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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근본과 인간교육의 백년대계를 세우기 위하여
-안창호의 정신과 철학을 중심으로
1. 적폐의 청산과 인간교육의 필요
오늘 정부는 나라의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으며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러나 드러나는 적폐를 청산하는 것은 그 가지와 잎을 잘라내는 것과 같아서 적폐의 뿌리를 뽑지는 못한다. 적폐의 뿌리가 깊이 박혀 있는 한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적폐의 가지와 잎이 무성하게 자라날 것이다. 적폐의 뿌리는 무엇인가? 나라의 근본인 헌법정신과 이념을 짓밟고 훼손하는 것이다. 이 나라의 헌법정신과 이념은 헌법전문에 쓰여 있는 대로 삼일운동과 임시정부의 정신과 이념이다. 삼일운동과 임시정부의 이념과 정신은 온 국민이 나라의 주인과 주체가 되는 민주공화의 이념이고 온 민족이 하나로 떨쳐 일어나는 민족통일의 정신이다. 민주공화와 민족통일의 이념과 정신은 삼일운동과 임시정부 그리고 촛불혁명에 사무친 이념과 정신이다. 적폐의 뿌리를 뽑으려면 나라의 근본을 바로 세워야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듯이 근본을 바로 세우면 도가 살아난다(本立道生). 나라의 근본을 바로 세우면 적폐가 사라지고 나라와 국민의 바른 정신과 기운이 살아날 것이다.
나라의 근본인 민주공화와 민족통일의 정신이 한국사회에서 갈수록 약해지고 있다. 삼일혁명, 4·19민주혁명, 촛불혁명을 통해 일시적으로 민주공화와 민족통일의 정신이 찬란하고 장엄하게 타오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의 일상생활과 정치 경제 교육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나라의 근본정신은 쇠퇴하고 말라가고 있다. 그렇게 된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 경제성장에 매달린 한국사회는 돈과 기계와 경쟁에 매이게 되었다. 시장과 기업의 논리가 중요하지만 그 논리가 국가사회를 전적으로 지배하면 국민은 모두 돈과 기계와 경쟁에 내몰린다. 그러면 민주공화와 민족통일의 정신은 쇠퇴하고 소멸할 수밖에 없다. 둘째 유치원에서 고등학교에 이르는 교육은 오랜 세월 입시경쟁과 주입식 지식교육에 머물렀다. 이런 교육을 계속하면 인간의 정신과 성품은 깊이와 품을 잃고 얕고 좁아진다. 그러면 당연히 민주공화와 민족통일의 정신도 약해지고 줄어든다.
한국사회가 돈과 기계와 경쟁에만 매달리고 경쟁교육과 지식 주입 교육만 한다면 나라의 근본을 바로 세울 수 없고 적폐의 뿌리를 뽑을 수 없다. 지역 자치를 위해서 민주시민의 생활공동체를 만들려고 해도 주민들이 서로 도우며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풀뿌리 자치는 실현될 수 없다. 적폐를 청산하고 나라의 근본을 바로 세우려면 민주공화와 민족통일의 정신과 이념을 가진 인간교육을 해야 한다. 앞으로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어 인공지능과 로봇이 산업사회와 경제를 주도하면 인간의 삶은 계산적인 기계화와 자동화에 더욱 예속되고 민주정신과 통일정신은 약화되고 고갈될 것이다. 인간이 사회의 주인과 주체가 되는 민주정신과 이념은 약해지고 서로 돌보고 보호하며 더불어 사는 협동과 통일의 정신은 소멸할 것이다. 민주와 통일은 인간의 근본문제다. 인간은 삶의 주인과 주체로서 서로 돌보며 더불어 사는 존재다. 그렇게 살 때 인간은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 되고 가장 보람 있고 행복한 존재가 된다. 민주공화와 민족통일의 이념과 정신을 확립하고 실현하는 것은 한국근현대의 이념과 정신을 실현하는 것이며 한반도와 동아시아와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2. 민주공화와 민족통일을 위한 인간교육은 어디서 시작할 것인가?
민주시대의 인간교육은 타율적인 주입식 교육이 될 수 없다. 국민을 국가산업의 인력자원으로 보거나 국가의 병력자원으로 본 국가주의사회는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국가의 이념과 목적을 주입시키고 인력과 기능을 육성하는 교육을 추구했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과 주체인 민주국가에서 국가의 이념과 목적은 국민이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서 사는 것이며 국민을 나라의 주권자로서 돌보고 보호하고 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국가의 국민교육은 국민이 국가의 주인과 주체가 되는 교육이고 국민교육은 국민의 자기 교육이 되어야 한다. 인간교육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스스로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하여, 스스로 자신이 참 인간이 되게 하고 스스로 참 인간이 되는 자기 교육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기 교육은 저절로 자연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자기 교육을 위해서는 인간과 역사, 국가와 세계에 대한 깊은 철학적 연구와 인간교육의 내용과 방법에 대한 연구와 노력이 요구된다. 민주공화와 민족통일을 지향하는 인간교육은 고대와 중세의 철학과 종교의 가르침에 의존할 수도 없고 외국의 교육이론과 사상에 의존할 수도 없다. 내가 나로 되고 참 인간이 되는 인간교육, 민주와 통일을 실현하는 국민이 되는 국민교육은 ‘스스로 하고 스스로 되는’ 교육이므로 근본적으로 우리 역사와 우리 삶에서 그 교육의 정신과 철학, 목적과 방법을 찾아내고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 인간교육, 민주교육은 기본적으로 스스로 하고 스스로 되는 자기 교육이므로 스스로 정신과 철학, 목적과 방법을 찾아내고 만들어내야 한다. 그리하여 가장 주체적이고 창조적이면서 세계 보편적인 정신과 가치를 지향하는 인간교육이 되어야 한다.
근현대 한국민족은 민주공화와 민족통일을 추구하고 실현하고 완성하기 위해 온갖 시련과 역경을 거쳐 왔다. 근현대 한국민족의 정신과 삶 속에 민주공화와 민족통일의 정신과 이념이 사무쳐 있다. 근현대 한국민족은 민주공화와 민족통일의 정신과 철학을 형성하고 실현하고 완성하려고 애를 써왔다. 삼일혁명, 임시정부, 4·19민주혁명, 6월 시민항쟁, 촛불혁명은 근현대 한국민족의 정신과 철학을 밝히 드러낸 것이다. 우리 민족이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이루려고 했는지 뚜렷이 보여준 것이다. 한국민족이 근현대의 역사에서 추구하고 이루려고 했던 민주공화와 민족통일의 정신과 철학은 헌법전문에서 밝힌 삼일혁명과 임시정부의 정신과 철학에서 가장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삼일혁명과 임시정부의 정신과 철학을 제대로 깊이 연구하면 한국민족과 헌법전문의 정신과 철학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3. 나라의 근본을 세우고 인간 교육의 귀감이 된 안창호
1) 나라의 근본을 세운 안창호
민주공화와 민족통일의 길을 연 안창호
나라가 망해가고 식민지가 되는 과정에서 나라의 자주독립과 민족의 통일을 위한 운동에 안창호는 누구보다 더 순수하고 치열하고 흔들림 없이 헌신하고 희생하였다. 그는 조선왕조에서 소외와 차별을 받던 평안도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과 유교경전을 배우고, 17세 때 서울 선교사 학교에서 기독교정신과 과학을 배웠다. 유교를 통해 몸과 맘, 말과 행동을 바르게 하는 법을 익혔다. 기독교에서 모든 책임과 잘못을 자기에게 돌리고 자기를 변화시키고 겸허하게 섬기는 심정과 자세를 배웠다. 과학을 배움으로써 그는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으며 좋은 원인을 만들면 좋은 결과에 이른다는 합리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민주정신과 원리를 배우고 민중을 깨워 일으켜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이루는 운동에 앞장섰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이끈 서재필과 윤치호는 양반가문의 자제였고 관직을 가졌고 미국에서 유학한 지식인 명망가였다. 이들은 오만한 지식인 엘리트로서 서구문명을 목표와 표준으로 삼고 한국 민중을 불신하고 멸시했다. 이들은 민중 계몽에 힘썼지만 민중의 무지와 무기력, 게으름과 더러움을 혐오하였다. 안창호는 서재필과 윤치호에게서 민주주의와 민주적 토론 법을 배우고, 서구문명의 이념과 원리를 배웠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안창호는 민중을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고 존중하였다. 그가 맨 처음 평양의 쾌재정에서 청중 앞에 섰을 때 그의 나이는 만 20세가 되지 못했다. 그 자신이 가난한 평민의 아들이었고 내세울 권위와 명망이 없었다. 그의 고향인 평양에서 연설할 때 청중은 그의 부모나 친척과도 같은 고향의 어른들이었다. 그가 높은 관리들과 어른들인 청중 앞에서 사회 권력층의 불의와 부정, 억압과 착취를 비판하고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어가자고 외쳤을 때, 청중은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고 환호하였으며 관리들도 함께 박수를 쳤다. 그는 연설을 통해서 부모와 같은 청중과 하나로 되는 감격을 체험하였고 민중에게 엄청난 힘과 지혜가 숨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쾌재정의 연설에서 민중과 하나로 되는 깊은 경험을 한 안창호는 민중을 신뢰하고 사랑하면서 민중 속으로 들어가 민중과 함께 일어나는 운동을 벌였다. 1902년에 미국으로 유학 간 안창호는 직접 노동을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길거리에서 상투 잡고 싸우는 한인동포들을 보고 안창호는 유학 공부를 중단하고서 한인노동자들을 교육 훈련 조직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그리하여 1905년에 한인동포들의 ‘보호하고 단합함’을 강령으로 내세운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조직하였다. 그는 민이 사랑으로 서로 ‘보호하고 단합함’이 문명부강의 뿌리와 씨라고 하였다. 민이 사랑으로 서로 보호하고 협동하고 단합하는 것이 민주주의와 문명의 기본 토대이고 뿌리라고 본 것은 그가 철저한 민주공화의 정신에 이른 것을 말해준다.
민이 서로 보호하고 단합하는 것이 안창호에게는 인생과 역사에서 가장 보람 있고 행복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미국과 멕시코에서 노예처럼 살던 한인노동자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깨워 일으켜 서로 보호하고 협동하는 아름다운 공동체 사회를 만들었다. 한인노동자들은 자존감을 가지고 경제적으로 윤택한 생활을 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신뢰와 존경을 받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안창호는 농장주(기업주)들과 지역사회 그리고 그 지역 유지들로부터 신뢰와 공감과 찬양을 받는 한인공동체 사회를 만들었다. 그가 일하는 곳에서는 민주공화의 세계가 열렸다. 그가 세운 공립협회는 1908년에는 미주, 하와이, 멕시코, 한국, 중국, 블라디보스톡에 수많은 지회를 두게 되었다. 공립협회를 확대 개편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미국에서는 일제를 제쳐놓고 한국정부의 구실을 하게 되었으며 상해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주요기관이 되었다.
일제가 한국의 주권을 빼앗은 을사늑약이 일어나자 안창호는 미국에서 동지들과 ‘대한신민회 취지서’를 작성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신민회를 조직하고 교육독립운동을 일으켰다. 그가 조직한 신민회는 최초로 민주공화정을 정치이념으로 제시한 단체였다. 그는 신민회를 통해서 민족교육운동을 벌이고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그는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서 독립전쟁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독립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민주적 자각이 일어나고 민족 전체가 하나로 단결하고 통일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게 민족통일은 독립운동을 위한 수단과 방법이면서 독립운동의 목적이었다. 민족이 단결하고 통일되어야 힘을 모아서 독립운동을 하고 독립전쟁을 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통일된 민족만이 자주독립의 자격을 가지며 자주 독립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독립운동의 목적은 민주적인 통일국가를 이루는 것이었다. 멀지 않은 날에 일제가 미국, 중국, 러시아와 전쟁을 하게 될 것이고 그 때 한국민족은 자주독립의 기회를 얻을 것이라고 그는 예견하였다. 그러나 그런 기회가 오더라도 한국민족이 단합하고 통일되어 있지 않으면 자주 독립을 얻지 못할 것이며 또 잠시 독립을 얻더라도 오래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독립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줄기차게 민족의 단결과 통일을 위해 혼신을 다해서 헌신하고 노력하였다.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서 안창호는 먼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 깨워 일으켜야 한다고 보았다. 한국민족을 깨워 일으켜 통일된 의식을 갖도록 하려고 안창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민족을 깨워 일으키는 연설을 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서 민족을 자각시키고 통일시키는 애국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안창호는 충군애국을 고취하려고 윤치호가 지은 황실찬미가인 무궁화가(無窮花歌)를 바탕으로 현행 애국가1~4절을 새로 지었고, 무궁화가의 후렴을 그대로 애국가에서도 사용했다. 애국가 후렴에 나오는 무궁화를 나라와 민족을 상징하는 꽃으로 보고 무궁화처럼 우리 민족의 생명력은 무궁하다고 역설하였다. 1907년 2월부터 1910년 4월까지 안창호는 대성학교를 세워 청년학생들을 기르고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자주독립과 민족통일의 정신을 민족의 가슴에 심어주었다.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크게 감동하고 공감한 이승훈은 평안북도 신민회 책임자가 되어서 오산중학교를 세우고 안창호의 교육이념과 정신에 따라서 민족교육운동에 헌신하였다.
안창호는 민주적으로 자각한 사람들이 서로 협동하고 단결하려면 먼저 건전한 인격을 기르고 단결하고 협동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일합병을 앞두고 다시 미국으로 망명한 안창호는 민족통일을 상징하는 8도의 청년대표들을 뽑아서 흥사단을 창립하였다. 흥사단은 덕력과 체력과 지력을 길러서 건전한 인격을 형성하고 공고한 단결을 훈련하려고 만든 단체였다. 건전한 인격을 가지고 단합한 지도자들이 민족의 단합과 통일을 이룸으로써 일제와 맞서 싸워서 민족의 자주독립을 쟁취하자는 목적으로 흥사단이 만들어진 것이다.
삼일혁명의 정신과 철학을 형성하고 실천한 안창호
나라가 망하고 식민지가 되는 과정에서 민을 깨워 일으켜 민족의 자주독립과 통일을 이루는 것이 근현대 한국민족의 과제였다. 안창호는 이러한 민족의 과제를 가장 치열하고 일관성 있게 그리고 사상과 실천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방법적으로 수행하였다. 일상생활의 말과 행실에서부터 조직과 단체의 행동지침과 실천방안 그리고 민족과 세계의 큰 비전과 전망에 이르기까지 안창호는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조직하고 일을 추진하였다. 안창호가 일으킨 신민회의 교육독립운동과 대한인국민회(공립협회)의 민주공화 운동은 한국민족의 가슴에 자주독립과 민족통일의 불씨를 심어주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 깨워 일으켜 민족의 자주독립과 통일을 이루려는 안창호의 교육독립운동과 민주적 조직운동은 한국민족의 가슴에 스며들었다가 삼일운동으로 살아났다.
삼일운동은 민족대표들의 호소와 자극으로 시작되었으며, 각 지역의 민중이 자발적으로 계획하고 조직하고 협력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난 자생적 민중운동이었다.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서 민중이 스스로 일어나 ‘대한독립만세!’를 외침으로써 민족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 점에서 삼일운동은 민족의 한 사람 한 사람을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 깨워 일으켜 나라를 되찾고 바로 세우려 했던 안창호·이승훈 등의 교육독립운동이 열매를 맺은 것이다. 조직적으로 삼일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고 주도한 것은 천도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이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서 스스로 일어나 나라의 자주독립을 선언한 것은 안창호의 교육독립운동과 민주통일정신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민족의 자주독립운동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서 시작되어 안창호 이승훈의 교육독립운동을 거쳐 삼일운동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민을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 깨워 일으켜 독립을 이루겠다는 일념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 시작되었고 안창호의 교육독립운동과 애국운동을 통해 심화되었고 삼일운동으로 결실을 보았던 것이다. 실제로 안창호가 조직한 청년학우회의 총무로서 안창호의 심복이었던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썼고 안창호의 교육 이념과 정신을 받아들여 평생 교육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승훈은 민족대표들을 이끌어 삼일운동을 주도하였다. 안창호가 한국민족의 가슴에 심어놓은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한 사상적 정신적 불씨가 삼일혁명으로 살아난 것이다. 삼일혁명에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 깨어 일어났고 민족 전체가 하나로 되어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임시정부를 낳은 어머니 안창호
삼일혁명은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했고 민족 전체가 하나임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1919년 3월 1일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3월 15일에 안창호는 대한인국민회 중앙 총회장의 이름으로 미주·하와이·멕시코 재류 동포 전체회의를 열고 항구적인 독립운동 방침을 결의하였다. 삼일독립운동이 일어난 후 상해, 러시아, 한성에서 임시정부 명단이 발표되었다. 온 민족의 독립의지를 모아서 독립을 선언한 삼일운동의 뜻을 이루는 길은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독립운동을 더욱 체계적으로 힘차게 벌여 나아가는 것이었다. 당시 상해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하려는 한인동포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임시정부를 조직하기 위해서 상해의 한인동포들은 한국과 해외의 지도자들을 상해로 불렀다. 상해 동포들의 부름을 받은 안창호는 대한인국민회의 후원금 3만 불을 가지고 상해로 갔다.
상해로 간 안창호는 한인동포들과 독립운동지도자들 앞에서 “머리가 되려고 하지 않고 섬기러 왔다.”고 했으며 “크고 작은 일에서 속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상해 임시정부의 명단에 따라 안창호는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 취임하고 민족을 대표하고 민족의 단합과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지도자들을 상해로 모시고 청년 차장들을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성에서 발표된 임시정부 명단대로 임시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이 안팎에서 나왔다. 한성임시정부 명단은 기호 세력이 중심이 되어 만든 것이며 이 명단에서 안창호는 노동국 총판이라는 낮은 지위에 있었다. 이것은 안창호가 미국과 멕시코에서 한인노동자들을 교육·조직·훈련한 것을 염두에 두고 안창호의 격을 낮추어 놓은 것이었다. 민족의 단합과 통일을 위해 안창호는 기꺼이 자신을 노동국 총판으로 낮추고 이승만 대통령, 이동휘총리,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총장을 세우고 청년 차장들과 함께 임시정부를 시작하였다. 안창호는 노동국 총판이라는 지위에 있었지만 상해 동포들의 열렬한 지지와 대한인국민회의 재정 지원에 힘입어 실질적으로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그는 탁월한 조직력과 지도력을 바탕으로 뛰어난 설득력과 추진력을 가지고 독립운동의 큰 이상과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하며 짧은 기간 안에 임시정부의 토대를 다져 놓았다. 당시 안창호를 깊이 신뢰하고 지지했던 임시의정원은 안창호를 임시정부의 대통령 대리로 선출하기도 하고 노동국 총판의 명칭을 총장으로 격상시키는 결의를 하였으나 안창호는 한사코 노동국 총판의 지위를 고집하였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임시정부에 대한 신뢰와 평판을 높이고 민족의 단합과 통일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임시정부는 안창호가 아무 것도 없는 맨바닥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그 때 있었던 것은 당사자들의 동의나 허락도 없이 상해, 러시아, 한성에서 만든 임시정부 명단뿐이었다. 안창호는 자기를 비우고 낮추면서 민족을 대표할 수 있는 지도자들을 설득하여 모셔다가 임시정부를 출범시켰던 것이다.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하고 이동휘를 총리로 모시고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을 총장으로 세우고 임시정부를 시작한 안창호는 “미칠 것 같이 기쁘다.”는 말을 거듭 하였다. 실질적으로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만들어낸 안창호는 임시정부를 낳은 어머니,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임시정부를 위해 일했던 2년 남짓 기간에 안창호는 ‘독립’신문을 발행하고 ‘독립운동 자료와 역사’를 편찬했으며 연통제를 만들어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을 군 단위까지 조직하였고 교통국을 만들어 해외와 국내의 독립운동 세력을 연결하고 만주의 독립군들을 통합하는 일을 하였고 선전홍보위원회를 이끌었다. 이 시기에 그는 한국 적십자사를 만들어 큰 단체로 발전시켰고 수 많은 조직과 단체를 만들었다.
안창호는 임시정부를 시작하고 이끌면서 민족의 대동단결과 통일을 줄기차게 역설했기 때문에 ‘안창호의 통일독립’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이때까지 지역주의, 당파주의, 소영웅주의를 버리고 민족의 단결과 통일을 추구했다. 그러나 안창호가 뛰어난 지도력과 설득력, 추진력과 기획능력, 고매한 인격과 높은 도덕, 깊고 방대한 사상과 철학을 가지고, 큰 비전을 제시하면서 구체적인 정책과 방안을 마련하는 데 대하여 그리고 많은 청년들과 동포들의 깊은 신뢰와 지지를 받는데 대하여 질투하고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안창호는 서북지역 사람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안창호와 의논하고 일을 하려고 했으므로 안창호를 시기하는 사람들은 안창호가 ‘지방열’을 가진 ‘야심가’라고 비난하였다. 안창호가 자신은 지역감정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한 일이 전혀 없다고 해명하여도 안창호를 음해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안창호를 비난하고 음해하는 중심에는 이승만이 있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통령이면서 상해로 오지 않고 미국과 하와이에 있으면서 자기 세력을 확장하고 미국을 상대로 외교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일찍이 하와이에 와서 자기 세력을 확장하고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서 권력투쟁을 일으켜서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지방총회를 분열시키고 파괴하였다. 이때 이미 이승만은 대한인국민회 중앙 총회장이었던 안창호에 대해서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고 안창호와 안창호 지지 세력에 대하여 끊임없이 음해하고 비난하였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예정되었을 때 이승만은 안창호에게 자신을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파견해달라고 부탁하였고 총회장 안창호는 이승만을 대표로 결정하였다. 안창호에 대한 이승만의 음해와 비난은 거의 일방적이었다. 임시정부의 젊은 차장들이 대통령 이승만과 안창호의 갈등으로 일하기 어렵다고 했을 때 안창호는 “이 박사가 나를 오해한 것일 뿐 나는 이 박사에 대해서 나쁘게 말한 일이 없다.”고 해명하였다. 차장들이 거듭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을 문제 삼자 안창호는 “이 박사와 나 사이에 일어난 일(분열, 갈등)에 대하여 나는 조금도 책임지지 않겠다.”고 단언하였다.
대통령 이승만은 대한인국민회의 모금 활동을 중단시키고 미국 동포들의 후원금을 직접 거두었으며 독단으로 후원금을 사용하였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재정난에 빠졌고 이승만과 임시정부의 갈등은 깊어졌다. 이동휘 총리는 처음부터 이승만을 배척하는 운동을 펼쳤으며 이동휘 역시 자기 세력인 상해 공산당을 중심으로 분열 행동을 일삼았다. 다른 총창들과 이동휘의 갈등도 심해졌다. 이처럼 임시정부가 갈등과 분열 속에 있었으나 안창호는 이승만과 이동휘를 끌어안고 임시정부를 유지하려 하였다. 안창호가 보기에 이들과의 분열은 임시정부의 분열이고 민족의 분열이었다. 이승만과 이동휘가 떨어져 나가면 임시정부는 둘, 셋으로 쪼개지고 민족의 단합과 통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승만과 이동휘를 버리고 안창호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이끌어가자는 젊은 차장들의 주장에 대하여 안창호는 한사코 이승만, 이동휘와 갈라서려고 하지 않았다. 안창호는 이승만과 이동휘의 개인적인 결점과 문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국민 대중에게 민족의 지도자로 높은 명망과 신뢰를 얻고 있었고 이동휘는 함경도지역과 사회주의세력에게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안창호는 민족의 대동단결과 통일을 이루지 못하는 임시정부는 존재할 가치와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민족의 단결과 통일을 상징하는 의미에서라도 이승만과 이동휘를 임시정부 안에 끌어안고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안창호는 “헤어지지 않을 아내이면 분이라도 발라서 데리고 살아야 한다.”면서 이승만과 이동휘를 감싸주고 끌어안았다. 이승만을 끝까지 배척하던 이동휘가 먼저 임시정부를 떠났다. 안창호에 대한 이승만의 불신과 음해도 해소되지 않았다. 안창호에 대한 임시정부 안팎의 비난과 음해도 여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안창호는 자신이 임시정부를 떠나는 것이 임시정부와 민족의 단결과 통일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임시정부 밖에서 평민으로서 임시정부를 위해 일하는 것이 임시정부와 민족의 단합과 통일에 더욱 기여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안창호는 임시정부와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2년 남짓 섬기던 임시정부를 떠났다. 임시정부를 떠난 안창호는 해외 여러 지역에 사는 동포사회와 단체 기관들의 대표자 회의를 소집하였다. 임시정부의 지지기반을 확충하고 민주적 협의과정과 기구를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민족의 대동단결과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안창호는 민족대표회의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르쿠츠크파 한국공산당세력이 새로운 임시정부를 세우려고 책동했기 때문에 민족대표회의도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다시 임시정부를 지원하여 민족의 단결을 이루고 독립투쟁을 힘차게 전개해가기 위해서 안창호는 민족전체를 하나로 끌어안는 대공주의(大公主意)를 내세우며 민족의 독립운동세력을 하나로 통합하는 ‘민족유일당’ 건설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막판에 국제공산당의 정책에 따라 사회주의세력이 이탈함으로써 이마저 실패하였다. 결국 안창호는 민족주의 독립운동세력을 중심으로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안창호는 한국독립당을 조직하는 과정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정치, 경제, 교육, 민족의 평등을 바탕으로 세계인류에까지 대공주의(大公主意)를 실현하는 당의 강령과 정책을 확립했다.
임시정부를 조직할 때나 임시정부를 이끌 때나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고 대독립당을 추진하고 한국독립당을 조직할 때 안창호는 임시정부를 낳고 기른 어머니와 아버지의 심정과 자세를 가지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였다. 그의 사상과 실천은 이후 한국독립운동의 중심에서 계승되고 발전되었다. “전 민족적 항일 투쟁노선과 사회 민주주의적 독립국가 건설론이 포함된 이 같은 안창호의 생각은 그 후 민족주의 각 정당들과 임정을 포함한 우리 독립운동계에 공통으로 계승되고 발전되었다.”
2) 교육독립운동과 인간교육의 귀감인 안창호
한국근현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민족의 자주독립운동이 교육독립운동으로 전개된 것이다. 전봉준이 일으킨 동학농민혁명운동이 교육과 훈련과 준비 없이 일어났다가 장엄하게 실패하고 수십만 농민이 살육을 당한 후 민중에 대한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자각이 크게 일어났다. 동학농민혁명운동이 실패한 직후에 국민을 깨워 일으키는 애국계몽운동이 일어났고 독립협회가 설립되고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애국계몽운동을 심화 발전시켜서 안창호는 신민회를 조직하고 교육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안창호를 이어서 이승훈은 오산학교를 세우고 교육독립운동을 이어갔다.
한국근현대에서 국민교육운동은 물론 안창호 이승훈만 한 것은 아니다. 일찍이 고종의 지원과 요청으로 선교사들이 많은 학교를 세우며 교육활동을 펼쳤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통해 국민교육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천도교의 손병희도 독립협회의 주요 인사들과 개화파 지식인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전봉준의 농민혁명노선에서 벗어나 교육문화출판운동에 집중하였다. 이로써 천도교는 독립협회와 신민회에서 교육운동을 벌였던 인물들과 손잡고 삼일운동을 일으킬 수 있었다. 나라가 망하고 식민지가 되는 과정에서 국민교육운동이 전국에서 힘차게 일어난 것이 한국 근현대의 중요한 특징이다.
한국근현대의 국민교육운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안창호·이승훈이 일으킨 교육독립운동이었다. 민을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 깨워 일으키는 국민교육은 민의 주체적 자각을 위한 교육이다. 인간교육은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교육하고 스스로 인간이 되는 교육이다. 그러므로 교육하는 사람은 섬기는 자세로 정성과 사랑을 다해서 교육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깊은 신앙을 가졌던 안창호와 이승훈은 자기를 비우고 낮추어 민을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 받들고 섬기면서 사랑과 정성을 다해서 가르치고 깨우쳤다. 사랑과 정성을 다해서 받들고 섬기는 자세로 민중을 가르치고 이끌었다는 점에서 안창호와 이승훈은 인간교육의 본보기이며 참된 스승이다. 안창호는 미국에서 한인노동자들을 교육하고 훈련할 때 먼저 길거리와 마당을 깨끗이 쓰는 것부터 시작했다. 허드렛일을 해주고 함께 노동하며 가르치고 일깨우는 모습을 보였다. 대성학교에서는 절대 정직과 진실을 내세우며 함께 뛰고 함께 일하며 학생들을 사랑으로 이끌었고 겸허하게 섬기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는 작은 일에서 큰일에 이르기까지 사랑과 정성을 다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동포들 사이에서 서로 보호하고 협동하고 단합하는 모범을 보였다. 누가 병이 들거나 어려움에 처하면 그는 혼신을 다해서 돌보고 도와주었다. 최남선, 이광수, 피천득, 이갑, 안태국, 윤현진 등은 병이 들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안창호의 헌신적인 간호와 정성스러운 돌봄을 받았다. 안창호의 간호와 돌봄을 받은 사람들은 안창호를 지극히 존경했고 안창호의 심복이 되었다.
이승훈도 어린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쓰고 학교마당을 쓸고 변소청소를 하는 등 궂고 험한 일은 자신이 맡아서 하였다. 이승훈은 자신의 재산을 다 바쳐서 학교를 세웠고 자기를 비우고 낮추면서 사랑과 정성으로 학생들을 깨우치고 이끌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살았으므로 언제나 죽을 각오를 하였다. 삼일운동에 앞장섰다가 서대문형무소에 갇혔을 때도 죽을 자리를 찾았다면서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그리고 3년 반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 감방의 변기통 청소를 맡아서 하였다. 이승훈도 안창호와 마찬가지로 진실과 정직을 가장 앞세웠고 겸허하게 심부름꾼의 자세로 정성과 사랑을 다 해서 일하고 가르쳤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교육독립운동의 한 길을 걸어온 이승훈이 죽었을 때 정인보는 묘비에 “다시 살고 다시 죽기를 거듭 하였다(且生且死).”고 썼다.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이 오산중학교에서 한 학기 공부했는데 늙은 이승훈의 얼굴을 보고 “남자는 늙어서도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로구나!”하며 깊은 감동을 받았고 이승훈이 자신의 마음에 영원한 별이 되었다고 하였다.
일본 도쿄대학을 정년퇴임한 오가와 하루히사 교수는 근현대 한중일 정치 사상가들을 연구한 전문학자다. 그는 한중일 근현대 정치가와 사상가들 가운데 안창호와 이승훈처럼 사랑으로 겸허하게 사람을 교육하는 일에 헌신한 인물은 없다고 하였다. 안창호와 이승훈처럼 진실하고 정직하게 사랑과 정성으로 겸허하면서 높은 인격을 가지고 사람을 사람답게 기르는 일에 집중한 사람은 일본과 중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안창호 이승훈의 교육독립운동은 한중일 근현대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특별한 일이다. 더 나아가서 세계근현대에서도 나라를 잃고 식민지가 된 민중을 깨워 일으켜 참 사람이 되게 하고 민족의 자주독립과 통일에 이르려고 한 것은 매우 특별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4. 한국근현대의 정신과 철학을 확립한 안창호
1) 한국 근현대의 과제와 목적
세계근현대는 민주화, 과학기술(산업)화, 세계화를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민주화는 민이 종교혁명과 정치혁명을 거치면서 중세의 신분적 제약과 속박에서 벗어나 역사와 사회의 주인과 주체임을 자각하고 국가사회의 주권자로서 자기 구실을 해가는 과정이다. 과학기술(산업)화는 산업혁명을 통해서 과학적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자유롭게 일하고 경제활동을 함으로써 경제 사회적 풍요와 편리를 누리게 되는 과정이다. 세계화는 인류가 교통수단과 기술의 발달로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 경제, 정치, 종교, 문화의 교류와 합류를 이루어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자본과 기술이 군대와 결합함으로써 국가들이 저마다 부국강병을 추구하고 불의한 침략전쟁을 일으켜 약소민족국가들을 지배하고 착취하게 되었다. 강대국과 강대국 그리고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 세력 확장을 위한 식민지쟁탈전이 벌어졌고 1~2차 세계대전으로 귀결되었다. 이로써 민은 부국강병과 약육강식을 추구하는 국가들의 권력과 산업정책을 위해서 인력자원과 병력자원으로 이용되고 소모되었으며 민의 주권과 자유를 잃게 되었다. 불합리하고 불의한 침략과 지배는 과학적 합리적 사고와 자유롭고 합리적인 생활과 경제활동을 가로 막았다. 제삼세계 약소민족과 국가들에 대한 서구 강대국들의 불의한 침략과 약탈은 세계 인류의 정의와 평화를 파괴하였고 세계화는 왜곡되고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의 근현대는 나라가 망하고 강대국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세계 근현대의 불의와 고통을 가장 깊고 철저하게 경험하였다. 따라서 한국민족은 가장 절실하고 치열하게 민의 주체적 자각과 실천을 추구했고 과학적 합리적 사고와 삶을 열망했으며 민족의 자주독립과 통일을 통해 정의와 평화의 세계로 가는 길을 힘차게 열어왔다. 민주화 과학화 세계화로 나아간 한국근현대는 왜곡되고 파괴된 세계 근현대를 바로 잡고 완성하는 과정이었다.
2) 민주공화, 민족통일, 인간교육의 정신과 철학을 닦아낸 안창호
세계 근현대의 불의와 고통을 가장 깊고 철저하게 겪으면서 근현대 한국민족은 민주화, 과학화, 세계화라는 근현대 이념과 목적을 체화하고 실현하고 완성해가면서 근현대의 정신과 철학을 확립해 갔다. 한국 근현대의 정신과 철학은 삼일운동, 임시정부, 4·19혁명, 70년대 민주화운동, 5·18민주항쟁, 6월 시민항쟁, 촛불혁명을 통해 표현되고 실현되고 완성되어 왔다. 안창호는 민주화 과학화 세계화로 나아간 한국근현대의 중심과 선봉에 선 인물이다. 안창호는 민주화, 과학화, 세계화라는 근현대 이념과 목적을 가장 깊고 치열하게 깨닫고 체화하였으며, 민족의 자주독립과 통일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함으로써 근현대 이념과 목적을 한국의 역사와 사회 속에 실현해 갔다.
안창호는 일찍이 한학과 유교경전을 공부했고 17세에 서울에서 선교사 학교에서 기독교정신과 과학사상을 배우고 익혔다. 1896년에 독립협회가 창립되고 만민공동회가 열리자 안창호는 여기에 적극 참여하여 민주정신과 원리를 배웠으며 민중을 깨워 일으킴으로써 민족의 자주독립을 이루는 운동에 앞장섰다. 안창호는 역사 문화적 주체성을 가지고 서양의 문화와 정신을 깊이 받아들임으로써 동서 문화가 합류하고 융합하는 세계사적 지평의 한 가운데 서게 되었다.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큰 고통을 겪는 과정에서 안창호는 생명체험과 민중체험을 깊이 하였다. 민족의 고통 속에서 안창호는 깊은 사상과 철학을 낳았다. 그는 자신의 몸과 맘속에서 생명과 정신을 깊이 자각하고 체험하였다. 그리고 한국역사의 한 가운데서 민중을 만나서 민중과 하나로 되는 깊은 체험을 하였다. 자신의 생명과 정신을 깊고 높게 실현하고 완성하려고 했으며 민중과 함께 서로 돌보고 더불어 사는 삶을 추구했고 민족의 단합과 통일을 이루어 민족의 독립과 세계평화에 이르려고 하였다. 그의 사상과 철학은 대학교에서 이론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고 서재에서 책을 읽고 만들어낸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인생과 역사에서 깨닫고 체험하고 실천한 것을 바탕으로 통합적이고 체계적인 사상과 철학을 이끌어냈다.
그의 철학은 생명의 본성과 목적을 실현하고 완성하는 생명철학이고 생활철학이었다. 생명의 본성은 물질의 제약과 속박에서 해방된 자유와 기쁨을 가진 것이고 사랑으로 서로 소통하고 사귀고 하나로 되자는 것이다. 안창호는 평생 생의 기쁨과 사랑을 잃지 않았다. 또한 생명체는 세 가지 본성과 특징을 가진다. 스스로 하는 자발적 주체성, 내적으로 통일된 전체성, 새롭게 진화 발전함. 다시 말해 주체성과 전체성과 진화가 생명의 세 가지 본성이다. 생명의 철학자 안창호는 기쁨과 사랑을 가지고 주체의 자발성과 헌신성, 전체의 통일성, 진화와 혁신을 추구하고 실현하려고 했다. 그의 철학을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1. 과학적 합리성과 무실역행의 철학
안창호의 철학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과학적 인과관계와 인과율을 인생과 역사, 도덕과 정신에까지 인정하고 중시했다는 것이다. 그는 좋은 원인이 있으면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보았고 인간이 진실하고 힘차게 행동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에 이른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진실과 정직을 가장 중요한 진리이고 덕이라고 보았다. 무실은 진실을 추구하자는 것이고 역행은 힘을 길러서 힘껏 일하자는 것이다.
그가 내세운 진실과 정직, 그리고 무실역행은 단순한 도덕적 권면이 아니었다. 그것은 반민주적 특권 사회의 부패와 불의, 거짓과 허위를 청산하고 새로운 사회를 이루려는 혁신적 주장이었다. 조선사회의 지배층은 공허한 생각과 주장을 하면서 일하지 않고 놀고먹으면서 일하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했다.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조선사회 지배층은 말과 생각이 공허하고 거짓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불의하고 부패한 사회관계와 행태도 거짓되고 기만적이었다. 또한 일제의 침략과 지배도 불의하고 거짓되고 기만적인 것이었다. 안창호는 조선사회의 이러한 거짓과 허위가 나라를 망하게 했다고 보고 절대 정직과 진실을 내세우고 힘껏 일하면서 서로 보호하고 협동하는 삶을 살자는 뜻에서 무실역행을 주장하고 실천하였다.
이로써 안창호는 비과학적 미신적 사고와 행태를 깨끗이 청산했고 반민주적이고 특권적인 사회의 불의와 부패, 거짓과 위선을 극복하고 함께 일하며 서로 돌보고 서로 살리는 새로운 나라를 이루려고 하였다.
2. 나의 확립과 애기애타의 철학
안창호는 인생과 역사의 주인과 주체인 ‘나’를 확립한 철학자였다. 인생과 역사의 궁극적 책임은 ‘내’게 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고 내가 포기하고 좌절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안창호는 나를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 바로 세우기 위해서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법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정의돈수(情誼敦修)를 말하고 “사랑을 공부하고 배우자!”고 하였다. 그가 말년에 내세운 ‘나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라’(愛己愛他)는 말은 그의 사상과 철학을 압축한 것이다.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안창호의 주장은 매우 현대적이고 새로운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어떤 종교와 철학도 ‘애기(愛己)’를 앞세우지는 못했다. 유교는 극기(克己)와 수기(修己)를 말했을 뿐이고 불교는 멸아(滅我), 무아(無我)를 말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한 기독교도 결국 이웃사랑을 강조한 것이다. 서양 현대철학은 인간의 자아를 해체하려고 하였다. 근현대의 인생과 역사를 누구보다 치열하고 진지하게 살았던 안창호는 애기애타를 말함으로써 현대인의 삶과 정신을 움직이고 살리는 사상과 철학을 제시했다. 세계 젊은이의 맘을 사로잡은 방탄소년단의 앨범 ‘Love yourself’도 듣는 사람에게는 ‘나를 사랑하라.’는 말이 된다. 그 앨범 속에 있는 ‘Answer: Love myself’는 제목도 그렇지만 가사내용은 안창호의 애기철학을 잘 드러내고 있다.
안창호의 애기는 나 자시에 대한 사랑에 머물지 않고 남을 사랑하는 이타(利他)로 나아간다. 나를 사랑하는 애기와 남을 사랑하는 이타는 서로 다르면서도 깊이 결합되어 있다. 나를 깊이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남을 바르게 잘 사랑할 수 있다. 나와 남은 뚜렷이 구분되면서도 그 깊이와 높이에서 뗄 수 없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안창호는 덕력, 체력, 지력을 길러서 건전한 인격을 세우고 건전한 인격을 바탕으로 단체와 조직의 공고한 단결에 이르고 공고한 단결에 힘입어 민족 전체의 통일에 이르려고 하였다.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여 건전하고 힘 있는 나를 만들고 서로 보호하고 협동하는 사회관계에 이르며 민족 전체의 통일과 세계평화에 이르자는 것이 안창호의 ‘애기애타’ 철학이다. 그는 공(민족, 세계)과 사(나, 가정)를 뚜렷이 구분하는 공사병립(公私竝立)의 원칙을 확립했고 나를 살리고 힘 있게 해서 민족과 세계의 공적 영역을 열어가는 활사개공(活私開公)의 원칙을 정립했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바로 세우려 했고 서로 보호하고 협동하는 이타의 삶을 추구하면서 민족과 세계 인류 전체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대공주의(大公主意)를 내세웠다.
3. 개조와 새롭게 나아감의 철학
안창호는 개조와 사랑을 내세웠다. 그는 평생 개조에 대해서 생각했고 개조는 인생과 역사의 가장 근본적인 진리라고 보았다. 개조(改造)는 개혁하고 창조하여 자신과 세상을 보다 낫게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이다. 자기와 세상을 사랑하면서 새롭게 개혁하고 창조해 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행복의 어머니는 문명이고 문명의 어머니는 ‘개조하려는 인간의 노력’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간을 ‘개조하는 동물’이라고 했고 자기와 세상을 새롭게 개조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고 사명이라고 했다. 자연만물과 사회의 개조는 인간의 자기개조에서 시작되고 자기 개조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안창호에게는 ‘나’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보람 있고 행복하고 위대한 일이다.
그는 또한 사랑을 인생과 역사의 가장 궁극적 실재라고 하였다. 대전형무소에서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안창호는 행복은 화평에서 오고 화평은 사랑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1919년 상해의 교회에서 한 설교 ‘사랑’에서도 사랑이 ‘행복의 최고 원소’라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사랑한즉 하나님이 우리의 속에 들어오오”라고 하여 서로 사랑하는 것이 가장 위대하고 행복한 순간임을 말하였다. 그에게 사랑은 가장 궁극적 실재와 진리이고 개조는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행위였다. 사랑 안에서 인간은 가장 잘 새로워지고 변화된다. 사랑은 개조의 원동력이며 목적이다. 그는 문명부강의 뿌리와 씨를 민이 서로 보호하고 단합함이라고 했다. 민이 서로 보호하고 협동하는 것은 사랑의 실천이고 활동이다. 인간이 자기와 사회를 개조하는 것은 서로 보호하고 협동하는 사랑의 삶을 살기 위함이다. 안창호에게 문명은 행복의 어머니다. 인간이 자기와 세상을 개조하려는 노력에서 문명은 생겨나는 것이며 사랑으로 서로 보호하고 협동하는 데서 문명은 부강해지고 인간은 더욱 행복해지는 것이다.
자기와 세상을 개조하여 서로 보호하고 협동하는 문명사회를 이룩하려면 인간은 끊임없이 새롭게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안창호의 철학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어떤 ‘시련과 역경’에서도 ‘기쁨과 사랑과 희망’을 가지고 ‘보다 나은’ 삶과 역사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그는 과거에 매이지 않고 현재에 머물지 않았으며 인생의 마지막까지 보다 나은 새로운 삶을 위해 줄기차게 나아갔다. 과거와 현재에 머물지 않고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 생명과 인간의 본성이고 목적이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과거와 현재에 머물 수 없고 늘 새롭게 다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본능과 욕망에 매여 사는 파충류는 현재에 충실하게 살고 감정과 기억을 가지고 사는 포유류는 과거와 현재에 충실히 살아간다. 그러나 지성과 영성을 가진 인간은 과거와 현재의 자기와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고 개혁하여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존재다. 안창호는 나아가면 살고 머무르면 죽는다고 했으며 어떤 곤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사랑과 기쁨과 희망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자고 하였다. 보다 나은 삶과 세상을 위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며 행복하고 부강한 문명을 이루는 것이다.
3) 안창호, 이승훈, 유영모, 함석헌의 계보를 열다.
안창호의 철학과 사상을 이어받아 유영모와 함석헌은 씨알철학을 만들었다. 이승훈은 안창호의 교육정신과 이념을 가지고 교육독립운동을 펼쳤다.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에서 유영모와 함석헌은 스승과 제자로 만났다. 삼일운동에 참여한 함석헌은 평양고보를 자퇴하고 오산학교에 편입했으며, 일찍이 오산학교 교사로 일했던 유영모는 삼일운동으로 이승훈과 조만식이 감옥에 갇히자 오산학교의 교장으로 오게 되었다. 안창호의 교육정신과 이념이 살아 숨 쉬던 오산학교에서 삼일운동의 역사적 상황과 분위기 속에서 유영모와 함석헌은 만났으며 평생 한국근현대의 정신과 철학, 안창호의 정신과 철학을 심화 발전시키는 일에 헌신하였다.
유영모와 함석헌의 철학을 연구하면 기본 내용과 정신이 안창호의 철학과 일치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안창호, 유영모, 함석헌의 성향과 기질은 서로 다르지만 철학의 기본 내용과 정신은 일치한다. 유영모는 금욕과 명상 속에서 깊은 정신세계를 탐구하고 동서고금을 회통하는 철학을 형성했고, 함석헌은 정치, 사회, 종교, 문화, 교육의 여러 영역을 아우르는 자유롭고 활달한 사상과 철학을 펼쳤다. 그러나 유영모와 함석헌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이성철학, 주체와 전체를 일치시키며 주체 ‘나’를 확립하고 혁신하는 민주철학, 민족과 인류의 통일을 추구하고 실현하는 통일철학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안창호와 일치한다.
유영모와 함석헌은 안창호와 마찬가지로 비과학적 운명론적 결정론적 사고와 신화적 교리,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종교적 감정과 행태를 깨끗이 청산하였다. 이들은 민중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과 존중을 가지고 민을 역사와 사회의 중심에 세웠다. 유영모가 『대학』에 나오는 ‘친민(親民)’을 ‘씨알 어뵘’(민을 어버이 뵙듯 함)으로 풀이한 것은 민을 어버이처럼 받들고 섬긴 안창호의 민중관과 일치한다. 유영모와 함석헌은 민을 씨알이라고 함으로써 민에게 자존감과 품격을 주었다. 씨알은 인간의 무궁한 생명력과 스스로 하는 자발적 주체성과 우주적 신적 생명의 초월적 전체성을 나타내고 표현한다.
유영모는 일찍이 과학교사를 지냈으며 ‘생각’을 삶과 철학의 중심에 놓았다. 그는 ‘생각함’으로써 내가 나로 되고 새롭게 변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나’를 깊이 탐구하여 나를 확립하고 나의 탈바꿈과 변화를 이룸으로써 모두 하나로 돌아가는 귀일(歸一)을 거쳐 참된 통일에 이르려고 하였다. 유영모의 가장 핵심적 말은 ‘솟아올라 나아감’이다. 솟아올라 나아감으로써 내가 새롭게 변화하고 귀일하고 통일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함석헌은 안창호와 이승훈의 교육독립운동을 계승하여 철학적으로 심화 발전시키고 완성하였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함으로써 그는 민의 주체적 자각을 역설하였다. 그의 철학은 민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과 존중에서 시작되었다. 그가 “거울에 비친 네 얼굴을 먼저 사랑하고 존경하라.”고 한 것은 안창호의 애기사상과 일치한다. 그리고 그가 인간혁명론을 통해 인간의 자기 혁신을 주장한 것은 안창호의 인간 개조론과 일치한다. 그는 인간의 스스로 하는 주체와 하나로 통일된 전체가 참이고 선이고 아름다움이라고 하였다. 스스로 하는 주체가 없는 것, 전체의 하나 됨이 깨진 것은 참도 아니고 선도 아니고 아름다움도 아닌 것이다. 나다운 나, 창의적이고 개성적인 ‘나’가 참이고 선이고 아름다운 것이다. 전체와 이어지고 전체가 하나임을 드러내고 표현하고 실현 하는 것이 참이고 선이고 아름다움이다. 그는 또한 인간과 역사를 생명진화의 과정에서 보았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 자아가 깨지고 새로워짐으로써 죽음을 넘어 새롭게 나아가는 것이 생명과 역사의 진리다.
안창호, 이승훈, 유영모, 함석헌은 권리주장과 이해관계보다 더 깊고 높은 생명의 근원과 사명에서 인간과 역사를 이해했다. 민을 신뢰하고 사랑하고 존중했다는 점에서,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고 새롭게 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상생과 공존의 삶을 실현함으로써 민족통일과 세계평화에 이르려 했다는 점에서 인간의 자기 교육과 변화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네 사람은 하나의 역사적 철학적 계보를 형성한다.
5. 나라의 근본을 세우는 인간교육을 어떻게 할까
안창호는 한국근현대의 중심과 선봉에서 한민족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서 누구보다 순수하고 치열하게 헌신하고 노력했다. 그의 정신과 철학은 삼일운동과 임시정부의 정신과 철학을 가장 잘 드러내고 표현하였다. 그는 교육독립운동을 이끌었고 교사로서 큰 모범을 보였다. 안창호는 한국민족과 국가의 스승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는 근현대 한국민족의 정신과 삶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보편적 정신과 가치를 구현한 인물이다. 한국근현대사에서 안창호처럼 허물이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한결같이 바른 길을 걸어온 지도자는 없다. 민족과 세계 전체의 자리에서 서로 다른 세력과 사상들을 끌어안으며 민주와 통일의 길을 곧게 걸어온 안창호는 오늘 한국사회가 분열과 갈등에서 벗어나 생각과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인물이다. 안창호는 보수와 진보, 젊은이와 늙은이, 가난한 이와 부자가 함께 존경하고 따를 수 있는 분이다. 우리는 나라의 근본을 세우는 인간교육을 위한 내용과 방법을 안창호의 삶과 정신과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 안창호의 삶과 사상에는 인간교육을 위한 깊은 철학과 내용과 방법이 담겨 있다.
나라의 근본을 세우고 인간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려면 인간교육이 필요하다. 한국과 세계의 민주시민이 되기 위하여 그리고 자유롭고 평등하면서 서로 살리고 더불어 사회는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인간교육을 해야 한다.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 국민을 섬기는 공무원 그리고 민주시민을 위한 인간교육을 해야 한다. 자본과 기계가 지배하는 산업사회에서, 인공지능과 로봇이 주도하는 미래 사회에서 인간이 자신의 삶과 사회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 인간교육이 절실히 요청된다.
이미 4년 전에 국회에서 여야 국회의원 만장일치로 인성교육진흥법을 통과시킴으로써 의무적으로 유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인성교육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성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 까닭은 인간(인성)교육의 내용과 프로그램, 방법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교육은 주입식 지식교육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교육이므로 인간과 교육에 대한 깊은 철학이 확립되어야 하고 교육의 내용과 방법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교육을 가르치고 지도할 교사를 양성해야 한다.
인간교육을 위한 철학, 내용과 방법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어떻게 인간교육을 하는 교사를 양성할 것인가? 한국근현대의 정신과 철학, 헌법전문에 제시된 삼일운동과 임시정부의 정신과 철학을 깊이 연구해야 한다. 한국근현대의 정신과 철학은 인류정신사와 사상사에서 새로운 것이므로 연구의 기준과 방법이 새로워야 한다. 동양과 서양의 전통정신과 철학을 기준으로 한국 근현대(삼일운동과 임시정부, 안창호)의 정신과 철학을 연구해서는 안 된다. 근현대의 인간과 사회가 고대와 중세의 인간과 사회보다 더 나아간 것이고 더 새롭고 높은 것이다. 근현대의 정신과 철학을 연구하는 것은 나와 우리의 정신과 철학을 연구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연구하고 내가 나로 되는 길을 찾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한국근현대의 정신과 철학을 기준으로 동서의 전통과 정신을 비판하고 창조적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방식으로, 한국근현대의 정신과 철학을 연구해야 한다.
나라의 근본을 세우는 인간교육을 하려면 나라의 근본인 민주공화와 민족통일의 정신과 철학을 확립하고, 인간교육의 내용과 프로그램을 연구 창작하며, 인간교육의 교사 양성하는 연구 교육기관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서 유치원과 초중고에서 인간교육을 실행하고 대학과 사회에서 민주시민교육으로서 인간교육을 실행해야 한다.
인간교육의 철학과 방법을 연구하고 인간교육을 하는 교사를 양성하는 연구 교육 기관을 마련하는 방안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1) 국가와 민족의 사업으로 한국근현대의 정신과 철학, 인간교육의 철학과 방법을 연구하고 인간교육을 담당할 교사를 양성하고 민주시민을 교육하는 기관을 설립한다. 국가와 사회의 지원으로 설립하되 국립 또는 민간 교육 기관으로 할 수 있다.
2) 대학과 협력하여 대한 안에 이러한 연구 교육 기관을 설립하고 연구하고 교육한다.
3) 흥사단을 비롯한 관련 기관들의 협력으로 연구 교육을 진행하면서 연구 교육의 기관의 설립을 추진한다.
4) 나라의 근본을 세우는 인간교육에 동의하는 인사들의 참여와 지지를 확대해 간다.
씨알사상연구소 소장 박 재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