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절사에 닿으니 늙은 세월이 날 반겨주네
유진택추천 0조회 023.06.05 18:00댓글 0북마크기능 더보기
게시글 본문내용
구절사는 이제 내 마음의 절로 자리를 잡았다. 봄, 가을에 아내와 동행하여 찾아간 구절사의 풍광이 늘 아련함을 자아낸 탓이었다. 구절사란 이름에서 풍기는 소슬함과 절을 찾아가는 도중에 펼쳐지는 산길의 풍광은 삶의 피로에 찌든 중생의 발걸음을 묶어두기에 충분했다.
햇살은 초여름처럼 따갑고 산자락을 물들였던 봄꽃들은 분주히 씨앗만을 날린다. 혼자 산길을 타고 가는 나그네의 적적한 심사를 알았을까. 숲속에 숨어 우렁차게 날개를 터는 꿩의 울음소리에 마음이 녹아났다. 봄볕에 취한 꿩의 울음소리를 바닥에 깔고 구불구불 풀어지는 산길을 따라 한참 만에 도착한 곳이 산중턱의 쉼터다. 쉼터에는 산객들 몇 명이 오붓이 둘러앉아 막걸리 잔을 앞에 놓고 산행의 피로를 풀고 있었다. 가끔씩 막걸리 파는 젊은 사내의 예절바른 인사도 간간히 들려왔다. 비록 상술에서 나오는 예절이지만 들을수록 낯선 것은 웬일일까.
부드럽게 휘어진 다리 모양이 미학적인 느낌이 든다
독수리봉 정상의 소나무와 벤치의 아름다운 조화, 2009년의 화재로 소나무가 불에 탄 흔적이 보인다
둑수리봉에서 굽어보면 옥천군 군서면 상중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위자락에 걸터앉아 간단한 요기를 하고 독수리봉에 오른 시간은 12시경, 앞이 확 트인 공간이 눈앞을 압도한다. 이곳에도 잡상인들이 올라와 막걸리를 팔고 있다. 막걸리에 취한 산객들의 웃음소리가 허공을 가득 채운다. 아무리 음주행위가 자유라고 하지만 불시에 닥칠지도 모를 산악 사고를 위해서는 자제해야 할 일이다. 요즘 음주에 의한 산악 사고가 빈번히 발생한다는 뉴스를 접하고 보면 더욱 그렇다.
독수리봉 아래 손에 잡힐 듯 옥천군 군서면 상중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집들이 쏟아지는 햇살에 눈부시다. 비닐하우스 단지와 실핏줄처럼 산속으로 풀어지는 들길과 산길들이 어머니 품속처럼 아늑한 향수를 자아낸다. 한참을 넋 놓고 있다가 천길 벼랑에 서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흠칫 놀란다. 깎아지른 듯한 천길 단애엔 몇 개의 소나무들이 위험스레 발을 걸치고 있다. 생존경쟁이 따로 없다. 어쩌면 우리도 저들과 같은 존재일지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생존을 위해 위험스레 삶의 길을 걷는 사람들, 잘못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고집스레 그 길을 걸어가고 있지 않는가.
때이르게 만개한 싸리꽃, 홍자빛으로 타오르는 꽃이 눈부시다
산길 3거리엔 구절사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서있다
산길에 세워진 구절사 일주문
그러나 자세히 보니 소나무는 뭔가 이상하다. 솔잎 하나 붙어 있지 않는 나뭇가지들이 거뭇거뭇 탄 채로 변해있다. 2009년 발생했던 화재 사고의 여파가 아직까지 고스란히 남아있다. 식장산에 화재가 났다는 방송은 아직까지 뇌리 속에 선명하게 박혀있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구절사는 부처님의 공덕으로 화를 면했다는 소문도 한몫했다.
가파른 벼랑을 끼고 한참을 돌아가면 곧장 구절사에 닿는다. 드문드문 나타나는 솔숲의 대열도 화재 현장의 연속이다. 밑동에서부터 나뭇가지 전체가 불에 그슬려 그날의 참상을 보여준다. 독수리봉을 타고 오른 산길은 옥천과 대전의 경계 지점인 마달령 능선을 부드럽게 향해 뻗는다. 안내판이 꽂혀있는 삼거리의 흙길에는 구절사란 안내 간판이 조그맣게 붙어있다. 목탁소리에 묻어나는 청아한 반야심경이 마음을 씻어준다. 산길을 휘돌 때마다 반야심경이 커졌다 작아졌다 여운을 남긴다.
구절사의 풍경이 중생의 마음을 씻어주는구나
문득 지붕에 기와를 얹은 일주문이 나그네를 맞는다. 대부분의 절은 주변에 담장을 쌓고 절의 이름을 새긴 커다란 현판을 일주문위에 내 걸지만 구절사는 소박한 절답게 산길에 일주문을 세웠다. 물론 주변이 숲에 묻힌 산비탈이라 담장을 쌓을만한 지형이 아니라 단순한 형태로 세운 듯하다.
천길 벼랑 아래 둥지를 틀고 있는 구절사의 풍경
바위 사이에서 활짝 꽃을 피운 돈나물
불두화를 배경으로 대웅전과 요사채가 보인다
일주문은 불가에서는 아주 특별한 의미로 쓰였다. 세속과 불계의 경계 지점을 표시하기도 하고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다” 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요즘 사람들이 절을 찾아 마음을 다스리고 오는 것도 그런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일주문을 벗어나자 구절사가 눈앞을 압도한다. 천길 벼랑 아래 둥지를 튼 구절사의 풍경은 그림이 따로 없다. 요사채와 대웅전 위에는 산신각과 칠성각이 미끄러질 듯 바위틈에 걸쳐있고 위험스레 바윗길을 타고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행렬이 보인다.
구절사는 조선 태조 2년(1393년)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무학대사가 이 부근을 지나다가 영축봉 아래 거북바위를 보고 성현이 나올만한 형세 같다고 해서 절을 세웠는데 처음에는 영구암이라고 불렀다. 그 후에 구절사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구절사의 연혁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일제 강점기 때 반포된 사찰령에도 절 이름이 없을 정도로 구절사의 연혁은 베일에 가려있다.
산길을 타고 내려와 텃밭 옆 문 하나를 또 지난다. 양편에 막대기를 세우고 그 사이에 막대기를 얹은 문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세월에 절어 낡고 오래된 문은 슬쩍만 건드려도 풀썩 쓰러질듯하다. 이것도 혹시 일주문처럼 보여 한참을 쳐다보다 텃밭에 눈길을 돌린다. 손바닥만 텃밭에는 보랏빛으로 물든 감자꽃이 고랑을 뒤덮고 있다. 산자락에는 장단지들이 햇살에 반질반질 빛나고 있다. 마치 부화를 기다리는 알처럼 단꿈에 젖어있다. 노랗게 꽃을 피운 기린초와 돈나물도 장단지와 어울려 정겨움을 자아낸다.
대웅전 마당에는 일제히 몰려온 검은 나비떼들이 수없이 팔랑거린다. 한가롭게 피어잇는 꽃들을 누비며 늦은 봄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가끔 마당가에 묵인 개가 우렁차게 절을 울리고 숲 속에 숨어 나무둥치를 쪼아대는 딱따구리 소리가 반야심경에 묻혔다 간다. 잠시 평상 위에 앉아 벼랑을 올려다본다. 아찔한 벼랑에 둥지를 튼 칠성각과 산신각을 오르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 때 작달막한 주지스님이 요사채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왔다. 심심했던지 사람들 곁에 오더니 우스갯소리를 풀어놓는다.
대웅전 처마에 매딜린 풍경, 바람이 자고 있어 은은한 풍경소리를 들을 수 없다
매발톱꽃
“사람들이 와서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혼자 살면 심심하지 않느냐는 거지, 심심해도 어쩌, 심심하다고 딴 짓이나 하면 되겠어. 외로움도 극복하는 방법을 배워야지‘
스님은 최근에 불거졌던 스님들의 도박판을 비판하다가도 심심하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감싸않는 말을 한다. 가재는 게 편이다. 내가 보면 불가나 정치판이나 진배없다. 정치판은 썩어도 불가만은 달라야한다. 보리수 밑에서 7년간 수행하여 부처가 되었다는 석가모니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눈앞의 향락에만 눈이 어두워 미몽을 헤매고 있으니 얼마나 헛되고 슬픈 일인가.
마음을 열고 찾은 절마당엔 적막만 감도는구나
스님과 한참 대화에 파묻히다가 산행객 몇 명을 따라 일어선다. 왔던 길을 되짚어 올라와 독수리봉에서 능선 길을 타고 내쳐 걷는다. 세천공원 길로 빠지지 않고 정상의 철탑 전망대를 거쳐 고산사, 식장사로 이어지는 길을 택했다. 전망대에서 절까지는 10리길이다.
그러나 이쪽 산길은 세천 공원에서 올라오는 길에 비해 무섭도록 한적하다. 어쩌다 사람 한두 명 스쳐 지날 뿐, 숲속에 숨어 흐느끼는 산새의 울음소리에 마음이 저려온다. 정상의 철탑을 거쳐 한참을 고불거리며 내러가니 식장사가 나를 맞는다. 산자락 아래의 평화통일 기원 9층석탑과 잔디밭의 부도와 어울린 식장사는 암자처럼 단출하다. 불탄일이 지나 그런지 절은 무섭도록 조용하고 가끔씩 구슬픈 산새 소리만 마당을 휘돌다 간다. 대웅전 측면의 벽화에 눈길이 쏠린다. 고타마 싯타르타의 출생부터 사문유관, 출가, 고행, 깨달음, 설법, 열반까지의 과정을 실감나고 감동적으로 그린 벽화다.
고산사로 발길을 틀기 전 보리수 나무에 눈길이 쏠렸다. 보리수 나무는 막 익기 시작한 탐스러운 열매를 매달고 눈길을 유혹하고 있다. 그 당시 부처님도 보리수 열매에 유혹당에 그 아래서 7년간 수행을 한 것일까. 붉은 빛이 도는 열매 몇 를 따서 입에 넣었더니 달콤하고 향긋한 맛이 혀끝을 자극한다.
식장사의 대웅전
부처가 7년간 수행을 했다는 보리수 나무에는 막 익기 시작한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고산사의 전경
식장사에서 200미터 아래엔 고산사가 자리 잡고 있다. 고산사로 내려가는 산길은 아름드리 소나무가 뿌려주는 진한 솔향기로 가득하다. 담쟁이 넝쿨을 휘감은 늙은 소나무의 대열이 시원하게 눈길을 스친다. 구슬픈 악기소리를 내는 듯한 산새 소리를 마음에 담고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개심사 길이 보이고 아래로 곧장 고산사에 닿는다.
고산사도 적막하기는 마찬가지다. 불자들의 그림자는 아예 찾아볼 수 없고 늙은 아낙이 꽁무니를 빼고 도망을 치는 강아지 뒤를 쫒느라 정신이 없다. 난 그런 절의 풍경이 좋다. 절에 오면 근엄해지는 분위기가 나를 압도하는 것 같아 싫을 때가 있다. 꾸미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속살을 드러내는 고산사의 풍경 때문에 난 가끔 이 절을 찾는다.
마곡사의 말사인 고산사는 서기 886년 신라 정강와 원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하고 조선 인조 14년에 수등국사가 중건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까지 6차례의 중건을 거쳤지만 대웅전만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텅 빈 고산사 마당을 대충 눈으로 훑다 산길을 타고 내려온다. 산길에는 나뭇가지 휘늘어진 뽕나무가 까만 오디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길에는 이미 떨어진 오디 열매들이 드문드문 깔려있다.
시원한 그늘이 깔린 산길은 가팔라서 내려가는데 애를 먹었다. 세천 공원 저수지부터 구절사와 정상의 철탑 전망대를 거쳐 고산사까지의 4시간 동안의 여정이 오롯이 피로로 쌓인 탓이다. 팍팍한 땅을 디딜 때마다 발가락은 욱신욱신 통증을 몰고 왔다. 터덜거리는 발소리에 놀라 산새들이 후드득 날갯짓을 하며 허공을 차고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