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25
ㅡ 백제건국과 소서노 2 ㅡ
앞 편에서 백제를 건국한 '비류' '온조'가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 친아들이 아닌 소서노가 주몽과 재혼하면서 데려온 양아들이라는 기록이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편 "또 말한다(일운)"에 나온다 했다.
사실 삼국사기라는 공인된 국정역사서에 두 가지로 기록되어 있는 것부터 괴이하지만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아마 당시 김부식도 무엇이 진실인지 몰랐기 때문에 어쩔 수없어 두 가지를 다 기록한 것으로 추정 된다.
하지만 당시 역사가 흘러간 과정을 살펴보면 비류, 온조가 주몽 양아들 설이 진실에 가깝다 보인다.
내 초등학교 시절 교과서에도 나왔던 고구려 2대왕이자 주몽 맏아들 유리명왕(이하 유리왕) 설화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설화내용은 아래와 같다.
[주몽이 부여 대소왕 압박을 못 이겨 졸본으로 도망치면서 본 부인 '예부인'(부여 대소왕이 좋아하는 것으로 나옴. 주몽과 삼각관계)과는 함께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주몽이 부여에서 도망칠 때 부인 예씨는 주몽의 애를 임신한 상태였다. 주몽이 예부인에게 단검을 반으로 쪼개 숨기면서 수수께기 같은 이야기를 남긴다. 그리고 혹 아들이 태어나면 그 수수께기를 풀고 숨긴 반쪽 단검을 찾아 자기에게 오라고 한다. 예부인은 주몽이 떠난 후 홀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주몽 맏아들로 이름은 <유리, 유류, 누리>라 지었다. 예부인은 '유리'가 성장한 뒤 아버지 주몽이 남긴 징표인 부러진 칼을 유리에게 찾게하여 주몽이 세운 고구려로 가게 한다.(다른 기록에는 예부인이 유리와 함께 갔다고도 나온다. 그랬다면 부러진 단검이 필요했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이 설화 이야기가 백제건국 시발점이 된다.
만약 비류나 온조가 친아들이었다면 주몽이 유리가 오자마자 비류 온조 또는 소서노까지 내치고 유리를 황태자로 삼긴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봤을 때 비류 온조는 주몽 친아들이 아닌 소서노가 데리고온 양아들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관련 재미있는 내용도 남아있다. 역사서 기록은 아니다.
먼저 그 내용부터 살펴보자. 소서노가 자기 아들들인 비류와 온조를 제끼고 황태자를 유리로 정하자 화가나서 주몽과 유리에게 험한 말을 쏟아붓는 장면이다.
[떠나지요. 고구려를 당신께 온전히 드리지요. 이 소서노. 사랑하는 내 고구려를 떠나고, 내 졸본을 떠나고, 내 고향 소노를 떠나고, 내 백성을 떠나드리지요. 하지만!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보십시오. 이 소서노가 아들들을 데리고 뭘 하는지. 유리 너 또한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보아라! 내 아들 비류, 온조가 너의 고구려를 어찌 넘어서는지. 천 대가 지나도, 만 대가 지나도, 이 소서노 후손들이 반드시 너의 고구려를 밟고 일어설 것이다.]
윗 내용은 2010년 KBS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1화 회상 및 특별출연으로만 언급된다. 탤랜트 정애리가 연기했다.
고구려 건국 초기까지만 해도 주몽과 소서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리가 부여에서 귀환하자 후계자 문제로 대립한다. 주몽(이덕화 분)이 유리를 태자로 삼으려 하는 찰나 책봉식장에 난입해 주몽이 유리에게 건네준 활을 빼앗아 바닥에 던져 버리고 유리의 웃옷을 벗기더니, 비류와 온조의 웃옷도 벗겨 상처 하나 없는 유리와 대비되는 전장에서 얻은 흉터들을 보라며 주몽에게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삼으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주몽은 오히려 소서노에게 파혼을 선언하며 혼인 예물을 바닥에 던져 박살을 낸다. 이에 질세라 소서노도 주몽이 자신에게 준 혼인 예물들을 내팽개쳐 버리고 주몽과 유리에게 자신의 후손들이 반드시 당신들의 고구려를 밟고 일어설 것이라고 차갑게 내뱉고는 자신이 거느린 소노부의 신하들과 백성들을 데리고 남하하여 백제를 세운다.
여러모로 MBC 대하드라마 '주몽'의 소서노와 대조되는 모습인데, 주몽에서는 추모와 소서노의 사랑 이야기를 부각시키기 위해 소서노가 스스로 물러난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나 냉혹한 왕위다툼 권력 투쟁 측면에선 '근초고왕' 드라마에서 묘사한 소서노가 더 그럴듯 하 다. 물론 2천년도 더 전의 일이라 당시 실제 내부 상황이 어땠을지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역사적 사실은 유리가 황태자가 되어 고구려 2대 왕이 되었다는 것이고, 그에 불만을 품고 소서노가 비류 온조 두 아들을 데리고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가서 백제를 건국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참 쿨한 '왕위쟁탈전' 이다.
세계사적으로 봐도 '왕위쟁탈전' 은 부모 형제사이에도 피를 보는 냉혹한 권력쟁취 현장이다.
그러나 고구려 주몽과 소서노는 피 한방울 안 흘렸다. 소서노는 자기 두 아들과 세력들을 데리고 고구려를 쿨하게 떠났을 뿐이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 백제를 건국한다.
여걸 소서노의 대단한 점이다. 고구려를 건국하는데 중점적인 역할을 했기에 새로운 나라 건설에도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처럼 우리나라 역사에서 다시없을 소서노라는 여걸때문에 고구려와 백제건국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 백제건국 과정에도 험난한 진통은 있었다.
두 형제 온조와 비류는 나라를 세울 장소를 두고 의견이 갈린다.
'온조'는 한강 남쪽의 위례성에 정착하기를 원했지만, 비류는 바닷가의 미추홀(현재의 인천 지역)에 정착하기를 원했다.
결국 형제는 각자 자신의 뜻대로 따로 나라를 세우기로 한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십제'(후에 백제로 고침. 십 명의 신하들이 함께 세웠다는 의미)를 세웠다.
한편, 비류는 미추홀에 정착해 '비류백제'를 건국했다. 그러나 미추홀의 환경이 너무 좋지 않아 비류는 나라를 제대로 정착시키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만다.
비류가 이런 상황에 좌절하여 자살했다는 기록도 있다.
어쨌든 비류가 죽은 후, 비류의 백성들은 온조에게 합류하였고, 백제는 더 강력한 나라로 성장 하게 된다. 온조는 위례성을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주변의 부족들을 통합하고 국력을 키워 갔다.
온조는 지혜롭고 강력한 지도자로 백제를 번영시켰다. 온조는 백성들 신뢰를 받으며 나라 기틀을 다졌고, 그의 후손들은 백제 역사를 이어갔다.
온조와 비류 출생이 불명확하지만 어쨌든 주몽의 아들이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는 백제가 고구려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어 백제 왕위에 정통성을 부여한다.
그래서 백제건국 설화에만 난생설화든 신화가 없다.
하지만 백제는 고구려를 계승한다기 보다는 정신적으로 부여를 계승했다고 생각한다.
고구려는 백제가 극복해야 할 나라였을 뿐이었다.
비류 온조 형제의 갈등과 그로 인한 선택은 나라의 창건 과정에서의 어려움과 도전을 상징한다. 그러나 백제는 결국 화합과 통합을 통해 강력한 나라를 이루는 과정을 보여준다.
백제의 초기 도읍인 위례성 선택은 지리적 전략성과 중요성을 반영한다. 한강유역 풍부한 자원과 교통요충지를 차지 함으로써 백제 번영을 이끌었다.
백제건국에 대해 기록된 역사서를 좀 더 살펴보면,
김부식의 '삼국사기' 건국전설에 의하면 고구려에서 비류와 온조 형제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각각 미추홀과 위례에 도읍을 세웠는데, 미추홀에서 건국한 비류는 결국 자결하여 그의 나라는 동생 온조에게 병합 되었다고 나온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는 고구려 왕비였던 소서노가 남하하여 건국했다고도 한다.
'주서'를 비롯한 중국 사서 등에는 시조로서 고구려의 주몽이 아닌 '우태' 혹은 '구태'라 하는 인물이 등장하여 혼란을 주고 있다. '우태'는 소서노 첫 번째 남편으로 알려져 있다.
확실한 것은 백제를 세운 지배 계층이 고구려계였다는 것이다.
한편 문헌 상으로는 백제와 부여의 관계가 없었다고 단정할 수 없으나, 고고학적 측면에서 백제와 부여의 직접접 관계가 희박했다는 것이 정설에 가깝게 굳어지고 있다.
백제가 묘제든 유물이든 부여와 직접적 관계를 증빙할 수 있는 자료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으며, 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부여 영향을 받은 고구려와 관계에서 국한된 것이었음이 분명해지고 있다.
백제건국 세력들은 한강 유역에 이미 있었던 해양 세력인 '토돈 분구묘제' 집단과 연합한 다음, 한반도로 남하해서 현지 토착 세력과 융화되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백제가 지배계층과 피지배 계층 언어가 달랐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백제는 초창기부터 고고학적 지배층이 토돈분구묘계 및 고구려 이주민들이 연합한 국가였음이 밝혀진 요즘 와선 설득력이 크게 떨어졌다.
이러한 시조설화 차이에 근거하여 일부 사학자들은 백제의 건국집단을 두 개 이상으로 가정하기도 한다.
아예 비류를 시조로 하는 다른 나라(비류백제라고 가칭됨)가 상당기간 존재했을 것이라는 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비류국의 마지막 왕인 송양왕과, 비류국에서 이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소노부(=비류나부)를 소서노, 비류와 연관짓는 사람도 있다. 일단 '비류'라는 이름부터가 한자까지 동일하고, '소서노'와 '소노'의 발음이 비슷하며, 소노부가 상당기간 왕비족 이었다는 점 등을 고려한 것이다.
소서노와 백제건국에 대해서는 이 정도에 마치고 다음은 신라건국에 대해 정리해 나가겠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