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이 넘는 역사 동안 농구계에는 별별 일이 다 있었다. 때로는 오늘날 기준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규정과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농구가 있는 것은 아닐까. 각종 규정과 기록, 사건에 얽힌 100가지 사실을 엄선해 정리해보았다.
1 ‘농구의 창시자’ 네이스미스 박사는 명문 캔자스 대학의 감독이었다. 그러나 ‘창시자’라는 호칭과 성적은 별개였다. 그는 캔자스 대학 역사상 유일하게 5할 승률을 올리지 못한 감독(55승 60패)으로 남았다. 네브라스카 대학과의 경기에선 48-8로 졌다.
2 농구를 두고 ‘Basketball’이라 부르기에 앞서 네이스미스와 일행은 ‘Box Ball’이라 부르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했다. 그 당시에는 막대에 바구니나 박스를 걸어두고 공을 던졌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3 트래블링 룰이 바이얼레이션으로 지정되어 통용된 시기는 1920년대로 추정된다. 이전까지는 차징(charging)이었다. 이전까지는 트래블링 한 번에 파울 하나씩 적립된 셈이었다.
4 1905년에 심판이 두 명으로 늘어난 것은 거친 플레이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2심제가 본격화된 것은 1920년대였다. 그리고 심판이 두 명에서 세 명이 된 배경도 같았다. 1988년 NBA는 거친 수비로 스타들의 돌파가 어려워지자 심판을 한 명 더 늘렸다.
5 1910년대에 뉴욕 지역에서 활약한 오리지널 셀틱스는 ‘계약’의 개념을 도입한 최초의 농구단이었다. 당시 선수들은 수당을 많이 주는 팀을 따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는데, 셀틱스는 최상의 경기력을 위해 계약을 통해 선수들을 관리하였다. 당시 셀틱스 소속이었던 냇 홀먼(Nat Holman)은 50년대 초청 감독자격으로 방한해 국내 농구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6 사실, 오리지널 셀틱스는 상대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다. 너무 압도적이어서 관중들이 지루해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농구단이 해체될 때까지 그들은 193승 11무 1패를 기록했다. 그러나 그들은 포스트 플레이, 지역방어, 맨-투-맨 수비에서의 스위치 디펜스 등을 개발하는 등 농구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7 최초로 원 핸드 점프슛을 던진 선수는 1930년대 스탠포드 대학을 이끌던 안젤로 루이세티로, 점프해서 밀어 던지는 스타일의 슛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대다수 감독들은 ‘미친 짓’이라고 폄하했다. 강백호가 울고 갈 말이다.
8 한국에서 점프슛(투 핸드)을 먼저 던진 팀은 1927년 YMCA 팀으로, 일본 원정길에서 배운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원 핸드 점프슛은 국내에서는 ‘호호 플레이 슛’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9 20년대에는 한국 농구인들 사이에서 ‘멋있는 슛’으로 통했던 슛이 있었다. 한쪽 옆으로 발을 끌면서 던지는 슛이었다. 폼 자체가 멋있어 관중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규칙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시기였기에 트레블링을 부는 심판도 없었다고. 「한국농구80년사」에서 故 이성구 선생은 “좌우간 멋쟁이 슛을 한다는 사람들은 신발의 콧등이 닳아서 발가락이 튀어나오곤 했다”고 회고한다.
10 1921년 이전까지 실내농구코트에서 백보드는 벽에 붙어 있었다. 간혹 선수들은 벽을 타고 올라가 슛을 성공시킬 수도 있었다. 닌자처럼.
11 1940년대 말의 일이었다. NBA에서 최초로 골 밑을 지배했던 故 조지 마이칸(George Mikan)은 평균 21.3득점으로 ‘잡으면 한 골’인 선수였다. 상대팀은 그를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어 관중을동원(?)하기도 했다. 포트웨인과의 경기에서 한 관중은 마이칸을 향해 콩알 탄을 끼운 새총을 쏘다가 적발되었다. 마이칸은 “처음에는 벌인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한 겨울에 벌이 농구장에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라고 회고했다.
12 마이칸은 트래쉬토크의 달인이기도 했다. 시라큐스와 맞붙은 1954년 NBA 파이널에서 미니애폴리스를 3차전 승리로 이끈 그는 “시리즈는 3승0 패가 됐다. 난 목요일에 있을 4차전을 끝내고 토요일에는 골프를 치러갈 것이다”라고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나 이에 자극 받은 시라큐스 선수들의 선전 때문에 마이칸은 골프를 치지 못했다. 시리즈는 7차전까지 갔고, 미니애폴리스는 간신히 우승했다.
13 한국 최초의 농구중계방송은 1939년 7월, 캐나다 웨스턴 팀의 내한 경기였다. 1차전은 연전이, 2차전은 보전이 상대로 나섰고, 3차전에서는 연전과 보전이 연합하여 경기를 치렀다. 장소는 서울운동장 정구장(동대문 운동장)이었다.
14 최초의 NBA 올스타전은 1951년 3월2일에 열렸고, 이는 미국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에서 아이디어를 빌린 것이었다. NBA 사무국의 제안에 구단주와 감독, 선수들이 모두 ‘재미있겠다’며 찬성의 뜻을 모았다. 하지만 그들이 올스타전을 개최하기까지는 엄청난 고민이 뒤따랐다는 후문이다. 그 고민의 주제는 “과연 관중들도 즐거워할까?”였다. 그러나 첫 올스타전엔 만 명의 관중이 입장했다. 당시 평균 관중 3천 명도 안 되는 구단이 많았으니 대성공인 셈이었다. 이 경기는 무료입장이었다.
15 1946년부터 55년까지 뛰었던 ‘팻 프레디(Fat Freddie)’ 스콜라리는 한쪽 눈이 거의 실명상태였음에도 불구, 올스타전에 출전했을 정도로 기량이 뛰어났던 선수였다. 170cm이 조금 넘는 키였지만 그는 초창기 미국 프로농구 최고의 포인트가드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16 존 맥클렌든 감독은 속공을 전술의 개념으로 정착시켰다. 네이스미스 박사의 제자였던 그는 테네시 주립대학의 감독을 맡아 3년 연속으로 대학 농구 우승을 이끌었고, 훗날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그 외에도 풀-코트 프레스, 포-코너 오펜스의 효과를 검증했다.
17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한 일본 대표팀에는 세 명의 조선 선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성구, 염은현, 장이진 선생이 그들로, 일본농구협회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대표팀 유니폼을 입었다.
18 38년부터 40년까지, 전 일본 농구선수권대회에서 보성전문은 3년 연속으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3년 연속 우승한 팀은 대회 원년인 22년부터 23년 3회 대회까지 우승한 도쿄 YMCA 이후 처음이었다. 당시 보전의 핵심은 故 조득준 선생으로, 현 서울 삼성 단장 조승연 씨의 부친이다.
19 FIBA의 정식 농구경기에 철제 백보드를 처음 설치한 건 1896년이었고, 목재로 바뀐 게 1910년경이었다. 백보드가 투명한 유리가 되기 시작한 것은 ‘흥행’을 위해서였다. 높은 곳에 앉은 사람들이 백보드 때문에 경기를 잘 보지 못하겠다고 불평을 하기 시작하면서 백보드를 투명한 재질로 바꾼 것이다. 이후 덩크가 경기 중에 자주 속출하면서 안전을 위해 유리의 질이 강화되었고, 탄력 좋은 선수들을 위해 백보드 아래쪽을 더 튼튼하게 하였다.
20 1910년대만 해도 감독과 코치는 경기 중에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리지 못했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는데, 심지어 수건이나 음료수조차 마음대로 건네지 못했다. 그래서 감독들은 수신호를 통해 작전을 알려주곤 했지만, 적발될 경우 팀 파울이 주어졌다.
21 1947-48시즌 뉴욕 닉스에는 아시아계 선수가 입단해 화제가 됐다. 바로 일본계 와타루 미사카가 그 주인공으로, 유타 대학에서 44년 NCAA 우승을 경험했던 가드였다. 그는 그러나 세계전쟁 여파와 인종차별로 단 3경기만을 뛰었다. 48년에 그는 농구계를 떠났고,
훗날 공로를 인정받아 1999년 유타주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었다.
22 일본의 오까야마(1954년생, 224cm)는 1981년 NBA 드래프트에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전체 171위(8라운드 10위)로 지명되었다. 워리어스와는 사전접촉이 없었지만,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일본 교포들을 염두에 둔 흥행 전략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100미터를 주파하는데 20초가 넘었을 정도로 느렸던 그의 NBA 입성은 이뤄지지 않았다.
23 UCLA 존 우든 감독은 주어진 모든 여건을 전략으로 활용했다. 그는 림의 그물을 단단하게 묶어 슛이 성공돼도 볼이 그물을 빨리 통과하지 못하도록 조정했다. 볼이 통과해 다시 상대의 공격이 재개되는 동안, UCLA는 유유히 백코트 해 수비대형을 갖출 수 있었다는 후문이다.
24 그물에 얽힌 일화는 하나 더 있다. 로욜라 메리먼트 대학의 폴 웨스트헤드 감독은 런-앤-건을 추구했고, 때문에 경기 템포가 더 빨라지길 원했다. 때문에 림의 그물을 느슨하게 묶어 슛이 들어가는 족족 볼이 림을 빨리 통과하도록 했다. 상대팀에게 잠시의 쉴 틈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폴 웨스트헤드는 NBA와 WNBA에서도 런-앤-건으로 인기를 얻었다.
25 1955년 1월 6일 인디애나폴리스가 로체스터를 상대로 6차 연장전 78분 경기를 치른 바로 다음 날, 인디애나폴리스 주전선수 전원은 또다시 48분을 모두 뛰어야 했다. 그 당시에는 선수층이 깊지 않았고, 식스맨과 용병술의 개념도 확립되어 있지 않아, 주축 선수들만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었다.
26 50년대 NBA 파이널 중 가장 격렬했던 시리즈로 기억되고 있는 1957년 NBA 파이널 3차전. 보스턴 셀틱스는 세인트루이스 호크스와의 1승 1패 상황에서 3차전을 위해 세인트루이스로 이동했다. 그런데 슛 연습을 하던 보스턴 선수들은 이상함을 느꼈다. 슛이 모두 짧았던 것이다.
심지어 NBA 초창기 최고의 슈터였던 빌 셔먼도 슛이 림에도 닿지 않았다. 그는 감독이었던 레드 아워백에게 이를 얘기했고, 아워백은 곧 셀틱스쪽 골대가 호크스보다 훨씬 높았음을 알아냈다. 분노한 아워백 감독은 호크스의 구단주 벤 커너에게 분노의 주먹을 날렸다.
27 오늘날 전미 대학농구(NCAA) 토너먼트를 뜻하는 ‘3월의 광란(March Madness)’의 근원은 고교농구였다. 1939년, 일리노이주 고교농구의 열기가 워낙 뜨겁다보니 일리노이주의 한 스포츠 매거진에서 이 단어를 썼던 것이 오늘날 NCAA를 대변하는 최고 히트상품이 됐다.
28 ‘정글 짐(Jungle Jim)’이란 별명의 짐 로스커토프는 1950년대를 빛낸 수비수였다. 그가 NBA에서 은퇴할 때 보스턴 구단은 그의 등 번호 18번을 영구결번 시키려 했지만, 로스커토프는 “후배를 위해 남겨달라”며 이를 사절했다. 그의 대(代)를 이어 18번을 사용하게 된 데이브 코웬스는 70년대 셀틱스를 우승으로 이끌면서 그 번호를 자신의 이름으로 영구결번 시켰다. 훗날 보스턴은 로스커토프를 기념하기 위해 등 번호 없이 이름만 새긴 유니폼을 보스턴 홈 구장 천장에 올렸다.
29 ‘아대’라 불리는 리스트밴드(Wrist Band)는 원래 흘러내리는 양말을 잡기 위한 고무 밴드가 그 용도였다. 윌트 채임벌린이 가난한 시절에 양말이 자꾸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고무 밴드로 이를 고정시켜놓고, 혹시 시합 중에 고무 밴드가 끊어질 것을 걱정, 여분을 준비해서 손목에 차고 다녔던 것이 지금의 용도로 발전했다.
30 NBA에서 양말을 발목까지 내려 신은 최초의 선수는 피트 매러비치(Pete Maravich)였다. 이전까지 선수들은 양말을 무릎까지 올려 신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의 노-룩 패스 역시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31 카림 압둘-자바는 1학년이었을 때만 해도 대학 1학년들은 정규경기에 나설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1학년들을 이끌고 UCLA 정규팀과 연습경기를 가져 당당히 승리를 거두었다. 압둘-자바가 2학년이 되던 해, 그 시즌의 UCLA는 30전 전승이라는 새 기록을 올리며 대학무대를 평정했다.
32 윌트 채임벌린은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필라델피아 고교시절 필라델피아주의 삼단뛰기 챔피언이자 400미터 허들 유망주였다. 캔자스 대학 진학 후에도 높이뛰기 대회에 나서 컨퍼런스 챔피언 자리에 등극했다. 또, 채임벌린은 은퇴 후 배구선수로 변신해 미국 배구 발전에 공헌했다. 1984년 LA 올림픽과 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우승한 미국 배구대표팀 멤버들이 바로 채임벌린의 친구들이었다.
33 채임벌린은 NBA의 한 경기 최다 득점인 100득점을 올리던 날에도 낮에 2명의 여성과 뜨거운(?) 데이트를 즐긴 것으로 알려졌다.
34 보스턴 셀틱스는 흑인 선수들로만 주전을 구성한 최초의 프로농구단이었다. 故 레드 아워백 감독은 63-64시즌에 빌 러셀, 톰 샌더스, 윌리 널츠, 샘 존스, KC 존스로 주전을 구성했고, 셀틱스는 NBA 역대 최다 우승팀으로 남았다.
35 1966년 NCAA 우승팀 텍사스 웨스턴 대학은 흑인들이 주전을 이룬 최초의 대학팀이었다. 팀을 이끌었던 돈 해스킨스 감독은 흑인을 출전시켰다는 이유로 4만여 통의 협박편지를 받기도 했다.
36 한국 농구에서 가장 먼저 정장을 입은 감독은 방열과 박한이었다.
방열은 78년 실업연맹전 삼성과의 경기부터 양복을 입었다. 이전만 해도 트레이닝복과 점퍼차림, 여기에 운동화를 신고 경기장에 나서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었다.
37 75-76시즌 NBA 역사상 최초로 스틸과 어시스트를 리드했던 슬릭 와츠는 NBA 최초의
삭발 선수다. 머리숱이 없어서 머리를 밀었던 그는 땀이 눈에 흘러 들어가 플레이에 지장을 주자 헤드밴드를 착용했다.
38 90년대 댈러스 매버릭스, 마이애미 히트 등에서 전문 식스맨으로 활약했던 포워드 크리스 게틀링은 10대때 사고로 머리를 수술한 후, 그 흉터를 가리기 위해 헤드밴드를 사용하기도 했다.
39 1979년 NBA에서 최초의 여성 선수가 탄생한다. 당시 24살이었던 앤 메이어스는 인디애나 페이서스와 1년 계약을 맺었다. 프로 입단을 위해 국가대표 자격까지 포기했던 메이어스는 그러나, 끝내 남성의 벽은 넘지 못했다.
40 NBA가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공산국가로부터 농구 스타를 스카우트하는데는 구소련의 체스 챔피언 게리 카스파로프(Garry kasparov)의 역할이 컸다. 체스역사상 최연소 세계챔피언인 그는
명성을 쌓은 덕분에 소련에서의 영향력도 대단했다. 농구 팬이었던 카스파로프는 비밀리에 선수와 구단의 만남을 주선해주었고, 덕분에 스카우트의 길이 열리게 됐다.
41 한때 ‘가짜 신동파’ 사건이 있었다. 당시 국민적 스포츠 영웅이었던 신동파를 사칭한 그 남자는 또 다른 국가대표였던 김무현으로 둔갑하기도 했으나, 신동파의 육군팀 동료였던 백문철에 의해 우연히 덜미를 잡혔다.
42 NBA도 1984년까지 보상선수 제도가 있었다. 그리고 보상선수 제도로 가장 쏠쏠한 재미를 본 팀은 LA 레이커스였다. 76년 7월, 레이커스에서 뛰던 게일 굿리치는 FA 자격을 얻어 뉴올리언스 재즈(현 유타 재즈)로 이적했다. 재즈는 당시 보상선수 제도에 따라 77년과 79년 1라운드 지명권을 레이커스에 내줬다. 그런데 재즈는 78-79시즌에 26승 56패로 NBA 꼴찌가 됐고, 공교롭게도 드래프트 지명권은 1순위 지명권이 돼버렸다. 레이커스는 쾌재를 불렀다. 그들은 그 지명권으로 매직 존슨을 지명했다.
43 1972년 뮌헨 올림픽은 미국이 농구 우승에 실패한 최초의 올림픽이었다. 대표팀 역사상 가장 어린 팀이었던 미국은 소련과의 결승에서 거의 승리를 챙긴 듯 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시계 계시기가 잘못됐다는 주최측의 억지 덕분에 소련은 마지막 역전찬스를 잡았고, 51-50으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 훗날 미국 대표팀 선수들은 ‘냉전 시대’가 안겨준 피해라 회고했다.
44 1973년 NBA 드래프트 5라운드에서 애틀랜타 호크스에 지명된 데이브 윈필드는 MLB, NFL, NBA, ABA 등 4개 단체에서 지명된 최초의 선수였다. 윈필드는 전공인 외야수를 택했고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그렇지만 대학 농구사상 가장 뛰어난 리바운더로도 기억되고 있다.
45 박한 현 대학농구연맹 회장은 1976년 3월28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이상백배 대회에서 한양대에게 87-83으로 이긴 후 19년에 걸쳐 통산 500승을 달성했다. 96년 8월 23일, 그가 이 기록을 달성할 무렵 통산 성적은 500승 161패 4무였다.
46 미국 대학농구무대에서 ‘활약’다운 활약을 펼친 최초의 외국인은 1970년대의 크레시미르 코직(Kresimir Cosic)으로 기억되고 있다. 70년부터 73년까지 브리검영 대학에서 뛴 그는 유고슬라비아 태생으로, 매 시즌 평균 20득점을 올리며 활약했다. 당시만 해도 동유럽 선수가 미국무대에서 뛰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는데, 211cm의 키에 장거리 슛까지 펑펑 터트렸기에 더 많은 화제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FIBA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그를 추모하기 위해 크로아티아에서는 매년 ‘코직 컵’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47 지금의 NBA 로고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71년이었다. 로고를 바꾼 이유는 간단했다. NBA 창설 35주년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이전 로고는 원 안에 ‘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이라 새겨져 있었는데, 마치 야구리그의 단체 같다는 느낌이었고, 세련되지 못했다.
48 1977-78시즌, 보스턴 셀틱스의 구단주 어브 레빈과 버팔로 브레이브스의 구단주 존 영 브라운은 팀을 맞바꾸었다. 독립영화 제작자였던 레빈은 사업영역을 넓히기 위해 할리우드로 가길 원했고, 브라운의 브레이브스를 받아 샌프란시스코로 연고지를 이전했다. 이 구단은 훗날 LA 클리퍼스가 된다. 반면 KFC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운 브라운은 더 많은 돈이 필요해 전통의 보스턴을 원했다. 그러나 두 구단주 모두 거의 ‘탄핵’받다시피 하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49 마이클 조던이 보스턴을 상대로 63점을 올려 한 경기 최다득점 기록을 올린 바로 다음 경기였던 3차전에서, 셀틱스 선수들은 조던을 단 19점으로 묶었다. 셀틱스는 122-104로 이겼다.
50 한국 농구의 가장 큰 적이었던 무태추는 현역 시절 238cm, 182kg의 거구였다. 그는 중국농구 한 경기 최다득점 기록(80점)을 보유하고 있다. 군인 팀인 빠이 로케츠 소속이었던 그는 1979년 4월에 열린 NBA 워싱턴 블레츠와의 친선 경기에서 팀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무태추는 87년 은퇴했다.
51 에어(air)테크놀로지가 사용된 최초의 운동화가 등장한 건 1979년이었다. ‘TAILWIND (테일윈드)’라 불린 이 신발은 런닝화로, 농구 에어포스 원(AF1)의 효시라고도 볼 수 있다. 에어포스 원 이전의 농구화는 현재의 신발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미드 솔과 아웃 솔의 구분이 모호했고, 단지 발목이 높은 신발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에어포스 원은 에어-솔을 내장하였고 발목을 감싸는 스트랩을 설치하여 농구선수를 보호하는 본격적인 농구화의 시작을 알렸다.
52 1984년 NBA 드래프트 10라운드에서 시카고 불스는 칼 루이스를 지명했다. 84년 LA 올림픽 4관왕을 비롯해 총 4개 대회에서 9번 우승했던 ‘육상 황제’루이스는 NFL 드래프트에서도 지명됐다.
53 마이클 조던의 라이벌이었던 존 스탁스가 뉴욕 닉스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부상 덕분(?)이었다. 90년 트레이닝 캠프 마지막 날까지 별 활약이 없었던 스탁스는 패트릭 유잉과 충돌하면서 무릎을 다쳤다. NBA 규정상 부상자는 방출할 수 없다. 그 대상에 포함됐던 스탁스는 부상 회복 후 식스맨으로서 입지를 굳혔다.
54 80년대부터 16년간 886경기를 뛰었던 크리스 더들리는 당뇨병 환자였다. 매 경기 쏟아지는 피로를 참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는 그는 은퇴 후 당뇨병으로 고생하는 아이들을 돕기 위해 오레곤 지역에 자선단체를 설립했다.
55 올랜도 매직의 부사장인 팻 윌리엄스는 농구 경기에서 ‘이벤트’의 개념으로 가수를 초청하는 아이디어를 낸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 아이디어가 실현된 곳은 필라델피아 76ERS였다. 한편 윌리엄스는 여러 나라에서 아이를 입양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한국인도 2명 있다.
56 2002년 8월, 85세의 나이로 타계한 스포츠 캐스터 칙 헌(Chick Hearn)은 슬램덩크(Slam Dunk), 에어볼(Air Ball), 핑거롤(Finger Roll), 가비지 타임(Garbage Time) 등의 용어를 만들어낸 인물이다. 그 용어 모두 중계 중 즉석으로 만들어졌다고.
57 81년과 82년, 고려대는 정기전에서 천당과 지옥을 맛봤다. 누구도 이길 것이라 예상치 않았던 81년 정기전에서는 1학년 양중철과 최철권의 깜짝 기용과 박종천에 대한 압박 수비로 77-76으로 승리했다. 당시 정기전에서 야구, 아이스하키, 럭비가 모두 진 상황에서 농구만 기를 펼 수 있었다. 하지만 1년 뒤 열린 82년 정기전에서는 고대의 압승이 예상됐지만 이민현의 막판 실책과 김현준의 위닝샷으로 연대가 81-80으로 이겼다. 이때는 축구와 야구, 아이스하키가 이겼지만 농구와 럭비만 패전을 기록해 자존심을 구겼다.
58 NBA가 샐러리 캡을 도입한 이유는 재정난 탈출을 위해서였다. 하늘을 찌를 듯 솟는 선수들의 연봉 인상을 합리적으로 제한함으로써 구단마다 재정난 탈출을 시도한 것. 이러한 샐러리 캡 제도를 제안한 것은 데이비드 스턴 총재로, 1984년 총재 취임 직후 처음으로 가진 선수협회와의 단체교섭에서 가장 먼저 나온 안건으로 알려져 있다.
59 마이클 조던이 시카고 불스 유니폼을 입고 뛴 1,109 경기에서 한 자리 득점에 묶인 경기는 단 1경기다. 그는 86년 3월 22일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단 8점에 묶였다. 불스도 123-97로 패했다.
60 농구대잔치 사상 처음으로 열린 87년 올스타전은 노장팀과 소장팀의 대결 형식으로 치러졌다. 노장팀에는 박수교 이문규 박인규 진효준 신동찬 등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고, 이충희와 김현준이 막내로 합류했다. 소장팀에서는 고명화 김진 조명선 유재학 한기범 등 젊은 선수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고, 막내는 중앙대 허재였다.
61 농구대잔치 여자부 최다연승은 1987년 국민은행의 28연승이었다.
이 기록은 86-87시즌 우승팀이자 당대 최강이었던 동방생명에 의해 중단(66-61, 패)됐다.
국민은행에선 정미라 조문주 등이 활약했고, 동방생명에서는 김화순과 최경희가 있었다.
62 최철권은 1987년 10월14일 광주 전국체전에서 97점을 기록하며 한국농구 한 경기 최다득점 기록을 남겼다. 전북선발로 출전한 그는 3점슛 18개를 성공시켰고, 팀은 부산선발에 135-95로 승리했다.
63 중앙대 시절 팀에서 득점 어시스트 리바운드 스틸 부문에서 탑을 달렸던 허재는 87년 10월7일 단국대전에서 전반 54점을 홀로 득점하는 등 총 75점을 기록하면서 팀 승리(99-97)를 이끌었다. 그는 기아에서의 농구대잔치 데뷔전이었던 88년 12월8일 국민대학교전에서 27점 18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실업 첫 경기여서 다소 긴장했던 것 같다.” 경기 후 허재의 소감이었다.
64 세계선수권대회 사상 한 경기 최다득점 기록은 허재가 갖고 있다. 허재는 1990년 대회 이집트전에서 62득점을 폭발시켰다. 김인건 경기이사는 “그 경기에서 허재는 따로 지시가 필요하지 않았을 정도로 신들린 듯한 활약을 보였다”고 회고했다. 이충희도 1986년 브라질전에서 45점을 폭발시켰고 이는 역대 7위다.
65 88년 서울 올림픽에 앞서 존 탐슨 미국 대표팀 감독은 3점슛 강화를 위해 슈터 영입에 심혈을 기울였다. 대표팀 후보 92명 중 17명이 3점슛을 위해 영입된 선수들이었다. 그 중에는 스티브 커와 같은 전문 슈터들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88 올림픽에서 미국을 놀라게 한 것은 전문 슈터들이 아닌, 3점슛을 던지는 장신 센터·포워드들이었다.
66 NBA 3대 총재 래리 오브라이언은 1990년, 농구명예의 전당 후보에 올랐지만 “비밀 투표방식은 비민주적”이라며 입성을 거부했다. 오브라이언 전 총재는 케네디 대통령의 측근으로 민주당의장을 거쳐 75년부터 84년까지 NBA 총재를 지냈다.
67 ‘뉴욕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센터 패트릭 유잉은 91년 연봉문제로 불화가 심해지자 팻 라일리 감독에게 자신이 트레이드 되고 싶은 팀 목록을 적어내기도 했다. 포틀랜드, 피닉스, 골든스테이트, 보스턴, 워싱턴 등이 그 대상이었다. 그러나 트레이드는 성사되지 않았고 연봉 협상은 NBA 재정위원회에 회부된 끝에 간신히 마무리 될 수 있었다.
68 매직 존슨이 에이즈 감염 사실을 밝힌 뒤 한동안 ‘매직의 여자들’이 화제가 된 바 있다. 이에 대해서는 국내 주요 일간지에서도 보도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끌었다. 그들 중에는 복싱스타 타이슨의 전처였던 로빈 기븐스, 성인영화 배우 히자 헌터와 같은 유명인사들도 있었다.
69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할 ‘드림팀’ 감독을 맡은 척데일리(당시 디트로이트 감독)는 취임 직후 농구협회측에 자신이 원하는 선수들을 포지션별로 정리해 제출했다. 센터 부문에서는 데이비드 로빈슨과 패트릭 유잉이, 포인트가드에서는 매직 존슨과 아이재아 토마스가, 슈팅가드에서는 마이클 조던과 조 두마스가 1, 2위에 각각 올랐다. 스몰포워드에서는 스카티 피펜과 크리스 멀린이, 파워포워드에서는 칼 말론과 데니스 로드맨이 1, 2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중 디트로이트 선수들은 단 1명도 ‘드림팀’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70 중국 네티즌들은 마지앙에 대해 ‘시대를 잘 못 타고난 선수’라 한다. 그는 NCAA 무대에서 뛴 중국 농구사상 최초의 선수였다. 1993년 유타 대학에서 뛰었던 그는 NBA 진출도 노렸지만, LA 클리퍼스의 시범경기 로스터에만 올랐을 뿐, 방출된 후 더 이상의 도전은 하지 못했다.
71 이상민이 연세대를 택한 결정적 계기 중 하나는 유재학(울산 모비스 감독)이었다. 시대를 풍미했던 유재학은 연세대에서 코치와 선수로 이상민과 만났다.
72 1994년 불의의 고통사고로 사망한 드라젠 페트로비치는 유고슬라비아를 유럽선수권대회와 올림픽 준우승으로 이끈 ‘국민농구선수’였다. 그가 사망하자 고향 자그레브(Zagreb)에는 10만 명이 넘는 팬들이 찾아 페트로비치를 추모했다.
73 1994년, 야구선수였던 마이클 조던이 소속팀이었던 버밍햄 바론즈의 원정 여행을 위해 기증한 버스는 33만 7,000 달러로 좌석 35개, TV 6대, 바(Bar)가 갖춰져 있었다. 마이너리그 야구단에게는 과분한 선물이었다.
74 95년 12월28일 선경증권 유영주는 외환은행을 상대로 55득점을 기록, 국내 대잔치 통산 여자부 최다득점 기록을 경신했다. 이는 83년 12월11일 김영희(한국화장품)가 조흥은행을 상대로 기록한 52득점 이후 13년 만에 만들어진 신기록이었다.
75 1996년 발표된 서태지와 아이들 3집 앨범 타이틀곡
‘발해를 꿈꾸며’뮤직비디오에는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농구화 ‘AIR FORCE ONE HIGH(에어포스 원 하이)’가 등장한다. 91년 발매된 이 신발은 독특한 디자인으로 여전히 많은 매니아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서태지가 신고 등장한 것은 일명 ‘빨간 완창’으로 불리고 있다.
76 96년 1월 11일, 현대산업개발의 7년차 김은영은 코오롱을 상대로 14점 11리바운드 10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한국농구 사상 첫 트리플-더블이었다. 남자부에서는 15일 뒤인 1월 26일에 이상민이 상무 소속으로 출전해 SBS를 상대로 13점 17리바운드 10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이상민은 2경기 뒤 친정팀 현대전자전에서도 11점 11리바운드 10어시스트를 기록했다.
77 제51회 종별선수권대회를 끝으로 남자일반부 경기가 사라졌다. 프로출범이 이유였다. 이 대회에서 신생팀 동양 오리온스는 처음이자 마지막 종별대회 우승을 거머쥐었다. 박광호 감독과 김진 코치가 이끌었고 전희철 김병철 정재훈 허남영 이흥섭 등이 뛰었다.
78 NBA의 최다관중동원 기록은 대부분 디트로이트 피스톤스가 갖고 있지만, 1위는 1998년에 애틀랜타 호크스의 조지아돔에서 기록됐다. 시카고 불스를 보기 위해 무려6만 2,046명이 조지아돔을 찾았다. 역대 2, 3, 5위는 실버 돔에서 작성됐다.
79 경희대 김현국 코치는 프로농구 출신 대학 지도자 1호다.
그는 99년 6월에 열린 제36회 전국대학농구연맹전 1차대회부터 최부영 감독과 함께 벤치를 이끌며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프로에서 그는 97년 나산에 입단한 뒤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아왔다.
80 99년, 프로농구 선수들은 결식아동을 돕기 위한 자선음반을 녹음하기도 했다. 자선음반의 타이틀은 ‘별들의 전쟁’으로, 이 앨범에는 이상민 전희철 정재근 주희정 문경은 우지원 등이 참가했다.
81 1999년 월드 유니버시티 게임에서 우승한 미국 대표팀에는 케빈 프리먼(전 SK), 피트 마이클(전 오리온스)이 있었으며 브랜든 헤이우드(NBA 워싱턴), 케년 마틴(NBA 덴버), 마이클 레드(NBA 밀워키) 등이 있었다. 마이클은 9.1득점으로 팀내 득점 3위였다. 이들과 같은 B조에는 한국도 있었다. 임재현, 이정래, 이병석, 김주성, 이규섭, 송영진, 전형수,
김태환, 정훈 등이 한 팀이었고, 미국에 96-77로 패했다. 한국은 3승 4패로 23팀 중 17위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첸 커, 멕시코에서는 에드왈도 나허라, 체코에서는 이어리 웰시 등이 유망주로 있었다.
82 통일농구대회를 위해 방한했던 북한의 이명훈을 위해 현대 아산은 버스와 침대를 개조하는 등 편의를 개조했다. 이명훈은 235cm의 세계 최장신 농구선수이며 앉은키만 130cm였다.
83 2000년 1월 16일 신세기전 4쿼터에서 서장훈은 오랜만에 덩크슛을 꽂았다. 이는 1999-2000시즌 서장훈의 첫 덩크슛이었다. 발목이 좋지 않아 덩크를 자제해왔던 그가 덩크를 시도한 것은 하니발과 존스의 성화 때문이었다.
84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쿠바전에서 전주원은 올림픽 경기 사상 첫 트리플-더블(10점 11어시스트 10리바운드)을 기록했다. 한국은 쿠바에 69-56으로 이기면서 8강에 진출했다.
85 창원 LG의 쉐드릭 다운스는 2000년 1월 16일 기아와의 경기에서 주전으로 뛰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외국인선수가 주전에서 제외되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연인 즉 이렇다. 다운스가 유니폼을 분실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1쿼터 중반에야 급조한 유니폼을 입고 출전했다.
86 2000-01시즌에 신세기에서 뛰었던 켄드릭 브룩스는 시즌 중 사촌 여동생을 한국으로 초청했다. 그런데 그녀는 서울에 오자마자 대뜸 서대문 형무소와 임진각, 판문점 등을 가고 싶다고 말해 주위를 당황시켰다. 알고 보니 롱비치 주립대학서 사회정치학을 전공하면서 평소 한국의 분단 상황과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87 2001년 3월 7일 수원에서 열린 삼성과 현대의 대결은 23년간 지속되었던 농구명가 라이벌전에 종지부를 찍던 날이었다. 현대가 2000-01시즌을 끝으로 KCC로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00-01시즌 중 두 번이나 리그 1위 삼성의 연승 행진을 가로막았던 현대는 그러나 이 경기에서는
94-79로 패하면서 삼성의 시즌 최다승 신기록(34승)을 도왔다.
88 조던은 2002년 1월 4일 홈 경기에서 NBA 사상 4번째(카림 압둘-자바, 윌트 채임벌린, 칼 말론)로 3만 득점을 돌파했다. 공교롭게도 이날 그의 상대는 오랜 친정팀이었던 시카고였다.
89 오스카 슈미트(Oscar Schmidt)는 브라질의 ‘마이클 조던’이었다. ‘성스러운 손’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그는 45살까지 선수 생활을 했고, 마지막 시즌에도 평균 34득점을 기록했다. 등 번호 14번은 브라질 농구협회 차원에서 영구결번 됐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45번째 생일날 열린 경기에서 같은 팀 후배에게 주먹을 날려 퇴장을 당하기도 했다. 나중에 밝혀진 이유는 ‘나에게 패스를 안해서’였다.
90 NBA 선수 중에는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 은퇴 후 어렵게 살아가는 선수가 많다. 그러나 대부분 자업자득이다. 90년대 평균 200만 달러를 벌었던 시카고 불스 우승멤버 제이슨 캐피는 이른바 ‘현지 처’를 지나치게 많이 만들어둔 탓에 매달 줘야했던 양육비만 해도 어마어마했다는 후문이다. 그는 지금 카 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올스타까지 선발됐던 케니 앤더슨도 바람기와 위자료, 양육비 때문에 파산신청을 했다.
91 2005년 ABC 대회에서 중국은 사우디를 상대로 98-10으로 승리했다. 야오밍의 존재감은 사우디가 감당하기에 너무 버거웠다. 완패에도 불구하고 사우디 대표팀은 경기 후 야오밍에게 기념 사진 촬영을 요청했다.
92 시카고 불스의 벤 월러스는 수비에 비해 공격력이 떨어진다. 수술 중 손상된 팔 인대 때문이다. 오늘날 자유투 작전의 희생양으로 전락한 이유이다. 월러스가 살아남은 이유는 공격이 아닌 수비이긴 하지만 말이다.
93 2005년 2월에 있었던 프로농구 올스타전에서 드림팀 감독을 맡던 전창진은 오로지 올스타에서만 볼 수 있었던 라인업을 선보였다. 3쿼터 선발로 코트에는 자밀 왓킨스, 김주성, 애런 맥기, 현주엽, 조우현을 내보낸 것이다. 이 라인업은 4분 뒤 김승현, 신기성, 황성인, 양동근, 양경민의 ‘키 컸으면’ 라인업으로 변신한다. 김승현은 주니어 버로를 상대로 포스트-업을 시도해 바스켓 카운트까지 얻어내며 관중들을 즐겁게 했다. 오로지 올스타전이기에 가능했던 장면이었다.
94 2005년 11월 7일. 전주 KCC와 대구 오리온스전에서 찰스 민렌드는 종료 버저와 함께 동점슛을 터트려 경기를 연장으로 끌고 갔다. 이어 그는 종료 직전 덩크슛으로 승리를 자축했다. 덕분에 KCC는 100점 고지를 밟았고, 경기는 100-90으로 막을 내렸다. 그의 버저비터와 덩크슛이 바꾼 건 승패와 점수대만이 아니었다. 농구 토토의 적중자가 단 1명으로 좁혀지는 파란(?)이 일어난 것.
덕분에 1등 적중자는 18억 원의 대박을 터트렸다.
95 국내 신인선수 드래프트에는 대학선수만 나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인도 테스트를 통과하면 얼마든지 드래프트에 참가할 수 있다. 그 동안 정식 농구수업을 못 받았던 독일동포, 국방부 소속 의장대에서 복무하던 현역 병장, 농구단 프런트 등 다양한 신분의 드래프트 희망자들이 나서서 눈길을 끌었다.
96 샌안토니오 스퍼스는 매 시즌 한번씩 17일간 홈 구장(AT&T 센터)을 비워줘야 한다.
바로 샌안토니오 지역의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인 샌안토니오 스톡 쇼 & 로데오(San Antonio Stock Show and Rodeo) 때문이다. 이 행사 기간에 스퍼스는 7~8차례의 원정 경기를 갖는데, 이를 두고 로데오 로드 트립(Rodeo Road Trip)이라 한다. 2002년부터 시작된 로데오 로드 트립에서 스퍼스는 통산 29승 10패를 기록하고 있다.
97 시카고 불스도 홈 구장 유나이티드 센터를 정기적으로 2주간 비워줘야 한다. 바로 매년 11월 초에 유나이티드 센터에서 열리는 초대형 써커스 행사 때문이다. 이 기간에 불스도 원정 경기를 연달아 갖는데, 이를 두고 써커스 로드 트립(Circus Road Trip)이라 부른다. 불스는 마이클 조던 은퇴 후 써커스 로드 트립에서 5승 47패를 기록 중이다.
98 울산 모비스에서 뛰고 있는 에릭 산드린은 전통의 묘기 농구단 할렘 글로브트로터스(Harlem Globetrotters)에서 선수 생활을 한 바 있다. 당시 그의 별명은 샹하이(Shanghi)였다. 이유는 아시아인의 피가 흐르는 농구선수였기 때문이라고.
99 2007년 3월 경제전문지 포브스(Forbes)紙가 발표한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100인」에서 1위를 차지한 이는 바로 야오밍이었다. 야오밍은 4년 연속으로 1위에 올랐다. 2위는 허들선수 루시앙이었는데, 야오밍이 2006년 납부한 세금은 무려 3,250만 달러로 루시앙보다 약 5배 많은 액수였다.
100 2007년 추계연맹전에서 동아중은 성성중에 64-60으로 승리했다.
이 경기는 중고연맹 주최대회 사상 처음으로 열린 4차 연장 경기였다. 성성중은 집중력을 발휘해 계속해 경기를 연장으로 끌고 가는 저력을 발휘했다.
글 손대범 기자
JUMPBALL 2008년 04월호(발행일 03월 25일) 기사
2008-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