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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1. 23
영국의 위대한 3대 수출품이 ‘영어’ ‘비틀스’ ‘대헌장’이라고 한다. 대헌장은 라틴어로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라고 하며, 여기에서 인권·자유·평등 같은 민주주의의 기초이념과 사법제도, 대의정치 같은 현대인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모든 것이 나왔다고 영국인은 평가한다. 1215년 러니미드라는 목초지에서 탄생했으니 올해가 대헌장 800주년이다. 러니미드는 영국 여왕의 주말 거처인 윈저성과 런던의 관문인 히드로공항 중간에 있다.
영국 민화에 기초한 ‘로빈 후드’ 이야기가 대헌장과 직접적 관련이 있다면 조금 흥미가 더 생길지 모르겠다. 러니미드 목초지에서 귀족들의 위협에 못 이겨 대헌장에 날인한 존 왕(재위 1199~1216)은 영국 왕 중에서 가장 인기가 없었다. 존 왕은 로빈 후드 이야기에서는 형의 왕위를 탐내는 동생으로 나오는데, 로빈 후드 일당들에게 언제나 골탕을 먹는다. 존의 형인 사자왕 리처드 1세(재위 1189~1199)는 위험에 빠진 선량한 농민을 구하기 위해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는 영웅으로 나온다. 영국 역사에서 존 왕은 악인이고 바보스럽고 탐욕으로 가득 찬 인간으로 나온다. 그래서인지 그 이후 영국 왕 32명의 이름에는 존이 나타나지 않는다.
▲ 1215년 라틴어로 양피지에 쓰인 마그나 카르타. 2007년 소더비 경매에서 2130만달러에 낙찰됐다. / ⓒ AP
대헌장과 로빈 후드 이야기가 연관이 있음은 흥미롭다. 로빈 후드의 식구들이나 서민들은 노팅엄의 셔우드숲에서 살아간다. 산림관리인이 나타나 이들을 괴롭히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존 왕은 재위 기간 동안 귀족들과 상의하지 않고 왕의 삼림을 대폭 늘린다. 셔우드숲이 그중 하나다. 당시 영국법상 왕의 산림이나 귀족 소유의 숲은 주인의 허락 없이는 들어갈 수 없었다.
당시 일반인은 숲에 의존해 살아갔는데 존 왕에 의해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로빈 후드가 서민을 보호하고 왕과 귀족들을 골탕 먹이는 의적(義敵) 캐릭터로 등장해 인기가 높다. 과거에는 이런 식의 왕과 귀족 소유의 숲이 영국 전체에 산재해 있었다.
한인타운 킹스턴 근처의 리치먼드공원에는 공원경찰이 따로 있다. 이 공원 안에서 사건이 발생하면 보통 경찰과 왕실경찰 격인 공원경찰이 같이 개입한다. 리치먼드공원이 형식상으로는 왕실 소유이기 때문이다. 윔블던 테니스대회가 열리는 윔블던 마을의 언덕 위에는 윔블던 커먼이라는 공원이 있다. 영국에서는 공원지역을 이렇게 파크(park)와 커먼(common)으로 가른다. 파크는 주인이 있고 담장이 있으며 개폐시간이 있는 반면, 커먼은 그 세 가지가 모두 없다. 그래서 커먼을 공유지라는 뜻의 커먼이라고 부른다.
대헌장 이전, 많은 영국 왕은 신과 법 위에 있었다. 궁지에 몰린 존 왕을 신과 법 밑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 귀족들은 대헌장을 들이밀어 항복을 받아냈다. 존 왕이 대헌장에 동의하는 순간은 그 두 가지가 이루어지는 듯했다. 존 왕은 날인을 하고 나서 측근들만 남게 되자 나뭇가지를 씹으면서 자신 위에 25명의 왕이 생겼다며 분노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바로 로마 이노센트 3세 교황에게 칙사를 보내 무효를 간청한다. 교황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제로 동의했다는 존 왕의 말을 믿고 일단 대헌장을 파기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 마그나카르타에 서명하는 영국 존 왕의 모습. /게티이미지코리아
그리고는 제대로 내용을 파악한 뒤 러니미드 대헌장 협상 장소에 있었던 40명의 영국 귀족을 파문하고 자신이 임명한 스티븐 랭턴 캔터베리 대주교도 직무정지를 시켰다. 존 왕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대헌장의 정신인 왕을 신과 법 밑에 두고자 하는 의도는 이렇게 해서 실현되지 않았다. 그 이후에는 왕과 교회와 의회의 역학관계에 따라 두 개 다 밑에 가기도 했다가 하나 위, 하나 아래로 가기도 하는 등 양자의 권력관계는 부침을 겪었다.
그러나 왕이 신과 법 두 개 다보다 위에 가려고 할 때는 항상 말썽이 생겼다. 여기에 세금 문제까지 더해지면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왕권신수설을 믿고 의회를 무시한 채 세금을 올리려다가 올리버 크롬웰의 혁명이 일어나 목이 잘린 찰스 1세(재위 1625~1649)가 대표적인 경우다. 미국 독립의 불씨가 된 보스턴 차 사건도 결국 차에 붙는 세금을 무리하게 올리려다 일어났다.
영국인은 돈에 관련된 일이라면 자유니 대의니 하는 것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영국에서 혁명이나 큰 사건과 관련해서 그 동기를 찬찬히 살펴보면 거의가 돈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면 틀림없다. 헨리 8세(재위 1509~1547)의 종교개혁도 이혼을 위함이라고는 하지만 돈 문제가 걸려 있었다. 헨리 8세는 당시 영국의 국부(國富)를 삼분하던 왕과 귀족과 교회 중에서 제일 만만한 교회를 이혼을 핑계로 탄압하고 교회 재산을 몰수했다. 자신이 반을 갖고 나머지 반을 귀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장물 배분이다. 교회와 수도원 땅과 재산 분배를 받은 영국 귀족들은 그 이후 가톨릭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자다가 깰 정도로 과민하게 반응하면서 가톨릭교회의 부흥을 목숨을 걸고 막았다. 그리고 가톨릭 신자는 영국 왕이 될 수 없다는 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최근 유럽인권법에 어긋난다 해서 폐기하기 전까지 영국에서 가장 주요한 법 중의 하나였다.
명예혁명이라고 부르는 사건도 가톨릭교도인 제임스 2세(재위 1685~1688)를 귀족들이 폐위시키고, 네덜란드 오렌지 공에게 시집 가 있던 신교도인 메리를 여왕(재위 1688~1694)으로 내세운 것이다. 이 폐위사건이 무혈혁명이었다고 해서 딸이 아버지를 몰아낸 불효혁명임에도 ‘명예혁명’이란 이름이 붙었다. 귀족들은 이때 자신들에게 정치적 부채를 갖고 있는 메리 여왕에게 대헌장을 재빨리 들이밀어 여왕이 승인, 선포하게 만들었다. 이때 대헌장은 귀족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일부 문구를 손본 것이다.
존 왕이 대헌장에 날인한 밀랍 인주가 굳기도 전에 합의를 어겨버린 뒤 근대 의회제도가 생기기 전까지 왕과 의회의 싸움은 계속 이어졌다. 왕이 인정을 하건 안 하건 대헌장은 영국의회가 왕과 싸울 때 가장 큰 무기였다. 존 왕 이후 역대 왕들에 의해서 44번이나 대헌장은 확인되었고 다시 선언되었다.
왕들은 자신들이 뭔가 의회에 대해 원하는 것이 있으면 대헌장을 다시 확인하고 선언해 주었다. 조지 왕조 시대(1714~1830)의 거의 100년간 대헌장은 불온문서였다. 예를 들면 1762년 아서 베드모어라는 언론인은 아들에게 대헌장을 가르치다가 체포돼 세상의 영웅이 되었다.
대헌장을 승인하라고 존 왕에게 대들던 당시 귀족들이 오늘날 대헌장이 이렇게 대단하고 근사한 대접을 받는 것을 보면 황당해하면서 기절할지도 모른다. 대헌장은 귀족들과 일부 런던 중소상인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지금은 세계 인권과 자유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는 하지만 당초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다. 일종의 평화협정문서였다.
대헌장은 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존 왕의 항복문서다. 사자왕이라고 불리던 용맹스러운 형과는 달리 결지왕(缺地) 혹은 실지왕(失地王)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불리던 존 왕이 프랑스 내의 실지를 되찾으려는 욕심 때문에 벌인 전쟁의 전비조달 때문에 증세를 위해 대헌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앞서서 몇 번을 무리해서 증세를 했는데 전쟁에서 연패하는 바람에 귀족들과 시민들이 힘들어 했다. 그러다가 1215년 패전 배상금(4만파운드·372억원)을 물어주게 되자 시민과 귀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귀족들만 반란을 일으켰으면 몰라도 런던 시민까지 가세하자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보고 존 왕이 항복문서에 동의를 했다. 일단 동의를 한 뒤 바로 로마 교황 이노센트 3세의 동조를 얻어 폐기시켰고 다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존 왕은 식중독으로 숨진다.
대헌장이 세계적으로 인권에 관한 최초의 문서라고 하는 이유는 대헌장의 정신에 근거해서 현재의 사법제도나 민주절차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전체 63조에 달하는 대헌장의 조항 대다수는 귀족들의 재산, 유산, 토지, 채무 처리 같은 실질적인 문제에 관한 것이다. 제1조가 영국 교회의 자유에 대한 것이다. 주교가 기안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다음은 제2~8조 봉건영주들의 상속·결혼 등의 규정, 제9조 채무자의 권리, 제10~11조 유대인 대금업자의 채무 관련 규정, 제12조 세금의 부과는 납세자의 동의를 전제, 제13조 런던과 지방의 자유 등 현재에는 크게 가치가 없는 사항들이다. 그중 제54조는 자신의 남편 살인 건 말고는 여자의 증언에 의해 남자가 체포되거나 구금될 수 없다는 조항인데, 어떤 이유로 역사적인 문서에 삽입되었는지 궁금하다.
대헌장 중 가장 의의가 있다고 하는 건, 적법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명시한 제39조와 제40조의 정신이다. 대헌장의 역사적 가치를 폄하하는 사람들도 이 두 조항이 가지는 뜻에는 동의한다. 이를 좀더 확대 해석하면 ‘왕까지 포함해 누구든 초법적인 존재는 없다’와 ‘정의의 지연은 정의의 부정이다’이다. 그리고 제21조의 ‘같은 계급에 의해서만 처벌될 수 있다’는 현대 배심원 제도의 기초가 되었다.
▲ ‘마그나 카르타’를 승인한 존 왕./ ⓒ 위키피디아
또 제61조의 ‘25명의 귀족이 왕이 대헌장을 지키는지를 지켜보겠다’는 조항이 대의정치의 기초를 만들었다는 해석이다. 결국 ‘귀족 특혜 보장’과 ‘왕의 권한 축소’를 위해 제정된 대헌장 조항들이 현대에 들어와 원용되어 현재의 인권을 위시한 사법제도와 대의정치를 통한 민주주의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영국 역사학자 사이먼 샤마는 “대헌장은 자유의 출생증명서가 아니라 전제정치의 사망증명서”라는 멋진 말을 남겼다.
대헌장은 양피지에 깃털 펜과 잉크로 작성되었다. 원본에는 조항별로 번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참석 귀족들이 사전에 모여서 합의 사항을 적은 것이 아니라 귀족들의 요청 사항을 그냥 순서 없이 늘어놓았다. 라틴어로 쓴 데다, 옛날 펜글씨로 제대로 된 띄어쓰기도 없이 다닥다닥 붙여 써서 자세히 살펴봐도 일반인은 요령부득이다.
40명의 봉건영주 귀족들이 참석해서 왕의 거처인 윈저성과 반군들의 주둔지 스테인즈 중간의 러니미드라는 목초지에서 10일간 협상한 뒤에 랭턴 캔터베리 대주교가 작성해서 왕이 날인했다. 41장을 만들어 참석 귀족 40명이 하나씩 나누어 갖고 왕도 하나 가졌는데 현재 4장만 남아 있다.
처음에는 대헌장이라고 부르지 않고 ‘봉건영주들의 조항(The Articles of the Barons)’이라고 불렸다. 1215년 제정되었다가 바로 폐기되었고 1217년 런던의 템스강 건너 캔터베리 대주교(영국국교의 수장)의 런던 숙소인 램버스궁(주교의 숙소는 궁이라 부른다)에서 존 왕의 아들 헨리 3세 왕이 다시 날인하고 나서야 이를 대헌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297년 의회에서 통과된 뒤 법으로 제정되었다. 13세기와 17세기에 원본과 동일한 모양의 사본을 만들었는데 17개가 살아남아 그중 15개가 영국에 있고 오스트레일리아에 1개, 미국 상원에 1개가 보관되어 있다.
대헌장과 미국과의 관계는 정말 각별하다. 2014년 링컨 대성당의 대헌장 원본이 미국에서 전시되었을 때 미국인들은 록스타를 맞듯이 대헌장을 대했다. 미국인의 대헌장 사랑은 미국의 건국 과정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면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지배계층의 박해를 피해 1620년 종교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잉글랜드 서남부 플리머스항구를 떠날 때를 생각해보자.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라 불리는 미국의 선조들은 당시 ‘가슴에 대헌장을 안고’ 갔다.
1687년 필라델피아에서 대헌장이 인쇄되어 배포되기 시작했다. 89년이 지난 1776년 독립선언을 했고, 2년 뒤 겨우 독립을 쟁취했다. 이런 모든 역사적인 사실 뒤에 대헌장이 있다고 미국인은 믿는다. 그래서 미국인들의 대헌장 사랑은 거의 종교적이라고 할 만하다는 비아냥거림을 듣는다.
따지고 보면 관습법이나 그전의 어떤 판례도 없이 시작한 미국은 대헌장을 국가 수립부터 지금까지 모든 법적 행위에 대한 근거로 삼았으니 그렇게 숭앙을 할 수밖에 없다고 이해된다. 미국에서는 기본적으로 법적 논쟁에 부딪히면 항상 대헌장을 보자고 한다. 거기에서 자신의 이론에 맞는 근거를 찾으면 무조건 논쟁에서 이긴다. ‘미국인에게는 성경보다 대헌장이 더 중요하다’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이에 비하면 영국인들의 대헌장에 대한 관심은 놀랄 정도로 소홀하다. 오죽했으면 미국 최고의 대담 프로그램 사회자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 나온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마그나 카르타’의 영어 단어가 뭐냐는 질문에 대답을 못해서 세계적 망신을 당했다. 레터맨은 설마 현직 총리이자 세계 최고의 대학 옥스퍼드에서 그것도 PPE(철학·정치·경제 복합전공)를 공부한 캐머런이 ‘마그나 카르타’가 영어로 ‘Great Charter’라는 사실을 모를 거라 생각하고 질문을 던진 것은 아니다. 대헌장 800주년을 즈음해서 당시 미국 투어 중이던 링컨 대성당 원본 얘기를 하면서 미국인들에게 대헌장 소개를 하려고 한 순수한 동기였는데 캐머런이 딱 걸려 버린 것이다.
대헌장의 장소를 찾아 러니미드를 찾은 사람들은 실망한다. 아무것도 없다. 필자도 그중 한 명이다. 30년 전 영국에 왔을 때의 일이다. 마침 다니던 회사와 얼마 되지도 않고 해서 점심시간에 찾아가 보고 놀랐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벌어졌던 현장에는 기념관도 없고 심지어는 관리사무소도 없었다.
▲ 마그나카르타 메모리얼= 미국변호사협회 ABA 가 만든 원형 기념비
기념품이나 안내서 같은 것을 파는 방문객 안내소도 없었다. 미국 변호사협회가 세워 놓은 조그만 정자 같은 기념물이 하나 서 있을 뿐이다. 정말 장사에는 귀재들이라는 영국인이 이런 장소에 기념관도 짓고 자료 전시하면서 안내문도 배치하고 입장료도 받고 기념품이나 팔면 상당한 수입이 될 터인데 놓치는 것을 보고 참 이상하다고 여겼다.
미국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남의 나라에 기념물을 세워 주었을까? 그런데 거기에 새겨진 기념판의 내용이 참 가관이다. 대헌장의 의의를 기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관련이 있는 사항만 있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 이민선조들이 대헌장 사본을 안고 간 점, 미국 출신 낸시 아스토가 여성 참정권 운동에 대헌장을 이용한 점,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에 대헌장 정신을 이용한 점, 체면치레로 영국인 윌리엄 윌버포스의 노예해방 기여에 대해 잠깐 언급한 정도인데 남의 집에 와서 자기네 자랑을 잔뜩 늘어놓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대헌장 기념물 옆 언덕 위에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어서 미국인에게는 러니미드가 특별한 장소다. 올해에도 미국 변호사협회가 대헌장 서명일에 대거로 성지순례 오듯 온다고 뉴스에 나왔다.
영국은 대헌장 선포 700주년이던 1915년은 1차 대전 중이라 경황이 없어 조용했다손 치더라도 750주년인 1965년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고 지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800주년이라 조금 움직임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가시적인 일은 없다. 6월 15일을 ‘마그나 카르타 데이’로 지정해 임시 공휴일로 하자는 청원이 의회에 올라가 있고 영국도서관에 남아 있는 원본 4장을 모두 모아 2월 3일부터 3일간 전시하는 정도다. 그것도 사전에 추첨된 2015명만 입장할 수 있다.
평소에 영국도서관에 2장, 링컨 대성당에 1장, 솔즈베리 대성당에 1장씩 보관되어 있어 관람할 수 있으나 이렇게 한꺼번에 모두 모아서 한 장소에서 전시하는 것은 처음이다. 마그나 카르타 기념협회가 추진하고 있던 러니미드 방문객 안내소는 예산 확보를 못해 800주년 행사가 끝나도 세워지기가 어렵다. 더 화급한 역사적 건축물이나 의의가 더 깊은 행사 지원 때문에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거기다가 직접 러니미드를 관리하는 지역 군과 서리주는 현재 자신들의 예산은 복지·병원·학교 같은 곳에 사용해야 한다고 발뺌을 했다. 대헌장은 이렇게 고향에서는 정작 설움을 받고 있다. 오죽하면 BBC 기자가 “혹시 내셔널 트러스트가 그런 것을 세우면 교통량이 많아질까 봐 일부러 안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농담 같은 말을 했을까?
2015년 1월 초, 대헌장 800주년 2파운드짜리 기념주화가 나왔는데 큰 실수가 발견되었다. 존 왕이 깃털 펜을 들고 대헌장에 서명을 하고 있는 모습이 틀리게 묘사되어 있었다. 존 왕은 펜으로 서명을 한 것이 아니고 왕의 국새로 밀랍인주에 도장을 찍었다. 과거 1000년간 왕을 위해 주화를 만든 로열 민트는 주화에 있는 존 왕의 모습은 그냥 상징적인 의미지 실제를 그린 것은 아니라고 이해하면 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그동안 존 왕이 대헌장에 서명하는 모습의 각종 그림들은 이런 무심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흥분한다.
권석하 / 재영칼럼니스트·‘영국인 재발견’ 저자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