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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용주사
2024년 05월 25일(토요일)
용주사(龍珠寺) 표지석
용주사 사천왕문
보통의 사찰들이 천왕문에 사천왕상을 세워두는 것과 달리 용주사의 문에는 사천왕상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서 있습니다
용주사(龍珠寺) 편액
서쪽 광목천왕(廣目天王), 북쪽 다문천왕(多聞天王)
광목천왕
서방을 맡은 광목천왕은 말 그대로 부릅뜬 눈으로 나쁜 것을 물리치고 나쁜 말을 굴복시킨다. 인간의 선악을 살펴 그것에 상응하는 상과 벌을 줍니다. 손에 용과 여의주를 잡고 있어 조화를 부립니다.
다문천왕
북방을 맡은 다문천왕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도량을 수호하면서 불법을 듣는다는 뜻에서 다문천왕이라 합니다.
그래서 손에는 부처님을 상징하는 보탑을 들고 있고 부처님 말씀을 많이 듣고 인간에게 많이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동쪽 지국천왕(持國天王) , 남쪽 증장천왕(增長天王)
지국천왕
동방을 맡은 지국천왕은 나라를 다스리고 지키며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손에 비파를 들고 항상 음악을 연주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니 나라는 자연적으로 부강해지고 안락하여 스스로 나라가 지켜지는 것입니다.
증장천왕
남방을 맡은 증장천왕은 불자들의 지혜와 복덕을 늘려주고 이익을 증장 시켜주는 것이 주된 임무입니다. 그래서 들고 있는 칼로 인간의 번뇌를 끊어버리면 바로 지혜가 나오므로 번뇌를 끊는 취모검을 들고 인간의 지혜와 복덕을 늘려주는 역활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해치상
보통 궁에서 보이는 해치인데, 용주사는 능사로 특별한 절집이었습니다.
해치상의 받침돌에 새겨진 글씨는 잘보이지 않습니다.
용주사사적비
입차불래(入此門來), 막존지혜(莫存知海)
이 문에 이르면, 지식과 분별을 버려라
뭣좀 안다고 까불지 말고, 모두 버리고 들어와라... 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효행박물관
박물관 앞에 망실된 비석의 이수
용주사 오층 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2호)
화성 용주사 오층 석탑은 원래 다른 장소에 있던 것을 용주사의 지장전 뒤쪽으로 옮겼다가 다시 지금의 위치로 이전한 것입니다. 전체 높이는 4.5m이며,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중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우고 상륜을 얹었습니다.
상층 기단의 한 면에만 위패 모양의 조각을 새긴 것고 하층 기단의 모두 면에 여의두문 모양의 안상을 새긴 것이 독특합니다. 5층에 해당하는 맨 위쪽의 탑신은 나중에 복원한 것으로 보이며, 석탑의 전체적인 제작 방식으로 볼 때 고려시대의 석탑임을 알 수 있습니다.
*탑신 : 탑의 기단과 머리부분 사이에 있는 탑의 몸채
*상륜 : 불탑 맨 꼭대기에 있는 기둥 모양의 장식 부분
*여의두문 : 고사리 모양의 장식 문양
*안상 : 눈모양의 장식
부모은중경탑
용주사 입구 홍살문(紅箭門)
홍살문은 왕실의 능(陵), 원(園), 묘(廟). 궁궐 .관아 등의 정면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 경의를 표시하는 문입니다.
용주사에 홍살문이 있는 이유는 정조 대왕이 사도 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용주사에 호성전(護聖殿)을 건립해서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입니다.
삼문(三門)
삼문은 정면 3칸으로 동서로 2개와 중앙에 1개, 모두 3개의 문이 있어 삼문이라고 부르는데, 절에서는 보기 힘든 문인데, 용주사에 삼문이 있는 것은 이 절이 사도세자의 원찰 겸 사당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삼문의 네 기둥에는 주련(柱聯)이 하나씩 걸려있는데 첫글자를 연결하면 용주사불(龍珠寺佛)이 됩니다.
龍蟠華雲(용반화운) 용이 오색 구름에 웅크리고 있으니,
珠得造化(주득조화) 여의주를 얻어 조화를 부리더니,
寺門法禪(사문법선) 절문에 이르러 선을 본받아,
佛下濟衆(불하제중) 부처님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한다.
용주사(龍珠寺) 편액은 죽농 안순환(竹濃 安淳煥 1871~1942) 의 글씨입니다.
안순환은 명월관과 태화관을 운영한 사람인데, 태화관은 3.1 만세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장소입니다.
세존사리탑과 천보루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삼문과 천보루 사이에 세워진 세존사리탑은 1702년 성정스님이 부처님의 진시사리 2과를 사리병에 담아 석탑에 안치하였다고 합니다.
높이 4m의 전형적인 5층 석탑의 구조로, 1층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과 옥개석을 차례로 올리고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양화, 보주를 모두 갖추었습니다.
천보루(문화재자료 제36호)
용주사 천보루는 대웅보전의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거대한 문루인데, 일반적인 사찰의 건축양식보다는 궁궐이나 대갓집의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는 용주사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세워졌기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건물 밖의 현판에는 '천보루', 안의 현판에는 '홍제루'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밖으로는 하늘이 보호하는 곳이고, 안으로는 널리 백성을 구제하여 백성들이 불성을 깨닫게 하는 곳이다'라는 의미입니다. 1790년 절의 창간 당시 지어진 앞면 5칸, 옆면 3칸의 규모 2층 누각이며, 앞쪽으로 1칸만큼 돌출되어 있습니다.
사다리꼴의 주춧돌을 사용하였고, 주춧돌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음각하였습니다.
천보루(天保樓) 편액
하늘이 보호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천보루 주련
自笑一聲天地驚(자소일성천지경) 스스로 웃는 한 소리에 천지가 놀라 깨우치는구나
孤輪獨照江山靜(고륜독조강산정) 외로운 달은 홀로 비치고 강산은 조용한데
心得同時祖宗旨(심득동시조종지) 문득 깨달아 동시에 조사 종지를 얻으니
여섯 개의 누하 장주초석에는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이었던 이덕무( 雅亭 李德懋 1741~1793)가 쓴 주련이 새겨져 있는데,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주련 글귀를 보면 이곳이 사도세자와 연관된 사찰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傳持祖印壬午歲(전지조인임오세) 조사의 인가를 전해 받으니 임오년(壬午年 = 壬午禍變, 1762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한 사건)이라.
叢木房中待釋迦(총목방중대석가) 뒤주(총목방 : 나무로 에워 싼 방) 안에서 석가모니를 기다리는데,
眞歸祖師在雪山(진귀조사재설산) 진귀조사는 설산에 있었네.
천보루 석주
석주를 보면 장군목을 끼우게 홈을 파 놓았습니다. 처음 천보루를 설계 할 때는 용주사의 정문으로 설계를 하였기 때문에 국왕(정조)이 용주사를 들렸을때 경호와 인원 통제가 필요해서 빗장을 걸게 되었는데, 천보루 앞에 삼문이 추가로 지어졌기 때문에 실제로는 빗장을 걸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홍제루(弘濟樓) 편액의 글씨는 차우 김찬균 차우(此愚 金瓚均, 1910~?)의 글씨입니다.
홍제(弘濟)는 널리 백성을 구제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괘불지주(掛佛支柱) 와 그 뒤로 청수대(관솔대)가 보입니다.
괘불지주
괘불지주란 법회를 할 때 두루마리로 말려져 있던 불화(괘불)들을 거는 기둥을 지탱하는 돌기둥을 말합니다. 왼쪽 지주는 뒤쪽이 막혀있고, 오른쪽은 뒷쪽이 있는 게 특이합니다.
대웅보전(보물 제1942호)
용주사 대웅보전은 사찰 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있으며, 석가여래와 함께 동방 약사여래, 서방 아미타여래의 삼세부을 모신 곳입니다. 내부와 외부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고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지붕은 여덟팔자 모양의 팔작지붕입니다. 또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대웅전 안에는 목조 삼세불 좌상과 후불탱화, 삼장 보살도와 같은 귀중한 문화재가 모셔져 있는데, 당대 최고 수준의 걸작품입니다. 정조는 이 절을 자신의 꿈 내용대로 용주사라 이름 짓고 중심 전각인 대웅보전의 현판을 직접 썼습니다.
대웅보전 현판 옆에는 두마리 용이 지키고 있는데, 한마리는 물고기를, 다른 한마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습니다.
주련은 다음과 같습니다.
報化非眞了妄緣(보화비진료망연) 보화는 진신이 아니고 마침내는 인연을 망치는 것이며
法身淸淨廣無邊(법신청정광무변) 진정한 본체(법신)은 청정하고 광대무변 한 것이기 때문이다.
千江有水千江月(천강유수천강월) 천개의 강물에는 달 그림자도 천개가 드리우니
萬里無雲萬里天(만리무운만리천) 끝까지 구름이 가리우지 않으니 만리끝 까지 하늘이구나.
대웅보전(大雄寶殿) 편액은 정조(正祖 재위기간 1776~1800)의 어필(御筆·임금의 글씨)입니다.
대웅보전에 모셔진 삼세불(미래불 아미타불, 현재불 석가모니불, 과거불 약사여래불)
목조삼세불좌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4호)
삼세불은 용주사 창건과 함께 조성하였습니다. 가운데는 주존인 석가모니불을 봉안하고, 동쪽에 약사여래불, 서쪽에 아미타불을 협시하였으며, 높이 110cm의 목조불입니다.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에는 본존인 석가여래는 전라도 정읍 내장사의 계초스님이 담당했고, 아미타여래는 전라도 지리산 피근사의 봉현스님이 조성했고, 약사여래는 강원도 간성 건봉사 상직(尙植)스님이 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인은 석가여래는 항마촉지인, 아미타여래는 아미타인, 약사여래는 약함을 들고 있습니다
대웅보전의 닫집속에서 발견된 조성원문을 보면 불상이 조성 과정을 알 수 있는데, 삼세불은 상계, 설훈, 계초, 봉현 등 20명의 스님이 참여하여 1790년 8월 16일 처음 시작하여 9월 30일에 완성하였으며, 바로 다음 날인 10월 1일에 나라 안의 명승을 초빙하여 점안식을 거행하였다고 기록되었습니다.
후불탱화
대웅전 건물의 내부 고지 사이에 후불벽을 설치하여 '삼세불회도'를 봉안하였으며, 세로 440cm, 가로 350cm의 비단에 채색한 거대한 불화로 1790년 절의 창건과 함께 만들어졌습니다.
화면의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그 오른쪽에 아미타불, 왼쪽에 약사불이 협시합니다. 아미타불과 약사불은 동일하게 원형으로 두광, 신광을 나타냈고 석가모니불만은 주형(舟形)으로 처리하였습니다. 화면의 하단에는 석가모니불 아래에 제자 아난과 가섭이 수학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바로 밑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시립하고 있습니다.
아미타불 아래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약사불 아래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각각 화려한 보관과 영락을 지니고 시립해 있고, 하단의 좌우 가장자리에는 증장천왕(增長天王)과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승엄한 부처님의 세계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한편 하단 중앙의 문수, 보현보살 사이에는 은자서(廣目天王)의 축원문이 적혀있어 후불탱화를 봉안함으로써 부처님의 가피가 왕실에 미치기를 기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당시 연풍현감이던 단원 김홍도(1745~?)가 그렸다고 하나, 그림의 하단에 기록이 적혀있지 않고 양식을 보아도 김홍도의 화풍과 차이가 있어 그의 작품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도리어 모든 인물의 얼굴과 손에 구사된 서양화의 음영법을 근거로 조선 후기에 다른 화승이 김홍도의 그림을 본떠 새로 제작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독특한 음영법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나타나는 특징으로, 이 시기 경기지역에서 활동한 경기파들의 작품에 보이는 표현수법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후불탱화의 중앙하단에는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축원문을 살짝 넣어두었는데, 처음에는 먹으로 주상과 왕비, 세자만을 위해 썼다가, 축원문을 본 정조가"왜 어머니가 빠졌냐?"고 불호령을 내려 붉은색으로 덧칠하고 은으로 다시 썼습니다.
주상전하 수만세 (主上殿下 壽萬歲)
자궁저하 수만세 (慈宮邸下 壽萬歲)
왕비전하 수만세 (王妃殿下 壽萬歲)
세자저하 수만세 (世子邸下 壽萬歲)
범종각
용주사 동종(국보 제120호)
높이 1.44m, 입지름 0.87m, 무게는 1.5톤
용주사 동종은 신라의 종 형식을 갖춘 고려 시대 초기의 거대한 범종입니다. 종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용통이 있고,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두 발로 힘차게 종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종의 네 곳에 잇는 'ㄷ'자 모양의 유곽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연꽃 봉우리 형태의 유두가 있습니다. 종의 몸체 앞뒤에는 비천상을, 좌우에는 삼존상을 새겨 넣었고, 그 사이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있습니다. 종의 어깨와 입구 부분의 넓은 띠는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종 몸체에 통일신라 문성와 16년인 854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후대에 새긴 글이 있으나, 종의 형태나 문양이 그 시대의 다른 종과 일치하지 않아 학계에서는 고려 초기의 종으로 추정합니다.
용주사 종이 원래 어느 절에서 옮겨온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 종이 광복 이후 국보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144cm를 지닌 비교적 큰 외형과 완전한 보존 상태뿐 아니라 몸체에 큰 글자로 새겨진 통일신라에 해당되는 명문의 중요성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기록된 명문을 살펴보면 ‘성황산갈양사 범종일구석반 야주성이만오 천근 금상십육년구 월일사문 염거(成皇山葛陽寺 梵鍾一口釋般 若鑄成二萬五 千斤 今上十六年九 月日沙門 廉居)’로, ‘성황산 갈양사 범종으로서 이만오천근을 들여 금상 16년 모월 모일에 사문 염거가 발원하였다’는 어쩌면 범종의 명문으로는 매우 간결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금상 16년은 범종의 다른 쪽 몸체에 기록된 신라 제46대 문성왕(文聖王) 16년으로서 854년에 해당됩니다. 그러니까 일단 명문을 통해보면 이 종은 통일신라 854년에 염거 스님이 갈양사(葛陽寺)를 창건하고 그 때 이 종도 함께 주조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러나 이 명문은 종의 제작과 관계없는, 그것도 그리 오래 전이 아닌 20세기 초에 추각된 것임이 밝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 종의 발원자로 기록된 염거화상의 입적 년대가 20세기 초에 들어와 밝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천불전(千佛殿)
현재 천불전 자리는 과거에 노전(爐殿) 또는 향로전(香爐殿)이라고 불리던 건물이 있던 곳으로이 자리에 최근 3년동안 법당불사를 하여 1993년 3월에 건물을 완성하고 천불전이라 이름하였습니다.
건물 내부에는 천개의 작은 불상을 봉안하였고, 이 천불은 다불사상(多佛思想)에 근거한 것으로 주로 현재의 현겁천불을 이룹니다.
천불전(千佛殿) 편액
佛紀 二五三六年 壬申 八月 正云 道光 ?(불기 2536년(1992) 임신 팔월 정운 도광 ?)
삼존불
천불전에는 지권인(智拳印)을 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불로 좌우로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과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삼존불(三尊佛)을 모셨습니다.
시방칠등각(十方七登閣)
시방은 10곳의 방향입니다.
동서남북과 동북, 동남, 서남, 서북 방향, 그리고 상과 하의 10곳으로서 무수한 부처님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칠등은 칠성, 즉 북뒬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시방칠등각은 칠성각과 동일한 의미라고 했습니다.
시방칠등각(十方七登閣) 편액
대웅보전과 천불전 사이에 위치한 전각으로 칠성 산신, 독성이 탱화로 봉안되어 있으며,
이 세 신앙은 불교를 신앙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한국적 불교신앙으로 우리는 삼국시대에 불교를 수용하면서 불교이전의 재래 토착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조화롭게 수용 발전시켰으며, 칠성신과 독성, 산신을 모시는 전각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 존재하며, 각각의 신을 따로 모셔 칠성각, 산신각, 독성각이 별도로 존재하기도 하고 삼성각이라고 하여 이들 세 신을 하나의 전각에 함께 봉안하기도 합니다.
칠성탱
1935년 제작된 용주사의 칠성탱화는 중앙에 치성광여래가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하였고, 좌우로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서있는 모습입니다. 상단 좌우에는 칠여래가, 하단의 좌우에는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원성군이 있습니다.
법고각
호성전
호성전(護聖殿) 편액
호성전 내부
정조대왕께서는 일반적인 제사 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던 듯 현릉원 옆에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용주사를 창건하고, 대웅보전 옆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제각으로 호성전을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호성전 안에는 사도세자(장조), 혜경궁홍씨(정조대왕 어머니), 정조대왕, 효의황후(왕비)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이 위패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1호 '화성 용주사 목조불패'의 복제품이면, 원본은 효행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좌로부터,
장조의황제 영가(莊祖懿皇帝 靈駕)
헌경의황후 영가(獻敬懿皇后 靈駕)
정조선황제 영가(正祖宣皇帝 靈駕)
효의선황후 영가(孝懿宣皇后 靈駕)
지장전(地藏殿)
지장전은 저승세계를 상징하는 사찰의 건물로 명부전이라고도 합니다.
그 내부에 저승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어서 시왕전이라 하기도 하고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신다고 해서 지장전으로부르기도 합니다.
지장전 내부
목조각상 일괄은 원래 용주사(龍珠寺) 말사인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중리 만의사(萬儀寺) 지장전에 봉안되어 있었던 것이지만, 1894년(고종 31) 지장전이 무너져 내리자 용주사로 옮겨온 것입니다. 만의사는 원래 동탄면 신리에 있었으나, 이 터가 1669년(현종 10)에 송시열(宋時烈)의 장지로 정해지자 현재의 자리로 옮겨오면서 이름도 만의사(萬義寺)에서 만의사(萬儀寺)로 바꾸었다. 2009년 5월 21일에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지장보살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협시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모시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을 모시며 각 시왕 앞에는 동자상을 안치합니다.
중앙의 지장보살은 민머리(僧形)에 지물(持物)은 육환장을 들고 있으며 몸체는 어깨가 좁고 그 경사가 급하여 움츠린 듯한 인상을 줍니다.
진강대종사탑
전강대종사(1898~1975)는 우리나라 근세 불교의 대표적 고승으로, 용주사의 정신적 지주로 불립니다.
1961년 인천 용화사에 선원을 개설하였고, 1969년 용주사에 중앙선원을 설립한 스님으로 1975년 1월 앉은 채로 입적에 들었다고 합니다.
관음전(觀音殿)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수각
용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