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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도 문명도 그 일상은 언제나 혼탁하다. 인간은 천사가 아니며 현실의 세계도 어떤 경우에도 천국은 아니다. 부족함을 안고 있는 한계의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세계는 그럴 수밖에 없다. 비유하자면 세상은 그 자체로 연옥(煉獄)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불행이 아니다. 천국은 이룰 수 없지만 지옥(地獄)은 아님에 다행이다. 역사는 때로 지옥이 현실로 도래하는 것을 통해 세상의 연옥 같음을 지키는 게 오히려 소중하다는 걸 보여준다.
이는 잦지는 않지만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문명이 붕괴될 때만이 아니라 진통의 고비에서도 종종 이런 일이 벌어지곤 했다. 근대(近代)세계 개막기 전후의 자코뱅의 공포정치는 대표적인 경우였다. 현대에도 그랬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의 참상만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 홀로코스트(Holocaust·유대인 대학살)가 있었다. 그냥 전쟁으로 인한 비극이 아니었다. 광기(狂氣)의 악행(惡行)이 빚은 지옥도였다. 아우슈비츠는 지상에 구현된 지옥 자체였다.
전쟁은 차라리 인류 역사가 결코 피하지 못한 연옥적 일상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은 불가피한 어떤 게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성의 붕괴이며 악마화였다. 그런데 나치만 그랬던 게 아니다. 악마적 사태는 또 있었다. 아니 먼저 있었다. 1932~1933년까지 당시 소련령이었던 우크라이나에서 홀로도모르(Holodomor·기아 학살)의 참상이 있었다. 스탈린에 의해 고의적으로 자행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가려졌다. 히틀러의 홀로코스트에 의해 가려진 것만이 아니었다. 좌익적 조류(潮流)의 유행이 진실을 가렸다.
장막 뒤의 지옥
▲ 1930년대 우크라이나의 대기근, 홀로도모르는 스탈린에 의해 고의적으로 자행된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은 사회주의 진영 전체에 철(鐵)의 장막(帳幕)을 둘러쳤다. 그런데 그것은 진실을 가리는 장막이기도 했다. 이른바 진보를 자처하는 ‘쓸모 있는 바보’ 지식인들이 그 장막의 자락 노릇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현대사는 그 장막 뒤에서 벌어진 또 다른 참상으로 얼룩져 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인한 대기근에 따른 아사(餓死)와 문화대혁명의 난동이 부른 학살이 있었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본받은 폴 포트에 의한 킬링필드라는 대학살도 있었다. 공산주의라는 좌익 전체주의 이데올로기가 빚어낸 것이었다.
한반도에서도 전개 양상은 다르지만 본질에서는 동일한 굴곡의 역사가 진행됐다. 해방공간 3년의 좌우 격돌의 진통을 겪은 뒤 한반도 남쪽에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됐다. 그런데 3년 뒤 북한을 앞세운 국제 공산 세력의 침공으로 6·25전쟁이 발발했다. 500만 명이 넘는 인명피해에, 1000만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유엔군 피해자도 15만 명이 넘고, 미군 전사자도 4만 명에 육박했다. 참혹했다.
이후 역사의 진행도 공산전체주의의 문제점을 강렬하게 보여주었다. 6·25전쟁 뒤 남쪽 대한민국은 폐허 위에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대한민국은 기적의 역사를 향해 나아갔다. 그런데 북한은 정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북한은 한동안은 남한을 앞서 있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사회주의권 국가가 다 그랬듯이 점차 몰락을 향해갔다. 단순한 몰락이 아니었다. 북한은 지옥이 되었다.
기아와 기적의 기원
북한은 소련을 위시한 모든 사회주의 국가가 그랬듯이 늘 ‘낙원’을 떠들었다. 그러나 그 낙원은 구호로만 존재할 뿐 현실의 북한은 기아(飢餓)의 지옥일 뿐이다. 계량경제학자인 차명수 전 영남대 교수의 《기아와 기적의 기원》(2014)은 그 실상을 신랄하게 포착한다.
조선 후기 18~19세기는 양반, 상놈 할 것 없이 생활 수준이 현저히 악화돼 있었다. 단적으로 사람들의 키가 이전보다 더 작아졌다. 그런데 북한 사람들의 키는 바로 그 조선 후기만큼 도로 작아졌다. 원인은 저서 제목대로 ‘기아’, 즉 굶주림 때문이다. 북한 주민의 키는 조선 후기 수준으로 퇴화(退化)한 결과 이제 아시아에서 제일 작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북한은 국명(國名)에 조선을 달고 있다.
반면 오늘날 한국인들의 평균 신장은 동아시아에선 최장신이다. 특히 신세대의 경우는 서구권 수준인 경우가 흔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잘 먹어서다. 그런데 개발 시대 한복판인 50년 전 유신(維新) 선포 무렵으로 돌아가면 잘 먹는다는 건 아직은 전혀 일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의 한국인들은 비만을 걱정하고 다이어트를 고민한다. 서구적 고민이다. 이 같은 변화는 그 저서 제목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적’이다. 일컬어 ‘한강의 기적’이라 한다.
북한의 김일성(金日成)은 시종 사회주의 낙원의 깃발을 흔들었지만 결국에는 기아의 지옥을 만들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세우고 일으킨 이승만(李承晩)·박정희(朴正熙) 두 지도자는 단 한 번도 그 같은 깃발을 흔들어댄 적이 없다. 허황한 약속이 아니라 노력을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 도중인 1952년 2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를 재건하기에도 다수의 우리의 희생과 우리의 쉬지 않는 노력으로 성취할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1963년 민정 이양을 위한 자신의 첫 대통령 선거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여건으로는 누가 집권해도 당장 잘살게 할 수 없다. … 내가 집권하면 여러분에게 근면과 내핍, 피땀 흘려 일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박정희는 그리고 내내 국민에게 이렇게 진솔하게 말했다. 군더더기 없이 “우리도 잘살아보자”고 했다. “어떻게?”라는 물음에 간명하게 답했다. “하면 된다”였다.
낙원의 약속에 지옥이 있다
이승만·박정희 누구도 낙원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본래 지상에 낙원은 없다. 개인이든 국가든 다 마찬가지다. 오직 가능한 것은 ‘좀 더 나음’이며 낙원을 만드는 게 아니라 지옥을 막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지옥은 언제나 낙원의 약속 속에 도사리고 있다.
대한민국과 북한의 갈림길에는 이미 이런 운명적 예비가 있었다. 이념적 선택이 바로 그것이다. 북한이 선택한 사회주의체제는 지옥으로 가는 예약이었고 대한민국이 선택한 자유민주체제는 그 자체가 번영을 가능케 하는 토양이었다.
낙원의 필연적 도래를 약속하는 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몰락으로 향한다. 인간을 길든 존재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민주체제는 토양을 제공할 뿐 필연적 낙원을 약속하지 않기에 오히려 번영을 가능케 한다. 인간을 자조(自助)의 존재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개인이든 국가든 번영의 열매는 소위 역사 법칙이 아니라 언제나 땀의 결과다. 저절로 필연적으로는 없다. 오직 노력과 분투에 의해서만 가능할 뿐이다. 어떤 일이든 시작에 주어진 처지는 언제나 열매 없는 빈 벌판과 같다. 난관과 어려움도 쉴 새 없이 닥쳐온다. 탓하고 좌절하면 아무것도 없다.
열매는 오직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는 자세를 가질 때만 가능하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8년 12월 15일 선포한 국민교육헌장의 한 대목이다. 박정희는 국민에게 그 같은 마음가짐을 호소하며 ‘감히 예감할 수 없었지만 모두가 열망했던 번영의 길’로 한국을 이끌었다.
“하면 된다”와 기업가 정신
▲ 이병철과 정주영. 이들의 기업가 정신이 오늘의 한국을 만들었다. / 조선DB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어렵다. 해야 할 일은 많은 경우 ‘불가능’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도 “안 된다”고 체념하며 돌아서곤 한다. 하지만 박정희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하면 된다”라고 했다.
불가능을 뚫고 위대한 성취를 이룩한 인물을 영웅이라 한다. 그리고 그런 시대를 ‘영웅시대’라 한다. 그렇다면 박정희 시대는 분명 영웅시대다. 한 시대에 딱 한 명 정도만 등장해도 한 국가를 먹여 살리는 데 부족함이 없을 만한 인물들이 경제 건설의 전장에 줄을 지어 등장했다. 삼성, 현대 등 이제는 세계적 반열에 오른 기업들을 일으킨 경제적 거인들이 그랬다.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노력하고 분투하는 정신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에 못지않게 어쩌면 그 이상으로 중요한 마음가짐이 공통적으로 있었다.
“남이 잘됨을 축복하라. 그 축복이 메아리처럼 나를 향해 돌아온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李秉喆) 회장의 말이다.
“사회 각 분야에서 열심히 훌륭하게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존경과 찬사를 보낼 수 있는 나라가 제대로 발전한다.”
현대를 일으킨 정주영(鄭周永) 회장의 말이다.
현은 다르지만 내용은 완전히 동일하다. 그들은 타인의 성취를 질시(疾視)하지 않고 존경했다. 이병철·정주영 등의 경제인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많은 어록이 있다. 하지만 이런 면모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사실 그들만이 아니라 건강한 기업가 정신은 본질적으로 그런 마음가짐에 바탕한다. 기업가 정신의 핵심에는 상인(商人) 정신이 있다. 이익의 추구를 약탈이 아니라 거래를 통해서 이루는 것이다. 그러려면 타인의 성취와 소유를 존중해야 한다.
이 같은 자세는 “하면 된다”는 정신과도 바로 통한다. “하면 된다”는 자세는 질시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앞서간 존재의 기왕의 성취를 인정하고 본받으려는 데서 나온다. 그 시절 “하면 된다”의 정신과 기업가 정신은 이렇게 하나가 돼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런 정신을 일깨운 박정희·이병철·정주영은 모두 11월의 인물들이다.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생이고, 정주영은 1915년 11월 25일생이다. 이병철은 1987년 11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국가도 ‘남 탓’에 빠지면 반드시 실패
사회주의는 이와 정반대로 말한다. 사회주의에 빠진 좌파 분자들은 언제나 “하면 된다”와는 반대로 “해도 안 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이유는 이른바 ‘구조적 모순’이다. 그들은 자본주의체제가 있는 한 아무리 노력해도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고 열을 올린다. 구조적 문제와 계급모순이 있는 한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남 탓’이다. 여기 빠지면 ‘내 탓’이라는 마음은 자리가 없어진다. 자기 책임이라는 자조(自助)의 정신이 사라진다.
개인도 그렇지만 국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남 탓’의 논리에 빠지면 반드시 실패한다. 제3세계론·종속이론 등이 다 이런 경우였다. 저(低)개발과 저발전이 제국주의의 신(新)식민지적 수탈 때문이라 했다. 그런 원망의 이데올로기에 빠진 나라치고 그 처지에서 벗어난 경우는 단 하나도 없었다. 정반대로 원망을 접어두고 어떻든 앞선 나라를 본받아보려 노력한 나라들만이 저개발에서 벗어났다. 한국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한일국교 정상화는 단적인 본보기다.
‘남 탓’은 ‘타인의 성취를 존경’하는 자세와는 완전히 대극(對極)이다. 타인의 성취를 인정하지 않고 부당하게 보게 되면 자신도 노력하여 성취하겠다는 “하면 된다”는 정신은 절대로 형성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발전을 위한 정신적 동력은 있을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정반대의 마음이 발동하게 된다. 뺏으려는 마음이다. 사회주의는 그 같은 심리의 논리다. 이제는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분배(分配)라는 개념도 뿌리에는 그런 좌익논리가 있다. 부(富)는 부당한 것이니 나누는 게 정의라는 논리다. 점잖게 표현해 분배지 달리 표현하면 “뺏으면 된다”는 발상이다. 그것을 급진화시키면 사회주의 혁명의 논리가 된다.
그러나 ‘남 탓’에다 “뺏으면 된다”는 정신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겠는가. 그런 식으로는 낙원은커녕 ‘보다 나음’조차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에 빠져들게 되면 이성과 양식의 눈이 멀기 일쑤다. 달아오른 마음으로 그 혁명적 감성을 찬송(讚頌)하게 된다. 한 국가 안에서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러시아혁명 이후 사회주의가 세계적 유행을 타면서 세계 도처에서 그런 붉은 찬송이 기세 높게 울렸다. 마르크스와 레닌을 뒤따르려는 행렬이 줄을 이었다. 안으로는 자본가 타도 밖으로는 제국주의 타도를 외쳤다. 그러나 그 모든 혁명 소동은 참극을 야기했으며 그 나라들을 몰락의 구렁텅이로 몰고 갔다. 김일성의 북한도 그랬다.
박정희 시대 한국의 좌파적 반대파들
▲ 2021년 8월 25일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서울 종로구 경실련 회관에서 열린 ‘재벌·대기업들의 실거래 실태와 보유세 추정결과 공동기자회견’에서 기업 소유 부동산에 대한 중과세를 요구했다. / 조선DB
그런데 한국에서도 그 같은 조류가 끈질기게 발호했다. 6·25전쟁을 겪으며 일단 숨을 죽이게는 되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다시 좌익적 조류가 스멀스멀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4·19 직후의 혼란기가 그랬다. 박정희의 5·16이 그것을 제압했지만 독초(毒草)는 또 자라났다. 포장은 바뀌었다. 하지만 본질은 동일했다. 어떤 점에서 이것은 인간이, 특히 지식분자들이 결코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는 영원한 병리일지도 모른다.
박정희 시대의 야당도 그렇게 물들어갔다. 당시 유행하던 종속이론의 영향이 침투했다. 정상배(政商輩) 무리와 순박한 민주인사들이 뒤엉켰다. 논리와 식견은 얄팍하지만 정의감은 불타는 지식인·학생들이 대오를 이루어 열을 올렸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 뒤에는 광기의 신념으로 무장한 확신범적 좌익분자와 북한의 책동도 있었다. 그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민주를 외치고 사회정의를 외쳤다.
그들은 박정희의 경제 정책에 대해 사사건건 “안 된다, 안 된다”를 끊임없이 외쳐댔다. 수출입국은 말짱 헛된 것이고 내수(內需) 위주의 내포적(內包的) 공업화를 해야 한다고 떠들었다. 고속도로도 공업단지도 필요 없다고 외쳤다. 고군분투하는 선두 기업들을 매판(買辦) 자본이라 공격하고 독점(獨占) 재벌이라 몰아붙였다. 그러면서 농업과 중소기업 위주의 정책을 펴야 한다고 외쳤다. 그런데 그들이 욕하는 그 매판 재벌이라는 게 당시의 선진국 수준에 비춰보면 그야말로 아직 중소기업이었다.
박정희 시대 내내 그랬다. 가히 영웅시대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던 그 개발 시대는 한편으로는 이 같은 몰지각을 상대해야 했던 고단함의 시대이기도 했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박정희 시대의 성취는 이 같은 불순함과 무지몽매의 덩어리를 다스려가며 이룬 것이었다.
‘민주-진보’가 ‘정상배-부패집단’이 되었다
▲ 2017년 2월 15일 오전 더불어민주당 대선주자인 이재명 성남시장이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기본소득 토론회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 조선DB
번영은 이뤄지고 이제 다른 시대가 왔다. 그러자 한편으로는 여전한 가운데 또 한편으로는 다른 양상이 나타났다. 과거 개발 시대의 반대 세력들은 좌익적 부류와 무분별한 이들이 뒤섞여 있었지만 순박하기는 했다. 좌익적 무리도 불순하기는 했지만 나름대로는 신념형의 부류였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더 이상 그런 유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좌파적 사고(思考)에 대한 집착은 여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냥 속물(俗物)의 정상배였다.
지난 대선 당시 이재명(李在明) 후보의 경우부터가 그랬다. 그런 인물을 후보로 내세웠다는 것 자체가 상식 밖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이상 가는 문재인(文在寅) 정권 시절의 난행(亂行)이 연일 드러나고 있다. 정치적 이적(利敵) 행위만이 아니라 후안무치한 부정부패의 행각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문 정권이 대표적 국정과제의 하나로 앞세웠던 탈(脫)원전은 세계적 수준에 있던 한국의 원자력산업을 망가뜨리고 국민의 전기요금 부담을 가중시킨 대표적인 악정(惡政)이었다. 그런데 문 정권 패거리는 그런 악정의 이면에서 온갖 이권(利權)을 챙겼다. 태양광 발전을 비롯한 신재생에너지 사업 전체가 ‘비리(非理)의 복마전(伏魔殿)’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태양광사업은 전력(電力)사업에는 아무런 기여도 없으면서 도처의 엄청난 규모의 산림을 망가뜨렸다. 그러면서도 문 정권 패거리는 그 사업에 개입해 돈을 빼먹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새만금 해상풍력사업권 일부가 중국기업에 매각되었다. 그 자체도 개탄스럽지만 그 과정에 문 정권의 해상풍력사업에서 중요한 일을 맡았던 자가 개입해 있었다. 그 일가가 엄청난 규모의 이권을 챙겼음이 드러났다.
문 정권의 운동권 패거리는 민주를 앞세웠다. 그리고 진보를 내세웠다. 언젠가부터는 좌익적 기치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민주-진보’를 앞세웠던 자들이 부패집단이 되었다.
‘남 탓’이 부르는 타락
타락이다. 그러나 그냥 타락이 아니다. 좌익적 정신자세에서 비롯된 예정된 결과다. ‘남 탓’에 빠져 ‘내 탓’이 사라지면 자조만이 아니라 윤리도 사라진다. 그럼에도 정의(正義)로운 척 행세를 하기는 해야 한다. 위선(僞善)이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위선으로 남을 속이기 위해 자신부터 속인다. 위선을 위선으로 느끼지도 않게 된다. 사악함이 자라난다.
이것은 좌익 이데올로기가 판치기 시작한 이래 세계 모든 곳의 좌익의 역사에서 나타난 보편적 현상이었다. 차이라면 심하거나 약한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좌익운동권 출신들도 그렇게 예정된 타락의 길을 밟아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문 정권 세력의 중추를 구성했으며 지금도 그 정치 세력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그들 세력에는 또 하나의 탈선도 겹쳐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범죄집단의 문제다. 저들 패거리의 도처에 조폭집단이라는 범죄집단이 어른거리고 있음이 포착되고 있다. 한때는 멀쩡했던 중견기업이 조폭 출신에게 인수되었음도 드러났다. 그 범죄 패거리들이 저들 정치 세력과 ‘더불어’ 가고 있었음이 계속 확인되고 있다. 이것뿐일까? 드러난 것은 언제나 빙산(氷山)의 일각이다.
惡이 정치적 위세를 부릴 때
개탄을 넘어 경악이다. 그런데 ‘남 탓’은 범죄적 심리와도 멀리 있지 않다. 범죄적 심리 자체가 본질적으로 ‘남 탓’의 심리다. 경계가 무뎌진다. 그리하여 드디어 ‘더불어’ 가던 그 모든 게 차곡차곡 하나로 겹쳐진다. 지금 저들 패거리는 그렇게 치닫고 있다. 단순한 정치적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악(惡)의 발호다.
선악(善惡)은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악을 용납해도 좋다는 것일 수는 없다. 인간은 한계를 안고 있지만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올바름을 추구해나가야 한다. 대개의 사람은 그것을 안다. 굳이 무슨 철학자쯤 되는 존재가 아니라도 나름대로 세상과 자신을 헤아리며 나쁘지 않게 살아가고자 한다. 지탱되는 사회, 지속되는 문명은 그런 가치관이 살아 있음으로 해서 유지되고 이어진다. 선악 분별이 포기되면 그 모든 것은 다 무너진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마침내 악적(惡的) 타락으로까지 치달은 자들의 도발을 마주하고 있다. 이들이 정치적 위세에 더해 선동까지 일삼고 있다. 그 선동이 이기게 되면 무엇이 오게 되는지는 동서 세계의 역사가 그리고 우리의 역사가 이미 다 보여주었다. 비상한 상황이 다가오고 있다.⊙
이강호 /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월간조선 2022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