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羅州) 나(羅) 씨 세보(世譜)―1세~5세
나주(羅州) 나(羅) 씨는 한국 고유의 성씨이다. 금성(錦城) 나(羅) 씨가 라말여초에 시작되었다면, 나주 나 씨는 여말선초에 시작되었다. 『나주나씨대동보』(羅州羅氏大同譜)에 따르면, 나주 나 씨의 시조(始祖)는 나부(羅富)이며, 고려 시대 정의대부(正義大夫)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을 역임했다. 정의대부는 정3품이며, 감문위는 고려 6위의 제1위로서 상장군이 감문위 수장이다. 묘역은 1953년 봄 관향(貫鄕, 본관, 선향) 나주 송현동(松峴洞)에 시조묘를 설단(設壇)하고 매년 3월 13일 세일제(歲一祭)를 시행하고 있다. 1977년 가을 묘역을 보수했다. 2008년 시조묘 설단을 나주 보산동으로 이설했다. 나주 나 씨 시조 나부의 출신지는 전라남도 여황현(삼국 시대 지명, 현 나주시)이며, 중국 예장 나 씨 시조 나주(羅珠)가 한국의 지명 나주(羅州)를 가리키는 것처럼, 중국의 지명 나부(羅浮)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시조의 중국 기원설은 근거가 없으며, 지리학적 오류로 추정된다.
1세(世)는 나득규(羅得虯)이며, 고려 시대 영동정(令同正)을 역임했다. 1954년 봄 전북 김제 청도원(淸道院)에 선영을 설단했으며, 매년 3월 15일 세일제를 시행한다. 나주 나 씨 중시조이다.
2세는 나중윤(羅仲允)이며, 고려 시대 영동정(令同正)을 역임했다. 1954년 봄 전북 김제 청도원(淸道院)에 선영을 설단했으며, 매년 3월 15일 세일제를 시행한다.
3세는 나송기(羅松奇)이며, 고려 시대 영동정(令同正)을 역임했다. 1954년 봄 전북 김제 청도원(淸道院)에 선영을 설단했으며, 매년 3월 15일 세일제를 시행한다.
4세는 나수영(羅守永)이며, 고려 시대 진사(進士)와 영동정(令同正)을 역임했다. 1954년 봄 전북 김제 청도원(淸道院)에 선영을 설단했으며, 매년 3월 15일 세일제를 시행한다.
1세~4세의 묘역은 실전되었으며, 1954년 봄 전북 김제 청도원(淸道院)에 선영을 설단했고, 매년 3월 15일 세일제를 시행한다.
5세 나위(羅位)는 고려 시대 제 호조전서를 역임했으며, 세칭 금양처사라고 했고, 말년에 나주로 퇴거했다. 전서공파(典書公派)의 시조이며, 후에 2개 파로 분파했다.
5세 나계(羅桂)는 고려 시대 중서시랑을 역임했으며, 처는 창원 황 씨이고, 후손들은 경기도에 살았다. 시랑공파(侍郎公派)의 시조이며, 후에 4개 파로 분파했다.
5세 나석(羅碩)은 고려 시대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 영동정(令同正) 금성군(錦城君)을 역임했고, 처는 남평(南平) 반(潘) 씨이며, 후손들은 전북에 살았다. 금양군파(錦陽君派)의 시조이며, 9개 파로 분파했다.
5세 나세(羅世)는 고려 시대 문과 한림 상원사 연안군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했고, 전북에 후손들이 살았다. 연안군파(延安郡派)의 시조이며, 5개 파로 분파했다.
5세 나원(羅源)은 고려 시대 사온서직장 영동정을 역임했고, 묘역이 나주 송현동에 있으며, 후손들이 나주에서 세거했다. 직장공파(直長公派)의 시조이며, 27개 파로 분파했다. 나주 송현동 개발로 2008년 7세 묘역이 있는 나주 보산동으로 5세 묘역 일부가 이장되었다.
나주 나 씨 원조는 정의대부(正義大夫)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 나부이며, 근래에는 영동정 (令同正) 나득규가 나주 나 씨 중시조로 알려져 있다. 4세까지는 묘역이 실전된 실전 선조이며, 5세부터 묘역이 현존하는 현존 선조이다. 당시 나주 나 씨 선조들은 본관이나 관향을 표기하지 않는 것이 상례였으나 조선 시대 전기 세종 1년 전북 김제 출신 나득강(羅得康, 1378년~1444년)이 과거 시험에 급제하면서 본관을 나주로 기재(나주인)함으로써, “최초의 나주인”이 탄생했다. 판서공 나득강은 세종의 신임을 받아 이조좌랑, 예조정랑, 의금부지사를 역임했고, 이조판서를 제수받았다. 이후부터 전남 나주(羅州)가 나주 나 씨의 관향으로 정착되었고, 조선 시대 후손들은 나주 또는 나주인이라고 출신지를 표기하기 시작했다. 판서공 나득강의 부친은 낙천와(樂天窩) 나중우(羅仲佑)이며, 고려 시대 후기에 예문관지제고, 춘추관편수관 등을 역임했고, 조선 시대 태조 이성계로부터 우의정을 제수받았다. 나중우와 나득강은 전북 김제를 대표하는 유학자이기도 했다. 조선 시대와 대한민국 시대를 거치며 나주 나 씨들은 사회 각 분야에서 중요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조선 시대 중기 사대부 시조 문학을 대표하며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사초 「겸춘추일기일사」(兼春秋日記一事)를 기록한 호조정랑·승정원좌승지 송암 나위소(羅緯素)는 또한 호남 제일의 부호였다. 전남 나주 출신으로 대대로 이어받은 나위소 가문의 재산은 후손 나만치(羅晩致)에게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조선 시대 후기 전북 정읍 출신 백봉(白鳳) 나용균(羅容均, 1895년~1984년)은 독립운동가이자 우리나라 정치학의 아버지이다. 일본 와세다대와 영국 런던대에서 정치학을 유학하고 독립운동을 거쳐 제헌의회와 대한민국국회에서 5선 의원을 역임했으며, 장면(張勉) 정부에서 보건사회부장관과 박정희 정부에서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나용균 가문은 전북 정읍 제일의 부호였으며, 일제 강점기 이후에 남은 재산이 삼천석꾼이었다. 대한민국 3개 정부에서 4선 국회의원과 재무부장관, 상공부장관, 경제 부총리, 통일 부총리 등 장관직 5회, 부총리직 3회를 역임한 나웅배(羅雄培)는 또한 서울대교수와 아주대총장 그리고 중앙대특임교수와 목원대초빙교수를 역임한 우리나라 정관계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또한 나웅배는 대전중학교와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서울대 경제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석사와 캘리포니아대 버클리경영대학원 경영학박사를 마친 경영학자로서 고도 성장기 한국 경영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나라 경영학의 아버지이다. 나웅배의 동생 나중배는 육군대장으로 예편했으며,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역임했고, 후에 사우디아라비아 주재 한국대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 참고 자료: 『나주나씨대동보』(羅州羅氏大同譜) <끝> <작성자: 나종혁 나주 나 씨 부사공파 26세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