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가. 겉 사람의 의지 처인 맘모나(재물)를 버리지 못하면 예수와 하나 되지 못한다.
나 ‘없어질’로 오역한 ‘에틀리페테’는 그치다, 실패하다, 결핍되다, 부족하다, 뜻이다.
다. 처소(스케나스)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으로서 몸 된 성전이다.
2. 본론
가. 겉 사람의 의지 처인 맘모나(재물)를 버리지 못하면 예수와 하나 될 수 없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
예수의 제자가 되는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 등장하는 것은 모두 맘모나(재물)의 속성으로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 의지처인 맘모나를 버리지 못하면 예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이를 넘어서지 못하였는데도 자칭 예수의 제자라고 한다. 목사 선교사 신학박사들이라도 맘모나를 버릴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나. ‘없어질’로 오역한 ‘에틀리페테’는 그치다, 실패하다, 결핍되다, 부족하다, 뜻이다.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눅 16:9)” 이 또한 오역이다.
‘없어질’로 오역한 ‘에틀리페테’는 동사, 가정법, 과거 2인칭, 복수이며 에크와 레이포에서 유래했다. 어의는 생략하다, 즉(함축적으로) 그치다(죽다), 실패하다, 결핍되다 부족하다의 뜻이다.
그러므로 ‘없어질 때’가 아니라 ‘영원한 처소로 ’ 오역한 ‘에이스 타스 아이오니우스 스케나스’는 시간의 개념이 아니다. 시제가 없다. 그러므로 ‘영원한 처소’가 아니라 ‘아이오니우스’는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곧 정과 욕심으로 가득찬 마음의 속성이 십자가에 달려 죽고 난 이후에 나타나는 세계다.
겉 사람 곧 휘장이 찢어지고 난 이후의 차원이다. 맘모나(재물)가 사라진 이후에 나타나는 것이 천국이다. 이 ‘아이오니우스(지성소)’ 안에서 아버지와 하나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 하였다. 아버지와 하나인 내(예수 차원)가 나타나는 것이 ‘아이오니우스(지성소)’다.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눅 16:9)” 문장 앞에 ‘없어질 때’로 오역한 ‘에클리페테’는 십자가에 달리기 전 내면에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이 모두 끝나는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 처소(스케나스)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몸 된 성전이다.
겉 사람의 속성인 맘모나(재물) 곧 겉 사람의 아이오니우스(지성소)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면 앞에서 말씀하신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혼)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의 말씀이 열린다.
그러므로 아무나 이 길을 갈 수 없다. 목사가 되고 신학박사로 포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모두 내려놓아야만 한다. 광야 사십 년 생애를 통해 험악한 훈련을 받아야 하는 길이다. 그런 후에도 여호수아 갈렙에 속한 자들만 가나안 에레츠(땅)에 들어간다.
탈락자들은 어차피 고난의 과정을 이어가야 다음 기회를 얻게 된다. 예수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말씀하신다. 충족된 자만 ‘에이스 타스 아이오나스’ 안으로 들어간다. ‘에이스’ 전치사는 ‘~안(속)으로 들어가다’의 뜻으로 하나 되기 위함이다.
처소(스케나스)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몸 된 성전으로서 모두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나에게 있는 정과 욕심이 십자가에 달려서 없어지면 비로소 아버지가 계시는 ‘아이오니우스’가 내 안에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가 아니라 시제가 없는 개념이다.
시간과 공간의 의미가 전혀 없다. 마음(카르디아) 너머의 세계(아이오니우스), 곧 누스(이성, 지성, 정신, 영혼) 안에 있는, 성소(마음) 너머의 지성소가 나타나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이오니우스 안에는 어떠한 언어도 생각도 없이 끝난 자리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