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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뿌리아름역사동아리 원문보기 글쓴이: 麗輝
이런 논의들을 많이 봤을 것이다.
물론 학계에서도 지금까지 많은 연구 성과가 있었으며 덧붙여 온, 오프라인에서도 많은 논의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문제는 아직까지 계속 바뀌고, 진전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런 '문화'라는 부분의 연구는 대부분 문헌사적인 것 외의 부분에서 많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한 부분이 바로 고고학이다. 고고학은 절대적으로 추정학문이자, 현재진행형인 학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유적, 유물의 등장은 기존 이론에 변화를 추구하게끔 만들고 그 과정에서 학문적인 성과를 얻는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문화의 원류, 그 기원, 그 성격 등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기존에는 한국 문화의 계통을 파악할때 單線的, 單元的(unilinear)으로 파악했던 것이 사실이다. 유럽 혹은 시베리아 등지에서 전파된 문화가 한반도에 정착한 것이 우리 문화의 원류이다, 라는 식의 해석이 지금까지 우세했으며 그런 경향은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를 해석하는데에도 영향을 미쳐왔는데 최근 들어 이런 전파론적 입장 이외의 자생론적 입장도 힘을 얻고 있다. 그와 동시에 단순히 석기-청동기-철기시대의 순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것에서 문화적인 측면까지 부가하여 용어를 정리한다든가, 지역별로 차별성을 두어 독자적 문화권을 설정하는 것까지 이뤄지고 있게 된 것이다. 이런 형태를 살펴본다면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어떤 성격을 지닌 학문인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주인장은 동아시아의 오랜 전통적 세계관이 바로 다원적 국제관계임을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 실체는 10~13세기 몽골제국이 등장하기 이전의 고려시대때 확연하게 드러나는데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그 이전부터 전해진 전통적인 모습이라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국제관계를 모델로 삼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 적용하는 것 역시 하나의 역사를 연구하는 방법론으로 제시될 수가 있을텐데, 그 모델의 적용 범위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이 또 하나의 궁금증으로 생겨났다. 일단 동아시아에서 거대한 통일제국, 일원적 지배체제를 고수하던 거대한 통일제국이 등장한 시기가 몽골제국 이전에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를 파악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울지도 모른다. 한 무제와 당 고종 치세의 잠깐이 그때인데 그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다원적 국제관계 속에서 각국이 존속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역사시대에 속하는 때로서 비록 단편적이나마 중국측 문헌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하지만 역사시대 이전의 선사시대에는? 이라는 질문에 봉착하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문헌을 통한 연구를 기대할 수가 없다. 그때 도움이 되는 것이 고고학일 수 있는데 얼마전 우리 문화를 多元的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읽은 바 있어 여기에 잠깐 소개하고 주인장의 생각을 적어볼까 한다.
최몽룡, 김경택, 홍형우 선생님을 비롯해 하문식, 강인욱, 이원준, 아르투르 라스킨, 수보티나 아나스타샤 등 8명이 참가해 쓴 '동북아 청동기시대 문화 연구'라는 책이 그것인데 러시아 연해주의 청동기-철기문화와 우리 학계에 읍루라고 알려진 뽈체 문화(B.C 7/6세기~A.D 2/3세기)를 비롯해 한국, 중국, 그리고 러시아의 지석묘 연구 등 한국문화의 기원을 밝히는 데 중요한 논거를 제공해 줄 주제의 연구 논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의 첫번째 장이 최묭룡 선생님이 쓴 '한국 문화의 계통-다원론적 입장'이라는 글인데 이 챕터를 읽고 느끼는 바가 있어 이에 대해 잠시 글을 적으려고 한다.
고고학적 근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선사시대 중에서도 그나마 고고학적 자료조차 적은 석기시대의 경우는 연대를 편년하고 그 시대적 구분에 맞춰 다양한 분야를 연구한다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기실, 손바닥만한 석기 1개를 갖고 그것을 분석하여 어떤 결과를 도출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한편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석기시대를 전공하는 사람들이라면 다른 어떤 분야를 새로 공부해도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만큼 정해진 자료도 워낙 미비하고 그 안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길었던 시대에 대해서 포괄적 혹은 미시적으로 언급해야 하기 때문에 석기시대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상한연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구석기시대는 일반적으로 평양 상원 검은모루 동굴과 경기도 연천 전곡리, 충북 단양 금굴 유적 등으로 통해서 약 70~20만년 전으로 보고 있지만 그 진폭이 상당히 크다는 문제점이 있다. 북한학계에서는 검은모루 동굴을 100만년 전까지 올려보고 있는데 이들이 전기 구석기시대의 유적임은 분명하지만 그처럼 이른 연대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는 아직 제시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 아직 이들 유적들의 연대를 입증할만한 지질학적 고생물학적 근거가 뚜렷하게 제시되지 않은 셈이다. 더욱이 이들 유적에서 출토된 동물화석군 및 석기를 포함하는 유물들과 한반도 이외의 지역, 즉 중국이나 시베리아 지역과의 비교연구도 이루어진 바가 아직 없다. 따라서 당시 우리 민족의 기원 또는 문화의 出自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 단계인 20만년전 전후가 되면 그 실마리가 조금은 보인다. 바로 경기도 연천 전곡리 유적에서 보이는 역석기문화가 그것인데 이를 통해서 시베리아 예니세이 강 상류의 카멘니로그와 라즈로그Ⅱ 유적(이 유적인 민델-리스 간빙기층에 형성된 것으로 20~40만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몽고령의 고르노 알타이지역 사간 아부이 동굴, 내몽고 자치구 大窯읍 투얼산 사도구 유적, 요녕성 榮口 金牛山 유적과 비교될 수 있다. 이를 통해 최몽룡 선생님은 그동안 논의되지 않았던 시베리아의 예니세이 강 상류-몽고(알타이)-내몽고-요녕(만주)-연천 전곡리로 이어지는 구석기시대의 문화루트를 새로운 가설로 설정해볼 수 있는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중석기시대인데 우리는 유럽의 편년체계를 받아들여 이 시대의 존재 가능성을 상정하고 있다. 중석기시대는 일반적으로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대(transitional period)로서 B.C 8,300년경 빙하의 후퇴로 나타난 새로운 환경 하에서 계속 구석기시대의 수렵-채집 경제를 근간으로 하면서 세석기의 사용이 증가한 시기를 말한다. 물론 그러면서 농경과 가축 사육이 점진적으로 보급되었고 중석기시대는 신석기시대로 대체된다는 것이 중론이다. 하지만 빙하기와 별 관련이 없던 근동지방에서는 갱신세(홍적세) 직후 농경이 시작되는데 반해 영국의 경우는 B.C 3,000년경까지도 그 전환이 이뤄지지 않았다. 고로 이런 유럽식의 중석기시대 개념의 이해가 우리에게도 적용이 될지는 미지수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유럽식 석기문화가 나타나지 않고 극동지역에서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하바로브스크시 근처의 아무르강 유역 오시뽀쁘카 문화의 토기와 비교될 수 있는 토기가 제주도 한경면 고산리(10,180±65년 B.P)에서 나오고 있는 점 등을 근거로 중석기시대를 하나의 독립된 시기가 아닌 단순히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시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런 과정 속에서 B.C 7,000년경으로 편년되는 간즈다레 유적에서 토기가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어서 오시뽀쁘카 문화의 설정을 보류한다 하더라도 이미 平底의 심발형토기를 煮沸具로 사용하며 竪穴 주거지에 거주하던 신석기-청동기시대를 아우르는 독자적인 고고학 문화인 '極東平底土器 문화권'의 설정도 가능한 시점에 이르고 있다. 물론 통영 상노대도, 공주 석장리, 거창 임불리, 홍천 화화계리 등 유적의 수가 급증하면서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도 중석기시대의 존재 가능성이 언급될 정도로 그 연구 수준이 상당히 진척된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신석기시대의 경우는 종래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 유적(사적 394호)을 근거로 그 상한을 B.C 6,000년경으로 설정한 바 있었다. 하지만 오산리 유적이 근처에 소재한 석호 형성 이후(B.C 4,000년경)에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발굴 층위자체에 문제점이 제기되면서 이를 우리나라 최초의 신석기시대 유적으로 보는 의견에 회의를 보이는 입장도 생겨났다. 이후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에서는 이 유적 특유의 문양구성을 지닌 덧무늬(융기문) 토기와 함께 오산리식의 특징적인 압날문 토기가 출토되고 오산리보다 연대가 올라가는 집자리도 확인되었다. 또한 제주도 한경면 고산리에서 우리나라 最古의 신석기시대 유적이 발굴조사되었는데 이 역시 그 연대가 오산리유적보다 상당히 앞선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고산리 유적의 경우 세석기와 석핵이 나오는 후기 구석기시대, 융기문 토기와 무경식 석촉이 나오는 신석기Ⅰ 단계, 유경식 석촉이 나오는 신석기Ⅱ 단계 등 세 시기로 층위를 나눌 수 있는데 1단계와 2단계, 즉 세석기와 융기문 토기의 결합만으로도 유적의 상한연대는 아무르강 중부 평원 북부의 가샤 유적(11,000~12,000 B.P, B.C 10,000), 바이칼호 근처의 우스띠 까렌까 유적(B.C 7,000), 일본 長崎縣 北松浦郡 吉井町 福井 동굴유적(12,700 B.P, 10,750 B.P) 등과 연관시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즉, 신석기시대의 상한은 B.C 8,000~10,000년 - B.C 2,000~1,500년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소리가 된다.
덧붙여 최근 강원도 영동지방을 중심으로 '中東部先史文化圈'이라는 용어가 새로이 대두되고 있다. 여러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지면서 강원도의 신석기시대가 전기(오산리, 춘천 교동, 문암리), 중기(지경리Ⅰ, Ⅱ)와 후기(춘성군 內坪-B.C 980년 이전)으로 세분되면서 전기는 함북 선봉군 굴포리와 무산 범의구석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지방, 중기는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와 평남 온천군 궁산리 유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이 밝혀지고 있다. 이는 문화의 전파가 시기 및 지역에 따라 다르게 이루어질 수 있음이 뚜렷하게 드러난 결과인데 그 양상이 종래 생각해왔던 것 이상으로 복잡하다는 데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신석기시대, 하면 유명한 것이 바로 '빗살무늬 토기'라고 할 수 있다. 구라파에서는 LBK(Linear Band Keramik)라는 문화가 있는데 혹은 다뉴브Ⅰ문화라고도 한다. B.C 5,000년대부터 유럽 중앙과 동부에서는 경작이 용이한 황토 지대에서 화전식 농경이 행해졌고 이것이 서쪽으로 전파되었다. 그 문화와 공반된 토기 문양이 흔히 우리가 빗살무늬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데 해방전에는 이 LBK 문화의 토기를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토기들의 조형으로 생각하여 이것이 스칸디나비아를 포함하는 북유럽으로부터 시베리아를 거쳐 북위 55도 환북극 지대를 따라 한반도로 전파되었다는 것이 일본 학계의 주장이었다. 이후 김원룡 선생님은 그 견해를 수용하여 북부 시베리아의 환북극권 신석기문화의 대표적 유물이 빗살무늬 토기라고 언급하면서 흑룡강 상류 쉴카강 북안의 석회굴에서 나온 빗살무늬 토기를 근거로 우리의 빗살무늬 토기를 바이칼 지구를 포함하는 범 시베리아 신석기 문화에 포함시키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후 한강 유역의 첨저형 토기와 함경도의 평저형 토기도 원래는 한 뿌리로 알타이 지역을 포함하는 바이칼 호 주변이 그 기원지가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견해가 나와 종래의 주장과 다른 견해들도 나왔으며 오시뽀쁘까 문화의 대표적인 가야 유적을 발굴한 비탈리 메드베데프,'극동평저토기론'을 주장한 大貫靜夫의 견해가 제시됨에 따라 한국 신석기문화의 기원 및 연대 그리고 각 토기 형식에 따른 새로운 문화전파에 대한 시각은 수정 내지는 보완이 불가피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중국 요녕지방에서 발굴된 다양한 유적들의 편년이 잘 정리됨에 따라 그 곳에서 나타나는 빗살무늬 토기들이 우리의 빗살무늬 토기 문화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이처럼 석기시대에 대해서만도 점차 종래의 단선적인 문화 전파론적 입장은 점점 그 입지가 좁아지고 있음을 알 있다. 요즘도 그렇고 그 이전의 사회도 그러했듯이, 선사시대 역시 다양한 문화적 전파와 교류, 토착문화의 자생-발전을 통해서 점차 발전했음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점차 더 많은 고고학적 근거가 발견되면 다시 수정이 될 수 있을 것이며 그 상한연대에 대한 변동 역시 불가피해질 것임은 재론하지 않도록 하겠다.
최몽룡 선생님은 청동기시대를 B.C 1,500~B.C 300년까지 파악하면서 북한이나 만주와 마찬가지로 남한의 경우도 그 상한을 B.C 1,500년까지 볼 수 있음을 언급하였다. 이 역시 주인장이 고등학교에서 B.C 10세기경을 청동기시대의 시작으로 봤던 때와는 많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강원도 춘천 서면 신매리 유적과 경기도 평택 지제동, 청주 용암동, 경주시 내남면 월산리, 충주 동량면 조동리 등의 유적이 모두 B.C 7~10세기 경에 해당하는 유적들인데 특히 강릉 교동 주거지에서 발견된 공렬이중구연부 토기는 서북계 角形土器와 동북계 공열토기가 복합된 양상의 결과로 이해되고 있어 연해주지방 청동기시대 문화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가 있다 하겠다. 종래는 B.C 7세기 전후로 편년되는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흔암리 유적이 그러한 복합된 양상을 보여주는 최고의 예로 이해되었는데 강릉 교동 유적의 경우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결과 B.C 1,130~840년이 나와 그보다 앞선 유적일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이처러 서북계와 동북계 양계의 문화가 복합된 최초의 지역이 남한강 유역이 아닌 태백산맥 동안인 강릉일 가능성이 점쳐지면서 그것이 시사하는 바 역시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그와 더불어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지석묘를 언급할 수있는데 일반적으로 지석묘 사회는 전문직의 발생, 재분배 경제, 조상숭배 및 혈연을 기반으로 하는 계급사회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이 지석묘 문화는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 전기(B.C 300~B.C 1)에 걸쳐 한반도 전역에 나타나는 토착문화를 대표하는 묘제라고 할 수 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기존의 토착적 지석묘문화에 북쪽 예니세이강 쪽에서 석관묘가, 아무르강 유역에서 암각화문화가 들어와 각기 거리를 두고 공존하거나 서로를 수용해 한국의 복합적이고도 다원적인 청동기문화를 형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로 인해 기원과 전파에 있어 연대 및 형식의 문제점 때문에 유럽으로부터의 전파설보다는 '한반도 자생설'이 더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
이와 같이 언급될 수 있는 것이 암각화인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암각화로는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암각화, 울주 언양면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그리고 고령 양전동 암각화 등이 있겠다. 그밖에도 함안 도항리, 영일 인비동, 칠포리, 밀양시 상동 안인리 신안마을, 남해 양하리, 상주리, 벽연리, 영주 가흥리, 여수 오림동과 남원 대곡리 등지에서도 암각화가 확인되고 있다. 이런 암각화의 문양들은 미국 북서부 워싱턴주 오제타의 미카 부락민들과 아무르강변 사카치알리안 암각화 등에서 확인되는데 특히 아무르강의 암각화는 현재 이 지역에 거주하는 나나이(Nanai)족의 조상들이 제작한 것으로 믿어지며 그 연대는 B.C 4,000~3,000년경이다. 이들은 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만주족으로 이어지는 종족의 한 갈래로 말갈이나 여진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져서 더욱 주목된다.
이로 인해 이러한 암각화 문화는 영일만(포항)에서부터 시작하여 남원에 이르는 내륙으로 전파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아무르강의 암각화 문화가 海路를 따라(육로를 따라왔다면 그 이동과정이 확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동해안을 거쳐 바로 영일만 근처로 들어왔다가 다시 내륙으로 전파되어 남원에까지 이른 것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암각화 문화는 청동기시대의 석관묘, 지석묘와 비파형동검의 전파 루트와는 다른 경로를 거쳐 전파되었으며 그 문화 계통도 달랐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지만 포항 인비동과 여수 오림동의 경우를 보면 기존에 우리나라에 전래된 청동기(비파형 또는 세형동검)와 마제석검을 사용하던 청동기-철기시대 전기 사회에 쉽게 융화되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암각화의 경우는 아무르강 유역의 암각화들을 포함한 다른 지역과의 암각화와 비교-연구된 적이 거의 없으며 그 편년에 있어서도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를 두고 논란이 있기 때문에 더 자세한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마지막이 철기시대인데 기존에는 B.C 300~B.C 1년을 청동기시대 Ⅱ기 혹은 초기 철기시대라고 불렀고 A.D 1~A.D 300년을 원삼국시대(서울대학파) 혹은 삼한시대(영남학파)로 불러왔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증가된 고고학적 자료로 인하여 전자를 철기시대 전기로, 후자를 철기시대 후기 혹은 삼국시대 전기로 인식하는 움직임이 늘어나고 있다.
다만 최몽룡 선생님은 김원룡 선생님의 견해를 수용하여 한국이 위만조선때부터 한일합방 이전까지 거의 중국 문화권에 속해있었다고 언급하고 있어 아쉬운데 이 부분은 논외로 여기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이 책에서 최몽룡 선생님은 특히 중국 문화권에만 속해있는 한국에서 그 외 문화권의 영향이 상당히 발견되고 있음을 역설하기 위해서 그렇게 언급한 듯 하기 때문이다. 특히 세형동검의 자루 끝에 새 형상의 안테나를 장식한 안테나식 검은 오스트리아 잘쯔캄미구트 유적에서 시작하여 유럽 철기문화의 대명사가 된 할슈탓트 문화에서 보이는 스키타이식 동물문양이 가미된 것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스키타이식 구리솥, 철솥과 청동제 마구 등이 김해 대성동과 양동리 등에서 출토된 것을 본다면 우리 문화의 전파 및 수용 루트 및 양식이 종래 생각해 오던 것보다 훨씬 다양했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언급한 것이 울릉도였는데 울릉도 북면 현포 1리에서 돌로 쌓은 직사각형의 기단 위에 3열로 높이 1.5~2m 정도 되는 15개의 입석을 세운 제단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과거 이런 제단은 우리나라에서는 발견된 예가 없지만 이와 유사한 제단들이 몽고의 청동기시대 중 카라숙 문화에서 발견된 바 있다. 이들은 사슴돌, 제단, 케렉수르 등으로 불리는데 우쉬키인-우베르 제단 등이 울릉도의 그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겠다. 또한 울릉도에서는 현포 1리, 서면 남서리와 울릉읍 지동리에서 고인돌이 새로이 확인되었고 현포 1리에서는 무문토기, 홍도편, 갈돌편과 갈돌 등이 발견되어 입석이 세워진 제단 유적은 이들과 같은 시기, 적어도 철기시대 전기에 축조된 것이라 추정된다.
한편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 및 철기시대 전기 문화의 계통을 논할때 빠뜨릴 수 없는 문화로 미누신스크 청동기 문화 중 안드로노보(B.C 1,700~1,200), 카라숙(B.C 1,200~700), 타가르(B.C 700~200) 문화기가 있는데 특히 카라숙 문화로부터 돌널무덤이 전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카라숙과 타가르 문화와 비슷한 문화적 양상들이 한국에서도 확인이 되지만 청동거울의 꼭지(紐) 수라든가, 칼의 형태, 거울의 무늬 등이 양자가 다르기 때문에 종래 생각해 오던 식으로 청동기-철기시대의 기원과 이들을 직접 관련짓는데 있어 고려의 여지를 두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처럼 우리 문화의 기원을 얘기하는데 있어 이제는 종래의 단선적인 의견보다는 보다 다양하고 복잡한 다원적인 견해가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제시대의 식민사관의 영향하에 제시되었던 금석병용기(Aneolithic, Chalcolithic Age)란 시대 개념 및 용어가 해방 이후 북한 학자들의 노력으로 폐기되고 이를 청동기시대로 대체한 지도 벌써 수십년이 흘렀으며 그 연대의 상한도 B.C 15세기경까지 올라가게 되었는데 이는 남한 청동기시대의 상한에도 적용할 수가 있게 되었다. 또한 최근 발굴된 서울 송파구 풍납동 토성으로 인해 종래 '三國史記' 초기 기록을 불신하는 입장에서 만들어져 별다른 비판없이 폭넓게 통용되어 오던 '原三國時代'란 용어가 점차 설득력을 잃어가고 대신 '철기시대 후기', '삼국시대 전기', '馬韓'이라는 용어가 학계의 지지를 얻고 있다.
이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삼국의 개시 연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입장이 점차 지지를 받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取信에 있어서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긴 지만 고고학 자료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신빙성을 점차 입증해주고 있으며 이는 긍정적인 역사관을 수립하는 데에도 기여한다고 할 수 있겠다.
상당히 보수적이라 할 수 있는 고고학계에서조차도 이제는 이전과 다른 學風(?)이 분다고 해야할까? 주인장이 고등학교때나 대학 초년생때 보던 고고학적 입장이 이제는 많이 바뀐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되기 때문에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은 이전보다 더 많이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이제 고고학적 근거를 토대로 문헌을 연구-해석할 수 있는 주체적인 연구환경이 조성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전까지는 고고학적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측 문헌, 특히 삼국지 위지동이전을 절대적인 Text로 삼아 역사를 해석했지만 이제는 우리측 실물자료를 토대로 우리가 주체적으로 역사를 해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이제는 보다 포괄적으로, 그리고 다원적으로 역사를 이해하려는 움직임도 상당히 많이 일어났다고 여겨진다. 이는 더 이상 우리 문화가 단선적이며 단일화된 것이 아니고 복잡하고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인 결과물이라는 것을 역사 복원을 통해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소리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런 학풍은 보다 세밀한 부분으로까지 확대되어야 할 것이며 그로 인해서 기존에 갖고 있던 단순화된 역사인식이 아닌 합리적인 역사인식이 이뤄져야만 한다고 주인장은 생각한다.
- 참고문헌 -
최몽룡, 김경택, 홍형우 편저, 2004,『동북아 청동기시대 문화 연구』, 도서출판 주류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