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순이 - 아버지,(2009)
(이현승 작사 / 이현승 작곡 이현승 편곡)
한걸음도 다가설 수 없었던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얼마나 바라고 바래왔는지
눈물이 말해 준다
참 정말 멀어져가버린
쓸쓸했던 뒷모습에
내 가슴이 다시 아파온다
서로 사랑을 하고 서로 미워도 하고
누구보다 아껴주던 그대가 보고싶다
가까이에 있어도 다가서지 못했던
그래 내가 미워했었던
참 정말 멀어져가버린
쓸쓸했떤 뒷모습에
내 가슴이 다시 아파온다
서로 사랑을 하고 서로 미워도 하고
누구보다 아껴주던 그대가 보고싶다
가까이에 있어도 다가서지 못했던
그래 내가 미워했었던
제발 내 얘길 들어주세요
시간이 필요해요
서로 사랑을 하고 서로 미워도 하고
누구보다 아껴주던 그대가 보고 싶다
가슴속 깊은 곳에 담아두기만 했던
그래 내가 사랑했었다
긴 시간이 지나고 말하지 못했던
그래 내가 사랑했었다.
인순이의‘아버지’ 우리들의 눈물이 된 이유
인순이 스스로 방송에서 밝힌 것처럼 그녀에게'아버지'라는 말은 그 자체로 상처다.
그녀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떠났고 그렇게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는 가끔 편지왕래를 했었다지만그것이 이 땅의 혼혈로 태어나 아버지 없이
겪은 그 세월을 위로해줄 수는 없는 일이었을 테니까.그녀의 '아버지'라는 곡은 바로
그 꺼내기만 해도 아픔이 되는 그녀의 트라우마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가수다'의 첫무대에서 꺼내든 이 곡은 가수로서의 그녀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곡이면서, 동시에 아마도 어쩌면 그녀가 불렀던 그 어떤 곡보다 어려운
곡이었을 것이다.
"어릴 적 내가 보았던 아버지의 뒷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산이었습니다.
지금 제 앞에 계신 아버지의 모습은 어느새 야트막한 둔덕이 되었습니다."
이 낮은 읊조림으로 시작한 그녀의 '고백'은 노래가 그 어떤 기교나 과장 없이
담담하게 가사를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힘을 가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아버지'라는 곡이 가진 그 담담함을 이처럼 절절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 인물로
인순이 만한 가수가 있을까.곡에는 그녀의'눈물'속에 담겨진 아버지에 대한 미워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다른 것이 아닌 같은 것이라는 긍정이 담겨져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 진실.
인순이는 그것을 스스로의 삶을 담아 노래로 전해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미워했었다"고 고백하고, 또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마음을 전했다.
그녀가 노래 시작 전에 읊조렸던 그 말, '커다란 산'이 '야트막한 둔덕'이 되었다는
그 말은 아마도 모든 아버지를 가진 이들의 마음일 것이다.물론 이 의미도 이중적이다.
'커다란 산'은 든든함을 말하기도 하지만,그것을 아픔으로 가진 이들에게는 넘어설 수
없는 '막막함'을 뜻하기도 하니까. 그래서 '야트막한 둔덕'이 되었다는 인순이의
진술은 이제 그 고통을 넘어 트라우마마저 관조할 수 있는 자신을 얘기하는 것이다.
인순이를 통해, 물론 그 감회의 크기나 정서는 다르겠지만 우리도 저마다의
아버지를 꺼내보게 된다.
그녀는 노래 첫머리에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남겼다.
"부디 사랑한다는 말을 과거형으로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자식이 부모에게 하지 못한 그 말만을 뜻하는 건 아닐 것이다.
어쩌면 부모가 자식에게 하지 않은 그 말이기도 할 것이니까.
그러니 이제 사랑한다는 말은 모두에게 현재진행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카네기홀에서 두 번씩이나 공연을 가진 인순이는 그 두 번째 무대에서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모셔놓고 "여러분은 모두 제 아버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상처는 아물면서 더 단단해졌고 가수임을 고집하는 '천상 가수'에 의해 고스란히
하나의 노래로 승화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이 노래를 우리에게 선물했다.
상처가 눈물이 아닌 노래가 되었을 때, 그것은 상처의 토로가 아닌 우리의
마음까지 다독이며 두드리는 소통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녀의 눈물이 우리의 눈물이 된 이유라고 할까!,
본명 ; 김인순 (金仁順, Kim Insoon)
출생 ; 1957년 4월 5일
경기도 포천군 청산면 백의리(現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백의리)
신체 ; 163cm, 50kg, B형
가족 ; 배우자 박경배, 딸 박세인
학력 ; 연천청산중학교 (졸업)[7]
종교 ; 천주교(세례명: 세실리아)
소속사 ; 휴맵컨텐츠
데뷔 ; 1978년 희자매 1집 앨범 <희자매>
경력 ; 해밀학교 이사장 (2013년 ~ 현재
1978년 3인조 걸그룹 희자매로 데뷔하고
1981년부터 솔로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히트곡 없는 국민가수'라는 평이 있고, 인지도나 위상, 가창력치고는 본인만의
오리지널 히트곡이 적은 것은 사실이다.<친구여>는 조PD의 곡에 피처링한 거고,
<거위의 꿈>은 카니발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세대를 뛰어넘어
모두에게 기억될 정도의 곡이 적은 것일 뿐,세자매 시절에도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실버들>, 윤종신이 리메이크해 더욱 알려진 김형석의 데뷔작인 발라드<이별연습>,
90년대에 박진영과 협업한 <또> 등은 상당한 인기를 얻은 히트곡이다.
나는 가수다 출연 이후로 <아버지> 역시 뒤늦게 상당한 히트곡이 되었다.
어쨌든 스탠더드에 가까워진 <밤이면 밤마다>가 있기 때문에 범국민적인 히트곡은
아니라고 해도, 본인만의 히트곡이 없다고 볼 순 없다.
인순이는 흑인 주한미군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프리카계 혼혈
한국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한국에서 인순이가 태어나고 나 몰라라 식으로 대처하고
떠났기 때문에 인순이는 아버지를 본 적도 없다고 한다 12살 때 미국에 있는 아버지로
부터 미국행을 제안받았지만 혼자 남을 어머니를 생각해서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와 몇번 편지를 주고 받은 적이 있지만 이후 연락이 끊어졌다고 한다.
기사 당시 홀어머니 혼자 키우는 대부분의 가정이 그렇듯 경제적으로 매우 빈곤했으며
인순이는 힘겹게 중학교를 졸업했다고 한다.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아졌지만 아직도 혼혈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강한데,
1960년대의 대한민국에서 혼혈, 그것도 흑인 혼혈이고, 아버지가 없는 미혼모의 딸
(인순이)에 대한 주변의 시선은 매우 좋지 않았다. 어릴 적 뿐만 아니라 가수로 성공한
후에도 이러한 차별은 은연중 따라다녔다. 결국 이는 인순이의 인생에 큰 상처로 남게
되었다. 익히 알려진 사실 중 하나지만 인순이가 과거 1970년대 희자매로 활동하던
시절 흑인 혼혈 특유의 곱슬머리를 가리기 위해 방송에 나올 때에 머리에 천을
둘러야 했다.
인순이는 자신이 어느 사회에도 100% 속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갖고 평생을 살았으며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기까지 매우 오랫동안 정체성 혼란에 시달렸다고 하였다.
기사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 에서 자신의 고향은 한국도 아니고 미국도 아닌 그 사이에
있는 바다 즉 태평양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현재에는 자신은 당연히 한국인
이며 애국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혼혈로 자라면서 굉장히 힘든 학창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다음 혼혈 세대들은 자신과 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강원도 홍천군에 다문화 대안학교인 해밀학교를 세웠다. 대한민국 교육부에게
정식 인가받은 중학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