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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대 경종
●본명: 이윤, 숙종의 맏아들
●출생-사망: 1688-1724,
●재위기간: 1720년 6월-1724년 8월(4년 2개월)
●주요 업적: 소론의 지지를 받음, 삼수의 옥 발생, 소론의 공격으로 노론 세력에 타격을 가하는 신임사화(신축옥사와 임인옥사를 합쳐 이르는 말) 단행, 자식이 없어 이복동생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 평소에 병약하여 재위 4년만에 복통, 한열, 설사 증상을 보이다 사망.
[제20대 경종실록]
[1. 비운의 왕 경종의 등극과 노소론의 당쟁 격화]
정계 일선에서 남인 세력의 힘이 극도로 약해지고 조정이 서인 일색으로 되자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더욱 첨예화되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버지에 의해 어머니가 죽는 것을 목격한비운의 왕 경종이 즉위한다. 희빈 장씨의 아들 경종의 등극은 희빈 장씨를 죽음으로 몰고간 노론에 대한 정치적 박해를 예고하고 있었다. 경종은 1688년 숙종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희빈 장씨 소생이다. 이름은 균, 자는 휘서이며 태어난지 두 달 만인 1689년 원자로 정호되었다. 그가 원자로 정호되자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인현왕후가 젊기 때문에 후궁의 아들 균을 원자로 삼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하다가 유배되어죽었으며, 이 때 많은 서인들이 대거 축출되고 남인이 조정을 장악했다(숙종 편 '기사환국'참조).
원자로 정호된 왕자 균은 1690년 3세 때에 다시 세자에 책봉되고, 그의 어머니 장씨도 빈으로 승격하였다가 인현왕후가 폐출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장씨는 갑술환국으로 폐비 민씨가 복위되자 1694년 다시 빈으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1701년 '무고의 옥'으로 사사되었다(숙종편'무고의 옥' 참조).
어머니 희빈 장씨가 사사될 때 세자 균의 나이는 14세였다. 그는 이 사건 이후 줄곧 병환에 시달렸으며, 후사도 얻지 못했다. 일설에는 그가 아이를 얻지 못한 것이 희빈 장씨 때문이라고 한다. 희빈 장씨는 사약을 받으면서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고 싶다고 숙종에게 애원하게 되는데, 숙종은 처음에는 이를 거절하다가 결국 인정에 끌려 그녀의 청을 들어주게 된다. 하지만 막상 세자를 그 자리에데려다 놓았을 때에 돌발적인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장씨는 자신의 아들을 보더니 재빠르게달려와서는 다짜고짜 그의 하초를 움켜쥐고 잡아 당겨버렸다. 그 때문에 세자는 그 자리에서기절을 했고, 이 사건 이후 항상 시름시름 앓으며 남성 구실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숙종은 1716년 소론을 배척하고 노론을 중용한 후(병신처분), 1717년 세자가 병약한데다가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당시 좌의정이던 노론 영수 이이명에게 숙빈 최씨의 소생인연잉군(영조)을 후사로 정할 것을 부탁했다(정유독대). 또한 그 해에 연잉군으로 하여금 세자를 대신하여 세자대리청정(세자를 대신하여 편전에 참석하여 정사를 배우는 것)을 명했다.연잉군의 대리청정이 결정되자 소론측이 '흠을 잡아 세자를 바꾸려 한다'며 반발하고 나섰다.그 래서 이때부터 세자 균을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간의 당쟁이 격화되었다. 이같은 논란 속에서 세자 균은 1720년 숙종이 죽자 왕위를 이어받아 조선 제20대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경종 즉위 초년에는 여전히 노론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경종의 건강이 점차 악화되는데다, 후사마저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거저(세자를 세우는 일) 할 것을 주장한다. 즉, 경종이 너무 병약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니 연잉군을 세제로 삼아 왕위가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종은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721년 노론측의 주장에 따라 연잉군을 세제에 책봉하였다. 그런데 노론측은 두 달 뒤인 그 해 10월 경종이 병약하여 정사를 주관할 수 없다며 이번에는 연잉군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경종에게 정사에서 손을 떼라는 말이었다. 노론측이 대리청정을 주장하자 소론측이 왕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거세게 반발하였다. 하지만 경종은 와병중이어서 세제청정을 받아들였다가, 소론측의 반대로 다시 거둬들였다.
이후 경종은 세제청정을 명했다가 다시 거둬들이기를 반복한다.이 바람에 노, 소론간에 당쟁만 더욱 격화되었다. 그리고 1721년 12월 경종의 지지를 받은 소론은 과격파인 사직 김일경을 우두머리로 한 7명이 앞장서서 세제대리청정을 요구한 집의조성복과 청정 명령을 받들어 행하고자 한 노론 4대신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 등을 '왕권 교체를 기도한 역모자'라고 공격하는 소를 올렸다. 이 상소로 인하여 1716년 병신처분 이래 지속되던 노론의 권력 기반이 무너지고 대신 소론 정권으로 교체되는 환국이 단행되었다. 이 결과 노론 4대신은 파직되어 김창집은 거제부에, 이이명은 남해현에, 조태채는 진도군에, 이건명는 나로도에 각각 안치되었고, 그 밖의 노론대신들로 삭직, 문외출송 또는 정배되었다.
그리고 소론파에서 영의정에 조태구, 좌의정에 최규서, 우의정에 최석항 등이 임명됨으로써 소론 정권의 기반을 굳혔다.조정을 장악한 소론은 과격파를 앞세워 노론측 인사에 대한 축출 작업을 더욱 가속화한다.3개월 뒤인 1722년 3월 소론의 강경론자들이 노론의 과감한 처분을 요구하고 있을 때 남인의 서얼 출신 목호룡은 노론측에서 경종을 시해하고자 모의했다는 이른바 '삼급수설'(대급수:칼로 살해, 소급수:약으로 살해, 평지수:모해하여 폐출함)을 들어 고변하였다. 이 고변에 따르면 음모 관련자는 정인중, 김용택, 이기지, 이희지, 심상길, 홍의인, 김민택, 백망, 김성행 등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노론 4대신의 아들 또는 조카이거나 아니면 추종자들이었다. 이 고변은 숙종의 죽음 전후에 당시 세자였던 경종을 해치려고 모의하였다는 것인데 이때에 와서 드러난 것이다. 목호룡은 남인 서얼로서 풍수를 공부하여 지관이 된 사람이다.정치적 야심을 품고 있던 그는 풍수설을 이용하여 노론에 접근하여 처음에는 왕세제편(영조)에 섰으나, 정국이 소론의 우세로 돌아서자 배반하여 이 같은 음모 사실을 고변하였다.
이 사건은 노론에 엄청난 타격을 안겨 주었다. 목호룡의 고변이 있자 국청이 설치되어 역모 관련자들을 잡아와 처단하였고, 노론 4대신도 다시 한성으로 압송되어 사사되었다. 국청에서 처단된 사람 중에 법에 의해 사형된 사람이 20여 명, 맞아서 죽은 이가 30여 명, 그밖에 그들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교살된 자가 13명, 유배 114명,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녀자가 9명, 연좌된 사람이 173명에 달하였다. 반면에 권력을 잡은 소론파에서는 윤선거와 윤증을 복관시키고 남구만, 박세채, 윤징완, 최석정 등을 숙종묘에 배향하였으며, 목호룡에게는 동지중추부사의 직이 제수되고 동성군의 훈작이 수여되었다. 이 대대적인 옥사가 신축년과 임인년에 연이어 일어났다고 해서 '신임사화'라고 한다.
신임사화 후 정권은 소론에 의해 독점된다. 하지만 경종이 병이 악화되어 1724년에 죽고영조가 들어서면서 소론의 짧은 정권 독점기는 끝나고 만다. 생모의 죽음을 목격하고 또 생모에 의해서 생산 능력을 상실한 채로 어렵게 왕위에 올라 병석에서 4년을 보내다 죽은 경종 시대는 이처럼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정권 다툼으로 조정이항상 피바람에 휩싸였던 시기였다. 때문에 경종 재위 4년 동안 뚜렷한 치적을 남기지도 못했다. 다만 이 시기에 서양의 수총기(소화기)를 모방하여 제작했으며,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밝힌 내용을 담은 남구만의 '약천집'이 간행되었다.
경종은 1724년 8월 재위 4년 2개월 만에 37세를 일기로 죽었으며,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했다. 그는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정비는 심호의 딸 단의왕후였고, 계비는 어유구의 딸 선의왕후였다. 능은 의릉으로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다.
[2. 경종의 부인들]
단의왕후 심씨(1686-1718)
청은부원군 심호의 딸이다. 1696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경종이 즉위하기 2년 전에 병으로 죽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덕을 갖추어 어린 나이에도 대전, 중전 그리고 병약한 세자를 섬기는 데 손색이 없었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왕후에 추봉되었다. 능은 혜릉으로 경기도 양주에 있다.
선의왕후 어씨(1705-1730)
영돈녕부사 어유구의 딸이다. 1718년 세자빈에 책봉되어 가례를 올렸으며,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이후 1724년 경종이 죽자 2년 뒤에 경순왕대비에 올랐다가 1730년 26세를 일기로 죽었다. 그녀는 매사에 조심스럽고 온유하였으며, 경종이 병약한 탓에 소생이 없었다. 죽은 후 경종이 묻혀 있는 의릉에 함께 묻혔다.
경종의 가계도
[3. '경종실록'편찬 경위]
'경종실록'은 총 15권 7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720년 6월부터 1724년 8월까지 경종 재위 4년 2개월 동안의 역사적 사건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편찬 작업은 1726년 8월에 시작되어 1732년 2월에 완료되었다. 하지만 실록청 의궤가 남아 있지 않은 관계로 편찬 과정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영조실록'에 의하면 좌의정 이집과 우의정 조문명을 총재관으로 하고, 대제학 이덕수, 부제학 서명균, 판중추부사 이의현, 지춘추관사 김재로, 승지 윤봉조 등 소론측 인사들이 도청당상이 되어 편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실록의 내용은 노소론의 대립과 신임사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기사 가운데 사건이나 인물에는 '사신 왈' 또는 '근안'이라는 논평을 달았다. 그 논평에서 신임사화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이고, 노론 대신들에 대해서는 혹평하였다. 그 때문에 경종실록 찬수에는 처음부터 논란이 많았다. 실록의 교정을 맡은 주서 이수해는 1729년 3월 사국의 뒷면에 농간이 있다고 상소하였다가 당습을 버리지 않는다고 유배당했다. 그리고 1729년 12월에는 도청당상 이덕수를 불러 '신사의 처분(장희빈의 죽음)'에 대한 범례를 정했으며, 1731년 5월에 실록이 완성되어 시정기의 세초가 논의되었고, 1732년 3월 춘추관의 요청에 따라 네 곳의 사고에 봉안하도록 하고 시정기와 중초를 세초하였다. 하지만 1732년 4월에 헌납 민정과 사간 한덕후 등이 실록에 '이진검 옥사'가 실려 있지 않다고 문제를 제기하며, 마땅히 내용을 더해서 다시 봉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741년 헌납 이천보도 소를 올려 경종실록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고, 빠진 것을 보충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론의 정치적 기반이 탄탄해져 신임사화가 무옥으로 규정됨에 따라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하지만 수정 실록의 편찬 작업은 영조 대에 이루어지지 못하고 정조 시대에 가서야 시작될 수 있었다.
1777년 '영조실록'을 편찬하게 되자 노론인 이사렴, 유당 등이 상소하여 '선조수정실록'과 '현종개수실록'의 예에 따라 '경종실록'도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자, 정조는 이를 받아 들여 1778년 2월부터 작업에 들어갔다. 수정 실록은 즉위년과 재위 4년간을 각각 1권씩으로 편찬하여 총 5권 3책으로 구성되었다. 기사 내용을 살펴보면 즉위년부터 신임사화에 대한 부당성을 의식하고 기록한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즉, 경종실록이 노론측 인사에 대해 악평을 한 것에 반해 수정실록에서는 이러한 악평을 삭제하고 신임사화를 일으킨 소론측 인사들을 일방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은 모두 개수하였다. 수정 실록의 편찬 목적은 신임사화를 무옥으로 단정하고 수정, 삭제하였으므로 시정기의 기사 내용이 대폭 축소되었다. 1779년 경연관 송덕상은 '경종실록'의 수정본이 마련되면 구본은 없애버리자고 하였으나 정조는 고례에 의하여 양본을 함께 보존하도록 했다. 이 수정 실록 편찬 작업에 참여한 인원은 총재관 정존겸을 비롯 도청당상 6명, 도청낭청 4명, 분판낭청 12명 등 도합 23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노론측 인사였다.
경종 시대의 세계 약사
경종 시대의 동아시아 정세를 보면 일본은 1720년(경종 원년) 종교 서적 외 서양 책의 수입을 허가하였으며, 청은 성조가 죽고 세종이 즉위하여(1722년) 기독교를 엄금했다. 한편 유럽에서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혼인동맹을 체결했으며(1721년), 같은 해 영국에서는 월폴 내각이 성립되었고, 또 영국, 프랑스, 스페인간에 방수동맹(防守同盟)이 체결되었다. 이 때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페르시아를 침공하여(1722년) 흑해 진출을 기도하고 있었다.
조선왕조 제20대 경종
경종이 후사가 없는 이유
희빈 장씨는 사약을 받으면서 마지막으 로 아들을 보고 싶다고 숙종에게 애원하게 되는데 숙종은 처음에는 이 를 거절하다가 결국 인정에 끌려 그녀의 청을 들어주게 된다. 하지만 막상 세자를 그 자리에 데려다 놓았을 때에 돌발적인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장씨는 자신의 아들을 보더니 재빠르게 달려와서는 다짜고짜 그의 하초를 움켜쥐고 잡아 당겨버렸다. 그 때문에 세자는 그 자리에 서 기절을 했고 이 사건 이후 항상 시름시름 앓으며 남성 구실을 하 지 못했다는 것이다.
경종의 즉위와 소론정권의 부흥
경종 즉위 초년에는 여전히 노론이 정권 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경종의 건강이 점차 악화되는데다 후사마저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건저(세자를 세우는 일)할 것을 주장한다. 즉 경종이 너무 병약하여 언제 죽을 지 모르니 연잉군을 세제로 삼아 왕 위가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종은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721년 노론측 주장에 따라 연잉군을 세제에 책봉하였다. 그 런데 노론측은 두 달 뒤인 그 해 10월 경종이 병약하여 정사를 주관 할 수 없다며 이번에는 연잉군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해야 한다고 주 장했다. 이는 곧 경종에게 정사에서 손을 떼라는 말이었다. 노론측 이 대리청정을 주장하자 소론측이 왕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 우며 거세게 반발하였다. 하지만 경종은 와병중이어서 세제청정을 받 아들였다가 소론측의 반대로 다시 거둬들였다.
이 후 경종은 세제청정을 명했다가 다시 거 둬들이기를 반복한다. 이바람에 노, 소론간에 당쟁만 더욱 격화되었 다. 그리고 1721년 12월 경종의 지지를 받은 소론은 과격파인 사직 김 일경을 우두머리로 한 7명이 앞장서서 세제대리청정을 요구한 집 의 조성복과 청정 명령을 받들어 행하고자 한 노론 4대신 영의정 김창 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 등을 '왕 권 교체를 기도한 역모자'라고 공격하는 소를 올렸다. 이 상소로 인하 여 1716년 병신처분 이래 지속되던 노론의 권력 기반이 무너지고 대 신 소론 정권으로 교체되는 환국 이 단행되었다. 이 결과 노론 4대신 은 파직되어 김창집은 거제부에, 이이명은 남해현에, 조태채는 진도군 에, 이건명 은 나로도에 각각 안치되었고 그 밖의 노론 대신들도 삭 직, 문외출송 또는 정배되었다. 그리고 소론파에서 영의정에 조태구, 좌의정에 최규서, 우의정에 최석항 등이 임명됨으로써 소론 정권의 기 반을 굳혔다.
노론의 타격과 신임사화
조정을 장악한 소론은 과격파를 앞세워 노론측 인사에 대한 축출 작업을 더욱 가속화한다. 3개월 뒤인 1722 년 3월 소론의 강경론자들이 노론의 과단한 처분을 요구하고 있을 때 남인의 서얼 출신 목호룡은 노론측에서 경종을 시해하 고자 모의했다 는 이른바 '삼급수설'(대급수:칼로 살해, 소급수:약으로 살해, 평지 수:모해하여 폐출함)을 들어 고변하였다. 이 고변에 따르면 음모 관련 자는 정인중, 김용택, 이기지, 이희지, 심상길, 홍의인, 김민택, 백 망, 김성행 등이었 는데 이들은 모두 노론 4대신의 아들 또는 조카이 거나 아니면 추종자들이었다. 이 고변은 숙종의 죽음 전후에 당시 세 자였던 경종을 해치려고 모의하였다는 것인데 이 때에 와서 드러난 것 이다. 목호룡은 남인 서얼로서 풍수를 공부하여 지관이 된 사람이다. 정치적 야심을 품고 있던 그는 풍수설을 이용하여 노 론에 접근하여 처음에는 왕세제편(영조)에 섰으나 정국이 소론의 우세로 돌아서자 배 반하여 이같은 음모사실을 고변하였다.
이 사건은 노론에 엄청난 타격을 안겨주었 다. 목호룡의 고변이 있자 국청이 설치되어 역모 관련자들을 잡아와 처단 하였고 노론 4대신도 다시 한성으로 압송되어 사사되었다. 국청 에서 처단된 사람 중에 법에 의해 사형된 사람이 20여 명, 맞아서 죽 은 이가 30여 명, 그 밖에 그들의 가족이 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교살 된 자가 13명, 유배 114명,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녀자가 9명, 연좌 된 사람이 173명에 달하였다. 반면에 권력을 잡은 소론파에서는 윤선 거와 윤증을 복관시키고 남구만, 박세채, 윤징완, 최석정 등을 숙종묘 에 배 향하였으며 목호룡에게는 동지중추부사의 직이 제수되고 동성군 의 훈작이 수여되었다. 이 대대적인 옥사가 신축년과 임인년에 연이 어 일어났다고 해서 '신임사화'라고 한다.
경종의 작은 업적
서양의 수총기(소화기)를 모방하여 제작 했으며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밝힌 내용을 담은 남구만의 '약천집'이 간행되었다.
단의왕후 심씨
청은부원군 심호의 딸이다. 1696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 나 경종이 즉위하기 2년 전에 병으로 죽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총 명하고 덕을 갖추어 어린 나이에도 대전, 중전 그리고 병약한 세자를 섬기는 데 손색이 없었 다. 1720년 경종의 즉위하자 왕후에 추봉되었 다. 능은 혜릉으로 경기도 양주에 있다.
선의왕후 어씨
영돈녕부사 어유구의 딸이다. 1718년 세 자빈에 책봉되어 가례를 올렸으며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 었다. 이 후 1724년 경종이 죽자 2년 뒤에 경순왕대비에 올랐다가 1730년 26세를 일기로 죽었다. 그녀는 매사에 조심스럽고 온유하였으 며 경종이 병약한 탓에 소생이 없었다. 죽은 후 경종이 묻혀 있는 의 릉에 함께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