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코 끝에 감추어진 비밀(태을금화종지) 4/4
그대가 계속해서 하고 있는 행위들을 주시해 본 적이 있는가? 없다면 내일 아침에는 한번 해 보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대가 무엇을 하는가 지켜보라. 어떻게 침대에서 일어나며 어떻게 움직이며 무슨 생각이 머리에 떠도는지 지켜보라. 그대는 놀라게 될 것이다. 그대는 아침마다 똑같은 일, 똑같은 몸짓, 똑같은 표정, 똑같은 생각들을 해댄다. 그대는 하나의 짜여진 각본이 되어있다. 그리고 그대는 평생 그런 짓만 한다.
또 누가 아는가? 앞으로도 수많은 삶을 그렇게 살아가야 할지. 화가 나거든 주시해 보라. 항상 똑같은 과정이다. 그대는 동일한 공간을 통하여 움직인다. 행복할 때도 주시해 보라. 사랑에 빠졌을 때도 주시해 보라. 그리고 사랑이 떠나버렸을 때도 주시해 보라. 그것은 거의 동일한 과정이다. 그대는 계속해서 똑같은 바보짓을 되풀이 해댄다. 똑같은 넋두리들을 계속해서 지껄여댄다.
그대는 깨어 살지 못하고 있다. 그대의 99%가 다른 사람이나 사회나 혹은 그대 자신에 의해서 각본이 짜여져 있다. 그러므로 앉아서 코끝을 응시하는 것이 처음에는 쉽지가 않다. 이런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이제 우린 이 사람에게 가지말자. 이 가엾은 친구를 보게나. 얼마나 깊이 명상에 빠져 있는지. 게다가 그는 코끝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지금은 그에게 다가갈 시간이 아니야."
그들은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그대가 코끝을 응시하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사실 그들은 그대가 손아귀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을 보고는 더욱 강하게 달려들 수도 있다. 그런 일은 일어난다. 사람들이 앉아 명상을 할 때면 일상적인 일을 할 때보다도 더 많은 상념들이 의외로 많이 폭발한다. 수백만 가지 생각이 돌진해 온다. 그대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상념들을 그대가 제거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대에게 괴로운 시간을 안겨 줄 것이다. 그래서 생각들은 들어오게 되어있다.
그 상념들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냥 앉아서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뭔가 손을 써야 한다. 싸우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싸우기 시작하면 코 끝을 바라보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제3의 눈에 대한 얼차려, 빛의 도전을 망각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대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사념의 티끌 속에 갇혀버릴 것이다. 사념을 쫓기 시작하면 그대는 갇혀버린다. 그들을 따라가도 갇혀버리고 그들과 싸워도 갇혀 버린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그것이 바로 비결이다. 붓다도 똑같은 비결을 사용하였다. 사실 비결들은 거의 같다. 인간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자물쇠가 같을 때는 열쇠도 같아야 하는 것이다. 비결은 이것이다. 붓다는 그것을 삼마사티라고 불렀다. 올바른 기억(正念), 그냥 기억만 하라. 생각이 다가온다. 어디에 있는지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지켜보라. 오고 머물고 가는 것을 주시하라. 아무런 거부감이나 판단이나 비난 같은 것을 하지 말고 마치 과학자들이 사물을 들여다 보듯 객관적이 되어라.
상념들은 매우 유동적이다. 그들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대는 단지 상념이 일어나는 것과 얼쩡거리는 것과 꺼져버리는 것을 주시만 하면 된다. 싸우려고 하지도 말고 쫓아가지도 말고 그냥 고요한 관찰자가 되어라. 그러면 놀라게 되리니 지켜보는 행위가 정착되면 될수록 상념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 지켜보는 것이 완전해지면 사념들은 사라져 버린다. 거기에는 공간만이, 틈바구니만이 남게 된다.
그러나 한 가지 요점을 기억하라. 마음은 속임수를 쓸 수도 있다는 것.
더 깊게 추구해봐야 얻는 것은 없다.
깊게까지 심사숙고 하려고는 하지 말라. 그것이 프로이트식 정신분석가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연상(free association), 생각이 하나 들어온다. 그대는 다른 생각이 또 들어오는 것을 기다린다. 그렇게 해서 연쇄적으로 보게 된다. 그것이 바로 모든 정신분석가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과거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 생각은 다른 생각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게 해서 무한히(ad infinitum). 거기에 끝이라곤 없다. 그 속으로 들어가면 그대는 쓸데없는 낭비에 불과한 여행을 끝도 없이 하게 될 것이다. 마음은 그럴 수도 있다.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것이다.
더 깊게 추구해 봐야 얻는 것은 없다.
상념이 어디로부터 생겨나는지를 주시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며,
그 너머까지 추구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마음을 밝혀낸다는 것,
의식으로 의식 너머에까지 이른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의식으로 의식 너머에까지 이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불필요한 헛수고는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이것에 끌리고 저것에 끌려 그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릴 것이다. 코끝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제3의 눈도 잊혀지고 빛의 회전도 아득한 곳에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단 하나 생각에 그치는 정도여야 한다. 꼬리를 물어서는 안 된다. 하나의 생각이 일어난다. 그것이 어디서 오는가를 어디에 있는가를 어디로 가는가를 지켜볼 때 그 생각은 사라져 버린다. 명심하라.
불교도들은 하나의 생각이 일어날 때 이렇게 외친다. "사념이다. 사념이다." 깨어있기 위해서 말이다. 도둑이 들어왔을 때 모두가 깨어나도록 도둑이야, 도둑이야."하고 외치듯이 그냥 "사념이다. 사념이다."하고 외침으로써 그대는 깨어나 얼차리게 될 것이다. 도둑이 들어오거든 그 녀석이 무슨 짓을 하는지 지켜보라. 그대가 얼차리는 순간 사념은 정지할 것이다. 녀석은 약간 움찔하여서 놀라 그대를 쳐다볼 것이다. 전에는 그대가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녀석은 약간 불편해질 것이다. "이 사람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지금까지는 그렇게 고분고분하더니 이제는 도둑이야, 도둑이야, 사념이다, 사념이다라고 외치고 있잖아. 이거 어떻게 된 거 아냐?" 사념은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녀석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이 사람 돌아버렸군. 코 끝을 바라보면서 사념이다, 사념이다 하고 외쳐대고 있으니 말이야." 얼차려는 사념을 잠시동안 정지시킬 것이다. 녀석들을 꽁꽁 묶어 응시할 것이다. 계속해서 지켜보라. 비난하지 말라. 내던지지 말라. 싸우지도 말라. 비난이나 판단이 그대로 하여금 그 생각에 들러붙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냥 거기에 머물면서 생각들을 바라보며 얼차리라. 그러면 사라지기 시작한다. 왔던 것과 같이 사라져 버린다. 그것은 상상으로부터 와서 상상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것이 일단 사라지면 그대는 다시 선정(禪定)으로 되돌아온다. 그 근원에까지 쫓아갈 필요는 없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그대는 존재의 근원에까지 가야 하리라. 정신분석에는 끝이 없다. 그것은 결코 끝이 나지 않는다. 완전히 심리가 분석된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어느 누구도 완전히 분석될 수가 없다. 일 년, 이 년, 삼 년, 사 년해서 무려 칠 년간이나 정신 분석가를 찾아다닌 사람을 그대는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정신분석이 완결되어 그 짓을 그만둘 것 같은가? 아니다. 그들은 정신분석가들에게 지치고 정신분석가들도 그들에게 지쳤다.
그러나 어떤 정신분석가도 완전한 적이 없다. 그럴 수가 없다. 그것은 끝이 없는 양파이다. 껍질을 계속해서 벗기고 또 벗겨도 끝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도움은 된다. 그대로 하여금 보다 시류와 그대 자신에게 잘 적응하게 해 준다. 그것은 그대를 변형시키지는 못한다. 그것은 그대를 정상적인 바보로 만들어 줄 뿐이다. 그게 전부이다. 그것은 그대가 소속되어있는 병든 사회에 그대를 잘 적응하게 해 줄 뿐이다.
그대를 탈바꿈된 빛나는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삶이 가져다 주는 모든 것에 좋든 나쁘든 순응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질질 끌려다니는 평범한 인간으로 만들어 줄 뿐이다. 삶을 슬프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수용이 될 수 없다. 진정한 수용에는 언제나 환희가 따르기 때문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야기했다. 사람은 행복할 수 없다고 기껏해야 편안할 수 있을 뿐이라고 보다 편안한 삶이 가능하다. 그게 전부이다. 그러나 행복은 불가능하다. 사실 그것은 정신분석을 통해서는 불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행복한 사람들이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을 보아 왔다. 붓다, 노자, 크리슈나, 이런 춤추는 사람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프로이트는 행복하지 않으며 그럴 수밖에 없다. 그가 정신분석을 집어 던져 버리고 명상 속으로 뛰어들지 않는다면 그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명상을 배우기 위해서는 몇 번의 삶이 더 필요할 것이다. 사실 그는 명상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프로이트 뿐만 아니라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같은 사람도 두려워했다. 융은 이 책 『태을금화종지』에 대한 논평을 썼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적일 뿐 실제적인 가치가 전혀 없다. 그 자신이 명상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실제적인 일을 알겠는가? 게다가 그는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기적인 사람은 명상의 문턱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이기심을 던져버려야 하기 때문에 명상을 하기 쉽지 않다.
라마나 마하리쉬가 살아있는 동안 융은 인도에 왔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권했었다. "당신은 삶의 내적인 신비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 인도에 왔는데 왜 라마나에게 가보지 않으십니까? 당신은 『태을금화종지』에 대한 논평을 썼고 여기에는 황금 꽃이 활짝 핀 사람이 있습니다. 라마나에게 한 번 들러 보시지요 ?"
그러나 그는 결코 가지 않았다. 그는 인도를 여행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라마나에게만은 가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무엇이 두려워서였을까? 이 사람, 이 거울과 마주 대한다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융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가? 융은 사진에서조차 그의 에고가 드러난다. 프로이트는 융만큼은 이기적이어 보이지 않는다. 융의 이기적인 성격때문에 아마 그는 그의 스승 프로이트를 배신하고 떠나 버렸을 것이다.
그의 사진을 한 번 보라. 그의 교활하고 타산적인 눈하며..... 마치 누구에게라도 달려들듯이 극도로 이기적이다. 하지만 아주 영리하고 지적이고 능수능란해 보인다. 기억하라. 정신분석이나 분석심리학, 기타 그 부류들은 그대를 행복으로 인도해주지 못한다. 그들은 단지 뜨뜻미지근하게 적응해나가는 삶만을 일러 줄 뿐이다. 그것은 그대가 환희의 불꽃으로 타오르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의 힘을 넘어서 있다. 그 이유는? 그 이유는 바로 계속해서 상념들을 분석하기 때문이다. 분석은 필요가 없다. 그래서 비결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을 쉬게 하고자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올바른 관(觀)이요,
우리는 전존재를 완전한 휴식의 상태에 가져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분석은 완전한 휴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혼돈만 불러일으키고 쉬지 못하게 할 뿐이다.
그외의 것은 잘못된 것이다.
분석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으로는 어디에도 이를 수 없다.
상념이 끊임없이 흐를 때는
그것을 멎게 하고 관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두 날개이다. 첫째, 틈만이 존재하고 사념이 오지 않을 때는 선정에 들라. 그리고 사념이 들어 오거든 이 세 가지를 살펴보라. 사념이 어디에 머물러 있으며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잠시 동안 틈바구니를 보는 것을 멈추고 그 사념들을 지켜보고 나서 작별을 고해라. 녀석들이 사라지거든 다시 돌아와 선정에 들어라.
다시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그대가 지나가고 있는 차 사이의 공간을 지켜보고 있을 때 차가 다가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대는 차를 바라보겠지만 관심 따위는 갖지 않을 것이다. 어디서 만들었으며, 제작년도가 언제며, 색깔이 무엇이며, 운전수와 승객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분석 따위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그냥 차가 지나가는 것만 주목할 것이다. 다가온 차는 그대 앞을 지나쳐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다시 그대는 공간에 관심을 갖는다. 그대의 모든 관심은 공간에 가 있다. 그러나 차가 와서 잠시 그대는 거기에 신경을 쓰는 것뿐이다. 그리하여 차가 사라지면 그대는 다시 휴식과 선정의 공간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상념이 끊임없이 흐를 때는 그것을 멎게 하고는 관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관한 다음에 다시 멎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이 들어올 때마다 멎게 하라. 생각이 사라지거든 다시 선정에 들어라.
이것이 바로 바른 깨달음을 위하여 정(定)과 혜(慧)를 동시에 닦는
방법(定壽.雙修)인 것이다. 이것을 회광이라고 한다.
선정에 들 때는 언제나 빛이 몰려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고정됨이 있을 때마다 거기에 원이 만들어질 것이다. 빛의 회전이 있을 때마다 이들은 모두 필요하다.
이것을 회광이라고 한다. 회는 지요, 광은 관(觀洲)다.
주시罐譏가 없는 멈춤은 빛이 없는 회전이다.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 그런 비극이 하타 요가(Hatha Yoga)에서 일어난다. 그들은 고정시키고 집중하지만 빛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들은 손님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그들은 계속해서 집단장을 할 뿐이어서, 거기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왜 집을 단장하는지 누구를 위해서 하는지는 망각해 버렸다. 하타 요가의 수행자는 끊임없이 자기 몸을 예비하고 정화하며 요가 아사나를 취하고 호흡수련을 하는 등 극성맞을 정도이다. 그는 무엇을 위해서 그것을 하는지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빛은 바로 곁에 있는데도 그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빛은 완전히 자신을 놔버린 상태에서만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주시가 없는 멈춤은 빛이 없는 회전이다.
이것이 소위 요가 수행자라고 하는 삶들에게 일어나는 비극이다. 다른 종류의 비극은 정신분석가나 철학자들에게 일어난다.
멈춤이 없는 주시는 회전이 없는 빛이다.
그들은 빛에 대해서 생각은 하지만 그것이 흘러들어 오도록 예비하지 못한다. 그들은 단지 빛에 대해 생각만 할 뿐이다. 그들은 손님에 대해 생각을 하며 수천 가지의 상상을 해댄다. 그러나 그들의 집이 준비되지 않았다. 양자를 다 놓쳐버린 것이다. 스승은 당부하고 있다.
이것을 유념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놓쳐 버릴 수도 있다. 예비하고 기다려라. 준비하라. 코 끝을 응시하면서 제3의 눈에 얼차리고 척추를 똑바로 세운 체 편안한 자세를 유지하라. 그것이 해야할 전부이다. 더 이상의 것은 필요가 없다. 수년 동안 요가 자세를 수련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래서 요가 행자들은 그렇게 멍청하게 보이는 것이다. 지성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들의 몸은 강건해서 오래 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빛이 없는 삶이란 무지의 어둠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가 오래 살든 단명하든 아무런 차이도 나지 않는다. 핵심은 단 한 순간이라도 빛 가운데 사는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 한 순간이 영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세상에는 빛에 대해서 계속 머리를 굴려대는 철학자들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하는가? 그리고 어떤 정의가 가장 최선의 것일까? 그들은 계속해서 이론과 도그마와 사상의 체들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자신들은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빛은 바로 문간에서 기다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것을 유념하라.
이러한 두 가지의 오류에 빠지지 말라. 그대가 만약 깨어 있다면 그것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엄청난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똑바로 알아듣는 사람은 단 한 순간에 다른 종류의 실존 속으로 뛰어든다. 하나님은 멀리 있지 않다. 바로 그대 자신 속에 있다.
Contin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