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부터 淸까지 꾸준히 조성돼 曹氏 귀의군 시기에 집중 발전 동서 절벽에 40여 석굴 존재 조성 양식, 돈황 천불동과 유사 5000여㎡ 걸쳐 펼쳐진 불화들 조성 시기 정치·문화 사료로 중요 수월관음 등 미적 가치도 높아
허허벌판에 차를 세워 내렸다. 조금을 걸어가니 날카로운 협곡이 눈에 들어온다. 깊게 패어진 골짜기 사이로 기암괴석의 절벽이 펼쳐진다. 구석구석 조그마하게 석굴들의 존재가 보인다. 협곡의 이름은 ‘만불협(萬佛峽)’. 만불이 존재하는 골짜기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이곳에 ‘유림굴(楡林屈)’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림굴은 감숙성 안서현에서 서남쪽으로 75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며 돈황의 막고굴, 서천불동과 함께 실크로드 불교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석굴로 평가받고 있다.
하서주랑(河西走廊)의 서부에 있는 유림굴은 그 위치적으로도 중요하다. 하서주랑이란 동쪽 오령(烏嶺)에서 시작해 서쪽 옥문관(玉門關)에 이르는 약 900㎞ 구간의 좁고 긴 평지다. 서한(西漢)시기 장건(張騫)이 서역을 개척한 이후 하서주랑은 실크로드 상에서 중원과 서역을 연결하는 육로 교통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실크로드 길목에 있는 유림굴도 구법의 한 루트였을 것으로 보인다.
맥적산과 병령사도 그랬듯이 중국의 석굴은 강이나 하천에 연원을 두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절벽 위의 석굴에서 수행과 신앙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수원(水源)은 필수였기 때문이다. 안서의 유림굴도 기련산맥의 만년설이 녹아 내려 생성된 유림 하천을 기반으로 해서 형성됐다.
언제부터 이 협곡에 석굴들이 조성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현존하는 석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당나라 시기 조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뒤를 이어 송·위구르·서하·원 시기까지 중수와 조성이 반복됐다. 이후 청나라 시기에는 보수작업이 이뤄졌는데 이 때문에 많은 소조불상의 원형이 훼손됐다.
유림굴은 동서의 양 협곡 사이의 절벽에 조성돼 있다. 동쪽 절벽에는 30여개의 굴이 서쪽 절벽에는 11개, 모두 40여 개의 굴이 들어서 있다. 석굴에는 소조 불상 100여 구와 불화가 5,650㎡에 걸쳐 그려져 있다. 현재는 동쪽 절벽의 감실을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조계종 교육원 연수단이 찾았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운영됐다. 3층에 걸친 감실 앞에 콘크리트로 계단과 난간을 만들고 출입문을 설치해 관람객이 임의대로 보지 못하도록 했다. 안내원의 안내에 따라 관림 시에만 문을 열어준다. 또한 입구의 벽면이 무른 것과 달리 굴의 외벽 표면에 경화 처리해 훼손을 막고 있다. 이런 유적 보존과 운영 방식은 돈황과 투르판의 석굴들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다.
앞서 답사한 맥적산과 병령사 석굴은 불상 중심이었다면 유림굴은 불화를 중심으로 살펴야 한다. 청나라 시기 대규모 보수 사업이 진행되면서 각 굴의 소조불상들이 대부분 새로 만들어졌다. 그러다보니 형상이 둔중하고 색채 역시 수준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유림굴에 있는 불교 예술의 주요 발전 시기를 티베트 점령기, 조씨 귀의군 정권시기 등을 꼽는다. 특히 조씨 일가의 정권 시기에 유림굴은 집중적으로 발전했다.
이에 대해 최태만 서울산업대 조형예술과 교수는 ‘유림 제25굴의 도상 고찰’이라는 제하의 논문에서 “티베트로부터 이 지역을 수복해 당의 조정에 바친 장의조에 이어 조씨 일가가 이 지역을 지배하던 시기에 굴착되거나 중수한 굴이 유림굴에 28개가 있다. 막고굴까지 합치면 70여 개에 이른다”면서 “이런 까닭에 조씨 귀의군 정권하에 특별히 불교문화가 융성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 조씨 가문은 별도의 화원(畵院)을 둬 유림굴과 막고굴 벽화는 물론 비단 그림, 판화, 사경 등을 제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대(唐代) 장의조부터 조씨 귀의군 시기에 집중적인 숭불 정책은 돈황 등 지역에 불교문화의 융성을 가져온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유림굴과 돈황 막고굴은 그 조성 형식이 유사하다.
석굴 형식으로 보면 △중심탑주형(中心塔柱形, 주실의 중앙에 방형의 탑주가 있는 형식) △중심불단형(中心佛壇形, 주실을 평면방형 또는 장방형으로 파들어간 석굴 형식) △대상형(大像形, 평면 또는 타원형의 굴)이 주되다. 이는 유림과 돈황 막고굴에 모두 나타는 것들이다.
유림굴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은 11굴이다. 청대에 최종적으로 개착한 굴로 서하 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18나한상의 생동감이 인상적이다.
11굴 옆 12굴은 5대 10국시기 조성됐지만 유림굴 중 벽화가 가장 보존이 잘돼 있다고 평가 받는다. 천장에는 천불을 묘사한 불화가 있는 데 막고굴의 천불 불화보다 색채의 탈락이 훨씬 덜하다. 굴 남쪽 벽 아랫부분을 보면 가족들이 나들이를 하는 ‘출행도(出行圖)’가 있다. 이는 200년 동안 이 지역 지배했던 모용(慕容) 가문의 모습으로 알려졌다.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들어갈 수 없었고 표지판 사진으로만 확인할 수 있었던 유명 석굴은 25굴과 2굴이다.
특히 25굴은 티베트 점령기 당시 벽화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고 그 보존 상태도 양호한 것으로 알려졌다. 25굴 주실 남벽에는 ‘관무량수경변상도’가 북벽에는 ‘미륵경변상도’, 동벽의 ‘팔대보살만다라경변상’ 등의 도상이 나타난다. 이를 통해 당시 예술 수준과 건축, 의복, 음악, 풍속 등을 파악할 수 있다.
2호굴은 서하 시기에 조성됐다. 이곳에는 수월관음이 그려져 있다. 남측과 북측에는 수월관음이 그려져 있다. 사진으로 보여준 북측 수월관음은 비스듬히 기대어 조각달을 보고 있다. 이 그림들은 당나라 때 화가 주방(周昉)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으로 봤지만 ‘고려 수월관음도의 원형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림체가 매우 유려하다.
유림굴에서 마지막으로 들어간 곳은 6굴이었다. 굴 입구부터 화엄법계(華嚴法界)란 현판이 걸려있었다. 이곳에는 유림굴에서 가장 큰 미륵대불이 있었다. 높이만 24.7m에 이른다. 동행한 유근자 한국미술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의 설명에 따르면 6굴은 규모가 커서 예불굴로도 이용됐고, 그 만큼 훼손이 많았다.
불상의 조성 시기는 당대(唐代)이다. 이 시대 미륵불은 측천무후가 많이 조성했는데 본인이 황제가 되기 위한 발원을 많이 담았다고 한다. 또한 불상이 여성성을 강하게 가지기 시작한 것도 측천무후 시기부터라고 유 연구원은 설명했다.
6굴에서 잠시 나왔다. 조계종 교육원 연수단 스님들이 ‘미륵존불’을 염송하고 있다. 미륵 부처는 미래에 오실 부처이다.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모든 중생은 미륵의 도래를 기원한다. 이는 온 세상이 불국정토가 되길 바라는 염원이 담겨있다. 험준한 구법의 길에 올랐던 구법승들도 불국정토를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걸어 나갔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내딛는 오늘의 한 걸음이 중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