 조금만 더 참으라 하십니다. 너무 오래 고려를 떠나셔서 이곳 사정을 전혀 모르시나 보오. 이러다가 나라가 망할 판국인데 말이요..."
"그렇다면 이제 저하께서 결단하셔야 합니다."
"무얼 말이요..."
"고려 백성들을 위해...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시는 것 말이옵니다."
"나보고 아바마마를 배신하고 고려의 왕이 되라는 소리요? 그건..."
"일찌기 심왕 전하께서도 정의를 위해 경왕 전하와 척을 지시지 않으셨습니까? 대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옵니다."
- 그러나 왕감은 아직도 확실히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그 와중에 고려에서의 새로운 움직임이 심왕의 정적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고려에 있는 권문세족들, 그리고 대도에 있는 바얀 등의 세력들...이들은 왕감의 이런 모습에서 심왕을 궁지에 몰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니...
- 고려심왕과 고려에 남아있는 세자 왕감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는 소식은 테무르 대칸을 몰아낼때까지는 심왕과 동지였던 바얀과 다란칸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들은 아무리 종친이라고는 해도 하야스 대칸의 심왕에 대한 신임이 너무 과도하다고 느끼고 서로 공조하며 심왕을 견제하기로 마음먹은 지 이미 오래였다. 그는 아직까지도 심왕의 장인이었던 정계의 거물 감마라칸까지도 끌어들일 생각을 했으나 아무리 감마라칸이 기회주의자라도 기본적으로 심왕의 편을 들까봐 망설이고 있었다.
- 대도까지 찾아가 부왕을 설득하려 했던 세자의 시도는 예상대로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고려의 개혁파들은 어린 세자가 산전수전 다 겪은 심왕의 말빨에 상대가 안되리라는 점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다만 그래도 그를 대도로 보낸 이유는 자꾸 틈을 벌이게 하여 세자가 나중에 자신들의 말을 더 잘 듣게 하기 위함이었다. 세자는 단순히 고려를 위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부왕의 정책에 비판적이었고 간언을 한 것이었으나 이들 개혁파들의 계획에 자기도 모르게 끌려들어가는 모양새가 되었던 것이다.
- 대도로 직접 쳐들어가 심왕에게 대들었던 최유엄 등도 이미 강경 개혁파의 일원이었음은 물론이고 이제 이들은 속도를 앞당기기 위하여 김의중이라는 인물을 세자에 붙여놓게 되었다. 그의 임무는 세자를 수행해 자주 고려의 현실과 신음하는 민중들의 모습을 보여주게 하여 나라를 생각하는 세자의 조급함을 이윽고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표출하게 하려는 물밑작업이었다.
- 세자가 대도까지 직접 찾아와 귀환을 종용하고 최유엄이 찾아와 자신에게 무례를 저지르며 귀환을 촉구하자 아무러한 심왕도 고려를 너무 비우면 위험할 것이라는 점을 직감했다. 그래서 계속 자신의 간자들을 보내 국내 정세를 파악하게 하고 개혁파와 권문세족들의 동향을 계속 보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바얀과 다란칸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심왕을 최대한 대도에 묶어놓고 그 사이에 세자로 하여금 고려에서 변란을 일으키게 하여 심왕의 평판을 최대한으로 떨어뜨린 다음에 고려로 쫒아내버려 권좌를 내려놓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현재 권력의 최정점에 있었으나 심왕은 이미 경왕과의 골육상쟁이라는 주홍글씨를 이미 가지고 있어서 또 한번 이번에는 아들과의 골육상쟁을 한다면 그의 운신에 치명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 바얀은 은밀히 자신과 선이 닿아있던 고려의 권문세족들을 통해 심왕이 보낸 간자들을 잡아 매수하게 하여 고려정세의 심각성을 실제보다 훨씬 축소시켜 보고하게 한다. 그래서 심왕은 세자와 개혁파들의 불평이 있으나 심각한 수준은 아니고 권문세족들도 마찬가지라는 종합적인 판단을 하게 된다. 따라서 심왕은 아직도 시간이 있다고 생각해 대원제국과 심왕으로서의 정무에 당분간 열중하게 된다. 권문세족들 입장에서는 최대한 심왕의 귀국을 늦추려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이 부분에서 바얀과 이해관계가 일치했으나 심왕이 정치적으로 매장당한 다음에 고려로 돌아온다는 바얀의 후반 계획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 개혁파들은 세자에게 그동안 고려의 위기상황을 실제보다 엄청나게 과장해 세자에게 알리는데 주력했다. 그래서 세자의 인내심도 그만 한계에 다다르게 된다. 아직 어린 나이라 차분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훈련이 덜 된 점도 작용했다. 이제 때가 되었다 판단한 개혁파들은 어느 날 왕궁의 텅빈 옥좌가 놓여있는 대전으로 세자를 안내한다.
"아바마마도 안 계신데 내가 왜 여기 와야 하오?"
어리둥절한 세자에게 김의중은 아뢰었다.
"이미 심왕께서는 고려를 버리셨습니다. 이제 세자마마께서 고려의 옥좌에 오르시어 고려의 정사를 돌보셔야 하옵니다. 고려에 계신 세자마마야말로 고려의 참된 군왕이시기 때문이옵니다."
그러자 도열해있던 개혁파들은 한결같이 외쳤다.
"천세 천세 천천세!!"
세자는 당황하며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있었다.
"만약 아바마마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경들은 어찌 처신하려고 이러시오? 이러지들 마시오..."
개혁파들을 대표해 그들의 입이 된 김의중은 이에 대답했다.
"심왕께서는 워낙 제국의 정사일로 바쁘시어 고려에 못 오신다는 점은 저희들도 이해하옵니다. 그러나 세자마마께서도 보셨듯이 작금 고려의 사정은 너무 안좋사옵니다. 백성들은 도탄에 빠진 상황에서 더 이상 이 나라에 군주가 안 계시오면 5백년 고려의 사직은 망하옵니다. 이에 신들이 구국의 일념으로 세자마마를 임시로 왕위에 올리고 심왕의 회답을 기다리자는 것이옵니다. 또한 세자마마는 심왕 전하에 이어 당연히 고려의 왕이 되실 몸이옵니다. 현 시국이 수상하니 심왕께서도 크게 이해하시고 저하에게 고려를 맡기실 것이옵니다. 너무 심려 마옵소서. 자 오르시옵소서."
- 세자는 잠시 더 머뭇거리다가 서서히 옥좌의 계단을 밟기 시작했다. 그리고 크게 심호홉을 한 다음 고려의 왕좌에 앉았다. 그러자 개혁파들은 다시 한번 천천세를 외치며 신왕의 즉위를 경하했다. 그리고 심왕의 조서라며 위조해 문무백관에게 뿌리고 신왕의 즉위를 정당화했다. 이어 재빠르게 고려의 모든 권력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심왕이 머뭇거린 사이에 말하자면 고려에서 개혁파들이 주동해 세자 왕감을 왕위에 올리는 정변이 일어난 것이었다.
- 얼마 후 이 소식을 들은 제안군 왕숙은 자신이 모을 수 있는 군사를 집결시키려고 했으나 바얀의 공작으로 이제 완전히 심왕을 고려에 들어오는 것을 사생결단으로 막기로 한 권문세족들까지 개혁파들과 힘을 합친 결과 오히려 왕숙이 목숨에 위협을 받으며 고려 국경 밖으로 내쫒기는 상황이 벌어졌다. 권문세족들과 개혁파들은 서로 상극이었으나 일단 심왕이라는 공동의 적을 막기 위해 불가피하게 한 배를 타게 된 것이었다.
- 곧바로 대도로 달려온 왕숙에 의해 사태의 전말을 들은 심왕은 경악했다. 자신의 친아들...그것도 장남이 자신의 뒤통수를 이렇게 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받은 보고들도 모두 가짜였음은 더욱 충격이었다. 자신이 오래 대도에 머무는 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고려의 기반이 사실상 허무할 정도로 전무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허기사 고려왕이면서도 머문 기간이 얼마 되지도 않으니 어떻게 보면 자업자득이었다.
- 왕숙이 대도로 도망쳐 온 지 불과 하루 뒤, 이번에는 고려 개경에서 아들 왕감의 서신이 도착했다. 위기에 빠진 고려를 구하고자 충신들이 종용해 자신은 어쩔 수 없이 고려의 임시왕 자리에 올라 급하게나마 백성들을 구할 정사를 펴겼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므로 아바마마인 심왕은 부디 이를 이해하고 이렇게 된 이상 고려를 자신에게 임시로 맡겨 달라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읽자 심왕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이런 천하의 바보천치같은 놈...내 여태껏 이런 놈을 세자로 앉히고 후일을 도모하려고 했다는 말인가???"
- 심왕은 울부짖으며 서신을 갈기발기 찢어 내동댕이쳤다. 자신이 대도에서 행세할 수 있는 기반이 바로 고려왕이었는데 그걸 세자가 앗아가버리면 바얀 등 정적에게 좋은 빌미가 될 뿐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너무 경솔했음을 하늘을 우러러 후회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심왕은 눈 앞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그러나 항상 위기에서 그의 능력은 빛을 발했다.
- 심왕이 명색이 왕으로 있는 고려에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아들인 세자가 정변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은 여러 경로를 통해 삽시간에 대도에도 퍼졌다. 사람들은 심왕이 아버지인 경왕과도 다투고, 부인인 보다시리와도 무늬만 부부이고한데 이제 친아들까지도 등을 돌렸다고 뒤에서 수군거렸다. 바얀 등 반심왕파는 이러한 여론을 한층 부정적으로 퍼뜨렸다.
(정말로 난 저주받은 팔자던가...?)
- 자신의 발판이던 고려에서 정변이 터지고 자신의 명성이 또다시 곤두박질치는 최악의 상황에 다시 직면하게 된 것이었다. 세자의 친모였던 야속진은 자신이 직접 고려로 가서 세자를 설득하겠다고 심왕에게 진언했으나 심왕은 소용없을 것이라고 단칼에 이를 물리쳤다. 세자의 성격을 어릴적부터 잘 아는 심왕은 고집세고 순수한 세자가 이지경까지 왔으면 대의를 내세워 쉽게 아무리 어머니라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속진도 이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모정을 내세워 한 번 시도라도 해볼 요량이었다. 그만큼 사태가 급박했던 것이다.
- 그런데 그 와중에 보다시리가 심왕을 찾아왔다.
"부인, 어쩐 일이오?" 이미 거처가 서로 다른 사실상 남남이었기 때문에 보다시리를 대하는 심왕은 냉랭했다.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제 어찌하실 셈입니까?"
"일체 연락이 없던 그대가 내 아들놈의 일로 직접 찾아오니 참으로 고마울 따름이구려."
심왕의 냉소적인 반응이었다.
"제가 부친을 설득해 조정의 여론을 움직여 고려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도와드릴까 합니다."
심왕은 이 말에 귀가 송곳했으나 이내 되물었다. 그만큼 이들의 관계는 지극히 이해타산적이 되버린지 오래였다.
"댓가는?"
"당신이 항상 품속에 품고 있는 야속진이라는 그 계집을 세자에게 보내십시오."
"그게 무슨 뜻이요?"
"제가 여기 대도의 여론을 돌려놓을테니 그녀를 자기 자식에게 보내 설득하라는 겁니다."
- 심왕은 금새 보다시리의 의도를 알아챘다. 야속진을 자신에게서 떼어놓고 고려로 보내면 손을 써서 그녀를 죽여버리려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심왕은 보다시리가 능히 그러고도 남을 잔인한 여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 이미 부인에게도 말해놓았지만 세자는 부인이 간다고 해서 쉽게 마음을 돌릴 아이가 아니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써볼까 하오."
그러자 보다시리는 벌컥 화를 냈다.
"부인...부인이라니요? 저는 실제로 어떻든간에 전하의 엄연한 정실부인입니다. 그따위 천한 계집년을 부인이라 칭하시다니오? 지금 저를 모욕하시는 겁니까?"
"좋도록 생각하시오."
보다시리는 한참 씩씩거리다가 안정을 되찾았다. 심왕은 보다시리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좋소. 부인, 지금은 부인과 장인인 감마라칸의 도움이 필요하오. 장인 어른께 잘 말씀해 주시오. 조만간 조정에서 내가 소명할 기회가 있으니 말이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전하 이것만은 명심하세요. 제 앞에서 함부로 그년을 부인이라 칭하지 마세요. 전하께 부인은 오직 저 하나입니다. 저는 제가 죽을때까지 전하의 부인으로 남을겁니다. 실제로는 부부가 아니라도 말입니다."
- 고려의 정변 소식이 퍼지자 난감해진 것은 대칸 하야스도 마찬가지였다. 최대한 심왕을 변호하고 싶었지만 바얀 등이 주도하는 여론은 심왕에 매우 비판적이 되버리고 나름 심왕도 조정에 자신의 세력을 심어놓았지만 이런 여론에 소극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바얀 등은 고려의 세자가 정변을 일으켰는데 당연히 아비인 심왕이 가서 이를 진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사실 상식적으로 보면 이것이 맞는 말이었으나 심왕의 속사정은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여기에서 여론에 밀려 고려로 돌아가면 다시 여론에 밀려 영원히 대도에 발을 들여놓지 못할수도 있었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야망도 종지부를 찍게 되는 것이다. 대칸 입장에서도 믿을 수 있는 심왕이 곁에 없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내심 심왕을 응원하고 있었다.
- 결국 조정에서 심왕 등 모든 대신들이 총출동해 이 문제를 다루기로 했다. 바얀과 다란칸 등은 심왕이 마땅히 고려로 귀환해야 할 당위성을 설파하며 이는 너무나 당연한 조치인데 심왕이 안가고자 하는 것은 이해가 안된다고 했다. 대칸은 심왕을 거들어 심왕은 고려왕뿐만 아니라 만주도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에만 머물수 없다고 이해를 구하고자 했으나 바얀 등은 고려에 잠시 가서 정변을 진압하고 오면 그만인데 뭐가 문제냐고 따졌다. 그러자 한 발 나서며 바얀에게 묻는 이가 있었다.
"그렇다면 바얀 대장군은 심왕이 고려에 갔다온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겠소?"
감마라칸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고려에 대장군의 눈과 귀가 깔려있다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이오. 그렇게 심왕을 고려로 내쫒고 싶어하는데 잠시 정변을 진압하고 심왕을 다시 대도로 돌아오게 놔두겠다는 보장을 할 수 있느냐 말이오?"
"심왕이 반란을 진압하고 오는 것인데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그렇다면 순리에 맡기면 그만인데 그토록 심왕이 고려로 가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자식의 반란을 아비가 진압하도록 하는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더구나 심왕은 고려왕이기도 합니다."
"당연? 그게 과연 좋은 모양새가 되겠소? 더구나 심왕은 이미 경왕과도 같은 골육상쟁을 겪은 바 있소. 또다시 그런 수모를 겪게 하자는 말이오? 도대체 바얀 당신의 의도가 뭐요?"
- 감마라칸이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아무러한 바얀도 대답히 궁색해지기 시작했다. 눈치빠른 대칸 하야스는 며칠 동안 정회하기로 하고 심왕과 단둘이 만나 사안을 논의했다.
"잠시 정회했으나 사태가 어떻게 흘러갈 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형님. 바얀이 반격하기 전에 빨리 고려의 정변을 진압해야 합니다. 그래야 형님이 고려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생각해두신 묘안이 있습니까?"
"있기는 하지만...이것 역시 세자의 반란만큼이나 앞으로 나의 전정에 치명적일 수 있어서 고민이다. 특히나 고려왕으로서의 나의 위치에 있어서 말이다."
"시간이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대칸. 저에게 하루의 말미만 주십시오. 깊이 생각해보겠습니다."
- 심왕의 눈빛은 흔들렸다. 과연 그의 고육지책은 무엇일까?
- 대칸과 대화를 나눈 다음 날 심왕은 초췌한 얼굴로 황궁을 찾아갔다. 주위를 모두 물린 대칸은 심왕에게 매우 궁금하다는듯이 물어봤다.
"그래, 형님. 무슨 복안이 있으신 것입니까?"
- 그래도 누군가 엿들을까봐 심왕은 대칸에게 가까이가 귓속말로 뭔가를 소곤거렸다. 그러자 대칸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해졌다.
"그렇게 한다면 고려의 난리를 수습할수는 있겠지만 형님의 고려에서의 입지가 크게 흔들릴 것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렇다고 이렇게 그냥 방치한다면 난 고려에서의 모든 기반을 잃게 된다. 최악의 상황만은 막아야 할 것이 아니냐?"
"음..."
- 대칸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대칸으로서 명하노니 심왕은 그대로 계책을 시행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대칸!"
- 한편 대도로 서신을 보낸 세자 왕감은 부왕인 심왕으로부터 아무런 전갈이 없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화가 난 세자는 김의중에게 따져 물었다.
"그대는 내가 임시로 고려왕이 되면 심왕께서 모든 것을 납득하시고 용인하실 것이라고 했는데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것이오?"
"전하, 침착하시옵소서. 조만간 곧 심왕께서 무슨 하교가 있으실 것입니다. 게다가 설사 일이 우리 뜻대로 잘 안풀린다 해도 이미 고려의 모든 힘은 우리에게 있사옵니다. 도대체 두려워 하실 것이 무엇이옵니까?"
"부왕의 허락도 안받고 오직 나의 우국충정만으로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데 이제 세상이 나를 천하의 불효자라 일컬으면 난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오? 게다가 부왕께서는 대원제국의 실력자이신데 대군으로 고려를 침공해 불바다로 만드시면 애당초 이 일을 시작하느니 못한 일이 되는 것이 아니오?"
"전하, 전하께서는 부왕의 친아들...그것도 장남이시옵니다. 설마 심왕께서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라도 전하에게 해라도 끼치시겠사옵니까? 걱정마시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할 방안을 신등과 논의하시옵소서."
"개혁을 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권문세족들과 힘을 합쳐 가까스로 아바마마를 제어하고 있는데 저들을 막고 어떻게 개혁을 하겠다는 것이오?"
세자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김의중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비상시국에는 비상수단을 동원해야 합니다. 지금 고려에서 힘의 관건은 군사이옵니다. 권문세족들의 사병이 문제인데 지금 우리 사람들이 조정의 군권을 장악해나가고 있습니다. 일단 권문세족들과 제휴한 것은 일시적으로 저들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함이었고 저들을 한번에 쓸어버려야 마마께서 그토록 염원하시던 개혁...심왕께서도 쉽사리 추진하지 못하신 개혁을 전하의 손으로 이룩해내실 수 있습니다. 심왕 전하께서도 권문세족들 때문에 개혁을 안정적으로 추진하시지 못하셨는데 이것을 전하께서 이루시면 고려 백성들의 칭송은 물론이고 심왕께서도 기꺼이 전하를 인정하실 것이옵니다. 그날이 멀지 않았사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옵소서. 믿어주시옵소서, 전하."
- 이렇게 개혁파들은 임시 고려왕위에 오른 세자 왕감을 안심시키는데 분주했다. 그러나 권문세족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일단 심왕이 고려에 들어오는 것을 최대한으로 막아보자 대도의 실력자 바얀과도 내통했고 심지어 개혁파들과도 연대해 이를 일시적으로 성공시켰으나 개혁파들이 조정의 군권을 장악해나가자 결국은 서로 격돌할 것임을 직감했다. 사실 서로 원하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는 숙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권문세족들도 나름 대처를 하는 중에 대도에서 심왕의 전갈이 왔다.
- 심왕이 권문세족들에게 전한 메시지는 놀라웠다. 앞으로도 일정한 개혁을 계속 하겠지만 권문세족들의 이권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겠다는 것이었고 세자 왕감을 끌어내려 대도로 보내주면 이전처럼 제안공 왕숙에게 섭정을 계속시키고 현상태를 유지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권문세족들은 심왕이 궁지에 몰리자 일시적인 방편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 의심했다. 그러나 이 전갈을 비밀리에 가지고 온 사람은 놀랍게도 대칸의 아우인 아유르바르와다(훗날의 인종)였다. 그가 대칸이 이 약속을 보증한다는 말을 하자 삽시간에 대세는 돌변했다.
- 그래도 심왕을 의심하는 일부 권문세족들이 있었으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는 하되 일단 대원제국의 대칸이 직접 약속을 한 것이나 진배없었기 때문에 심왕편에 서서 왕감을 잡아보내야 한다는 의견이 결국 대세를 이루었다. 그동안 대칸이 속국에게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불문율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의견이 모아지자 권문세족들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 아유르바르와다와 같이 돌아온 제안공 왕숙은 권문세족들과 논의해 야밤을 틈타 일시에 대규모의 사병들을 이끌고 궁궐을 공격해 들어갔다. 권문세족들이 이렇게나 빨리 자신들의 뒷통수를 칠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개혁파들은 군사를 동원할 틈도 없이 너무나 어이없게 패주해 도망치기에 바빴다. 권문세족의 사병들은 세상 모르고 자고 있던 왕감을 사로잡고 곧바로 대도로 실어보냈다. 모든 것이 전격적으로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졌고 허둥대던 김의중 등 개혁파의 우두머리들도 각개격파식으로 모두 대도로 압송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왕감의 쿠데타는 너무나도 허무하게 막을 내렸던 것이다.
- 대도로 압송되어온 왕감은 어느덧 부왕 앞에 무릎꿇려져 있는 처지로 전락했다. 그 뒤로 김의중 등 다른 개혁파의 수장들도 모두 무릎꿇고 있었다.
"나의 보검을 다오!"
- 심왕은 검을 쥐자 지체없이 다가가 김의중 등 개혁파의 무리들을 하나하나 목을 베기 시작했다.
"네놈들의 어리석음이 대사를 그르쳤구나! 너희들은 고려 종사의 천년만년 죄인으로 역사에 남게 될 것이다!"
- 심왕이 직접 하나하나 모두 목을 베어버리고 이윽고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세자만이 남게 되었다. 목이 잘린 시체들이 널브러진 심왕의 거처는 온통 핏물로 가득했고 피비린내가 진동해 분위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제 너만 남았다. 단지 내 핏줄이라는 이유로 이 무리들의 수괴인 너를 살려야 하겠느냐?"
- 세자는 떨면서도 말했다.
"소자는 단지 고려를 위해서 한 일이옵니다. 부왕께서 저를 이해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내 너를 대도로 불러 그토록 알아듣게 이야기했거늘...너를 세자로 삼은 것도 다 내 불찰이니 이제와서 누굴 탓하랴...다만 차마 내 손으로 널 죽일 수도 없고 대칸께서도 특별히 네놈을 죽이지 않고 귀양보내시는 관대한 처분을 내리셨으니 가서 죄를 참회하며 지내라. 네 운명은 이제 내 손을 떠났다."
- 심왕은 허탈한 목소리로 그렇게 내뱉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보다시리가 한 마디 했다.
"세자...이토록 부왕께 불효를 저질렀으면 알아서 스스로 자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소?"
- 그러자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심왕은 나직히 말했다.
"부인...그만하시오. 이제 모든 것이 끝났소."
"세자 그대때문에 부왕이신 심왕은 또다시 골육상쟁의 오명을 뒤집어썼어요. 결국 고려에서의 개혁도, 여기 대도에서의 입지도 또 치명타를 입게 되었죠. 아직도 자신의 죄가 뭔지도 모르고 있죠?"
- 세자는 보다시리와 심왕과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소로운 눈빛으로 보다시리를 아무말 않고 노려보기만 했다. 보다시리는 그런 세자와 치열한 눈싸움을 벌이다가 문득 심왕에게 물었다.
"전하...이전에 전하가 저희 가문의 요청을 하러 오셨을때 제가 거래의 조건을 말씀드린 적이 없었던 것 기억하시죠?"
심왕은 침통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이야기는 갑자기 왜 꺼내시오?"
"바로 이것이옵니다!"
- 그러자 심왕은 문득 깨달은 듯 눈을 번쩍 뜨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보다시리의 창이 세자의 가슴을 정통으로 꿰뚫었다.
"안돼...!!!"
- 세자는 뭐라 할 틈도 없이 창을 맞고 즉사했다. 심왕과 야속진은 달려가 세자를 부둥켜안고 오열했다.
"감아...감아...!!!"
"역시 저 천한 년의 씨를 받은 것이 전하에게 화가 되었습니다."
보다시리가 냉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하자 야속진의 눈빛에 살기가 돌았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칼을 빼들어 보다시리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그러자 심왕이 제지했다.
"야속진...제발 멈추시오!!!"
- 야속진은 입술을 떨다가 이윽고 다시금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왕감의 시신을 껴안고 다시금 통곡했다.
"역시 전하는 현명하시군요. 전하가 못하신 일을 제가 거들어드린 것뿐이옵니다. 저를 너무 원망마시지오."
- 보다시리는 그 말만 남긴 채 자리를 떠났다. 심왕과 야속진 내외는 그렇게 한참동안 절명한 왕감의 시신을 안고 울고 또 울었다. 그 사이에 심왕의 머리는 어느덧 백발이 되어버렸다. 얄궂은 운명의 장난으로 심왕의 장자이자 장차 고려왕이 될 뻔했던 왕감은 이렇게 죽어버린 것이었다. 서기 1310년 5월 어느 날의 일이었다.
- 비록 자신에게 크나큰 불효를 자행한 세자 왕감이었으나 보다시리 손에 급사하자 심왕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장남을 잃은 그는 물론이고 친모였던 야속진은 당분간 침상에 누워 병을 돌보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심왕 역시 한동안 자신의 궁 밖으로 나가지 않고 두문불출한채 슬픔을 달래야만 했다.
- 심왕이 예상한대로 세자 왕감의 정변을 이런 식으로 정리한 후폭풍은 엄청났다. 아버지 경왕의 골육상쟁도 모잘라 아들과의 골육상쟁까지 일어나 결국 장남이 죽는 참담한 일로 파국을 맞자 바얀 등 심왕의 반대파들은 맹공세를 취했다. 자신의 가족들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분란을 일으키는 작자에게 대원제국의 중임을 맡긴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쿠빌라이의 외손자라 해도 이러한 인물에게 제국을 맡긴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다는 것이었고 이 역시 대칸인 하야스에게도 적지않은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 세자의 죽음은 고려에도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자신의 우군으로 여겼던 개혁파를 스스로 숙청한 심왕으로 인해 오히려 자신의 궁극적인 정적이라고 여겼던 권문세족들과 잠정적인 제휴를 하는 처지로 전락했고 이는 백성들 입장에서는 심왕이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여기기 충분했다. 복잡한 속사정을 모르는 백성들은 한없이 심왕을 원망했고 그의 평판 또한 땅에 떨어져 고려왕으로서의 그의 지위도 위태로워졌다. 더구나 자신의 아들까지 죽이는 비정한 인간으로 알려지자 심왕은 백성들에게 어느덧 존경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자리잡았다. 겉으로는 심왕과의 휴전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시켜 만일에 대비한 권문세족들의 입김도 어느 정도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 이리하여 심왕은 세자의 죽음으로 인해 안팎으로 크나큰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나 대칸 하야스는 제국 내에서 심왕에 대한 비난을 모두 물리쳤다. 그는 심왕이 보여준 탁월한 제국경영의 실력을 믿었고 그에게 무한한 신뢰를 변함없이 보냈던 것이다. 그래서 심왕이 한동안 두문불출하자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직접 심왕궁으로 찾아가 위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장남을 잃은 충격으로 심왕궁은 그야말로 무덤 같은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자 심왕은 끝없는 슬픔에도 불구하고 마냥 이렇게 지낼 수만은 없었다. 그는 심양왕이었으며 동시에 아직도 고려왕이었다. 고려는 정사를 맡겼던 제안공 왕숙이 다행히 혼란을 간신히 수습하고 권문세족들과 균형을 이루며 그럭저럭 잘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또다시 고려왕 없는 고려의 상황은 언제든지 왕감과 같은 일을 반복할 불씨가 내재했다. 그러나 심왕 입장에서는 일단 제국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것이 더 급했기 때문에 고려일은 현상유지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 심왕이 가까스로 자신의 몸을 추스리고 자신의 명예회복을 하려고 나서는 찰나, 대칸인 하야스가 쓰러졌다. 여러가지 말이 돌았는데 일단 병상에 누운 하야스는 급속히 건강이 악화되어갔다. 자신의 건강도 별로 좋지 않았던 심왕은 만사를 제쳐두고 대칸의 병상을 지켰다. 심왕의 극진한 간병에도 불구하고 대칸은 이윽고 마지막 순간을 맞게 되었다. 최후를 직감한 대칸은 좌우 모두를 물리치고 심왕과 독대를 했다.
"형님, 정말 백발이 이제 되셨군요..."
대칸은 희미하게 웃었다.
"대칸..."
"아들을 그렇게 보내신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제가 이모양이 되어 형님에게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대칸의 보령 이제 겨우 30세입니다. 빨리 털고 일어나셔서 제국의 정사를 돌보셔야지요. 이런 모습은 온 세상의 주인이신 대칸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제가 죽더라도 형님이 계시니 큰 걱정은 없습니다. 다만..."
대칸은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지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이제 죽을때가 되니 그 옛날 형님과 함께했던 나날들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그려..."
"신은 아직도 혈기왕성하시던 대칸이 갑자기 이렇게 되신 것이 믿기지가 않습니다. 뭔가 짚이시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바얀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대칸은 또다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바얀의 세력기반 역시 저 대칸입니다. 비록 형님과는 사이가 좋지 않지만 그 또한 저의 충직한 부하입니다. 오랜 세월 그를 보아와서 잘 알고 있죠. 바얀은 아닙니다 형님. 어쨌든 이제 와서 그걸 따져서 뭘하겠습니까? 모든 것이 저의 운명입니다. 하늘의 푸른 늑대로 돌아가라는 계시지요."
"저도 심왕이니 고려왕이니 다 때려치우고 초야에 묻힐까 합니다..."
심왕은 자신도 모르게 문득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대칸은 정색했다.
"형님! 그 당치 않으신 말씀입니다. 지금 형님이 아니계시면 제국은 위태로워집니다. 이는 우리의 할아버지이시고 대원제국을 여신 쿠빌라이 대칸에 대한 도리도 아니구요. 형님은 아직도 하실 일들이 많지 않습니까?"
대칸의 호흡은 흥분때문인지 가빠졌다. 심왕은 대칸의 손을 꽉 쥐고 진정시켰다.
"형님의 야망에 대해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문득 대칸은 이런 말을 꺼냈다. 그러자 그의 눈이 갑자기 매서워졌다.
"그때 저에게 옛 고구려의 땅을 다 달라고 했을 때 다른 대칸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형님의 목이 달아났을 겁니다."
그 말을 듣자 심왕은 놀라기는 커녕, 지그시 눈을 감았다. 대칸의 숨은 점점 가빠왔지만 가까스로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저는 형님의 말을 너그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단지 형님과 제가 혈육이라는 점만은 아니었습니다...그건 바로 제가 그 누구보다도 형님의 깊은 속내를 잘 이해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형님이 이루고자 하는 그 대륙의 야망...우리 제국의 다른 칸국을 뛰어넘는 그 원대한 야망...그것 또한 칭기스칸이나 쿠빌라이 대칸의 뜻과 이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뿌리를 타고 올라가면 우리 모두는 하나입니다. 고구려니 몽골이니 그것을 구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형님이 대망을 이루신다면 그것 또한 우리의 제국의 복이 된다 이 말입니다..."
"하야스..."
죽음 직전 대칸의 진정성을 듣자 심왕은 눈물을 흘렸다. 대칸도 심왕의 손을 꼭 쥐었다.
"형님...이미 제 아우인 아유르바르와다와도 모든 이야기를 끝마쳤습니다. 저의 자식들이 너무 어려 일단 대칸의 자리를 아우에게 넘기기로 했습니다. 제 아우도 저 못지 않게 형님을 끝까지 믿고 따를 것입니다. 후일은 너무 걱정마십시오..."
여기까지 말을 마치자 대칸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한동안 숨을 헐떡거렸다...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으며 심왕에게 마지막 말을 건넸다.
"형님...제국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숨을 거뒀다. 심왕은 승하한 대칸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만을 흘릴 뿐이었다.
(잘가라 하야스...그대는 진정한 몽골의 위대한 푸른 늑대였으며 대칸이었다. 하늘에서 다시 보자꾸나...)
심왕의 눈에서 눈물은 가늘었으나 그의 마음 속에서는 피눈물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 심왕의 최대 정적이었던 바얀은 물론 하야스가 대칸이 되기 전까지는 생사를 같이 했던 동지였다. 그러나 권력이란 나눌 수 없는 법, 일단 자신이 받들던 하야스가 대칸이 되자 자신의 공에 비해 상대적으로 심왕보다 너무 대우가 낮다고 은근히 불평하게 된다. 물론 하야스가 살아있을때는 그를 진심으로 받들었기 때문에 그리 노골적으로 이에 대해 불평하지는 않았다. 또한 심왕과 자신의 신분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었기 때문에 그런 한계도 있었다.
- 그러나 하야스가 대칸이 되는데 바얀 자신의 공도 매우 컸기 때문에 조정에 자신의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고, 심왕이 궁지에 몰릴때마다 자신의 당여를 이용해 맹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위기를 벗어나는 심왕으로 인해 그의 불안감은 한층 더해갔다. 일단 하야스의 최측근 중 하나인 다란칸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데는 성공했으나 아직까지도 명목상의 심왕 장인이었던 제국의 숨은 실력자 감마라칸의 모호한 태도때문에 심왕과는 어중간한 권력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심왕이 자신을 벼르고 있었고 때가 되면 사생결단을 해야하는 처지라는 점은 바얀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심왕 역시 하야스 대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바얀에 대한 보복을 자제하고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 바얀을 지지하는 층은 주로 몽골의 무사계급이었다. 이는 주로 문관이 지지배경이었던 심왕과는 대조적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바얀이 군권을 쥐고 뒤짚어엎을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권력의 향방을 결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인 군대만은 하야스칸이 꽉 쥐고 있었고 자신이 죽기 전 이 군부의 수뇌들을 모두 불러 다음 대칸인 아유르바르와다에게 충성을 맹세시켰기 때문에 이마저도 용이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얀 자신이 군부로부터 은근히 신망을 받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아직까지도 제국의 강력한 세력이었던 메르키트 부족 출신으로 '메르키트 바얀'이라 불릴 정도로 그 부족의 자랑거리였다. 특히나 카이두의 난을 진압할 때 혁혁한 전공을 세워 몽골 전사의 최고 영광스러운 칭호인 '바토르'를 받을 정도로 무용이 뛰어났다.
- 바얀이 자신의 부하이기도 했지만 이러한 엄청난 배경 때문에 하야스 대칸도 생전에 그를 마음대로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하야스가 대칸이 된 다음 바얀은 이도상서, 어사중승, 상서평장성사, 그리고 아스트 친위군 사령관 등을 역임해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문제는 아유르바르와다가 바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가 하야스 대칸이 서기 1311년 1월에 승하하고 새로운 대칸이 되자 제일먼저 한 일이 심왕을 불러 바얀의 전횡에 대해 논의한 것이었다.
- 하야스 대칸의 죽음으로 상심에 젖어있던 심왕은 슬픔을 뒤로 하고 새로운 대칸과 다시 마주했다. 다행히 새로운 대칸은 하야스의 유언대로 심왕 자신을 더욱 전폭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낌새였다. 일단 방금 즉위했기 때문에 지지기반이 없었고, 군부는 충성을 하겠으나 자신이 믿을만한 측근세력이 전무했다. 그래서 자신과 혈통으로 이어진 심왕에 의지할 수 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바얀은 새 대칸 자신이 죽도록 싫어했기 때문이다. 심왕은 초췌한 얼굴로 심왕궁을 직접 방문한 새 대칸을 황망히 맞이했다. 심왕 그로서도 자신의 최대 아킬레스건인 고려를 이용해 계속 자신에게 비수를 들이대는 바얀을 이번 기회에 확실히 정리하고 싶어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심왕은 바얀과도 나이도 엇비슷해서 좋은 호적수가 되었던 것이다.
"심왕 전하..."
대칸은 자신을 스스로 하대하며 심왕에게 존칭을 붙였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대칸의 존댓말을 듣던 심왕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대칸, 바얀 문제는 그리 시간을 오래 끌 필요는 없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동안 저는 바얀이 권력을 누리며 저지른 온갖 비리와 부정 행위들의 증거를 다 확보해 놓았습니다. 바얀은 신이 이런 준비를 한 것을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다만..."
"다만...?"
"몇 가지 고려할 사항들이 있습니다. 첫째, 그래도 바얀은 한때 우리 모두와 생사고락을 같이 한 동지였습니다. 그를 내쫒는다고 해도 하야스 대칸의 말씀도 있고하니 절대로 죽일 수는 없습니다. 둘째, 바얀은 군부의 신망을 얻고 있으니 계획을 추진하기 전에 군부의 언질을 대칸께서 확실히 받아놓으셔야 할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칸을 배신해서는 안된다고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역시 형님께서는 용의주도하십니다."
새 대칸에게서 '형님'이라는 말을 듣자 심왕은 미소를 지었다. 하야스 대칸의 죽음 이후 처음 웃어보는 것이었다.
- 심왕이나 바얀이나 항상 서로에 대한 정보를 캐내려고 사방에 간자들을 뿌려놓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바얀의 첩자들은 대칸이 심왕궁을 방문한 사실을 그만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바얀은 새 대칸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뽀족한 대책이 없었다. 그래서 하야스 대칸이 서거한 후 자신이 정권을 확실히 장악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일이 성사되면 심왕을 고려로 쫒아내고 거기서 손을 써서 없애버릴 심산이었던 것이다.
-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바얀은 군부의 실력자들을 만나 자신에게 협조해줄 것을 부탁했다. 사실상의 쿠데타 모의였으나 뜻밖에도 이들은 난색을 표했다. 하야스 대칸이 이미 이런 조짐을 알고 자신들에게 새 대칸에게 무조건의 충성을 서약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몽골 전사들은 어지간한 인간 말종이 아니면 이런 서약을 반드시 지켜야만 했다. 바얀에게는 비밀로 했기 때문에 그걸 모르고 바얀이 이들에게 접근했다가 그만 개망신을 당했던 것이다.
-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바얀은 다란칸 등 자신의 파벌들과 회동해 대책을 논의했다. 바얀 자신의 지지기반인 메르키트 부족을 끌어들이자는 논의가 나왔으나 아무리 바얀의 명성이 크다고 해도 이전 테무르칸때도 반란에 동의해 정권교체를 한 부족이 또다시 같은 짓을 반복했다가는 전체 몽골 울루스에게 지탄을 받기 십상이었기 때문에 이것도 무리였다. 바얀은 물론 자신이 대원제국의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새 대칸을 폐위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건 자신이 하야스 대칸을 모신 그 동안의 세월을 통째로 배신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그야말로 꿈도 꿀수 없었다. 다만 여기에서 바얀은 실마리를 풀 수 있다고 생각하고 새 대칸에게 독대를 청했다.
- 한편, 심왕은 다시 한번 명목상의 장인인 감마라칸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심왕이 감마라칸의 처소를 들어갈 수 없었다. 보다시리가 직접 심왕의 장자인 왕감을 죽였기 때문에 보다시리에 대한 심왕의 원한이 뼈에 사무치리라는 점을 감마라칸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의 거래는 위험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하루 종일 감마라칸의 저택 대문에서 심왕은 소식을 기다렸으나 그만 발걸음을 돌려야했다. 그때 어디선가 전갈을 받은 심왕은 황급히 어디론가 향했다.
- 마침내 대칸과 독대한 바얀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앞으로 대칸에게 절대적으로 충성을 바치고 딴 맘을 먹지 않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대칸!"
"바얀 장군, 새삼스럽게 이게 무슨 말이오?"
"제가 대칸을 지키고 있는 한 그 누구도 감히 대칸에게 위해를 가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그러니 대칸께서도 저를 믿어주셔야 합니다."
"난 도무지 장군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구료."
"심왕과도 잘 지내겠습니다. 우리 둘이 대칸을 보좌하면 이 푸른 하늘 아래 우리 제국은 무한할 것입니다."
- 그때 대칸은 귓속말로 전갈을 받더니 손짓을 했다.
"장군이 독대를 청했지만 부득이하게 한 분을 더 모셔야겠소."
바얀이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심왕이 있었다. 바얀의 표정은 순간 일그러졌다.
"자 짐이 즉위한 지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았소. 처음 시작하는 것이니 모든 것을 확실히 정리합시다."
- 심왕은 바얀을 무섭게 노려보더니 바얀이 그동안 저지른 모든 불법행위, 부정부패 등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바얀은 얼굴이 뻘개지더니 목소리가 격앙되기 시작했다.
"심왕은 무얼 근거로 그런 거짓말을 대칸 앞에서 늘어놓는 것이오? 하늘이 두렵지 않소?"
"정작 하늘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바얀 장군 당신 아니오? 나를 내쫒고 대칸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혼자 다 제국의 부귀영화를 독차지하려 하오? 그럴수는 없지."
- 심왕이 손짓을 하자 그동안 바얀의 악행에 증인이 될 만한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와 증언을 했다. 조정의 고위관직에 있는 이들도 있었기 때문에 바얀이 거짓조작이라고 우기기도 어려웠다. 바얀의 입술이 새파래지더니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바얀 당신만 나의 약점을 가지고 이용한 것이 아니오. 나 또한 그랬소. 다만 당신과 나의 차이점은 난 떄를 기다리며 결정적인 한 방을 먹일 때를 기다렸다는 것이지. 전 대칸께서는 그대를 전적으로 믿으셨기에 차마 그럴 수는 없었지만 이제는 제국의 앞날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것인 것이오."
그러자 바얀은 살기등등한 표정을 지으며 대칸에게 물었다.
"대칸, 대칸도 이 심왕의 음모에 이미 가담한 것이옵니까?"
"짐은 전혀 모르는 일이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점차 확실해지는군." 대칸은 싸늘하게 대답했다.
- 이어 바얀이 얼마전에 찾아갔던 군부에서 한 말까지 다 폭로되기에 이르렀다. 바얀은 어처구니가 없었던지 헛웃음을 지었다.
"천만번 양보해 이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칩시다. 그러나 이미 그대에 대한 악소문은 대도에 널리 퍼져있소. 그러니 이런 증좌들을 대칸께서도 쉽게 물리치지 못하시는 것이오. 그동안 그대가 한 언행을 되돌아보시오. 대칸과 온 백성들이 그대를 버리려고 하는 까닭이 그럼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이오. 다만 이전의 인연도 있고 하야스 대칸께서 하신 말씀도 있고 하니 그대를 지방으로 좌천시키는 선에서 마무리 지을 것이오. 여기 대칸과 내가 그렇게 보증하는 이상 그걸 어기는 일은 없다는 것 쯤은 그대도 알고 있겠지?"
"만일 내가 그걸 거절한다면?"
"내일 공개적으로 대전에서 조정회의를 열어 공식적으로 그대를 추궁할 것이오. 지금 독대라서 이런 관용이 허용되는 것이지만 공식적인 회의에 들어가면 그대가 어떤 처분을 받을지는 장담할 수 없소. 그러니 지금 빨리 결단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 바얀은 갑자기 들이닥친 이 모든 것에 매우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숙여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 했다. 한참 그러더니 이윽고 그는 고개를 들어 심왕을 노려보며 한 마디 했다.
"그래도 나를 죽이지 않는다니...이걸 그대에게 내가 고마워해야 하는 것인가?"
- 다음 날 바얀은 갑작스러운 병환을 이유로 조정에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지방으로 은거하기를 청했다. 그리고 이미 모든 것을 입을 맞춰놓은대로 바얀은 허울뿐인 관직을 받으며 조용히 정계은퇴를 하게 되었다. 바얀은 자신의 지지세력에게 사태의 내막을 도저히 말하기에는 체면 문제도 있고 해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바얀의 갑작스러운 폭탄선언에 그의 지지파들은 우왕좌왕 어쩔 줄 몰라했다. 이렇게 해서 심왕은 다시 한번 최대 정적인 바얀을 숙청하며 제국의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로 떠오르게 된 것이었다.
- 바얀의 실각은 어쩌면 그를 극도로 싫어했던 새 대칸이 즉위함으로써 이미 예정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다만 당시 바얀의 힘 또한 강력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가 물러나더라도 손쉽게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심왕의 능력으로 바얀은 그야말로 어처구니없이 하루 아침에 정계에서 강제로 은퇴하게 되었는데,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었고 또 그러했기 때문에 개망신을 당한 바얀은 그 자초지종을 함구한채 자신을 따르는 세력한테도 일체 말하지 않았다. 바얀이 사라진 조정에서 심왕은 그러므로 완전히 대원제국을 통제할 수 있었고, 이에 바얀을 따르던 무리들은 심왕에게 붙거나 조정에서 쫒겨나는 처지로 굴러떨어졌던 것이다.
- 바얀이 좌천되고 그의 세력이 조정에서 흐지부지되자 이제 심왕의 대세력을 막을 자는 대원제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새 대칸은 속으로는 이를 매우 두려워했으나 친형인 하야스 대칸의 유지도 있고 또한 곁에서 오랫동안 심왕과 그 역시 생사고락을 같이 했기 때문에 심왕의 됨됨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심왕에게 지나친 권력집중은 못마땅했으나 현실적으로 별다른 도리도 없었고 어쨌든 자신이 심왕의 전정을 가로막지 않는 이상 심왕도 자신에게 위해할 인물은 아니라는 점만은 확신했다. 그래서 당분간은 심왕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 심왕 입장에서는 드디어 대원제국의 권력을 손아귀에 완전히 쥐었으나 변수는 아직도 남아있었다. 먼저 자신의 딸이 심왕의 장남을 죽인 것 때문에 거의 두문불출하며 더구나 이제 심왕이 유일무이한 제국의 권력자로 우뚝 서자 더더욱 자중하던 감마라칸이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런 힘도 없는 늙은이에 불과했으나 기실 맘만 먹으면 그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했다. 또한 이제는 모든 힘을 잃고 허수아비가 되었으나 한때 바얀편이었던 다란칸, 그리고 바얀을 은근히 지지하던 메르키트 부족과 옹기라트 부족, 군벌세력들이 여전히 건재했다. 이들은 아직도 심왕의 잠재적 정적으로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최고권력을 쥐었으나 심왕은 아직도 신중히 제국의 정사에 임했다.
- 먼저 심왕은 하야스 대칸이 이전에 약조한대로 자신이 심왕으로 있던 만주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더더욱 확고히 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당시 만주 일대는 몽골이 점령한 이래 자신이 정복한 금나라의 발상지여서 존재하던 금나라 군벌들을 모두 쫒아내고 몽골 황족들의 군벌로 할거하고 있었다. 비록 이들이 이전부터 심왕에게 복속을 맹세했으나 심왕은 보다 확고한 지배력을 원했다. 그래서 대칸에게 이전 하야스 대칸의 약조를 언급하며 장기적으로 만주 일대를 다른 킵차크 칸국과 같은 규모로 자신의 봉지로 만들려고 했다. 이미 이에 대해서도 하야스한테 말을 들었기 때문에 대칸은 내심 그리 내키지 않았으나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 이리하여 심왕은 자신의 칭호에 맞게 만주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확대시켜 나간다. 이는 곧 당시 그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몽골 군벌들의 권력 약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심왕 자신이 쿠빌라이 대칸의 외손자였으므로 황족 중에서도 최고 권위를 가졌고, 고려왕까지 겸하는 막강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별다른 불평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용의주도한 심왕은 이들의 권력을 축소하는 대신 상응하는 막대한 재물을 내림으로써 이들의 불만을 최소화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 이렇게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하는데 심왕은 2년여의 세월을 보냈다. 이제 어느 정도 제국경영의 자신감이 생긴 심왕은 자신의 마지막 난제였던 고려문제를 마무리지으려 했다. 이제 원나라 조정은 자신의 세력들로 꽉 차 있어 장기간 대도를 비우더라도 변고가 있을리가 없었다. 심왕은 이에 대비해 이미 이중삼중의 대비책을 마련해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명색이 심왕임과 동시에 고려왕의 지위에 있었는데도 계속 고려에 있지 않음은 앞으로도 지속적인 골치거리로 작용할 여지가 농후했다. 이미 왕감의 죽음으로 인해 큰 상처와 충격을 받은 심왕은 이전과 달리 하루속히 고려문제를 매듭짓고 싶었던 것이다.
- 서기 1313년 정월에 심왕은 드디어 고려로 귀국하기로 결정하고 대도를 떠났다. 물론 영구귀국은 아니고 당분간 머물면서 자신의 공백문제의 해결책을 모색하려고 한 것이다. 대원제국, 아니 당시 세계 최고의 권력자의 위용답게 그의 행렬은 끝이 안 보일 정도로 장대했다. 그는 자신의 가족들을 모두 대동했는데 여기에는 뜻밖에도 보다시리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비록 심왕 자신에게는 이제 원수나 다름없었으나 고려로 귀국하는데 왕후를 대동안한다면 또다시 쓸데없는 논란의 중심에 설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원한을 누르고 데리고 갔던 것이다. 물론 자신의 잠재적 정적이었던 감마라칸에 대비한 인질의 성격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감마라칸의 처소에서 보다시리를 끄집어내는 것은 나름 함들긴 하였으나, 아무러한 감마라칸도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던 심왕의 위세에 끝까지 맞서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 심왕의 고려 귀국길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이 심왕을 수행했다. 그는 바로 강양공 '왕자'의 둘째아들 '왕고'였다. 왕자는 심왕 자신에게는 이복형이었다. 그러므로 왕고는 심왕에게 조카가 되는 것이었다. 왕자는 생전에 경왕에 이어 고려왕이 될 수 있었던 인물이었으나 심왕의 어머니인 제국대장공주의 위세에 밀려 심왕에게 고려왕 자리를 뺏긴 처지였고 이미 이때는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그래서 심왕은 내심 왕자에 대해 매우 미안한 마음을 가졌고 그 반대급부로 왕자의 세 아들 중 가장 명석하고 총명했던 왕고를 친자식처럼 키웠던 것이다. 심왕은 그에게 친히 '올제이투'라는 몽골식 이름까지 내릴 정도로 극진히 총애했는데 왕감이 죽고 난 다음 왕고에 대한 심왕의 총애는 한층 더해졌다. 특히나 왕고가 죽은 왕감을 빼어박은 듯하게 닮았던 점도 크게 작용했다. 심왕과 의비 야속진 입장에서는 마치 죽은 아들이 살아돌아온 것처럼 느꼈기 떄문에 왕고에 대한 총애는 날로 더해갔다.
- 왕고 또한 심왕 내외를 친부모처럼 대하며 극진히 모셨다. 당시 왕고에게는 어머니 정신부주 왕씨가 멀쩡히 생존해 있었으나 왕고는 오히려 의비 야속진을 더 따랐다. 야속진 또한 어려서부터 왕씨로부터 떨어져 대도에서 사실상 인질로 있었던 왕고를 불쌍히 여겨 친자식처럼 대했다. 그러나 왕감의 친아우였던 아라눌특실리의 생각은 달랐다. 이제 고려식 이름인 '왕만'으로 불린 그는 그렇지 않아도 형인 왕감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부친인 심왕이 왕고를 지나치게 총애하는 것에 내심 크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왕만과 왕고의 사이는 그리 좋지 못했다.
- 심왕의 행렬이 고려의 도읍 개경에 들어서자 순식간에 화젯거리가 되었다. 이미 개국때부터 무역 등을 통해 국제적 경험이 풍부했던 고려인들도 이번에 심왕 행렬에 대동한 수많은 진귀한 문물들과 이전에 보지 못한 벼라별 세상 사람들을 보려고 행렬이 지날때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실상의 금의환향인 심왕은 이번 기회에 세상 최고 권력자가 된 자신의 위상을 분명히 보여주려고 제국의 모든 기이한 문물들을 총동원했던 것이다.
- 왕궁에 도착한 심왕은 곧 섭정을 도맡아하던 제안공 왕숙을 만나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며 이번에 자신의 고려왕 문제를 확실히 해결하겠다고 하며 섭정의 지위를 거두었다. 어렸을 때 고려를 떠나 기억이 익숙치 않았던 왕만과 왕고 역시 이제 장성해 고려땅을 밟은 감회가 남달랐다.
- 이어 심왕은 별다른 휴식을 취할 틈도 없이 그간 자신이 대도에서 원격통치를 행해 부실하던 산적한 사안들을 처결하기에 바빴다. 대원제국의 정사를 돌보던 그에게 고려의 그것을 처리하는 것쯤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워낙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이기도 했던 심왕의 능력에 주변에 있던 고려의 조신들은 혀를 내둘렀다. 이전에도 심왕의 국정수행능력은 천재적이었지만 그간 제국의 정사를 도맡아하며 그의 실력이 더욱 일취월장했던 것이다.
- 그 누구보다 고려의 개혁에 열정을 불태웠으나 이제 역설적으로 그를 가장 지지하는 세력은 권문세족이 되었고 오히려 심왕은 고려의 개혁파들의 씨를 말려버렸다. 그때문에 고려심왕은 가능한 개혁을 계속 추진했으나 명백히 제한적이었고 개혁의 뜻을 마음속 깊이 품은 신하들 중 일부는 심왕에 대한 원한을 더욱 키워나갔다. 권문세족의 입장에서야 이는 자신들의 현상유지에 최적의 조건이었기 때문에 더구나 제국의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심왕에게 오히려 아부하기에 바빴다. 심왕 입장에서도 자신의 대망을 위해서 일단 고려는 안정을 위해 현상유지가 필요했다. 심왕은 권문세족들과 자주 회동하며 이들의 지지를 공고히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 어느 정도 고려에서의 일들을 마무리지은 심왕은 이제 마지막으로 자신과 고려왕 문제를 매듭지으려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왕궁에 틀여박혀 한 달 동안을 거의 혼자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윽고 고려심왕은 자신의 둘째 아들 왕만을 새로운 고려왕으로 정했으니 이가 바로 충숙왕이다. 자신이 어차피 고려에 계속 머무르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고려왕의 지위를 유지하며 또다시 고려를 비우면 이전 왕감 사태의 재판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제국에서의 자신의 위상에 치명타를 입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악순환을 반복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왕만이 은연중에 자신에 대한 불만이 큼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보완 차원에서 세자는 왕고로 정했다. 심왕은 자신 대신 누군가 고려왕이 되어야만 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결국은 자신의 유일한 아들인 왕만밖에 없음을 절감했던 것이다.
- 서기 1313년 3월 왕만이 약관 20세의 나이로 고려왕에 올랐지만 그는 세자로 왕고가 정해졌다는 사실을 듣고는 경악했다. 앞으로 자신의 소생이 당연히 고려왕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형인 왕감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잘 알았기 때문에 (충)숙왕은 입도 뻥긋 못하고 속으로 분을 삭일 수 밖에 없었다. 더더군다나 심왕은 이전과는 반대로 고려에 계속 머물면서 대도로부터 매일매일 정사를 보고받기로 결정하고 고려에서의 동향을 주시하기로 했다. 이는 곧 심왕이 사실상 고려왕으로 권력을 계속 누리면서 자신은 허수아비 왕으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왕감의 일때문에 부왕이 이런 짓을 한다고 짐작은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왕고를 세자로 삼았다는 사실에 숙왕은 심왕에게 형언할 수 없는 배신감을 느꼈다. 심왕과 숙왕 사이에 새로운 분란의 씨앗이 싹트는 순간이었다.
- 숙왕이 고려왕이 되어 드디어 심왕은 '고려왕'이라는 딱지를 떼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세계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심왕으로서는 이 일은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도 있었다. 다만 치밀한 그의 성격탓에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치룬 통과의례에 불과했던 것이다. 게다가 숙왕이 고려왕에 오른 다음에도 아버지인 심왕이 사실상의 고려왕으로 행세하고 자신은 그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심왕의 입장으로서는 이전 왕감의 일도 있고 해서 숙왕이 쓸데없는 말썽을 일으키지 않을까 감시 겸 훈육 차원에서 계속 고려에 머물렀던 것이다. 어차피 이제 자신이 제국의 사실상의 일인자였으므로 그가 고려에 있어도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 고려왕이 된 숙왕을 심왕은 2년여에 걸쳐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러나 숙왕은 심왕이 세자로 왕고를 삼은 일까지 더해 노골적으로 심왕에게 반감을 드러냈다. 그렇지 않아도 친형인 왕감이 심왕때문에 죽었다고 은근히 원망하고 있었는데 이는 불에다 기름을 부운 꼴이었다. 숙왕이 반감을 표시해봤자 심왕에게는 그저 하룻강아지에 불과한 아들이었다. 그러나 숙왕이 아비인 자신에게 대놓고 원망의 언행을 보내고 매일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보란듯이 하자 심왕은 또다른 고민에 빠졌다. 그래도 이전 세자였던 왕감은 비록 파국으로 끝났지만 어떻게 해서든 고려를 살려보고자 애를 썼는데 숙왕은 그저 왕노릇을 즐기기에만 바빴던 것이다. 어느 정도 숙왕의 성격을 알았기에 만약을 대비해 심왕은 왕고로 세자를 삼아두었던 것이다.
- 심왕은 점차 숙왕이 고려왕의 그릇이 못된다고 느꼈다. 나아가 그에게 아무리 자신이 품은 야망을 이어받아 실현시켜야 한다고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불가피하게 자신의 유일한 친아들이기 때문에 할수없이 상황에 떠밀려 고려왕에 앉혔지만 2년이 지나자 심왕은 자신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서기 1315년 숙왕에게 아들 왕정(훗날 충혜왕)이 태어나자 숙왕의 심왕에 대한 원망은 더욱 커져갔다. 심왕은 점차 자신이 고려에 머물러있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을 느꼈다. 어차피 오래있을 곳은 못되었으나 떠밀리듯이 고려를 떠나기는 싫은 그였다.
- 한편, 대도에서는 또다시 수상한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 심왕이 2년여동안 대도를 비우자 이제 심왕이 고려일을 매듭짓고 돌아오면 제국의 권력을 빼앗을 마지막 기회까지 날아갈 것이라 직감한 반대세력들이 최후의 발악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주동자는 역시 자신의 저택에 처박혀 때를 기다리던 감마라칸이었다. 그는 심왕이 제국의 무소불위 최고권력을 쥐고 흔들자 불평 정도가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반대파들의 러브콜을 받았다. 심왕이 대도를 비운 이때 정변을 일으켜 지금의 대칸을 몰아내고 심왕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심왕이 너무 독주를 하자 옹기라트 부족, 메르키트 부족, 다란칸, 심지어 대칸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군부의 일부 장군들까지 가세해 은밀히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 그들은 차제에 아예 심왕이 고려에 있을 때 그를 제거할 계략을 꾸몄다. 이전처럼 괜히 심왕이 살아있을 때 먼저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심왕에게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감마라칸은 보다시리에게 지령을 내려 기회를 봐서 심왕을 직접 암살하라고 지시했다. 심왕이 자신에 대한 원한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보다시리는 심왕이 의비 야속진하고만 붙어있고 자신은 고려에만 데려와 남남처럼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심왕에 대한 접근 자체가 어려웠다. 아직도 보다시리는 심왕에 대한 감정이 복잡했다. 시집 온 이래 평생 자신을 푸대접한 그였지만 희대의 영웅인 그에게 끌리는 감정도 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 감마라칸은 비록 심왕의 명목상의 장인으로 복지부동하면 종신할때까지 부귀영화는 보장되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이런 무리수를 둔 것은 아무래도 심왕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보다시리가 왕감을 죽여 심왕은 엄청난 원한을 딸과 자신에게까지 가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고려일을 매듭짓고 대도로 돌아오면 가장 먼저 자신과 보다시리를 칠 것이라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먼저 선수를 쳐서 장차의 화근을 미리 잘라버리려 했던 것이다.
- 그러나 감마라칸은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이건 결국 그의 일생일대의 대실수였다. 심왕이 아무리 보다시리와 자신에 대한 원한이 크다하나 그는 일의 경중을 잘 아는 제국의 운영자였다. 보다시리는 자신의 정비로 그녀를 제거한다는 것은 고려에서의 위신은 물론이요, 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이라는 것을 심왕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현재 제국을 사실상 다스리는 처지에 있는데 자식을 죽인 원수라 해도 그는 극도의 자제력을 갖추고 있는 위인이었고, 왕감이 죽음으로써 어떤 면에서는 냉정한 말이지만 자신의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심왕이 아무리 막강한 힘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이런 냉철한 사리분별을 못할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감마라칸이 이런 치명적인 오판을 내린데는 아무래도 나이가 들며 생기는 지나친 의심과 조심스러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눈높이로 심왕을 저울질한 것이 결정적이었던 것이다.
- 어쨌든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보다시리가 심왕 제거에 대해 머뭇거리자, 감마라칸은 심왕을 대도로 유인해 처치하기로 했다. 감마라칸은 심왕에게 서신을 보내 보다시리와의 이혼 문제를 논의하자고 했다. 아무래도 심왕과 계속 혼인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여러모로 부담스럽기 때문에 이제 때가 왔다는 것이다. 심왕은 이제와서 보다시리와 부부의 연을 끊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반대했지만, 감마라칸은 사실상 부부가 아니니 이제 확실히 매듭을 짓자고 했다. 감마라칸의 의중은 어떻게 해서든 심왕을 자신의 왕궁으로 끌어들여 없애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 형식상이지만 보다시리를 자신의 왕후로 두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리할터인데 심왕은 감마라칸의 이러한 행동에 벌써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마라칸의 언행 뒤에는 뭔가 큰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대도에 깔려있는 자신의 눈과 귀를 통해 복지부동하고 있던 자신의 정적들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정보를 알아냈다. 심왕은 재빨리 손을 쓰기 시작해 일단 숙왕을 고려왕으로 계속 두고보기로 하고 딴짓을 못하게 조치를 마련했다. 고려에서 그의 눈과 귀가 되줄 세력은 바로 권문세족이었다. 자신이 권문세족들의 기득권을 보장해주는 이상, 이들은 대원제국 최고의 실세인 자신의 개가 될 것임을 그 누구보다 심왕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서기 1315년. 심왕은 만 3년만에 고려를 떠나 다시 대도로 길을 떠났다. 고려의 세자였으나 심왕은 왕고를 데리고 다시 떠났다. 고려에 계속 놔두면 숙왕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숙왕은 고려를 맡게 할 지 장차 모르겠지만 자신의 더 큰 대망을 이룰 그릇으로는 이미 왕고를 점찍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심왕암살을 포기한 보다시리도 심왕 일행을 따라 다시 대도로 향했다.
- 이미 심왕은 대칸에게 서신을 보내 대도에서 새로운 반란모의를 고발하고, 일단 군사동원이 가장 중요하니 대칸의 피신을 명했다. 심왕이 대도로 향한다는 소식을 접한 반란군들은 황궁으로 달려가 대칸을 찾았지만 이미 대칸은 친위군들과 함께 종적을 감춘 뒤였다. 대신 반란군에 붙어 황궁을 침범한 군부 내 일부 장군들은 그 자리에서 심왕이 준비해둔 군사들에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 반란군을 지휘할 군부 수뇌들이 사실상 깡그리 사로잡힌 것도 모른채, 감마라칸에 집결한 반란군의 우두머래들은 심왕을 그곳으로 끌어들일 계책을 짜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사이 감마라칸의 저택을 포위한 것은 다름아닌 대칸의 친위군이었다. 황궁을 빠져나온 대칸은 역으로 심왕의 계책에 따라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둔 군사들을 이끌고 감마라칸의 처소를 겹겹이 둘러쌌던 것이다. 반란군을 통솔할 장군들이 부재한 이상, 모였던 반란군들은 대칸의 군사들을 보자 슬금슬금 뒷걸음치며 뿔뿔이 흩어지기에 바빴다.
- 심왕은 반란군들의 눈을 속이고자 자신의 일행은 천천히 대도로 향하게 하고 고려에 머무른 3년 동안 비밀리에 육성한 '심왕군'이라는 특수부대 3만에게 총동원령을 내려 자신이 말을 바꿔 타며 질풍같이 대도로 치달렸다. 이미 반란군에 동조한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감금되고, 이제 남은 것은 감마라칸의 저택에 역포위된 마지막 무리들 뿐이었다. 심왕이 개경에서 대도까지 도달하는데는 불과 3일밖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속도로 심왕은 어느덧 감마라칸의 저택 앞에서 대칸과 조우했다.
"심왕, 직접 얼굴을 본 게 얼마만이오. 이런 식으로 만난 것은 유감이지만..."
"대칸,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이제부터 여기 일은 제가 맡을 것이오니 황궁으로 돌아가시옵소서. 이제 마지막 악의 무리들을 깨끗이 청소해 천년만년 제국의 안녕을 이제 시작하겠나이다."
- 대칸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친위군들과 함께 환궁했다. 그 자리는 대신 심왕이 이끌고 온 고려인들로 구성된 '심왕군'이 대신했다. 감마라칸은 이미 모든 것을 깨달은 듯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동조한 반란의 수뇌부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채 어쩔줄을 몰라하며 안절부절했다. 그들 중에는 아예 자결을 하는 이들도 속출했다. 분명 사로잡히면 처형을 면치 못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 심왕은 하루 반나절을 그렇게 포위한 채 감마라칸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끝끝내 소식이 없자 군사들을 동원해 처소문을 부수고 들이닥쳤다. 처소 안을 지키고 있던 몇몇 잡병들을 가볍게 제압한 심왕군은 이윽고 감마라칸과 그 무리들을 포승줄에 묶에 심왕 앞에 대령했다.
"장인 이른, 할 말이 있으시옵니까?"
"...."
감마라칸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묵묵부답이었다.
"반란의 무리들을 남김없이 모두 옥에 가두어라. 이들의 처결은 대칸과 만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안됩니다!"
어디선가 찢어지는 듯한 여인의 목소리가 나더니 날아든 표창에 감마라칸을 붙잡고 있던 좌우 병사 두 명이 나뒹굴며 떨어져나갔다. 그러자 감마라칸이 눈을 번쩍 뜨며 탄식하듯 뇌까렸다.
"보다시리..."
심왕이 비밀리에 일행을 빠져나가 급히 말달리는 것을 포착한 보다시리가 재빨리 뒤쫒아왔던 것이다.
"전하, 전하는 하늘이 두렵지 않으시옵니까? 아버지와 아들을 그리 보내고 이제 장인까지 이렇게 죽이시려 하나요?"
"비키시오!"
"네...제가 왕감...당신의 아들 왕감을 죽였어요! 그 오랜 세월동안 그래서 이 순간을 기다리신 건가요?"
"반란을 먼저 일으킨건 저들이오. 내가 일부러 죽이려고 한 적은 없다 말이오."
"하지만 이를 기화로 결국 죽이실 것 아닙니까? 그걸 심왕 전하 역시 속으로 얼마나 통쾌하게 여기시는건가요?"
보다시리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고였다. 보다시리를 처음 만난 이후 처음 보는 눈물이라 아무러한 심왕도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보다시리...장인의 죄는 대역죄이지만 내 어떻게 하든 목숨만은 살려드리겠소. 그러나 나머지 무리들에게 관용은 없소!"
"심왕..."
감마라칸이 입을 떼었다.
"내가 이들 모두를 끌어들여 그대를 향해 칼을 겨눴소. 그런데 나만 살려두고 이들을 모두 죽인다면 내 무슨 면목으로 구차하게 살겠는가? 차라리 나 하나를 죽이고 나머지를 살려주시오. 그러면 이들은 모두 그대의 너그러움에 경의를 표하고 두번 다시 딴 마음을 품지 않을 것이니..."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자 보다시리의 눈에서는 다시 독기가 뿜어져나왔다.
"그 어느 누구도 내 아버지의 몸에 털끝 하나라도 접촉을 하면 모두 그 자리에서 송장이 될 것이다!"
보다시리의 무용담은 고려인들로 구성된 심왕군도 알 정도로 전설적이었다. 그래서 모두 멈칫하며 심왕의 눈치만을 보기 시작했다. 그 때...
"전하, 신첩도 왔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 목소리로 향했다. 의비 야속진이었다. 그녀 역시 보다시리가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뒤따라 달려왔던 것이다. 야속진을 보자 보다시리의 얼굴은 투지가 치솟아 올랐다.
"전하, 잘됐군요. 이것이 바로 신첩이 오랫동안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순간이옵니다. 내 저년의 목을 제손으로 베어 그동안 저의 피맺힌 원한을 이자리에서 풀겠습니다! 만약 제가 저년에게 진다면 심왕 전하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보다시리는 고개를 돌리며 감마라칸에게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도 엄연한 몽골의 푸른 늑대십니다. 제가 져서 먼저 이 세상을 떠난다면 구차한 모습을 더 이상 보이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해주세요!"
감마라칸은 그 말을 듣자 한동안 묘한 표정으로 딸을 쳐다봤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심왕은 걱정스러운 듯 야속진을 나무랐다.
"야속진...이 무슨 경거망동이오?"
"이제야 소첩의 오래된 피맺힌 한을 풀 수 있게 되었사옵니다. 이것은 하늘이 주신 기회이옵니다."
"나보고 부인들끼리의 결투를 승낙하라는 말이오?"
"보다시리와 저 그리고 하늘이...우리의 아들 왕감 모두가 원하는 일이옵니다..."
심왕은 한동안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심왕군도 숨죽이며 심왕의 입을 주시했다.
"아버지, 아들, 장인과 이런 악연을 맺고 또 그것도 모잘라 부인들끼리의 죽음의 결투를 허락해야 한다는 말인가...?"
심왕은 떠나가도록 울부짖으며 가슴을 쳤다. 모두가 숙연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다가 심왕은 피를 토하며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군사들이 그를 급히 부축해 나가자 보다시리는 야속진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천한 종년이 어떻게 해서 전하의 승은을 입었지만 오늘 기필코 그 천한 목숨을 끊어주마!"
야속진도 자신의 쌍검을 서서히 꺼내며 맞대응했다. "내 오늘에서야 아들의 원수를 갚겠구나..."
- 이윽고 보다시리와 야속진의 혈투가 시작되었다. 초반은 역시나 몽골 제일의 여전사인 보다시리의 우세였다. 그녀는 비장의 무기인 창을 바람개비처럼 휘날리며 야속진의 급소를 연거푸 노렸다. 시앗싸움의 원한이냐 자식의 원수갚기냐...여인들간의 사투는 남자들이 보기에도 서릿발이 날릴 정도로 처절하고 무서웠다. 야속진도 나름 무용이 뛰어난 여자였으나 누가 보기에도 보다시리의 적수는 되지 못하는 듯 했다. 그러자 보다시리는 비웃음을 날리며 자신있게 야속진의 정면을 향해 돌진했다.
"윽...!"
- 보다시리는 자신을 너무 과신했다. 야속진은 보다시리의 방심을 노리고 일격을 가한 것이었다. 발끝의 아킬레스건을 잘린 보다시리는 걸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피투성이가 된 야속진은 서서히 일어나서 보다시리의 창을 빼앗아 그녀를 향해 겨눴다.
"자식을 잃은 어미의 한을 너는 알겠느냐? 바로 이것이 그 힘이다!"
"아...안돼..."
- 보다시리는 악착같이 기어가며 다가오는 죽음을 처절하게 부정했다.
"그동안 네년의 창으로 무수한 사람들을 죽였지? 이제 네 창으로 네가 인과응보를 받아야 할 때가 왔다!"
"네년이 감히 날...!
야속진은 거침없이 보다시리의 창을 날려 보다시리 자신의 몸을 커다랗게 관통시켰다. 보다시리는 이전에 테무르 대칸과 황후, 그리고 왕감과 똑같은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그녀는 눈도 감지 못한 채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절명했다. 그 때 정신을 차린 심왕이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난 뒤였다.
(보다시리...부디 저 세상에서 나와 재회하면 서로 다투지 말고 웃으십시다...)
- 심왕은 벌써 싸늘하게 식어가는 보다시리의 시신을 쳐다보며 야속진을 부축했다. 이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심왕에게 저항했던 무리들은 모두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감마라칸, 다란칸, 옹기라트부와 메르키트부의 원로들, 군부의 일부 장군들까지 한치의 예외도 없었다. 그동안 관용으로 정적들을 대했던 심왕은 아주 상반된 태도로 자신을 적대하는 이들의 씨를 완전히 말려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제 심왕을 대적할 잠재적인 정적들조차 대원제국에서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견제가 없는 심왕의 절대권력...그것은 심왕의 가장 절정기로 치달음을 뜻하는 것임과 동시에 곧 다가올 새로운 도전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 심왕이 고려에서 돌아오면 더 이상 자기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 착각한 감마라칸의 중대한 실수는 역설적으로 심왕에게 최후로 남아있던 정적들을 깨끗이 청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와중에 사실 심왕에게 눈엣가시같던 존재였던 보다시리까지 죽고 나자 이제 심왕을 대적할 자는 대원제국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 대칸의 입장에서 심왕은 그야말로 태산같은 존재였다. 아버지인 하야스 대칸때 심왕은 하야스와 일종의 형제적 유대를 바탕으로 제국을 사실상 공동통치했으나 이제 심왕 앞에서 대칸은 그야말로 햇병아리같은 존재였다. 심지어 대칸은 심왕에게 제국의 대칸 아래의 최고 자리인 승상까지 제안했다. 이걸 받게 되면 심왕은 공식적으로 제국의 2인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심왕의 머리는 비상하게 돌아갔다. 모든 권력의 겉과 속을 다 차지하게 되면 새로운 정적들을 만든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또한 하야스와의 의리를 아직도 가슴에 아로새기고 있던 심왕은 그의 친아우인 현재의 대칸에게 지나친 위압감을 주기도 싫었다. 대칸 또한 심왕에 대한 지나친 권력집중이 항상 마음에 걸렸으나 하야스 대칸과 그를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유야무야 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심왕은 승상직을 거절했고, 대신 자기 사람을 그 자리에 앉히는 것은 잊지 않았다.
- 감마라칸의 반란이 진압된 얼마 후 심왕의 일생의 연인인 의비 야속진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 의원을 불러 알아본 결과 일전에 보다시리와의 결투때 입은 상처가 도져서 급속히 맹독이 몸에 퍼져나간다는 것이었다. 보다시리는 자신이 애용하던 창끝에 항상 무서운 맹독을 바르고 결투에 임했는데 이것이 상대방을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이는 역할을 했다. 다만 야속진과의 결투때는 제대로 그녀를 건드리지 못해 맹독의 일부만이 야속진의 몸에 스쳐 그런 효과를 못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서서히 맹독이 퍼질 때까지 야속진은 그런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이윽고 이상이 생겨도 부군인 심왕이 걱정할까봐 최대한 인내하며 나름 치료하다가 급기야 손쓰지 못할 지경까지 오고 만 것이었다.
- 이제 심왕은 하야스 대칸에 이어 생전 자신이 유일하게 의지했던 두 번째 사람을 잃기 직전에 놓였다. 백지같이 하얗게 된 야속진은 숨을 할딱이며 비통한 표정의 심왕을 그윽히 쳐다봤다.
"마마..."
그러자 심왕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나에게 한번도 '여보'라고 한 적이 없소. 이제 한번 불러봐주겠소?"
"마마께서는 저의 낭군이기도 하시지만 처음 뫼신 이래로 저의 주군이시며 제가 유일하게 온 세상에서 존경하는 분이시셨습니다. 또한 마마의 후사를 이은 영광을 주시기도 하시구요. 어찌 언강생심 동등한 호칭으로 마마를 대하겠습니까?"
"난 그대를 오직 정인으로 내 아내로만 생각했지 다른 생각을 해본적은 없소...그대는 나에게 베풀어주기만 했지. 당신은...당신은 나의 모든 것이었소."
"...마마 소첩도 마찬가지이옵니다. 마마께서는 저에게 이 세상 전부나 마찬가지이셨습니다. 제 성심껏 평생동안 진실되게 마마를 모셨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은 없사옵니다. 다만..."
"...감이 말이요?"
"...네 우리 아들 감이...이제 저 세상으로 가면 그 아이를 볼 수 있겠군요. 가서 이제 모든 오해를 풀고 잘 데리고 있겠습니다, 마마..."
"나도 때가 되면 따라갈 것이오...그럼 우리 가족 모두 저 세상에서 다시 한번 행복하게 살아봅시다..."
"마마..."
야속진의 눈에서는 눈물 한 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심왕은 필생의 연인이자 부인이었던 의비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소리내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마마...천하디 천한 소첩의 죽음에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마마는 아직도 이 세상에서 하실 일이 많으신 존귀한 분이 아니시옵니까? 마마같이 크나크신 분께서는 이런 작은 일에 지나치게 신경쓰시는 것은 아니됩니다. 소첩이 진실로 바라는 바도 아니구요...마마 부디 가슴속에 품으신 그 헤아릴 수 없는 큰 뜻을 꼭 펴시옵소서. 그리고...그리고..."
의비는 눈을 감기 직전 당부의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
"...우리 아들 만(숙왕)을 잘 부탁드려요..."
- 의비 야속진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이제 심왕 곁에는 진정으로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게 된 것이었다. 심왕의 슬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지만 의비가 유언처럼 남긴 말대로 곧 떨쳐 일어나 자신의 야망을 계속 추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건 야속진과 자기 자신에게로 향한 약속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감정만은 어찌할 수 없었던지 이미 백발이 되어버린 그의 얼굴은 또한 의비 죽음의 충격으로 급속히 노화되어 심왕은 실제 나이보다 훨씬 노안으로 변해버렸다.
- 의비가 죽자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의 친아들인 고려왕 왕만은 즉각 그녀의 유해를 고려로 보내줄것을 청했다. 여기에는 별다른 뜻이 있다고 보이지 않자 심왕은 순순히 승낙했다. 그리고 다시 몸을 추스리고 제국의 정사를 돌보기 시작했다.
- 심왕은 이제 '심왕'이라는 자신의 칭호도 왕고에게 물려줄 생각이었다. 야속진의 유언대로 왕만은 왕감처럼 죽여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뭔가 불안한 존재였다. 자신의 유일한 친아들임에도 이미 부자지간의 관계는 냉랭할대로 냉랭했다. 게다가 왕만은 고려왕으로서의 자격도 없는 무능한 인간이라고 심왕은 판단을 내린지 오래였다. 그래서 왕고를 고려의 세자로 내세웠지만 여전히 불씨는 남아있었다. 그래서 왕고에게 심왕 자리를 물려주어 장차 왕고가 고려와 만주 두 곳을 모두 경영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고자 했던 것이다. 비록 친아들은 아니었지만 심왕은 사실상 자신의 후계자로 왕고를 지명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즉, 혈연적으로는 친아들이 아니었지만 사실상의 친아들로 여겼던 것이다. 이에 대해 숙왕의 원한을 더욱 살 것임은 자명할 것이나 심왕 입장에서는 대국적 견지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심왕은 왕고에게 '심왕' 직책을 물려주며 말했다.
"올제이투, 내가 너에게 내 상징과도 같은 심왕 직책을 주는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숙부님...숙부님의 뜻을 하늘같이 받들어 이루시는데 작은 도움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난 대원제국의 핵심사안에만 집중하고자 한다. 지금 요동 동방에는 칭기스칸의 동생가문 3왕가가 분할해서 다스리고 있지만 형식상 나의 위세에 제압당해 복속상태에 있다. 내가 권좌에 있는 동안에는 네가 심왕으로 행세하는데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심왕 마마!"
"아니지 이제부터 심왕은 너 올제이투지..."
"그럼 숙부님은 이제 뭐라고 호칭해야 합니까?"
그러자 심왕은 껄껄 웃으며 호탕하게 대답했다.
"원래 고려왕때의 시호인 '선왕'으로 돌아가야겠지!"
- 올제이투, 즉 왕고는 새로운 심왕이 되어 부임지인 요양으로 떠났다. 당시 서만주 일대는 수많은 고려인들이 살고 있어서 사실상의 고려땅이나 마찬가지였다. 요양은 그곳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왕고는 거기에 머무르며 동만주, 북만주의 동방 3왕가를 견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어 고려에서 또다시 소식이 날아들었다. 숙왕이 의비의 시신을 성대하게 안장했으나 태후로 추존하지는 않았다는 전갈이었다. 이를 들은 선왕은 대노했다.
"지 친어머니인데 명색이 고려왕이라는 작자가 대놓고 패륜을 저지르는구나. 이 놈을 당장...!"
- 그러다가 선왕은 문득 야속진의 당부를 떠올렸다. 가까스로 분을 삭인 그는 몽골 황족인 영왕의 딸 역력진팔라공주를 숙왕에게 시집보내도록 명했다. 겉으로는 대원제국과 고려의 화합을 강조한다는 명분이었으나 사실상 숙왕을 더욱 목전에서 감시하기 위한 선왕의 조치였다. 항상 친형이던 왕감을 상기해 일종의 강박관념에 시달리던 숙왕은 감히 부왕의 명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원나라 공주와 혼인하니 이가 바로 복국장공주다. 그러나 이일로 금슬이 좋던 공원왕후 홍씨를 왕후 자리에서 억지로 내치게 되어 숙왕의 선왕에 대한 원한은 점점 심해져갔다.
- 선왕은 이제 본격적으로 제국의 내정을 개혁하려고 했다. 그는 오랫동안 '성리학' 또는 '주자학'이라는 유학의 새로운 종파에 주목하고 있었다. 너무 철학적인 면을 강조하는 면도 있어 내심 크게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제국의 효율적인 관료경영을 위해서는 당시 이만한 사상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미 고려에도 이 주자학이 안향을 통해 도입되었는데 이때도 선왕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대륙에는 아직 보편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개 사상에 불과했다. 그러나 선왕은 전격적으로 이를 제국적 이념으로 채택해 오랫동안 끊어졌던 과거제까지 부활시키는 쾌거를 거두었다. 결국 마치 콘스탄틴 대제로 인해 기독교가 세계적 종교가 되었듯이 선왕의 성리학 국교화로 이후 명나라때까지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조선의 국가이념으로 자리잡게 되는 데도 적지 않은 나비효과가 된 것이었다.
-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선왕은 자신의 왕궁에 '만권당'이라는 기관을 설립했다. 이는 겉으로는 학문교류의 장소였지만 사실상 선왕을 보좌하는 브레인들의 집결지였으며 사실상 세계의 중심이나 다름없었다. 원래 학문에 조예가 깊고 통달했던 선왕은 요수, 염복, 조맹부, 원명선 등 당대 최고의 명류들과 교류했고 이들도 선왕의 해박한 지식과 경륜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선왕은 고려에서 최고의 천재 유학자라 일컬어지던 이제현을 불러내어 이들과 교류하게 함으로써 고려말 성리학의 발전에도 지대한 이바지를 했다. 또한 선왕은 야속진의 죽음 이후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고 티베트 승려를 불러 계율을 받았고 여러 후궁들을 거느리며 바쁨과 동시에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이때가 가히 선왕 인생의 최고 황금기라 할 만 했다.
- 이러한 선왕의 위세로 인해 제국의 수도이던 대도에는 엄청난 수의 고려인들이 몰려들어 살게 되었다. 또한 당시 몽골 고위층에게는 고려 여인을 아내로 삼지 않으면 사람취급도 안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그밖에 고려문화가 제국을 휩쓸어 오늘날 말하는 '한류'의 원조가 되기도 했다. 이를 주지하듯이 '고려양'이라 한다. 그러나 이 몰려든 고려인들 가운데 엉뚱한 놈이 하나 끼어들어서 선왕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던 운명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될 줄은 그 누가 알았으랴...
- 몽골이 고려를 침략해 삼별초의 최후항쟁 이후 부마국이 된 다음, 고려에서 가장 큰 사회적인 문제로 떠오른 것이 바로 '공녀'였다. 고려의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습에 취해버린 몽골 지배층들이 어여쁜 고려의 여자들을 닥치는대로 조공으로 바치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이러한 악습은 훗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한동안 중국측에서 요구했는데, 이 모든 것의 유래가 바로 몽골의 대원제국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이를 막고자 어린 남자들과 빨리 결혼시켰는데 이로써 '조혼', 즉 어린 신랑과 나이든 신부간의 결혼이라는 새로운 풍습도 생겨났다.
- 그러나 경왕(충렬왕) 이후 비록 경왕 자신은 순수 고려인이었으나 먼저 변발을 하며 몽골인으로 자처한 이후 선왕부터 점차 몽골인의 피가 섞이기 시작해 이윽고 고려 조정대신들도 모두 변발을 한, 이것이 고려인지 몽골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려는 '작은 몽골'로 되어버렸다. 이런 분위기 하에서 고려의 수려한 처녀들이 대도로 향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훗날 이들 중 가장 성공한 이가 바로 그 유명한 '기황후'였던 것이다.
- 고려의 여인들이 대도로 가며 점차 몽골제국의 실체가 널리 고려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몽골과 싸울때는 그저 거란족이나 여진족같은 북방의 야만족 정도로 취급했던 고려인들은 여인들을 통해 대원제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이며 세계의 중심이라는 말을 듣고, 또한 고려인들도 거기로 진출하면 고려보다는 더욱 잘 살수 있다는 말을 듣고 하나둘 짐을 꾸리며 오늘날로 말하자면 '이민'을 가게 되었다. 권문세족 하에서 하루가 멀다한 착취에 신음하던 고려백성들은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든 고향땅을 떠났던 것이다.
- 그러나 대도까지 머나먼 길 도중 지금의 요하 근처 요양땅에서 이 일단의 고려인들은 하나의 '이민사회'를 이루게 되었는데 바로 '심양왕'이 이들을 통솔하도록 처음에는 설립된 관직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멈추지 않은 고려인들은 계속 대도로 발걸음을 옮겨 이윽고 선왕이 제국 최고의 통치자로 있던 10년 동안 기하급수적으로 그 숫자가 늘어났다. 고려왕이 이젠 제국 최고의 실세가 되었다는 소식에 고려인들은 대도 자체가 새로운 고려라는 인식을 가져 이윽고 대도 인구의 25%가 고려인으로 채워지기에 이르렀고, 몽골제국의 신분계급에서도 고려인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고 준몽골인같은 대우를 받게 되었다.
- 이렇게 몽골제국의 수도로 구름같이 몰려든 고려인들 중에는 '임백안'이라는 젊은이도 끼여있었다. 그는 고려에 있을 때 가족이 모두 권문세족들의 착취로 굶어죽고 그 자신도 거리에 버려져 굶어죽기 일보직전에 길을 지나가던 어느 승려가 불쌍히 여겨 그를 거두어 한동안 절에서 머물렀다. 절에서 자라며 속세를 잊으라는 승려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굳어지자 바깥 세상이 그리워졌고, 자신의 기구한 신세를 한탄하며 세상에 대한 원한을 키워갔다.
- 15세가 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임백안은 절을 탈출해 다시 고려의 도읍지 개경으로 들어왔다. 그는 이왕 속세로 나온 이상 반드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성공해 세상을 향해 복수를 하겠다는 악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당시 빈털털이 젊은이에게 개경은 절대로 기회의 땅이 아니었다. 개경 자체도 몽골에게 집중적으로 착취당하고 있어 사람들의 삶이 비참했던 것이다.
- 겨우겨우 이런저런 잡일을 하며 끼니를 때우던 임백안의 행색은 그야말로 초췌하기 그지 없었다. 이것은 그 자신이 원하던 목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내던 그는 거리에서 우연히 몽골로 끌려가던 아리따운 처녀들의 행렬을 보게 되었다. 궁금해하던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저 아름다운 처녀들이 왜 무리지어 끌려가는 겁니까?"
"하 아직도 세상 물정을 모르는 친구가 여기있구먼. 저건 공녀로 끌려가는 고려의 처녀들이라오."
"공녀요?" 임백안은 눈을 껌뻑거렸다. 말상대인 사람은 한심하다는 듯 임백안의 위아래를 쳐다보며 말했다.
"젊은 사람이 행색이 거지꼴인걸보니 하루하루 먹고사느라 고생깨나 해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르는구먼. 몽골 귀족층에게 바치는 여자라 이말이오."
"그래서 처녀들이 저렇게 울면서 가는거군요."
"지금이야 가족들과 헤어지니 슬프겠지. 하지만 대도로 가면 다들 떵떵거리며 살던데 뭘..."
"예? 떵떵거리며 살다니요?" 임백안의 귀가 순간 솔깃해졌다.
"아 고려 처녀들이 아름답다는 소문이 대원제국에 쫙 퍼져서 몽골인 귀족들이 너도나도 고려여인들만을 찾는다오. 그래서 여기 고려에서는 미녀들의 씨가 마를 지경이지. 이젠 고려의 최고 미녀들을 보려면 대도로 가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오. 다 거기에 가 있으니깐...더구나 현재 우리 선왕 전하께서 대도의 황제를 쥐락펴락하고 있으니 대원제국이 사실상 고려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판국이라오."
"그래서 여자들이 가서 팔자를 고치는거군요."
"일단 몽골인들이 닥치고 고려여인들을 찾으니 얼굴이 미색이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순식간에 최소한 첩이 되어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고려의 가족들까지 대도로 불러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인생역전이 되는 거지. 벌써 그걸 노리고 너도나도 고려를 떠나 대도로 가는 고려인들이 줄을 서고 있어요. 이러다간 고려에 권문세족들 빼고는 아무도 남는 사람이 없을껄? 푸하하..."
"여자들말고도 자진해서 대도로 가는 남자들도 많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대도는 지금 온 세상의 중심이라 벼라별 진귀한 물산들이며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오. 그래서 할 수 있는 일들도 많아. 특히나 선왕 전하께서 고려인들을 많이 뒤를 봐주고 계셔서 고려인들은 더욱 수월하지. 나도 고향이라 지금은 고려에 머물지만 사는게 힘들어지면 어떻게 할 지 몰라."
"감사합니다." 임백안은 순식간에 삶의 희망이 보이는 듯 했다. 그래서 그는 그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한동안 대도로 갈 노잣돈을 모았다. 그리고 길을 떠났다.
- 개경에서 대도까지는 먼 길이었다. 임백안은 노잣돈을 최대한 아끼기 위해 최소한 먹고 잠을 줄여가며 걷고 또 걸었다. 이윽고 도착한 대도는 듣던대로 가히 천하의 중심이었다. 모든게 고려는 상대가 안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곧 그에게 닥쳐왔다. 대도는 고려인들로 바글바글했으나 그만큼 일자리에 대한 경쟁도 치열했다. 세상물정에 어두웠던 임백안은 믿었던 고려인에게 사기를 당하고 가져왔던 얼마되지 않는 돈까지 다 날려 그만 노숙하는 처지가 되었다. 노숙하면서는 거리의 불량배들에게 구타당해 거의 반죽음을 당할뻔하기도 했고, 병까지 걸려 거의 죽을뻔한 위기도 넘겼다. 사실상의 거지였던 것이다.
- 이제는 죽느냐 사느냐 삶의 막바지에 몰린 임백안이었다. 그래서 그는 최후의 결심을 했다. 환관이 되기로 했던 것이다. 대도에 와서 가장 출세하는 방법은 역설적으로 남자이기를 포기하는 환관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그는 일찌기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무리 자신이 궁색하다해도 죽도록 하기 싫었다. 그러나 거리에서 허무하게 굶어죽기에는 그동안 살아온 자기 자신이 억울했다. 반드시 세상에 복수를 하리라 다짐했던 그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환관에 지원했다.
- 당시 고려출신 환관은 대도에 상당수 있었다. 선왕의 일종의 밀정으로서 궁궐에 박아놓는 측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고려출신 환관들은 영리하고 충성스러워 인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경쟁률이 엄청났으나 타고난 운이 있었는지 어찌해서 임백안은 대도 황궁의 환관이 될 수 있었다. 물론 밑에서부터 시작해야 했지만 그가 맡은 일은 바로 황태후 다기의 시중을 드는 일이었다. 물론 무수한 환관들 중 하나로 가장 허드렛일을 하는 직분이었다.
- 다기는 전술한대로 하야스 대칸과 현재 대칸의 친어머니였다. 웅기라트 부족 출신으로 아들들이 연달아 대칸이 되며 황궁의 가장 큰어른으로 행세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도 선왕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가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선왕이 현재 대칸에 이르러 하야스때보다도 더욱 큰 권한을 행세하자 어머니의 본능으로 이를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자신의 아들들이 선왕의 허수아비로 있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물론 아들들이 대칸이 되는데 선왕의 역할을 절대로 과소평가하지는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선왕은 신하였다고 생각했다.
- 선왕이 실권을 쥔 다음 별다른 문제없이 제국을 사실상 통치하자 다기는 나이가 들수록 점차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선왕이 대칸이 되는 것이 아닌가했다. 더구나 이미 현재 대칸은 다음을 이을 아들을 가지고 있었다. 즉, 다기 자신의 친손자였던 것이다. 이런 불만에도 불구하고 다기 황태후 자신은 겉으로는 선왕에게 호의적이며 온화하게 대했다. 그녀 역시 선왕의 위세에 찍소리도 못했던 것이다. 그저 선왕이 더 이상의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자신의 손자에게 무사히 대칸의 자리가 넘겨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언제까지 계속 자신의 아들과 손자들이 선왕의 꼭두각시로 지내야 하는지 답답한 마음 또한 금할 수 없었다. 더구나 선왕이 감마라칸의 반란으로 자신의 친족이던 옹기라트 원로들을 몰살시키자 더욱 더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 이런 복합적인 감정때문에 황태후는 점차 성격이 이상하게 변해갔다. 그래서 그녀는 새로 들어오는 고려출신 환관들을 못살게 구는 나쁜 습관이 생겨났다. 일종의 선왕에 대한 간접적인 화풀이였던 것이다. 사실 황태후에게 보내는 고려출신 환관들은 은연중에 선왕의 뜻을 받들고 황태후에 대한 일종의 감시자 역할을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임백안 역시 황태후의 별 희한한 투정을 다 받아주며 선왕을 만나기를 학수고대했다. 제국 최고의 권력자인 선왕에게 잘 보여 자신이 한번 제대로 남들 보라는듯이 출세하고 싶었던 것이다.
- 이윽고 때가 왔다. 일찌기 선배환관에게 잘 말을 해서 선왕이 황태후를 모시는 고려환관들을 비밀리에 따로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임백안에게는 실로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 왕궁에 들은 임백안 일행은 선왕을 만나 그간의 사안들을 보고했다. 임백안은 넌지시 선왕의 얼굴을 쳐다봤다. 얼굴은 노안이었지만 가히 제국의 통치자다운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자기 차례가 오자 임백안은 긴장된 목소리로 보고를 하며 끝에 선왕에 대한 엄청난 공치사를 해댔다. 서류를 보고 있던 선왕은 그러자 고개를 들며 임백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임백안은 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마음이 급했다.
- 한동안 임백안을 노려보던 선왕은 얼굴을 찌푸리며 모두 물러가라 명했다. 며칠 후, 임백안은 자신을 황궁에서 내쫒으라는 선왕의 엄명을 들었다. 이제 이런 몸으로 황궁에서 쫒겨나면 남은건 죽음뿐이었다. 다급해진 임백안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황태후에게 달려가 읍소했다.
"황태후 마마...살려주옵소서. 이제 여기서 쫒겨나면 천한 신은 꼼짝없이 굶어죽사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황태후는 갑자기 매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선왕이 너를 황궁에서 내쫒겠다고 했다고? 그것 참 재미있구나."
황태후는 한참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임백안에게 물었다.
"내가 너를 계속 내 곁에 있게 해주면 넌 나에게 뭘 해주겠느냐?"
"황태후 마마 곁에만 있게 해주시면 이제부터 저를 개처럼 취급해주셔도 좋습니다."
"흐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임백안에게는 그야말로 영겁의 시간이었다.
"너는 원래부터 개가 아니더냐? 다만 고려의 개였다는 것이 좀 다를 뿐이었지..."
그러자 임백안은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이미 고려를 떠나올때부터 고려와는 인연을 끓은 놈입니다. 몽골의 개가 되겠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이름부터 바꾸자꾸나. 그 고려식 이름인 임백안보다는 이제부터 너를 '토쿠스'라고 부르마. 그리고...선왕에게 너의 대한 일은 내가 잘 말해보마."
"황은이 망극하옵나이다. 황태후 마마!"
- 임백안, 아니 토쿠스는 거듭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황태후에게 무한한 감사의 절을 올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마음속에서는 선왕에 대한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원한이 불길처럼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 황태후 다기의 선처로 겨우겨우 황궁에 머물게 된 임백안은 그 이후 이름을 아예 황태후가 지어준대로 '토쿠스'라 자칭하며 완전히 몽골인으로 자처했다. 황태후는 대칸의 아들인 시디발라(후일 영종)를 품에 안기다시피 하고 직접 키웠는데 그 덕분에 시디발라는 토쿠스와도 매우 친해졌다. 토쿠스는 장차 대칸이 될 이 소년에게 기필코 잘보여 출세하겠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 황태후가 내심 선왕을 싫어했다는 것을 예민한 나이인 시디발라가 모를 리 없었다. 더구나 자신이 직접 황태후는 물론이고 아버지 대칸도 선왕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자신도 은근히 선왕에 대한 반감이 생겼다. 그런데 심왕 왕고 또한 황태후를 통해 시디발라 황태자에게 접근해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황태후는 왕고가 선왕의 최측근인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심 이를 경계하고 은근히 왕고를 황태자에게서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넉살좋은 왕고는 잘도 황태자 옆에 붙어 황태자의 환심을 사기에 노력했다.
- 토쿠스는 점점 황태후의 환심을 사더니 어느덧 황태후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 그러자 황태후에게 왕고를 조심하라고 말했다.
"올제이투 전하는 선왕이 가장 총애하는 사람입니다. 분명 황태자 마마에게 접근하는데는 뭔가가 있을테니 황태후께서는 반드시 그를 멀리하셔야 하옵니다."
- 그런데 황태후는 나름의 소식통을 통해 왕고가 심왕이 된 이후 심왕의 권한이 선왕 자신때보다 크게 축소되어 사실상의 허울뿐인 작위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최근 들어 선왕과 심왕 사이의 관계가 많이 소원해졌다는 말도 들렸다.
"그건 고육지책일수도 있습니다. 우리 사정을 염탐하기 위해 첩자를 보낸 것도 모자라 직접 올제이투 전하를 황태자께 접근시켜 장차를 대비하려는 것입니다."
"장차...를 대비한다니?" 황태후의 목소리는 떨렸다. 자신도 알고 있었지만 막상 듣게 될 그 두려운 말들 앞에서...
"이런 말을 미천한 소인이 꺼낸다는 것이 황망하오나..." 토쿠스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망설이다 이윽고 말했다.
"...어떻게해서든 황태후 마마께서 선왕에 반대한다는 증거를 잡아 아예 황태자 마마로 하여금 대칸을 못되게 하려는 수작일수도 있습니다. 황태자 마마께서 선왕 마마를 싫어한다는 걸 선왕이 모를리가 없으니깐 말이옵니다."
"음..."
- 토쿠스의 예상과는 달리 황태후는 놀라는 대신 긴 한숨을 내쉬며 뇌까렸다.
"그건 나도 이미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내 아들들은 그동안 선왕과 피를 나눈 형제처럼 가까운 사이였고 선왕도 이들에 대한 충성심은 의심할 바가 없었구나. 그러나 장차 대칸이 될 내 손주녀석은 선왕과는 거의 남남이고 게다가 그를 매우 싫어하니 선왕이 과연 순순히 손자를 대칸에 오르게 도와줄 지 정말 알 수가 없지. 그것이 내 유일한 근심거리다."
"대칸 폐하와는 상의해보셨습니까?"
"물론이지. 그러나 이미 현재 제국의 모든 실권은 선왕이 쥐고 있으니 대칸이라고 별다른 수가 있겠느냐? 게다가 대칸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선왕이 자신을 배반할 사람이 아니라는 정도는 알고 있어서 내 말을 경청하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는다. 허기사 대칸이 지금 뭘 어찌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대칸 이후에 내 손자가 대칸이 무사히 되기를 그저 빌 수 밖에..."
토쿠스의 눈매가 갑자기 매서워졌다.
"그러다가 선왕이 아예 대칸이 되어도 이리 계실것이옵니까?"
그러자 황태후가 벌떡 일어나 토쿠스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자신이 지나친 말을 했음을 직감한 토쿠스는 넙죽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미천한 이 개 토쿠스가 감히 주제넘는 말을 황태후 마마께 감히 뇌까렸나이다. 죽여주시옵소서."
"고려 환관 놈이...감히 건방지게...!"
그러다가 황태후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어조가 차분해졌다.
"실은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네 배짱이 참으로 두둑하구나. 감히 환관놈이 황태후 앞에서 그런 말들을 다 하고..."
황태후는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허기사 그래서 내가 너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 내 옆에 두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하오면..." 토쿠스는 다시 고개를 들며 말을 이어갔다.
"마마께서는 이렇게 계시면 아니되옵니다. 뭔가 대책을 세우셔야 하옵니다..."
"안다. 나도 요새 그 일로 생각중이니 때가 되면 너에게도 좀 여러가지 물어보마."
"황공하옵니다."
- 1319년 9월, 선왕이 숙왕을 감시하라고 고려로 보낸 복국장공주가 갑자기 급사했다. 일찌기 선왕 자신의 어머니가 연상되어 선왕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상 자신의 정적인 된 숙왕을 칠 좋은 기회였으나 선왕은 아버지 경왕과의 가슴아픈 과거사가 생각나 도저히 가혹하게 처결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숙왕의 어머니 의비 야속진의 유언 때문에 더더욱 그럴 수는 없었다.
- 사람을 고려로 보내 조사한 결과, 숙왕이 공주를 평소해 학대하고 구타해 그 여파로 죽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자 대도의 조야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물론 조정은 선왕의 심복들로 가득차 있었으나 잠잠했던 황족들이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벌써 고려에서 이전 경왕에 이어 두 번째로 황실 공주가 의문사를 당했으니 분위기는 격앙되기 시작했다.
"도대체 고려에서 우리 대원제국을 뭘로 보기에 황실 공주가 계속 이렇게 죽는거지?"
"이전에 경왕때야 우리가 직접 나서서 해결했지만 지금은 제국 자체가 저 반 고려인한테 넘어갔으니 어디 하소연할때도 없네 그려...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이 옳은 일인가?"
- 황족들을 중심으로 이런 소리들이 나돌자 선왕은 다시 크나큰 위기가 옴을 직감했다. 이 아들놈이 또다시 나를 궁지로 몰아넣는다는 생각도 했다. 아니 어쩌면 숙왕이 이걸 노리고 일부러 일을 크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자신이야 어떻게 되든 이미 나를 원수로 보고 있다면 자신을 불살라서라도 그 복수를 하려고 말이다...
- 이러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감히 고려를 응징하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 이유는 선왕때문이었다. 그러나 비록 말은 못하지만 선왕에게로 향하는 시선들은 그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라는 암묵적인 명령이기도 했다. 숙왕에 대한 선왕의 감정은 복잡했기 때문에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선왕은 결국 숙왕은 가만히 내버려둔채 그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물어 대도로 압송해 처형하는 선에서 이번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 차마 숙왕을 숙청하지 못한 선왕으로 인해 대도의 여론은 급격히 악화되어갔다. 결국 선왕은 몽골인이 아닌 고려인이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즐비했다. 숙왕 입장에서도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갔지만 대도의 여론이 더욱 나빠지면 결국 선왕은 자신을 폐위하고 왕고에게 고려왕 자리를 넘길 것이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실제로 이때만해도 선왕은 계속 왕고를 고려의 세자로 삼아놓은 상태였다.
- 이미 자신의 아들을 가지고 있던 숙왕은 결코 이대로 주저앉아 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앉아서 당하기보다는 아직도 고려왕인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선왕을 권좌에서 내쫒고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고려왕의 자리를 이어가게 하고 싶었다. 이전에 경왕이 선왕에게 느꼈던 것과는 반대로, 이제는 숙왕이 선왕을 아버지라기보다는 자신의 고려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정적으로만 간주하게 된 것이었다.
- 뜻하지 않게 제국의 여론이 선왕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황태후 다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는 선왕에 대한 불만세력들을 하나로 모아 선왕을 내쫒고 자신의 손주에게 안정되게 대칸 자리를 물려주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는 토쿠스를 고려로 비밀리에 보내 숙왕의 의향을 타진했다. 이미 사람의 속내를 꿰뚫는데 일가견이 있던 토쿠스는 숙왕이 진심으로 아버지 선왕을 미워하며 죽이지는 않더라도 반드시 대도의 권좌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이는 황태후 다기의 이해관계와 일치했다. 황태후나 숙왕이나 자신의 후계에게 제왕의 자리를 안정되게 물려주는데 있어서 선왕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 공통적이었기 때문이다.
-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양쪽은 정보교환 등을 통해 선왕을 무너뜨릴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 숙왕은 이 과정에서 자신이 알아낼 수 있는 선왕의 모든 약점들을 낱낱이 황태후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황태후는 이것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선왕에 대한 여론몰이를 하더라도 결국 그를 몰아내는 것은 무력이었다. 선왕은 대도에 고려인들로만 구성된 심왕군 3만을 친위대처럼 주둔시키고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었다. 또한 군부의 장군들도 거의 모두 그를 신봉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황태후는 대도 밖에 다른 세력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황태후는 결국 동방 3왕가를 주시했다.
- '동방 3왕가'는 칭기스칸의 동생들의 후예인 보르지긴 분파들로 만주 일대의 땅을 분봉받은 막강한 군벌세력들이었다. 옷치긴-카치온-카사르 왕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한때 그 세력이 너무 막강해 쿠빌라이칸이 고려를 후대한 것도, 또한 애당초 심(양)왕의 봉작이 생긴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제국의 황실에서 이들을 견제하기 위함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선왕이 능수능란하게 이들을 제어하고 이들 간에도 서로 견제하고 힘을 합치지 못하게 해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결코 선왕의 정적이 아니었다.
- 그런데도 황태후는 이들에게 섣불리 밀정을 보내 자신을 도와달라고 할 참이었다. 그러자 토쿠스가 급하게 이를 막았다.
"마마, 저들은 현재 선왕에게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무리하게 속내를 보이시면 큰일납니다."
"하지만 선왕을 몰아내려면 반드시 저들의 힘이 필요하다. 누굴 보내 은밀히 이 일을 진행시킬 수 있겠느냐?"
"제가 알아보니 딱 적임자가 한 사람 있습니다."
황태후의 눈이 커졌다.
"과연 그게 누구더냐?"
토쿠스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
"바얀 장군이옵니다."
그러자 황태후는 무릎을 탁 쳤다.
"그렇지! 바얀...바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꼬? 토쿠스, 네가 이 제국의 은인이구나!"
"황공하옵나이다, 마마."
- 토쿠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선왕을 쳐부술 동맹의 큰 그림을 바로 그가 발로 뛰며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황태후에게 고개를 숙인 그의 눈에서는 어느덧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 메르키트 바얀...한때 선왕과 대원제국의 실권을 두고 자웅을 겨루던 자였다. 그러나 선왕의 권모술수에 그만 무릎을 꿇고 어거지로 정계를 은퇴해 강남행대어사중승으로 좌천되어 굴욕적인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대도 황궁에 남아있던 그의 추종자들은 와해되었고 선왕쪽으로 붙은 이들은 바얀의 약점을 낱낱이 고해 바얀은 대도로 복귀하고 싶어도 선왕이 언제든지 자신을 다시 정치적으로 매장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이를 갈며 사냥 등으로 울분을 달래고 있었다. 허울뿐인 관직인 강남행대어사중승도 이윽고 집어던지고 완전 야인으로 소수의 부하들만을 데리고 정처없이 대원제국을 떠돌아다니는 것이 어느덧 그의 일상이 되고 말았다.
- 바람처럼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도 몽골 관리들이나 장군들의 대접을 받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가 어딜 가든지 선왕의 눈과 귀가 그대로 따라다니고 있었다. 선왕은 비록 바얀을 몰락시켰지만 여차하면 그가 자신을 향한 반대세력들의 비수로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관리들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바얀은 어딜가든지 푸대접을 받았고 특히나 중국계 관료들로부터는 입에 담지 못할 모욕을 받기도 했다. 이에 중국인에 대한 깊은 원한을 가지게 된 바얀은 훗날 중국인 몰살이라는 과격한 정책을 제안하게 되기도 한다.
- 어쨌든 이것은 먼 훗날 일이고 선왕이 제국의 실세로 군림하는 현재에 있어서 바얀은 한낮 권력을 잃은 비참한 패배자에 불과했다. 선왕이 진짜 독하게 마음만 먹는다면 바얀 쯤은 쥐도새도 모르게 없앨수 있었다. 그러나 한때 권력을 잃은 선왕을 바얀이 어찌하지 못했듯이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선왕 역시 은연중에 제국의 부족들과 장군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고 있던 바얀이라는 거물을 함부로 죽이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고려의 아들 숙왕이 노골적으로 자신에게 반감을 드러내는 이 시점에서 그런 자충수를 둘 수는 더더욱 없었던 것이었다.
- 세월이 지나자 바얀의 얼굴에서는 점차 분노의 표정이 사라져갔다. 그러나 그만큼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선왕에 대한 헤아릴 수 없는 원한이 더욱 굳건히 자리잡혀 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선왕에 대한 복수심뿐만이 아니라 그토록 어이없이 당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감과 반성의 의미도 있었다. 더구나 대도에서 감마라칸의 반란이 무참하게 진압되고 몽골의 여러 부족들의 원로들이 살육당하자 바얀은 더더욱 몸을 낮춰야했다. 실제로 자신이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괜한 의심을 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좋아하던 사냥도 멈추고 거의 두문불출하며 방문객들도 일절 거절한 채 세월을 낚고 있었다.
- 또다시 세월이 흘러가자 이번에는 선왕의 아들 고려왕 숙왕의 일로 몽골 황족들의 여론이 선왕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소식이 바얀의 귀에도 들려왔다. 사실 또다시 몽골의 공주가 고려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선왕에게도 난감한 일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숙왕에게도 치명타였음은 자명했다. 그래서 숙왕은 궁지에 몰린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나고자 황태후 다기의 세력과 손을 잡았고 나아가 동방 3왕가와도 제휴하려는 과정에서 바얀에게도 은밀한 연락을 취해왔다.
- 그러나 선왕의 눈과 귀가 이를 놓칠리 없었다. 일단 황태후와 숙왕의 세력이 바얀과 연락을 취하는 것을 놔두고 좀 더 확실한 근거를 잡아 한꺼번에 일망타진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윽고 움직임이 포착되고 곧바로 선왕에게 보고되었다. 선왕은 이제 바얀은 살려두기에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자객들을 보내 처치하려고 했다. 바얀의 무공이 너무 뛰어나 당대의 고수들만 엄선해 보냈는데 실제로 바얀이 이들과 상대하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다. 그러자 바얀은 황태후가 보낸 토쿠스의 수완으로 가까스로 사지를 벗어나 만주로 향했다.
- 바얀이 만주의 동방 3왕가로 간 이유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황태후의 명으로 반드시 이들을 포섭해 무력으로 선왕을 권좌에서 몰아내라는 밀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바얀이 선봉이 되어 그 군사력으로 대도를 치면 그동안 선왕의 위세에 눌려 불만을 억제하고 있던 메르키트와 옹기라트 부족 구성원들이 호응해 안팎으로 선왕을 친다는 것이 황태후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단 동방 3왕가를 찾아가면 자신의 위치가 선왕에게 노출되는 것은 각오해야 했다. 즉, 만일 바얀이 이들을 설득하는 것에 실패한다면 바얀은 만주에서 죽게 될 것임은 거의 명확했던 것이다.
- 바얀과 황태후의 우려대로 일단 동방 3왕가를 만난 바얀은 문전박대를 당했다. 당시 선왕은 동방 3왕가에 특별히 신경을 써서 잘 대우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이 굳이 당대 최고 권력자의 비위를 거스르며 바얀을 도울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바얀은 몽골 무사의 정신을 들먹이며 절반의 몽골인에게 계속 제국의 권력을 줄 수는 없다고 강력하게 이들을 설득했다. 또한 이는 곧 황태후의 뜻이며 다른 몽골 황족들의 뜻이라고 말해도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 며칠 뒤, 선왕은 황태후를 독대하게 되었다. 서로 뒤로는 무서운 정치적 비수를 감춘 채, 겉으로는 온화하게 대화를 시작했다.
"선왕께서 여기는 어인 일이시오?"
"황태후 마마..." 선왕은 황태후의 거처를 쭉 둘러보더니 말문을 열었다.
"왜 소신을 그리 믿지 못하시는 것이옵니까...?"
"대관절 선왕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건지 이 노인네는 도무지 알 수가 없구료..."
"믿지 못하셔서 계속 제 불민한 아들놈과 바얀등과 접촉하시는 것이 아니옵니까?"
"난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좋습니다. 계속 그렇게 모르는 척 하십시오. 그럼 신은 제가 할 말만 하겠습니다."
선왕은 삽시간에 표정을 바꾸며 저승사자같은 표정으로 황태후를 노려보았다. 황태후는 자신도 모르게 찔끔거렸다.
"일찌기 전 대칸이셨던 하야스 형님께서는 아드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너무 어려 제국의 정사를 감당못하기에 일단 보위를 친아우이신 현 대칸에게 넘기셨죠. 그것은 장차 하야스 형님의 아드님이 장성하시면 그때는 다시 보위를 넘겨주라는 어심이셨습니다. 현 대칸께서도 분명히 저한테 그렇게 말씀하셨고 황태후 마마께서도 당연히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자 황태후도 눈을 무겁게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그러했지요."
"신은 하야스 형님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입니다. 그야말로 형제보다도 더한 사이였고 황태후 마마도 제가 어머니처럼 모시고 따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그런데 저에게 왜 이리 의심을 품으십니까?"
어느덧 선왕의 목소리는 떨리기 시작했다.
"만약 현 대칸께서 푸른 하늘의 부름을 받아 올라가신다면 하야스 대칸의 유지대로 그의 아드님이 다음의 대칸이 되셔야 하는게 순리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신이 듣건대 태후마마께서는 현 대칸의 아드님이신 시디발라를 다음 대칸으로 미신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 사실이옵니까?"
황태후 다기는 그 말을 듣자 서서히 눈을 뜨며 말했다.
"소문이 아니라 그것이 내 생각이오."
"도대체 이러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선왕, 나도 이제 내 할말을 해보겠소...지금 조정의 대부분의 신료들이 다 누구의 사람이오?"
"물론 거의 다 저를 따르는 사람들이옵니다. 이는 대칸께서도 허락하신 일이옵고 덕분에 그동안 제국은 태평성세를 이어왔습니다. 제가 만약 역심을 품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었을 것이옵니다. 그러나 신은 그러지 않았사옵니다."
"선왕이 하신 말씀은 다 옳소. 그러나 하야스 대칸의 아들이자 내 첫 친손주 역시 그대를 무척이나 따르고있지. 그래서 안된다는 것이오."
"무슨...뜻이옵니까?"
"나 또한 선왕의 충심을 의심치 않고 있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다르지. 선왕 그대가 지난 10여년 동안 대원제국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소. 그런데 다음 대칸 역시 그대의 꼭두각시로 보인다면 장차 이 제국의 체면이 어디로 가겠소? 다행히 시디발라는 그럴 생각이 없으니 내가 시디발라를 미는 것이오."
"저는 쿠빌라이 대칸의 외손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대는 절반이 고려인이 아니오? 이 대원제국은 순수한 칭기스칸의 혈통만이 대칸의 지위와 권력을 동시에 누려야 하오. 그런데 그대가 지금 그 철칙을 짓밟고 있는게 아니오?"
- 여기까지 말을 듣자 선왕은 자신도 모르게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동안 자신이 대원제국을 위해 헌신해 온 그 오랜 세월에 대한 보상이 겨우 이런 말을 듣자고 한 것은 아니었다. 선왕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아가 그대가 고려로 돌아가지 않고 대도에서 권력을 계속 움켜잡고 있으니 사람들은 그대가 장차 대칸의 자리까지 노린다는 헛소문을 지어내고 있는 것이 아니오? 결국 선왕은 의심받게 되어있다 이 말이오. 그러니 이제 모든 욕심을 버리고 권력을 대칸에게 돌려주세요. 그것이 선왕 자신을 위해서도 좋은 것이 아니겠소? 고려로 돌아가는 것도 좋은 생각이고 말이오. 그대 아버지가 고려왕이었고 지금 아들도 그러하니 상왕으로 남은 여생을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것이 아니겠소?"
- 황태후 다기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거침없이 독설을 퍼부었다. 그 한마디 한마디가 선왕의 폐부를 파고들었다.
"지금 대칸의 건강도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고 있어요. 그러니 부디 선왕이 이 제국의 앞날을 위한 결단을 내려주기를 이 힘없는 늙은이는 바랄 뿐이오."
"좋습니다. 그 이야기는 거기까지 하기로 하고...실은 다른 일로 마마께 거래를 하러 왔습니다."
"무슨...거래라니...?"
"실은 바얀의 일이옵니다. 신에게 온 전갈에 의하면 지금 요동(만주)에서 이리로 압송되어 오고 있다 합니다."
"뭐라고요?"
이 말을 듣자 황태후는 순간 흠칫했다. 짐짓 내색을 보이지 않으려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 순간을 선왕은 놓치지 않았다.
"물론 태후마마께서는 이 일과 전혀 상관이 없으시겠죠. 그러나 바얀은 동방 3왕가를 만나 저에 대한 반란을 획책하였다 하옵니다. 이는 중죄이므로 마땅히 참형으로 다스려야 하옵니다. 허나..."
황태후는 선왕의 입을 주시했다.
"...신은 바얀을 살려줄 것입니다. 나아가 이 조정에 복귀하도록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태후마마의 말씀대로 저의 무리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어 여론이 나빠진다면 다른 몽골 부족들을 대표할 수 있는 이들을 출사하게 해 그러한 온갖 오해들을 불식시킬 것이옵니다."
"음...그래 선왕께서는 뭘 원하시는 것이오."
"고려의 제 아들놈에게 경고의 서신을 하나 써주시면 됩니다. 그 내용은 경거망동하지 말 것이며 또다시 불미스러운 일들을 터뜨린다면 폐위시키겠노라 말이옵니다. 제 말은 통 들어먹지 않아 태후마마의 권위만이 그 놈을 얌전하게 할 것이옵니다."
- 이리하여 선왕과 태후 다기는 전격적으로 합의를 도출했다. 얼마 후 대원제국의 황태후 밀서가 고려 숙왕에게 도착했다. 비밀리에 보낸 것이 아닌 공식적인 경고장이었다. 이로 인해 숙왕은 부왕을 몰락시키기 위한 책동을 한동안 멈추었고 그 반대급부로 바얀은 극적으로 대도로 끌려와 처형장 대신 조정으로 사면을 받아 복귀하게 되었다. 바얀을 조정에서 다시 만난 선왕은 인사를 나누며 치열한 눈싸움을 벌였다. 장차 사생결단을 해야 할 처지임을 둘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조정의 조회가 파한 후 바얀의 뒤를 토쿠스가 따라붙으며 남몰래 말을 건넸다.
"장군께서는 앞으로 할 일이 많으실 것이옵니다. 제가 태후마마와의 다리가 되어 드릴 것이오니 그리 아십시오."
바얀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썩소를 지었다.
- 바얀은 선왕과 황태후의 정치적 합의에 의해 대원제국의 조정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정에는 이미 장기간 공백상태였던 그의 빈자리의 결과가 너무나 선명했다. 비록 명목상 선왕이 몽골 부족과 황족들과의 화해의 제스쳐로 그를 복권시켰지만 조정의 대다수 신료들은 선왕의 충복이나 다름 없었고, 바얀과 일부 몽골 부족들을 조정회의에 참석시켰지만 명백히 허울에 불과했다. 일단 숫적으로도 선왕파에 상대가 안되었기 때문에 조정의 대소사는 선왕의 뜻대로 예전처럼 움직였다.
- 일단 바얀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괜히 조바심을 내어 무리수를 두었다간 다시 쫒겨날 운명이었고 이번에도 쫒겨나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점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대신 그는 비록 선왕파였지만 각각 개인적인 친분을 쌓는데 몰두했다. 선왕파 신료들은 바얀이 접근할 때마다 극도로 몸을 사렸지만, 바얀의 집요한 모습에 일단 인간적으로는 그를 동정하기에 이르렀다.
- 선왕은 대칸의 건강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점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두고도 고민했다. 일단 황태후는 시디발라를 밀었기 때문에 이대로 방관하다가는 자신의 권력을 순식간에 상실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연히 선왕은 하야스 대칸의 장남인 쿠살라를 다음 대칸으로 올리고 싶어했다. 사실 자질은 하야스의 차남인 투그테무르가 더 출중했지만 명분상 장남인 그를 밀수밖에 없었다. 선왕이 시디발라를 반대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권력유지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하야스 대칸의 유지를 계승하는 것이기도 하고 현실적으로도 자신이 권력을 잃으면 고려에도 자신을 원수처럼 대하는 숙왕이 있는 이상 갈데도 없는 그야말로 물러날 수 없는 승부였던 것이다.
- 극단적으로 치자면 황태후와 시디발라를 모두 제거하고 자신이 직접 쿠살라를 대칸으로 추대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러한 선왕이라도 이는 무리였다. 일단 황태후 다기는 하야스의 친어머니이기도 했고 자신도 한때 어머니처럼 따르던 여인이었다. 또한 시디발라도 의형제를 맺은 현 대칸의 아들이기도 했기 때문에 도리상 그러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설사 선왕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이를 수행하더라도 이를 빌미로 동방 3왕가와 숨죽이며 있던 모든 몽골 황족들과 부족들이 들고 일어날것임은 자명했다. 게다가 거기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선왕이 몰락하면 대원제국은 복수의 칼날을 고려로 향할 것이었다. 아무리 숙왕이 선왕을 반대했다해도 그 분풀이 대상을 모면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 그러므로 어떻게 하든 황태후와 시디발라를 설득하고자 했으나 소용이 없자 선왕은 은근히 협박을 가하기도 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권력을 총동원해서 말이다. 선왕은 집요하게 황태후 다기로 하여금 시디발라를 다음 대칸으로 올리는 것을 포기하도록 종용했다. 시디발라에게도 마찬가지로 여러 방면으로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황태후와 시디발라는 요지부동이었다. 여기에는 비밀리에 바얀과 토쿠스의 조언이 있었다.
- 선왕은 결국 병상에 누워있는 대칸과의 독대를 청했다. 대칸은 이미 선왕이 무슨 말을 할지 다 알고 있었으나 선왕의 요청을 거부할 힘이 있었을리가 없다. 선왕은 하야스 대칸이 일찌기 대칸에게 자리를 넘긴것도 장차 하야스 대칸의 아들들이 장성해 왕위를 잇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는 것을 상기하며 부디 그 약속을 이제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대칸은 일찌기 황태후 다기가 선왕에게 한 말을 되풀이했다. 이 때문에 선왕은 이미 대칸도 황태후와 입을 맞춰놓은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아...결국 혈육의 정 앞에서는 과거의 맹세도 헛된 것이었다는 말인가...?)
선왕은 깊게 탄식하며 허무하게 대칸의 침소를 나왔다. 그러고보니 고려의 숙왕도 선왕이 심왕 왕고를 다음 세자로 봉한 것을 두고 크게 반발해 지금 사이가 벌어진 사실을 문득 떠올렸다. 과거 경왕도 친자식이자 장남인 자신을 제거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다가 결국 선왕 자신이 강력히 이에 맞서 고려왕 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 역시 다시 기억했다. 이제는 자신이 가진 권력의 모든 것을 걸고 필사적으로 시디발라의 대칸 즉위를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1320년 3월 1일.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약 10년간 대원제국의 대칸으로 군림했던 대칸이 죽은 것이다. 새벽에 죽었는데 황태후 다기가 재빨리 토쿠스로 하여금 대칸의 유조를 언급하며 시디발라에게 빨리 대칸을 이으라는 황명을 내렸다. 황궁 사방에 깔려있던 선왕의 눈과 귀로 인해 선왕도 자신의 신료들을 이끌고 황궁으로 들어왔다. 새벽에 벌써 난리법석이 난 것이다.
- 대전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황태후 다기는 시디발라를 데리고 바얀 등 극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황궁 대전으로 들어왔다. 거기에는 이미 선왕과 그를 따르는 대다수의 신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황태후 마마, 신등과의 상의도 없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제위 계승을 선포하시는 것은 불가하옵니다."
선왕이 자신을 따르는 신료들을 대표해 일갈했다. 그러나 황태후 다기는 작심한 듯이 꿈쩍도 안했다.
"황태후인 내가 허락했고 대칸의 유조이기도 하며 대다수 몽골 황족들과 부족들의 대표가 지지한 상황에서 뭐가 안된다는 말이오?"
"애당초 하늘로 돌아가신 대칸께서는 하야스 대칸의 황자님들이 너무 어리셔서 그 임시방편으로 이분들이 장성하실때까지 보위를 잇도록 하신 것이옵니다. 이는 황태후 마마께서도 승인하신 일이 아니옵니까? 앞뒤가 맞는 처사가 아니옵니다."
"물론 순리적으로는 그렇소. 그러나 선왕, 내가 말했지 않소? 선왕 그대만 아니었으면 그대 말대로 그렇게 되었을 것이오. 그러나 그대가 10년 동안 그놈의 쿠빌라이의 외손자라는 혈통 하나만으로 이 대원제국을 좌지우지했기 때문에 더 이상은 안된다는 것이 양식있는 몽골 황족들과 부족 원로들의 공통된 의견이란 말이오. 선왕 그대때문에 내가 내 아들이기도 했던 하야스의 유지계승을 못하게 된것이라는 말이오, 아시겠소?"
"돌아가신 대칸은 저를 전폭적으로 믿으셨기 때문에 제국의 대사를 일임하신 것이옵고 신 또한 대칸께서 보여주신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충심으로 신명을 다했사옵니다. 저에게 주어진 권력을 제가 허투루 쓴 적이 있습니까? 감마라칸의 반란으로 죽은 몽골 부족 원로들의 죄는 죽어 마땅한 것이었사옵니다. 제가 대원제국의 정사를 돌본 지난 10년간 우리 대원제국은 최고의 번영을 구가했습니다. 이것이 신의 죄라는 말입니까?"
- 그러자 선왕파의 신료들은 옳소를 외치며 격하게 지지를 표했다. 여기에 힘을 얻은 선왕은 다시 한번 외쳤다.
"지금 황태후 마마께서는 대원제국의 미래보다는 단지 친손자의 제위계승이라는 사적인 욕망에 사로잡히시어 대사를 그르치고 계시옵니다. 이제라도 어지러워진 제국의 질서를 바로잡는데 협력해 주시옵소서!"
"선왕은 궤변을 집어치우시오!"
- 모두들 소리친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거기에는 바얀이 있었다. 그는 매우 격앙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사자후를 토해냈다.
"나 메르키트 바얀...몽골의 전사로서 나름 남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고 있소! 그러나 과거 선왕은 나의 그 작은 허물들을 들추어내며 나를 이 조정에서 쫒아내고 말았소. 그리고 지금 이 제국을 보시오. 대도에는 수많은 고려인들이 있어 이곳이 과연 대도인지 고려인지 분간을 못할 지경이 되었소. 최고의 번영? 흥! 과연 이것이 누구를 위한 번영이라는 말이오? 우리 대원제국은 위대하신 칭기스칸께서 푸른 늑대의 정기를 받아 세우신 세계에서 가장 신성하며 큰 제국이오. 그런데 그 중심에는 우리 몽골인들이 아닌 고려인들이 득실거리고 있소. 자 이것이 다 과연 누구때문에 벌어진 일이오? 근본을 바로 세우지 않고는 우리 대원제국은 결국 저 반쪽 몽골인이자 고려인의 밥이 될 것이오. 정신들 똑바로 차리라는 말이오!"
- 바얀은 오랜 기간동안 쌓였던 한을 토해내듯이 눈에 핏발이 선 채 좌우를 둘러보며 열변을 토했다. 그의 연설에 몸서리를 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선왕 또한 바얀의 호소를 듣자 잠시동안 말문이 막혔다. 이 중요한 순간을 황태후 다기는 결코 놓치지 않았다.
"바얀 대장군의 말씀이 백번 옳소! 선왕 그대가 얼마나 이 제국을 잘 다스렸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오. 우리 대원제국은 몽골인들의 제국이오. 그대가 그렇게 높은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제국의 근본을 뒤흔드는 것이라는 말이오. 선왕을 따르는 신료들 그대들도 몽골인들이 아니오? 지금 선왕의 전횡을 보면 하늘에 있는 하야스 대칸도 이해해주리라 믿소. 시디발라에게 보위를 잇게 하도록 하겠소!"
- 그러자 놀랍게도 조정 대전에서는 숫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찬물을 끼얹은 듯이 황태후의 결정에 반대하는 이들이 아무도 없었다. 바얀의 열변이 마치 이들에게 최면을 씌운 것 같기도 했다. 선왕도 뭔가 한대 맞은 듯이 얼떨결한 표정으로 대전을 뛰쳐나왔다. 잠시 자신을 추스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 결국 이리하여 시디발라가 다음 대칸에 올랐으니 이가 바로 '게겐칸'이라 불린 인물이다. 그러자 아직 청소년이었던 새 대칸은 노골적으로 선왕을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대전회의에서도 걸핏하면 선왕을 망신주기에 골몰했고 항상 선왕을 죽일듯이 노려보아서 선왕이 대전회의에 참석하는 것 자체를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이밖에 황태후와 바얀의 공작으로 선왕파였던 이들도 점차 동요하기 시작했다. 아직 선왕은 실권을 쥐고는 있었으나 대칸부터가 선왕을 적대시하자 권력구도가 서서히 바뀌게 되었고 선왕을 지지하던 이들도 하나 둘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선왕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대칸이 바뀐 것을 실감하게 된 것이었다. 역으로 대칸과 황태후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바얀의 권력은 차츰 강화되기 시작했다.
- 나아가 힘을 얻은 바얀은 다시 고려의 숙왕과 연계해 선왕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 화두는 바로 선왕의 고려귀환이었다.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선왕은 아버지의 고향인 고려로 돌아가 여생을 마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말이야 그럴듯하지만 과연 선왕이 고려로 돌아가면 그의 운명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이러는 사이에 선왕의 권력은 눈녹듯이 하나둘 점차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 선왕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심하는 동안, 한동안 연락이 없었던 심왕 왕고가 찾아왔다. 왕고는 찾아오자마자 선왕에게 폭탄선언을 했다.
"모든 걸 뒤엎으시고 선왕꼐서 대칸이 되십시오!"
왕고의 말에 선왕은 마시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리며 놀란 듯이 왕고를 쳐다봤다.
"올제이투, 그게 무슨 말인가?"
"이미 대원제국은 전하를 버렸사옵니다. 더 이상 무슨 미련이 남으신 것이옵니까? 더 권력을 잃으시기전에 여기 대원제국의 심장인 대도에 새로운 고려를 세우십시오. 과거 고구려를 뛰어넘는 대제국의 야망을 이루시라는 말이옵니다!"
- 대륙의 야망...그것은 오매불망 선왕의 아득한 꿈이자 그리움이었다. 그런 그의 야망을 알고 있던 왕고는 이제 그 뜻을 이루라고 종용하고 있던 것이었다. 쿠빌라이의 혈통을 이은 선왕 자신이야말로 몽골과 고려를 모두 아우를수 있는 자격 또한 갖추고 있었다. 하야스 대칸도 일찌기 이런 선왕의 야망을 눈치챘으나 때가 되면 뜻을 이루어보라고까지 하지 않았던가? 못할 것도 없었다.
(음...!)
- 선왕은 어느덧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자신의 마지막 정치적 도박인 거사의 그날이 밝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 몽골인제일주의를 앞세워 선왕과 하야스칸의 바램과는 달리 시디발라가 게겐칸으로 새로운 대칸이 되었다. 선왕을 평소에 적대시하던 시디발라가 대칸에 오르자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선왕을 따르던 몽골 황족들과 신료들도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선왕의 권력기반은 그를 전폭적으로 밀어주던 하야스칸과 의지하던 이전 칸에 바탕을 두고 있었는데 이제 그 반대가 되었으니 대칸의 미움을 받아 권력에서 쫒겨난 바얀처럼 이제 선왕이 그러한 똑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 왕고의 충동질을 받고 선왕은 거사에 대한 생각을 점차 가지게 되었다. 이제 새로운 대칸과 황태후 다기, 바얀 등이 똘똘 뭉쳐 자신의 세력기반을 하나하나 허물려고 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게다가 본국 고려에서는 자신의 아들이지만 이제 명백한 정적이 된 숙왕이 자신을 노릴 것임 또한 분명했다. 대도에서는 자꾸 자신보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려로 돌아가라 압박했고 고려로 돌아간다해도 숙왕이 대도와 결탁해 무슨 짓을 벌일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선왕은 실로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된 것이었다.
(아...권력이란 이렇게 허무한 것이었던가...?)
선왕은 심왕궁의 연못을 멀거니 쳐다보며 소일하는 시간이 점차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가 낚시꾼처럼 잔잔한 물소리나 들으며 두문불출하자 반대파들의 첩자들이 심왕궁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 대칸을 위시하여 황태후와 바얀 등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선왕이 만권당에서 두문불출하는 동안 선왕파 신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데 광분하기 시작했다. 이미 선왕에게 가망이 없음을 직감한 수많은 몽골 황족들과 부족들, 신료들 장군들이 점차 선왕을 버리기 시작했다. 선왕도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 선왕은 몽골과 고려를 잇는 가교로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태생부터가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심왕을 기반으로 더 큰 꿈과 야망을 이루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몽골제국은 자신을 고려인으로 취급했다. 결국 쿠빌라이의 외손자라는 혈통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이었다. 선왕은 그러자 눈을 번쩍 떴다.
(그들이 나를 고려인으로 버린다면 나 역시 그들을 버릴 수 밖에...! 이제 오래된 나의 대륙의 야망을 실현할 때가 온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애당초 나의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 선왕의 휘하에는 심왕군 3만이 건재했다. 이는 대도에 있는 선왕의 강력한 군사적 기반이었다. 또한 이들을 통래 대도에 있는 수많은 고려인들과의 인적 네트워크 또한 구축되어 있었다. 선왕이 이제 거사를 일으킨다면 당연히 대칸을 노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지 대칸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국호를 고려로 바꾸고 고려제국을 선포하며 쿠빌라이칸의 외손자로서 대원제국의 후계자임을 천명할 것이었다. 새로운 고려가 대도에 서게 되면 당연히 원래 고려의 숙왕은 폐하고 대륙고려를 세우게 되는 것이었다. 고조선과 고구려의 오랜 숙원인 대륙의 대제국을 결국 자신이 이루게 되리라 믿었다.
- 선왕의 이러한 거사계획은 결과적으로 몽골인들의 지지는 받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매우 신속하게 진행되어 순식간에 그들을 압도해야만 했다. 그 이후 몽골 황족들을 설득해 자신의 대의에 동참하게 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권좌에 오르기를 바랬다. 그때까지는 고려인들을 중심으로 거사를 진행해야만 했다. 선왕은 심왕궁을 드나드는 왕고와 함께 계획을 신중히 모의하기 시작했다.
- 전적으로 고려인들로 구성된 반란군들이기 때문에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선왕 입장에서는 이 방법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만큼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선왕의 입지는 급속도로 악화되어갔다. 자신의 대의 자체가 대원제국을 뒤엎는 것이기 때문에 몽골인들의 협조를 구하기도 요원했다. 다만 동방 3왕가 등의 막강군벌들이 신속히 동원되지 말기를 바랄 뿐이었다.
- 승산은 있었다. 일단 자신의 심왕군과 대도의 고려인들을 동원하면 대도를 장악하는 것이 가능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살육이 벌어지게 되어있는데 이는 어쩔 수 없었다. 대도를 장악하게 되면 선왕 자신이 대칸에 오르는 동시에 시디발라와 황태후를 인질로 삼아 다른 몽골세력들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포섭을 노리고 있었다. 이 부분은 선왕이 자신이 있었다.
- 드디어 모든 준비는 끝났다. 선왕은 심왕궁에서 칩거하는 척 했던 것도 상대방을 방심하게 하려던 고도의 노림수였던 것이다. 사실 연못만 바라보던 선왕은 자신과 똑같은 용모를 갖춘 가짜였다. 실제로 그는 변장해 심왕궁을 나와 그간 거사를 위한 여러 준비를 하기 바빴던 것이다. 거사준비는 끝났으나 일이 성사되는 것은 진실로 하늘에 달려있었다.
- 대도의 성문이 닫히고 고요에 빠질 무렵인 어느날 밤, 선왕은 드디어 군사를 일으켰다. 선왕군은 횃불도 들지 않은 채 살금살금 대도의 황궁을 향하여 전진했다. 특공대를 보내 내성의 성벽을 넘어 성문을 열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공략할 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황궁 성벽에 도달할 즈음, 갑자기 사방이 대낮같이 밝아지더니 엄청난 함성이 일어났다. 몽골군이었던 것이다.
- 선왕은 이미 각오했다는듯이 자신이 선두에 서서 군사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선왕군의 맹렬한 기세에 몽골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얀이 친히 지휘하는 몽골군은 용케도 버티고 있었다. 숫적으로는 선왕군이 압도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거기다가 바얀과 일찌기 친분이 있었던 제국 최고의 장군 중 하나인 젊은 엘테무르(드라마 '기황후'의 연철)의 활약이 지대해 선왕의 계획처럼 좀처럼 성벽문을 뚫을 수가 없었다.
- 선왕의 황성 진입이 지체되자 심왕군은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들 주위로는 점차 사방에서 대도에 도착한 몽골군이 속속 집결하고 있었다. 선왕의 우려대로 거기에는 동방 3왕가가 보낸 대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선왕은 일단 황궁으로 진입해 대칸을 사로잡으면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이미 물러날 곳이 없음을 직감한 고려인들로 구성된 선왕군 수만명은 커다란 함성을 지르며 결국 성문을 부수고 황궁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황궁을 샅샅이 뒤져도 대칸과 황태후는 이미 종적을 감춘 뒤였다.
- 선왕은 자신도 모르게 대칸의 황금옥좌를 향했다. 그곳은 바로 온 세계의 중심이자 최고의 자리였다. 선왕은 거기에 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어쨌든 최선은 다한 셈이었다.
- 이윽고 황궁 공략에 전력을 쏟던 선왕군의 후방이 금이 가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고려군은 점차 밀리며 하나둘씩 처참하게 쓰러져갔다. 결국 하늘은 선왕의 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 대도에서는 죽어가는 고려인들의 비명이 삽시간에 퍼지고 있었다. 깊은 잠에 빠졌던 대도의 백성들도 변란소리를 듣고 모두들 거리로 나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바얀은 눈에 보이는 고려인들을 닥치는대로 죽이고 있었다. 이때 하도 많은 고려인들이 죽어 고려인들이 다시 대도에서 자리잡기까지는 기황후때까지 약 20여년의 세월을 기약해야만 했다.
- 바얀이 이끄는 몽골군은 황궁을 역포위하며 선왕군에 대한 포위망을 점차 좁혀오고 있었다. 바얀을 따라 대칸과 황태후, 그리고 토쿠스 등도 황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황궁 대칸의 옥좌에서 그들을 노려보고 있는 선왕을 발견했다. 선왕 주위로는 그를 호위하는 마지막 10명의 무사만이 남아있었다. 바얀은 선왕을 보자 비웃듯이 조롱했다.
"그대가 그렇게도 아끼던 올제이투도 그대를 구하러 결국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구려."
선왕은 그 말을 듣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자 황태후 다기가 이어 말했다.
"선왕은 너무 상심마세요. 올제이투는 죽지 않고 우리 편에 가담해있으니깐요. 호호..."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렇게 옥좌에 앉아있던 선왕은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내 대륙의 야망의 끝이 바로 이거로군!"
그리고 가지고 있던 무기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러자 그를 옹위하던 무사들 역시 무기를 놓으며 엎드려 통곡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선왕의 영광은 그 종말을 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 선왕이 자신의 '대륙의 야망'의 화룡점정을 찍으려 했던 '대고려제국'의 꿈은 중과부적으로 그렇게 끝이 났다. 선왕이 시도했던 그것은 그러나 무모하다고만 탓할 수는 없었다. 당시 그의 입장으로서는 그렇게 할수밖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그의 권력과 고려인들의 호응으로 충분히 해볼만한 승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하늘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 당시 고려 본국에서의 선왕에 대한 평판이 어떠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대도에서만큼은 그는 고려인들의 영웅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헌신적으로 대도의 그 수많은 고려인들은 선왕의 대의에 호응하고 동참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스러져갔다. 선왕은 고려인들의 자신에 대한 그 충성심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결국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고려인이라는 것을 자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 일단 하옥된 선왕의 처리문제를 놓고 조정에서는 다시 한번 격론이 벌어졌다. 반역을 꾀했으니 당연히 처형시켜야 한다는 바얀측과 그래도 쿠빌라이칸의 외손자라는 점은 무시할 수 없으니 일단 살려두어야 한다는 다기 황후의 의견이 충돌했다. 바얀측은 다기 황태후가 옛 정을 잊지 못하는 것 아니냐며 비아냥거렸지만 황태후의 의견을 마냥 묵살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 당시 이미 다기 황후측에 찰싹 붙어있던 심왕 왕고 올제이투와 토쿠스 등은 선왕을 처형하면 고려 본국에서 어떻게 나올지도 예상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결국 선왕을 살려두는 쪽으로 여론이 기울어졌다.
- 하옥되어 여러가지 상념에 젖어있던 선왕에게 어느 날 토쿠스가 찾아왔다.
"선왕 전하."
선왕은 그가 맨 처음에 누구인지 몰랐다. 그러자 토쿠스는 간사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다기 황태후 마마를 모시고 있는 환관 토쿠스입니다."
"음...네 놈이 황태후의 모사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는 내 일찌기 들어 알고있다. 한번 만나고는 싶었는데...어쩐 일이더냐?"
선왕의 입장에서는 적대적으로 나올만도 했는데 놀랍게도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선왕을 찾아뵙고 그동안 제가 오랫동안 쌓아왔던 말을 하려고 이리 왔습니다."
"...무슨 뜻이지? 네놈이 나와 구면이더냐?"
선왕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토쿠스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하며 메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년전 제가 황태후 마마를 모시는 하급 내관으로 전하의 궁을 방문한 적이 있었지요. 그때 전하께서는 저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시고 결국 황태후 마마에게 아뢰어 저를 황궁에서 내치도록 명하셨습니다. 이제 기억이 나시는지요?"
선왕은 그 말을 듣자 기억을 되새기더니 문득 웃음을 지었다.
"이제야 기억나는군...그놈이 바로 너였더냐?"
토쿠스는 선왕이 입가에 비웃음을 띄자 더욱 분노했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따져물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그러자 한동안 침묵이 흐르더니 선왕이 입을 열었다.
"그때 내가 한 행동은 옳은 일이었다."
그러자 토쿠스는 손을 부르르 떨었다.
"당신의 그 생각없는 행동때문에 전 죽을뻔했습니다. 저도 당시 죄없는 고려 백성들의 하나로 선왕을 흠모해 덕담을 올린 것 뿐인데 당신은 왜 저를 내치셨습니까? 좋게 타일러 돌려보낼수도 있지 않았습니까? 결국 선왕 당신은 그런 사람이었던 겁니까?"
그러자 선왕은 토쿠스를 똑바로 노려보며 답했다.
"난 나름의 수양을 통해 사람을 보면 그 인성을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다. 네가 만약 평범한 상이었다면 그때 너의 아첨을 한번의 웃음으로 흘려보내고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너는 상이 매우 위험해 장차 다기 황태후 옆에 계속 놔둔다면 크게 해가 될 놈이라는 점을 난 꿰뚫어봤지. 그리고 결국 내 예상은 오늘날 보듯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구나."
"제가 타고난 상이 이런걸 어쩌라는 겁니까? 결국 제 관상때문에 절 죽이려 들려고 한다면 세상에 다 나쁜 관상을 가진 사람들은 다 죽어야한다는 겁니까? 그런 억지가 어디있소? 대답해보시오, 선왕!"
토쿠스는 오랫동안 쌓인 한이 복받쳐올라 선왕에게 고성을 지르며 절규했다. 그러자 선왕은 장탄식을 하며 말했다.
"...네가 얼마나 위험한 놈인지는 이제 모든 것이 백일하에 드러나지 않았더냐? 너의 그 얄팍한 술수로 나를 돕던 수많은 고려인들이 도륙당하고 죽었다. 너는 같은 고려인으로서 이 점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느냐? 어쨌든 그때 너를 확실히 쫒아냈어야 했는데 황태후의 부탁을 너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갔던 것이 지금에 와서보면 실로 천추의 한이로다...!"
토쿠스는 한동안 말없이 선왕을 무섭게 노려보다가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좋습니다. 제 개인적인 한풀이는 여기에서 그만하기로 하고...실은 전하에 대한 황명이 떨어졌습니다."
"모든 것이 운명이거늘..."
"티벳으로 귀양을 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선왕은 눈을 번쩍 뜨며 뇌까렸다.
"티벳...?"
"사람도 새도 가지 못하는 실로 이 세상의 끝이지요...흐흐. 거기서 전하의 야망을 마음껏 펼쳐보이시지요. 큭큭."
- 토쿠스는 크게 비웃으며 감옥을 떠났다. 티벳...한때 내 일생의 여인 야속진이 가고 싶어했던 그 곳...선왕은 또한 한때 티벳 불교에 심취해 언젠가 그곳에 한번 가보고는 싶었다. 비록 이런 귀양의 방식은 아니더라도...이것도 결국 운명의 장난이던가?
- 대도의 황궁에 다시 끌려나온 선왕은 초췌한 몰골로 대칸과 황후, 바얀의 앞에서 혹독한 모욕을 당하며 이윽고 티벳으로의 수만리 귀양길에 올랐다. 그는 대도의 거리를 돌며 백성들의 비난 또한 감수해야만 했다. 고려인들이 싸그리 없어졌기 때문에 거리에 나와있는 백성들은 그를 욕하고 비아냥거리에만 바쁜 무리들이었다.
- 대도에서 티벳까지는 머나먼 길이었다. 그러나 선왕은 여러가지 생각에 잠기느라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지나다가 들리는 길에 관리들의 냉대와 멸시 등도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한때 그래도 자신이 제국의 주인이었는데 인간사가 실로 허망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권력이라는 것 역시 신기루같다는 점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이런 말단 관리들까지 자신을 무시한다는 것은 자신이 권력을 잡고 있었을때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선왕의 눈 앞에 광활한 고원과 엄청나게 높고 눈으로 뒤덮인 설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눈 앞에 티벳이 펼쳐지자 뒤로는 과거의 모든 시간들과 공간들이 꿈처럼 멀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전혀 다른 세계에 온 듯이 말이다. 선왕은 점차 가빠져오는 숨을 내쉬며 그렇게 티벳에서의 귀양생활을 시작했다.
- 세상의 끝...티벳을 달리 표현할 방법은 없었다. 다기 황태후와 바얀 역시 그들이 선왕에게 최대의 고통을 줄 수 있는 곳으로 보내고자 해 선택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인적도 거의 없고 선왕은 어느 관사에 연금되어 사실상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온통 고즈넉했다. 선왕은 적막감에 사로잡혀 어느덧 명상에 잠기기 시작했다.
- 그렇게 1년이 지나자 비록 감시는 계속 했지만 선왕이 주변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이 허락되었다. 어차피 선왕이 탈출을 시도해도 거의 불가능한 곳이 티벳이었기 때문이다. 고산병에 걸려 처음 몇 달은 고생했지만 이제 제법 익숙해져갔다. 티벳의 라마불교승과도 만나 여러가지 담소를 나누며 더욱 티벳 불교에 심취해갔다. 그러나 유독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그동안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보냈던 대도가 아닌 고려였다. 왜 이럴까?
- 이런 곳에 오면 지난날이 자꾸만 떠오를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저 무의 세계로 자신의 의식이 점점 잠기는 것을 느꼈다. 티벳에 온 다음 더더욱 시간을 초월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른채 그렇게 하루하루 명상에 잠기며 선왕은 1년이 하루같이 느낄 정도로 신비한 체험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에서 일찌기 이런 영적 체험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자신의 의식에서 계속 깨어있던 단어...고려!
- 티벳에 온 지 2년이 지나자 선왕의 모습은 놀랍도록 편안해지고 흡사 도인과 같은 풍모를 하게 된다. 어쩌면 자신이 티벳에 온 것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만큼 티벳에서의 귀양생활은 선왕의 정적들 바램과는 반대로 선왕에게 매우 유익한 경험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속세에 있을 때 수많은 권력투쟁과 긴장의 연속 속에서 느끼지 못했던 영혼의 편안함과 안식을 비로소 이곳 티벳에서 가지게 된 것이었다. 범인들같으면 수년동안의 귀양생활로 인해 미쳐버렸을 환경에서 선왕은 특유의 강인한 의지로 그렇게 이겨내고 있었다.
- 티벳 귀양 3년째 접어들던 어느 날...선왕의 귀양지를 관할해 꽤 친해진 말단관리가 선왕을 다급히 찾았다. 선왕은 이때도 근처 티벳 사원에서 명상을 하고 승려와 담소를 나누고 있던 길이었다.
"전하...대도로 돌아오라는 대칸의 황명이 떨어졌습니다!"
- 귀양살이가 드디어 풀린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선왕의 표정은 복잡했다. 그러나 돌아가야 하는 것도 역시 그에게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점 역시 그의 얼굴에서 읽혔다.
- 선왕이 티벳으로 귀양가있는 동안 세상은 선왕 자신도 모른채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었다. 선왕이 숙청되자 바야흐로 대원제국의 조정은 황태후 다기와 바얀의 차지가 되었다. 대칸은 단지 황태후의 치맛자락에서 놀아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무능했고 제국의 정사는 황태후와 바얀이 서로 의논하며 처결했다.
- 그런데 희한하게도 선왕이 축출된 다음 제국에는 자연재해가 잇다르더니 백성들의 원성이 점차 높아갔다. 대칸은 그렇지 않아도 자신이 대칸이 된 정통성이 부족한 마당에 선왕이 사실상 통치하던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제국이 혼란에 빠지자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불교에 빠져들어 국고를 탕진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할머니인 황태후 다기가 살아있을 때는 어느 정도 무마가 되었지만 황태후가 서기 1322년에 죽자, 이제는 대칸을 위한 방패막이가 아무도 없게 된 것이었다.
- 대칸의 편에 서서 궁지에 몰리게 된 바얀과 왕고 등은 이에 서로 논의해 군사를 일으켜 게겐칸 시디발라를 죽여버리고 쿠빌라이 대칸의 장자 칭김의 적손인 예순테무르를 옹립해 새로운 대칸으로 삼았는데 이가 바로 '태정제'라 불린 인물이다. 바얀이 이때 하야스 대칸의 아들들을 대칸으로 올리지 않은 것은 너무 속보이는 짓이었기 때문에 세간의 비난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 자신이 떠받들었던 대칸을 직접 손에 피를 묻혀가며 죽여버린 바얀의 행동에 제국의 뜻있는 원로들은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고 바얀의 정치적 입지 또한 크게 위축되게 된다. 그에 반등해 바얀의 수하였던 엘테무르 장군이 급부상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 여담으로 황태후의 '충실한 개'였던 토쿠스 또한 바얀과 왕고의 손에 죽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한낱 도구에 불과했던 일개 고려출신 환관 하나 제거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황태후 일파를 쓸어버리는데 토쿠스 또한 자신들의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거대상 일순위였다. 분노에 찬 왕고의 칼에 죽기 전 토쿠스는 인상적인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
"사나이로 태어나 한평생 이렇게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하하하!"
- 왕고 올제이투 역시 심왕의 작위를 유지하며 다기 황태후에게 찰싹 붙었다가 바얀과 의기투합해 다시금 황태후가 죽자마자 대칸을 죽여버리는데 동참했기 때문에 그 역시 비난을 피할수는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선왕의 반란때 황태후쪽에 가담했기 때문에 황태후 다기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왕고는 상당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는데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힘의 대부분을 고려의 숙왕을 모함하는데 퍼부었다.
- 결국 1321년 대칸은 고려의 숙왕을 대도로 불러 약 3년간 억류하게 된다. 숙왕도 선왕을 쫒아내는데 나름 한 역할이 있었으나 대도에 머물며 황태후의 최측근으로 활동하던 왕고의 모함을 벗어나진 못했다. 대도로 끌려온 숙왕은 이전 복국장공주의 죽음과 국정문란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심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언제나 왕고가 있었다. 결국 아비인 선왕과 아들인 숙왕이 똑같이 3년 동안 타지에서 사실상 연금생활을 한 것이었다. 숙왕이 대도에 갇혀있는 동안 왕고는 자신이 사실상 고려왕이라며 마치 이전 선왕과 같은 흉내를 내기도 했다. 사실 심왕의 작위를 지니면서 대도에 머물렀기 때문에 비록 권력은 선왕에 비할바는 아니었지만 마치 선왕의 복사판같기도 했던 것이다.
- 왕고는 이미 이때 고려내에 자신에 동조하는 '친원파'들을 길러놓고 있었다. 특히나 매국노나 다름없는 유청신과 오잠이라는 이 두 간신배들은 왕고에게 지나친 충성을 하느라 고려의 조정대신들이 왕고를 정식으로 고려왕으로 받아들이는것을 반대하자 아예 고려를 없애고 원나라의 일부로 편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서슴치 않았다. 왕고는 이 두 부원배들의 책동에 속으로 코웃음을 쳤으나 일단 자신이 먼저 원나라에 최대한 충성하는 모습을 보여야했기 때문에 이러한 망동들을 수수방관했다.
- 그리고 정변이 일어나 게겐칸이 피살당하고 새로운 대칸이 서자 재빨리 말을 갈아탄 왕고는 적극적으로 선왕의 방면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주변에서는 이러한 왕고를 비웃었으나 어쨌든 선왕이 쫒겨난 건 게겐칸때문이었기 때문에 이제 그가 사라진 이상 선왕을 티벳에 계속 둘 명분 또한 사라진 것이었다. 바얀 또한 왕고의 이러한 주장을 못마땅해했으나 그 역시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바얀은 숙왕과 선왕이 대도에서 재회해 화해하는 것은 필사적으로 막고자 선왕이 티벳에서 대도에 도착하는 동안 얼른 숙왕을 고려로 귀국시켰다. 아울러 숙왕이 선왕을 다시는 살아서 보지 말도록 엄중히 경고했다. 숙왕이 이것을 반대할리는 만무했다.
- 이윽고 티벳으로 귀양갔던 긴 시간만큼 선왕이 귀양에서 풀려나 대도에 도착하기까지는 역시나 그만큼 긴 시간이 흘렀다. 선왕은 3년만에 보는 대도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먼저 황궁에 간 선왕은 새로운 대칸에게 인사를 올리고 대칸에게서 위로를 받았다. 이후 따로 바얀을 만나게 되었다. 바얀은 생각보다 멀쩡한 선왕의 몰골에 속으로 흠칫 놀랐다.
"티벳까지 그 먼 곳에 있다보니 어느덧 신선이 되셨구려..."
바얀의 그런 뼈있는 농담에도 선왕의 모습은 초연했다.
"어쨌든 나를 귀양에서 풀어준 이가 그대라니 참으로 세상사는 알 수가 없구료."
"솔직히 말해 난 그대를 귀양에서 풀어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소. 하지만 어디 세상사가 내 마음대로 되야 말이지..."
바얀은 선왕을 노려보며 썩소를 지었다.
"그러나 이제 예전같은 권세는 꿈도 꾸지 마시오. 세상은 그대가 떠나가있는 동안 많이 변했소.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딱 하나! 바로 이 바얀이 건재하다는 것이오. 그리고 난 아직도 권력을 쥐고 있소. 반면 그대 선왕은 이미 모든 것을 잃었소. 고려로도 가지 못할 것이오. 대도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시오. 이것이 나의 마지막 호의라는 것만은 알아두시오!"
선왕은 바얀의 그러한 통보에 묵묵부답이었다가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그대의 충고 고맙소. 이제와서 난들 무슨 미련이 남았겠소. 다만 나도 한 가지 충고를 드리리다, 바얀 장군."
"무엇이오?"
"너무 세상사에 연연하지 마시오. 사람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결국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
- 바얀과 해어진 후 선왕은 자신이 머물렀던 심왕궁으로 발길을 돌렸다. 선왕이 돌아올것을 대비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지만 그래도 사실상 아직도 폐허더미였다. 그 심왕궁에서 선왕 자신이 가장 각별히 아꼈던 곳, 만권당으로 선왕은 향했다. 그곳도 역시 난장판이었다. 선왕은 땅바닥에 흐트러진 서적 등을 집어들어 정리하며 다시 한번 눈물이 나왔다.
- 선왕이 심왕궁으로 돌아온 지 나흘째 되던 날, 왕고가 야밤에 몰래 찾아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선왕이 왕고를 보자 그리 놀라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선왕은 담담하게 왕고를 맞이했다.
"전하...!"
왕고는 피눈물을 쏟으며 선왕 앞에 엎드려 흐느끼기 시작했다.
"오냐...올제이투...네가 제일 고생이 많았겠구나..."
"그간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으셨사옵니까 마마...흑흑."
"미안하구나...네가 너에게 그런 명령을 내려 오랜 기간 너도 말못할 심정이었을 것이다."
"티벳에서 헤아릴 수 없는 고초를 겪으셨을 전하에 비하겠나이까?"
- 사실은 이러했다. 선왕이 졍변을 일으켰을 때 만일을 대비해 왕고한테 선왕은 승리가 확실해질때만 자신에게 합류하도록 따로 명령을 해 둔 상태였다. 만에 하나 정황이 반대로 흐르면 반드시 반대파에 붙어 후일을 도모하라는 것이었다. 선왕의 거사가 실패하자 왕고는 이를 악물고 다기 황태후쪽에 붙어 이후 철저하게 자신을 위장하며 살았던 것이다. 물론 이전부터 게겐칸에게 접근한 것도 모두 선왕의 지령에 따른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왕고가 그토록 집요하게 숙왕을 괴롭힌것도 선왕을 위한 일종의 복수였던 것이다.
"이제 하늘이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다...이제 너에게 기대해 볼 수 밖에...올제이투!"
왕고는 눈물을 거두며 단호하게 말했다.
"마마께서는 아직도 정정하신데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요...그래도 만약 마마께서 못 이루시는 꿈이 있다면 신 왕고 반드시 그 유지를 받들어 이루겠나이다!"
"그래...그 말을 들으니 안심되는구나. 올제이투...이제 나의 그 오래된 대륙의 야망은 네가 이룰 차례가 된 것이다."
선왕과 왕고는 그렇게 오래토록 서로를 부둥켜앉고 오열하고 있었다.
- 서기 1325년 5월, 선왕은 심왕궁에서 막 흐트러지는 벚꽃을 구경하고 있었다. 독서광이었으며 문학적 조예도 깊었던 그는 이때 수많은 미인들에게 둘러싸여 풍류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뇌리 속에는 여전히 인생에 있어서 두 사람만이 맴돌 뿐이었다. 자신에게 있어서 최고의 대칸이었던 하야스와 자신 인생의 유일한 사랑 야속진...아울러 자신에게서 멀어져 간 그 '대륙의 야망'...평생 품고 있던 그 야망이 날라가자 선왕은 인생의 목적이 사라진 듯이 날마다 멍하니 하늘을 보는 일이 잦아졌다. 그리고 동시에 마음 깊숙이에서 뭔가가 올라오더니 그의 몸을 차츰 병들게 하고 있었다.
(아...고려...고려를 가고 싶구나...내 아버지의 땅이며 나의 백성들이 있는 그 곳...)
선왕은 멀리 동쪽 하늘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평생동안 고려에 있던 기간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은 고려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정신이 또렷해지며 선왕은 그 동쪽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고려...고려...나의 꿈..."
그러더니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향년 51세였다. 죽은 뒤에야 선왕의 유해는 고려로 돌아와 안장되었으나 숙왕의 푸대접은 여전했다.
- 선왕의 유지를 이어받은 왕고는 이후에도 계속 자신이 고려왕이 되고자 숙왕을 모함했다. 계속되는 위기를 모면코자 숙왕은 또다시 몽골의 황족 공주를 베필로 맞이했으나 또다시 의문사당하자 궁지에 몰렸다. 왕고는 철저하게 자신과 선왕 사이의 비밀을 숨긴 채 이를 기화로 다시 대도 조정에 숙왕을 폐위시켜야 한다고 엄중히 제안했다. 또다시 대도로 끌려가기가 죽도록 싫었던 숙왕은 자신이 상왕이 되고 그토록 원하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이가 바로 한국사에서 최악의 폭군으로 알려진 그 충혜왕이다. 결국 이런 놈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숙왕은 그동안 그토록 무리수를 쓴 것이었다.
- 아니나 다를까...죽은 선왕의 장손이기도 했던 (충)혜왕은 희대의 막장행각으로 왕이 된 지 1년만에 폐위되는 수모를 겪고 다시 숙왕이 복위되었는데 그도 이전과 같이 무책임하게 국정을 운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왕고는 이때를 노려 계속적으로 몽골 조정을 등에 업고 고려에 압박을 가해 자신이 고려왕이 되고자 무던히 애를 썼다. 일단 고려왕이 된 다음 심왕의 작위를 유지하며 선왕이 이루지 못한 그 대업을 자신이 기필코 이루고자 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왕고의 로비는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선왕같이 쿠빌라이 대칸의 외손자라는 프리미엄조차 없던 그가 고려왕이 되기에는 여러가지 난관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왕고의 능력의 한계는 거기까지였다. 그래서 그는 숙왕이 죽고 혜왕이 다시 고려왕이 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럼에도 왕고는 혜왕이 폭군이라는 점을 이용해 계속적으로 고려왕이 되고자 기도했으나 결국 혜왕에게 오히려 잡혀 죽을뻔하기도 했다. 그래서 왕고는 혜왕이 죽은 다음에야 고려로 올 수 있었고 돌아오자마자 세상을 떠났다.
- 바얀은 이후에도 제국의 막강한 권세가로 이름을 날렸고 대칸이 되기 위한 투쟁에서 한번도 잘못된 선택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엘테무르에게 점차 밀려 수세에 몰리자 조카인 톡토테무르와 결탁해 엘테무르를 제거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 자신 역시 톡토테무르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참고로 하야스 대칸의 아들들은 차례로 대칸에 오르게 된다.
- 선왕의 '대륙의 야망'은 비록 자신의 대에서 실패했지만 그 유지는 왕고가 아닌 다시 자신의 손자의 핏줄로 돌아와서 가까스로 이어진다. 물론 폭군 혜왕이 아닌 자신의 다른 친손자였다. 그는 바로 공민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