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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가와는 해안 방어를 위해 두 가지 방도를 생각해낸다.
하나, 서양포술을 전수 받아 해안포대 건설
둘, 빵 만들기
영국과 서구열강들의 함대를 방어하는 게 급선무였으니 첫 번째는 당연했지만, 동시에 주력했던 게 빵을 만드는 것이었다. 생뚱맞아 보이는 일이지만 에가와는 결연한 의지로 ‘빵’을 찾아나섰다.
“잘 싸우려면 우선 먹어야 한다. 먹기 위해선 주먹밥을 만들어야 하는데, 전쟁하는 와중에 밥 짓고, 주먹밥 뭉치는 걸 언제 해? 가볍게 한끼 해결할 수 있는 서양의 떡을 들여오자!”
쉽게 상하는 주먹밥 대신 가볍고, 휴대하기 편하고, 오래 보존할 수 있는 서양의 빵을 전투식량으로 낙점한 거다.
에가와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데지마(出島 : 에도 막부가 나가사키에 건설한 인공섬. 네덜란드와의 무역을 독점적으로 허용한 곳)에서 요리사로 일한 사쿠타로였다.
“네가 서양 떡을 만들 줄 안다면서?”
“서양 떡이 아니라 빵입니다.”
“그거 만드는 법 좀 알려줘”
‘팡(パン)’이 일본 사회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거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일본에 빵이 전래된 건 1543년, 포르투갈 사람들이 일본에 등장하면서다(총과 함께 빵이 들어왔다). ‘팡’이 일본에서 슬슬 저변을 넓혀가다가, 에도 막부가 등장한 뒤 잠시 모습을 감췄다(정부 정책이 '쇄국'이라). 물론 이 때도 데지마의 네덜란드 사람들은 빵을 굽고, 버터를 발라먹고 있었다.
어깨너머로 보아온 일본인들은 빵의 ‘유용성’을 알고 있었다.
“전투식량으로 쓰기에 딱인데”
에가와가 놓칠 리 없었다. 빵을 전투식량으로 활용했다. 당시 에가와가 만든 빵은 밀가루에 소금으로 간을 한 ‘초보적인’ 빵이었으나 유용성은 확실했다. 에가와가 직접 사슴사냥에 빵을 들고 가 확인했다.
“평균적인 식사량을 가진 사람이 빵 1개, 많이 먹는 애들이 2개를 먹었다. 빵을 먹은 뒤에 찻물을 마시면, 뱃속에서 불어나 포만감을 느껴진다.”
10여 년이 흐른 1855년. 에가와는 죽었지만, 일본은 너나 할 거 없이 ‘빵’을 연구하게 된다. 아니, 연구할 수밖에 없는 일이 터진다.
'흑선내항(黒船来航)'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증기선들이 일본에 등장했고 사회는 요동쳤다. 외세의 등장 앞에 일본은 전쟁을 생각했다. 아니, 서구세력과의 전쟁까지 아니더라도 일본 내에서 변화의 움직임이 보였다(흑선내항이 촉발한 거지만).
전쟁의 먹구름이 피어오르는 상황에서 빵이 다시 주목받았다.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 의학을 공부하던 시바타 호안이 새로운 빵을 들고 나온다.
“군용식량하면 비스킷이지! 서양 군인들은 비스킷을 먹어! 빵보다 이게 더 쓸만 해.”
1855년 미토 번(水戸藩)에서 시바타가 비스킷과 ‘비슷한’ 빵을 만들었다. '병량환(兵糧丸)'이다(이름부터 군용식량이란 게 느껴진다). 미토 번이 빵을 만들자, 훗날 메이지 유신의 주축세력이 되는 사쓰마와 조슈에서도 빵을 내놓는다. 사쓰마의 증병(蒸餠), 조슈의 비급병(備急餠)등이 등장한다.
나라의 위기(!?) 앞에서 일본 각지에서 빵을 만들었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이름이 ‘떡’, ‘경단’, ‘찐빵’이란 단어를 연상케 했고, 실제로도 보조 역할이 고작이었다. 이때까지도 일본의 주요 군용식량은 주먹밥이었다.
등장은 했지만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빵. 아직까지는 시대의 바람을 쫓아가지 못했던 걸까?
아니다. 빵은 시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군용식량의 왕자였던 주먹밥은 누가 봐도 시대의 흐름에 뒤처진 존재였다. 다만 계기가 없었을 뿐이었다.
계기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다. 일본에서 전쟁이 터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