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헬라 문명의 모든 흔적이 고서라니 남아있던 아테네는 처음 이곳을 방문한 바울과 선교사 일행에게는 참으로 휘황찬란한 도시였다. 지어진 지 500년도 넘는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의 웅장함과 각종 경기장과 예술의 광장들은 가히 경탄할만한 건축물들이었다. 거기에 가는 곳곳마다 장엄한 신상과 우상들이 세워져서 눈을 미혹하게 하는 것들로 가득 있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이 얼마나 타락하고 우매해질 수 있는지 아테네는 그것을 보여주는 도시였다.
(행 17: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행 17: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마치 골리앗 앞에 다윗처럼 이 거대한 신전의 도시에서 바울은 결코 주눅 들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마음이 격분해서 다양한 철학자들과 논쟁을 벌였다. 결국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들에 세운 철학과 논리란 자가당착에 빠지는 자기모순이요 이율배반일 수밖에 없다. 그런 해결할 수 없는 논리의 모순을 더 꼬고 꼬아서 자기도 스스로 하는 말뜻을 모르고 하는 허황한 주장들만 난무한 이 철학의 도시에서 바울은 철학에는 철학으로 논리에는 논리로 대응했다.
(행 17: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행 17:19)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그러나 다른 도시들에 비해 아테네 선교는 그렇게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이 지성인이라고 자처하는 교만한 아테네 사람들은 전도자들을 한갓 이방 신을 전하는 사람들쯤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어리석어 보였다. 자신을 낮추고 인성을 취하신 하나님 곧 신은 교만한 그들에게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으로 생각이 되었다. 그러나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별을 전하는데 포기하지 않았다.
(행 17: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행 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행 17: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 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아테네 사람들의 우상숭배를 질타하면서도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여전히 유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했다.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확연히 갈렸다. (행 17: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바울은 아덴에서 비록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낙담하지 않았다. 그는 더 큰 교훈을 얻었고 인간의 철학과 지성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만을 높여야 한다는 것을 실감하고 고린도로 향했다. 그리고 아테네에서 얻은 교훈을 실천했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화려함에 주눅 들지 않을 담대함과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의지할 수 있는 믿음과 세상을 품을 사랑을 가지고 오늘도 나아가 하나님을 들어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하시고 비록 세상이 어리석게 볼지라도 십자가만을 높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