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오장환문학상 / 손택수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 / 손택수
아파트를 원하는 사람은 위험인물이 아니다
더 좋은 노동조건을 위해 쟁의를 하는 사람도 결국은
노동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적어도 자신이 속한 세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루종일 구름이나 보고 할 일 없이 떠도는 그를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소유의 욕망 없이도 저리 똑똑하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혼자서 중얼거리는 사람, 혼자서 중얼거리는
행인들로 가득 찬 지하철역에서도
그의 중얼거림은 단박에 눈에 띄었다
허공을 향해 중얼중얼 말풍선을 불듯
심리 상담과 힐링과 명상이
네온 간판으로 휘황하게 점멸하는 거리
어떤 슬픔은 도무지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혼자서 중얼거리는 사람이 사라지자 혼자서
중얼거리는 사람들로 거리가 가득 찼다
책소개
문학동네시인선 180번으로 손택수 시인의 여섯번째 시집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가 출간되었다.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뒤 한국 서정의 특별한 이름으로 자리해온 그가 자신의 감수성과 세계관을 더욱 넓힌 끝에 도달한 자리를 선보인다. 시집의 첫 시 「귀의 가난」에는 이번 시집의 태도가 집약되어 있다. “나이가 들면서” 찾아온 “귀의 가난”이 도리어 스스로 “자상해”질 수 있는 기회로 반전될 때, “상대방의 표정과 눈빛에 집중”하는 시집 속의 화자들은 세계의 잊힌 자리들을 조금씩 밝혀 보인다. 그 자리 안에서 모든 외롭고 괴로운 존재들이 마침내 안온해질 터이다.
보은군은 제14회 오장환문학상에 손택수 시인을 제10회 오장환신인문학상에는 박은영 시인을 선정했다고 24일 밝혔다.
군에 따르면 오장환문학상 운영위원회(위원장 오봉옥)에서 심도있는 심의 결과‘제14회 오장환문학상’ 수상자로 손택수 시인(54)을 선정했습니다. 수상 시집은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이며, ‘제10회 오장환신인문학상’수상자로 ‘셀로판지의 사색’외 4편을 쓴 박은영 씨(40)를 뽑았다.
이번 오장환문학상의 심사는 최원식 문학평론가, 백무산 시인, 박수연 문학평론가가 맡았으며, 오장환신인문학상의 심사는 오창은 문학평론가와 김성규 시인이 맡았다.
오장환문학상 수상자인 손택수 시인은 1970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1998년 ‘한국일보’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현재 노작홍사용문학관 관장으로 재직 중으로 신동엽문학상, 임화문학예술상, 노작문학상, 조태일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시집 △호랑이 발자국 △목련전차 △나무의 수사학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붉은 빛은 여전합니까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 등의 작품이 있다.
오장환문학상 박수연 심사위원 심사평은“개인적 삶이 품은 고통의 이력과 현 사회의 욕망의 시스템을 시인 특유의 시적 성찰과 발견의 세계로 이끌어 승화시키는 놀라운 성채이다”라고 말했다.
신인문학상 수상자인 박은영 시인은 1984년 경기도에서 태어나 가톨릭대학교 국제관계학과를 졸업했고 방송작가로 활동하며 EBS 다큐프라임 △강대국의 비밀 △절망을 이기는 철학―제자백가 △한국사 오천 년―생존의 길 △포스트 코로나 △EBS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등을 집필했다.
오장환신인문학상 김성규 심사위원은“상상력이 현실과 환상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시선을 가지고 있다”고 심사평을 내놓았다.
오장환문학상 수상자에게는 창작기금 1,000만원, 오장환 신인문학상 수상자에게는 500만원의 상금을 수여하고, 시상식은 9월 16일 오장환문학제에 서 열릴 예정이다.
오장환문학상 오봉옥 위원장은“오장환문학상과 오장환신인문학상은 보은군 회인면 출신인 한국 시단의 3대 천재로 불린 오장환 시인을 기리기 위한 상”이라며 “이번에 선정된 수상자는 시인 오장환의 문학 세계에 잘 부합되고 시대의식과 역사의식이 살아 있는 시집을 집필한 시인들”이라고 말했다.
한편, 오장환문학상은 보은군 회인면에서 출생해 한국 아방가르드 시단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오장환(1918∼1951) 시인을 기리기 위해 2008년 제정돼 최금진(1회)· 백무산(2회)· 최두석(3회)· 김수열(4회)· 최종천(5회)· 윤재철(6회)· 장이지(7회)· 최정례(8회)· 이덕규(9회)· 박형권(10회) 이근화(11회) 육근상(12회) 이진희(13회) 시인을 수상자로 선정했다.
손택수 시모음
묵죽(墨竹)
손택수
습자지처럼 얇게 쌓인 숫눈 위로
소쿠리 장수 할머니가 담양 오일장을 가면
할머니가 걸어간 길만 녹아
읍내 장터까지 긴 묵죽(墨竹)을 친다
아침 해가 나자 질척이는 먹물이
눈 속으로 스며들어 짙은 농담(濃淡)을 이루고
눈 속에 잠들어 있던 댓이파리
발자국들도 무리 지어 얇은 종이 위로 돋아나고
어린 나는 창틀에 베껴 그린 그림 한 장 끼워놓고
싸륵싸륵 눈 녹는 소리를 듣는다
대나무 허리가 우지끈 부러지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씩만, 눈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 시집 《호랑이 발자국》(2003) 수록
길이 나를 들어올린다
손택수
구두 뒤축이 들렸다 닳을 대로 닳아서
뒤축과 땅 사이에
새끼손가락 한 마디만 한 공간이 생겼다
깨어질 대로 깨어진 구두코를 닦으며
걸어오는 동안, 길이
이 지긋지긋한 길이
나를 들어 올리고 있었나 보다
닳는 만큼, 발등이 부어오르는 만큼 뒤꿈치를 뽈끈
들어 올려주고 있었나 보다
가끔씩 한쪽으로 기우뚱 몸이 기운다는 건
내 뒤축이 허공을 딛고 있다는 얘기
허공을 디디며 걷고 있다는 얘기
이제 내가 딛는 것의 반은 땅이고
반은 허공이다 그 사이에
내 낡은 구두가 있다
나무의 수사학1 / 손택수
꽃이 피었다.
도시가 나무에게
반어법을 가르친 것이다.
이 도시의 이주민이 된 뒤부터
속마음을 곧이곧대로 드러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나도 곧 깨닫게 되었지만
살아 있자, 악착같이 들뜬 뿌리라도 내리자
속마음을 감추는 대신
비트는 법을 익히게 된 서른 몇 이후부터
나무는 나의 스승
그가 견딜 수 없는 건
꽃향기 따라 나비와 벌이
붕붕거린다는 것.
내성이 생긴 이파리를
벌레들이 변함없이 아삭아삭
뜯어 먹는다는 것
도로변 시끄러운 가로등 곁에서 허구한 날
신경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피어나는 꽃
참을 수 없다 나무는, 알고 보면
치욕으로 푸르다
담양에서
손택수
아버지 뼈를 뿌린 강물이
어여 건너가라고
꽝꽝 얼어붙었습니다.
그 옛날 젊으나 젊은
당신의 등에 업혀 건너던
냇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