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복음 26, 51 - 60 |
51 그러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들고, 대사제의 종을 쳐서 그의 귀를 잘라 버렸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상황 파악을 못하다가 무리가 달려들어 예수님을 붙잡자 그때서야 예수님이 체포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을 것이다.
다른 공관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마태오 복음 사가는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다치게 한 주인공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반면 요한 복음 18 장 10 절에서는 베드로라고 언급한다. 베드로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기원 후 68 년까지 생존했던 베드로의 안전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수님으로부터 여러 번에 걸쳐 배신하리라는 경고를 들은 그는 자신의 충성심을 시험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폭력 행위를 말렸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충성심은 그러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베드로가 칼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있은 후에 예수님의 신변을 보호할 목적으로 칼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고, 어떤 학자들은 그 당시에는 호신용 칼을 지니고 다니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고 해석한다.
귀가 잘린 사람은 ‘대사제의 종’으로 ‘말코스’라고 요한 복음 18 장 10 절에 언급하고 있다. 그는 아마도 대사제 직속 부하로서 경비병들의 지휘관이었을 것이다. 즉 그는 대사제가 예수님을 체포하라고 파견한 무리를 지휘했던 사람일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칼에 귀가 잘린 말코스를 고쳐 주신다. |
52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예수님의 이 명령은 베드로의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행동을 단호히 거부하시는 말씀이다. 당시의 상황을 추측해 보면 무리가 예수님께 달려들어 예수님을 묶으려 했을 것이고 베드로는 칼을 휘두르면서 그것을 막으려고 했을 것이고,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보호하려고 막아섰을 것이다.
고함이 오고가고 다친 자의 비명 소리가 울려 펴졌을 것이다.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바로 그런 혼란과 폭력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평온한 목소리로 사람들을 진정시키신다. 이 말은 폭력을 멈추라는 말씀이다.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예수님께서는 5 장 39 절 이하에서 악을 행하는 자에게 보복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이 말씀 속에는 생명에 대한 존엄이 들어 있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불러온다. 폭력을 사용하는 자는 결국 자신도 다른 사람의 폭력으로 망하게 된다.
그래서 폭력으로는 불의를 막을 수 없으니 그런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또한 칼은 하느님 나라의 지배 원리에 반하는 세상 국가들의 힘의 통치력을 대변하는 것으로 칼의 사용을 금하신 것이다. |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이 말씀은 너희는 왜 내가 아버지께 청하지 않는지 생각해 보았느냐, 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도와달라고 청하지 않으신 것은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뜻은 인류의 회개와 구원이다. 그것은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당신의 힘으로 사람들을 압도해서 강제로 회개시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메시아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 인류를 회개시키고 구원하려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로마의 군대 조직에서 군단은 정원 6100 명, 말 726 필 정도의 규모였다.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이라는 말은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대규모의 천사 군대를 뜻한다.
하늘의 군대를 호출하기만 하면 그 힘을 불과 몇백명에 불과한 체포자들을 능히 무찌를 수 있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사악한 무리에게 잡히신 것은 당신 자신을 막아낼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라는 말은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를 나타내며, 무슨 일이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청하고, 아버지께서 필요하다고 판단하신다면 아들의 일이 아버지의 일이기에 그리고 아들과 아버지가 일치를 이루기 때문에 즉시 예수님께서 청하시는 일이 이루어 질 것이다. |
54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대로 이루어져 한다는 예수님의 강한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느님의 뜻에 의한 것이고, 구약의 예언의 성취임을 강조하고자 하는 마태오 복음사가의 신학을 반영하는 구절이다.
하느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 성부 하느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신 각본대로 성자 예수님께서 소극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능동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신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과 계획이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동적인 응답과 순종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
5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 무리에게도 이렇게 이르셨다.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나왔단 말이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지만 너희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최고의회에서 파견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붙잡자 예수님은 ‘너희는 강도라고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나왔단 말이냐? ’ 하고 말씀하신다.
‘강도’는 폭력으로 타인의 물건을 강탈하는 자이기도 하지만, 극단의 민족주의자들의 추앙을 받는 혁명가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예수님은 로마나 유대 당국을 전복시키려 하지도 않으셨고, 은밀한 곳에 모여서 어떤 모의를 하는 ‘강도’와 전혀 다른 분이셨다. 그분은 늘 군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가르쳤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모욕의 부당함을 지적하시며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지만’이라는 말은 공공연하게 성전에서 활동하면서 사람들을 가르쳤다는 뜻이다. 당시 유대 랍비들은 가르침을 줄 때 보통 앉아서 가르쳤다. ‘나를 붙잡지 않았다’는 너희는 나를 붙잡지 못했다. 라는 뜻이다.
군중이 두려워 예수님을 붙잡지 못한 것인데 예수님은 이것을 단순히 군중이 두려워 예수님을 잡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지 않아서 붙잡지 못한 것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셨다. |
56 예언자들이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때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
‘예언자들이 기록한 성경 말씀’은 구약 성경의 예언을 뜻한다. 즉 구약 예언의 성취를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글자 그대로 해석을 하면 ‘이 모든 일은 성경의 예언대로 된 것이다.’ 라는 뜻으로 모두 하느님의 뜻, 계획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성전에서 예수님을 붙잡지 못하고 지금 겟세마니에서 예수님을 붙잡게 된 것은 모두 하느님의 계획에 속한 일이라는 뜻이다.
‘그때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 곁을 떠나지 않겠다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도망쳐 버렸다.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자들은 아마도 예수님뿐 아니라 제자들도 체포하려고 했을 것이다. 더구나 베드로가 칼을 휘둘러서 사람 하나가 상해를 입었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로 그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예수님 한 분만 체포하기 위해 큰 무리가 움직였을리는 없었을 것이다.
제자들은 무리가 왔을 때 칼을 휘두르며 그들을 막으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 순순히 체포에 응하시자 자기들도 체포당하는 것이 두려워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다. 그래도 베드로는 시간이 좀 지난 후에 발길을 돌려서 대사제의 관저로 간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의 편리와 이익을 위해 주님을 버리고 도망친 적은 없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철저히 홀로 당신의 길을 걸어가신다. |
58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 예수님을 뒤따라 대사제의 저택까지 가서, 결말을 보려고 안뜰로 들어가 시종들과 함께 앉았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가 ‘멀찍이 떨어져’ 상황을 지켜 보고 있었다. ‘결말을 보려고’라는 말은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지켜 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즉 그냥 구경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마당에 피워놓은 불 주변에 둘러선 시종들 틈에 끼어 상황을 지켜 보고 있다.
당시 고위층의 저택의 안들은 직사각형으로 건물에 둘러싸여 외부와 격리되어 있었지만 바깥뜰과 연결되어 있었다. 베드로가 대사제의 저택 안뜰까지 들어간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른다는 것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함께 가는 것이 ‘진정한 따름’이다. 베드로가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은 진정한 따름이 아니다. |
59 수석 사제들과 온 최고 의회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려고 그분에 대한 거짓 증언을 찾았다.
수석 사제들과 최고 의회 의원들은 지금 오로지 예수님을 사형시키기 위해 불법적 절차를 통해, 정식 심문은 그 당시 법에 의하면 낮에 해야 하고 낮 동안에 끝내야 하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사형시키기 위해서 증언과 증거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거짓 증언을 찾았다’, 라는 표현은 예수님을 사형시키기 위해 증언을 조작하려고 애를 썼다는 뜻이다. |
60 거짓 증인들이 많이 나섰지만 하나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마침내 두 사람이 나서서 말하였다.
예수님께 사형 선고를 내리기 위해서 증거를 찾았으나 결정적인 증언은 하나도 없었다. ‘두 사람’의 증인이 등장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신명기 17 장 6 절에 의하면 증인은 적어도 두 명 이상이어야 했고, 증인들을 따로 심문해서 증언이 일치해야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 아마도 최고의회에 매수된 두 명이 증인으로 나선 것으로 추정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