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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고려 이전
과거제도 이전 고대 한국에서 인재를 뽑을 때는 귀족 등 신분을 대대로 세습하거나, 잘 아는 사람을 추천하고 추천자가 일종의 보증을 서는 천거 방식을 이용했다. 신라의 화랑제도 역시 보통 청소년 수련 단체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화랑의 매력으로 인재를 모으고 화랑과 휘하에 모인 낭도의 공동생활로 결속력을 다지고 교육해 그 중에서 능력이 우수한 자를 천거해 뽑아 신라의 문무관직에 부임시키는 역할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유교 지식에 대한 시험을 치러 관리를 등용한 제도는 신라의 독서삼품과이다. 이때의 시험은 전적으로 시험 결과에 따라 관리를 등용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 등용에 성적을 단지 참고하는 형식이었기에 본격적으로 과거 제도를 도입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식 과거제도는 고려 4대 왕 광종 때 들어왔다.
신라에서 골품제의 벽에 막힌 6두품 이하는 독서삼품과를 통해도 출세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당나라의 외국인 전형 시험인 빈공과에 응시하는 경우도 많았다. 당나라 유학생과 거기에 딸린 인력은 일종의 코리아타운인 신라방의 구성원이었다. 당나라에서 공부했거나 빈공과에 급제한 경력이 있으면 신라에 귀국해서도 적어도 태수 자리는 보장되었다.
발해의 과거제에 대해 자세한 기록은 없다. 당나라의 빈공과에는 발해 지식인들도 많이 응시했고, 당연히 신라 학생들과는 상당한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 빈공과 수석은 주로 신라 학생들이 차지하다가 한 번 발해의 오소도(烏炤度)가 신라의 이동(李同)을 누르고 수석을 차지한 적이 있었는데, 신라 유학생들의 대선배였던 최치원이 '국가적인 굴욕이다'이라고 깠을 정도였다. 오소도의 아들 오광찬(烏光贊)도 나중에 당나라 빈공과에 응시했는데, 이번엔 신라의 최언위가 오광찬보다 등수가 높았다. 마침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던 오소도가 오광찬의 등수를 최언위보다 높여줄 것을 당나라에 요청했지만 거부당하기도 했다.
2.2. 고려
광종이 영입한 후주 출신 쌍기의 건의에 따라 958년(광종 9년)에 처음 시행되었다. 초기에는 중국 귀화인들이 주로 지공거를 맡았다. 쌍기도 첫 지공거(시험 감독)를 역임했다.
고려시대에는 제술과, 명경과, 잡과가 있었다. 제술과는 문학적 재능과 정책(=글짓기, 현대의 논술)으로 인재를 뽑는 시험이었고, 명경과는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으로 인재를 뽑는 시험이었다. 제술과는 정책과 관련된 시무책보다는 문학적 재능을 더 중시했고 암기보다는 지식을 이용한 창작을 중요시했기에, 제술과에서 뽑는 인원이 명경과보다 훨씬 많았고 대우도 제술과가 명경과보다 더 좋았다. 쉽게 말해 제술과에서는 '(어떤 정책이나 사상에 대해) 논어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오며 주자는 이렇게 말했는데, 그것에 근거하여 내 생각은 이렇고 이런 정책이다.' 라면 명경과에서는 '~한 경전에서는 이렇다.'라는 것이 시험 내용이었다.
물론 양인들도 과거로 등용될 수 있었지만 자급자족하기엔 경제력이 받쳐주지 못했다. 현대에도 공무원 시험 치른다고 몇 년간 부모님들이 뒷바라지해주는(특히 돈) 사례가 많다. 물론 또다른 비교 대상인 대학수학능력시험은 말할 것도 없다. 옛날에는 멀쩡한 청년 한 명이 농사일을 하지 않고 골방에서 책과 씨름하게 되면 기회비용이 매우 컸기에 어지간한 각오와 재력이 없는 이상 과거에 도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노동력이 중요한 농경사회에서 성인 남성 하나가 농사일을 안하고 앉아서 언제 합격할지도 모르는 공부만 하고 있는 것은 엄청난 손해다. 따라서 응시자의 대부분은 중류층의 향리나 귀족이었고, 이들은 대개 진짜 과거라고 볼 수 있는 문과에 응시했다. 양인들은 대부분 그나마 만만한 기술 쪽 잡과로 몰렸다.
고려의 과거제도는 다음과 같이 총 3가지 단계로 구성된 삼장제를 채택하였다. 이것은 조선시대 문과의 2단계 소과, 3단계 대과에 영향을 주었다.
향시(계수관시) - 1차시험. 개경이면 상공, 지방이면 향공, 외국인이 대상이면 빈공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향공의 숫자를 제한하게 하는 시험관이 주요 지역의 지방 수령들인 계수관이었기 때문에 계수관시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문과의 경우 향공진사에 대해서 신분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상층향리인 2등급 부호장 이상의 손자 혹은 5품인 부호정 이상의 아들 가운데 1명에게만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 고려시대의 과거제도는 해석이 복잡하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과거제도 혹은 중국의 그것과 같다는 보장이 없다.
국자감시(사마시) - 2차시험. 상공과 향공 합격자, 3년 동안 300일 이상 근무한 현직관리와 12공도생만이 응시가능한 시험이다. 고려시대 학교 국자감을 수료 완료하고 졸업했을 시 일종의 장학생 특전으로 바로 2단계인 국자감시를 볼 수 있게 해줬다. 일명 사마진사과로, 여기에 합격하면 진사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쪽도 다른 해석이 있다. 즉, 국자감시는 2차 시험이 아니라 국자감 입학자격 시험이고, 국자감을 졸업해야 진짜 과거시험인 예부시 자격이 주어졌다는 학설이다.
예부시(동당시) - 3차시험. 일명 동당감시라고 부르며, 여기서 합격하면 바로 관리가 된다. 고려 초기에는 호족자제들이 바로 시험을 보러 오기도 했지만, 덕종 시기에 국자감시가 생기면서 이런 직행코스는 사라지게 된다. 예부시에서는 3장 연권법이라고 해서 경서를 시험보는 초장을 통과해서 중장에, 시와 부를 시험보는 중장을 통과해야 종장의 시험 자격이 주어지고, 마지막으로 일종의 현실문제에 대한 대답인 대책을 시험보는 종장까지 합격하여야 예부시에 합격하게 된다. 이 3장 연권법은 조선시대 대과의 초시,복시, 전시에 그대로 전해진다.
복시 - 특별시험. 다른 국가의 과거제도에 있는 전시에 해당한다. 예부시에 합격한 이들을 대상으로 국왕 앞에서 치르는 시험으로, 복시는 단순히 급제생들의 순위를 매기는 것이었기에 떨어진다고 해서 관직에 못 오르는 건 아니었고, 상설된 것도 아니었다.
국자감시에 사학인 12공도생들의 응시가 가능한 점이나, 후술할 지공거 제도가 유지되는 점,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인 전시가 비상설이었으며 결국 의종 이후에는 거의 시행되지 못한 점 등을 고려하면 전반적으로 그 발전상이 당나라의 제도와 송나라의 제도의 중간 정도의 위치에 있으며, 고려의 왕권이 후대 조선에 비해 확립되지 못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로 인해 붕당의 원조격인 당여가 형성되었다.
공민왕은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송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향시-회시-전시의 과거삼층제를 도입했지만, 지공거들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결국 실패하였다. 공민왕의 과거제 개혁을 나중에 조선이 계승하게 된다.
예부시의 시험 감독은 지공거라고 했다. 지공거는 단순한 시험 감독이 아니었다. 채점도 했고, 심지어 수험생이 맘에 들면 붙이고 맘에 안 들면 떨어뜨리는 일도 잦았다. 나중에 급제하거나 높은 관직에 오를 때에도 지공거의 힘이 필요했다. 사료에 의하면 많은 문생들은 지공거를 좌주라고 불렀고 등용문에 오르려면 이들에게 아부하는 것은 필수였다고 한다. 이는 중국의 과거제도의 폐해와 유사한데 전시 제도로 보완한 중국 송나라와 명청시대에 조차 시험감독관을 일평생 스승님으로 모시며 동문끼리 붕당으로 뭉치는 폐단이 있었다. 진사 중국 항목 참조
고려도 당연히 지공거가 사학의 폐단 중 하나로 떠오르며 과거제가 황폐해졌다. 한 스승으로부터 배운 사형제 관계가 지공거와 수험자가 될 경우, 선배가 후배를 관직에 꽂아주는 식의 비리가 일어났다. 게다가 새로 뽑은 사람이 이후 지공거가 되고, 먼저 지공거였던 자는 낙향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 제자들이 새로운 지공거에게 시험을 보는 등 서로 끌어주고 당겨주는 사이클이 완성되어버려 폐단이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 문벌귀족까지 가세했다. 지공거의 힘을 줄이기 위해서 시행된 것이 앞서 언급한 전시다.
고려시대의 유명한 지공거로는 최충이 있다. 이 사람은 정년퇴직하자 곧바로 사립학교인 사학을 일으켰다. 그 뒤를 이어서 다른 지공거들이 사학을 덩달아 열어 사학 12도를 이루었다. 사학들은 명문 사립학교로, 과거 합격자를 많이 배출해 인기가 높았다. 그 바람에 관학이 망하기 직전까지 가는 막장스러운 상황을 만들었다. 이에 예종은 일종의 전문학교인 국학 7재와 장학금인 양현고를 마련하여 학생들을 끌어모았고, 인종은 지방에 향학을 보급했다.
관학과 사학은 고려의 유학을 발달시켰지만, 결과적으로 과거 합격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고려시대엔 관직의 수가 적었기에 과거에 올라도 관직을 맡는데 상당한 기간이 걸리기도 했다고 한다. 음서로 올라간 사람들은 조금만 구르다가 곧바로 승진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지공거가 전공을 세웠거나 인품이 훌륭한 경우에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 가령 3원수 중 하나인 김득배는 정몽주를 발굴했고 최씨무신정권을 붕괴시킨 류경도 안향 같은 걸출한 문신들을 등용했다. 목은 이색과 사돈이자 대학자였던 유숙도 정도전, 이숭인을 발굴했다. 고려말에는 홍언박, 이색, 유숙, 김득배, 이제현, 이인복 등 쟁쟁한 지공거들이 많았다.
지공거는 조선 초기까지 존재했는데 조선 왕 가운데 유일한 과거 급제자인 태종 이방원은 직접 지공거를 맡으려고 했으나 이내 지공거를 폐지해버렸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이미지와는 달리 이방원은 엄연히 문인 계열이며, 이성계의 가문은 대대로 무인 집안인데 태종이 과거에 동일 기수 중 최연소로 합격하자 기뻐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무과는 고려가 존속한 기간 동안 극히 짧은 시기에만 있었던 탓에 사실상 없었던 제도로 취급한다. 고려에서 무과가 실시되었던 시기는 1109년(예종 4)부터 1133년(인종 11)까지 24년과 멸망 직전인 1390년(공양왕 2)부터 1392년까지 2년, 도합 26년에 불과하다. 북방 개척을 위해서 시행한 것으로 예종 때 무과를 강화하기 위한 국왕의 노력으로 관학을 7재로 정비하며 무학재(군사학과)를 설치하고 무과도 시행했으나 금나라와 고려간의 외교관계가 안정기에 들고 문벌귀족들의 반발로 곧 폐지됐다. 이후 고려 중기 무신정권 시대에도 잠깐 존재했다가 필요성을 못 느꼈는지 곧 폐지됐다. 이후 공양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도화되어서 부활했지만, 이때는 고려가 망하기 직전이라 큰 의미가 없다. 고려에서 무과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이유는 강예재 같이 국자감 7재에 속한 국가공인 교육기관을 통해 무신들을 길러내고 있었고 부사관 이상의 군인들은 전반적으로 군반씨족이라는 전문 집단에게서 공급받고 있었으며 호족들이 군권에 깊게 관여하고 있던 시대인 만큼 호족들이 군대로 진출하거나 호족들이 군대 보낼 만한 장정들을 군대에 넣어주는 체계였기 때문이다. 이의민이 고향에서 사고치던 걸 호족들이 눈여겨 보고 군대에 집어넣은 사례이다. 고려 중기에는 문벌귀족들이 무과의 도입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광종 때부터 승과라 하여 승려들만의 과거 시험도 있었다. 이 제도는 조선 초기까지도 유지되었으나 결국 숭유억불 정책의 강화로 중종 대에 폐지되었다.
2.3. 조선
조선에 이르러 과거 제도는 고려의 문제점과 유교적 사회이념에 맞춰 기존 제도를 대폭 개선하였다. 특히 전시(殿試)제도는 고려에서 과거를 받아 들인 이후 북송 시대에 정착하여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한 제도이다.
조선시대 과거의 어려움은 난이도, 과정, 경쟁률 어느 면에서도 만만한 게 없어 수십 년을 공부해도 합격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 예로 인천지역에서의 연구 결과 확인된 소과 합격자 288명 중 단 18명만 대과의 관문을 뚫었고 최고령 합격자 기록은 85세로 고종 시기의 정순교이며, 반대로 최연소는 14세로 고종 시기의 이건창이다. 이쯤 되면 벼슬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공부하는 수준이었다. 조선 선비들은 '유학' 이라는 직역에 속했는데(조선은 백성들에게 여러 세습직업인 역을 부여했는데, 칠반천역 등이 그 일부다), 이는 유학자를 뜻한다. 대한민국에서도 대학생은 학생예비군으로 빼주듯, 유학을 공부하는 이들은 국가통치 예비군으로 간주, 공부 자체가 국가에 이롭다는 논리로 여러 혜택을 받았다. 즉 군역과 부역 등을 합법적으로 면제받으려면 공부를 해야 했다.
83세에 급제한 박문규라는 사람은 하던 공부를 때려치우고 장사에 나서 돈을 많이 벌기도 했지만 흥청망청하게 돈을 쓰다가 결국 사업이 망해버렸다. 40세에 다시 공부를 시작해 시를 외우기 시작했다. 마침내 10,000편이나 되는 시를 외우기에 이르러 청나라 사람들에게까지 이름을 날렸다. 박문규는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고종 24년(1887년), 83세의 나이에 대과에 도전해 급제했다. 병과로 합격해 정9품을 제수받아야했지만 고종은 그를 당상관에 해당하는 정3품 병조참지(대한민국의 국방부 차관보와 비슷한 직위)에 앉혔다. 인조반정의 공신이던 김자점, 심기원, 이시백, 이시방 등은 공신임에도 종6품부터 시작해야 했다. 등급이 좀 낮은 공신이긴 해도(2등공신) 고령의 병과 합격자가 공신보다도 더 높은 자리에서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이 시점은 갑신정변 이후이고, 어차피 얼마 후 가실 양반이니 예우해 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듬해 종2품에 해당하는 가선대부 품급도 수여 받았는데 그해에 죽었다. 사실 고종 때는 관료 체제가 엉망에다가 품급이나 벼슬도 마구 퍼줘 공명첩이 당상관은 물론 정승직까지 거래되었다.
기본적으로 양반의 요건인 문과 과거 응시자격을 인정받으려면 4대 내에 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품계라도 있어야 한다고 알려졌지만 실질적으로 대과에 급제 하지 않더라도 조상대에 청금록(靑衿錄)이라는 지방 유생, 진사, 생원 명부에 오르면 자손들은 경제력으로 몰락하여 잔반이 되더라도 대대로 양반 대접을 받으며 그 고을에서는 뼈대있는 가문 행세를 했다. 즉 지방 향교나 서원의 유생명부에 이름을 올려 놓으면 사실상 역이 면제가 되어 양반 신분을 유지했다. 무슨 말이냐면 급제를 하지 못한 양반들이라도 대대로 양반행세를 하고, 일반 양인들은 공명첩으로 벼슬을 사거나 해도 청금록이라는 고을 양반 명부에 오르지 못하면 당대에만 역을 면제받고 신분은 물려 줄 수 없었다는 것. 조선 후기 족보위조 양반들이 향리에게 돈을 상납해서 청금록에 들어가려 하고 잔반들은 결사반대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결론적으로 조선시대 내내 문관직 수가 500여 명에 불과한데 아무리 현재보다 인구가 적었던 조선이지만 조선 초기엔 인구가 550여만, 조선후기에는 1,800만이나 되는데 총인구의 0.009%도 되지 않는 관직 수로 모든 양반이 4대안에 문과 급제 + 관직임용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4대안에 관원이 없으면 양반 신분이 아니다라는 말은 맞다고만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상술한 대로 과거는 법률상 양인이면 다 볼 수 있지만, 교육 기회가 없는 농민은 불가능하고, 정승 집안 이라도 서얼은 법적으로 자격이 없으며, 향리 같은 중간 계층도 지방 수령의 허가를 받고도 별도의 시험과 보단자라는 진입장벽에 굉장히 높았기 때문에 문과 응시생이라는 자격 자체가 신분이 되었고, 조선의 양반계층은 과거 응시자(?) 후보생이라는 특수한 신분을 물림하며 신분을 유지했다.
하지만 정치가 난맥상을 보이던 세도정치 시기조차 과거가 명문가 양반들만의 잔치판은 아니었다. 의외로 대대로 세습해온 명문가 출신이 아닌 급제자도 많았다. 서울대 연구에 따르면 순조 시기의 과거합격자 중에 신규 유입은 54%였다. 헌종조에는 50.9%, 철종조에는 48.1%에 달했다. 고종 시기에는 60%가 평민이었다. 오히려 평민 비율이 제일 낮았던 시기는 연산군과 숙종 시절로 30% 정도가 기존 양반 사대부 가문이 아닌 신규 유입자였다. 다만 여기서 합격한 평민은 시골서 농사짓던 양민이 아니라 최소 중인이나 향리급의 신분이다. 해당 기사와 연구에서도 낮은 신분의 정의를 어디까지 내려야 할지 제시하지 않았다. 이 연구에서는 왕대가 바뀌면서 평민으로 전락하기도 하고, 중인 가문에서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경우 스스로를 양반이라고 자처 라며 분류가 매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반석평의 예를 들어서 천민, 면천된 양인도 응시할수 있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국가의 역을 지지않고, 사유물에 불과한 천민은 물론 당대에 면천된 양인은 응시가 금지되었다. 특히나 1392년부터 1600년까지 200년간 고작 12건의 양인급제자의 사례가 발견된 셈인데 이것을 가지고 모든 양인이 아무런 제약없이 문과, 생원·진사시에 급제할 수 있었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다 우리역사넷(국사편찬 위원회)
이론상 지방서 농사짓던 일자무식 농부도 과거에 응시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일단 양반 사대부가문에서 제외되어 중간신분으로 떨어진 향리는 지방 수령에게 허가를 받아야 하고, 경우에 따라 역을 대체할 자가 없으면 응시가 불허 되었고, 응시가 허락 되더라도 향교나 서원의 양반 유생들과 차별로 별도의 소양 시험을 거쳐 통과해야 초시에 응시 할 수 있도록 했고, 양반 사대부들의 견제로 양반이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2대에 걸쳐 향리직을 얻어 종사하면 중인 신분으로 강등됨을 경국대전에 명시 했으며, 명문 양반 사대부가라도 서얼과 그 후손들의 응시를 금지했으므로 사실상 응시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반 양인에 대해 제한 규정이 없음을 들어 과거 제도가 아무나 응시가 가능했다고 주장하는건 상당히 무리한 주장.
과거 제도는 1894년 제 1차 갑오개혁 때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한 달 전인 1894년 5월 15일에 마지막 과거 시험이 치러졌다. 당시 병과 시험의 주제는 《대학(大學)》의 한 구절인 '지극한 선에 머무르는 법(止於至善)'을 논하는 것이었으며, 급제자 중 독립운동가 이상설은 병과 2등이었다. 당시 이상설이 제출한 답안지도 남아있다. 그리고 이 마지막 과거시험에 이승만 전 대통령도 응시했었다.
1894년 7월 12일 '선거조례'와 '전고국관제'를 제정해 시험과목으로 국문, 한문, 사자(寫字. 글씨를 똑같이 베껴쓰는 것), 산술, 내국정략, 외국사정 등 정치 행정과 실무, 국제정치 등을 시험해 관리를 선발했다. 그 외에 '향공법'(鄕貢法)이라고 하여 각 지방에서 일정 인원을 추천받아 인재를 선발하는 천거 방식의 임용제도도 함께 시행되었다.
2.4. 시험 과정
생원진사시는 소과 또는 사마시라고도 하는데, 유교 지식인으로서 소양을 시험하고 성균관 입학 자격을 부여하는 시험이다. 초시에서 한성부 및 각 도별로 할당된 인원을 먼저 뽑은 뒤 복시에서 최종 합격자를 가렸다. 3년에 한번 전국에서 생원 100명, 진사 100명으로 도합 200명만 선발하는 시험으로 대과만큼 쉽지 않았다.
이렇게 소과를 통과한 사람들이 성균관에 입학했다. 성균관의 학사 과정은 쉽지 않았다. 하루 출석에 원점 1점씩, 연 300점 이상을 채워야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한 대과 초시인 관시를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으며 시험도 많았다. 매 10일마다, 그리고 매달 시험을 치렀다. 한 단원이 끝날 때에도 시험이 있었다. 월 평균 10회의 모의고사를 치른다고 생각하면 된다. 일정 횟수 이상 최하점을 받으면 낙제. 등급이 대통-통-약통-조통 순이었는데 조통은 사실상 지금의 D나 F와 마찬가지였기에 이걸 받으면 망신을 뛰어넘는 개망신을 받아야 했다.
출석은 별다른 게 아니었다. 성균관 내의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기 전 일종의 출석부인 도기에 하루 두 번 이름을 쓰면 그날은 출석한 것으로 쳤다. 따라서 어디 놀러 안 가고, 밥 때 되어 밥먹으면 출석 끝. 물론 나라에서 주는 밥인 만큼 맛이 없어 잘 안 먹었다고 한다. 그나마 복날 음식은 평이 좋은 편이었다고 하는데 초복에 참외 2개 중복에 개고기였기 때문이다. 원래는 한 번이었다가 아침만 먹고 나가노는 학생이 있었기 때문에 두 번으로 변경했다. 오늘날의 교수들이 강의 끝날 때 출석 한번 더 부르는 이유와 같다 권당에 참여한 날짜들만큼 출석일수가 부족해지면 식년문과 시험 초시에서 혜택을 받을 수 없고, 성균관 입학생 중 출석점수가 되는 유생에게만 대과 초시 합격자 240명 중 50명이 배정된 관시에 응시할 수있는 자격을 주었으므로 출석은 꼬박꼬박 해야 했다. 반대로 이 점으로 인해 성균관 학생들의 동맹휴학인 권당이 정치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기에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안이 있다 싶다면 그걸 이유로 학생들이 권당을 하기도 했다. 권당을 한다는 것은 국가의 인재들이 단체로 관직을 포기하겠다는 선언과 같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과라고 하는 문과는 문관 관료 임용시험으로, 법제상 양인이라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으며, 소과에 반드시 합격하지 않아도 응시가 가능했다. 앞서 언급하였듯 소과 합격자는 성균관에 입학할 경우 1차 시험인 초시 합격에 메리트가 있었으며, 그밖에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특별 임용 시험 같은 별도의 혜택이 주어질 뿐, 소과와 대과는 별개의 시험으로 운영되었다.
문과(대과)는 1차 초시에서 240명, 2차 복시에서 33명을 끊는다. 마지막으로 이 33인의 순위를 가리는 3차 시험이 하나 더 있는데 이를 전시라 한다. 전시는 중요하지 않을 것 같지만, 처음 임관되는 품계가 달라지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시험이다. 장원 급제자는 종6품, 나머지 갑과에 해당하는 2명은 정7품, 을과 7명은 정8품, 병과 23명은 정9품부터 시작한다. 공신이나 당상관 이상의 자제들은 음직으로 문과에 급제하지 않고도 관직을 얻을 수 있었으나 비급제자로서 승진의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과거에 도전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보면 시험에 평생을 바쳐도 모자랄 것 같지만, 학습능력이 나이가 들수록 떨어지기 때문에 보통은 30대 중반 정도이 주류였고 40이 넘으면 숫자가 많이 줄어들었다. 아니면 포기하거나 . 젊은 나이에 합격한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최연소 장원급제자는 17세에 급제한 박호(朴箎)이다. 최연소 합격자는 고종 때 13세로 합격한 이건창(李建昌)이다. 고종 때 지나치게 많이 뽑았던 점을 고려한다면 최연소 합격자 기록은 15세다. 오늘날과 비교한다면 사법시험 최연소 합격자는 만 18세로 되어 있는데 이 당시 고등고시 사법과는 한 해에 40명 뽑던 시절이다.
드물게 왕의 권한으로 특별히 과거를 열어 시험 쳐서 합격시켜주는 일도 있었다. 이런 경우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될 정도로 매우 특이한 일이었다. 이를 직부전시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잡다한 절차를 다 건너 뛰고 전시를 보는 것이어서 시험을 한 번도 안 치고 관직을 주는 경우는 없었다. 직부전시는 초시 전체 장원이나 성균관에서 특별한 시험을 칠 때 1등에게 내리는 비정기적인 조치였다. 직부전시도 세도정치 시기 악용되었다. 흥인군의 아들도 13세의 나이로 직부전시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의 반대로 취소되어 흥인군이 격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흥선대원군이 종친들에게 관직을 주기 위해 종친 대상으로 직부전시를 시행했는데 흥인군과 사이가 나빴던 흥선대원군이 흥인군의 아들을 제외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종친들은 이후 흥선대원군의 파벌이 되었고, 여기서 제외된 흥인군 계열만 고종 파벌에 들어갔다.
2.5. 개방성과 폐쇄성의 양면
양인 모두에게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과거에 합격만 하면 양반이 되어 출세를 할 수 있었다. 고려도 과거 응시를 보장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조선 시대의 유연성이 더 높았다. 고려 지배층의 결집도가 높았던 데다 고려의 직접적 행정력과 법제적 기반이 조선처럼 전 국토에 미치지 못한 것이 이유이다. 조선의 세습 관료가 아닌 일반 양인 출신 문과 급제자 비율은 초기 40% ~ 50%에 달했다. 초기 과거 급제자 출신들이 문벌을 짓기 시작한 중기에는 점차 낮아져 10% 후반대까지 이르렀으나, 양란 이후 회복해 후기에는 다시 40% ~ 50% 비율을 유지했으며, 말기에는 60%에 육박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조선사 전체로 확대하면 평민 급제자 수는 전 과거 급제자 중 1/3에 이른다.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겸 서울대 명예교수 연구)
한영우 교수는 ‘과거, 출세의 사다리’(지식산업사) 4권 말미에서 "조선왕조가 500년 이상 장수한 비결은 지배 엘리트인 관료를 세습으로 보장하지 않고 능력을 존중하는 과거시험 제도로 부단히 하층 사회에서 충원했기 때문"이라며 "공부를 열심히 하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탄력적 사회를 유지하려 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실제로 양인 대부분은 과거를 볼 응시 자격을 갖추기 어려웠다. 과거 준비를 위해서는 당시 농사를 짓지 않고 공부에 전념해야 하며 노동없이 부양가족을 먹여 살릴만한 경제력이 있어야 했고, 실제로 과거 공부에 전념할 수 있을 만큼 재산을 가진 사람들은 소수였다. 그래서 3대가 함께 과거공부를 하는 집안의 사례도 있었다. 연원을 본다면 과거 시험지에 기재하는 4대조 내에 양반이 없는 경우 양반이거나 재력만은 양반을 칭할 만큼의 재력가들이 거의 전부였다. 그마저 재력가라도 아무나 응시 하지 못하는데 과거에 응시하려면 응시서류로서 호적과 신원 보증서에 해당하는 보단자(保單子)를 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무나 추천을 해줄수 있는게 아니라 지방이면 경재소(京在所)의 3인, 서울의 경우 각 부서의 현직관원 3명 이상의 추천서인 보단자를 받아야만 응시가 허락 되었다. 과거(科擧) 제도는 실력만으로 뽑는게 아니라 擧자가 들어있는것 처럼 천거도 필요한 것이었다.
또한 서얼들은 태종이 만든 서얼금고법 때문에 정조 이전까지 문과 응시가 막혀 있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범죄자, 횡령죄나 뇌물을 받은 관리의 아들, 재가한 부녀의 아들, 손자 그리고 서얼은 문과 생원, 진사시에 응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문과 합격자 비율로 따지면 위와 같다는거지 임용이나 얼마나 고위직으로 진출했느냐를 따지면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 조선 시대에는 과거 합격자가 관료 숫자보다 많아서 임용이 늦어졌다. 대과에서 1~3등으로 합격한 사람을 제외하면 품계와 관직을 받을 자격이 주어질 뿐 관직, 정확하게는 녹봉이 나오고 역할이 주어지는 관직인 '실직'을 받는다는 보장은 없었고, 결국 못 받았다면 녹봉도 없고 직위도 없는 산직이나 받을 수 있다. 당해 합격자들끼리만 경쟁해서 임용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면 송대 이후 중국의 경우, 조선의 대과 합격자가 상위 3명을 제외하면 직접 임용이 되지 않았던 것과 달리, 최종합격자인 진사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합격과 동시에 모두 고위 관료 임용이 보장 된 엘리트 신분이었다.
게다가 과거 시험은 공직 자리가 있든 없든 정기적으로 시험을 치렀다. 별시라고 해서 원손 탄생, 세자 책봉, 국혼, 국상 탈상 등 국가에 축하할 일이 있다거나(증광시) 성균관에 행차하거나 문묘제례 시(알성시), 어느 지역 민심을 잡고 싶다거나 하면 과거를 열었다. 왕이 다른 지역에 행차를 해도 과거를 열 수 있는 등, 추가 시험을 통해 얼마든지 더 뽑았다. 정기 시험은 3년씩 기다려야 하지만 별시는 그것보다 더 빨리, 더 자주 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 주상 전하께서 성균관에 행차했다가 날씨 좋으니 과거나 치르자며 그 자리에서 시험을 열면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은 열폭에 몸서리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부 응시자들은 별시도 노려보려고 지방에서 올라와 한양에 쐐기박고 사는 경우도 있었고, 그리하여 한양 집값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한양에 집 갖고 있는 것이 최고의 기득권이어서, 벼슬살이를 하다 사화에 휘말려 귀양살이를 하더라도 남은 가족들은 세를 줄지언정 집의 소유권은 어떻게든 지키려 했다. 실학자의 이미지가 강한 정약용조차도 망한 집안을 다시 일으키려면 어떻게든 지금부터 돈을 모아 한양에 집 한 채 마련해야 한다고 강진에서 가족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누누이 당부할 정도였다.[4] 과거 시험 응시자가 한양에서 멀리 살면 멀리 살수록 드는 돈과 시간도 많이 들었기에 서울 출신이 당연히 더 유리했다. 선비가 시험을 치러 한양으로 올라오고 내려가는 나귀와 하인의 인건비, 밥값, 숙박비등이 모두 가문에서 들이는 비용이었고, 갑자기 대왕대비나 임금이나 원자 아기씨가 돌아가시는 국상이라도 나면 이 또한 지방 수험생에게는 오가는 비용이 모두 매몰비용으로 돌아가는 또다른 비극이었다.
또한 과거 합격자에 비해 관에서의 일자리는 의외로 적기 때문에 인사적체가 극심해서 이렇게 한양에서 정기 시험으로든 특별 시험으로든 아등바등 합격을 해봤자 실제 관에서의 일자리를 받는다는 기약은 없었다. 이 때문에 을과나 병과의 경우 합격하고도 평생 임용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이 임용 순서도 대단히 불공평했다. 우선 집안을 가렸다. 과거 시험지에 대놓고 4대조의 이름과 관직을 쓰게 되어 있었다. 공식적인 이유는 과거를 볼 자격이 있는지 알기 위한 것. 4대조 내에 반역자가 있거나, 천민이거나, 재가녀 자손이거나 하면 과거 시험을 볼 자격이 없었다. 아무튼 이렇게 써놓은 가문을 볼 때 공식적으로 4대조 안에 정규 관료인 현관이 있으면 그 자손을 먼저 임명했다. 이를 현관서용(顯官敍用)이라 부른다. 그러나 반대로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4대조내 관료 출신이 없다면 과거 응시 자체도 지방이면 현직관원 3명 이상의 추천서인 보단자를 받아야 응시를 할 수 있었고, 어렵게 합격하더라도 임용이 잘 되지 않았다, 이것을 한품서용(限品敍用)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후대로 갈수록 인사가 적체되면 대기발령으로 늙어 죽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며, 한미한 가문이면 임용을 포기하고 과거 급제의 명예에 만족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또한 문반과 무반 모두 급제자가 임용이 된다면, 배치되는 초임기관이 정해져 있었는데, 이때 어디에 배치되느냐에 따라 이후의 승진 여부가 결정되었다. 문과 합격자는 이조에서 승문원, 성균관, 교서관 가운데 하나에 추천을 받고 임명될 수 있었다. 무과 급제자중 임용되는 경우는 병조를 통해서 선전관, 부장, 수문장 가운데 하나에 추천을 받았는데, 승진 한계와 승진 속도가 정확하게 이 순서에 비례했다. 그리고 사실상 문관 합격자의 10% 미만만 직접 임용이 되고, 나며자 30여명은 대기발령 상태로 임관대기를 하게되며, 이 상태에서 전직 관료(보통 삼년상 등으로 사직하거나 임기가 만료되었거나 파직), 문음(음서, 공신 자제와 2품이상 관료 자제), 3년에 한 번씩 공식이지만 알성시와 기타 특별 시험까지 합치면 96% 이상의 합격자가 임용 대기 중인 수많은 누적된 과거시험 급제자와 경쟁하여 임용을 받아야 했다. 4등부터 33등 합격자는 정8품 이하 품급을 받긴 하지만 이들 실무 경험이 있는 전직관료 집단과 중앙정계 인맥이 풍부한 명문가문의 자제와 같은 품급이라하더라도 임용될 가능성이 극히 낮았다. 2품이상 관리의 아들이나 손자는 그에 비례하여 정7품에서 종9품 품급이 나왔다. 이들 뿐만 아니라 급제자들 사이에서도 조차 2품이나 당상관급 직계자식- 일반 관료 가문- 그 이하 듣보잡...식으로 공식적인 서열이 있었다. 따라서 과거 시험지에 기재하는 4대조 내에 당상관이 없는 급제자는 아예 관직을 받지 못하거나 생을 마감할 확률이 높았다. 다만 급제가 한대에만 그치는게 아니라 자손 대대로이 계속해서 급제를 하고 혼맥을 쌓고 나가면 대를 이어 조금 더 잘 나갈 수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대대로 합격을 하면 그 집안은 지방에서 명문가라고 볼리는데 당연히 중앙정계에서 이렇게 되기는 힘들다. 결국 조선의 과거제도는 관료 임용 시험이라기보다는 관료 임용 자격 시험에 더 가깝다. 특히나 조선 후기로 갈 수록 기호지방 명문가들이 그마저도 한양 명문가가 점점 실직을 독점 하는 추세가 강해지면서 지방 유림 출신 급제자들은 거의 임용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여기서 후보자가 아닌 자격시험이라고 한 이유는 특정 관직 후보로 오르려면 직급(품계)에 맞춰 문관은 이조, 무관은 병조에 관직 추천 명단으로 올라가야 했다. 그러니 당연히 급제만 하고 서울에서 구직활동을 안하거나, 지방으로 낙향하면 학문으로 명성을 떨치거나 전국구 효자로 품행이 알려진 경우가 아니면 죽었다 깨나도 관직 후보군에 오를수도 없고, 관직수가 급제자에 비해 매우 적기 때문에 사극에서 나온대로 명문가에 인사하러 다니며 뇌물 (그 당시엔 당연한 인사)을 바쳐야 했다. 그러고 나서도 신규임용이나 5품이하 관료는 대간들에 의해 일종의 신원조회인 서경(署經)을 통해 과거조상과 자신의 범죄경력이 없음을 검증해야 임명 되는것이 절차였다.
거기에다가 문과는 명문가들이 모이는데다가 뽑는 사람이 적어 합격하기도, 벼슬에 임용되기도 너무도 어려웠기 때문에, 지방 양반이나 몰락 양반 뿐만아니라 어지간한 집안도 문과보다 무과에 합격하여 양반 지위를 노리는 형태가 나타났다. 조선에서 문반직은 겨우 500여 명이지만 무관은 3,000여 명 이나 되었기 때문이었다. 무과에서는 28명만 뽑지만 지방에서 향리 출신이 자비로 출정해서 내갑사가 되어 나중에 하급 무관 품계를 받기에 무과가 유일한 통로는 아니다. 역시 음서로도 임용이 된다. 그러나 무과에도 유교 경전, 병법, 말타기 활쏘기[5]을 연습을 해야했기 때문에 조선 초기에는 일반 양민이 응시하기에는 역시 진입 장벽이 있었다. 일단 군사용 전마는 말 중에서도 엄선되어 키워야하고 관리하기 위해선 전문적인 마부가 있어야 했다. 일반인 양반들이 타는 조랑말만해도 노비 두세 명 값에 유지비는 사람보다 몇 배는 먹여야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무과로 뽑는 인원이 대폭 늘어 진입장벽이 크게 낮아졌고, 군복무로 경력을 쌓은 사람이면 몇년 빡세게 공부와 체력단련을 하면 합격을 노릴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며, 실제 10,000명 넘게 합격하는 사례까지 나타날 정도였다. 이미 임진왜란 이후 공명첩 당상관 품계 가격이 쌀 몇십 섬에 불과해서 일반 양인과 천민은 공명첩으로 역을 면했다. 물론 고위급 인사로 출세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어쨌든 양반자리를 확보했으니 지방에서 떵떵거릴 정도는 되었다. 다만 신분제가 허물어져 가던 조선 중후기에도 천민들이 과거치는 것은 조선 조정에서 매우 꺼렸는데 지금 시각에서 보면 '급제<벼슬이지만 당시 신분제 사회에서는 천민들이 공을 세우거나 공명첩으로 면천되어 공을 세우더라도 역을 면해주거나 그 다음에 '벼슬을 퍼줄 망정 과거 응시는 잘 허락해주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천민출신 서흔남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를 남한산성까지 업어주고, 성 안팍에서 스파이와 전령 활동을 하여 정2품 당상관인 훈련주부(訓鍊主簿)와 가의대부(嘉義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받았지만 벼슬을 줄지언정 과거 응시는 허락하지 않았다. 엊그제 까지 천인들은 공은 인정해주어 대우는 해주지만, 명문가문의 전유물인 관료집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진 않는다는 의미. 특히 청요직(주로 조정의 공론을 형성하는 언관직)은 무조건 대과를 거쳐야 했고 명예직이 아닌 실제로 재상이 되려면 무조건 청요직을 거쳐야 했다. 명예는 잔뜩 올려주되 실제로 중요한 관직에의 참여는 배제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공명첩보다 과거 합격증인 공명홍패의 인기나 가격이 더 높았다. 조선 중후기가 되면 당상관 품계 가격이 쌀 몇 섬으로 폭락해도 안 살 정도지만 과거 합격증인 홍패의 위력은 여전했다. 왜냐하면 과거 응시 자격은 곧 양반의 자격을 인정하는 셈으로 후손에게 신분도 물려 줄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공명첩이나 일회성 벼슬으론 당대에만 역을 면제 받을 뿐 이기 때문이다.
정충신은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워 면천되고 그후에도 공을 세워 벼슬을 받은 후에 다시 공을 많이 세우면 특별히 과거 응시를 허락해주긴 했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 임진왜란 시기는 매우 예외적인데 전시의 급박함으로 인해 천인이 왜인의 목을 베면 면천, 양인이 왜적의 목을 베면 무과 초시 (初試) 급제로 치고 2명의 목을 베면 무과 도시 (都試) 응시 자격을 주는 양반으로 대우하게 해줄 정도였기에 왜적 목 3개면 천민에서 무관으로 신분 급상승이 가능했고, 쌀 몇십 섬으로 당상관 직위까지 팔아치웠다. 임용한 박사 공저 <뇌물의 역사>에서 관청 역졸 마부 관노들이 죄다 신분 급상승해서 당상관직을 얻어 고을 수령 품계가 제일 낮아져 버린 아이러니가 나올정도였다.
2.6. 종류
사실 과거제도는 크게 2가지로 나뉘는데 바로 '정과(科)'와 '잡과(雜科)'이다. 정과는 오직 '문과(文科)'와 '무과(武科)'만을 의미하므로 문과와 무과가 아닌 다른 것들은 전부 잡과이다.
참고로, 하기된 내용에는 현대의 공무원 시험과 각종 직책에 빗댄 표현이 많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성격 자체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현대의 공공조직과 공무원은 국민과 국가를 위한 업무에 종사하지만, 전근대의 왕조 국가에서 공공조직은 왕실을 유지하고 공무원은 군주의 충복이었기 때문이다. 즉, 과거 제도에서 뽑고자 하는 관원은 순수히 조선 왕조의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왕조와 왕실의 유지를 위해 선발하는 것이다. 이는 가장 유능한 인재를 왕의 곁에 두고자 하는 데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2.6.1. 문과
말 그대로 현대의 행정공무원에 해당되는 문관을 뽑는 시험이다.
다만 경국대전에 따르면 문과는 문관 관료 선발 시험인 대과만을 지칭하였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유교 지식인으로서 능력을 시험하고 성균관 입학 자격을 부여하는 생원시와 진사시, 즉 소과는 문과에 해당되지 않는다. 하지만 대체로 문과를 치르는 사람이 소과를 치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여기에서 함께 묶어서 설명한다.
문과 대과에는 3년마다 치르는 정기시인 식년시와, 비정기시인 증광시, 별시, 알성시 등이 있었다. 문과는 초시, 복시, 전시 순으로 초시에서 각 도의 인구 비례를 고려하여 240명(성균관 50명, 한성시 40명, 향시 150명)을 1차로 선발하고, 복시에서 그 중 33인을 선발하였고, 전시에서는 등수를 결정해서 관직의 품계를 결정하였다.
이론적으론 양인 이상이면 응시가 가능하였으나, 양인은 대체로 농사를 지었기에 과거에 열중할 시간이나 체력도 없었는데다 자금도 없었다. 그래서 집안이 부유한 양인이나 양반이 주로 응시를 했다.
사실 조선시대의 책은 엄청 비쌌는데, 그 당시 인쇄기술도 변변치 않아서[6] 생산기간이 상대적으로 길었고, 그렇기에 대체로 관청 등지에 소규모로 보관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구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책을 구하기 위해선 시간을 들여서 필사를 하거나 아니면 민간에서 비싸게 사야될 수 밖에 없는데 두 경우 모두 시간이 막대하게 소모되거나 아니면 돈을 막대하게 소모되거나 그랬기에 위에 언급된 부유한 양인이나 양반만이 이를 감당하면서 책을 구할 수 있었고, 이들만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2.6.1.1. 소과
소과는 사서오경 등의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능력과 지식을 시험하는 생원시와, 시나 부로 문예창작 능력을 시험하는 진사시로 나뉘었고, 이들을 각각 통과하면 생원 혹은 진사라는 칭호를 받는다. 고려시대 명경과의 후신이 생원시고, 제술과의 후신이 진사시다. 현대로 치자면 9급 공개경쟁채용시험의 필기시험(1차)이나 7급 공개경쟁채용시험/5급 공개경쟁채용시험의 공직적격성평가(1차)+필기시험(2차)에 해당된다.
법제적으로 생원과 진사는 동일하나 시대에 따라 더 우선시되는 시험이 달랐는데, 고려 후기까지만 해도 귀족들이 사장을 중시하던 문화가 있어 제술과(진사시)를 더 높이 쳤다. 하지만 조선이 건국되면서 사대부들이 이러한 풍조를 없애려고 했고, 이후로는 생원시가 더 높게 평가 받으며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또한 소과 합격자들이 대다수를 이루는 성균관 유생의 자리 배치에서도 이러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데,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300일 동안 앉는 자리의 순서가 생원이 진사보다 상석에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신분제였던 조선 시대에는 두 시험을 보는 계층에서 우열이 가려졌기 때문에 초기에는 생원시 쪽에 더 유능한 인재들과 명문가 출신의 자제들이 많이 몰려 더 어려운 시험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다시 경전에 대한 이해력과 지식보다는 사장(詞章)이 더욱 중시되었고 이때부터는 다시 생원보다 진사가 존경받게 되었다.
진사와 생원별로 1차시험인 초시는 한성시에서 200명, 지방의 향시에서 500명을 뽑아 각각 700명을 선발했으며 각 지방별로 인구비율에 따라 합격자 수를 분배했다. 현대의 지역인재전형으로 볼 수도 있다. 초시 합격자를 모아 2차시험인 복시를 통해 다시 각각 100명을 선발해 그 진사와 생원 합 200명을 소과 합격자라 불렀다. 2차 복시 합격은 당연히 지역 안배 없이 실력으로 200명을 선발했다.
합격자들은 길일을 택하여 생원은 동쪽에, 진사는 서쪽에 서서 국왕에게 절을 올린 뒤에 합격증서로서 백패와 주과(酒果)를 받았다.
초시에 합격하면 종9품을 받고 하급 관리가 될 기회가 주어지거나 성균관에 입학할 기회가 주어지는데, 하급 관리로 시작하면 디메리트가 엄청 컸기에[10] 대부분 성균관에 입학했다. 그래야 한양에서만 치러지는 비정기 과거 시험이나 성균관 유생들만을 위한 특별시험에 응시가 가능해서 쉽게 정계에 올라갈 수 있었기 때문.
다만 현재로 치자면 고위공무원에 해당되는 당상관은 과거 응시가 금지되었다. 당상관은 대부(大夫) 반열에 들었기 때문에 사족(士族) 지식인을 위한 시험을 칠 이유가 없다는게 공식적인 명분이었고, 실질적으로는 별도의 직급체계를 가져 품계가 상당히 높게 잡히는 종친·외척·부마 등을 겨냥한 것이다. 사실 현재도 고위공무원이 굳이 응시하지 않는 것처럼, 굳이 당상관이 과거 제도에 응시할 명분이 없기도 한다.
2.6.1.2. 대과
2.6.1.2.1. 초시
1차시험인 초시는 총 240명을 선발했으며 관시, 한성시, 향시로 나뉘어졌다. 관시는 성균관 유생 중 우수한 사람만이 응시하여 50명을 선발했으며, 한성시는 서울에서 40명, 향시는 지방에서 150명을 선발하였다. 참고로 향시는 지역배당이 있었는데 각각 경기도 20명, 강원도 15명, 황해도 10명, 충청도 25명, 경상도 30명, 전라도 25명, 평안도 15명, 함경도 10명이었다.
2.6.1.2.2. 복시
2차 시험인 복시는 여기서 최종합격자 33명을 선발했으며, 이 명단에 들어가면 사실상 문과 합격 확정이었다. 3차 시험인 전시에서는 그 33명 사이에 등수를 결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2.6.1.2.3. 전시
왕이 직접 나와서 문제를 내는 전시에서는 대과 복시 합격자들이 대책에 대해 써 올렸는데, 그것은 현실의 정책이나 문제되는 사안에 대한 국왕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다. 이를 책문이라고 한다. 왕의 심중을 제대로 헤아리면 장원이 될 확률이 높은 것이다. 현대로 따지면 5급 공개경쟁채용시험/7급 공개경쟁채용시험에서의 3차 시험(면접) 혹은 9급 공개경쟁채용시험에서의 2차 시험(면접)에 해당된다.
세종 - 인재를 등용하고 양성하는 방법에 대해 논하여라.
중종 -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사람을 사신으로 선발해야 하는지를 논하여라.
중종 - 술의 폐해는 오래되었다. (중략) 우리 조선의 여러 훌륭한 임금님들께서도 대대로 술을 경계하셨다. (중략) 그런데도 오늘날 아랫사람들이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폐단이 더욱 심해져, 술에 빠져 일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술에 중독되어 품위를 망치는 사람도 있다. 흉년을 만나 금주령을 내려도, 민간에서 끊임없이 술을 빚어 곡식이 거의 다 없어질 지경이다. 이를 구제하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명종 - 근래에 와서 학교가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 이를 개선할 방책을 논하여라.
광해군 - 공납품을 토산물 대신 쌀로 바꾸는 것에 대해 논하여라.
숙종 - 왜국에서 울릉도를 죽도라고 부르며 우리 백성들의 어로 활동을 금지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우리의 입장을 설명해 줘도 들을 생각을 안 한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물론 진지한 문제만이 나왔던 것은 아니다.
광해군 - 어렸을 때는 새해가 오는 것을 다투어 기뻐하지만, 점차 나이를 먹으면 모두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세월이 흘러감을 탄식하는 데 대한 그대들의 생각을 듣고 싶다.(1616년 광해군 8년 증광 회시 책문)
정조 - 온갖 식물 가운데 이롭게 쓰이고 사람에게 유익한 물건으로 남령초보다 나은 것이 없다. 어떻게 하면 모든 백성이 남령초를 피우게 할 것인지 대책을 말해 보라.(1796년 규장각 초계문신 남령초 책문)
다만 조선 시대에서는 시, 글짓기 같은 문학적 소양 역시 관리의 능력이라고 평가했기 때문에 영 이상한 질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조선 시대에서 격이 높은 문학이란 단순히 가사가 아름답고 운율이 아름다운 것을 넘어 과거의 다양한 고사에 담긴 내용을 적절하게 인용하고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표현해야 했기 때문에 시를 쓰는 사람의 교양과 지식 수준을 판단할 수 있었다. 정조의 뜬금없어 보이는 담배 찬양도, 실제로는 당시엔 상품 작물로서 수익이 매우 큰 담배 농사의 증가 때문에 정작 벼 등 식용 작물의 비중이 줄어들자 이에 대한 찬반이 매우 거세지는 상황이라 이 담배 농사를 지지하면서 이를 해결할 방안을 찾아보자는 의도가 담겨 있다. 정조 본인이 애연가라는 점도 어느 정도 있었겠지만.
이명한의 <백주집>(白洲集) 중 '잡저'에 따르면, 광해군의 '세월이 흘러감을 탄식'에 대해선 당대의 문인인 이명한이 '사람이 세월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지 세월이 사람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然則人能傷歲 歲不傷人)라는 답안을 제출했다. 이명한의 이 답안은 비록 장원은 못했지만 아원(亞元, 과거 급제자 중 차석)이라는 고득점을 받았다.
그 외에도 성리학적 이치에 관련된 대책도 출제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명종 13년(1558년)에 출제된 대책으로, "해와 달이 떴다 지는데 어떤 때는 낮이 길고 어떤 땐 밤이 긴데 왜 그런가? 일식과 월식은 왜 생기나? 밤하늘의 보통 별과 행성들의 움직임을 상세히 설명할 수 있는가?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별이나 혜성은 어떤 때에 보이는가?" 라는 무슨 과학 퀴즈 같은(...) 문제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이이의 그 유명한 '천도책'이 나왔다. 당시 천도책을 본 시험관들은 '여러 날 밤을 새워 가며 문제를 만든 우리도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쓰지는 못한다.'라고 평했으며, 시험 답안지를 뛰어넘어 대학 교수의 연구 논문까지 초월하고 나아가 조선의 성리학계를 뒤흔들어 버린 수준에 유학자들을 놀라게 한 것은 물론 저 멀리 명나라에도 전해져서 조선으로 온 명나라 사신들도 이이를 찾았을 정도였다. 지금까지도 성리학 연구의 정수로 전해질 정도이니 말 다했다. 참고로 천도책은 세 시간 만에 작성되었으며 당시 이이의 나이는 만 21세로 지금으로 치면 대학생 혹은 군인 정도였다.
이렇게 3차 시험인 전시는 합격자의 순위를 정하는 시험으로 왕이 직접 주관했으며 성적순으로 갑과에 3명, 을과에 7명, 병과에 23명을 배정했다.
<갑과>: 1~3위
1위: 장원(壯元) - 종6품 수여, 이를 '출륙'이라고 한다.
2위: 아원(亞元) - 또는 방안(榜眼)이라고도 부른다. 정7품 수여
3위: 탐화랑(探花郞) - 을과와 병과 급제자들의 어사화는 이 사람이 왕으로부터 전달받아 꽂아준다. 정7품 수여
<을과>: 4~10위: 정8품 수여
<병과>: 11~33위 - 병과 23명은 정9품 수여
다만 장원이 얻는 종6품과 병과가 얻는 정9품 사이엔 5계단 정도였고(정9-종8-정8-종7-정7-종6), 이 사이의 시간 간격이 7년 정도로 꽤 컸다. 지금으로 치자면 5/7/9급 공무원 시험을 같이 쳐서, 갑과에겐 5급(사무관)을, 을과에겐 7급(주사보), 병과에겐 9급(서기보)을 줬다고 보면 된다.[13] 특히 조선 초기는 몰라도 중기엔 과거 합격자가 과잉공급 되어서 적체되었는 바람에, 갑과만 임용이 확정되고, 을,병과는 이조의 관직 임용을 받을 기회만 주어졌다.이 때는 갑과와 조상 4대조 중 관리가 있는 사람이 우선적으로 임용되었기에, 만약 권율처럼 명문가 태생이라면 병과라도 임용이 확정되었지만, 한미한 가문이라면 늙을 때까지 관직에 못 올라가는 경우도 꽤 있었다. 괜히 장원을 원하는 게 아닌 것.
이이의 경우 과거시험에서 9번 모두 장원급제를 하여 구도장원공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과거시험에서 전설적인 업적을 남겼다. 여기서 9번은 정말 과거시험 자체를 9번 본 게 아니라 2번 치러지는 과거시험의 여러 예비시험과 본시험을 아울러 9회 장원을 했다는 말이다. 물론 이것도 대단한 능력인 건 맞다.
당연히 과거 합격자가 많은 가문은 명문가로 칭송받았다. 전주 이씨가 가장 많은 문과 합격자(870명)를 냈고, 그 다음으로 안동 권씨(368명), 파평 윤씨(346명), 남양 홍씨(당홍계)(292명), 청주 한씨(292명) 순서다.# 덕수 이씨인 이순신의 후손들은 단 한 명만 문과에 합격했지만, 무과에서는 267명의 합격자를 배출했다. 이순신 항목에도 나오는 말이지만, 정확히는 직계인 '충무공파'에 국한된 얘기. 율곡 이이의 후손들이어서 문과 쪽인 문성공파의 경우에는 정반대다.
야샤에서는 왕이 암행을 나갔다가 어떤 유생한테 좋은 이미지를 얻어서 돌아온 다음 갑자기 별과를 실시해 그 유생의 맞춤형 문제를 줘서 급제시켰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많다. 예를 들어 숙종에 관한 야사 중 암행 나갔을 때 어떤 곤궁한 집에서 머리를 가린 며느리과 아들이 시어머니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시어머니는 그들을 보며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들에게 까닭을 물어보자 아들이 집이 가난해서 며느리가 머리카락을 잘라 시어머니의 생신상을 차렸는데 그걸 알게 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 대한 안쓰러움에 생신상을 받고도 울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숙종은 나중에 과거시험에서 "한 노파는 울고, 젊은 여중은 춤을 추고, 사내는 장구치며 노래한다"라는 주제를 내놓았는데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제대로 된 답을 쓰지 못했으나 아들은 정확한 답을 적어 급제했다는 이야기다.
2.6.2. 무과
말 그대로 현대의 직업군인(부사관/장교)에 해당되는 무관이 되려는 시험이다.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무과가 시행된 것은 고려의 예종(고려) 때인 1109년. 그러나 1133년 고려 인종(고려) 때 무과가 폐지되고 공양왕 시기인 1390년에 무과 시험이 열리기 전까지 무과가 열리지 않았다.
고려가 멸망하고 들어선 조선에서 고려와는 달리 태종(조선) 2년(1402) 첫 무과가 치뤄진 후 계속 무과가 유지되었다.
다만 같은 급수면 직업군인과 일반 행정공무원의 대우가 유사했던 21세기와 달리 문을 더 중시했던 조선이니만큼 문반에 비해 대우가 좋지 않았다. 무관의 최상급 관직인 도총관(都摠管)은 정2품으로 정1품까지도 관직이 존재하는 문관보다 낮은데다가 그런 자리조차 대부분 문관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고 순수하게 무과에 급제한 무관의 경우 관직으로는 정3품 당상관 절충장군이 한계였다. 이순신 장군이 받은 삼도수군통제사조차 종2품에 불과했다.[15] 다만 그렇다고 이들을 무시한 건 아니었는데 고려시대 중기에 이미 한 번 무시했다가 난리난 일이 있었던데다, 조선의 태조인 이성계도 신흥 무인 세력이었기에 무반을 무시하는 건 사실상 태조를 낮잡아 보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관직과 품계가 다른 경우도 많았는데 관직상으로 순수 무반의 관직은 정3품까지였다. 하지만, 무과 급제자가 그 이상 승진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었는데 이 때는 문관의 품계(문산계)를 받았다. 즉, 품계만 문관의 품계를 받을 뿐이지 무과 출신자도 고위직으로 승진이 가능했으며 이런 경우는 당연히 품계에 맞는 대우를 받았다. 이순신 장군도 관직은 종2품 삼도수군통제사였지만 품계는 문관의 품계인 정2품 정헌대부를 받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정2품에 해당하는 대우를 받았다. 무과 급제자 중 최고위직에 오른 사람들 중에서 정승까지 오른 사람은 역대 7명 뿐이라 적었으나, 현대로 치면 국방부 장관이라 할 수 있는 병조판서(정2품) 중에는 무과출신자들이 여럿 있었다. 또한 김성응처럼 판의금부사(종1품-의금부의 수장)에 오른 경우도 있었으며, 이징옥처럼 갑사 제직중에 무과에 급제한 뒤 종1품 숭정대부 겸 판중추원사(중추원의 수장)까지 출세한 경우도 있었다. 포도대장과 훈련대장 역시 상당수가 무과 급제자 출신이었다. 그 밖에도 도원수, 순변사, 도총관(모두 정2품) 등 무반 출신이 자주 임명되는 직책도 많았다. 물론 문과 급제자들과 비교하면 무과 급제자들이 최고위직으로 승진하는 것이 드물었긴 하지만, 애초에 무과 출신이 전문성을 갖는 공직은 군사 분야에 한정되어있는만큼 심하게 차별대우 받았다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또한 무과가 사실상 없고 무관을 수시채용 형태로만 뽑은 고려시대에 비해 정기적으로 실시한 무과가 존재한다는 점은 꽤 발전된 모습이었다. 다만 실무 중심이던 군사분야를 유학적 지식이 요구되는 '무과'를 통해 유학자들이 몸쓰는 일까지 집어먹었다는 평도 있다. 또한 문과보단 낮게 봐도 잡과보단 높게 봤는지라, 양반가 자제들이 의외로 많이 응시했으며, 이쪽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문과보단 낮게 본 건 사실인지라, 명문가의 비율은 매우 적었고, 대신 양인이나 중인의 비율이 높았다. 물론 예외란건 있어서, 덕수이씨 충무공파같은 경우는 명문가임에도 이순신의 영향으로 무풍기조가 들어 임진왜란 이후 무과 급제자는 267명이나 되는 반면 문과 급제자는 1명이었다.
특히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외세의 침입이 있던 이후 조선후기에 무과로 뽑는 인원이 크게 늘어났고, 이 때문에 시험의 난도가 상대적으로 낮아지면서 몰락 양반은 물론이요, 문과를 볼 수 없었던 서얼 등 중인들은 물론, 기존 양반 사대부들도 양반신분을 유지하는데 수월한 무과에 몰리고, 또한 전란시에는 광취무과라고 해서 면천된 천민에게도 응시자격을 부여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괄의 난에서 공을 세웠던 정충신이다.
또한 나중에 와서는 면천이 안된 천민들도 불법적으로 응시하는 경우도 성행하며 무과 위상도 많이 떨어지게 된다. 어찌보면 양인들의 등용문이 된 격. 다만 무과도 문과보다는 상대적으로 문턱이 낮은 것이지 연습은 개인이 알아서 해야 했고 무과 과목 가운데서도 마상육기는 고도의 몸놀림과 순발력이 필요한데다가 아차하면 낙마 사고의 위험성도 있었기에 마냥 보기 쉬운 시험은 아니었다. 실제로 문과보단 많이 뽑았지만 그만큼 지원자도 많이 나와서 경쟁률이 높았다. 그래도 조선군 자체가 명목상 징병제로 돌아갔기 때문에 시험 진입장벽이 생각보다 높았음에도 군 경력자들이 신분상승 및 명예를 위해서 응시하는 경우가 차고 넘쳐났던것이기는 했다.
무과는 문과와 달리 소과가 없다는 점, 대과의 초시와 복시 선발인원이 50, 5명씩 감소한다는 점, 무과급제자는 종7품의 관직, 을과 출신에게는 종8품의 품계, 병과 출신은 종9품의 품계에 각각 제수하도록 규정되었다는 점, 전시에서 장원을 뽑지 않는다는 점 등이 달랐다. 다만 초시, 복시, 전시 3단계의 대과, 대과 합격자에게 홍패를 준다는 점은 문과와 같았다.
원래는 초시에서는 원시(훈련원시) 70명, 향시 120명 등 190명을 뽑았고, 복시에서 28명을 선발하였지만 전란이 일어난 이후로는 몇 백 명은 기본에 만명 이상을 뽑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명종때는 을묘왜변의 여파로 200명을 추가 선발하였고, 정묘호란이 일어난 인조 15년 별시(1637)때는 수천 명을 뽑았으며, 1676년에는 18,251인을 뽑았다. 이 때문에 만과라는 별명까지 붙었고, 조선후기에 무과의 위상이 쇠퇴한 원인이 되었다.
조선 초중기에는 합격하면 주로 종사관이나 변방의 만호 또는 부장 정도의 보직을 바로 받았으며 포교를 받는 일은 없었다. 종사관, 만호, 부장 등의 관직에서 어느 정도 복무한 후 능력에 따라 첨사나 부사 등으로 진급시켰다. 문제는 위에도 적은 것처럼 조선 후기로 갈 수록 인사적체로 발령이 날 지 모른다는 것. 수천명이나 만 명을 뽑았는데, 그 사람들이 전원 만호나 부장으로 발령날 리가 없다. 또한 문과하고 마찬가지로 관직에 오르더라도 임용적체로 인해 대다수가 말단직이나 떠돌다가 은퇴하기 일쑤였고 고위직으로 출세한 사람은 전란이 아닌 이상 손에 꼽는 수준이니 출세를 바라기에는 부적합한 시험이었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아무리 무과의 위상이 쇠퇴하여 고위 관료가 되기는 힘들어도, 어쨌든 신분상승은 되는것이기에 홍패(합격증)을 받는것만으로도 만족해하는 경우도 많았기에 무과 응시자가 늘었다.
2.6.2.1. 초시
목전(나무로 만든 화살로 240보 거리에서 3발 채점)·철전(육량전, 아량전, 장전등을 쏘기)·편전·기사(말타며 활쏘기)·기창(말타며 창 다루기)·격구(말을 타거나 직접 뛰면서 막대기로 공을 치는 경기)가 시험과목이었다. 말을 타고 하는 기마 격구는 전투적인 성향이 강하고 경기를 하면서 말을 자유자재로 다루기에 나중에 마상 무예를 배우는데 유용하여 시험과목에 포함되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일부 직렬의 공무원 시험에 존재하는 체력검정에 해당된다.
속대전 편찬 이후에는 목전·철전·편전·기사·유엽전(버드나무 모양 화살촉을 단 실전용 화살)·조총·편곤으로 시험과목이 바뀌었다.
2.6.2.2. 복시
병법서, 유교 경전, 무예가 시험과목이다. 무과 복시는 초장(주로 궁술), 중장(기사, 기창, 격구. 후기에는 격구가 빠지고 조총, 편추가 추가), 종장(병법, 유교경전), 세 시험점수를 합산하여 28인을 선발하였다. 식년 무과 기준이다. 별시는 상황여하에 따라 더 많은 인원을 선발한다. 무예와 관련성이 적은 유교 경전이 들어간 이유는 원래 무신들도 최소한의 교양은 있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들어간 것이며, 당연히 문과에 비해 난도가 크게 낮았다. 하지만 무과에 급제해도 어찌되었든 합격을 한 셈이니 양반자리가 유지된다는 점을 알아챈 양반들이 너무 무과로 몰리는 폐단이 발생해서 유교 경전의 비중이 점점 커졌다. 고려 중후반기까지 무신들 중 상장군, 대장군 같은 고위직들조차 대다수가 자기 이름 석자나 겨우 쓰면 다행일 일자무식들이었음을 생각하면 꽤 진보한 부분이긴 하다. 지금으로 치자면 공무원 시험의 지력시험에 해당된다.
병법으로는 손자, 오자, 육도삼략, 삼십육계 등 무경칠서 중 1권, 유교 경전으로는 사서(대학, 중용, 논어, 맹자) 오경 중 1권, 통감 ,역대병요, 장감박의, 소학 무경 중 1권을 선택해 주관식으로 시행되었다고 하며 경국대전도 시험과목이었다. 사실 현재도 장교나 부사관이 되기 위해선 어느정도 문무겸비가 되어야 하고, 경찰공무원이나 소방공무원 등 일부 특정직 행정공무원이나 교정직 공무원 등 공안직 공무원도 행정학을 본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대에도 이어지는 셈.
윤승운 화백 만화 맹꽁이 서당에서 공부를 싫어하는 맹꽁이 서당 학동들이 우리는 돌머리이니 차라리 무과를 택하겠다하여 칼싸움하고 이러는데 무과는 공부 안해도 무술을 잘하면 급제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물론 작중에서는 천자문도 다 안뗀 주제에 과거시험을 보러가기도 했던 아해들이기는 했다만. 요즘 무과와 비슷한 사관학교 입학시험이나 장교시험도 기본 교양이나 군사학에 대한 지식도 있어야 하고 입시 시험도 빡세다. 그리고 맹꽁이 서당 학동들이 글을 게을리 하는데 만약 저렇게 글공부를 게을리하여 최소한 진사시에 붙지 않으면 양반 계급이 날아가고 글공부보다 더 힘든 군역이나 부역을 짊어지는데 다치거나 죽을 위험이 있다.
비교적 설명이 적은 무예 역시 현대인 기준으로는 괴악한데, 기마술이 얼마나 아크로바틱한지는 마상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현대의 마장마술과 비슷하지만 아예 말과 혼연일체되어 안장에서 덤블링(!)을 넘는 수준이다. 말을 그렇게 타면서 활을 쏘아서 명중을 내고(기사) 장병기를 다루거나(기창) 구기종목을 한 것(격구)이다. 활쏘기 역시 현대에 전래된 국궁과는 파운드 수가 달랐으며, 조선에서 비교적 비중이 적었던 검법에도 칼을 하늘 높이 던졌다 받는 것이 있는 등 전근대 직업군인들에게 요구된 무예 소양은 만만하지 않았다.
2.6.2.3. 전시
기격구와 보격구, 즉 마상 격구랑 보행 격구가 시험과목이다.
왕 앞에서 치르는 시험으로 복시에 합격한 이들을 따로 모아 치르며 합격 여부를 결정하는 시험은 아니였고 1등부터 마지막 등수까지 순서를 정해 인사를 배치하는 시스템이었다. 전시에서 상위권 성적을 받으면 보통 금군이나 장용영 등 국왕 직속부대로 배치가 되었고 그다음으로는 오위&오군영 - 지방 - 국경 or 수군으로 배치가 되었다고 한다. 금군이나 장용영 등 국왕 직속부대는 당연히 국왕과 가깝고 서울에 주둔했기에 진급이 빠르고 급여도 높은 편이었다. 사실 오늘날에도 제1경비단 같은 대통령경호처 지원부대들은 군 내에서 상당히 요직으로 알려져 있고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한 때 사령관이 참모총장과 국방장관을 재끼고 대통령을 독대할 수 있었던 국군기무사령부의 경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권력기관으로 꼽을 정도였다.
2.6.3. 잡과
잡과(雜科)는 궁중과 6조, 지방관청에 속한 아문과 속사(屬司)의 관리를 선발하는 분야이다. 오늘날로 치자면 통번역사, 외교관, 연구원, 의사, 약사 같은 전문직 시험이나 조리, 시설관리 등 기술직렬 공무원이나 자료를 기록하거나 연구하는 연구직 공무원을 뽑는 시험에 해당된다.
지금이야 기술직렬이나 전문직렬이 동일한 급수의 행정직렬과 같은 대우를 받지만 그 당시는 성리학 기반의 국가인 조선시대이기에 문과보다 낮게 봤다. 다만 향리의 자손이나 서얼, 혹은 이들의 자손 같은 중인은 문과를 치지 못하기에 무과와 같이 가장 많이 노리는 시험이기도 하며, 실제로 이것으로 먹고 사는 경우도 꽤 있었다.
잡과에는 고정적으로 시험이 실시되는 분과와 그렇지 않은 분과(일명 부정기과)가 있었는데, 일단 고정적으로 실시되는 분과는 1392년 제정된 입관보리법(入官補吏法)에서 처음 규정되었다. 이 당시에는 이과(吏科), 역과(譯科), 의과(醫科), 음양과(陰陽科)가 고정적으로 실시되었다. 이후 제정된 경국대전에서 이과 대신 율과(律科)가 들어가며, 역과, 의과, 음양과, 율과가 고정적으로 실시되었다. 하지만 이 네 가지 분과만으로는 수십개의 아문과 속사에서 필요한 전문 기술 관원을 확보할 수 없었다. 때문에 관원이 필요한 속사에서는 잡과가 실시될 때 꼽사리끼는 방식으로 관원을 선발, 확보하였다.
다만, 여기서 고정적으로 실시된다는 것은 일정한 시기마다 실시된다는 것이 아니라, 4개 분과 시험의 제도와 실시가 법제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현대 대한민국에서 기술직 공무원이나 연구직 공무원을 뽑을 때도 행정공무원이나 부사관/장교처럼 상시적으로 모집하는 게 아니라 소수만 그것도 상시적으로 뽑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보면 된다.그래서 문과 정도는 아니였지만 경쟁률이 매우 높았다.
참고로 문과와 무과와 다른 잡과만의 특이한 체계가 있었는데, 바로 부분점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아래에 나온 모든 시험엔 통(通)·약(略)·조(粗) 등 등급이 있었으며, 통은 2분(分), 약은 1분, 조는 반분으로 계산하는데 지금으로 치자면 문제에 대한 대답을 잘했냐에 따라 배점 4점 만점에 4점,2점,1점,0점으로 나눠서 매겼다고 보면 된다. 최종 성적에 따라 1등은 종8품계, 2등은 정9품계, 3등은 종9품계를 주어 임시 관직인 권지(權知)로 임명하였다.
잡과는 당연히 문과와 무과와는 차별을 받았으며, 시험 제도와 관직 제수에서 그 차이를 보인다. 문과와 무과는 예비시험을 거치고, 대과에서도 전시를 거쳐 왕이 직접 순위를 정해주는 형식을 취했으나, 잡과는 예비시험이 없고, 본시험도 초시와 복시로만 이뤄져 있었다. 부정기과는 초시와 복시로 나누지 않고 단 한 번의 시험만으로 합격자를 뽑기도 했다. 또한, 합격 증서인 백패(白牌)에도 문과와 무과에는 어보(御寶)를 찍어줬으나, 잡과에는 예조인(禮曹印)만 찍어주었다. [22]
잡과 내에서도 어느 정도 서열이 있었다. 역과가 으뜸이었고, 음양과, 율과, 잡과가 그 다음, 부정기과가 말단이었다. 이는 성적에 의한 품계 서평에서 드러난다. 역과의 1등은 사역원의 종7품을, 2등은 종8품을, 3등은 종9품을 받았다. 다른 잡과의 1등은 종8품, 2등은 정9품, 3등은 종9품을 받았다. 부정기과는 정9품 혹은 종 9품을 받았다. 애초에 부정기과는 최종 선발 인원이 1~2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최말단의 품계를 받았다.
조선 중기 이후 잡과의 경쟁이 치열해지자, 바로 잡과에 응시하기보다는, 후술할 취재에 들어 녹봉도 받고 기술 실무를 쌓으며 공부해 잡과에 응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한, 조선 후기의 잡과에서는 세습의 경향이 짙어지는데, 마땅한 기술 교육기관이 전무하던 당시엔 선대의 기술 전수가 유용한 잡과 준비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2.6.3.1. 이과
경국대전 편찬 이전에 잠시 치뤘으며 원래는 취재로 뽑았던 중앙에서 일하는 하급관리인 서리와 중간관리직인 녹사를 뽑기위해 치렀던 시험으로, 지금으로 치자면 말단/중간관리직 공무원을 뽑는 9급 공개경쟁채용시험, 7급 공개경쟁채용시험과 비교가 가능했다. 아래에 언급된 율과는 원래 이과에 속했다. 1등에겐 가객고승동정(架閣庫丞同正), 2등에는 부승동정(副丞同正), 3등에는 녹사동정(錄事同正)을 줬으며, 나머지에겐 그냥 백패만 줬다. 그리고 여기에서 뽑힌 사람은 일명 거관이란 제도를 통해 수령으로 특채될 기회가 주어졌다.
다만 아전 항목에서 보듯이 녹사나 서리로 선발된 사람은, 문과/무과 등으로 정식으로 선발된 사람보다 승진 등이 느린 등 많은 불이익이 있었으며, 설령 거관을 하더라도 경쟁자가 너무 많아서 수령이 되기 힘들었다.
경국대전 편찬 이후 이과에서 율과가 독립해 나갔고, 이들은 다시 녹사취재/서리취재로 선발방식이 바뀌면서 소멸되었다.
2.6.3.2. 이문과
외교 문서를 관리하는 관리를 뽑는 시험으로, 지금으로 치자면 역과와 같이 외교관후보자 선발시험과 비교가 가능했다. 다만 이과와 같이 조선시대 초반 약 40여년간만 시행되었으며, 지금의 외교부에 해당되는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 (承文院)이 탄생한 이후엔 그냥 문과의 선택과목으로 해서 모집하는 것으로 바뀜으로써 소멸되었다.
2.6.3.3. 역과
역과는 통역사와 외교관인 역관을 선발하는 시험으로, 사역원(司譯院)에서 주관하였다. 지금으로 치자면 통역사 & 번역사 시험 + 외교관후보자 선발시험에 가까웠다.
한학, 왜학, 몽학, 여진학이 있었는데, 한학은 초시에서 45명(한성시: 23명, 해주시: 7명, 평양시: 15명)을 선발하고, 복시에서 13명을 선발했다. 왜학, 몽학, 여진학은 각각 초시에서 4명, 복시에서 2명을 선발했다. 즉 왕 앞에서 시험을 보는 전시가 없었던 것.
참고로 사역원에 입사하는 조건은 매우 까다로웠는데, 현직 역관의 추천이 있어야 되며 심사위원에 해당되는 사역원 관리 15명 중 13명의 동의를 받아야 입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세종 시절엔 한학부가 사실상 중국어마을(...)이 된 적 있었다. 무려 한학부에서 중국어를 안 쓰고 한국어를 쓰다가 걸리면 군역으로 보내버린다는... (...)[23]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었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 주변 외국과의 교류가 증가하면서, 통번역 수요가 증가하고, 이 과정에서 역관의 지위가 상승하게 된다. 또한, 통번역 업무를 수행하면서 비공식적인 수입을 창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 실제로, 초시 합격 자격만으로도 품계는 받을 수 없지만 변경 지역의 관청에서 통번역 품을 팔거나 개시(開市)와 후시(後市)에서 무역을 하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말기엔 특정 역관 가문이 차지하는 세습직이 되었다.
2.6.3.4. 의과
의과는 의원(의사)을 선발하는 시험으로, 내의원이 아닌 전의감에서 주관하였다. 초시에서 18명을 선발하고, 복시에서 9명을 선발했다.
드라마에서는 의과에 합격하면 내의원에서 바로 근무하는 것처럼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매우 어려웠다. 내의원 정원 자체가 20명이 채 되지 않았고, 그 중에서도 순수 잡직은 10명 내외였기 때문에, 대부분 혜민서나 활인서에서 근무했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지방 감영에서 근무하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으로 치자면 국립 보건소에 근무하는 의료직 공무원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2.6.3.5. 음양과
음양과는 관상감에서 주관했는데, 천문학, 지리학, 명과학(命課學)으로 나뉜다. 천문학은 초시에서 10명을, 복시에서 5명을 선발했고, 지리학과 명과학은 각각 초시에서 4명, 복시에서 2명을 선발했다. 음양과에 합격하면 지관(地官)으로 일했다. 지금으로 치자면 기상직 공무원이나 지적직 공무원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2.6.3.6. 율과
원래는 선술한 이과에 속했지만, 경국대전 시행 시기에 독자적인 과로 독립하였다. 율과는 형조에서 실시했고, 초시에서 18명을, 복시에서 9명을 선발했다. 그리고 복시에서 선발된 인재는 법원 실무를 담당하는 율관이 되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법원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법원공무원과 같다고 보면 된다.
시험 과목은 명나라의 법전인 대명률과 경국대전, 당률소의,무원록,율학해이,율학변의 등 법학 관련 과목들이었으며. 영조 이후엔 대명률, 무원록, 경국대전으로 축소되었다. 참고로 율관은 상한선이 있었는데, 바로 종6품이었다. 즉 아무리 잘해도 참하관이 끝이었던 것.
2.6.3.7. 부정기과
이 밖에도 요리, 미술, 음악, 수학, 도서 관리 등 여러가지 기술 관련으로 전문직 관리를 선출한 기록도 있었다. 즉 현대의 연구직 공무원이나 타 직렬의 기술직 공무원을 선출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2.6.4. 취재
일명 특별시험으로 분류가 되며, 중앙의 하급관리인 서리와 녹사, 그리고 양반의 자손, 친척에게 관직을 주기 위해 치른 시험이다. 아래의 음서와 마찬가지로 품계의 상한이 있었다.
참고로 아전 항목에서 보듯이 녹사와 서리도 처음엔 취재로 모집을 했었지만, 이후 이과로 모집을 했으며, 그 뒤엔 다시 취재로 모집방식을 바꿨다.
참고로 취재 출신자는 녹봉은 받을지라도 문·무반의 품계를 받을 수 없었다.[27] 잡과 출신자는 문과와 무과에 비해 차별은 받았을지라도 과거라는 정규 시험의 합격자이기 때문에 취재 출신자는 잡과 출신자보다도 안 좋은 대우를 받았다. 잡과 출신자는 자신의 임용 성적과 근무 여하에 따라 당상관의 지위를 얻어 반상의 지위에 들 기회[28]를 얻어볼 수라도 있었지만, 취재 출신자는 과거 전시에 합격하지 않는 이상 꿈도 꿀 수 없었다.[29], 그래서 취재로 들어와서 잡과를 도전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2.6.5. 음서
고려시대까지는 반드시 과거에 합격하지 않더라도 문벌귀족의 초필살기 음서를 통해 바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고위 공무원이면 그 빽으로 관리가 되는 것. 그야말로 합법적 혈연 낙하산인데, 오히려 뭐하러 힘들게 과거 봐서 관직에 오르냐는 말이 돌 정도로 음서를 통해 관리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 하기는 커녕, 음서 출신이 과거를 합격해 실력으로 들어온 관리들을 제치고 재상 반열에 오르는 일도 있었다. 딱히 과거 급제를 안 해도 명시적인 진급 상한선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 급제자 출신에 대한 명예와 예우는 분명히 있었다. 후대인 조선시대보다는 못하다곤 해도 고려시대에도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는 것을 떳떳치 못하게 생각하는 인식이 있었고, 권세 있는 문벌귀족, 권문세족 가문에서도 능력만 되면 자식들이 과거로 입신하길 원했고 또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음서로 일단 관직에 진출한 후에도 과거 공부를 계속하여 과거에 합격하는 사람도 꽤 있었고 과거 급제를 했다는 것은 충분히 능력이 있다고 볼 수 있어서인지 과거 제도 시행 이후 최고위 관직 재임자 상당수가 음서 출신인 과거 급제자였다. 단순히 가문이 좋다고 올라온 게 아니라 개중에서 실력이 확실히 있으니까 올라온 것이다. 또한 시험 감독관인 지공거 같은 일부 관직은 과거 급제자만 맡을 수 있기도 했으므로 과거 급제는 명백히 내세울만한 것이다.
거기다 과거 급제자는 오늘날의 공무원 시험의 합격자처럼 일정 품계 이상 관직부터 출발한 반면 음서는 과거급제자보다 훨씬 낮은 말단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고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당연히 과거 급제자가 승진이 빨랐다. 단 음서는 일반적인 과거 급제자의 급제 시 연령보다 더 빨리 받을 수 있어 음서로 말단이나마 관료 경력과 경험을 쌓고 보는 것은 확실히 이득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음서를 받았다는 것은 본인이 잘하고 말고 이전에 음서도 받을 정도로 위세가 좋은 가문이라는 말이기도 하므로 나중에 과거 급제를 해서 충분히 능력을 보이면 딱히 타 급제자에 비해 꿀릴 것도 없는데다 가문의 후광까지 받을 수도 있다.
조선 초 명정승으로 유명한 황희도 원래 고려말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당시에 처음 받은 것은 품계도 없는 말단 하급직이었다. 이후 관직 생활 도중 과거에 급제하여 개경의 중앙 공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고려시대에 이름을 날린 인물 중에서는 이렇게 음서로 관직을 시작했다가 이후 과거에 급제한 경우가 상당수 있다. 고려 후기 대표적인 권문세족 가문 출신인 이인복, 이인임 형제를 보면 이 집안은 상당한 권문세족 가문이었지만 이들 형제 역시 음서가 아닌 과거로 공직에 나가기 위해 노력했고 이인복은 과거에 합격했으나 이인임은 실패하여 음서로 관직에 진출했다. 당연히 과거급제자 출신인 이인복의 출세가 초기에 훨씬 빨랐다. 이인임은 나중에 출세했지만, 초기에 그의 승진은 더뎠고 이후 공민왕기를 거치며 정치9단 이인임 특유의 처세술로 성공하게 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관료제가 보다 세련되게 발전했고, 과거 제도 또한 체계적으로 발전하면서 음서를 통해 관료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다. 당장 음서 출신 관료들을 문음이라고 칭하며 명칭도 바뀌었을 뿐더러, 조선시대에는 2품 이상 관료의 아들만 음서가 가능했으며, 거기에 음서를 통해 관직을 얻으려고 해도 문음취재란 시험을 봐서 합격해야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당연히 고려와 마찬가지로 음서로 처음에 받을 수 있는 품계도 제한적이었다. 처음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품계가 이론상 과거 급제자와 마찬가지로 6품 밑이긴 한데 일반적으로는 급여조차 없는 말단직밖에 못 받았다. 과거 급제자에 비하면 승진이 상당히 어려웠던 것은 두말 할 것도 없고 청요직은 완전 봉쇄에 정3품 당상관 이상 진출하지 못한다는 진급 상한선까지 생겼으며, 더군다나 고려시대와 달리 과거로 들어온 사람보다 낮게 대우하는걸 거의 당연시 여기는 풍조가 팽배했다. 따라서 문음으로 관직에 들어오더라도 다시 공부해서 과거를 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제약이 훨씬 널널한 고려시대조차 음서로 관리가 된 사람이 과거 급제를 하는 사례가 꽤 있었고 음서 출신 고위 관료도 대부분 나중에 과거를 다시 쳐서 합격한 사람들임을 생각하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
심지어 금수저 오브 금수저라 할 만한 어지간히도 권세를 누리는 사람마저 이걸 피해갈 수가 없었고 과거 급제를 해야 제대로 대접받았다. 대표적으로 그 유명한 한명회는 할아버지가 명나라에서 조선 국호를 받아온 한상질이며 작은 할아버지는 개국 3등공신인 명문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음서로 등용되자 개성에서 경덕궁직이라는 말단관직을 전전했고 같은 관료들 사이에서도 왕따를 당했다. 한양 출신으로 개성에서 근무하는 관료들이 '송도계(松都契)'라는 친목계를 만들었는데, 한명회도 한양 출신이라 가입하려고 했지만 경덕궁직도 벼슬 축에 드냐며 끼워주지 않았다.
예외적인 사례가 바로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이다. 8대 옥당이라 하여 8대가 내리 홍문관 관원을 지냈던 후덜덜한 문벌의 덕을 받아 음서로 관직에 올랐는데, 영조가 과거에 다시 응시하여 고관으로 나아가기를 여러번 권유했지만 '이미 은혜를 입어 음서로 출사했는데 높은 관직을 구하여 다시 과거에 응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이유로 끝까지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래도 과거 급제도 안 했는데 정3품인 광주목사까지 역임했으니 상당한 고위직까지 진출했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예외로 영조시대의 화가인 겸재 정선이 있는데, 이 쪽은 음직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해서 과거급제 없이 종2품까지 오르게 된다. 왕도 정치를 표방했던 조선시대엔 당연하리만큼 왕과 세자의 스승이 매우 좋은 대우를 받았고, 정선이 왕의 스승이었기에 가능했던 사례라 보면 된다.
이렇게 된 이유는 고려 시대부터 음서 출신은 외교문서 작성 업무, 대간직, 지공거 등 높은 학문이 필요한 분야에는 임명을 받을 수 없는 제한이 있었는데, 음서 출신은 과거 출신 만큼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제한이 한층 강화되어 청요직에 나가는 것이 근본적으로 막혔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청요직을 통과하지 않으면 고위직으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음서의 가치가 낮아진 것이다. 그래서 과거를 통과한 이들만이 당당하게 관료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 말기에 이르면 다시 분위기가 역행하여 고관대작들의 자제들이 음서로 관직에 나가려는 경향이 서서히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이 시기에조차 고위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은 어디까지나 과거였으며, 바로 이것이 조선 말엽에 과거제의 폐단이 대두되며 과거 시험이 막장이 된 주요한 원인 중 하나다. (과거가 중시되지 않는다면 음서 카르텔이 과거를 무시하며 자기네들끼리 관직을 물려주면 되는데, 그걸 못 했다는 이야기다.) 그 김좌근조차 순조 때 김조순의 회갑 선물로 6품직에 제수되었으나 이후로 별다른 관직생활을 못하다가 헌종 때 과거 급제를 하고 나서야 폭풍승진을 거듭했다.
2.7. 경쟁률
현대의 행정직렬 공채에 해당되는 문과의 경쟁률은 무려 3000:1~16000 : 1이다. 현대의 공무원 시험이 아무리 인기직렬이여도 경쟁률이 고작(?) 200:1 정도인 걸 감안하면 말 그대로 헬난이도 시험이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무과는 문과보단 많이 뽑았을 때가 많았지만 그만큼 지원자격도 널널했기에 지원자도 많았었단 이유로 잡과는 지원자 자체는 문과보다 적었지만, 현대의 연구직/기술직 모집 때처럼 부정기적으로 시행이 되었단 이유로 문과와 마찬가지로 경쟁률이 높았다.
이러니 당연히 병과/을과로 급제를 하더라도 집안의 경사요[32], 장원이면 마을의 경사란 소리가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며, 괜히 문과에 양반가 자제들이 잡과와 무과에 양인들과 중인들이 목매면서 도전하는 것이 아녔던 것이다.
2.8. 결격 사유
현대의 공무원 시험에도 결격사유가 있는 것처럼, 과거 제도에도 결격사유가 있었다.
모든 시험에 응시할 수 없는 경우
재가한 부인의 아들
영구히 임용될 수 없는 범법을 행한 자(현대로 치자면 중범죄자다.)
대역죄를 저지른 당사자와 자손들
3품 이상 당상관
특정 시험에 응시할 수 없는 경우
서얼,향리의 자손 등 중인(문과)
3. 평가
3.1. 장점
능력을 지닌 사람을 비교적 공정성 있게 뽑을 수 있다는 점은 다른 방식에 비해 확실한 장점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신라 골품제의 결함인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4두품이면 나마 위로 못 올라가고 그 대신 무능한 진골이 이찬까지 올라가서 수뇌부가 무능화하는 문제를 해결한 것이 장점 중에 부각되는 부분이다. 실력만 있으면 누구든지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다는 점은 수뇌부의 능력을 탄탄히 하기 때문이다.
과거 제도의 시초는 한시적이긴 하지만 신라시대 관리등용방법으로 설치된 독서삼품과가 788년에, 고려시대에는 958년에 중국인 쌍기의 건의로 받아들여진다. 이 당시 유럽은 봉건제 사회로 영주와 기사들은 자신의 무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유지했으니 신분상승을 위해서는 칼로 점령하고 그들 위에 서야하는 시대에서 과거 제도는 고대/중세인 그 당시의 개념으로 보자면 공정성과 합리성 측면에서 대단히 혁신적이고 파격적인 시스템이다.
일단 전 세계적으로 따져봐도 관직을 임명하는 방법은 제한적이었는데, 딱히 그 전의 시스템이 과거 제도보다 특별히 더 공정하거나 유능한 인재를 임명하는데 합리적으로 작동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 이른바 전근대 시대에 과거제와 비슷한 제도로는 오스만 제국에서 시행했던 예니체리 및 관료 선발제도인 데브시르메 정도가 있을 것이다. 원래 기독교 피지배층에게서 세금 대신 능력 있는 남자아이를 갹출하다시피 징집한 제도로, 원래 황제의 근위대인 예니체리를 뽑기 위한 것이었으나 15세기 전반기부터 관료도 뽑기 시작하고 15세기 중엽쯤 되면 정계의 핵심 세력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쪽은 크게 보면 '시험→교육→시험→재능에 따라 배치' 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낮은 신분도 시험을 볼 자격이 주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이들만 응시할 수 있었고 관료나 장교의 아들은 시험을 볼 자격이 없었다. 애초에 제도의 목적 자체가 대를 이어 관직이나 권력이 세습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었기 때문.
그 외에 전 세계 역사를 통틀어서 관리를 뽑는 방법들은 다음과 같다.
추첨제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등에서 나타난 방법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기회를 가진다는 '공평함'은 확보되지만 능력상 합당한 인재가 선출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단, 고대 그리스에서도 당연히 제비뽑기로 나타날 수 있는 문제를 알고 있었기에 선출직이 따로 있었다. 그리고 페리클레스 등 유명 정치가들은 전부 그러한 선출직 출신이었다. 한편으로는 시민들도 언제 제비뽑기로 관리가 될 지 모르니 평소 공부를 많이 해야 했다. 오늘날에도 배심제 등 일부 제도에서는 사용된다. 주로 사법이나 감사 관련인 경우가 많다.
선거
공화제 국가에서 나타난 방법. 선거는 많은 사람에게 관직을 인정받았다는 '정당성'은 확보되지만, 비용이 많이 들고 번거롭다는 문제가 있다. 사실 고대에 선거가 어려운 것은 교통/통신 수단의 한계 탓도 크다. 아테네 같은 도시국가라면 모를까 조선 정도만 해도 걸어서 며칠은 걸린다. 게다가 민주주의가 확립되기 전의 선거는 선거의 4대 원칙이 지켜지지 않아서 후보자 자격, 투표권, 개표 문제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부적절하고 불평등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또는 그랬다는 마타도어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정당성도 확보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민주공화제가 주류 정치체제가 된 오늘날에는 선출직 공무원이 폭넓게 나타나며, 특히 기술관료보다 고위직에 적용된다.
상속과 세습
관직의 세습은 중세까지는 세계적으로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어느 정도 중세적인 관료제가 나타난 나라에서도 아버지의 관직을 자식이 세습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했으며, 이는 사회적으로 흔히 있는 직업의 세습 관념이 관직에도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공무의 위탁·수행이 명예와 위신, 부에 대한 대가로 여겨졌다. 다만, 조선시대의 아전이나 신량역천, 일본의 부라쿠민, 유럽의 사형집행인 등 실제 맡은 일이 고되고 권위가 없는 경우 직역(職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요역(徭役)에 가까운 취급이 되고는 하였다.
해당 사례로는 서유럽의 봉건제가 잘 알려져 있으며, 동아시아에서도 천거제나 과거제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널리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과거제가 정착한 후에도 부분적으로 남았다. 대표적인 게 바로 동양의 음서. 다만 음서의 경우 곧이곧대로 부친의 직책을 물려받는 건 아니기에 차이는 좀 있다. 오늘날에도 북미의 몇몇 시골 보안관 직책은 여전히 세습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공직에는 거의 적용되지 않는다.
천거, 발탁
관료나 호족, 명사 등 유력자의 천거나 발탁. 천거 제도는 처음으로 족벌주의에서 탈피하는 방법을 제시해주었고, 대개 추천자의 평판과 위신에도 영향을 주었으므로 최소한 능력이 있는 자를 선별하려는 경향이 나타나면서 잘 작동할 때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유력자의 발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인재는 한계가 있었으며, 유능한 인재가 유력자에게 기대게 되어 파벌과 문벌이 강화되는 부작용이 있다. 뿐만 아니라 발탁 과정의 공정성 역시 담보할 수 없다보니, 나중에는 사실상의 세습제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외적으로 무인들은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등 출신에 관계없이 실력으로 출세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웠지만, 그러한 사람들이 맡는 직위들은 상대적으로 요직이나 고위직은 아닌 경우가 많았다.
유럽에서는 매관제나 엽관제, 실적제 등과 복합적으로 결합되기도 하였다. 예컨대 근세 영국 해군에서는 제독은 물론이고 함장은커녕 일개 장교조차 돈으로 바로 얻을 수가 없고 후보생도 경험을 해야 했으나, 일단 장교가 된 다음에는 부족한 함장과 제독 TO를 놓고서 경쟁자를 누르고 빠르게 진급하려거든 상급자들인 함장이나 제독, 해군대신 등의 인사평가가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이는 민간에서도 마차가지였는데, 가령 빅토리아 시대의 각종 사용인(가정교사, 집사, 메이드 등)들은 계약기간이 끝나거든 기존 고용주에게서 소개장이나 추천서를 받으면 다른 곳에서도 수월하게 재취직할 수 있었고, 아예 새 고용처를 직접 연결해주기도 하였다.
서구권, 특히 영미권에서는 아직도 천거 제도의 영향이 남아 있어 전 직장의 상사나, 신입이라면 담당 교수의 추천서(reference)가 있다면 구직 시에 큰 우대 조건이 된다. 사람을 쓰는 데에 직접 겪어본 사람의 추천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서인데, 추천해주는 사람도 본인의 지위를 내걸고 '이 사람은 유능하다.'라고 보증해주는 것이니 아무나 추천서를 써주지도 않는다. 만약 한국에서 공채 우대조건에 교수 추천서가 들어간다면 인맥 채용이라고 난리가 날 것이다. 실제로 추천서가 먹히려면 써주는 사람이 누구나 인정하는 사회적 지위가 있어야 하고, 막 취업시장에 나온 젊은이가 그런 사람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뿐이다. 부모의 인맥.
매관제
공직이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이 생기지만, 동시에 권력을 행사할 기회이기도 했으므로, 수여자와 피수여자 간 상호 이익을 위해 매매되기도 하였다. 특히 유럽에서 지방 말단 관료는 공식적으로 돈 주고 자리를 살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근세로 가면 민간 관료뿐만 아니라 장교단도 매관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매관제도 나름의 장점은 있었는데, 돈 주고 관직을 구할 만한 사람은 대개 부유한 상류층이었고, 사실상 이들이 공무를 대행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인사 채용은 물론 공무 과정에서의 비용도 많은 경우 매직으로 해결하고 세금과 국고를 아낄 수 있었다. 고급교육의 기회도 애초에 잘 사는 집안일수록 누리기 쉬웠기에, 생각보다는 잘 굴러간 편이었다. 군주권이 강한 경우 아예 그러한 직위를 강제로 맡아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제도들과 마찬가지로 무능한 사람이 돈으로 관직을 꿰어차는 경우도 적지 않았고, 공정성 확보가 어려워서 차츰 사장되었다. 다른 제도와 달리 민주주의나 공화주의하고도 맞지 않으므로, 현대에는 공직은커녕 사기업에서도 비리로 간주되어 사용되지 않는다.
엽관제
정당에 대한 충성도와 기여도에 따라 공직자를 임명하는 인사제도. 선거제와 유사하게 엘리트주의를 견제하고 민주주의 실천에 기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는 하나, 직무에의 전문성이 결여되고 천거제나 매관제에서처럼 부정부패로 흐르기 쉽다. 의원내각제적 요소를 지닌 행정부가 국회의원을 장관으로 임명하는 것은 대표적인 엽관주의적 사례이며, 비례대표제도 일종의 엽관주의와 실적주의의 절충으로 여겨진다.
과거 제도가 비용이 들어간다고는 하지만, 다른 방식은 과거 제도 이상으로 '문벌'이나 '재산'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공정성'을 확보했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 전체의 모든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 능력을 살리는 시험을 보게 하고, 이로서 유능한 인재를 지속적으로 공급받는 방법을 제도화하자는 것은 사실 굉장히 혁신적인 발상이었다. 이와 같이 철저한 능력주의(meritocracy)는 오늘날 현대 사회의 기틀을 이루고 있으며, 현대인의 관점에서나 당연해 보일 뿐이지 그 시대 사회의 기준에서는 당연한 게 아니었다. 과거 제도에서 나타난 폐단들은 결국에 신분에 의한 채용이나 매관매직 등인데, 과거 제도 이외의 제도들은 그런 폐단을 처음부터 감수하는 국가 공식 임용 제도와 다름이 없었다.
과거 시험의 난도를 보면 현재 시행되는 어떤 시험보다도 높다. 현대 한국 기준으로 가장 어려운 입직시험이라면 입법부(국회사무처) 5급 공무원을 채용하는 입법고등고시, 행정부(인사혁신처) 5급 공무원을 채용하는 5급 공개경쟁채용시험, 과거에 외무고시로 불렸던 외교관후보자 선발시험, 사법부(법원행정처) 5급 공무원을 채용하는 법원행정고등고시 지금은 폐지되고 법학전문대학원 및 변호사시험으로 대체된 사법시험 등을 들 수 있을 텐데, 과거 시험은 이 시험들보다도 수준이 높다. 시험을 치르기 위해 기본적으로 사서삼경은 암기하고 있어야 한다. 게다가 역대 역사의 내용도 전거로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자치통감 수준의 역사서의 내용도 알고 있어야 했다. 거기에 답안을 작성하는 언어도 한국어가 아닌 한문이다. 이는 중국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는데, 한문은 구어체인 백화문과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이 정도가 기본으로 장착해야 하는 능력이다. 최종적으로 전시에서 나오는 문제를 답하고 자신의 논리로 서술해야 하기 때문에 종합 논술의 성격도 가진다. 그리고 과거의 답안은 절대로 길면 안 됐다. 종합 논술의 답안을 단 한 문장으로 담아내는 능력까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어렵게 시험을 통과한 조선시대 관리들은 기본적으로 한문구사 능력과 유학적 소양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능력은 중국이나 일본으로 사신으로 갔을 경우에 잘 드러난다. 중국어나 일본어를 한마디도 못 하지만 한문으로 필담을 나눌 수 있고 과거 시험을 준비하면서 얻은 역사 지식과 경전의 이해는 물론 한시를 주고받는 광경은 조선시대 기행문을 보면 매우 흔하게 관찰된다. 그래서 조선통신사를 파견할 때 에도 막부는 전문적으로 한시와 한문을 작성할 수 있는 제술관(製述官)을 요청했고, 당대 일본의 지식인들은 파견된 통신사 일행을 만나기 위해 천금도 아끼지 않고 문집의 발문과 서문을 지어 달라고 청하고 자신이 지은 한시와 문장을 비평해달라고 청했던 것이다. 자기 능력을 검증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과거시험이 실무능력보다는 '쓸모없는' 유학 고전이나 암기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러한 비판은 과거제도가 시행되었던 시대의 환경을 무시한 것이다. 전근대의 유학은 국가 경영의 기본 뼈대가 되는 학문으로, 그 시대의 관점에서는 충분히 실용적이었다. 또한 과거제도의 시험 출제내용도 기초 시험만 경전을 따져봤을 뿐, 본시에 이르러서는 "북방 이민족들의 침입으로 변경지역이 위태로운데 이를 혁파할 방안을 논하라."등 실무에 필요한 내용을 시험에 출제하였다.
실제로 북송 이전에는 문벌귀족 가문이 왕조보다도 훨씬 더 길게 존재했다. 이에 반해 북송 이후의 문벌 가문은 그 영향력이 크게 축소되었다. 과거 제도가 존재한다면 문벌은 스승과 제자가 여러 대에 걸쳐서 과거에 합격해야 형성이 되는데 아무리 뛰어난 스승이 있다고 하더라도 제자가 100% 과거에 합격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리고 시험관 - 합격자가 문벌을 형성한다고 해도 동아시아권에서 정쟁이 벌어지면 관료들이 죽거나 좌천당하는 일이 부지기수인데 이러한 상황에서 문벌이 형성되기는 매우 어렵다.
한국의 경우 고려시대 때 문벌귀족과 권문세족이 판쳤지만, 조선시대로 가면 과거제 합격유무에 따라 양인의 신분이 좌지우지되면서 양인과 노비의 제도가 자리잡히게 된다. 양반 집안이 3대를 넘어가도 과거를 통과하지 못하면 상민으로 신분이 추락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상민이 양반으로 출세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지만 있기는 있었다. 대표적으로 정충신. 이쪽은 아예 노비 출신이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공을 세워 양인이 되고, 그 후 과거에 합격해서 양반이 되었다.
또 과거 제도는 당시 조선 지식인들에게 장원 급제의 꿈을 안겨주었다. 경쟁률이 매우 낮기는 해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과 조금이나마 기회가 있는 것은 사회 분위기에 매우 큰 차이를 준다. 이것이 근대로 오면서 신분제가 무너진 사회에서 누구나 공부만 열심히 하면 신분상승으로 사회에 지도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 주었고,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 나는 힘들게 살아도 자식만은 나아지길 바라며 교육에 온갖 정성을 쏟는 사회 분위기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결과적으론 근대화에 발판이 되고 높은 과학기술의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아래 문단에서 더 자세히 다루듯 현대에 이르러서도 전 세계에서 공무원은 물론 대기업에서 직장인을 뽑는 방식은 과거 제도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다. 관료제처럼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금까지도 과거 제도와 비슷한 시험 제도가 존속해 올 수 있던 것은, 현재까지 인간이 만들어낸 방식 중에서 그나마 가장 공정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과거 제도의 문제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사실 그 대부분은 국가가 크게 부패하여 과거제도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요식행위로 전락했을때 발생하는 것이었다.
3.2. 단점
네가 곡산에서 공부하다 집으로 돌아간 뒤 내가 과거공부를 하라고 한 적이 있었지. 당시 주위에서 너를 아끼던 문인이나 시를 짓던 선비들은 본격적인 학문을 시킬 일이지 과거 따위나 시키고 있느냐고 모두 나를 욕심쟁이라고 나무랐고 나도 마음이 허전했었다.
─ 정약용, 1802년 12월 22일 강진에서 귀양 살면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
단점으로 제일 먼저 지적되는 문제가 사회가 경직된다는 점이다. 먼저 과목이 국가 기득권에게 유리한 것으로 결정되기에 기득권층이 원하는 사상을 사회전반에 강요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이외의 새로운 사상이나 발견을 허용하지 못하여 오히려 탄압하게 되어 사회가 퇴보한다. 조선과 중국은 사회가 유학적 관습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오히려 가면 갈수록 유학적 사고를 더 강요하여 결국 국가가 퇴보해, 19세기쯤 가면 조선과 중국은 서구권에 비해 전방위적으로 밀리게 된다. 다만 이는 과거제 때문에 그렇게 됐다기보단 특정 사상을 강요할 수 있는 기득권의 막강한 권력이 이미 존재했고 그것이 과거 제도로 발현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교 철학이 더 이상 시험 필수과목이 아닌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과거 시험의 필수과목이던 유교 경전을 달달 외우는 걸 잘 하는 인재가 정말로 효율적이고 유능한 인재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비판점도 있다. 실용적이지 않은 지식이 필수과목이라 해외에서는 오히려 과거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발전이 정체되었다는 비판도 나온다.
또한 아무리 실무 지식으로 시험 주제를 구성하여도 막상 실무에 들어가면 반드시 괴리가 생기기 때문에 실제 시험 성적과 실무 실력의 차이가 반드시 드러난다. 대체로 실무실력이 나중에 시험 성적을 따라가기에 잘 부각되지 않는 맹점일 뿐 분명 시험만능주의의 폐단 중 하나이다. 실무지식만으로도 이런데 유학만을 다루는 과거제는 더 심했으며 단순한 학문의 경직을 넘어 정책의 경직까지 퍼졌다. 도입 초기인 세종 때까진 문제 없이 잘 굴러갔으나 결국에는 유학에만 빠삭한 인재가 관직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 특징상 이후의 국왕대에서 점차적으로 정통 성리학파인 사림파가 대두되면서 조선은 점점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사림파의 비판 참조.
게다가 시험에 의한 인재 선발의 전체적인 문제로 바로 사람의 됨됨이를 판별하지는 못한다. 시험을 통과할 수만 있다면 성격이 개차반이라도 들어갈 수 있는 점이 최악의 문제점이다. 이점은 현대의 공무원 선발 시험들도 마찬가지긴 하다. 사람의 됨됨이가 인재 선발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할 때 나오는 최악의 경우가 현대에도 있는데 일반 공무원들도 그렇지만 특히 권력을 주름잡는 정치검사/판사들이며, 그들의 권력을 위해 뒤를 봐주는 집단이 생기기 마련이다. 중요 직책을 도덕성이 결여된 사람이 맡을 때의 문제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인성 부분에 한해선 차라리 과거제도 발달 이전 고대 동양에서 천거하던 시절에는 이런저런 대비책이 있었다. 추천해서 등용된 자가 사고를 치면 추천한 사람도 같이 털렸기 때문에 추천권을 가진 사람이 평소 행실을 체크해서 신중히 추천했기 때문에, 아는 건 많지만 인성이 개차반인 사람을 거를 수 있었다. 실제로 조광조는 성적으로 뽑는 과거시험이 행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현량과를 제안했고[50] 그 외에 몇몇 실학자들처럼 과거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천거제도를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물론 천거제의 단점이 과거제의 단점보다 많기 때문에 이뤄지지 않았지만 과거에도 과거제의 단점을 인식하여 대안으로 제시할수밖에 없었던 것.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성리학적 유교 사상에 의한 정치체제를 더욱 공고화됨에 따라 과거시험의 비중은 더욱 커졌고, 사회적으로도 사람이 출세하려면 사실상 과거 시험을 합격하여 양반이 되는 것 외에 별다른 게 없다보니 소위 ‘과거만능주의’ 가 사회 전반에 만연하게 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일단 과거 자체가 워낙에 준비기간이 긴데다가 난이도까지 어렵다보니 수험기간만 수십년이 넘은 수많은 장수생을 양산했고,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서얼이나 평민들까지 과거시험을 준비할 정도로 응시생만 10여만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합격률은 더욱이 낮아졌다. 합격도 이러한 상황에서 임용은 더욱 끔찍했다. 조선 후기에 들어 기득권이 보수화 되어가면서 최고위층 유력 가문만 임용이 되는 상황이 펼쳐지다보니 과거 합격을 통한 관직 임용은 더더욱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임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최소한 양반 지위라도 유지하기 위해[51] 생업을 내팽개치고 일생을 과거시험에만 매달리는 폐단을 낳았고, 고시낭인이 됨은 물론 집안까지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물론 이 사람들을 현대의 시각으로 단순한 잉여인간이자 등골브레이커 정도로만 폄하할 수는 없다. 당시의 과거 준비생들은 합격 자체가 자신의 입신뿐만 아니라 가문 자체의 생존과도 직관돼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어렵고 긴 시간동안 준비해서 과거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에, 과거 합격자들은 과거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거나 한문 실력이 없는 사람에 대해 강한 차별의식을 가졌고, 그 대상이 국왕이라 해도 다르지 않았다. 일례로 조선 영조는 즉위 전에 경전 공부를 하지 못했기에, 결과적으로 즉위하고 나서도 상소문이나 신하들의 발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이때 신하들은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영조를 무시했다. 이는 영조의 컴플렉스가 되어 사도세자가 공부를 게을리하거나 따라가지 못할 때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다그치게 되며 나중에는 아들을 정서적으로 학대하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영조 본인도 경전 공부에 노력을 했는지 나중엔 신하들이 쩔쩔 맬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시험 제도는 그나마 과거 제도를 옹호하는 문화권에서는 다른 방식에 비해 공정하다고 하지만, 관리 감독이 잘 이루어져야 이러한 장점을 유지할 수 있다. 시험 잘 봐봤자 담당관이 멋대로 조작해버리면 합격하지 못하며 시험을 개차반으로 봐도 담당관이 뒤를 보면 합격할 수도 있다. 현대에는 여러가지 부정행위 방지 대책을 만들어놨지만 조선시대엔 이런 부분이 훨씬 부실할 수밖에 없었고 특히 조선 말기의 과거제가 이러한 폐단이 심했다. 예를 들어 그 사림파도 광해군을 쫓아내고 인조를 옹립하면서 '산림직'이라는 특권을 얻는데, 과거시험 없이 다이렉트로 벼슬을 받는 제도였다. 시험 자체를 공정하게 치른다고 해도, 시험이 아닌 다른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느냐, 사람마다 공정의 기준이 다른 것은 어떻게 판단하냐는 시각이 서구적 시각에서는 강한 편이다.
일본의 "일중 비교 교육사"에서는 중국에서 서양 학문의 도입이 지연된 이유 중 하나로 중국의 학문 교육이 경직화 되었고, 에도시대의 일본 학문과는 유연성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주장하면서 중국의 근대화가 늦은 이유의 하나로 '과거 제도의 영향'을 꼽기도 한다. 중국은 과거에 급제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관직을 얻어 권력을 쥘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정권의 중추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중국 교육의 중심은 과거가 되었고 사회 전체의 지식 강화보다는 개인의 입신양명에 필요한 유학 이외의 학문에는 관심이 없어졌다. 이렇다보니 사회는 관료제의 특성상 경직되고 유학 이외의 과학, 의학 같은 실용적이지만 과거 급제에는 한톨의 도움도 안되는 학문이 천대받는 사회가 만들어지면서 유학을 제외한 나머지 학문의 발전이 매우 지체되고 과거에 급제하기 위하여 중국의 학습자는 지위와 재력을 가진 사람으로 제한되었으며, 권위와 권력에 밀접하여 논쟁적, 창조적인 학문이 배제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는 과거 제도를 시행한 조선에도 그대로 적용 가능한 논리이며 실제로 조선도 이와 비슷한 길을 걷게 된다. 현재도 한국 등지에서는 관존민비의 사상을 가지게 된 몇몇 공무원이 기득권을 좇아 창의적인 사업에 대해 규제를 한다는 식으로 갈등이 있고, 시험으로 평가가 용이한 행정 절차에는 공무원이 서양 이상으로 굉장히 능숙한 편이나 관이 뛰어넘을 수 없는 민간 분야의 창조성, 예컨대 서비스 산업이나 기타 문화 산업 등에서는 자신이 잘하는 규제를 통해 규제 만능주의적 사고를 가진다는 비판도 있다.
이런 과거 제도의 영향은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교육열로 이어져, OECD가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나오는 황금 티켓에 빗대 '황금 티켓 증후군'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