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기행 / 동유럽 아닌 동유럽 국가
헝가리는 동유럽의 한 국가이기를 거부합니다. 지리적으로도 동유럽이 아니며 정치적으로도 돌아선지 오래 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행자라면 그냥 유럽의 한 나라로 여기고 찾아주기를 희망합니다. 사회주의 시절을 연상하게 하는 어떠한 단어도 원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부다페스트는 자유로운 도시입니다. 상점마다 물건이 가득하고 거리엔 자동차가 붐빕니다. 특히 반가운 것은 우리 (한국) 상표 제품이 많은 것입니다. 한국에서 지금은 없어진 대우그룹이 먼저 진출해서인지 대우 마크를 달고 있는 자동차나 전자제품이 유난히 먼저 눈에 띱니다. 숙박도 식사도 마음 내키는 곳을 골라 이용할 수 있으며 순박하고 낙천적인 시민들은 여행자에게 매우 친절합니다. 다만 빈(오스트리아)을 거쳐서 입국하였을 경우, 빈의 건물들은 생기가 있는데 반해 부다페스트의 건물들은 - 고풍스럽기는 한가지지만 - 이제금 낡아 수명이 다한듯한 쇠락한 느낌을 줍니다.
빈과 부다페스트가 직접 비교되는 것은 두 도시가 쌍둥이처럼 같은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푸른 도나우 강(다뉴브 강)을 품고 있는 것도 같고 도시 연륜도 비슷하며 도시 전체에 음악이 흐르는 분위기 역시 같습니다. 그럼에도 한 도시에서는 생기를 느끼고 한 도시에서는 다소 음산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왜일까요.
빈의 건물들엔 소유자의 애정 어린 손때가 묻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반면 부다페스트의 건물들은 아직 국가재산이어서 관리는 하되 아끼지를 않습니다. 계단 벽의 콘크리트가 한 웅큼 떨어져 나가거나 현관 대리석 모서리가 부서져도 손댈 사람이 없습니다. 각자의 생활공간 출입문 따위 고장이나 고칠 뿐입니다.
그러나 달라지고 있습니다. 문호를 개방하고 체제가 바뀌면서 의욕과 생기가 살아나고 있습니다. 국가소유 기업들의 민영화나 도시 건물들의 사유화가 상당히 진행되었고 진행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동유럽으로 불리기를 거부할 정도로 이미지를 쇄신하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보다 안전한 나라?
이와 함께 헝가리는 서유럽이나 선진국들에서 퇴색하고 있는 민족정신을 결집하는데 힘을 쏟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에게 가장 큰 힘이 되고 있는 것은 역사의 향기가 배어있는 거리에서 옛날의 소박한 모습 그대로 살고 있는 국민들의 오염되지 않은 중세기적 심성일지 모릅니다. 공업화로 대표되는 현대화, 국제화에 뒤진 것이 오히려 장점으로 돋보이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몰락 이후 유럽의 도시들은 변했습니다. 특별히 구시가(舊市街)라 하여 정책적으로 보존해온 도시의 한쪽이거나, 민속촌으로 남아있는 지역을 제외하면 대개는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현대화했습니다. 전쟁의 참화가 심했던 곳일수록 더욱 초 현대화 했습니다. 그런 변화 속에서 유럽의 향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이제 중부유럽의 도시들을 찾아가 향수를 달래고 있습니다. 부다페스트(Budapest)는 그런 면에서 각광받는 도시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파리나 런던의 삼사십 년 전 모습이라고나 할까요? 가난하지만 인정이 있는 것도 그렇고 밝은 웃음 속에 희망이 출렁이는 것도 그렇습니다. 낡은 옷을 깨끗하게 차려입은 검소한 모습이나, 닳아 헤진 어른 양복을 입고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면 우리 역시 부모세대의 삶을 떠올리게 됩니다.
친절에 정성이 배어있는 것도 고향 감정을 건드리는 모습의 하나입니다. 호텔을 찾은 여행자에게 내어줄 방이 없을 때 이곳저곳 수소문하여 끝내 묶을 방을 마련해주는 친절은 선진화된 사회는 물론 우리 사회에서도 이미 사라진 모습입니다. 비자라든가 입국절차가 까다로웠던 것도 옛일입니다. 그래도 어딘가 사회주의 어두운 구석이 남아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은 도착하여 한두 시간이면 깨끗이 사라집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열심히 살고 있고 치안은 안정되어 있어 파리나 프랑크푸르트에서보다 긴장이 풀릴 정도입니다.
못난 한국인 여행자가 있어 그래도, 그래도 어딘가 사회주의의 음산함이 남아 있겠지요? 하고 물으니 로칼 가이드는 웃으며 말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여기선 한국이나 서울을 더 불안하고 위험한 곳으로 봅니다. 다리가 끊어지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전직대통령들이 구속되고… 헝거리는 적어도 한국보다는 안정된 나라입니다"
말을 그대로 인정할 순 없지만 음미해 볼만은 했습니다.
헝가리의 4가지 자랑
헝가리는 크게 4가지 자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노벨상 수상자를 8명이나 배출한 과학 수준이고, 둘째는 집시 음악의 본고장이라는 점이며, 셋째는 건강에 탁월한 효험이 있다는 중부유럽 최대의 미네랄 온천이며, 넷째는 끝없이 넓은 대평원의 자연입니다.
국민소득은 우리의 절반 정도로 뒤지지만 과학수준은 수십 년 앞서있는 나라입니다. 특히 물리화학이나 생리 의학 등 기초과학 쪽에 탄탄한 기반을 가지고 있어 중부 유럽에서도 저력이 있는 나라로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천문학의 세계적 전문가인 J.고타드는 전화가 발명된 직후에 두 헝가리 관측소를 연결하는 전화망을 설립했습니다. 그는 달의 분화구에 관한 연구로 명성을 얻기도 했습니다. L.예트보스는 지구물리학자가 사용했던 비틀림 진자(振子)를 발명했는데 이 기구는 지금도 오일이나 천연가스 탐사 때 필수적인 장비의 하나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 그가 전쟁 중에 발명한 크림 톤 전구는 당시 다섯 손 안에 꼽을 만큼 중요한 수출품이었습니다.
컴퓨터를 발명한 것도 헝가리 수학자 J · 뉴만입니다. 그가 정한 "뉴만의 법칙은 현재 사용하는 PC에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A.S.되르디는 비타민C를 발견하고 근육단백질에 관한 연구로 노벨의학상을 수상했고, G.헤베시는 방사성 표시방법에 대한 공헌으로 화학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E.P.위그너는 핵물리학에 관한 연구 및 원자로를 최초로 건설한데 대한 공로로 물리학상을 받았고 G.베케시는 <속귀의 달팽이관에서의 자극의 물리적 메커니즘>을 발견하여 의학상을 받았습니다. 또 D.가보르는 홀로그래피 개발에 관한 연구로 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노벨상 수상자 배출은 헝가리의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치적 변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수상자의 대부분은 다른 나라에 살면서 연구하고 명성을 얻었습니다. 홀로그래피를 발견한 가보르는 영국인으로 71년 수상자명단에 올라있고 E.P.위그너는 미국인으로 63년 명단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낳은 것은 유서 깊은 명문 헝가리대학입니다.
이런 점에서 자부심과 비탄 감을 함께 가지고 있는 그들은 국가(國歌)에 한을 담아 노래합니다.
신이여, 헝가리안을 품어주소서
힘 있고 풍성해지도록 가호의 손길을 내리소서 ~
오랜 터키의 지배, 그 후 합스부르크가(家)의 지배,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의 패배. 그리고 56년 헝가리 사건에서 보듯 헝가리는 많은 어려움과 곤경을 견뎌왔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인간적인 풍요와 자유에의 기대를 잃지 않은 배경에는 민족의 애환을 달랠 민족음악이 있었기 때문으로 믿어집니다.
헝가리는 집시음악의 본고장
헝가리는 집시음악의 본고장입니다. 집시음악이란 서민생활의 애환을 담고 있는 민중음악입니다. 16세기를 전후하여 유럽에 진출한 이 음악은 집시의 생활양식과 마찬가지로 거주하는 나라의 영향을 받으면서 지방마다 조금씩 다른 형태로 발전하였는데, 에스파냐와 헝가리에서는 독자적인 개성을 나타냅니다. 다소 폐쇄적이고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고집하는 집시들에 의해 노래를 중심으로 발전되어온 집시음악이 헝가리에서는 기악연주 중심으로 변화하고 에스파냐에서는 춤을 동반하는 형태로 발전한 것입니다.
부다페스트에서는 시골음악을 도시형으로 발전시켜 집시 음악가들이 가수가 아닌 연주자로서 활약을 시작했습니다. 기악중심의 이 음악이 유명해진 것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유럽의 대중음악을 이끌었던 바이올린 등의 현악기와 그들의 민족 악기인 침발로의 앙상블을 집시 음악가들이 만들어낸 덕분입니다. 이 악단은 당시 유행하는 대중음악을 다 연주했는데, 완급의 자유로운 조절이며 정열적이고 즉흥적인 연주형태는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J.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은 이 집시 음악을 수집하여 피아노 연탄용으로 편곡한 것으로 집시 특유의 선율과 리듬을 담고 있고, F.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 역시 완만한 도입부와 빠른 템포의 주부로 이루어지는 차르다시 무곡 형식에서 볼 수 있듯, 집시 음악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집시음악은 헝가리 인들의 생활 속에 깊이 배어 고난을 극복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나라 잃은 슬픔이며 정치 이념적 혼란의 아픔을 참아내게 했습니다. 음악 속에 슬픔과 기쁨을 예리하게 대조시키면서 애환을 달랬습니다. 여행을 하다보면 이 나라 사람들의 음악수준이 대단히 높은 것에 문득 놀라게 되는데, 헝가리 인들의 음악사랑은 즐긴다는 개념 이전에 살아있다는 확인이요, 살아가는 수단이었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부다페스트는 중부유럽의 파리
부다페스트는 중부유럽의 파리로 불리면서, 한편에서는 빈과 쌍둥이 도시, 도나우 강(다뉴브강)의 진주, 도나우의 장미 등 별명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부다페스트는 부다와 페스트의 합성인데 도시 가운데를 흐르는 도나우 강을 경계로 두 도시가 서로 마주보는 형태였기 때문입니다. 강의 서안(西岸) 산지(山地)에 조성된 부다는 아르파드 왕조가 번영했던 13세기 이래 왕궁이 있던 곳으로 헝가리 역사의 중심으로 한 때는 중부유럽 최대의 도시였습니다. 강 건너(東岸)에 조성된 페스트는 왕국특권도시로 기초가 세워진지는 오래되었으나 강물이 자주 범람할 정도로 지대가 낮아 본격적인 개발은 늦어진 곳입니다.
1873년 두 도시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합병하였고, 그후 페스트지구는 이른바 현대적인 번화가로 발전했습니다.
때문에 역사적인 건물은 대부분 부다에 있습니다. ▲도나우 강 연안에서 가장 오래된 뾰족지붕이 인상적인 어부의 요새 ▲13세기 벨라 4세가 건립한 네오고딕 양식의 마챠시교회 ▲장엄한 왕궁과 낭만적인 왕궁의 언덕 ▲부다페스트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겔라르트 언덕 등이 부다에 있는 반면 ▲런던의 빅 벤에 필적하는 국회의사당 ▲파리 상젤리제에 해당하는 인민공화국거리 ▲헝가리 건국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영웅광장 ▲시민공원 등은 페스트에 있습니다.
여의도처럼 강 가운데 마르키트 섬이 있는데 전체가 공원입니다. 각종 스포츠시설이며 야외극장, 교회, 부다페스트 제일의 온천이 딸린 호텔 등이 있어 주말이면 여가를 즐기는 젊은이들로 가득찹니다.
특별한 사실은 부다페스트가 세계 최고 수준의 온천도시라는 점입니다. 헝가리 국내에 국제기준에 달하는 온천이 450곳 이상이며 부다페스트에만 1백 개소가 넘는데, 하루 용출량이 무려 7만 톤에 이릅니다. 동유럽국가중 헝가리인 혈색이 유난히 좋아 보이는 것은 이 온천 때문입니다.
시내 온천은 터키 점령시대에 개발된 둥근 돔의 것, 호텔의 부속시설, 공원 안에 있는 것 등 다양하며 요금은 한국의 대중사우나 이용료보다 싼데, 터키탕 외에는 수영복(모자포함)을 반드시 착용해야 합니다. 수질은 놀랍게도 미네랄 온천으로 여러 가지 질병의 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보이는데, 류마티즘 심장병 노이로제 등에 특히 효능이 있다고 합니다.
헝가리는 남한보다 약간 작은 나라에 1천 1백만 명 정도가 살고 있습니다. 내륙이고 주변이 높은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안에는 한없이 넓은 대평원이 펼쳐져 있습니다. 도나우 강이 국토의 중앙부를 북에서 남으로 흐릅니다. 헝가리 대평원은 치수(治水)를 통해 일부 옥토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방목지로 쓸 수밖에 없는 황무지가 대부분입니다.
바다가 없는 대신 중부유럽에서 가장 큰 호수인 발라톤 호(湖)가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헝가리 바다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발라톤 호는 그 스케일과 분위기에서 바다 같은 느낌을 줍니다. 여름에는 수영을 즐길 수 있으며 겨울에는 천연의 스케이트장이 됩니다. 4계절이 있지만 겨울이 약간 길고 또 대륙성 기후여서 여름은 덥고 겨울은 몹시 춥습니다.
여행하기 좋은 계절은 봄 가을이지만, 일교차가 심하고 또 실내와 옥외의 기온차가 심하므로 세심한 준비가 필요한 곳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