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10:16~20 두 왕
정약용은 기중기를 책을 보고 발명하였는데,
누가 이 기중기를 사용할까. 그런데 정조대왕이 정약용의 기중기 아이디어를 채용하였다. 그랬더니 10년 공사가 2년 만에 끝나고, 엄청난 노임이 절감되어, 나라에 큰 유익이 되었다. 수원성을 보라. 얼마나 잘 만들었나. 그런데 만일 정조가 정약용을 채용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또 세종대왕도 만약 학자들에게 훈민정음을 만들라고 하지 않았으면 지금의 한글은 탄생할 수 있었을까. 또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임진왜란 때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왕과 신하가 조합이 잘되었을 때, 나라가 잘 되었다.
전도서는 코헬렛 곧 유언이라는 뜻인데, 왕으로서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지도자들 곧 왕과 방백들에 대해서 특별히 10장에서 유언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솔로몬이 보니, 두 왕이 있었다. 한 나라는 왕이 어리고 아침부터 잔치하는 나라였다. 이들은 백성들과 정무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세금으로 걷은 것을 가지고 놀고 먹는 것이다.
16 왕은 어리고 대신들은 아침부터 잔치하는 나라여 네게 화가 있도다
지도자가 어리고 미숙하고, 동시에 신하들은 돈을 물쓰듯 쓰면서 아침부터 잔치하면 어떻게 되는가. 이런 나라는 화가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나라도 있었다.
17 왕은 귀족들의 아들이요 대신들은 취하지 아니하고 기력을 보하려고 정한 때에 먹는 나라여 네게 복이 있도다
그와 반대 되는 왕이 있으니, 이 왕은 상식이 있는 자요, 대신들도 사치하지 않으며 절제하고 다만 기력을 보하려고 먹는다. 이런 나라는 복이 있다는 것이다.
18 게으른즉 서까래가 내려앉고 손을 놓은 즉 집이 새느니라
게으르면, 대들보가 내려앉고, 집수리도 하지 않으면, 집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터져 나오게 된다.
19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나 돈은 범사에 이용되느니라
잔치, 포도주, 돈은 나쁜 것인가. 이런 것은 중립적인 것이다. 그래서 잘 사용하면 좋지만, 그런데 남용하면, 해악이 크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그 점을 말하고 있다. 잔치는 희락을 위해,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돈은 범사에 이용되도록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금욕주의도 아니고 쾌락주의도 아니다. 이런 것은 다만 남용하지 말고 조미료같이 써야 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마다 차이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20 심중에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며 침실에서라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공중의 새가 그 소리를 전하고 날짐승이 그 일을 전파할 것임이니라
사실은 왕도 중립적이다. 왕이 잘하면, 나라가 편하고 왕이 못하면 나락 기운다. 부자도 마찬가지이다. 왕이나 부자는 주권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방백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면, 주권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조언하라고 말한다. 물론 심하게 나갈 때는 비판하고, 대모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왕이나 신하가 나라를 잘 운용할 수 있도록 주권자들이 잘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돕는 것이 성경적이다.
딤전2:1~4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도 안에도 두 왕이 있는데, 바로 은혜라는 왕과, 죄라는 왕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가 왕노릇 하는 사람이다.
롬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라는 옛왕이 자꾸 육신으로 말미암아 은혜라는 왕을 넘본다. 그러므로 두 왕이 내 안에서 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성도의 실질적인 상태는 이것이다.
롬8:12~13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거듭났어도, 죄의 세력이 남아 있어, 육신대로 살도록 부추긴다. 그러므로 이것과 평생을 계속 싸워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 또는 자신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하였다. 죄라는 왕은 마치 두더지 뿅망치같이 튀어 나온다. 그럴 때마다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영으로써’라는 말은 성령으로써 복종시키는 것이다. 우리 힘으로는 어림없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서 사는 법을 훈련해야 한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칭의로 구원받지만, 이 두 구절을 성화의 핵심 구절이라고 하였는데, 그리스도인은 성화로 완전주의자처럼 완전한 죄의 소멸을 이루지는 못한다. 아무리 거듭났어도 행위로 거룩해질 수 없다. 믿음이 전제 되어 있다. 만약 성화로 거룩을 이루게 된다면, 우리의 행위에 따라 구원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죄의 세력과 싸워야 한다. 이것이 성화교리이다. 또한 유행하는 어떤 사람들의 말처럼 맡기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라면 계속 성화 부단히 곧 죄와 싸우는 삶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