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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1~14 - 나도 죽은 십자가 - 유기성 목사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6장 1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1]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2]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는 죽은 사람인데, 어떻게 죄 가운데서 그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3] 침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침례를 받을 때에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4] 그러므로 우리는 침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5]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6]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7]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8]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
[9] 우리가 알기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다시는 죽지 않으시며, 다시는 죽음이 그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10]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죽음은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신 것이요, 그분이 사시는 삶은 하나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11] 이와 같이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2] 그러므로 여러분은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서, 여러분이 몸의 정욕에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13]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④연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 ④또는 '무기'
[14]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롬 6:1-14, 새번역)
아멘.
요즘은 솔직히 마음이 많이 괴롭습니다.
세월호 사고 후에 1년이 되면서 우리나라 각계 지도층 또 우리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수준으로 인한 마음의 괴로움도 크고 더 마음이 괴로운 것은
이와 같은 때에 우리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그와 별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괴롭습니다.
많은 목사님들 또 많은 장로님들 무너져 내리는 것을 봅니다.
복음이 십자가의 복음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 하는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살게 하려는 것일까 그런 고민도 합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바로 믿을 수 있을까 세상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어떻게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바로 살 수 있을까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사람들이 무너지는 것은 우리가 봅니다.
그러나 사실 이름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많은 사람들, 그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하게 수없이 실종하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예수 믿어야 바로 믿는 거고 어떻게 예수 믿는 것이 잘 믿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우리를 바로세우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큰 문제 중에 하나가 십자가 복음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우리의 삶에 변화가 없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이해하기를 속주의 복음으로만 이해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는다 정말 놀라운 복음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습니다.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우리의 과거의 죄도 우리가 지었던 모든 과거의 죄도 다 사함을 받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지은 죄, 지금 현재의 죄도 사함을 받습니다.
심지어 아십니까? 이제 앞으로 내가 지을 죄 그 죄도 다 사함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는 우리는 이 세상에 나지도 않았을 때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벌써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지을 죄가 어떤 죄가 있을지라도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서 다 사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거 얼마나 놀라운 복음입니까? 그런데 이것만 복음인 줄로 알고 있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이 속주의 복음 그것만 복음인 줄로 알고 있는 사람 그렇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깁니까?
이미 모든 죄가 다 사함을 받았는데 우리가 거룩하게 살 필요가 뭐 있습니까? 이미 짓지도 않은 죄까지 예수님이 다 용서해 주셨다면 그러면 죄 안 지으려고 애쓸 필요가 뭐 있습니까? 이미 다 용서받은 죄인데 그래서
정말 말도 안 되는 질문이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오늘 로마서 6장 1절에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예수를 믿고 받은 은혜가 속죄의 은혜라면 그러면
죄를 많이 지을수록 은혜가 많은 거죠.
여전히 죄 속에 있으면 은혜는 여전히 풍성한 거죠.
굳이 죄 안 지어야 되겠다는 무슨 동기가 없잖아요 이런 질문은 로마서 5장 20절 말씀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20절에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잘못 왜곡하면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일수록 은혜를 많이 받는다는 겁니다.
별로 죄짓고 살지 않았던 사람이 십자가에서 받은 은혜하고 끔찍하고 너무너무 더럽고 너무너무 추악한 죄를 지었던 사람이
은혜 받은 거 하고 어떤 게 더 큽니까?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은혜를 많이 받은 거지 이런 식으로 이 말씀을 이해하고 있는 거죠.
이건 정말 말씀을 왜곡하는 겁니다. 여기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는 이야기는 죄를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에서 똑같습니다.
누가 죄를 더 많이 짓고 덜 짓고가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데 있어서는 똑같은데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달은 자냐 아니면 여전히 자기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인인 걸 모르는 자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어떤 죄인인가를 깨닫게 되면 충격을 받게 됩니다.
내가 그런 죄인이었어 그러나 자기 자신이 어떤 죄인인가를 깨달은 것이 충격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더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사하신 것을 깨닫게 될 때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넘친다는 말씀이 적용되는 거죠.
절대로 죄를 더 지으라 여전히 죄짓고 살으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바로 믿으면 정말 십자가 복음이 뭔지 제대로 깨달으면 죄 짓고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놀라운 말씀을 하는 겁니다.
2절 말씀에 보면 우리는 죄는 죽은 사람인데 어떻게 죄 가운데서 그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죄는 죽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죽은 사람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저 죄의 사함을 받은 사람만 아닙니다.
우리는 죄에서 죽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죄에서 구원받는 길은 죽는 것밖에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는 길은 노력해서는 불가능합니다.
여러분들도 죄 안 지으려고 노력해 보셨겠지만 성공하신 분 있습니까? 노력해서 죄 안 지은 사람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 대해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죄에서 죽는 경우에만 우리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또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뿐만 아니고
우리와 함께 우리와 연합해서 우리와 한몸이 되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도 분명히 믿어야 됩니다.
안타깝게도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것만 알지 그건 분명히 압니다.
나와 함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 성도는 많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 차이는 우리의 삶의 차이를 가져오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세례를 통하여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이 죽으신 그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된다는 겁니다.
3절 말씀을 보십시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을 때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세례가 뭡니까? 세례는 예수님과 우리가 연합하여 한몸이 되는 성례입니다.
여러분이 그 사실을 알고 세례를 받았던 제대로 몰랐든지 간에 이 시간에 분명히 하셔야 됩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예수님과 연합하여 한몸이 되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죽은 것이지요.
그 말씀을 하고 있는 겁니다. 세례를 받은 것은 예수님과 연합하여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이 된 겁니다.
6절 말씀에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이라고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만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는 나도 죽은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죄사함만 받은 게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도 십자가에서 죽은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그렇게 고백을 하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모든 성도들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그 일이 우리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죽었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나는 안 죽은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자신이 죽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도무지 헷갈립니다.
그것은 죽는다는 것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었다면 나는 성질도 다 없어지고
혈기도 다 없어지고 분노도 없어지고 음란한 마음도 없어지고 욕심도 없어지고 이기적인 마음도 없어지고 예수님만 사랑하고 살게 될 거야.
죽었다면 그런데 자기가 그렇지가 않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죽은 건가 안 죽은 건가 어떤 때는 죽은 것 같다가
다시 살아난 것 같다가 또 죽은 것 같다가 또 살아난 것 같다가 정신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오늘 여기 계신 분들 중에 내가 정말 죽었다 이렇게 분명하게 고백할 수 있는 성도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지금 다 이 문제에 빠져 있습니다.
속죄함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근데 내가 죽었다고 하는 믿음은 너무나 희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 사람과 그렇게 다르지가 않은 겁니다.
목사가 되고도 장로가 되고도 여전히 죄의 종노릇하는 겁니다.
여러분 6절 말씀에 보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은 것이 옛 사람이라고 그랬습니다.
육신이 아닙니다.
육신이 죽었다면 우리는 지금 무덤에 가 있어야 되는 거죠.
우리는 육신이 죽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죽은 것은 옛 사람이 죽은 겁니다.
이 옛사람은 죄의 종노릇하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죄의 종노릇하는 존재였습니다.
근데 이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은 겁니다.
우리 육신은 여전히 그냥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혈기도 그냥 있고 욕심도 그냥 있고 이기적인 마음, 음란한 생각 다 그냥 있습니다.
우리 속에 그러면 예수님과 함께 옛 사람이 죽었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속에 이 육신의 욕망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더 이상 육신의 욕망에
종 노릇하고 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육신이 죄가 지배하고 있던 옛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죄가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는 겁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거듭난 자가 살기 때문에 새 생명으로 사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죄가 우리를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속에 여전히 육신은 있지만 더 이상 그 육신이 그 죄가 우리를 사로잡아서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 갈 수도 없습니다.
옛 사람은 죽어버렸으니까 우리를 계속해서 죄 짓고 살도록 만들 수도 없습니다.
옛 사람이 죽어버렸으니까.
그래서 6절 말씀에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 옛 사람이 십자가에 죽은 것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7절 말씀에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육신은 죽지 않았는데 이렇게 자아만 죽은 경우를 여러분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분명한 예가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무기수를 생각해 봅시다.
이 무기수는 육신이 죽은 게 아닙니다.
그는 교도소에서 죽을 때까지 거기서 갇혀 살아야 됩니다.
그 무기수 안에 육신의 욕망은 여전히 있습니다.
무기수라고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고 마음껏 먹고 싶고 어디 마음껏 하고 싶은 그런 욕구가 없겠습니까? 그런데 이 무기수는 육신대로 못 삽니다.
왜 평생 교도소 안에서 살아야 돼? 그 교도소 안에서는 교도소장과 간수의 통제를 받아 살아야 됩니다.
자기 마음대로 못 삽니다.
이것을 자아가 죽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더 이상 자기 마음대로 못 사는 겁니다.
그러니 감옥인 거죠. 평생 감옥살이 하는 거죠.
많은 사람이 자아가 죽는 것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런 경우를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결혼을 생각해 보십시오.
결혼도 똑같습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그는 더 이상
자기 육신대로 못 삽니다. 자아가 결혼하면 죽습니다.
배우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배우자와 함께 사는 겁니다.
서로 순종하고 그리고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게 결혼 생활입니다.
이 자아가 죽는 것 때문에 어떤 사람은 결혼 생활을 감옥이라고 표현하고 무덤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자아가 죽은 것만 생각하면 꼭 그런 표현이 적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자아가 죽는 것이 꼭 끔찍하고 불행한 것만 아닙니다.
부부 생활이 괴로운 것은 자아가 안 죽어서 그런 겁니다.
결혼은 했는데도 자아가 안 죽은 부부 생활은 고통스럽습니다.
자아가 죽은 부부 생활은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자리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혼인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이 이제 여러분의 신랑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신랑이 되셨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여러분의 자아가 죽은 겁니다.
여러분에게는 신랑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예수님 안에서 삽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다스리시고 예수님이 여러분을 인도하십니다.
육신의 욕구는 여전히 있지만
육신대로 살지 않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주인이신 거죠.
이런 경우를 자아가 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직장생활하면서 직장 복음화에 대한 사명을 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회식을 하는데 상무님이 술잔을 건넸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술을 마시지 않기로 하나님께 약속을 드렸습니다.
제가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 하고 거절을 했더니 분위기가 아주 싸늘해졌습니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어느 중간 간부 되는 사람이 이분의 뺨을 때렸습니다.
상무님이 주는 술잔을 거절하더니 그 모욕을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는 직장을 사표를 쓰기로 마음에 작정하고 다음 날 기도원에 올라갔습니다.
출근하지 않고 기도문이 올라와서 마음을 새기기가 어려워서 힘들어하는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했는데 너는 직장 보고마를 위해서 그 뺨 한 번 맞는 것을 너가 견딜 수 없느냐?
그 말씀에 그가 꼬꾸라졌어. 그리고 기도원을 내려와서 그리고 그다음 날 출근을 했습니다.
여러분 자아가 죽는다는 것 이제는 더 이상 육신이 끄는 대로 살지 않는다는 겁니다.
전에는 육신의 종노릇만 하고 살았습니다.
그냥 내 혈기대로 내 감정대로 내 생각대로 내 계획대로 내 야망대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근데 이제는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 옛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육신의 욕구대로 육신이 하자는 대로 살지 않습니다.
주님이 하자는 대로 사는 것 이런 사람이 자아가 죽은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믿느냐고 하는 겁니다.
예수 믿고 속죄함을 받았다는 것만 믿는 사람 아직까지 진짜 예수 믿는 거 아닙니다.
속죄함을 받는 믿음은 분명하지만 그것만 믿는 것은 아직도 예수님을 믿는 거 아닙니다.
어디까지 믿어야 됩니까?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나도 죽었다 여기까지 믿어져야 그 사람이 예수님을 진짜 믿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렇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나도 죽었다 나도 죽은 십자가라 그렇게 여러분이 고백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믿어질 때 세례를 받는 겁니다.
4절 말씀에 보시면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다.
여러분 세례식은 장례식입니다. 장례식입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장례식을 치르고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장례식은 슬픈 장례식이 아닙니다.
기쁨 장례식입니다. 죄의 종노릇하는 옛 사람이 죽은 장례식이니까 옛 사람이 죽은 장례식을 치르고 사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죽었다고 그렇게 고백하는 겁니다.
이런 고백이 이런 믿음과 이런 고백이 될 때 이 사람을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근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믿음과 고백이 분명치가 않은 겁니다.
옛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은 믿지 못한 채 죄 용서만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용서해 달라고 회개는 하는 것 같은데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믿지를 못하니까 죄는 또 짓습니다.
그리고 또 와서 또 회개합니다. 그리고 가서 또 죄를 짓습니다.
이렇게 계속 반복하다가 보면 나중에 회계가 다 형식이 돼버리고 맙니다.
건성 회계가 됩니다. 회개를 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 마음은 여전히 죄 지을 생각으로 삽니다.
영적으로는 더 완고해지는 거죠.
예수를 믿은 지 오래되고 직분은 중직을 맡았는데도 그는 여전히 죄의 종노릇하는 겁니다.
왜? 자기가 죽었다고 하는 믿음이 분명치가 않으니까 그렇습 사람들이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못하는 이유는 죽었다고 느껴지지 않아서 그렇다는 겁니다.
여러분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느낌으로 믿으려고 하면 큰일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광복을 얻었습니다.
일본은 망하고 우리는 독립을 했습니다.
그러나 8월 15일 당일은 오히려 조용했습니다.
주지운 듯이 조용했습니다. 이 엄청난 소식이 전해졌는데도
그날은 조용히 했습니다. 누구도 거리에 나와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지 않았습니다.
그날은 다들 이게 무슨 일이야 소식은 들었는데도 느낌이 안 오는 거예요.
실감이 안 나는 거예요. 진짜 우리나라 독립한 거 맞아 일본이 망한 거 맞아
지금 총리의 할아버지 되시는 분이라고 전해 들었습니다만 아베 총독이 마지막 총독입니다.
그가 9월 9일에 미국 사령관이었던 하지 중장에게 항복 문서를 그리고 이 조선의 모든 통치권을 다 넘겨줄 때
그때 9월 9일입니다. 그때까지 아베 총독은 여전히 총독이었습니다.
일본은 망했는데도 그러니까 사람들이 한동안은 일본이 망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우리나라가 독립을 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는 혼란 상태에 있었다는 거 왜 느낌으로 알려고 하니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진리 앞에 서지 못하게 만드는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인 거예요.
사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옛 사람이 죽은 것은 느낌으로 아는 게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이 다 이루어 놓으신 거예요.
그 사실을 여러분의 성경책에도 기록되어 있잖아요.
분명히 기록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믿는 거지.
믿고 난 다음에 그다음에 체험이 오는 겁니다.
이제 막 결혼한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 부부라는 느낌이 있겠습니까? 뭐 5년쯤 살아보고 10년쯤 살아보고 난 다음에 이제는 우리가 부부 같으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겁니까? 결혼식 하고 나면
그러면 느낌은 아직도 부부 같지 않지만 우리는 부부지 내 남편입니다.
제 아내입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말합니까? 사실에 근거하니까 느낌은 아직 안 왔지만 사실이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고백하는 거잖아.
여러분 어떤 아이가 부모 없는 아이가
입양을 받았습니다. 그 집의 아들이 된 거예요.
느낌이 오겠습니까? 부모 같은 느낌이 오겠습니까? 내 집 같은 느낌이 오겠습니까? 한 5년쯤 지나서 10년쯤 지나서 이제는 내 부모님 같고 내 집 같은 다음에 나는 이 집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말합니까?
입양 수속이 끝나고 서류가 다 갖춰지고 그 집 호적의 이름이 올라갔으면 나는 이 집의 아들인 거죠.
사실이니까 느낌은 아직 오지 않지만 사실이니까 여러분 중에 여러분의 옛 사람이 죄의 종노릇하던 옛 사람이 정말 죽었구나 이런 느낌이 오는 사람이 이 자리에서 그렇게 많지 않으실 겁니다.
나는 여전히 죄의 종노릇하고 살아 나는 아직도 죄를 못 이겼어 내 옛사람은 아직도 죽지 않은 것 같아.
여러분 언제까지 느낌에 의존해서 믿으려고 하십니까? 그러면 여러분 죽을 때까지 진짜 믿음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옛 사람이 죽는 것은 서서히 죽는 게 아닙니다.
큐티 열심히 하고 새벽 기도 열심히 나오다 보면 어느 순간에 죽은 것 같은 때가 오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죽었다는 것은 오직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 성경책을 보고 아는 것입니다.
내가 죽었구나
내 옛 사람은 이미 죽었구나 그리고 아멘입니다.
하나님 그리고 고백하고 그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6장 11절에서 강력하게 권합니다.
여기라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길지어다.
여러분
여러분의 육신 안에는 죄의 욕망이 여전히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이 이렇게 하셔야 됩니다.
이제는 속으면 안 됩니다. 나는 나는 이미 죽었어 십자가에서 나도 죽었다고 십자가에서 여러분 속에서 죄의 욕망이 일어날 때 다시 여러분을 사로잡으려고 여러분을 노예 삼으려고 역사할 때
여러분이 이제는 진짜 믿어야 됩니다.
나는 죽었어 십자가에서 나도 죽었다고 내 옛 사람은 이미 죽었어 죄야 사탄아 너는 내게 아무 권한이 없어.
그렇게 고백해야 되고 그렇게 믿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14절에 죄가 여러분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운명적으로 죽을 때까지 예수를 믿어도 죄의 종노릇하고 사는 거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를 노예 생활하는 데서 건지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12절부터 13절까지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서
몸의 정욕에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만약에 어쩔 수 없이 죄 짓고 사는 거라면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할 리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이것을 오늘 당장 적용하셔야 됩니다.
예배 끝나고 난 다음에 여러분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적용하셔야 됩니다.
갈등이 많으실 겁니다. 육신은 계속해서 말할 겁니다.
그때 나는 죽었어 옛 사람은 나는 이미 벌써 죽었어 선포해야 됩니다.
식당에 가셨을 때 시험 드는 일이 있을 겁니다.
분명히 빈 자리인데 옷이 있고 빈 자리인데 핸드백이 있고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물론 같이 밥 먹고 싶은 사람들이 있고 속해 식구도 있고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먼저 뛰쳐 올라가서 다 그렇게 자리 맡아놓는 이런 일 때문에 어떤 분은 교회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밥은 탔는데 앉을 자리가 없어요 다 맡아놓아서 그래서 계단에 앉아서 쭈그리고 밥을 먹다가
내가 이 교회를 계속 다녀야 되나? 그래서 떠나면서 저에게 메일을 보내신 분이 있습니다.
여러분 식당에서 당장 적용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육신의 욕망을 따라 어쩔 수 없이 사는 옛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니까요.
이제는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인이십니다.
여러분 주차장에서 똑같은 고백을 해야 될 수 있습니다.
집에서
여러분 일터에 나가서 여러분이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라고 여길지어다 선포하라 그랬습니다.
최근에 저 한남동에 있는 서울 드림교회 담임 목사님이신 김여수아 목사님이 멈춤이라고 하는 책을 쓰셨는데 그 책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책 속에서 그 목사님이 미국에 있는 신학교회 다니실 때 이야기를 하셨어요.
학생들로부터 너무나 존경받는 아주 강의를 은혜롭게 하시는 교수님이 계셨는데 그 교수님에게 있어서 한 가지 문제는 시험 점수가 너무 짜다는 것 70점 이상을 받기가 어렵다는 소문이 나 있는 교수님이셨습니다.
열심히 공부를 해서 그 교수님 과목 시험을 보는데 문제는 별로 어려울 게 없는데 첫 번째 질문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첫 번째 질문이 당신은 이번 학기에 할당된 독서 과제물을 100% 다 읽었습니까? 예 아니오 그게 표시하게 돼 있습니다.
얘라고 표시하면 가산점 10점을 받고 아니요라고 표시하면 10점을 뺍니다.
목사님은 솔직히 다 읽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어요.
그러면 아니오지 근데 아니오라고 표시하면 10점이 빠지고 그러면 자기가 a 학점을 받을 수가 없어요.
자기는 꼭 a의 학점을 받아야 되는데
그러면 예라고 표시를 해야 되는데 그러면 100% 다 읽은 건 또 아닙니다.
그 밑에 이렇게 교수님이 썼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을 할 수 없다면 절대로 목회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인격의 순전함의 결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고 목회에 치명적인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종이 시험 마치는 종이 울릴 때까지 답을 쓸 수가 없었어요.
예와 아니오 사이에. 그러다가 시험지를 제출할 때 예언하고 썼습니다.
이것이 바로 옛 사람이 죽지 않은 사람의 삶입니다.
육신이 끄는 대로 사는 겁니다. 성적이 나왔는데 a 학점이었습니다.
전체 학생 중에 a 학점 받은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었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마음이 괴로워지기 시작합니다.
분명히 a 학점은 받았지만 나는 목사가 될 자격이 없어.
나는 거짓말로 받은 거야.
그게 계속 성령께서 그 마음을 찔러서 괴롭게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했지만 마음이 풀어지지가 않습니다.
결국은 교수님을 찾아갑니다. 눈물로 그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울면서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용서를 구하고 그리고 학점을 취소해 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자아가 죽은 사람입니다.
더 이상 육신의 욕망대로 살지 않는 겁니다.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사는 겁니다. 그로 인해서 어떤 손해를 보든지 간에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답니다.
여호수아 너는 목회자가 되려면 많은 도움이 필요하겠다.
내가 너를 도와줄 테니 이제 나와 정기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겠니?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그리고 3년 동안 그 교수님과 정기적으로 만났습니다.
교수님과의 만남은 괴로운 일이었다고 그럽니다.
왜? 솔직하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만 자꾸 하시는 겁니다.
거짓으로 대답을 들으면 마음이 편안하지만 교수님이 말씀하시더래요.
내가 지금 내게 거짓말을 말하면 당장은 부끄러움을 모면할 수 있겠지만 결국은 그 거짓 때문에 더 큰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정직하게 고백을 하고 이 연습을 3년을 하셨다는 그러면서 자기 속에 얼마나 무서운 죄가 도사리고 있는지를 처절하게 경험을 했다는 거
자기 속에 얼마나 죄의 심각성, 죄의 파괴성이 자기 속에 심각한 지를 치를 떨 정도로 경험했다는 겁니다.
3년 동안 그 교수님과 만나면서 그러면서 죄의 종노릇 하지 않는 훈련을 받았다고 했어.
지금 그 목사님이 목회하시면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은 아마 그 훈련 때문일 것입니
옛사람 이미 십자가에서 죽은 옛사람으로 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이 된 거죠.
여러분 이미 죄에서의 승리는 하나님이 다 이루어 놓으셨어요.
우리 옛사람은 죽었어. 그러나 여러분이 내가 죽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이 없다면
그건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권하는 겁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11절 말씀에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하나님을 향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런데 거기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앞으로 로마서에서 계속 나오고 바울 서신에 계속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가운데 그런 여러분이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예수님의 통치를 받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게 아닙니다.
4절 하반절에 보면은 놀라운 약속이 나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죽은 것만 아닙니다. 이제는 새 생명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 안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이 대한민국이라는 땅 안에 살고 있다는 뜻만 아닙니다.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 안에 있다는 말은 대한민국의 법을 지키고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해야 하고
우리나라가 혹시 실망스럽고 지도자들이 문제가 있어도 여전히 그것을 우리가 감수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 안에 있으면 놀라운 유익을 얻습니다.
우리가 해외 여행을 나가면 그러면 어느 나라에 입국할 때 우리는 여권을 보여줍니다.
그 여권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그냥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하는 영권만 보고 확인이 되면 우리는 입국 허가를 받습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도 똑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놀라운 새 생명의 삶을 살게 해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더 이상 우리는 죄의 종노릇 하지 않아도 됩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죄의 종노릇하면서 사시겠습니까? 1948년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세계 교회협의회 총회가 열렸습니다.
개회 예배를 드릴 때
이 강단 앞에 관이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누군가의 장례식을 개회예배 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누가 장례를 맞았는지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습니다.
예배가 진행되는 중에 사회하시는 분이
한 사람씩 한 사람이 나와서 이 관에 조의를 표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와서 도대체 누가 죽었길래 이렇게 하는가 하고 와서 그 관을 들여다보고는 다들 깜짝 놀랐어.
그리고 심각한 얼굴로 그 관을 지나갔습니다.
그 관 속에는 큰 거울만 하나 있었습니다.
관을 들여다보는 사람 그 사람이 그 관 속에 비치는 거죠.
자기 장례식입니다. 이것은 이미 성경에 분명히 우리에게 선언되어져 있는 것 우리는 이미 장례식을 치르는 사람 그 개회 예배 때 참석자들은 다 자기 장례식을 다시 한 번 치렀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산적한 많은 현안 문제가 있었는데
너무나 순탄하게 다 잘 처리되었던 총회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언제까지 예수님이 여러분의 뒤만 따라오시게 하며 살겠습니까? 언제까지 그렇게 하며 살겠습니까? 이제는 진짜 여러분 자신의 장례식이 이미 치러졌음을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속죄함을 받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죽은 사람 옛사람이 이미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나도 죽었습니다. 이 믿음이 여러분 안에 분명하셔야 됩니다.
저는 오늘 새벽 1시에 일어나서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었어.
과연
우리 교우들이 이 사실을 믿을 수 있을까? 듣기만 한 것이 아니고 정말 믿음으로 취하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바꾸어지지 않습니다.
속죄함을 받았다는 믿음은 오히려 우리를 자꾸 죄에 대해서 더 무디어지게 만듭니다.
우리는 그냥 속죄함 받은 게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기에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은 겁니다.
이제는 여러분 말을 한마디 하셔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셔야 됩니다.
여러분의 몸도 여러분의 삶도 이제는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때부터
여러분 한 사람만 이렇게 바르게 살아도 가정이 변합니다.
다른 가족들 변화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옛 사람이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만 분명히 하시면 가정은 반드시 교회도 변합니다.
그렇게 일터도 변하는 거고 세상도 변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이르노니 하늘에 미리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하늘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것이 여러분의 삶에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합시다. 이 시간에 여러분 기도하실 때 제가 속죄함을 받은 믿음만 아니고
나도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믿음을 분명히 하고 살게 해주옵소서.
이제는 이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 그래서 내 심령이 변화되고, 내 삶이 바꿔지고, 가정과 일터가 바꿔지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해 주옵소서라고 우리 다 같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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