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츠빙글리의 성서해석의 특징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의 해석자는 성령이시라는 것, 둘째, 단순하게 문자적 의미에 매달리기보다 신앙의 해석을 강조한 것, 셋째, 구약과 신약의 인도를 같이 받되 신학의 우선권을 신약성서에 둔 것(후기에는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강조함), 넷째, 구약성서 해석에서 교부들의 전통을 따랐으며,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같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받은 것과, 무엇보다 자연적인 의미를 중요시한 것, 그리고 비유적 해석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것 등등이다.
자세한 내용을 W. P. 스티븐스의 책을 통해서 확인해보기로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신학논쟁의 출발점을 성서로 바꾸어 놓았다. 성서만이 권위를 지닌 것이었다. 그들은 성서의 분명한 증언에 호소했지만, 그런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성서해석에 대한 논쟁에 연루되었다. 특히 그들이 상대방과 다르게 성서의 본문들을 사용하거나 해석할 때 더욱 그러하였다. 츠빙글리는 자신의 반대자들(가톨릭, 급진주의자, 루터주의자)과의 논쟁에서 다양한 해석의 원칙들을 발전시켰다. 그 중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성서는 성령으로부터 나오고 성령이 깨달음을 주시는 곳에서만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는 원리였다.
츠빙글리는 가톨릭 적대자들이 성서를 해석할 때 인간의 이성을 사용한다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이 먼저 성서에 투영시켜 읽어낸 것을 성서에서 읽으려고 한다는 것이다.(중략) 츠빙글리가 볼 때, 반대자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입증하려는 목적으로 성서에 접근했기 때문에 성서를 오해하였다(중략).
성령이 없으면 우리는 우리 생각대로 성서를 읽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에 접근하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해야만 한다. 그때에 하나님의 마음과 성령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육체적이고 인간적인 이성에 의해 눈먼 자들이 된다. 이것은 성서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성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서 성령이 필수적이라는 주장은 츠빙글리 신학의 하나님 중심성과 잘 맞아떨어진다. 그는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요 6:45)와 같은 구절들을 인용하는 데 결코 지치지 않았다.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러한 접근으로 말미암아 츠빙글리는 말씀과 성령이라고 말하는 루터와는 반대로 대체로 성령과 말씀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령이 없다면 말씀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츠빙글리가 성령을 강조한다고 해서 그가 성령을 성서의 대체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는 성령에 호소한 일부 급진주의자들의 오류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에게 영감을 준 하나님의 성령보다 그들 자신의 영에 호소한 것이었다.
성서의 분명한 구절들을 인용할 때마다 그들은 곧바로 성령에 대해 논하고 성서는 부인한다고 내가 말할 수밖에 없는 정도까지 몰고 간다. 마치 성령의 인도 아래 기록된 성서에 대해 하늘의 성령이 이해하지 못하기라도 하는 것인 양, 혹은 성령이 일관성이 없기라도 한양 보인다.
루터는 츠빙글리를 열광주의자(Schwärmer)라고 비난했는데, 이것은 루터에 대한 츠빙글리의 고발과 정확하게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츠빙글리가 볼 때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의 근거 없이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츠빙글리는 말과 고삐의 유비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둘은 모두 필요한 것이다. 고삐는 말이 없이는 끌어당기지 않는다. 그러나 고삐는 말이 올바른 길에 있도록 해준다. “우리가 우리의 판단을 거룩한 성서에 복종시키고, 또한 성령에 힘입어 성서와 조화되는 결정을 하는 교회에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은 정당하고 올바른 일인 만큼이나 유쾌하고 기쁜 일이다."(Z VI ii. 815.21-3; Works ii. 58) 성령은 성서의 해석자일 뿐만 아니라 저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의 인도는 언제나 성서와 조화를 이룬다.
개혁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영과 문자』(On the Spirit and the Letter)를 읽고 영향을 받았다. 츠빙글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린도후서 3:6("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에서 문자와 영의 근본적인 구별을 보았다. 그것은 본문의 문자적 의미와 비유적이거나 영적인 의미 사이의 구별이 아니라, 문자와 성령의 구별이었다. 그는 죽이는 문자의 예로서,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명령을 제시한다. 이 명령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일단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지면 죽이는 문자가 되고 만다. 왜냐하면 생명을 주시는 성령이 없이는 우리가 그 명령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본문이 다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문자적인 해석과 영적인 해석 사이의 구별을 인정하였으며, 아가서와 같은 책의 많은 본문들에서는 문자적 의미가 아닌 영적이고 비유적인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문자와 영의 두 가지 의미들은 츠빙글리에게 명백한 것이다. 츠빙글리가 말씀과 그것의 뜻 혹은 참된 의미를 구별하고 있는 데서 우리는 그가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츠빙글리는 그의 동시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올바른 성서이해를 위해 논란이 되는 본문들을 전후 문맥 안에 둔다거나, 성서의 한 본문을 다른 것과 비교한다거나, 성서의 다양한 의미들을 고려하는 등 다양한 성서해석의 원칙들을 활용하였다. 문맥과 비교의 중요성은 논쟁에서, 특히 성만찬 논쟁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츠빙글리는 "이것이 내몸이다"라는 결정적인 구절을 그 뒤에 따라 나오는 "너희를 위해 주는 것"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말씀의 문맥 안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또한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와 같은 성서의 다른 구절들과도 비교해 보아야 한다. 또 다른 비교의 형태는 유비의 사용이다. 츠빙글리가 유비를 사용한 가장 중요한 예는 신약성서의 세례와 성만찬과 구약성서의 할례와 유월절 사이의 유비이다.(예를 들어 믿음에 관한 야고보와 바울의 진술들처럼 명백히 충돌하는 본문들을 조화시키기 위해 비교법이 사용되었다. 츠빙글리는 성령은 어디서나 모순이 없기 때문에 성서의 본문들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 중요한 해석의 원칙은 신앙의 해석이었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라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츠빙글리도 이사야서 7:9에 호소하였다. 70인역과 불가타 성서는 "만일 너희가 믿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츠빙글리는 육체는 우리에게 먹으라고 주신 것이 아님을 우리가 믿음으로 알았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았고 모든 것이 그와 함께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확신한다. 육체를 먹는 일이 그것 외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츠빙글리는 묻는다. 그는 “이것이 내 몸이다"는 구절의 문자적 의미에 호소하는 루터에게 반대하면서, 말씀은 신앙이 다르게 권고하지 않는 한 그 자연스러운 의미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루터 자신의 진술을 상기시켰다.(Z V 662.2-663.15) 우리가 "이 반석 위에 내가 교회를 세울 것이다"는 말씀을(루터가 주장한 바대로)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성만찬 제정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못하도록 한다.
해석의 원칙으로서의 신앙은 종종 사랑 혹은 하나님의 영광과 연관된다.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명예나 영광을 탈취하거나 그것을 어떤 다른 것에게 돌리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라고 보았다.
츠빙글리는 논쟁에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모두에 호소하였다. 하지만 그가 구약성서의 본문을 먼저 인용할 때조차도 신학적 우선권은 신약성서에 두었다. 처음부터 그가 열망한 것은 "항상 신약성서와 구약성서의 인도를 받는 것"이었기 때문이다.(Z I 133.13-14) 구약성서를 신약의 빛에서 읽어야지, 신약을 구약의 관점에서 읽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츠빙글리는 구약성서에 근거해서 성만찬을 희생으로 간주하는 주장들을 거부하였다. 그것은 빛에서 어두움으로 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성서를 올바로 사용하면, 구약성서에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명백한 것만이 암시적으로 나타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양성서에서 입증되는 것만을 주장하는 재세례파들에 반대하여, 츠빙글리는 자신이 구약성서를 사용하는 데 대해 변호해야만 했다. 이것은 세례논쟁에서 특히 중요했는데, 여기서 재세례파들은 구약과 신약의 현저한 차이를 강조하였다. 츠빙글리는 그들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와 사도들도 구약성서에 호소했다는 사실을 주장하였다. 그는 특별히 다음과 같은 성서구절들을 인용하였다. "너희가 성서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서를 연구하거니와 이 성서가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라"(롬 15:4), “그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본보기가 되고,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
구약성서에 대한 츠빙글리의 견해에는 변화가 있다. 초기작품들에서는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더 강조한 반면, 후기작품에서는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보다 강조하였다. 이러한 강조점의 변화는 언약에 대한 그의 이해의 변화와 연관되어 있다. 1525년부터 그는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져 그리스도 안에서 갱신된 하나의 언약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오직 한분 하나님과 하나의 그 백성이 있기 때문에, 오직 하나의 언약이 있을 뿐이다. 츠빙글리 신학의 이러한 변화와 함께, 그가 재세례파들에 대항하여 펼치는 주장들에 힘이 더해졌다. 이것은 그가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자유롭게 주장을 펼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구약성서 해석에 있어서 츠빙글리는 교부들과 필로에게로 소급되는 전통에 서 있었다. 이 전통에서는 성서의 다양한 의미들을 셋 혹은 넷으로 구별하였다. 오리게네스가 인간을 육과 혼과 영으로 파악한 자신의 인간이해에 따라, 육체적(역사적), 물질적(도덕적), 영적(신비적)이라고 명명한 세 가지 의미가 있었다. 13세기에는 도미니크회 수도사인 다키아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of Dacia)의 2행 연구(連句)시에서 표현된 네 가지 의미(문자적, 비유적, 도덕적, 신비적)가 있었다. "문자적 의미는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비유적 의미는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이지, 도덕적 의미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신비적 의미는 무엇을 추구해야 할지를 가르쳐 준다."
츠빙글리의 근본적인 관심은 자연적인 의미(natural sense)였다.(그러나 자연적인 의미가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성서의 저자인 성령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에서 영적인 의미라고 볼 수도 있다.) 이것은 본문에 대한 세밀한 관찰로 이끌었는데, 이는 성서언어들과 성서의 많은 비유적 표현들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퀸즐리는 창세기와 출애굽기 주석에서는 70개, 이사야 주석에서는 200개의 수사학적 용어들을 지적하였다.)1) 특히 예언서에 대한 주석들에서 츠빙글리는 언어, 역사, 지리와 같은 문제들에서 주로 히에로니무스에게 의존하였다. 자연적인 의미에 대한 강조는 츠빙글리를 다른 개혁자들과 리라의 니콜라우스(Nicolaus Lyranus)와 같은 중세 신학자들과 연결시켜 준다.
자연적 의미 외에 도덕적 의미가 있다. 고린도전서 10:11과 같은 본문들은 구약성서가 우리를 위해 기록되었다고 밝히고 있지만, 이점은 신약성서도 마찬가지이다. 츠빙글리가 생각하기에 성서에 가르치거나 권면하거나 혹은 위로하지 않는 책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Z XIII 157.26-8) 성서의 이러한 도덕적 의도는 실례들을 사용함으로써 촉진되고 있으며, 이것은 츠빙글리 성서연구의 전반적인 목적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이는 예언모임을 시작하면서 사용하던 기도문에 표현되어 있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고 조명해 주셔서 순전하고 거룩한 방식으로 당신의 계시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올바르게 깨달은 대로 변화될 수 있도록 해 주옵소서."(Z IV 365.3-5)
자연적이고 도덕적인 의미에 덧붙여 신비적 의미가 있다. 츠빙글리는 이 의미를 성경을 이해하는 성서적 방법이라고 간주했다. 그는 고린도전서 10장 6절과 11절에 있는 바울의 말들에 의존하였는데, 그 구절에 따르면 구약성서의 모든 것은 상징적으로 일어난 것이며, 우리를 위해 기록된 것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상징해 주고 있다. 츠빙글리는 성서의 사건들이 상징적이면서 동시에 역사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는 그것들의 역사성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선지자들의 예언들을 지상의 이스라엘이나 지상의 예루살렘과 관계된 것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유대인들처럼 그 예언들을 육체적인 방식으로 보는 것이다. 그것들은 신비적 혹은 상징적 의미 역시 지니고 있다.
비유적 해석은 신약성서 특히 그리스도와 관련되는데, 츠빙글리는 누구든지 성서의 완성이신 그리스도에게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명시적인 것만을 구약성서의 인물이나 사건에서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츠빙글리는 유형론을 자주 사용하였다. 노아, 이삭, 요셉, 모세는 그리스도의 유형으로 적절하였다.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는 츠빙글리의 유형론의 다양한 특징들을 예시해준다. 거기에는 유사점이 있다. 제 삼 일은 그리스도가 삼 일만에 부활하신 것과 상응되고, 나귀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그리스도가 타신 나귀와 상응되며, 이삭이 지고 가던 나무는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와 상응된다. 또한 거기에는 차이점도 있다. 두 종들은 세 명의 제자들과 대비되고, 실체가 그림자보다 우월함을 보여주며, 이삭은 죽지 않았지만 그리스도는 죽었다. 만일 이삭이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와 똑같았다면 이삭은 그림자가 아니라 실체가 되었을 것이다. (Z XIII 147.36-148.32)(중략)
성서의 신비적 의미에 있어서 츠빙글리는 오리게네스에 대한 의존성과 독자성을 동시에 보여 준다. 그는 더 많은 것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오리게네스를 추천하면서도, 오리게네스가 본문을 역사적으로 다루지 않는 데 대해서는 비판하였다. 그는 오리게네스보다 자연적 의미를 더 강조하였으며, 해석에 있어서는 더욱 기독론적이었다. 츠빙글리에게 비유는 음식의 조미료일 뿐이었다. 비유는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성서에 근거를 둔 어떤 것에 대해 감칠맛을 줄 수 있다.
츠빙글리에게 있어서 성서의 중심성은 취리히 종교개혁에서 핵심적인 세 가지, 즉 설교, 논쟁, 예언모임에서 분명하다. 그 각각은 성서의 권위가 여타의 모든 권위 위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것들은 모두, 특히 예언모임은 성서에 대한 해석과 씨름하는 츠빙글리를 보여준다. 그것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츠빙글리의 모든 사상의 기초가 되는 하나님의 주권을 확언하고 있다.
1) E. Künzli, "Zwingli als Ausleger von Genesis und Exodus," Diss. (Zurich, 1951), 57 그리고 Z XIV 884를 보라.
<약어표>
Z Huldreich Zwinglis Smtliche Werke (Berlin, Leipzig, Zurich, 1905- ).
W. P. 스티븐스 지음, 박경수 옮김, 『츠빙글리의 생애와 사상』(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pp. 71-79.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문자적 해석에만 집착하면 극단적 세대주의나 이단이 되기 쉽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연속되지만 신약의 빛 가운데에서 구약을 보아야 하는 것도 공감이 됩니다.
네, 공감합니다.
츠빙글리가 자신의 논리를 만들 때 반대자를 의식해서 한 것은 당연한 수순인데, 그 반대자들 안에 루터가 있습니다. 루터와는 단순히 다른 게 아니라 카톨릭적 요소가 루터 안에 잔존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
“요6:45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호크마 주석>
요6:45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 이사야의 증거를 인용함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그에게 나아올 수 없다고 한 말씀을 재확인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선지자(prophets)를 말할 때 복수로 말하고 있다.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이 한 덩이로 뭉쳐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선지자 중 한 사람을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 인용된 말씀은 이사야 54장 13절과 예레미야 31장 34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귀절들은 교회의 회복에 대하여 말하면서, 교회가 하나님의 교훈으로 가르침을 받은 아들들을 갖게 될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교사의 직책을 담당하셔서 신자들을 자기 자신에게로 접근시키는 길 밖에 엄싸음을 우리는 쉽게 연역할 수 있다.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가르침의 방법은 외적인 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숨은 역사에도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하나님의 가르침은
내적인 마음의 깨우침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실 때, 이 '다'라는 말은 선택된 자들, 즉 교회의 참된 자녀들에게만 국한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예언을 현재 논의되고 있는 주제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을 때에만 교회가 참으로 세움을 입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여 주지 않으면 사람은 빛을 볼 눈이 없다고 주님께서 결론을 내리고 있음은 당연한 것이다. 동시에 주님은 하나님께로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결과적으로 다 주님께 나아오게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 즉시 덧붙인 말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 이 말씀의 요점은 믿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버리운 자로서 멸망에 넘겨진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모든 자녀와 생명을 유업으로 받은 자들을 그의 제자로 삼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리스도께서 앞서 사람이 이끌리지 아니하면 믿을 수 없다고 언급하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성령이 역사하시는 은혜에 이끌리면 사람은 반드시 믿게 된다고 선언하고 있다.
가톨릭 교도들이 꿈꾸고 있는 자유의지의 전 기능은 이 두 문구에 의해서 완전히 붕괴되고 무력해진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이끌 때에만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수 있다면, 믿음의 시작도 준비도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자들이 모두 온다면 주님은 그들에게 믿을 자유뿐만 아니라 믿음 그 자체를 허락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꺼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다면 그것은 은혜를 인치는 것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손만을 우리를 향해 뻗치시고 우리의 의지를 정지 상태에 정체시켜 두신다면 그는 우리를 이끌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믿음을 완성시켜 주실 때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이끄신다고 말해도 좋은 것이다.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실 때 기꺼이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을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인도하시기 때문에 그말씀을 하나님께 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내게로 오느니라" 주님은 여기서 자기와 아버지 사이에 존재하는 끊을 수 없는 유대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제자 중 누구도 그리스도께 순복하지 않거나 또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택함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학교에서 배우는 유일한 지혜는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을 보면 아버지께서 자기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장코뱅 성부께서 성자께 보낸 자들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진리는, 성령께서 말씀과 전도 속에 역사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습니다.
@노베 그렇군요. 공감합니다.
“요6:6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호크마 주석>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가르침이 신경하고 소생시키는 힘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그 교훈에서 유익을 얻지 못했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스도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귀를 접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여러 가지로 설명되기 때문에 먼저 이 말씀은 여러 가지로 설명되기 때문에 먼저 이 말씀의 참된 뜻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목적이 쉽게 드러날 것이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주님의 살이 육적인 마음의 유대인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다고 주님의 말씀을 설명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릇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하늘의 비밀을 논하는데는 인간의 모든 지혜가 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은 억지로 의곡하지 않는 한 그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살리는 것은 성령의 조명이라는 억지 견해가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육체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는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만,
그 살을 먹을 때는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들도 잘못되어 있다. 오히려 우리가 유익을 얻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육체(살)를 먹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육(flesh)은 무익하니라"라는 말씀에 '육'만으로는 또는 '육 그 자체만으로는'이라는 말을 첨가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육은 성령과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본문과 잘 어울린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먹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육(flesh)은 아무것에도 쓸모가 없다는 듯이 모든 유용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다만 육이 신령하지 않다면 어디서 살리는 힘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육의 땅에 속한 성품만을 생각하나 사람은 그 육에서 죽은 것 밖에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육이 힘을 공급받고 있는 성령의 능력에 눈을 돌리는 사람은 그 효능과 믿음의 경험에서 살린다는 말이 절대 빈 말이 아님을 느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육이 어떻게 참된 양식이 되면서도 무익하고 쓸모가 없는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영이 육에 의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조달한다는 의미에서 육은 과연 양식이 된다.
하나님은 육에서 우리와 화목의 관계를 맺으며 육에서 구원의 모든 부분이 성취된다. 그러나 육의 원천과 성격을 생각한다면 육은 무익하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그 자체가 죽음에 종노릇하는 존재로서 생명을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님의 육은 성령으로부터 우리를 먹일 힘을 공급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의 신령한 입을 가져야만 참으로 영양 섭취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문장은 짧게 단축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와 같이 행동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주님은 그의 설교를 이 말씀으로 끝내버렸다. 그들은 더 이상 주님의 말씀을 들을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신령한 자들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 몇마디 말씀은 그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 이것은 앞의 문장에 대한 암시적인 언급이다. 주님은 영이란 말을 다른 의미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지금까지 성령의 숨은 능력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나 이제 이를 신령한 그의 말씀에 적용시키고 있다. 이제 말씀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하여 하늘의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를 구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신령하다고 표현된다.
육적인 인식에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하여 깨닫게 되는 것이다. 위에 말씀한 내용은 믿음에 의해서만 깨달아질 수 있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 생명을 성령과 연결시키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주님은 그의 말씀을 그 결과에 따라 생명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그가 말슴을 살리는 힘이 있다고 하셨던 것과 같다. 그러나 이를 영적으로 받는 사람에게만 생명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은 이에서 죽음을 자아낼 뿐이다. 경건한 자들을 위하여서 이 말씀은 가장 즐거운 복음이 아닐 수 없다. 말씀이 그들의 영원한 구원을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자신을 순수한 제자로 나타내기를 힘쓰라고 경고를 받고 있다.
@장코뱅 성경에 근거하여 선진 성경교사의 가르침을 통해 성경을 잘 해석하려는 의도가 츠빙글리에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다리던 좋은 연재입니다. 츠빙글리의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를 조금이나마 배운 것 같습니다.
네, 저도 그래요.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