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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운(敎運) 1장
1. 상제께서 임인년 여름철을 맞이하여 형렬의 집에 가셔서 지내시니라.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상제께 드리는 공궤가 소략하고 더욱이 가뭄 때문에 밭에 심은 채소도 가뭄을 탄 탓으로 더욱 걱정 근심하니 그 사정을 관철하시고 상제께서 “산중에 별미가 있는 것이 무엇이리요 채소의 별미라도 있어야 할 터이니라”고 하시고 “걱정 근심을 말라” 하셨도다. 이 말씀이 계신 후 채소가 잘 자라 형렬이 한결 근심을 덜었도다.
2. 상제께서 처음으로 자기를 따른 사람에게 반드시 자신이 그 동안 지내오던 허물을 낱낱이 회상하여 마음속으로 사하여 주시기를 빌게 하고 미처 생각지 못한 허물을 하나하나 깨우쳐주시고 또 반드시 그의 몸을 위하여 척신과 모든 겁액을 풀어 주셨도다.
3. 김형렬은 임인년이 되어 상제께서 본댁에 머무실 때마다 상제를 찾아 뵈옵곤 하였고 상제께서 본댁에서 하운동(夏雲洞)으로 자주 내왕하셨기에 그 중로에 있는 소퇴원 마을 사람들은 상제와 형렬을 잘 알게 되었도다.
4. 상제께서 이해 四월 보름에 김형렬에게 심법을 전수하시고 九월 十九일 까지 수련을 계속하도록 하셨도다.
5. 상제께서 하루는 교운을 보리라 하시더니 세숫물을 대하시면서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눈을 감고 보라”고 말씀하시기에 모두들 눈을 감고 물을 들여다보니 갑자기 물이 큰 바다가 되고 바닷 속에 뱀머리와 용꼬리가 굽이치는지라. 모두들 본 대로 고하니 상제께서 “나의 형체는 사두 용미(蛇頭龍尾)니라” 말씀하셨도다.
6. 상제께서 임인년 四월에 정남기를 따르게 하시고 금구군 수류면 원평에 있는 김성보(金聖甫)의 집에 가셔서 종도들과 함께 지내셨도다. 이 때 김형렬과 김보경이 찾아왔도다. 상제께서 보경에게 유 불 선(儒佛仙) 세 글자를 쓰게 하고 정좌하여 눈을 감고 글자 하나를 짚게 하시니 보경이 불자를 짚자 상제께서 기쁜 빛을 나타내시고 유자를 짚은 종도에게 유는 부유라고 일러주셨도다.
7. 七월에 상제께서 본댁에 돌아와 계시므로 김형렬은 상제를 배알하고자 그 곳으로 가다가 문득 소퇴원 마을 사람들의 이목을 꺼려 좁은 골목길에 들어서 가다가 본댁에서 하운동으로 향하시는 상제를 만나 뵈옵고 기뻐하였도다. 형렬은 반기면서 좁은 길에 들어선 것을 아뢰고 “이 길에 들어서 오지 않았더라면 뵈옵지 못하였겠나이다”고 여쭈니라. 상제께서 가라사대 “우리가 서로 동․서로 멀리 나누어 있을지라도 반드시 서로 만나리라. 네가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나를 좇고 금전과 권세를 얻고자 좇지 아니하는도다. 시속에 있는 망량의 사귐이 좋다고 하는 말은 귀여운 물건을 늘 구하여 주는 연고라. 네가 망량을 사귀려면 진실로 망량을 사귀라”고 이르셨도다. 형렬은 말씀을 듣고 종도들의 틈에 끼어서도 남달리 진정으로 끝까지 상제를 좇았도다.
8. 김형렬은 심법을 받은 후부터 수련을 계속하다가 九월 十九일에 끝마쳤도다. 이 날에 상제께서 형렬에게 가라사대 “그만 그칠지어다. 다른 묘법은 때가 이르면 다 열어주리라” 하시니라. 상제께서 모든 천지공사에 신명을 모으고 흩어지게 하는 일과 영을 듣는 일에 무리들을 참관케 하고 또 풍우를 짓게도 하시면서 그 참관한 공사의 조항을 일일이 묻고 그 본 바의 확실 여부를 시험하셨도다. 이로써 상제께서 자신을 좇는 무리들에게 공사의 확신을 얻게 하셨도다.
9. 상제께서 어느 날 김형렬에게 가라사대 “서양인 이마두(利瑪竇)가 동양에 와서 지상천국을 세우려 하였으되 오랫동안 뿌리를 박은 유교의 폐습으로 쉽사리 개혁할 수 없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도다. 다만 천상과 지하의 경계를 개방하여 제각기의 지역을 굳게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을 서로 왕래케 하고 그가 사후에 동양의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운(文運)을 열었느니라. 이로부터 지하신은 천상의 모든 묘법을 본받아 인세에 그것을 베풀었노라. 서양의 모든 문물은 천국의 모형을 본뜬 것이라.” 이르시고 “그 문명은 물질에 치우쳐서 도리어 인류의 교만을 조장하고 마침내 천리를 흔들고 자연을 정복하려는 데서 모든 죄악을 끊임없이 저질러 신도의 권위를 떨어뜨렸으므로 천도와 인사의 상도가 어겨지고 삼계가 혼란하여 도의 근원이 끊어지게 되니 원시의 모든 신성과 불과 보살이 회집하여 인류와 신명계의 이 겁액을 구천에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모악산(母岳山) 금산사(金山寺) 삼층전(三層殿) 미륵금불(彌勒金佛)에 이르러 三十년을 지내다가 최제우(崔濟愚)에게 제세대도(濟世大道)를 계시하였으되 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헌을 넘어 대도의 참 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년(甲子年)에 드디어 천명과 신교(神敎)를 거두고 신미년(辛未年)에 강세하였노라”고 말씀하셨도다.
10. 상제께서 교운을 펼치신 후 때때로 자기를 좇는 종도들에게 옛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리라. 그 사람들 중에서 강태공(姜太公). 석가모니(釋加牟尼). 관운장(關雲長) 이마두(利瑪竇)가 끼었도다.
11. 이치안(李治安)이 상제의 예지에 감탄하여 상제를 좇게 되었도다. 전주부중에 들어가시다가 어떤 사람이 황급하게 가는 것을 보고 그에게 “집으로 곧 돌아가라”고 이르시니라. 그가 이상히 여겨 까닭을 묻는도다. 상제께서 “그대가 지금 혼사로 중매인을 찾아가나 그가 그대의 집에서 기다리고 있느니라 그리고 오늘 중매인을 만나서 결정하지 않으면 그 일은 허사가 되리라” 하시니라. 그 사람이 매우 경탄하여 일러주신 대로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니 과연 중매인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도다. 그 후 그 사람은 감복하여 상제를 찾아 뵈이니 이 사람이 바로 이치안이니라.
12. 김병욱은 계묘(癸卯)년 四월부터 남원(南原)의 세금을 거두는 관직에 있게 되었도다. 이 때에 박영효(朴泳孝)가 일본(日本)에 망명하여 혁명을 도모하고 병욱이 또 그에 연루하였도다. 관은 그 당원을 체포하기로 정하고 八월에 포교가 서울로부터 남원으로 내려와서 병욱을 찾았도다. 전주 군수 권직상이 병욱의 거처를 알기 위해 포교를 전주에서 남원으로 내려와서 병욱을 찾았도다. 전주 군수 권직상이 병욱의 거처를 알기 위해 포교를 전주에서 남원으로 보냈도다. 그 전날 미리 상제께서 남원에 가셔서 병욱을 숙소의 문 바깥에 불러내시고 그로 하여금 수합한 세금을 숙소 주인에게 보관시키고 가죽신 대신에 짚신을 신게 하고 밭둑과 언덕을 걸으시니 병욱은 묵묵히 뒤만 따랐도다. 한 주막에서 점심을 끝내시고 다시 걸어가시다가 그의 선산 밑에 이르니 때는 이미 저물었도다. 그제서야 상제께서 그를 돌아보시고 묘소를 물으시니 “와우형(臥牛形)입니다”고 여쭈는지라. 말씀하시되 “그러면 소 우는 소리를 들어야 참이 되리라” 하시고 그 자리에 앉아 기다리시니 산 아래서 소 우는 소리가 나는도다. 병욱이 소의 울음소리를 아뢰이니 상제께서 “먼 데서 들리면 소용이 없나니라” 하시고 한참 있으니 이상하게도 한 사람이 소를 몰고 묘 앞으로 지나가는데 소가 크게 우는도다. 상제께서 가라사대“혈음(穴蔭)이 이미 동하였도다” 하시고 자리를 떠서 그 산소의 재실로 내려가 이곳에서 그날 밤을 새우시니라. 이튿날 상제께서 묘지기를 남원에 보내어 형세를 알아보게 하셨도다. 그는 남원에 갔다 와서 서울 포교가 병욱을 수색함을 아뢰이니 이 때 비로소 병욱이 깨닫고 크게 두려워하여 몸 둘 곳을 모르도다. 상제께서 다시 묘지기에게 여자가 타는 가마를 마련케 하고 병욱을 거기에 태우고 전주 상관(上關) 좁은 목에 이르러 병욱으로 하여금 먼저 서원규의 집에 가서 정세를 자세히 살피게 하시니라. 그는 먼저 원규의 집에 들어서니 원규가 몹시 놀라면서 “그대가 어떻게 사지를 벗어났으며 또 어떻게 하려고 이런 위지에 들어섰느냐. 너무나 급한 화이기에 미쳐 연락할 새가 없었노라. 여러 친구와 그대의 가족들이 근심 걱정하는 중이니라”고 말하는도다. 병욱은 포교들이 전주를 떠나 남원으로 향하고 상제와 자기가 남원을 벗어나온 때가 겨우 한나절 사이 밖에 되지 않는 것을 원규로부터 듣고 상제께서 천심이심에 탄복하여 마지 아니하는도다. 포교는 남원에 이르러 병욱을 수색하다가 찾지 못하고 전주에 되돌아와서 군수 권직상을 조르고 각처에 게시하거나 훈령을 내려 병욱을 잡아들이게 하는 중이었도다.
13. 병욱은 서원규의 약국이 서천교(西川橋) 네 거리의 번화한 곳임을 몹시 걱정 근심하였으되 상제께서 나중에 찾아오셔서 병욱에게 근심말라고 이르시니라. 상제께서 병욱을 데리시고 왕래하시면서 거리에서 병욱의 이름을 높이 부르시니 그는 더욱 당황하여 모골이 송연한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고 여러 사람을 이곳 저곳에서 만났으되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도다.
14. 그 후에 상제께서 병욱을 장흥해의 집으로 옮기고 그 곳에 석 달동안 머물게 하셨도다. 석달이 지나서 상제께서 병욱에게 마음을 놓으라고 이르시니라. 일로전운(日露戰雲)이 급박하여 일병이 국토를 통과하고 국금을 해제한 때가 되니 박영효에 대한 조정의 혐의도 풀렸도다.
15. 이 해 七월에 동학당원들이 원평에 모였도다. 김형렬이 상제를 뵈옵고자 이곳을 지나다가 동학당이 모여있는 것을 보고 상제를 찾아 뵈옵고 그 사실을 아뢰이니 상제께서 그 모임의 취지와 행동을 알아오도록 그를 원평으로 보내시니라. 그는 원평에서 그것이 일진회의 모임이고 보국 안민을 목적으로 내세우고 대회 장소가 충남(忠南) 강경(江景)임을 탐지하고 상제께 되돌아가서 사실을 아뢰었도다. 이 사실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그네들로 하여금 앞으로 갑오(甲午)와 같은 약탈의 민폐를 없애고 저희들 각자가 자기의 재산을 쓰게 하리라. 내가 먼저 모범을 지어야 하리라” 말씀하시고 본댁의 살림살이와 약간의 전답을 팔아 그 돈으로 전주부중에 가셔서 지나가는 걸인에게 나누어 주시니라. 이로부터 일진회원들은 약탈하지 않고 자기 재산으로 행동하니라. 이 일로써 전주 부민들은 상제께서 하시는 일을 감복하면서 공경심을 높였도다.
16. 원일이 자기 집에 상제를 모시고 성인의 도(道)와 웅패의 술(術)을 말씀들었도다. 그것은 이러하였도다. “제생 의세(濟生醫世)는 성인의 도요. 제민혁세(災民革世)는 웅패의 술이라. 벌써 천하가 웅패가 끼친 괴로움을 받은 지 오래되었도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상생(相生)의 도로써 화민 정세하리라. 너는 이제부터 마음을 바로 잡으라. 대인을 공부하는 자는 항상 호생의 덕을 쌓아야 하느니라. 어찌 억조 창생을 죽이고 살기를 바라는 것이 합당하리오.”
17. “이 세상에 학교를 널리 세워 사람을 가르침은 장차 천하를 크게 문명화하여 삼계의 역사에 붙여 신인(神人)의 해원을 풀려는 것이나, 현하의 학교 교육이 배우는 자로 하여금 관리 봉록등 비열한 공리에만 빠지게 하니 그러므로 판 밖에서 성도하게 되었느니라” 하시고 말씀을 마치셨도다.
18. 그 후 광찬(光贊)과 형렬(亨烈)이 상제와 함께 전주(全州)에 동행하였느니라. 김석(金碩)이란 자가 문하에 입도하게 되었도다. 입도에 앞서 상제께서 광찬과 형렬을 좌우에 두고 청수를 앞에 놓고 두 사람에게 태을주(太乙呪)를 스물 한번 읽게 하신 후에 석으로 하여금 읽게 하셨도다.
19. 김광찬과 신원일이 상제를 모시고 계시던 정미년 정월 어느 날 상제께서 그들에게 “귀신은 진리에 지극하니 귀신과 함께 천지공사를 판단하노라” 하시면서 벽에 글을 다음과 같이 써 붙이셨도다.
20. 종도들이 모인 곳에서 상제께서 三월 어느 날 상제께서 가라사대 “지금은 신명 해원시대니라. 동일한 五十년 공부에 어떤 사람을 해원하리요. 최 제우는 경신(庚申)에 득도하여 시천주(侍天呪)를 얻었는 바 기유(己酉)까지 五十년이 되니라. 충남(忠南) 비인(庇仁) 사람 김경흔(金京訢)은 五十년 공부로 태을주(太乙呪)를 얻었으되 그 주문을 신명으로부터 얻을 때에 그 주문으로써 많은 사람을 살리라는 명을 받았느니라”고 말씀을 하시고 이어서 “이 두 사람 중의 누구를 해원하리오”라고 물으시니 시좌하고 있던 종도들 중에서 광찬이 “상제님의 처분을 기다리나이다” 하니 상제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시천주는 이미 행세되었고 태을주를 쓰리라” 하시고 읽어 가르치시니 그 주문은 이러하였도다.
「吽哆吽哆 太乙天上元君 吽哩哆囗耶 都來 吽哩喊哩娑婆啊」
21. 상제께서 대흥리로 행하실 때 박공우가 따라가니라. 상제께서 경석의 집에 들러 글을 써서 벽에 붙이고 “내가 머무는 곳을 천지가 다 알아야 하리라”고 말씀하시니 갑자기 천둥이 치는지라. 공우가 몹시 놀라고 마을 사람들도 뜻밖의 천둥을 이상히 여기니라. 이후에 일진회원인 안내성(安乃成). 문공신(文公信). 황응종(黃應鐘). 신경수(申京洙). 박장근(朴壯根) 등이 상제를 추종하였도다.
22. 황 응종이 노랑닭 한 마리를 상제께 올리니라. 상제께서 밤중에 형렬에게 그 닭을 잡아 삶게 하고 김형렬․한공숙․류찬명․김자현․김갑칠․김송환․김광찬․황응종 등과 나눠 잡수시고 운장주(雲長呪)를 지으셔서 그들에게 단번에 외우게 하셨도다. 이것이 그 때의 운장주이니라.
「天下英雄 關雲長 依幕處 近聽天地 八位諸將 六丁六甲 六丙六乙
所率諸將 一別屛營 邪鬼唵唵 口急口急 如律令 娑婆啊」
23. 김덕찬이 상제를 대함에 항상 거만하나 상제께서는 개의치 않으시고 도리어 덕찬을 우대하시더니 하루는 여러 사람이 있는 데서 공사를 행하실 때 크게 우뢰와 번개를 발하니 덕찬이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피하려 하니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네가 죄 없거늘 어찌 두려워하느뇨” 덕찬이 더욱 황겁하여 벌벌 떨고 땀을 흘리면서 어찌 할 바를 모르더니 이후에는 상제를 천신과 같이 공경하고 받들었도다.
24. 정미년 화창한 봄이 되었도다. 상제의 성예가 사방에 펼쳐지니 그 성예를 학동(鶴洞) 마을에 사는 문치도(文致道)가 듣고 전주(全州) 이서면(伊西面) 불가지(佛可止) 김성국(金成國)의 집에 계시는 상제를 배알하고자 찾아가는 길에 이성동(伊成洞)의 송대유(宋大有)와 동행하려고 그를 찾았도다. 마침 대유는 손님을 맞아있기에 종제와 함께 동행하기를 바라는도다. 대유는 종제가 폐병으로 위기에 놓였음을 알리고 상제께 구해주실 것을 간청하여 주기를 치도에게 부탁하니라. 그리고 대유는 동생에게 돈 두냥을 주효에 쓰라고 내어주면서 이 돈을 이자 없이 갚으라고 일렀도다. 동생은 형에게 한 냥이면 족하다고 하면서 한냥을 돌려주고 치도를 따라 상제를 배알하였도다. 그곳에서 동생은 사유를 일일이 고한즉 상제께서“인색한 자가 어찌 병을 고치리요” 하셨도다. 치도와 병자는 상제의 통찰하심에 경복하여 병자는 스스로 송구스러워 귀가하니라. 치도가 병자로부터 받은 한 냥으로 주효를 장만하여 성국으로 하여금 상제께 올리게 하니라. 그것을 보시고 상제께서 “어찌된 음식이냐”고 물으시기에 성국이 치도의 공양임을 아뢰니라.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돈이 “오늘 저녁에 많이 늘어날 것이었는데 부질없는 짓이라” 하시니 치도가 놀라며 상제의 깊으시고 신성하시고 고명하심에 당황하여 물러가기를 여쭈니 “오늘 저녁부터 병자는 보리밥을 먹이라”고 하심으로 이 사실을 병자에게 전하니 그날 저녁부터 보리밥을 먹기 시작하여 병에 차도를 보고 후에 폐병의 괴로움으로부터 재생되었도다. 이 일로써 상제의 성예는 더욱 더 마을에서 마을에로 퍼졌느니라.
25. 상제께서 정미년 가을 어느 날 신원일과 박공우와 그 외 몇 사람을 데리고 태인 살포정 주막에 오셔서 쉬시는데 갑자기 우뢰와 번개가 크게 일어나 집에 범하려 하기에 상제께서 번개와 우뢰가 일어나는 쪽을 향하여 꾸짖으시니 곧 멈추는지라. 이 때 공우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번개를 부르시며 또 때로는 꾸짖어 물리치기도 하시니 천지조화를 마음대로 하시니 상제시라.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분을 좇을 것이라고 마음에 굳게 다짐하였더니 어느 날 공우에게 말씀하시기를 “만날 사람 만났으니”라는 가사를 아느냐 하시고 “이제부터 네가 때마다 하는 그 식고(食鼓)를 나에게 돌리라” 하시니 공우가 감탄하여 여쭈기를 “평생의 소원이라. 깨달았나이다.” 원래 공우는 동학신도들의 식고와는 달리 “하느님 뵈어지소서”라는 발원의 식고를 하였는데 이제 하시는 말씀이 남의 심경을 통찰하심이며 조화를 임의로 행하심을 볼 때 하느님의 강림이시라고 상제를 지성으로 받들기를 결심하였도다.
26. 상제께서 정미년에 태인 고현리 행단에 이르러 차경석에게
「夫主將之法 務攬英雄之心 賞祿有功 通志於衆 與衆同好靡不成 與衆同惡靡不傾
治國安家得人也 亡國敗家失人也 含氣之類 咸願得其志」
란 글 한 절을 외워주시고 잘 지키기를 바라시면서 수부(首婦)가 들어서야 하느니라고 이르시니라. 경석이 상제를 모시고 돌아와서 그 이종매(姨從妹) 고부인(高夫人)을 천거하니 이날이 동짓달 초 사흣 날이니라.
27. 상제께서 동짓달 스무 여드렛날 정읍 대흥리 차경석의 집에 이르셔서 포정소(布政所)를 정하고 공사를 행하셨도다.
28. 상제께서 어느 날 상량공사(上樑公事)를 보실 때 있는 기운 그대로 풀어버릴 수 밖에 없다 하시고 경석에게 백목(白木)을 가져오게 하고 공사를 행하시다가 백목이 모자라 그로 하여금 백목을 더 가져오게 하고 샹량공사를 마치셨도다.
29. 또 형렬에게 말씀하시기를 “성인의 말은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나니 고대의 자사(子思)는 성인이라. 위후(衛侯)에게 말하기를 약차불이 국무유의(若此不已 國無遺矣)라 하였으되 위후가 그 말을 쓰지 않았으므로 위국(衛國)이 나중에 망하였다” 하셨도다.
30. 상제께서 정미년 섣달 스무 사흘에 신경수를 그의 집에서 찾으시니라 .상제께서 요(堯)의 역상 일월성신 경수인시(歷像 日月星辰 敬授人時)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천지가 일월이 아니면 빈 껍데기요 일월은 지인(知人)이 아니면 허영(虛影)이요. 당요(唐堯)가 일월의 법을 알아내어 백성에게 가르쳤으므로 하늘의 은혜와 땅의 이치가 비로소 인류에게 주어졌나니라” 하셨도다. 이 때 상제께서 일월무사 치만물 강산 유도 수백행(日月無私治萬物 江山有道受百行)을 가르치고 오주를 지어 천지의 진액(津液)이라 이름하시니 그 오주는 이러하도다.
新天地家家長歲 日月日月萬事知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福祿誠敬信 壽命誠敬信 至氣今至願爲大降
明德觀音八陰八陽 至氣今至願爲大降
三界解魔大帝神位 願趁天尊關聖帝君
31. 문공신(文公信)과 박장근, 이화춘. 세 사람은 고부화액을 당하고 상제를 원망하며 불경한 패설을 일삼았도다. 이화춘은 삼월에 의병에게 살되었고 박장근은 의병으로부터 매를 맞고 뼈를 부러뜨렸도다. 상제께서 이 사실을 전해 들으시고 공신에게 마음을 바로잡을 것과 천노가 있음을 알려주시니라. 그리고 상제께서 글을 써서 불사르셔서 이화춘을 귀신으로서 위안하셨도다.
32. 상제께서 김경학의 집에 대학교를 정하시고 “학교는 이 학교가 크니라. 이제 해원시대를 당하였으니 천한 사람에게 먼저 교를 전하리라” 하시고 경학을 시켜 무당 여섯 명을 불러오게 하고 그들의 관건을 벗기고 그들의 각자 앞에 청수를 떠놓고 그것을 향하여 사배를 하게 하고 시천주 세 번을 제각기 따라 읽게 하셨도다. 이것을 끝내고 그들의 이름을 물은 다음에 각자로 하여금 청수를 마시게 하니 이것이 곧 복록이로다. 이것이 해원시대에 접어들어 맨 먼저 천한 사람들에게 교를 전하신 것이었도다.
33. 공우가 어느 날 상제를 찾아 뵈옵고 도통을 베풀어주시기를 청하리라. 상제께서 이 청을 꾸짖고 가라사대 “각 성(姓)의 선령신이 한 명씩 천상 공정에 참여하여 기다리고 있는 중이니 이제 만일 한 사람에게 도통을 베풀면 모든 선령신들이 모여 편벽됨을 힐난하리라. 그러므로 나는 사정을 볼 수 없도다. 도통은 이후 각기 닦은 바에 따라 열리리라” 하셨도다.
34. 또 상제께서 말씀을 계속하시기를 “공자(孔子)는 七十二명만 통예시켰고 석가는 五백명을 통케 하였으나 도통을 얻지 못한 자는 다 원을 품었도다. 나는 마음을 닦은 바에 따라 누구에게나 마음을 밝혀 주리니 상재는 七일이요, 중재는 十四일이요, 하재는 二十一일이면 각기 성도하리니 상등은 만사를 임의로 행하게 되고 중등은 용사에 제한이 있고 하등은 알기만 하고 용사를 뜻대로 못하였으므로 모든 일을 행하지 못하느니라” 하셨도다.
35. 이 말씀을 마치시고 공우에게 “천지의 조화로 풍우를 일으키려면 무한한 공력이 드니 모든 일에 공부하지 않고 아는 법은 없느니라. 정북창(鄭北窓) 같은 재주로도 입산 三일 후에야 천하사를 알았다 하느니라”고 이르셨도다.
36. “모든 일을 있는 말로 만들면 아무리 천지가 부수려고 할지라도 부수지 못할 것이고 없는 말로 꾸미면 부서질 때 여지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도다.
37. 상제께서 차경석의 집에 유숙하시니 종도들이 모여와서 상제를 배알하였도다. 이 자리에서 상제께서 양지 온 장에 사람을 그려서 벽에 붙이고 제사 절차와 같이 설위하고 종도들에게 “그 곳을 향하여 상악천권(上握天權)하고 하습지기(下襲地氣)식으로 사배하면서 마음으로 소원을 심고하라”고 명하시니라. 종도들이 명하신 대로 행한 다음에 상제께서도 친히 그 앞에 서서 식을 마치시고 “너희는 누구에게 심고하였느냐”고 물으시니라. 어느 종도 한 사람이 “상제님께 심고하였나이다”고 말씀을 올리니 상제께서 빙그레 웃으시며 가라사대 “내가 산 제사를 받았으니 이후에까지 미치리라” 하시고 “자리로서는 띠자리가 깨끗하니라”고 일러주셨도다.
38. 상제께서 동곡에 머물고 계실 때 교운을 펴시니라. 종도 아홉 사람을 벌려 앉히고 갑칠에게 푸른 대(竹)나무를 마음대로 잘라 오게 명하셨도다. 갑칠이 잘라 온 대가 모두 열 마디인지라. 그 중 한 마디를 끊고 가라사대 “이 한 마디는 두목이니 두목은 마음먹은 대로 왕래하고 유력할 것이며 남은 아홉 마디는 수교자의 수이니라.” 그리고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하늘에 별이 몇이나 나타났는가” 보라 하셨도다. 갑칠이 바깥에 나갔다 들어오더니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나 복판에 열려서 그 사이에 별 아홉이 반짝입니다”고 아뢰니라. 상제께서 “그것은 수교자의 수에 응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도다.
39. 상제께서 매일 글을 쓰셔서 큰 두루마리를 만들어 형렬. 광찬. 윤근. 경학. 원일에게 명하시니라. “너희들이 창문을 봉하고 안방에 들어가서 방안에 있는 두루마리를 화로에 불사르되 연기가 방안에 가득 차게 하고 다 타거든 문을 열라. 일을 하려면 물불을 가리지 않아야 되니라.” 모두들 말씀에 좇아 그대로 행하였으되 연기 때문에 숨을 쉴 수 없도다. 참지 못해 윤근과 원일이 문 밖으로 뛰어나오고 나머지 종도들은 두루말이가 다 타기를 기다린 연후에 문을 열었도다.
40. 어느 날 상제께서 교운을 굳건히 하시고자 도통에 관한 말씀이 계셨도다. “지난 날에는 도통이 나지 아니 하였으므로 도가에서 도통에 힘을 기울였으나 음해를 이기지 못하여 성사를 이룩하지 못했도다. 금후에는 도통이 나므로 음해하려는 자가 도리어 해를 입으리라”고 하셨도다.
41. 그리고 “내가 도통줄을 대두목에게 보내리라. 도통하는 방법만 일러주면 되려니와 도통 될 때에는 유 불 선의 도통신들이 모두 모여 각자가 심신으로 닦은 바에 따라 도에 통하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어찌 내가 홀로 도통을 맡아 행하리오”라고 상제께서 말씀하셨도다.
42. 상제께서 어느 날 종도들과 함께 계실 때 “나의 일이 초장봉기(楚將蜂起)와 같이 각색이 혼란스럽게 일어나되 다시 진법이 나오게 되리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도다.
43. 상제께서 공사(公事)를 행하신 후부터 부친도 일상생활에서 의존심을 갖지 않도록 하고 또 평소의 허물을 뉘우쳐 앞길을 닦도록 하고 간혹 종도들로부터 물품이나 그 밖의 도움을 받는 것을 일체 금하셨도다.
그런데 하루는 어느 종도가 상제의 본댁이 너무 협착함을 송구히 생각하여 좀 나은 집을 사드렸도다. 상제께서 이것을 아시고 그 종도에게 꾸짖고 “네가 어찌 나의 부친에게 허물을 만들어 드리느뇨. 아직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불효라고 하겠으나 나는 불효의 앞길을 닦아드리려고 내가 항상 형편을 살피고 있으니 너희들이 부친을 도울 생각이 있으면 나의 허락을 얻어 행하라”고 명하셨도다.
44. 상제께서 무신년 四월에 전주에 가셔서 여러 종도들로 하여금 글월을 정서하게 하시리라. 상제의 말씀에 따라 광찬은 김 병욱의 집에 머물면서 상제께서 전하는 글을 일일이 등사하고 형렬은 상제를 따라 용머리 주막에 가서 상제로부터 받은 글월을 광찬에게 전하느니라. 광찬은 그 글월을 정서하여 책을 성편하였도다. 상제의 명대로 책이 성편되니 상제께서 광찬에게 세상에 나아가 그 글을 전함이 가하랴. 광찬이 상제의 존의에 좇을 것을 여쭈니 상제께서 그에게 “경석에게 책 한 권을 주었으니 그 글이 나타나면 세상이 다 알 것이라.” 말씀하시고 성편된 책을 불사르고 동곡으로 떠나셨도다. 책 중에 있는 글이 많았으되 모두 불사르셨기에 전하지 못하였고 한 조각만이 종도의 기억에 의해서 전하는도다.
士之商職也 農之工業也 士之商農之工職業也 其外他商工留所 (疑有闕文)萬物資生羞耻放蕩神道統 春之氣放也 夏之氣蕩也 秋之氣神也 冬之氣道也 統以氣之主張者
也 知心大道術 戊申十二月二十四日
左旋 四三八 天地魍魎主張
九五一 日月竈王主張
二七六 星辰七星主張
運 至氣今至願爲大降
無男女老少兒童咏而歌之
是故永世不忘萬事知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45.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절사를 가르치셨도다. 어느 명절에 이런 일이 있었느니라. 김형렬이 조상의 절사를 준비하였으나 상제의 명을 받고 마련하였던 제수를 상제께 가져갔더니 상제께서 여러 종도들과 함께 잡수시고 가라사대 “이것이 곧 절사이니라” 하셨도다. 또 차경석도 부친의 제사를 준비하였던 바 그 제수를 상제와 여러 종도들과 함께 나눴도다. 이 때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이것이 곧 제사이니라”고 가르치시니라. 이후부터 형렬과 경석은 가절과 제사를 당하면 반드시 상제께 공양을 올렸도다.
46. 류찬명이 어느 날 상제를 모시고 있을 때 상제로부터 요순(堯舜)의 도가 다시 나타나리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전하는도다.
47. 류찬명은 도통이 건감간진손이곤태(乾坎艮震巽離坤兌)에 있으리라는 가르침을 상제로부터 받았느니라. 이 가르침을 받고 그는 큰 소리로 건감간진손이곤태(乾坎艮震巽離坤兌)를 읽고 상제의 앞에서 물러 나왔도다.
48. 최덕겸․김자현․차경석 등의 종도들이 상제와 함께 있을 때 최덕겸이 “천하사는 어떻게 되오리까”고 상제께 묻는지라. 상제께서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를 쓰시면서 “이렇게 되리라” 하시니 옆에 있던 자현이 그것을 해석하는 데에 난색을 표하니 상제께서 다시 그 글자 위에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를 쓰시고 경석을 가리키면서 “이 두 줄은 베짜는 바디와 머리를 빗는 빗과 같으니라”고 일러주셨도다.
49. 상제께서 경석의 집에 계실 때 이런 일이 있었도다. 그의 사촌형이 술에 만취되어 찾아와서 경석에게 수없이 패설하는 데도 그는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기에 더욱 기승하여 횡포를 부리다가 나중에 지쳐서 스스로 돌아가니라. 상제께서 그것을 보시고 경석에게 “너의 기운이 너무 빠졌도다. 덕으로만 처사하기는 어려우니 성(聖) 웅(雄)을 겸하라”고 당부하셨도다.
50. 상제께서 신 경수의 집에 머무르시며 벽 위에 글을 친필로 써 붙이시니 그 글은 이러하도다.
51. 상제께서 무신년 六월 대흥리에 계시면서 공우로 하여금 각처의 종도들을 찾아 순회하게 하여 열하루 동안 매일 새벽에 한 시간씩만 잠에 들도록 하셨도다. 경석이 명을 좇아 여러 날 동안 자지 않았기에 지쳐 바깥에 나갔다가 들어오는 길에 문 앞의 모시밭 가에 이르러 잠에 취하여 혼미에 빠진지라. 이것을 보시고 상제께서“천자(天子)를 도모하는 자는 모두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도다.
52. 상제께서 종도 여덟 사람과 무리들을 모아놓고 교훈 하시니라. 윤경은 상제의 말씀을 좇아 여덟 사람을 집에 모이게 하고 이를 상제께 아뢰이니라 그런데 어떻게 연락하다보니 아홉 사람이 모이게 되니라. 윤경이 상제께 아홉 사람이 모였음을 아뢰이니 상제께서 “무방하다 한 사람을 나의 시종으로 쓰리라.” 말씀하시고 윤경의 집으로 오셨도다. 상제께서 등불을 끄게 하고 한 사람을 택하여 중앙에 세우고 나머지 여덟 사람을 팔방으로 세운 후에 “건 감 간 진 손 이 곤 태(乾坎艮震巽離坤兌) ”를 외우게 하고 자리에 정좌한 종도 二十여명으로 하여금 그것을 따라 외우게 하셨도다. 무리들은 밤이 깊어지매 외우는 것을 고치고 등불을 밝히고 상제의 훈계를 들었도다.
53. 상제께서 그 무리들 중에서 특별히 차 공숙을 뽑아 따로 말씀하셨는데 그는 소경이니라. 상제께서 “너는 통제사(統制使)가 되라. 일 년 三백六十일을 맡았으니 돌아가서 삼백 육십 명을 구하라. 이것이 곧 팔괘(八卦)를 맡기는 공사이니라”고 하셨도다. 공숙은 돌아가서 명을 좇아 새로운 한 사람을 구하여 상제께로 오니 상제께서 그 사람에게 직업을 물으시기에 그가 “농사에만 진력하고 다른 직업은 없사으며 추수 후에 한 번쯤 시장에 출입할 뿐이외다”고 여쭈니 “진실로 그대는 순민이로다”고 칭송하신 뒤에 그를 정좌케 하고 잡념을 금하셨도다. 그리고 상제께서 윤경을 시켜 구름이 어느 곳에 있는지를 알아보게 하시니 그가 바깥에 나갔다 오더니 “하늘이 맑고 오직 상제께서 계신 지붕 위에 돈닢 만한 구름 한 점이 있을 뿐이외다”고 아뢰는지라. 그 말을 듣고 계시던 상제께서 다시 “구름이 어디로 퍼지는 가를 보아라”고 이르시니 윤경이 다시 바깥에 나갔다 오더니 “돈닢 만하던 구름이 벌써 온 하늘을 덮고 북쪽 하늘만 조금 틔어있나이다”라고 여쭈는지라. 상제께서 “그곳이 조금 틔어있다 하여 안될 리가 없으리라”고 말씀하시고 두서너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사람을 보내셨도다.
54. 상제께서 十一월에 대흥리 경석의 집에 계시면서 포덕소(布德所)를 정하는 공사를 보셨도다. 어느 날 상제께서 황극수(皇極數)를 보신 후에 종도들을 모으고 각기 소원을 물으셨도다. 경석은 상제께서 재차 묻는 말씀에 “유방백세(遺芳百歲)를 못하면 유취만년(遺臭萬年)이 한이로다. 열지(裂地)를 원하나이다”고 여쭈니 상제께서 경석에게 “너는 병부가 마땅하니라” 하시니 경석은 불쾌히 여기는지라. 상제께서 “병권은 직신(直臣)이 아니면 맡기지 못하므로 특히 너에게 맡기었노라”고 말씀하셨도다.
55. 그 후에 상제께서 종도들의 지혜를 깊게 하는 일에 골몰하시더니 어느 날 종도들에게 “대학우경(大學右經) 일장을 많이 외우라. 거기에 대운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도다.
56. 어느 날 상제께서 형렬에게 대학에 있는 우경 一장을 외워주시니 그 글은 다음과 같도다.
盖孔子之言而 曾子述之 其餘十章 則曾子之意而門人記之也
舊傳 頗有錯簡 今因 程子所定而更考經文 別有序次如左
57. 또 대학(大學)의 다른 장(章)을 외워주시며 잘 기억하여 두라고 이르셨는데 글귀는 이러하도다.
如有一介臣 斷斷猗 無他技 其心休休焉 其如有容 人之有技 若其有之 人之彦聖 其心好之不啻若自其口出 寔能容之 以保我子孫黎民 尙亦有利哉 人之有技 媢疾以惡之 人之彦聖 而違之卑不通 是不能容 以不能保我子孫黎民 亦曰殆哉
58. 상제께서 어느 날 한가로이 공우와 함께 계시는데 이 때 공우가 옆에 계시는 상제께 “동학주(東學呪)에 강(降)을 받지 못하였나이다”고 여쭈니 “그것은 다 제우강(濟愚降)이고 천강(天降)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도다. 또 “만일 천강을 받은 사람이면 병든 자를 한번만 만져도 낫게 할 것이며 또한 건너보기만 하여도 나을지니라. 천강(天降)은 뒤에 있나니 잘 닦으라”고 일러주셨도다.
59. 하루는 상제께서 종도들을 둘러앉히고 오주(五呪)를 써서 한 사람에게 주어 읽히고 “만 명에게 전하라” 다짐하시고 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그와 같이 다른 사람에게 전하게 하셨도다.
60. 어느 날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오는 잠을 적게 자고 태을주를 많이 읽으라. 그것이 하늘에서 으뜸가는 임금이니라. 오만 년 동안 동리동리 각 학교마다 외우리라” 하셨도다.
61. 어느 날 저녁에 상제께서 약방에서 삼십 육만 신과 운장주를 쓰시고 여러 종도들에게 “이것이 제각기 소리 없이 칠백 번씩 외우라.” 이르셨도다. 그리고 또 상제께서 “날마다 바람이 불다가 그치고 학담으로 넘어가니 사람이 많이 죽을까 염려하여 이제 화둔(火遁)을 묻었노라”고 이르셨도다.
62. 형렬이 명을 좇아 六十四괘를 타점하고 二十四방위를 써서 올렸더니 상제께서 그 종이를 가지고 문밖에 나가셔서 태양을 향하여 불사르시며 말씀하시기를 “나와 같이 지내자” 하시고 형렬을 돌아보며 “나를 잘 믿으면 해인을 가져다 주리라”고 말씀하셨도다.
63. 상제께서 하루는 종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부안 지방 신명을 불러도 응하지 않으므로 사정을 알고자 부득이 그 지방에 가서 보니 원일이 공부할 때에 그 지방신(地方神)들이 호위하여 떠나지 못하였던 까닭이니라. 이런 일을 볼진대 공부함을 어찌 등한히 하겠느냐” 하셨도다.
64. 공우가 삼 년 동안 상제를 모시고 천지공사에 여러 번 수종을 들었는데 공사가 끝날 때마다 그는 “각처의 종도들에게 순회 연포하라”는 부분을 받고 “이 일이 곧 천지의 대순이라”는 말씀을 들었도다.
65. 또 어느 날 상제께서 말씀하시길 “선도(仙道)와 불도(佛道)와 유도(儒道)와 서도(西道)는 세계 각 족속의 문화에 바탕이 되었나니 이제 최수운(崔水雲)을 선도(仙道)의 종장(宗長)으로 진묵(震黙)을 불교(佛敎)의 종장(宗長)으로 주회암(朱晦庵)을 유교(儒敎)의 종장(宗長)으로 이마두(利瑪竇)를 서도(西道)의 종장(宗長)으로 각각 세우노라”고 하셨도다.
66. 상제께서 기유(己酉)년 정월 一일 사시(四時)에 현무경(玄武經) 세 벌을 종필하고 한 벌은 친히 품속에 지니고 한 벌은 도창현(道昌峴)에서 불사르고 나머지 한 벌은 경석의 집에 맡기셨도다.
● 교운(敎運)2장
1. 여흥민씨(驪興閔氏)가 어느 날 하늘로부터 불빛이 밝게 자기에게 비치더니 그 후 잉태하여 한 아기를 낳으니라. 이 아기가 장차 상제의 공사를 뒤이을 도주이시니 때는 을미년 십이월 초 나흘(十二月 四日)이고 성은 조(趙)씨이요, 존휘는 철제(哲濟)이요, 자함은 정보(定普)이시고 존호는 정산(鼎山)이시며 탄강한 곳은 경남함안군 칠서면 회문리(慶南咸安郡漆西面會文里)이도다. 이곳은 대구(大邱)에서 영산 창령 남지에 이르러 천계산 안국산 여항산 삼족산 부봉산으로 연맥되고 도덕골(道德谷)을 옆에 끼고 있는 문동산. 저고산의 아래로 구미산을 안대하고 있는 마을이로다.
2. 도주의 부친은 성함이 조용모(趙鏞模)이고 자함은 순필(順弼)이고 호는 복우(復宇)이며 조부는 홍문관정자(弘文舘正字)로 있다가 을사년의 국운이 기울어감에 통탄한 나머지 피를 토하고 분사하였도다.
3. 아기가 자라니 그 음성이 웅장하고 안광이 부시어 범의 눈초리와 같고 목은 학의 목과 같고 등은 거북의 등과 같고 이마가 해나 달과 같이 빛이 나서 관상을 남달리 하셨도다.
4. 도주께서 기유년(十五歲時) 四월 二十八일에 부친과 함께 고국을 떠나 이국 땅인 만주에 가셨도다.
5. 도주께서는 경술년에 어린 몸으로 나라에 충성하는 마음에서 일본 군병과 말다툼을 하셨으며 이듬해 청조(淸朝 말기에 조직된 보황당(保皇黨)원이란 혐의를 받고 북경(北京)에 압송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난 엄친의 파란 곡절의 생애에 가슴을 태우고 고국만이 아니라 동양 천지가 소용돌이치는 속에서 구세 제민의 큰 뜻을 가슴에 품고 입산 공부에 진력하셨도다.
6. 도주께서 九년의 공부 끝인 정사년에 상제의 삼계 삼계대순(三界大巡)의 진리를 감오(感悟)하시도다.
7. 도주께서 어느 날 공부실에서 공부에 진력을 다하시던 중 한 신인이 나타나 글이 쓰인 종이를 보이며 “이것을 외우면 구세제민(救世濟民) 하리라”고 말씀하시기에 도주께서 예(禮)를 갖추려 하시니 그 신인은 보이지 않았으되 그 글은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지기금지 원위대강(侍天呪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至氣今至願爲大降)’이었도다.
8. 그 후에 도주께서 공부실을 정결히 하고 정화수 한 그릇을 받들고 밤낮으로 그 주문을 송독하셨도다. 그러던 어느 날 “왜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느냐. 태인에 가서 나를 찾으라”는 명을 받으시니 이 때 도주께서 이국땅 만주 봉천에 계셨도다.
9. 그리하여 도주께서 정사년 四월에 친계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를 떠나 뱃길로 태인으로 향하셨던 바 도중에 폭풍을 만나 배는 서산 태안에 닿으니라. 이곳을 두루 다니면서 살폈으되 상제께서 가르치신 곳이 아닌 듯하여 안면도(安眠島)에 옮기셨도다. 도주님을 반가이 맞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이곳 창기리(創基里)의 이정률(李正律)이었도다. 도주께서 이 섬의 정당리(正當里) 느락골에 우일재(宇一齋)를 마련하고 이곳에서 공부를 하셨도다. 섬사람 삼십여명이 도주를 좇으니 그 중에서 이정률(李正律)이 지극히 따랐도다.
10. 도주께서 무오년 가을에 재실에서 공부하실 때 상제께 치성을 올리신 다음에 이 정률외 두 사람을 앞세우고 원평을 거쳐 구릿골 약방에 이르셨도다. 이 길은 상제께서 九년 동안 이룩하신 공사를 밟으신 것이고 “김제 원평에 가라”는 명에 좇는 것이라 하시도다.
11. 이 해 시월에 도주께서 권태로(權泰魯) 외 몇 사람을 이끄시고 모악산의 대원사에 이르시니라. 이 때에 도주께서 “개벽후 후천(後天) 五만년의 도수를 나는 펴고 너는 득도하니 그 아니 좋을시고”라 하시고 이정률에게 원평 황새마을에 집을 구하여 가족들을 그곳에 이사 거주하게 하고 자신은 대원사에 몇 달 동안 머무셨도다.
12. 이정률이 집을 구하려고 황새마을에 이르러 마을 사람 권씨를 만나니 그가 “간 밤에 꿈을 꿔 사람이 오기를 기다린다”고 하면서 자기집에 이사 거주하기를 간청하면서 정률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안면도에 건너가 가족들을 모셔오니 권씨는 모든 것에 불편 없게 지성껏 보살폈도다.
13. 도주께서 다음에 정월 보름에 이치복(호․석성)을 앞세우고 정읍 마동(馬洞) 김기부의 집에 이르러 대사모님과 상제님 누이동생 선돌부인과 따님 순임(舜任)을 만나셨도다. 선돌부인은 특히 반겨 맞아들이면서 “상제께서 재세시에 늘 을미생이 정월 보름에 찾을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음을 아뢰이니라. 부인은 봉서(封書)를 도주께 내어드리면서 “이제 내가 맡은 바를 다 하였도다” 하며 안심하는도다. 도주께서 그것을 받으시고 이곳에 보름동안 머무시다가 황새마을에 오셨도다.
14. 선돌부인은 하루는 “구릿골 약방에 비치하셨던 둔궤가 천지도수의 조화 둔궤라 하루 바삐 그것을 찾도록 함이 어떠하겠나이까”라고 도주께 아뢰니라. 이 때에 도주께서는 도수에 따라 이준세(李俊世)의 재실에서 도수를 보고 계셨도다. 이곳은 황새마을에 가까운 통사동(通士洞)이니라.
15. 도주께서 칠월 보름에 이우형(李右衡)을 앞세우고 금산사에 다녀오시니라. 권태로. 이상우. 박붕래(朴朋來)와 여러 무리들의 앞에서 “오늘 백종일(百種日)이니 인간 백종의 허물을 청산하는 날이니라. 인숙무죄(人孰無罪)요. 개과하면 족하리라”고 분부하시니 그들이 모두 자기의 허물을 개과하기에 힘쓰니라.
16. 도주께서 기미년 九월에 들어서서 정읍대흥리차경석(井邑大興理車京石)의 보천교 본부에 둔(遁)궤를 가져다 둔 것을 확인하시고 그것을 재실로 옮기고자 하셨도다.
17. 조용의(趙鏞懿)와 권태로(權泰魯). 권영문(權寧文). 이정두(李正斗). 김사일(金士一). 박붕래 외 두 명이 대흥리로 가니라. 이들이 보천교 본부에 당도하니 九월 四일 새벽 한 시경이 되니라. 본부의 사람들이 모두 깊이 잠이 든 때인지라. 그들이 한방에 들어가 병풍으로 가리어 놓은 둔궤와 약장을 찾아 가지고 나왔으나 약장만은 도중에 놓고 왔기에 옮겨지지 못하였도다.
18. 도주께서 통사동(通士洞) 재실에서 어느 날 “오도자 금불문 고불문지도야(吾道者 今不聞 古不聞之道也)라 믿고 닦기가 어려우니라” 하시고 다시 추종하는 여러 사람들을 앞에 모으고 무극대운(无極大運)의 해원(解寃) 상생(相生) 대도(大道)의 진리를 설법하시어 도(道)를 밝혀주셨도다.
19. 도주께서 이상우를 데리고 부안(扶安) 변산(邊山) 굴 바위에 이르러 이곳에서 공부하시면서 상제의 대순하신 진리를 사람들에게 설법하시니라. 이에 따르고자 하는 무리 이백이 넘었도다.
20. 도주에서 경신년에 재실에서 밤낮으로 불면 불식하면서 공부하시던 중 이월 열 이레에 둔궤가 봉안된 곳에서 벼락소리가 나더니 둔궤가 저절로 열려져 있었도다. 그 속에 호피 한장과 반쯤 핀 국화 한 송이가 그려있고 양피(羊血) 스무넉 점이 궤에 찍혀있고 오강록(烏江錄) 팔문둔갑 설문(舌門)이란 글자가 궤에 쓰여 있었도다. 그 후 둔궤는 도주께서 함안 반구정(伴鷗亭)에서 공부하실 때 그곳에 옮겨졌도다. 그러나 당시 심복자이던 창원 사람 조주일(曺周一)이 둔궤를 훔쳐 갔는데 훗날에 종도들이 이를 알고 매우 안타까워하니 도주께서 “그 시기의 도수에 쓰였으면 족하리라. 둔궤의 둔자는 도망 둔자이도다”고 그들에게 이르셨도다.
21. 종도들에게 칠성경을 외우게 하시고 도주께서 대원사에 들어가셔서 백일 도수를 마치셨도다. 마치신 날이 마로 신유년 칠월 칠석날이라, 그 때에야 종도들이 칠성경을 외운 뜻을 깨달으니라. 그들을 보시고 도주께서 “이곳이 바로 상제께서 천지신명을 심판한 곳이니라. 아직 응기하여 있는 것을 내가 풀었노라”고 말씀하셨도다.
22. 신유년 九월 五일에 권태로와 그 외 네 사람이 도주의 분부를 받고 구릿골에서 통사동 재실로 상제의 성골을 모시고 돌아오니라. 이 때 갑자기 뇌성이 일고 번개가 번쩍였도다.
23. 성골이 옮겨진 후 십 오일이 되니 상제께서 구세 제민 하시고자 강세하신 날이 되니라. 이날 재실에 모여 치성을 올린 후에 도주께서 “시시묵송 공산리 야야한청 잠실중 분명조화 성공일 요순우왕 일체동(時時黙誦 空山裡 夜夜閑聽 潛室中 分明造化 成功日 堯舜禹王 一切同)이라” 말씀하셨도다. 그러나 듣고 있던 사람들은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하느니라. 그들 속에 권태로. 이상우. 이우형이 끼어 있었도다. 이들은 재실에서 매일 밤낮으로 치성을 올리고 공부하시는 도주의 시종을 들었도다.
24. 도주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 나니라. 이 좇는 무리들에게 도주께서 말씀하시길 “임술년 섣달에 이르면 납월도수에 북현무도수(北玄武度數)가 닥쳐서 금전이 아니면 일이 풀리지 않을 것이라” 하시고 소액의 금품을 남겨 놓으셨도다. 좇던 무리 중 한 사람이 문공신(文公信)과 합세하여 야밤에 재실에 침입하여 난동을 부린 끝에 상제의 성골과 약간의 금품을 훔쳐가니 섣달그믐 새벽 두시였도다.
25. 도주께서 계해년 정월에 함안 회문리에 순회하고 그 곳에 잠시 머무시다가 밀양(密陽) 종남산(終南山) 세천동(洗川洞) 김병문(金炳文)의 집에 가셨도다. 이 때 배문걸이 도주를 모시고 따르니라. 그 곳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많은 종이에 글을 쓰셔서 둔도수라 하시고 석 달 동안 행하셨는데 그 종이가 심한 바람에도 날리지 않았도다.
26. 도주께서 그 후 주선원(周旋元)과 주선원보(周旋元補)란 두 직책을 마련하고 전교의 임무를 담당하게 하셨도다. 이 해 六월 치성일 전날에 밀양의 이우형 김용국 최창근 안병문. 그리고 부산의 박민곤과 안동의 권태로와 의성의 조원규와 예천의 이종창. 신용흠 그리고 봉화의 박붕래. 김천의 김규옥과 풍기의 조진명과 청도의 장득원 외 여러 사람들이 회문리에 모인 자리에서 도주께서 “근년이 이재신원(利在新元) 계해년이라”고 말씀을 마치고 전교를 내리시니라.
傳 敎
七閏十九歲爲章二十七章是會當
接 間一年置閏則有餘日 間二年置閏則日不足 及至十九年 置七閏則無餘不足故 以十九年爲一章 二十七章爲一會凡五百十三年也孟子所謂五百年必有王者 興者此也三會爲統 三統爲元 循環往復互無彊
接 一會各五百十三年則 三會合一千五百三十九年也 一統各一千五百三十九年 則 三統合四千六百十七年是爲一元
四天六百十七年前丁巳軒轅立極肇斯元
接 黃帝距今四千六百十七年前丁巳(上元甲前計算)
萬像萬事皆有是 諸法諸書總此源
接 天文地理人事 皆黃帝之所始敎而 史記記年亦自黃帝始也
傳囂頊嚳勛華禹 初統初會世世聖
接 自黃帝至於舜禹畧五百年矣 初統初會者以黃帝爲始則 以黃帝元年計 以至於 舜禹五百十三年者也
日出萬暈同發明 春回品物共華盛 初統之中降中季 聖不承承但一時
接 初統者黃帝以後 凡一千五百三十九年之謂而 五百十三年以後則初統之中會 也 一千二十六年以後則爲初統之季會也
禹後有湯湯後文 一會一聖應會期 中統由來世漸降 聖不道行但敎傳
接 中統者黃帝卽位 後千五百三十九年以後爲仲統也
釋後有孔孔後耶一會一敎各門筵
接 釋迦如來距今二千九百五十年(癸亥年計)癸丑生 孔子距今二千四百七十四年 庚戌 生 耶蘇距令一千九百二十三年辛酉生
季統敎亦無慨聖 惟有術述聖斷啓來
接 季統者黃帝卽位 後三千七十八年以後之季統也 距今一千五百年前六朝及新 羅之時 佛道中興 其後五百年距今略一千年前大宋之時濂洛諸賢一時傳道 其 後五百年以後 羅馬法王以耶蘇敎爲西洋之盟主 佛梁儒宋耶羅馬 一敎一昌應 會回
27. 도주께서 청도유천(淸道楡川)의 박동락(朴東洛)의 집에서 단도수를 행하시니 이것이 곧 진인 보두법(眞人步斗法)이니라. 이 때 배 문걸이 시종을 들었도다.
28. 계해년 九월에 이를 마치시고 도주께서는 十月부터 다음에 二月 중순까지 청도의 적천사(磧川寺) 도솔암에 있는 칠성각 뒤에 돌단을 높이 쌓고 二十四방위를 정하고 천지신명을 응기케 하고 공부시간은 저녁 일곱시부터 다음날 아침 여섯시로 정하여 일분 일초도 어김없이 넉 달 동안 계속하셨는데 낮에는 공부 행하실 때 쓰실 글을 많이 쓰셨도다. 이 때에 공부는 단도수라 하셨으며 시종한 사람은 배문걸. 이우형. 박민곤이니라.
29. 날로 도주를 흠모하는 수가 늘어나므로 태인에 갑자년 四월에 도장이 마련되었도다. 도주께서 밀양 종남산 세천에서 보시던 둔도수를 미치고 도장에 돌아와 치성을 올리시니라. 치성을 끝내고 칼을 자루에서 뽑아들고 六정신을 외우시면서 보두법을 행하고 종남산 세천에서 공부할 때 써놓았던 여러 글종이를 불사르셨도다.
30. 갑자년 여름에 도주께서 배 문걸을 데리고 밀양 종남산 영성정(靈聖亭)에 이르러 폐백도수(幣帛度數)를 밤 열시부터 다음날 아침 여섯시까지 다섯 달 계속하시고 다시 함안 반구정으로 옮겨 마치셨도다.
31. 갑자년 十一월 태인 도장에 가셔서 “庚은 변경지이시(變更之伊始)하고 申은 신명지의당(神明之宜當)이라 천어사어경신(天於斯於庚申)하고, 지어사어경신(地於斯於庚申)이라. 만물종어경신(萬物終於庚申)하고, 아역여시경신(我亦如是庚申)이라”고 밀양의 이우형. 김용국. 박 민곤 안동의 권태로. 청송의 조호규. 의성의 김장회. 봉화의 박붕래. 김천의 김규석등에 말씀하셨도다.
32. 을축년에 구태인(舊泰仁) 도창현(道昌峴)에 도장이 이룩되니 이 때 도주께서 무극도(无極道)를 창도하시고 상제를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上帝)로 봉안하고 종지(宗旨)및 신조(信條)와 목적(目的)을 정하셨도다.
宗旨(종지)
陰陽合德(음양합덕) 神人調化(신인조화) 解冤相生(해원상생) 道通眞境(도통진경)
信條(신조)
四綱領(사강령) ... 安心(안심). 安身(안신). 敬天(경천). 修道(수도)
三要諦(삼요체) ... 誠(성). 敬(경). 信(신)
目的(목적)
無自欺(무자기) 精神開闢(정신개벽)
地上 神仙 實現(지상신선실현) 人間改造(인간개조)
地上 天國 建設(지상천국건설) 世界開闢(세계개벽)
33. 도주께서 이 해에 각도문을 말씀하시니라.
覺道文
夫聖人之經典不求文章之色彩而求其眞理眞人之心求其實而不求外飾求其物之事理則求其天然而不求造作也故聖人明心達道而不求聞達書不求文章之色彩衣不求綾羅也求於文章者聖人之心法難得求好外飾者聖人之眞實難得大哉聖人之道德 元亨利貞大經大法道正天地數定千法而理定心法正大光明仙佛儒大道正通是以天命代語先後天道理氣生大矣至矣聖矣惟我奉敎後學以光大道以承大德以弘大業淸華五萬年龍華仙境一一同躋之地千萬幸甚焉
34. 봄 어느 날 도주께서 부안 변산(邊山)에 가셔서 육정(六丁) 신장을 불러 응기하시니 뇌성벽력이 크게 일고 산천이 진동하는 듯 하였도다.
35. 이 때부터 도주께서는 토지를 해원하고 제민(濟民)하고자 안면도와 원산도(元山島) 두 섬에 간사지(干潟地)를 개척하기 시작하셨도다. 신도들로 구성된 진업단(進業團)과 헌금 二만원과 구태인 일대의 개간지에서 얻어진 곡물 삼백 석이 동원 투입되었도다. 그러나 두 섬의 네 곳에서 뜻을 이룩하고자 하셨으되 심한 풍랑으로 두 곳은 뜻을 이룩하지 못하고 그 후 일본(日本) 마상회사(馬上會社)가 성과를 거두게 되었도다. 안면도의 이십만 평의 농지와 원산도의 염전(鹽田)은 두 곳의 여러 마을 사람을 구제할 수 있었도다. 도주께서 제민 사업을 돕는 한편 안면도 창기리에 있는 홍일우(洪一宇)에서 공부를 하셨도다. 이 때에 서산읍의 사람 이동만(李東萬)이 도주를 가까이 모셨도다.
36. 개척의 제민 사업으로 안면도에 와 계신 도주를 이정률이 돌보고 그의 아들이 심부름을 하였다. 어느 날 밤에 도주께서 그 아들에게 가지고 계시던 큰 칼을 숨겨두라고 이르셨도다. 그러나 그 아들은 칼이 무거워서 옮기지 못하여 그 사연을 도주께 아뢰니 “네 마음으로 숨겨보라”고 다시 이르시니 아들이 마음속으로 뒤뜰 대밭에 숨길까 생각하고 있는 순간에 칼이 없어졌도다. 이튿날 창기리 촌장이 경관을 데리고 도주가 머물고 있는 방을 샅샅이 뒤지다가 경관이 큰 칼의 향방을 도주께 물으니라. 이것은 그들이 도주를 요술쟁이로 안 까닭이나 증거를 잡지 못하고 돌아가니라. 도중에서 경관이 그 아들을 보고 “무엇을 하느냐”고 물으니 그 아이가 “몸을 위해 해변에 수양하러 왔노라”고 대답하니라. 이들이 돌아간 후에 그 아이는 도주께 “저도 모르게 그런 대답이 나왔나이다”고 아뢰었도다. 이에 도주께서 아무 말씀이 없으셨으며 큰 칼은 대밭에 있었도다.
37. 얼마 후 그 촌장이 급히 도주를 찾아와서 지난 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들이 죽게 되어 살려주기를 애원하는지라. 도주는 시종하는 아이와 함께 그 집으로 가셔서 병자실에 아이를 들여보내니 아이는 그 방에 들어서자 병자의 머리맡에 갑옷을 입은 무장이 칼을 뽑아들고 서있는 것을 보고 나와서 그 사정을 아뢰니 이 말을 들으시고 아무 말씀 없이 병자실에 들렀다 나오셔서 거처에 돌아오셨도다. 다음 날에 촌장이 황급하게 도주를 찾더니 “아들이 죽었으니 어찌 하오리까”고 물으니 도주는 그를 앞세우고 시체실에 드시어 자신의 손가락을 죽은 자의 가슴에 대이니 죽었던 자가 깨어 가족들을 돌아보고 “나는 한명이 되어가니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고 말하니라. 이 때 도주께서 손가락을 몸에서 떼시니 병자는 그제야 숨을 거두었도다.
38. 도주께서 병인년 봄 어느 날 공부를 마치고 담뱃대 도수라고 하시면서 담뱃대의 담배통과 물부리에 크고 작은 태극을 그려 여러 개를 만들어 여러 종도들에게 등급별로 나눠 주시고 일반 신도들에게는 제각기 설대에 태극을 그려 넣게 하셨도다.
39. 여름에 도주께서 태인과 서울 도염동에 오르내리시다가 겨울에 태인에 머무셨도다. 서울에서의 공부는 그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았도다.
40. 도주께서 태인에 계시다가 정묘년 九월부터 배문걸을 데리고 통사동의 재실에 가셔서 주(籌)를 놓는 공부를 석 달 동안 보시고 그 후에도 계속하셨도다. 주의 판을 오동목으로 숫가지를 대나무 조각으로 하셨도다. 숫가지 놓는 소리가 그치지 아니하고 숫가지가 이리 저리로 옮겨질 때마다 불빛이 번쩍이었도다. 무진년에 포유문이 선포되었느니라.
41. 무진년에 포유문이 선포되었느니라.
布喩文
曰人生處世惟何所欲 惟名惟榮曰名曰榮 人所共欲而求之難得是何故也 都是無也未如捷經 捷經非他求也 吾之所求有無量至寶 至寶卽吾之心靈也 心靈通則鬼神可與酬葃 萬物可與俱序 惟吾至寶之心靈無路可通汨沒無形之中一世虛過 幸於此世有無量之大道 正吾之心氣立 吾之義理求 吾之心靈任上帝之任意 洋洋上帝在上 浩浩道主奉命 明明度數無私至公引導乎
無量極樂五萬年淸華之世 肅我道友嚴我道友 極誠極敬至信至德 難求之欲虛過一世之寃至于 斯而豈不解寃哉 喜吾道友 勖哉 勉哉
42.. 또 당시에 奉祝呪, 眞法呪, 二十八宿呪, 二十四節呪, 心經道通呪, 七星呪, 願戴呪, 觀音呪, 解魔呪, 伏魔呪, 陰陽經, 運合呪, 開闢呪, 玉樞統, 太極呪, 明耳呪, 五方呪 . 五臟呪 九靈三精呪, 曳鼓呪 등이 주문으로 쓰였으나 대부분이 전하지 않고 몇 주문만이 전하여 오니라.
二十八宿呪
星宿下鄧禹馬成吳漢王梁賈復陳俊耿弇杜茂寇恂傅俊岑彭堅鐔馮異王覇朱佑任光祭遵李忠景丹萬修篕延邳肜銚期劉植耿純藏宮馬武劉隆給口急口急如律令
二十四節呪
候下長孫無忌孝恭杜如晦魏徵房玄齡高士廉蔚遲敬德李靖蕭瑀段志賢劉弘基屈突通殷開山柴紹長孫順德張亮候君集張公謹政知節虞世南劉政會唐儉李世勣秦叔寶口急口急如律令
陰陽經
乾定坤順乾陽坤陰日行月行日陽月陰有神有人神陰人陽有雄有雌雌陰雄陽有內有外內陰外陽有右有左左陰右陽有隱有顯隱陰顯陽有前有後前陽後陰天地之事皆是陰陽中有成萬物之理皆是陰陽中有遂天地以陰陽成變化神人以陰陽成造化天無地化無布於其下地無天功無成於其上天地化而萬物暢天地安而萬象具神無人後無托而所依人無神前無導而所依神人和而萬事成神人合而百工成神明竢人人竢神明陰陽相合神人相通然後天道成而地道成神事成而人事成而神事成神明神明天地諸神明下鑑垂察奉命身太一聖哲所願成就
運合呪
元亨利貞天地之道 仁義禮智人神之道 乾坎艮巽坤离兌震八位之精 東西南北四位之精 周千三百六十五度四分度之一轉換之度 甲乙丙丁戊己庚申壬癸天十之精 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地十二之精 金木水火土五行之精 靑紅黃白黑五色之精 宮商角藢羽五音之精
開闢呪
天上玉京天尊神將天上玉京太乙神將玉京玉樞守門將軍上下局雷聲霹將軍白馬元 帥大將軍雷聲霹惡將軍惡鬼禁亂將軍三首三界都元帥地神霹大將軍天動地動陰陽霹大將軍左部關元帥右部馬元帥天地造化風雲神將陰陽五行奇門神將六丁六甲甲神將太極斗八門神將山上將軍多神軍百將軍龍鬼神將千萬惡鬼節神將神將法
八萬四千諸大神將感我微誠助我宇一大運大事改改降臨降臨侍衛我奉命身大運大命太一聖哲常隨不離大道通大位定與天地合與陰陽合與五行合通天地通萬古通五方通四海四海應身力拔山岳威振乾坤天地道通天地造化無窮不息進退有法吾奉九天上世君勅速勅速唵唵口急口急如律令
玉樞統
天文地戶玉樞大判上帝出座萬神擧令左右劍戟前後旗幟風雨大作日月晦冥霹靂省震山水崩潰天轉地轉陰陽變化海印造化無窮無極無山退海移野崩陵殺氣消滅惡物自死神急人忙不分晝夜北斗樞西斗樞南斗樞東斗樞中斗樞轉環東岳柱西岳柱南岳柱北岳柱中岳柱改立東海門西海門南海門北海門開闢金元氣水元氣木元氣火元氣土元氣改定急如雷火疾如直矢億兆蒼生手下生活天地人大判決大事定位陰陽五行順平定位萬物群生各各定位天地復定日月更明山通水遠淸明世界和順世界萬理新制建哲極于中五廣濟化四極大定永定五萬年淸化之世唵唵口急口急如律令
明耳呪
天地昇光地曠昇日月曠開呪聞呪耳曠耳邊有聲速通人義唵唵口急口急如律令
五方呪
謹請東方工曹太沖天罡靑帝將軍南方太乙勝光小吉赤帝將軍西方傳送從魁河魁白帝將軍北方登明神后大吉黑帝將軍中央黃帝將軍降我局所侍吾主人太一聖吾奉三淸眞王口急口急如律令
五臟呪
天尊曰木肝中靑氣氣從左便重出化爲火心中赤氣氣從前面重出化爲金肺中白氣氣從右便重出化爲水賢中黑氣氣從背上重出化爲土脾中黃氣氣從額上重出化爲百節氣從千脈貫通百事如意萬事如意天上天下地上地下人間萬事無不通則口急口急如律令
九靈三精呪
天有貪狼巨文祿存文曲廉貞武曲破軍左輔右弼九星人有天生武靈玄珠定中孑丹雷雷丹元太靈靈童九靈天有虛精六旬曲生三台人有太光爽靈幽精三精天人爲一星靈不移相隨人間守護吾身上照下應道氣團圓延命長生福祿無邊與天同德與日同明與時順序與物會合江山不老九州淵源上天入地無不通明觀形제色無不通知遠報近報禍福影應如谷有聲如形隨影我兮神兮感應感應一如所願吾奉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玉淸眞王律令
43. 도주께서 기유년부터 신사년에 이르기까지 도수에 의한 공부와 포교에 힘을 다하시니 신도의 무리가 이곳 저곳에서 일어나니라. 그러나 일본이 이차 대전을 일으키고 종교단체 해산령을 내리니 도주는 전국 각지의 종도들을 모으고 인덕도수와 잠복도수를 말씀하시며 “그대들은 포덕하여 제민하였도다. 각자는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 처자를 공양하되 찾을 날을 기다리라.” 이 선포 후에 도장은 일본 총독부에 기증되니 도주께서는 고향인 회문리로 돌아가셨도다.
44. 도주께서는 고향에서 말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도수에 의한 공부를 계속하셨고 종도 몇 사람이 왜경의 눈을 피하면서 도주를 도우니라. 도주께서는 회문리(會文里)에 마련된 정사 회룡재(廻龍齋)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 두루 다니시면서 수행하셨도다.
45. 경상도 이용직(李容稷)이 한 다리가 불구인 몸으로 회룡재에 와서 도주를 돌보았으니 그는 문경에서 회룡재에 왕래할 때 거지노릇을 하면서 밤길을 이용하여 출입하였도다. 도주는 하루 그를 보고 “그대의 불구가 나의 공사를 돕는도다”고 말씀하고 웃으셨도다.
46. 이용직이 을유년 七월 이튿날 회룡재를 찾고 초나흗날에 떠나려고 도주를 뵈옵더니 도주께서 며칠 더 묵어 가라고 만류하시니라. 그가 초 여샛 날에 다시 떠나려고 하니 도주께서 “오늘 무슨 큰 일이 일어나고 도수가 바꿔지리라”고 말씀을 하시니 이용직은 그 까닭을 의심하니라. 다시 도주께서 “이제 두려워 말라. 다녀 오도록 하라”고 이르시고 그를 떠나 보내니 일본이 망하고 해방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도다.
47. 도주께서 기축년 겨울에 동래 마하사(摩訶寺)의 방 한 칸에서 정화수 스물 네 그릇을 받들고 사십 구일을 한 도수로 정하시고 공부를 하셨도다. 이광석(李光石)이 대웅전에서 도주를 위해 발원 염불을 올리니라. 사십 구일이 거의 될 무렵에 도주께서 승녀와 시종자에게 “법당의 불상을 자세히 보았느냐”고 물으시므로 그들이 달려가 보니 불상이 머리를 숙이고 있는도다. 도주께서 사십 구일을 다 채우신 새벽에 공부실 위에 학이 울며 날아가고 시종자에게 그 동안 모아놓은 글씨 종이를 태우고 그 재를 시냇물에 띄우라고 이르시므로 시종자가 그대로 하니 시냇물에 무지개가 서는도다.
48. 도주께서 마하사에서 도수를 마치고 도장에 돌아오시니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느니라. 도주께서 그 자리에서,
少年才氣拔天摩
手把龍泉幾歲磨
世界有而此山出
紀運金天藏物華
應須祖宗太昊伏
道人何事多佛歌
의 상제님의 글귀를 외우시고 “상제께서 짜 놓으신 도수를 내가 풀어나가노라”고 말씀하셨도다.
49. 박한경(朴漢慶)이 도주의 부르심을 받고 청주의 근방에 있는 청천면 화양동의 만동묘(萬東廟)를 찾으니 건물은 왜정 때에 없어지고 빈터만 남아있는 사정을 도주께 아뢰었도다. 또 그는 도주의 분부를 좇아 류한규(柳漢珪)를 데리고 화양동에 가서 도주께서 거처하실 곳을 마련하고 기다렸으되 다음 기회에 미루신 소식을 듣고 되돌아왔도다. 신묘년 삼월에 있었던 일이니라.
50. 갑오년 삼월에 도주께서 안상익(安商翊) 외 네 명을 대동하고 청천에 가셔서 황극신(皇極神)이 봉안되어 있는 만동묘 유지(遺趾)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오셨는데 돌아서실 때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밤중에 폭풍과 뇌성 벽력이 크게 일어 산악이 무너지는 듯하니라. 다음날에 숭정 황제 어필(崇禎皇帝御筆)의 비례 부동(非禮不動)이 새겨 있는 첨성대 아래쪽 암벽의 좌편에 닫혀있던 석문(石門)이 두 쪽으로 갈라져 내리고 그 안의 옥조빙호(玉藻氷壺)의 네 자와 만력어필(萬曆御筆)의 네 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전하였느니라.
51. 부산(釜山) 대신동(大新洞)의 산비탈 판자촌에 큰 불이 갑오년 삼월에 일어나니라. 그 불길이 강한 동남풍을 타고 보수동 도장을 향해 번져오므로 사람들이 당황하기 시작하니라. 이 때 오치국. 박봉상이 이를 도주께 아뢰니 듣고 계시다가 문을 열고 대신동 쪽을 바라보셨도다. 거세던 동남풍이 누그러지고 서풍이 일더니 불이 꺼지는도다.
52. 이해 봄 어느 날 도주께서 보수동 산정에서의 공부를 멈추고 대청에 나오셔서 “앞으로 신도들의 동(動)이 두 번 있으리라”고 말씀하시고 그 주변에 사는 신도들의 사정을 물으셨도다. 이 때 박한경. 오치국. 임규오. 박중하. 박봉상. 이인호 등이 시좌하였도다.
53. 도주께서 갑오년 가을에 박한경에게 사략(史略) 상하권(上下卷)과 사서삼경(四書三經)의 구판을 구하게 하시므로 이 때에 통감(痛鑑) 소학(小學)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시전(詩傳). 서전(書傳). 중용(中庸). 주역(周易)의 구판을 구하여 올렸더니 이 책들은 그 후에 도장에 비치되었도다.
54. 도주께서 다음 달에 박한경(朴漢慶)과 김용화(金容和). 김해구(金海九). 오치국(吳治國). 류철규(柳喆珪). 이윤섭(李允燮). 류한규(柳漢珪). 김영하(金永河). 오영식(吳永植) 등을 데리시고 해인사(海印寺) 경내에 있는 관음전(觀音殿)이자 심검당(尋劒堂) 뒤편의 다로경권(茶爐經卷)에서 사흘 동안 공부를 하셨도다. 그러나 공부에 관한 말씀은 없으시고 “사명당(四溟堂)의 입적실에 가서 불공이나 드리고 가리라” 말씀하시니 박한경과 그 외 세 사람이 먼저 그 곳을 돌아보고 와서 가시기를 청하니 “너희들이 다녀왔으면 되었다”고 말씀하시고 근처에 있는 백련암과 그 외 여러 암자를 돌아보시고 길에 오르셨도다.
55. 도주께서 해인사에서 돌아오신 다음 날에 여러 종도들을 모아놓고 “상제께서 해인을 인패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여 어떤 물체로 생각함은 그릇된 생각이니라. 해인은 먼저 있지 않고 자기 장중(掌中)에 있느니라.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이치의 근원이 바다에 있으므로 해인이요. 해도진인(海島眞人)이란 말이 있느니라. 바닷물을 보라. 전부 전기이니라. 물은 흘러 내려가나 오르는 성품을 갖고 있느니라. 삼라만상의 근원이 수기를 흡수하여 생장하느니라. 하늘은 삼십 육천(三十六天)이 있어 상제께서 통솔하시며 전기를 맡으셔서 천지 만물을 지배 자양하시니 뇌성 보화 천존 상제(雷聲普化天尊上帝)이시니라. 천상의 전기가 바닷물에 있었으니 바닷물의 전기로써 만물을 포장하느니라”고 말씀하셨도다.
56. 어느 날 시종자들이 도주를 뵈옵고 조수(潮水) 이치를 알고자 물으니 도주께서
“바다의 조석(潮汐) 이치는 음이다. 一매부터 五매까지는 동몽(童蒙)이요 六매는 성년(成年)이요 六매가 한 사리이요 十五일은 六매 한 사리이고 十六일 二사리이고 十七일은 三사리이고 十八일은 四사리이고 十九일은 五사리이며 二十일은 六사리이며 곧 六격기이니라. 二十一일은 소격기이고 二十二 22일은 호(湖)이며 二十三일은 조금이고 二十四일은 무시이니라. 五일은 一매이고 二十六일은 二매이며 二十七일은 三매이고 二十八일은 四매이고 二十九일은 五매이며 三十일은 六매 한 사리이니라”고 알려주시고 또 “이십구일의 작은 달에서는 그믐날의 아침의 조와 저녁의 석을 계산하느니라. 말하자면 아침의 조를 五매로 저녁의 석을 六매로 계산하여 그믐날 하루를 두 사리로 계산하는도다”고 일러주셨도다.
57. 병신년 三월에 박한경은 도주의 분부를 좇아 류철규. 박종순과 함께 정하신 바에 따라 공주 동학사(東鶴寺)에 이르렀도다. 이 절의 경내에 동계사(東雞祠) 삼은각(三隱閣)과 단종왕의 숙모전(肅慕殿)이 있고 생육신과 사육신을 추배한 동묘 서묘가 있으니 신라 고려 조선의 삼대 충의 지사를 초혼한 곳이로다. 이곳의 관리자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朴彭年)의 후손이고 정기적으로 청주에서 내왕하면서 관리하고 있었도다. 그러므로 평상시에는 문이 닫혀 사람들이 출입할 수 없는데 이날 따라 그 후손이 도주께서 불러 나온 듯이 미리 와서 문을 여니 도주께서는 배종자들을 데리시고 이곳을 두루 살피셨도다. 그리고 동학사 염 화실(花室)에서 이렛동안의 공부를 마치시고 말씀하시길 “이번 공부는 신명 해원을 위주한 것이라”고 이르셨도다.
58. 도주께서 종도들에게 “다섯 화공이 각기 맡은 대로 용 한 마리를 그렸느니라. 그림이 잘 되고 못 된 것은 그들이 모두 그린 뒤에야 알게 되니라”고 일러주셨도다.
59. 또 도주께서 하루는 “있는 말 없는 말을 꾸며서 남을 유혹하지 말고 올바르게 진리를 전하라. 혹세무민하는 행동은 천지안에서 용납할 길이 없도다”고 종도들을 깨우치셨도다.
60. 박 한경이 이 해 八월에 충청도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교화에 힘을 다하고 있던 중에 급히 도장으로 귀환하라는 도주의 분부를 받고 류철규와 함께 돌아오니 도주께서 지리산(智異山) 쌍계사(雙磎寺)에 갈 터인데 배종할 것을 분부하시니라. 다음날에 박한경. 류철규. 한 상덕. 김재복이 도주를 모시고 절에 이르러 정하신 바에 따라 청학루(靑鶴樓)의 뒷계단 위에 있는 영주각(瀛洲閣)의 정결한 방으로 안내를 받았도다. 도주께서 이렛 동안의 공부를 마치시고 생각하였던 바와는 달리 쉽게 마쳤다“고 하시고
「趙鼎山來智異應 一布衣來白日寒」
이라고 말씀하셨도다.
61. 도주께서 청명한 정유년 가을 어느 날에 감천에서 박한경에게 “누구의 소유지냐”고 한곳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물으시기에 그는 “자세히 모르겠습니다”고 아뢰이니라. 그곳이 훗날에 도주의 묘소(墓所)로 정하여지는도다.
62. 도주께서 이해 十一월에 도인들의 수도공부의 설석을 명령하고 공부는 시학(侍學) 시법(侍法)으로 구분케 하고 각 공부반은 三十六명으로 하며 시학을 五일마다 초강식(初降式)을 올리고 十五일마다 합강식(合降式)을 올리며 四十五일이 되면 봉강식(奉降式)을 행하게 하고, 시법은 시학 공부를 마친 사람으로서 하되 강식을 거행하지 않고 각 공부인원은 시학원 시학원(侍學員) 정급(正級) 진급(進級)의 각 임원과 평신도들로서 구성하고, 시학원은 담당한 공부반을 지도 감독하고 정급은 시간을 알리는 종을 울리고 진급은 내빈의 안내와 수도처의 질서 유지를 감시하여 수도의 안정을 기하게 하고, 시학관(侍學官)을 두어 당일 각급 수도의 전반을 감독하도록 하셨도다.
63. 박한경은 이해 섣달에 “도전(시봉) 오치국을 교체하려하니 적임자를 말하라는 도주의 분부를 받고 몇 사람을 아뢰오니 마땅치 않다” 하시므로 다시 류철규를 아뢰니 아무 말씀이 없으시므로 응낙하신 줄 생각하고 류철규에게 지방에 내려가서 모든 일을 정리케 하니라. 다음 달에 박한경이 류철규가 올라온 것을 도주께 아뢰니 “그만 두라”고 분부하셨도다.
64. 도주께서 다음해 二월 하순경에 최고 간부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박한경을 도전으로 임명하니 그는 총도전이니라. 종전의 시봉 도전과는 다르니라”고 분부를 내리셨다.
65. 박한경은 도전이 된 후에 지방의 일로 며칠 다녀오기를 도주께 청하였으되 허락을 얻지 못하였도다.
66. 도주께서 정유년 十一월 二十一일 자시부터 무술년 三월 三일까지 도장에서 불면 불휴하고 백일도수를 마시느니라. 五일에 심히 괴로워 하시므로 한의사와 양의사를 불러왔으되 “때가 이미 늦었도다”고 이르시니라. 도주께서 이튿날 미시에 간부 전원을 문 밖에 시립케 한 후 도전 박한경을 가까이 하고 도전의 머리에 손을 얹고 도의 운명 전반을 맡도록 분부를 내리고 “오십년 공부 종필(五十年工夫終畢)이며 지기 금지 사월래(至氣今至四月來)가 금년이다. 나는 간다.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고 행하여 오던 대로 잘 행해 나가라”고 말씀하시고 다시 문 밖을 향하여 “도적놈”을 세 번 부르시더니 화천하시니라. 무술년 三월 六일 미시요 양력으로 一九五八년 四월 二十四일이요. 수는 六十四세로다.
67. 화천을 고하듯 뇌성이 일고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듯 빗방울이 뿌리더니 무지개가 도장을 덮으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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