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지금까지 잘못 알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공감보다는 이성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사회가 변함에 따라 생각해야 될 것이 많은 세상이 되었다는 것도 배웠다.
공감의 배신 / 폴 블룸 지음 / 이은진 옮김
「공감의 배신」 편향적 감정의 치명적인 약점
‘공감의 배신’이란 제목은 의구심부터 불러일으킨다. 통념상 공감은 언제나 긍정적 가치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많은 사회적 범죄와 도덕적 잘못이 흔히 공감의 부재나 결핍 때문에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공감은 많은 문제에 대한 기본처방으로 간주된다. 수년 전에 화제가 되었던 <공감의 시대>의 저자 제레미 리프킨은 현재의 전 지구적 문제들에 맞서 세계적 차원에서 공감의식을 고양시켜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공감 능력을 어떻게 고양시킬 것이냐가 관심의 초점이었지 과연 공감이 해결책이 될 수 있느냐는 의문은 관심 밖이었다.
<공감의 배신>의 저자 폴 블룸도 공감의 장점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세상을 경험하는 행위”로 정의되는 공감 덕분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또 선행의 자극도 받게 된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공감은 형편없는 도덕 지침”이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면, 공감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과연 공감의 어떤 점이 저자로 하여금 그렇게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게끔 하는가. 그는 매우 간명한 비유를 든다. 곧 공감은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곳을 환히 비추는 스포트라이트와도 같다”는 것이다.
스포트라이트의 문제점은 무엇보다 빛을 비추는 범위가 좁다는 것이다. 스포트라이트는 특정한 공간을 환하게 밝혀주지만 그 나머지는 어둠 속에 방치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너무 많지만 공감은 특정인에게 한정될 수밖에 없기에 그 효과가 제한적이다. 즉 “스포트라이트와 성질이 비슷하다 보니 공감은 간단한 산수도 못 하고 근시안적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감정은 산수에 취약하다. 그래서 1명의 고통을 1000명의 고통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착오를 범하기 일쑤다. 어느 나라에서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가 200명이란 소식을 들었을 때의 느낌과 나중에 그 사망자가 2000명으로 늘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느낌을 비교해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의 기분이 그에 비례해서 10배 더 나빠졌을까? 한 사람의 고통에는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훨씬 더 많은 사람의 보이지 않는 고통에 대해서는 둔감한 것이 공감이 갖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공감은 간단한 산수도 할 줄 모르며 편향적이다. 가령 “수천 명의 타인이 끔찍하게 죽었다는 소식보다 내 아이가 살짝 다쳤다는 소식이 훨씬 더 가슴 아프다”는 것이 우리의 감정적 삶의 진실이라면 그것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렇게 편향적일 수밖에 없는 공감을 도덕 판단의 기준으로 삼으면 곤란하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 도덕적 결정에서 숫자를 중요하게 다루려고 한다면 우리는 공감 대신에 다른 능력에 의존해야 한다. 바로 이성이다. 이때의 이성은 영국의 공리주의자들이 치켜세운 계산적 이성이다. 도덕 판단에서도 비용과 편익의 계산이 가능하다고 본다는 점에서 저자는 공리주의의 계보를 잇는다(공리주의의 현대판으로 피터 싱어의 ‘효율적 이타주의’를 저자는 지지한다).
저자는 공감보다 이성에 무게를 두면서 지능과 함께 자제력이 개인뿐 아니라 사회의 유익에도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자제력은 감정적인 욕구를 억제한다는 점에서 합리성의 구현이다.
<이현우 서평가> 인터넷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