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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음악 인생 :
국영수와 예체능
박종갑 / 국어국문학
인생 제1막에서는 국영수를 잘해야 되고, 2막에서는 예체능을 잘해야 한다는 우스개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국영수 과목 공부를 잘해야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장을 얻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뜻과, 은퇴하여 살게 되는 노후에는 예체능 같은 취미활동이 정신적으로 풍요로움을 준다는 뜻이 대비되어 있다. 나는 은퇴 후에 음악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잘한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열심히 하고 있다. 더구나 집사람과 함께 하니 부럽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나는 음악활동과 관련해서는 참 많은 것을 누리고 산다. 동내 아마추어 가수(?)가 서른 평 가까운 크기에 마흔 석이 넘는 객석의 전용 공연장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아마 대구에서는 나뿐일 것이다. 공연장 이름은 <녹원 통기타 문화공간 상상>이다. 줄여서 ^상상^이라고 한다.
‘녹원’은 공연장이 녹원맨션(수성구 지산동) 상가 안에 있어서 붙였다. 통기타 가수들이 공연을 하며, 음악으로 일상적 생활의 활력소를 만드는 문화를 창조한다는 뜻에서 ‘통기타 문화공간’이란 말을 썼다. 공연장에 오는 사람들이 제일 궁금해 하는 부분은 ^상상^이다. ^상상^이라고 지은 연유를 궁금해 한다. ‘녹원 통기타 문화공간’까지는 자연스럽게 이해되는데, ^상상^엔 뭔가 특별한 연유가 있을 것으로 여긴다. 더구나 주인이 국문과 교수이지 않은가.
어떤 대상이든지 작명은 쉽지 않다. 처음부터 마음에 드는 경우는 드물다.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다가 집사람이 오래전에 우리 집 부엌 싱크대 위 수납장에 붙여 놓은 아래 글귀를 보고 ‘Imagination(상상)’이라는 단어에 갑자기 눈이 번쩍 뜨였다.
Imagination is better than knowledge. knowledge is limited. Imagination encircles the world. - Thomas Edison
‘음악으로 일상적 생활의 활력소를 만드는 문화를 창조한다’고 했는데, 창조의 바탕이 바로 상상 아니겠는가. 지식은 한계가 있지만 상상은 이 세상을 포괄한다고 하니 상상은 인간의 의식을 자유롭게 하는 정신적 행위가 될 것이다. 상상은 모든 사람에게 꿈을 펼칠 수 있게 한다. 사람들이 우리 공연장에 와서 음악을 들으며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행복해 하는 상상을 하면서 ^상상^으로 작명을 마무리했다. 그 뒤에, 유발 하라리의 유명한 책 <사피엔스>를 보니,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몰아내고 지구의 주인공이 된 게 원시인류 중 사피엔스에게만 있는 상상력 덕분이라고 한다. 상상력이 인류 문명의 원동력이라는 얘기를 읽고, 작명 참 잘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더구나 동일한 소리의 두 음절이라 부르기도 좋고, 음절마다 이응 소리로 끝나니 통통 튀는 느낌이라 밝고 힘찬 느낌을 준다. 또 '아' 모음이 양성모음이고, 입을 크게 벌리는 개모음이라, 소리가 우렁차게 멀리 날아가는 효과도 있다.
다른 일이 없으면 집사람과 함께 ^상상^으로 출근한다. 하루하루를 통통 튀는 밝고 힘찬 느낌을 가지려고 노력하며 음악을 즐긴다. 공연이 없을 땐 ^상상^은 연습실이다. 음악활동이 나의 본업이라고 여기며 그것에 시간과 노력을 집중하려고 애쓴다.
통기타는, 대부분의 우리 세대들이 그렇듯이, 대학생일 때 처음 접했다. 참 대단한 매력을 느꼈고 무척 즐기고 싶었다. 내면으로부터 아주 강한 끌림을 받았다. 방학 때 시골집에 가서 기타만 치다가 아버지께 꾸중도 들었다. 그러나 체계적으로 배울 기회는 없었다. 그러다가 군입대를 하면서 기타와 멀어졌고, 그 이후로 오랜 세월 동안 참고 잊고 살면서, 식구들이나 주변 지인들에게 기타를 다시 잡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느 순간에 마음속 깊숙이 휴화산으로 존재하던 기타를 향한 열정이 갑자기 활화산으로 변했다. 50대 중반의 어느 해에 국내 연구년을 하게 되었고 평일에 집에 있는 날이 종종 있었다. 집사람은 출근하고 혼자 거실에 누워 있었는데, 갑자기 이 시기를 놓치면 더 이상 기타를 즐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번개처럼 때렸다. 벌떡 일어나 차를 몰고 명덕 네거리 근방의 남문시장 악기거리로 갔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가게로 들어가서 무작정 기타 학원에 대해 물었고, 그 가게에서 기타도 샀다. 가게 주인이 소개해 준 학원으로 가서 바로 등록을 하고, 그 자리에서 첫날 레슨을 받았다. 이 모든 것을 그날 오후 한두 시간 안에 해치웠다. 30여년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마음속에서만 간직하고 있던 기타에 대한 소망을 어느 한 순간에 다시 불 붙이게 된 것이다.
무슨 악기든지 멋있게 연주하면 듣기가 좋지만 연습하는 소리는 소음에 가깝다. 기타는 여섯 줄로 된 현악기이지만, 아르페지오(arpeggio) 주법이면 모를까 스트로크(stroke) 주법으로 연주하면 타악기에 가깝다. 아파트 안에서 두들겨 대니 식구들도 힘들고 아래위 양 옆집 사람들도 불편하다. 항의성 전화를 몇 번 받으니 이대로는 더 이상 기타를 칠 수 없었다. 어떤 동호인의 조언을 듣고, 지하 주차장의 승용차 안에서 연습을 해 보았다. 여름이었는데, 차창을 열어 놓으니 모기가 달려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좀 희한하다는 듯이 쳐다보니, 할 짓이 못 되었다. 공중전화 부스 같은 방음부스를 사서 방 안에 들여놓고 그 안에 들어가 연습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여 알아보았다. 가격도 고가인데다가, 경기도 지역에 있는 공장에 직접 가보니, 자재에서 악취가 심하게 났다. 온 집안을 오염시킬 것 같아, 구입 직전에 포기했다.
마지막 방법으로 집 근처의 지하상가를 물색해 보았는데, 임대료가 높아 어려웠다. 기타 연습을 할 방법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절망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죽으라는 법은 없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까. 천우신조란 말이 좋겠다. 집에서 좀 떨어진 지산동 남양학교 근방으로 가 보았다. 부동산 가게가 눈에 띄어 별 기대도 없이 들어가 물어보니, 월 임대료가 십만 원짜리인 열 평짜리 반지하 점포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 지하상가는 장사가 안 되니 ‘죽은 상가’란다. 빈 점포도 여럿 있었다. 주인은 그냥 비워두는 것보다는 십만 원이라도 받는 게 낫다고 싼값에 세를 놓는다고 했다. 당장 보증금 이백만 원에 월 십만 원으로 계약을 마쳤다. 그리하여 왼쪽에는 세탁소가, 오른쪽에는 돈가스 가게가 붙어 있는 열 평짜리 점포를 전용 연습실로 쓰는 꿈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반지하라 소음 관련 민원이 생길 수 없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기타를 두들겼다. 기타 인생의 중흥을 꿈꾸게 되었다.
기타가 조금 느니 생각이 슬슬 달라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 앞에서 기타 치며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기타 동아리에 들어 동호인들과 어울렸다. 동아리 연습실에서 회원들 앞에서, 또는 여름철 신천변에서 하는 버스킹 행사에서 공연을 하는 맛과 멋을 조금씩 즐기게 되니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것 같아 좋았다. 내 연습실에서 편하게 연습을 하고 동아리 회원들과 어울리며 공연을 하는 취미생활에 만족해하며 살고 있었다. 집사람도 합류하여 ‘견우와 직녀’라는 예명을 쓰며 같이 음악활동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연습실에서 연습을 하고 있는데, 낯선 사람이 찾아와서는 자기가 이 사무실을 매입하려고 한다면서 그렇게 되면 바로 비워주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 생기는 것 같았다. 이런 공간을 또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다음날 바로 주인에게 전화하여 내가 사겠다고 했고, 너무 놀라서 흥정도 못 해보고 열 평짜리 점포 주인이 되었다. 그 후에 생각해 보니, 사겠다고 나타났던 사람은 주인이 보낸 공작원 같았다. 주인은 어서 빨리 점포를 처분해 버리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고, 나보고 사라고 여러 번 권하기도 했다. 나는 월 10만 원만 내면 되니 살 이유가 없었다. 그러다 공작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작은 규모지만 내 소유의 연습실이 생기니 기분이 묘하고 좋았다. 공간이 좀 더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기 시작했다. 허름한 동아리 연습실이나 신천 변 버스킹에서의 야외 공연은 여러 가지 한계가 있었다. 내가 주체가 되어 좀 더 정제되고 수준 있는 공연을 이끌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용 공연장을 마련하고 정기공연을 하는, 당시로서는 좀 허황된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바로 옆 돈가스 가게도 내가 살 수 있으면 두 공간을 합쳐 좀 괜찮은 공연장을 꾸밀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중 뜻밖에도 돈가스 가게가 장사가 안되어 폐업을 하려고 했다. 돈가스 가게 사장 말로는 가게를 살 사람이 나타났고, 그 사람이 자기에게 상당한 권리금을 준다고 하여, 그 사람과 가게 주인을 연결시켜 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당시의 점포 주인들은 모두 점포를 처분하고 싶어 했는데, 돈가스 가게 사장은 권리금을 줄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버티고 있었다고 했다. 아! 꿈을 실현할 기회가 왔다. 당장 내가 권리금을 줄 테니 나하고 가게 주인하고 연결시켜 달라고 했다. 그렇게 하여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열일곱 평짜리 가게도 사게 되었다. 집사람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사겠다고 하고 권리금까지 준다는 약속을 해 버렸다. 집사람 말이 우리가 돈가스 가게를 할 요량이면 여러 가지 조리기구들을 인수하게 되니 권리금을 주는 게 맞지만, 우리는 그 기구들을 전부 폐기 처분해야 하는데, 권리금까지 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이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인데, 혹시 다른 사람에게 팔려버릴까 봐 조바심이 나서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니,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런데 이번은 돈가스 사장의 공작이 있었다. 나중에 부동산 사장한테서 들어보니 죽은 상가의 점포를 권리금까지 주고 들어오거나 사려고 한 사람이 애시 당초 없었다며 허허 웃었다. 알고 보니 돈가스 사장은 장사가 워낙 안되어, 일 년 가까이 관리비와 월세도 못 내고 있었는데, 나한테서 받은 권리금으로 그것을 다 해결하고 몇 푼 가지고 가게 되었으니, 내가 얼마나 고마웠겠는가. 가면서 나한테 90도로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기존의 연습실과 돈가스 가게 사이의 벽을 헐고, 여러 가지 음향시설을 들여놓을 수 있도록 흡음시설을 포함한 인테리어공사를 했다.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운 좋게도 선한 사람들을 만나 제법 어울리는 공연장을 만들었다. 이른바 ‘죽은 상가’라 큰돈이 들지는 않았지만, 국문과 교수가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대중음악 공연장을 갖게 되니, 스스로 좀 얼떨떨한 기분을 느끼면서, 꿈꾸던 공연활동을 시작하였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했던가.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경 구절이 어울릴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꿈도 꾸지 않았던 일이 상상을 거쳐 현실이 되었고, <녹원 통기타 문화공간 상상>이 탄생한 것이다.
^상상^에서는 매월 한 차례씩 지역 주민들이나 지인들을 불러 모으고 아마추어 통기타 가수들을 초대하여 공연을 한다. 코로나 사태로 몇 년 쉬다가 작년부터 다시 시작했는데, 2024년 11월 20일부로 제60회 정기공연을 했다. 한 번 공연에 출연진이 4∼5 팀 정도 되는데, 그 속에 우리 부부도 들어간다. 실력이 부족하지만 주인이라고 텃세를 부리는 것이다. 코로나 사태 전에는 문전성시였다. 정규 객석 외에 수십 개의 스페어 의자에까지 청중들이 앉았다. 요즘은 평균 이삼십 명 정도의 청중들이 온다. 물론 무료공연이다. 떡이나 찰밥, 과자·과일·음료수·맥주 같은 것도 대접하니 청중들에게는 돈이 들지만, 출연료를 안 주니 출연진들에게는 돈이 들지 않는다. 출연진 섭외는 그동안 음악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쌓아왔던 두터운 인맥이 있어 어렵지 않다. 고맙게도 출연료도 없이 기쁘게 와서 공연을 해 준다. 대부분은 통기타 가수들이 온다. 색소폰 연주자도 한 팀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시 낭송, 클래식 기타·플루트·하모니카·아코디언·해금 등의 연주도 가끔 섞인다. 상당히 긴 시간을 음악활동을 하면서, ‘재야에 고수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말 프로 못지않은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 있다. 운이 따르지 않아 유명세를 얻을 기회를 잡지 못한 사람들이다.
조그마한 공간에 수십 명의 청중들 앞에서 하는 소규모 공연은 대규모 공연에서는 맛볼 수 없는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 세시봉 가수들의 대형 특별공연에 가 본 적이 있다. 최고의 유명가수들을 직접 보면서 노래를 듣는 기쁨이 크다. 그러나 엄청난 규모의 공연장이니 대형 엠프에서 쏟아지는 기계음 같은 느낌의 음향을 듣는다. 가수의 몸과 제스처와 표정을 피부로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웅장하고 먼 느낌이다. 소규모 공연은 대부분 출연진이 아마추어다. 가수와 청중이 서로 스킨십을 하는 느낌이다. 가수의 숨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표정과 몸짓도 바로 읽힌다. 맑고 선명한 음향이 귀로 솜털 같은 느낌으로 들어온다. 실수도 종종 한다. 서로 웃는다. 실수는 아마추어의 특권이라고 했던가. 눈만 감으면 프론지 아마추어인지 구분이 안 되는 경우도 제법 있다. 가수와 청중이 한 몸이 되는 느낌이 드는 것이 소규모 아마추어 공연의 가장 큰 매력이다. 우리 ^상상^의 고객 중에는 전국적으로 이런 소규모 아마추어 공연만 찾아다니며 즐기는 분도 있다.
^상상^ 공연에서 나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집사람은 피아노나 기타를 치며 직접 노래를 부르거나 피아노와 젬베로 내 노래에 세션 역할을 한다. 같이 기타를 치며 듀엣으로 노래를 하기도 한다. 청중들의 진정 어린 힘찬 박수를 받을 땐 참 기분이 좋다. 그냥 마지못해 치는 것인지 진정으로 치는 것인지 안다. 평소에 공연 때 부를 곡을 정하고 집중적으로 연습을 한다. 공연을 마치고 청중들이 물러가면 공연장 청소를 하는데, 그 전에 반드시 녹화된 동영상을 확인하며 희비를 함께 느낀다. 연습 때와 비슷하면 기분이 좋고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아쉽고 속상하다. 좀 괜찮다 싶으면 자랑이 하고 싶어 아는 사람들한테 동영상을 마구 보낸다. 공연은 남한테 보이기 위한 것이니 이런 저런 방법으로 알린다. 명예교수회나 명예교수 골프회 등 외부에서 공연 요청이 오는 경우도 있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사양하지 않고 나선다. 10년 전에 내가 졸업한 고교(마산고)의 졸업 4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다. 행사 얘기가 돌길래 동기들 카톡방에 나와 집사람의 공연 동영상을 여러 편 올렸다. 곧 회장한테서 출연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내가 계획한 대로 된 것이다. 얼마 전에 있었던 졸업 50주년 기념행사 때도 집사람과 같이 ‘견우와 직녀’라는 이름으로 공연을 했다. 행사가 잡히면 부담도 되고 걱정도 된다. 연습밖에 답이 없다는 점을 알기에 열심히 연습하고, 막상 무대에 서면 떨지 않고 공연을 한다. 가수로서의 실력은 부족하나 부부가 함께 하니 보기 좋다고 하며 박수를 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음악활동 중에 또 하나 중요한 것이 노래봉사공연이다. 단원이 모두 여덟인 ‘상상노래봉사단’을 결성하고, 한 달에 한 번씩 대구·경북의 여러 어르신주간보호센터나 요양원에 찾아가 노래를 부르며 같이 논다. 50회가 넘었으니 상당한 기간 동안 지속하고 있는 셈이다. 좀 자주 하고 싶지만, 지하실에서 장비를 챙겨 차에 싣고 가고, 설치하고, 마치면 해체하여 가져오고 하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어서 선뜻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요양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제일 좋아하는 봉사 프로그램은 노래 봉사인데,
특히 ‘자신이 아는 흥겨운 노래’를 들으며 따라 하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요양원 실무자들의 말에 의하면, 부채춤 같은 고전무용은 아주 싫어하신다고 한다. 예술성보다는 일단 흥이 나야, 폐쇄된 공간에서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이는 삶을 살아가는 듯한 느낌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되고, 그래야 쾌감과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많은 봉사단 중에서 우리 봉사단의 인기가 최고이다. 공연이 끝나면 또 언제 올 거냐고 매달리는 듯이 말하는 분들도 많이 계신다. 여러 요양원 원장님들이 '한 번 더 와줄 수 없냐‘고 전화를 한다. ’우리 요양원 어르신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게 만든 봉사단은 상상노래봉사단뿐이라'고 하면서 사정하곤 한다. 우리나라의 어르신들이 젊었을 때부터 즐기던 유흥의 장르가 흥겹게 춤추며 노래 부르기였다. 동네 마을 회관에서, 또는 관광버스 안에서, 소주 몇 잔 드시고 막춤을 추며 흥겨운 유행가를 애절하게 부르면서, 고된 농사일, 곡절 많은 삶에서 생기는 꽉 막힌 가슴을 뚫어가며 살아온 인생 아니겠는가. 우리 봉사단의 인기는 그런 유흥에 대한 갈증을 우리가 매우 만족스럽게 풀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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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상상 음악단 단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오늘 가장 유쾌한 원고를 게재한다"라는 기분이 드는 글이었습니다. 수요일 일정이 겹쳐서 아직 공연을 관람하지 못했는데, 그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게 합니다.
그리고 단장님께서 편집위원장 경험으로 이 글을 줄인 버전도 보내주심, 그 배려에 또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이끌어 나가는 전 과정이 소개되어야 다른 분들에게도 '새 세상을 열고 싶은 욕망'을 일으키고 또 '여는 방법'을 알려주어 왕성한 용기를 줄 수 있을 것 같고, 아울러 상상음악단 역사도 자세히 알 수 있을 것 같아 이 버전을 택했습니다. 우리 회지에 이만한 공간은 있기를 희망하면서! 단장님은 음악으로도 세상에 활기를 전하지만, 다이다믹한 문장으로도 활기를 전하십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