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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신자와 초보 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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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 츠빙글리의 신학사상(3) 성서해석
코람데오 추천 4 조회 266 24.09.30 08:13 댓글 18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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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4.09.30 08:22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문자적 해석에만 집착하면 극단적 세대주의나 이단이 되기 쉽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연속되지만 신약의 빛 가운데에서 구약을 보아야 하는 것도 공감이 됩니다.

  • 24.09.30 10:15

    네, 공감합니다.

  • 24.09.30 08:25

    츠빙글리가 자신의 논리를 만들 때 반대자를 의식해서 한 것은 당연한 수순인데, 그 반대자들 안에 루터가 있습니다. 루터와는 단순히 다른 게 아니라 카톨릭적 요소가 루터 안에 잔존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 작성자 24.09.30 10:08

    공감합니다.

  • 24.09.30 10:29

    공감합니다22

  • 24.09.30 08:27

    “요6:45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호크마 주석>

    요6:45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 이사야의 증거를 인용함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그에게 나아올 수 없다고 한 말씀을 재확인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선지자(prophets)를 말할 때 복수로 말하고 있다.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이 한 덩이로 뭉쳐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선지자 중 한 사람을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 인용된 말씀은 이사야 54장 13절과 예레미야 31장 34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귀절들은 교회의 회복에 대하여 말하면서, 교회가 하나님의 교훈으로 가르침을 받은 아들들을 갖게 될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교사의 직책을 담당하셔서 신자들을 자기 자신에게로 접근시키는 길 밖에 엄싸음을 우리는 쉽게 연역할 수 있다.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가르침의 방법은 외적인 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숨은 역사에도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하나님의 가르침은

  • 24.09.30 08:28

    내적인 마음의 깨우침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실 때, 이 '다'라는 말은 선택된 자들, 즉 교회의 참된 자녀들에게만 국한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예언을 현재 논의되고 있는 주제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을 때에만 교회가 참으로 세움을 입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여 주지 않으면 사람은 빛을 볼 눈이 없다고 주님께서 결론을 내리고 있음은 당연한 것이다. 동시에 주님은 하나님께로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결과적으로 다 주님께 나아오게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 즉시 덧붙인 말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 이 말씀의 요점은 믿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버리운 자로서 멸망에 넘겨진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모든 자녀와 생명을 유업으로 받은 자들을 그의 제자로 삼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리스도께서 앞서 사람이 이끌리지 아니하면 믿을 수 없다고 언급하신 것처럼,

  • 24.09.30 08:28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성령이 역사하시는 은혜에 이끌리면 사람은 반드시 믿게 된다고 선언하고 있다.
    가톨릭 교도들이 꿈꾸고 있는 자유의지의 전 기능은 이 두 문구에 의해서 완전히 붕괴되고 무력해진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이끌 때에만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수 있다면, 믿음의 시작도 준비도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자들이 모두 온다면 주님은 그들에게 믿을 자유뿐만 아니라 믿음 그 자체를 허락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꺼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다면 그것은 은혜를 인치는 것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손만을 우리를 향해 뻗치시고 우리의 의지를 정지 상태에 정체시켜 두신다면 그는 우리를 이끌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믿음을 완성시켜 주실 때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이끄신다고 말해도 좋은 것이다.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실 때 기꺼이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을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인도하시기 때문에 그말씀을 하나님께 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내게로 오느니라" 주님은 여기서 자기와 아버지 사이에 존재하는 끊을 수 없는 유대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 24.09.30 08:29

    하나님의 제자 중 누구도 그리스도께 순복하지 않거나 또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택함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학교에서 배우는 유일한 지혜는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을 보면 아버지께서 자기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 24.09.30 10:43

    @장코뱅 성부께서 성자께 보낸 자들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진리는, 성령께서 말씀과 전도 속에 역사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습니다.

  • 24.09.30 15:57

    @노베 그렇군요. 공감합니다.

  • 24.09.30 08:31

    “요6:6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호크마 주석>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가르침이 신경하고 소생시키는 힘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그 교훈에서 유익을 얻지 못했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스도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귀를 접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여러 가지로 설명되기 때문에 먼저 이 말씀은 여러 가지로 설명되기 때문에 먼저 이 말씀의 참된 뜻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목적이 쉽게 드러날 것이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주님의 살이 육적인 마음의 유대인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다고 주님의 말씀을 설명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릇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하늘의 비밀을 논하는데는 인간의 모든 지혜가 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은 억지로 의곡하지 않는 한 그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살리는 것은 성령의 조명이라는 억지 견해가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육체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는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만,

  • 24.09.30 08:32

    그 살을 먹을 때는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들도 잘못되어 있다. 오히려 우리가 유익을 얻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육체(살)를 먹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육(flesh)은 무익하니라"라는 말씀에 '육'만으로는 또는 '육 그 자체만으로는'이라는 말을 첨가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육은 성령과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본문과 잘 어울린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먹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육(flesh)은 아무것에도 쓸모가 없다는 듯이 모든 유용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다만 육이 신령하지 않다면 어디서 살리는 힘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육의 땅에 속한 성품만을 생각하나 사람은 그 육에서 죽은 것 밖에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육이 힘을 공급받고 있는 성령의 능력에 눈을 돌리는 사람은 그 효능과 믿음의 경험에서 살린다는 말이 절대 빈 말이 아님을 느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육이 어떻게 참된 양식이 되면서도 무익하고 쓸모가 없는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영이 육에 의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조달한다는 의미에서 육은 과연 양식이 된다.

  • 24.09.30 08:32

    하나님은 육에서 우리와 화목의 관계를 맺으며 육에서 구원의 모든 부분이 성취된다. 그러나 육의 원천과 성격을 생각한다면 육은 무익하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그 자체가 죽음에 종노릇하는 존재로서 생명을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님의 육은 성령으로부터 우리를 먹일 힘을 공급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의 신령한 입을 가져야만 참으로 영양 섭취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문장은 짧게 단축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와 같이 행동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주님은 그의 설교를 이 말씀으로 끝내버렸다. 그들은 더 이상 주님의 말씀을 들을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신령한 자들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 몇마디 말씀은 그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 이것은 앞의 문장에 대한 암시적인 언급이다. 주님은 영이란 말을 다른 의미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지금까지 성령의 숨은 능력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나 이제 이를 신령한 그의 말씀에 적용시키고 있다. 이제 말씀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하여 하늘의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를 구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신령하다고 표현된다.

  • 24.09.30 08:33

    육적인 인식에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하여 깨닫게 되는 것이다. 위에 말씀한 내용은 믿음에 의해서만 깨달아질 수 있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 생명을 성령과 연결시키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주님은 그의 말씀을 그 결과에 따라 생명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그가 말슴을 살리는 힘이 있다고 하셨던 것과 같다. 그러나 이를 영적으로 받는 사람에게만 생명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은 이에서 죽음을 자아낼 뿐이다. 경건한 자들을 위하여서 이 말씀은 가장 즐거운 복음이 아닐 수 없다. 말씀이 그들의 영원한 구원을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자신을 순수한 제자로 나타내기를 힘쓰라고 경고를 받고 있다.

  • 24.09.30 11:01

    @장코뱅 성경에 근거하여 선진 성경교사의 가르침을 통해 성경을 잘 해석하려는 의도가 츠빙글리에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 24.09.30 11:02

    기다리던 좋은 연재입니다. 츠빙글리의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를 조금이나마 배운 것 같습니다.

  • 24.09.30 16:12

    네, 저도 그래요.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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