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끼는 나의 詩
문병란
나는 1950년대 후반기 1956~1961년 사이에 조선대학교 인문대 국어국문과 전신인 문리대 문학과에 입학하여 당시 교수로 재직하셨던 다형(茶兄) 김현승(金顯承) 시인의 문하생이 되면서 본격적인 시 공부를 하였다.
나의 문학의 싹(芽期)은 이미 1947년 ~1949년 서석초등학교 재학 시 썼던 동요 <가을의 산길> 과 <고향 계신 어머니>를 쓰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일제치하 시골(화순 도곡)의 초등학교에서 일본어를 국어로 배워 당시 제국주의 군대였던 일본 병사에게 위문편지 보내는 것부터 시작한 글쓰기는 나라도 빼앗기고 성씨마저 빼앗겨 文元炳蘭이란 엉뚱한 이름(당시 창씨개명하지 않으면 초등학교 입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누구나 다 강제로 그 수치스러운 짓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부친께서는 고육책으로 우리 종문의 씨족 文에다 우리 동네 원동(元洞)의 元잘라붙여 文元이라 창씨(創氏)하고 입학하였다)을 가지고 성도 나랏말도 빼앗긴 채 일본문자 가나를 배우다가 1945년 8월 광복이 되어 성도 찾고 나랏말도 찾았을 때 1948년 이후 대한민국 문교부 산하의 초등학교령에 따라 3학년까지 마치고 4학년 때 광주의 명문 서석초등학교로 전학하여 한글로 글을 쓰고 동시 동요를 지었었다. 문예반 특별활동 시간에 문예반 지도교사였던 여운교 선생께서 <가을의 산책>을 보시고 격찬하셨으며 5학년에 쓴 <고향 계신 어머니> 라는 동요는 정용상 선생 (훗날 경희대 작곡과를 나와 중등학교 교사 장학관 작곡가를 지내셨다)에 의하여 작곡되었으며 그분의 작곡집과 중등학교 검인정 교과서 가곡 편에 실려 있어 그 악보에서 가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고향 계신 어머니
간절한 생각은 고향 계신 어머니
눈물을 흘리면서 남쪽 하늘을
홀로 앉아 외로이 바라볼 때에
해님도 서산 넘어 고향 갑니다.
그칠 줄 모르는 어머니 생각
돌아서면 바라뵈는 머언 하늘을
홀로 서서 우러러 하염이 없고
어머니 얼굴 실은 달이 뜹니다.
<고향 계신 어머니 전문>
꽤나 조숙했던 동심이 7.5조 가락을 빌어 타관에서 형과 같이 자취하며 공부했던 나의 심정이 약간 애상조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시절은 6.25한국전쟁과 가정의 빈곤 피란살이 등 고난을 겪으면서 향리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조선대 김현승 시인을 찾아서 본격적인 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처음엔 직접 시 창작 지도를 받지 못하였고 서양문예사조사 현대시론 같은 과목을 공부하다가 입대 전야에 바친 습작 시, 노트에서 <告別>이란 작품을 골라 당시 <전남일보(현재의 광주일보)>에 게재하여 주셨고 그것을 오려서 훈련병인 내게 우편으로 보내주셨다. 논산훈련소의 감옥살이와 같은 병영에서 군사우편으로 받아본 나의 시, 최초로 김현승교수의 인정을 받은 작품이었으며 그 습작기의 작품으로 인하여 1년6개월의 병영생활(학보병) 내내 시인 대접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제대와 함께 복학하여 3학년 1학기 <시 연습시간>에 칠판에 써놓은 <가로수>라는 제목으로 은사님과 함께 쓴 작품이 크게 칭찬받고 그해 가을에 (1959년 현대문학10월호)초회 추천을 받았다. 당시엔 전국적으로 문예지가 오직 하나 <現代文學>이었는데, 그 이전에 잠깐 선보였던 <文學藝術, 조금 후에 나온 <自由文學> 도통 그것뿐이었다. 그 중에서도 장수 잡지에다 권위 있는 필진과 추천시인들로 하여 그 잡지에 등단하는 것은 어렵고도 으뜸이었다. 시 연습시간에 쓴 습작 시 <가로수> 는 지도교수였던 당신께서도 그 시간에 함께 쓴 것이었는데 <사상계>에 발표하셨고 나의 시는 <현대문학>에 추천작품으로 게재된 것이었다. 누구나 첫사랑 처녀작은 잊을 수 없는 감격과 추억으로 오래 남는 기억을 갖는 것이다. 혹자는 데뷔작이 곧 대표작이 되며 40년 50년 시작활동을 해도 데뷔작 수준을 못 넘는다고도 한다. 제2회 <밤의 호흡> 제3회 <꽃밭> 그리고 그 시기에 썼던 <꽃씨>, <時間>, <손>, <조롱의 새> <기도> <나비 생물실 소묘>등은 제1시집에 게재된 것으로서 초기작품 중에서 기억나는 작품이지만 그 중에서도 초회 추천을 받은 <街路樹>는 고난의 역정인 군대생활을 마치고 학교에 돌아와서 새로운 의욕과 희망을 안고 문학공부에 본격적으로 정열을 쏟아 붓던 시절의 작품이라 아끼는 작품으로 골라 보았다. <손>이나 <時間> <꽃씨> 등과 함께 화제에 오르기도 하고 지금도 독자들이 기억해 주지만 그것보다는 다형 김현승 은사님과의 인연이나 추억 등으로 어느 작품보다 잊혀 지지 않고 아끼는 작품이라 고른 것이다.
가로수
향수는 끝나고
그리하여 우리들은 오후의 강변에서
돌아와 섰다.
생활의 폐허에 부대끼던 겨울을 벗으면
빙점에 서서 기다리는 우리들의 3월______
凍傷의 가지마다
부풀은 지혈에 창문이 열린다.
허기진 발자욱들이 돌아오는 오후의 입구,
아무데서나 너의 인사는 반갑고
너와 같이 걷는 이 길은
시진한 고독을 나누며 가는 계절의 좁은 길.
빈손 마주 모으고 돌아오는 밤이면
가난을 열 지어 흐르는 어둠 속
서러운 까닭은
우리 모두 사랑을 따로이 간직하기 때문이다.
어둠을 호흡하는 고요론 자리
누리지는 별빛을 머금어
다가오는 3월 같은 머언 얼굴들이
쏟고 간 눈물.
너는 보내야 했듯이 또 맞아야 하기에
철 따라
새 옷으로 갈아입은 미쁘운 여인.
여기는 계절이 맨발로 걸어왔다
맨발로 걸어 돌아가는 길목.
가자,
우리 소망의 머언 산정이 보이면
목이 메이는 오후.
가로에 나서면
너와 함께 나란히 거닐고 자운
너는 5월의 휘앙쎄, 기대어 서면 너도
나와 같이 고향이 멀다.
<현대문학 초회 추천을 받은 ‘街路樹’ 전문>
50년 전의 작품이지만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전개한 최초의 등단 작품 처녀작이라는 그 추억 때문인지 그 감격과 설레는 마음이 생생하게 그날의 강의실을 떠올려 준다.
김현승 교수는 한 주일은 쓰게 하고 그 다음 주는 제출한 작품을 평가하는 시간이다. 첫 강의 첫 시간 칠판에 시제를 써놓고 90분 동안에 써내라는 지도교수의 주문에 당황하면서도 모든 수강생들 끝 종과 함께 제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 후 혹평으로 소문난 감상비평 시간 칭찬의 기대보다는 혹평의 두려움을 예감하면서 그분의 강평을 기다렸다. 제출한 20여명의 작품 중에 괜찮은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으로 분류하여 강평하셨는데 괜찮은 작품은 나의 작품이었고 나머지는 그 수준을 인정하지 않았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대학생의 작품이란 그냥 학생의 작품 그것이 아니라 기성문단에 도전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신선한 새바람을 일으킬 그런 수준이라야 한다. 전제하고 나의 작품 수준을 거기에 도달했다고 극찬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할 정도로 흥분이 고조되었으며 새삼 나의 작품에 내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한 긍지와 더불어 우쭐한 마음에 천지가 달라지는 것 같은 환한 기분이었다. 그 칭찬에 힘입어 나는 학우들 간에 영웅적 존경을 받았고 경쟁자들이 모두 손을 든 격이었다. 거기서 힘을 얻은 나는 초기의 등단 작품 현재까지도 나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몇몇 작품을 많이 써내었다. 김현승교수의 관심과 기대는 더욱 깊어졌고 나는 자신감을 얻어 시인이 다 된 기분으로 그 해 일학기 내내 나는 휘파람을 씽씽 불었다. 그리고 2학기 9월 어느 날 책방에서 현대문학 10월호를 구입한 친구가 나의 등단 사실을 알려 주었다. 처음엔 놀리는 것으로 알았는데 눈으로 확인해 보니 사실이었다. 김현승 교수의 추천사도 함께 실려 있었는데, 타락하지 않은 감상(感傷)을 지성(知性)으로 조율한 언어파적인 표현의 뛰어남을 칭찬하고 있었다. 그 때까지 우리 대학에서는 재학생이 문단에 등단한 예는 없었기에 더욱 더 존경을 받았다.
돌이켜 보면 1년 6개월 병영생활을 마치고 복학하여 강의실로 돌아온 그 첫 시간의 감격과 이 <가로수>라는 사상계의 청탁을 받고 같이 쓴 그 작품의 이모저모와 통하는 데가 있어 극찬을 했고 그 작품에 높은 점수를 주었던 것 같다. 누구에게나 ‘행운’ 이란 게 있는데, 그것이 언제 오느냐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 시기와 당시의 심적 상태, 지도교수와 학생 간의 내밀한 영적 교감 신들림(enthusiasm) 같은 운명적 작용이 가해진 그런 행운이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나와 함께 수강한 동기생이나 후배 중 스스로 김현승 문하의 최고 학생이라 여기고 자부심을 가졌던 학생이 그 사건으로 전공을 바꾸어 고전연구로 방향전환을 했다고 누군가 귀 뜸해 주었다. 나의 우쭐한 행운은 또 다른 사람에겐 좌절감과 비애감을 주기도 했구나 이것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어느 후배 문인(수필가)에게서 들은 애기다.
아무튼 고향에서 고등공민학교 교사를 지내면서 박봉으로 나의 학비를 대주시던 중형께 보답도 되었고 사법고시합격만큼이나 기뻐하시고 당시 상당한 값이었던 백미 한 가마를 선물로 마련해 주셨다. 양림동 그리 크지 않은 조그만 저택에서 <가을의 기도><푸라타나스><눈물>의 시인으로 과작이면서도 실패작이 없는 깐깐하고 자부심 강한 기독교적 바탕 위에 고독의 시인으로 유명한 시인이었다. 박봉의 조선대 교수, 그 날 초회등단으로 보은한 백미 한 가마는 실력보다 인정과 의리에 바쳐진 문하생의 예의에 속한 것이었다.
그 작품 <가로수>는 <기도>와 함께 1968년에 <한국신시기념사업회>가 펴낸 한국시선에 실렸고 그것은 김소운 시인의 일어번역으로 일어판 한국시선에 실렸다. 그런데 거기서 작자 약력에 한국의 여류시인이라 소개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일어로 번역된 <가로수>는 일본의 개천상 후보작까지 오른 교포작가 김학영(金鶴泳)의 소설 <향수는 끝나고, 그리하여 우리들은(일본의 문예지‘ 新潮’에 발표)>의 제목이 한국의 여류시인 문병란의 가로수의 일 구절을 따온 것이라 밝히고 있다. 이 작품은 중편 소설로 한국 국적을 가진 일본교포가 남과 북에서 버림을 받고 일본에서도 멸시를 받는 분단시대 일본교포들의 조국에 대한 고뇌를 그린 소설이었다. 본토에서도 겪은 사상 분열로 관제 공산당이나 친북파 반공파 간의 갈등이 야기되는 그런 동족상잔의 비극이기도 한 것이다. 이 작품을 쓴 장래가 촉망되던 유능한 작가 김학영은 소설의 주인공처럼(자전적 소설이었으리라) 실제로 문학적 삶을 자살로 마감하였다. 그런데 유서와 함께 자기의 그 작품과 편지를 한국의 시인 문병란에게 전해달라고 유언으로 남겼다. 그 책과 유서로 남긴 편지는 유신정권이 붕괴하고 6.29선언 이후 민주화의 열기가 고조될 때 신조잡지와 편지가 인편으로 전해져 지금도 귀한 자료로 간직하고 있다.
초회 추천작 <가로수>, 그 작품 속에는 우수에 찬 20대의 고독한 나의 실존의식과 먼별에 기약하듯 막막한 문학의 미래를 어렴풋이 꿈꾸던 시절의 방황과 우수와 그 나름대로 대학생 시절의 순결한 문학열이 고이 숨어 있고, 평생토록 그 가르침과 기울려주신 김현승, 은사님의 제자 사랑이 가득 담겨 있고,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일어판으로 번역되어 잠시나마 여류시인으로 알려진 해프닝도 담겨 있고, 무엇보다도 젊은 나이에 인생과 문학을 자살로 마감해 버린 교포소설가 감학영의 소설 <향수는 끝나고, 그리하여 우리들은, > 그 여운 속에 숨어서 내게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리하여 아낄 수밖에 없는 유일한 작품이 아니겠는가.
시력, 50여년, 벌써 시집 25권, IMF 이후 서적도 공해인가 싶어 시집 간행을 삼가면서 밀쳐놓은 작품만 해도 몇 백편을 넘는다. 전집간행하고 나면 죽을 준비나 하는 것 같아 아직도 나는 현역 최 일선이길 자처하여 연간 40~50여편의 작품을 여기저기 청탁에 의해 쓰면서 입대 전야의 <고별>로부터 51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쓰는 시는 나에게 삶 자체가 되었다. 시와 삶의 일체감, 그리고 그것의 실천을 위한 현실참여 의식은 시인과 시가 그 삶의 현장에서 현실과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삶을 치열하게 영위할 수 있다는 시 정신에 의하여 나의 시적 특성을 이루고 있다 할 것이다. 시집 25권과 더 많이 쌓여 있는 원고와 앞으로 계속될 시 창작 생활의 기점이 바로 가로수였음을 밝히고 이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