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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오늘도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의 삶과 가정과 일터 위에 충만하게 흘러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도 거룩한 예배자로 서 있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또한 우리의 진심 한 스푼을 좀 담아서 좌우에 계신 분들에게 고백했으면 좋겠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의 애굽 생활을 청산하고 라암셋에서 출발을 하여 수꽃을 향하여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지난주 나누었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셨던 은혜가 있었다는 것이죠.
세 가지를 혹시 기억하십니까? 떠남의 은혜 하나님께서 떠나게 하셨다 번성의 은혜 하나님께서 70인을 200만으로 인도케 하시는 그 은혜가 있었다. 신분 변화의 은혜 그들은 종이었지만 하나님의 군대로 명하면서 이제는 신분의 변화에 은혜가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은혜는 출애굽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그들의 광야 여정을 살펴보면 그 은혜가 얼마나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볼 수가 있는 것이죠.
오늘은 그중에서도 이 떠남의 은혜와 맞물려 있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함께 말씀을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디어 본격적으로 광야의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광야의 여정은요 말로 표현하는 것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여러분 실제 200만이라는 인구가 한 길을 향해서 이동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200만을 이끌어야 하는 모세는 얼마나 부담스럽겠습니까? 이게 200만이라는 인구가 옮기는데 거기에는 아이고 내 무릎이 아파요 하면서 걷지 못하는 할매 할배도 있었을 것이고 그렇지 않겠어요? 이제 막 태어난 아기 그래서 보에 싸서 애지중지 안고 가야 하는 아기도 있었을 것이고 잡족들도 있었다 하잖아요.
그러니 잡족은 혹 모르잖아요 어떤 선동을 일으킬지 모르는 그러한 사람들도 그 안에는 포함돼 있었던 것이죠. 사람만 갑니까? 달구지 같은 것도 갔겠고요. 여러 가축들이 함께 떼 지어서 갑니다.
가축들이 이동할 때 그 사막의 먼지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겠습니까? 이 큰 무리를 이끌고 먼 길을 떠난다는 것은 엄청난 도전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 반대로 지도자 모세를 따라 했던 백성들은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말이 많고 탈이 많겠어요
여러분 소그룹도요 모이면 말이 많고 탈이 많은데 200만이라는 이 인구가 가면서
야 이거 제대로 가는 거 맞아 우리는 어떻게 먹고 살지
별별 이야기들을 다 끄집어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혹 상상할지라도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아주 훨씬 더 뛰어넘을 만한 매우 큰 일이었다는 거예요. 그러기에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뚝 이끌어내시고 이제 구원했으니 니들 한번 잘 걸어 봐라 잘 가는지 안 가는지 내가 지켜보겠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오히려 그들의 삶을 살피시고 그들이 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줄 뿐만 아니라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앞에서 이끌어주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셨다라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죄의 올무에서 끊어내시고 그감의 자리에 떠나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광야의 여정을 걸어야 하는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광야 같은 이 세상을 걸어가야 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참으로 감사한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흑암에서 딱 건져내시고 자유를 주었으니 한 번 구원받은 자로 열심히 살아봐라 그렇게 말씀하지 않고 지켜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까지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 앞에 저와 여러분들이 감사하는 기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가 오늘 본문은 몇 가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이 아닌 홍해 광야길로 인도하셨다는 거예요.
당시 애굽에서 가난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은 총 3개가 있었습니다. 해변길이라고 하는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이 있었고요. 두 번째는 홍해길이라고 하는 왕의 대로가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수르길 숲길이라고도 하는데 족장의 길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림을 한번 보실까요? 지도인데요. 저 맨 위쪽 보이십니까? 해안가에 있는 길 그 밑에 무엇이라고 써 있습니까? 블레셋 땅으로 가는 해안길이라고 쓰여 있어요. 지중해를 타고 올라가는 길이죠. 저 람셋에서부터 바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라는 거예요. 이 지중해 해변을 따라서 북상하면 당시 블레셋이 차지하고 있던 가사를 통과해서 가난 해안 평야까지 올라갈 수 있는 바닷길이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이 가나안 땅을 조금 더 확대해서 이스라엘 지역만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사진을 한번 보여주실까요? 여기에 보면 4개의 길이 보일 것입니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4번 길은 주황색으로 보이는 그 길은요 갈릴리 호수 요단 그리고 그 이어지는 사해 동편 쪽 길입니다. 왕의 대로라고 사용되었던 길이죠 그 옆에 3번 초록색 요단 서편이죠 이 길은 계곡길입니다. 이 도로는 애굽에서 연결되었다라기보다도 왕의 대로에서 엘라이라는 지역에서 이어져 가는 길 그래서 이것은 애굽에서 가는 길이라기보다 이스라엘에만 있는 길로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2번 파란색 길은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이들을 뭐라고 칭했나요? 족장이라고 했죠. 족장들이 걸어갔던 길 그러니까 성경 창세기 말씀에 보면 그들이 이동했던 길이 저 길을 통해서 이동되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좌측에 있는 1번 파란색 해안도로가 오늘 17절에 기록된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이라는 겁니다.
보시면 가자라고 기록돼 있는 것이 보이십니까? 잘 안 보이세요. 제일 위쪽에 가자라고 지적이 있는데 거기가 과거의 블레셋 땅으로 요즘 한창 전쟁 중인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입니다. 사실 이 길은 당시 매우 중요한 무역 도로였죠. 일주일이면 가나안 땅을 갈 수 있는 매우 빠르고 가장 편한 길이 바로 저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애굽 지역에는 애굽의 국경 수비대가 자리를 잡고 있었고, 가나안 초입에는 호전적인 블레셋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지 따라서 저 길로 가게 될 경우에 애굽 군대의 통제가 있을 것이고 가나안에 입성을 하기 위해서는 저지하는 세력, 즉 막강한 블레셋 세력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 이것이 불리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무엇이었냐 하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였다는 것이죠. 실제 이들은 전쟁을 치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거예요. 하나님의 군대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긴 했지만 군사적 힘이 제로였습니다. 전쟁을 통해 싸워본 경험조차 없었던 자들이지요.
또한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을 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확실한 정체성이 아직 있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그들의 삶 가운데 경험되어졌지만 이게 정말 하나님의 구원인가 긴가민가 하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즉 그들은 마음의 준비도 정신적 무장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라는 거예요. 이러한 상태에서 전쟁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요 전쟁을 두려워할 것이라는 그들의 형편을 미리 아시고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로 인도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것이 가장 빠른 길이고 그것이 어떻게 보면 가장 합리적인 길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를 알았던 하나님께서는 ‘아니야 아니야 그 길 아니야’ 그리고 다른 길로 인도하셨다는 것이죠.
우리 17절 같이 읽어보실까요?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을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으니라.
여러분 이 구절에서 기억해야 될 것은 돌이켜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낙심하여라는 의미가 있어요. 즉 하나님께서 가까운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홍해길로 우회시킨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나약함을 아셨기 때문에 취해졌던 조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신앙인의 인생 여정길에 찾아오는 시험도 동일하다는 거예요. 때로 우리는 이제 믿음이 강해서 그 믿음 안에서 어떠한 시험도 능히 이기며 살아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날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날마다 막 믿음이 충만해서 성령 충만하여 사는 게 아니잖아요 때로는 정말 작은 시험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걸려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는 나약한 내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실상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의 은혜를 입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인생에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고요 시험이 없는 인생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죠.
누누이 말씀을 드렸듯이 하나님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어려움을 살아내야 하는 존재들이 우리의 삶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10세의 정말 귀하고 귀한 아들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려라. 여러분 얼마나 큰 시험거리였겠어요 아무리 하나님과 친한다한들 어떻게 하나님, 10세 나 정말 사랑하는 이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 하십니까? 하나님, 그러실 수 있습니까라고 따질 수 있는 것이죠.
여러분 요셉은 어땠습니까? 형제들의 시기를 질투를 통해서 채색옷이 벗겨지고 노예로 팔려가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성경은 형통했다 말하지만 얼마나 힘이 들었겠어요.
그런데 그것도 부족했는지 하나님께서는 그를 감옥의 신세로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이죠. 다윗은 하나님 마음이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으로 인해서, 아들 압살롬으로 인해서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던 큰 시련을 겪어야 했던 왕이었던 것이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어떠셨나요? 마태복음 3장, 4장, 3장 말미에서 4장을 이어서 보시면 3장 말미에서는 요한을 통해서 세례를 받습니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에게 임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었죠.
내 사랑하는 아들이오 내 기뻐하는 자라
여러분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이 그때에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에 가셨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영접하였다고 해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마십시오. 또한 그것으로 인해서 염려하거나 걱정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혹 이길 힘이 없다면 그래서 낙심하는 가운데 있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블레셋 사람의 길이 아닌 홍해 광야길로 인도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피할 길을 주심으로 인해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 할렐루야.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같이 고백해 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믿으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물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면 때로는 우리가 원했던 짧은 길을 가지 못할 수도 있어요. 멀리멀리, 멀리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좁은 길일지라도 그분과 그 길에 생명이 있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원하는 길, 그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길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는요 블레셋 사람의 길에서 홍해의 광야길로 우회케 하신 하나님께서는 수꽃이라는 지역에서 애담이라는 곳으로 인도하셨다는 거예요. 20절 말씀 한번 보실까요?
그들이 수꽃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의 장막을 치니
그러면 여러분 이들이 어떻게 수곳에서 에담까지 갈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21절 앞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21절 같이 보실까요?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여러분 앞에 무엇이라고 돼 있습니까? 그들 앞에서 가시며 하나님은요 수곳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얘들아 애담이 있는데 그곳을 향해서 가라 그렇게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앞서 가셨다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백성들이 우왕좌왕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저 앞서가시는 여호와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지 어느 방향인지 다른 길이 있는지 궁금해할 필요도 없었던 거예요. 더 빠른 길이 있지 않느냐고 제시할 이유도 없었고요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 아니냐 의심할 이유도 없었던 것입니다. 다른 염려 걱정할 필요 없이 그저 앞서가신 여호와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거였습니다. 결국 앞서 가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숲곳에서 하룻길 거리 되는 광야 끝 애담으로 친히 인도해 주셨다.
여러분 참 재미있는 사실은 그동안 하나님께서 10가지 재앙을 할 때 누구를 앞세우셨습니까? 모세를 앞세웠어요. 물론 이들의 길에 모세가 진두지휘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모세가 앞서가며 인도하였다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누가 앞서 가셨다고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단언 16장 9절에 말씀하시죠.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누구시라고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여러분 우리가 스스로 무엇을 계획하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혹 그 계획이 잘 될지라도 혹 그 계획이 잘 되지 않더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은 여호와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에 그때 비로소 우리는 모든 걸 맡길 수 있고요 어떠한 상황에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다윗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압살롬에 의해서 쫓겨가야 하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놓여 있을 때에 그는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어요? 맨발로 지금 도망가는 아들에 의해서 쫓겨 도망가는 그 상황 속에서 어떻게 그가 나를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실 거라고 고백할 수가 있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있지만 목자 대신 여호와를 따라갔기에 그는 결국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자 되신 우리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 앞서 가십니다. 할렐루야. 그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떻게 따라가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제자들은 그 부르짐 앞에 어떻게 했어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그물도 버리고 배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던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죠.
반면 어떤 관리는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지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합니다. 계명을 다 지켜라. 예수님 제가 어려서부터 그 계명은 철저하게 다 잘 지켰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구나. 니가 가진 것들을 다 팔아서 이웃들에게 나눠줘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 그러면 하늘의 부하가 너에게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그가 따라와야 할 길이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지를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관리는 어떻게 했을까요? 그 사람은 재물이 많아서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여 갔다. 결국 재물을 포기할 수 없어 예수님을 포기한 인생이 되었던 것이죠.
이러한 사람에 대해서 디모데후서 6장 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돈을 사랑하니 일만하게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여러분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결국 돈 때문이다라는 거예요. 그 돈이 믿음을 떠나게 했다는 거예요. 이것이 첫 번째 결과이고 두 번째 결과는 뭐라고 돼 있습니까?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다. 이 말은 많은 근심에 사로잡혀서 고통 가운데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돈을 사랑해 믿음에 떠나면 더 잘 될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거 조금 부유해졌다고 전보다 평안해졌다고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부터 불행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그랬잖아요.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고 지혜를 구하고 듣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부와 영광과 선물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풍족한 가운데 이제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나 이방 여인들을 좋아하고 우상을 섬기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그의 삶의 내부적인 문제, 외부적인 문제로 그 인생은 불행이 시작되었다. 열왕기상 11장에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서는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뿐만 아니라 아구리라는 사람은요 이런 기도를 했고 우리에게 추천의 메시지를 줍니다.
우리 잠언 30장 7절에서 9절 말씀 우리의 기도의 제목으로 삼고 같이 고백합니다. 시작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에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다.
여러분 우리의 길이 굽는 경우는 하나님이 잘못 인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내 뜻대로 살고자 하는 우리의 잘못된 생각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지혜의 말씀을 버리고 내 뜻과 내 생각을 따라 살게 되는 그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길이 굽어졌다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잠언 19장 3절은 이렇게 말씀해 주세요. 읽어보실까요?
사람이 미련함으로 자기 귀를 굳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니라.
내가 잘못해서 길이 굽었는데 원망은 누구한테 하는 거예요? 하나님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깁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직 여호와를 따라갔던 것처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따라가는 것이 가진 것을 다 나눠주고 혹 모든 것을 다 버리는 그 상황이 될지라도 가장 현명한 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에 가장 귀한 생명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다 그 길에는 진리가 있다 진리는 무엇이냐 생명이다. 그래서 말씀하신 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광야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이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길이요 진리요 생명 대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기로 여러분 아멘으로 결심을 하신다면 무엇을 버리고 따라가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과 다른 것을 바꾸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시간을 사모하며 그 하나님께 나아가는 은총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얼마나 세상에 유혹이 많습니까? 그 유혹을 뿌리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요 하나님께서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는 거예요. 21절, 22절 우리 같이 읽어보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될 것은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했다는 거예요. 즉 그들이 걸어가는 동안 가야 하는 그 자리에까지 우리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는 것이 중단된 것이 아니라 끝까지 동행하셨다는 것이죠.
여러분 앞으로 계속되어질 이들의 여정 속에는 불평도 나오고요 원망도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서가 아니라 환경만 보고 함께하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던 그들의 모습이었다는 거예요. 때로는 환경에 어려움이 올 수는 있지만 우리 하나님은요 한 번도 그 자리를 떠난 적이 없으시다.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원치 않는 일을 만날 때 있잖아요 그때 하나님이 안 계신 게 아니라 그때도 여전히 우리 하나님이 그 자리에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장 5절에는 이렇게 말씀을 주세요. 같이 읽어보십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같이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여호수아에게도 말씀하셨죠. 내 말씀을 따라 순종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버리지 않겠다 그렇게 약속해 주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그 이름을 뭐라고 지어주셨어요? 따라 합시다
임마누엘 임마누엘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서 그 예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지어주셨다는 거예요. 임마누엘 놓으신 우리 주님이 언제나 떠나지 않고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그 사실을 기억하며 삶의 환경에 어려운 순간이 찾아와도 낙심하지 마시고 우리 주님을 붙드시고 살아가는 동안 나에게 정말 잘 되는 일, 부유한 일이 생길지라도 교만하지 마시고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는 성도님들이 되셔서 우리의 광야, 여정이 길, 나의 생명 다하는 그날까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저와 여러분들이 앞서가시는 우리 주님을 따라서 함께하시는 우리 주님과 함께 아름답고 복된 이 광야의 여정을 잘 걸어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