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83/ 모세가 아내로 취한 구스 여인은 누구인가? 또 이 일로 모세를 비방한 것은 미리암과 아론인데 왜 하나님은 미리암만 나병의 심판을 내리셨는가?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1~3)
섞인 무리들이나 그들에게 충동된 어리석은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모세는 지치기에 충분하였다. 그래도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누이 미리암과 형 아론의 비방은 의미가 다르다. 그들이 누구인가? 미리암은 나일 강가 갈대 숲에서 동생 모세를 살리기 위해 용기와 재치를 발휘하였고(출 2:7~8), 홍해를 건넌 다음에 이스라엘 여인들을 이끌고 찬양을 지휘하던 여선지자(출 15:20~21)였다. 아론은 하나님도 인정한 모세의 대언자요 초대 대제사장이다. 그런 그들이 함께 모세를 비방하였다. 그것도 모세의 아내를 걸고서, 무슨 문제가 있었는가? 민수기 12장 1절은 "모세가 구스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고 말한다.
이 구스 여자가 누구인가? 모세의 아내는 십보라인데 본문은 단지 '구스 여자'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이 여인의 신원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대략 세 가지 의견이 있다.
(1) 십보라와 헤어지거나 그녀의 사망 이후 모세가 재혼한 아내. 이 견해의 문제는 결국 모세가 바람직하지 않은 상대와 결혼하였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구스는 함의 후손이다. 그렇다면 모세 자신이 비방의 근거를 제공한 셈이 된다. 과연 이방인과의 혼인을 금한 규례를 전한(출 34:15~16; 신 7:3~4) 모세가 자기 친 형제들도 문제로 삼을 그런 결혼을 감행하였을까?
(2) 에티오피아 공주. 이 견해는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저서 「유대고대사」 제2권 10장 2절에 근거한 것이다. 요세푸스는 모세가 젊은 시절 에티오피아에 원정을 갔다가 공주를 만나 결혼했지만 헤어져 있다가 이때 다시 만났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십보라는 모세의 둘째 부인이 된다. 성경적 근거는 전혀 없다.
(3) 십보라. 하박국 3장 7절에 의하면 '구스(구산)'는 십보라의 출신지인 '미디안과 같은 곳이다. 이 주장에 대한 반론은 모세가 결혼한 지 4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형제들이 새삼스럽게 그 결혼을 문제 삼는다는 것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성경에 구스 여인의 신원에 대한 명시적인 정보는 없다. 그러나 본문의 정황 증거는 세 번째 견해를 지지한다. 우선, 미리암과 아론이 수십년 전에 이루어진 모세의 결혼을 이제 와서 문제 삼는다고 보는 것이 비합리적이라는 판단부터 살펴보자. 그런 시각은 모세와 그의 가족들의 실제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단지 '지난 세월만 계산한 데서 온 오해이다. 모세의 형제들이 십보라를 만난 것은 이 사건이 있기 얼마 전이다. 모세의 40년 광야생활 동안 모세의 형제들은 그의 생사여부도 모르고 지냈다. 그러니 십보라를 알 턱이 없다. 혹시 소식을 들었더라도 십보라를 미워할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동생이 처가살이(출 2:21 참조)로 생명을 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그들은 십보라를 보지 못했다. 모세가 아내와 두 아들을 이드로의 집으로 돌려보내고 혼자 갔기 때문이다.
그들이 십보라를 만난 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모세가 이드로의 양을 치던 '하나님의 산 호렙'(출 18:5; 3:1 참조)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때 이드로는 “모세가 돌려보냈던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의 두 아들을 데리고"(출 18:2~3) 모세에게 나아왔다. 그때가 시내광야에서 만나가 내린 출애굽 제1년 2월 15일(출16:1) 직후였다. 그리고 지금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는 때는 그들이 시내광야를 떠난 출애굽 제2년 2월20일(민 10:11) 직후이다. 그러니 미리암과 아론이 십보라를 만난 것은 이제 겨우 일 년이 되었을 뿐이다. 결국, 40년이란 세월 때문에 '구스여인'이 십보라가 아니라고 판단할 이유는 전혀 없다.
출애굽 노정에서 처음 만난 십보라는 미리암과 아론에게 긴장의 요인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우선, 그녀의 등장 방식부터 두 사람의 신경을 자극한다. 이드로가 그들을 데리고 온 것이다. 그것도 번제와 희생제물을 가지고 예우를 해 드려야 할 어른이 온 것이다. 이에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와서"(출 18:12) 이드로를 대접하였다. 미리암과 아론을 결정적으로 자극하는 일이 다음 날에 발생한다. 이드로가 사위 모세를 위해 부장제도를 제안한 것이다(21절). 그것은 모세와 함께 백성들을 지도하는 미리암과 아론에게도 직접적으로 관련이 되는 사안이었다. 미리암과 아론의 속이 불편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사돈어른이 자신들의 고유한 영역까지 침해하는 과도한 관심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문제는 모세의 반응이었다. 그가 "자기 장인의 말을 듣고 (24절) 그들과 한 마디 상의 없이 즉석에서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고서 이드로는 돌아갔고 십보라는 남았다. 미운털이 박힌 새 식구와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더 예민해진 이는 시누이 미리암이었다. 모세에 대한 비방은 미리암에 의해 주도적으로 진행되었다. 그것은 민수기 12장 1절에서 미리암의 이름이 아론보다 먼저 언급되는 것에서부터 알 수가 있다. 또 '비방하다'는 히브리어 동사 와트답베르는 3인칭 여성 단수이다.
즉 주어는 미리암과 아론임에도 불구하고 비방의 주체는 미리암으로만 표현된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이 일로 미리암에게만 나병의 심판을 내리신 것이야말로 그 사실을 분명히 해 준다. 물론 아론도 자기성격대로 수동적이지만 미리암과 의견을 같이한다. 그래서 이어지는 2절에서 그들은 함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민 12:2)고 한다.
그러면 왜 십보라를 십보라라고 하지 않고 '구스 여인'이라고 표현하였을까? 그건 미리암과 아론이 십보라가 '구스 여인'임을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 '미디안 여인'이라고도 하지 않고 구태여 '구스 여인'이라고 한 것은 모세를 향해 십보라가 함의 후손이라는 것과 피부색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 “네 처가는 이방 족속이다”는 것을 모세에게 확인시켜 주는 표현 방식이다. 엘렌 G. 화잇은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로 가는 도중에 이드로가 내방했고 그때에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의 권고를 즉시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아론과 미리암은 위대한 지도자에 대한 그의 영향력이 그들의 영향력보다 크지나 않은지 두려워하였다. 미리암은 불만의 정신에 휩싸여 하나님께서 특별히 지배하신 사건들 중에서 불평할 조건을 찾았다. 모세의 결혼은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즉 모세가 히브리 사람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않고 다른 민족의 여인을 선택한 것은 그 여자의 가족과 민족적 자존심에 모욕을 주는 처사로 생각되었다. 십보라는 광야에서 남편을 다시 만났을 때에 그의 임무가 너무 중하여 그의 힘이 쇠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자기의 염려를 이드로에게 고했고 이드로는 자기의 구제책을 제시했다. 심보라에 대한 미리암의 반갑의 주요 원인이 여기에 있었다. 미리암은 자신과 아론이 업신여김을 받고 있다고 상심하면서 모세의 아내를 그 원인으로 생각하고 그가 전과 같이 그들을 그의 의논자로 삼지 못하게 한 것은 심보라의 영향력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만일 아론이 의의 편에 굳게 섰더라면 그 약을 능히 제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미리암의 악한 행위를 견책하지 않고 그에게 동조했고 그의 불평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질투심에 참여하게 되었다(부조, 382~383).
누구보다 이해하고 도와주어야 할 누나와 형님의 비방은 견디기 어려운 법이다. 모세로서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어떻게 누님과 형님이..."라고 반응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모세는 그렇지 않았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3). 이 유명한 구절이 여기에 기록된 것은 누구라도 분노를 표할 만한 상황에서 모세는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가 침묵하자 하나님께서 저들을 책망하시고 노하셨다. 그런데 이 글을 모세 자신이 썼을까? 자신이 자신에 대해 그렇게 쓰면 어색하지 않은가? 그러나 바울도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고후 11:5)고 하였다. 모세는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 마음을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심정을 그렇게 남겼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