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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종주기
초록
내가 ‘백두대간’ 산행기를 쓰려고 하는 의무감은 백두대간을 기필코 종주하리라는 나름대로의 방편이다. 몸이 고생하여 산을 오르고 산을 오르며 흘린 그 땀과 한 줄기 스쳐가는 바람의 향기와 상쾌함, 그만으로도 산행은 행복하다. 무엇을 더 바라랴. 그러나 ‘백두대간’이라는 타이틀로 시작한 산행은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한다는 약간의 부담감도 따랐고, 지금 아니면 내가 언제 우리나라 등줄기를 밟아 볼 수 있을까 하는 욕심도 있었다. 또 혹시 아는가. 몇 년이 걸리는 산행기간동안 통일이 되어 지리산에서 저 백두산까지 걸어보는 감회가 있을지. 아무튼 그 어느 날 백두대간(지리산~진부령)을 다 마치고 난 그 시점은 얼마나 뿌듯하고 내가 대견스러울까 하는 성취감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 남편과 친구들이 함께하는 종주는 종주에 필요한 모든 준비와 안전이 보장되는 그야말로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들 용기만 있으면 되었다. 내 몫은 무조건 걷겠다는 의지와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만 있으면 된다. 그렇게 시작한 산행은 4구간을 지나가고 있다.
보통 산행과 다른 점은 바톤을 이어 받고 달리는 선수처럼 산행이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그 다음 산생이 시작되는 게 종주의 특징이다. 다시 그 지점에 서면 낯익은 풍경이 반갑고 오늘 걸었던 양이 길이로 확인되는 것이 재미있다. 걷다 돌아보면 지나온 산줄기 줄기들이 꿈틀거리는 생명으로 굽이쳐 있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온 내 발자취들이 꼬리를 물고 펼쳐져 있다. 다시 걸음을 옮기고 산길을 걷노라면 낙엽 밟히는 촉감과 잎을 떨구거나 잎을 간직한 낙엽송들로 산은 무척 환상적이다. 붉고 노란 잎과 소나무와 억새, 말라버린 들풀들이 깊어가는 가을의 정적을 만들어내고 그 정적 속으로 잠시 빠져드는 혼자만의 호젓함과 여유로움. 산행이 주는 순간순간의 희열이다. 대간을 시작한 시점이 가을이라 산은 무척 다채롭다. 그리고 사람을 더 따뜻하게 하는 것은 우리 부동산(부부 동반 산악회) 백두대간 팀이다. 남편과 그 일당들. 원래가 순수한 사람들이지만, 산에 오르는 그들은 언제보아도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고 즐겁고 기쁘다. 항상 봉사하려는 마음과 생색내지 않는 행동들이 우리 팀원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며 백두대간을 완승할 수 있는 저력이 될 것이다.
자꾸 산이 좋아지고 사람이 좋아지고 걸어온 구간이 그렇게 흘러가는 그 순간들이 고맙고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미흡하지만 산행기라도 적어 기록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발로 걷고 손으로 그 흔적을 다시 더듬는 일. 손발이 맞아야 도둑질도 한다지만, 내 손발이 맞으면 백두대간이 좀 더 신바람 나지 않을까 해서이다. 산을 좀 더 살피고 그 속에 펼쳐진 자연에 더 다가가 보고 내가 건강하여 이렇게 걸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말이다.
대장정의 첫 날, 산신제를 지내다
1차 산행; 성삼재에서 작은 고리봉을 지나 만복대 1433미터, 정령치 넘어 고기리까지 7시간 10분 산행
대장정의 첫날이다. 긴장과 약간의 부담과 망설임을 떨치고 첫 발을 내딛었다. 아직 여명도 없는 캄캄한 시각에 만난 우리 백두팀들은 상기된 목소리로 인사를 나눈다. ‘온다고 수고 많았제. 우리가 한다면 한다아이가..’ 집합장소 동래까지 오느라 더 새벽부터 달려온 친구들 그리고 창졸간에 이루어진 백두대간팀들은 반가움과 설레임으로 한바탕 왁자지껄하다. 능선따라는 앞좌석을 차고앉는다. 다른 산행에서는 늘 뒷 자리에 앉아 호시탐탐 술과 친하더니만 이제 그는 백두대간을 이끌 단장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만, 그 모습이 듬직하다. 곧 이어 ‘실전 백두대간 종주산행’ (조선일보사) 책을 한권씩 나누어 준다. 앞으로 진행될 산행구간의 내용과 지도가 담긴 아주 요긴하게 쓸 교재같다. 항공 촬영된 설악산, 지리산, 덕유산의 사진을 펼쳐 보이는 단장님은 앞으로 공부 좀 해오라며 엄포를 놓는다. 공부는 모르겠고 일단 거금의 책을 공짜로 얻은 팀들은 ‘오늘 잘 왔다’는 회심이 얼굴에 감도는 분위기다.
자다가 깨다가 하면서 3시간을 달려온 버스는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구례로 접어든다. 강을 따라 흐르는 농촌의 아침풍경은 해맑고 한가롭다. 차가 성삼재를 향해 가파르게 오른 후 일행은 차에서 내렸다. 오늘 오를 ‘성삼재~작은 고리봉~ 만복대~정령치~고기삼거리’라는 이름도 생소하듯, 산중턱에서 바로 산행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여느 산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산의 샛길로 접어들자 어느새 산의 중턱쯤에 올라와 있다. 산들은 금새 병풍처럼 겹겹이 둘러쳐 있고 일행이 저기가, 천왕봉, 반야봉이라며 산의 이름을 줄줄이 가리키고 있다. 내 눈에는 다 비슷한 봉우리에 아득한 능선일뿐인데. 종주를 하다보면 나도 산의 얼굴을 알아보겠지 하는 마음으로 만복대를 오른다. 억새가 펼쳐진 능선을 정면으로 보고 오르니 청아한 하늘 아래에 억새가 맞닿아 있는 것 같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의 몸짓이 어서 올라와 쉬어 가라는 손짓 같기도 하고 하늘을 향해 흔드는 아련한 노스탤지어 같다.
오늘은 이름만으로도 복이 가득한 이 만복대(1433미터)에서 백두대간 종주 ‘산신제’를 올린다. 듬직한 바위가 움집처럼 자리를 만들어 주어 바람도 피하고 사람들의 시선도 피할 수 있는 아늑한 곳이다. 웅녀가 들어있겠다는 우스개 소리도 하며 가져온 제물을 차려 놓고 축문을 읽고 산행대장 영평이 아부지부터 초헌을 올린다. 일행 모두도 정성껏 한 마음으로 산신령님께 절을 한다. 종주를 하는 동안 넘어지지 말고, 낙상하지 말고, 미끄러지지 말고 아무 불상사 없이 산을 오르고 내리고 가는 길 오는 길 잘 살펴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일행들도 의좋고 아무런 문제없이 이 산행을 마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간절한 마음으로 이렇게 산신께 소통했으니 이제 모든 산신들은 우리의 든든한 빽이 되어 줄 것이다. 제물로 올렸던 육해공군의 산해진미로 점심를 먹는다. 조갑데기 술이 한 잔씩 돌아가고 영평이 아부지가 끓인 된장찌개의 기막힌 맛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만복이 깃드는 행복감에 취해 버린다. 산행을 하고 먹는 한 모금의 술과 밥. 거기에는 산행의 노고와 산행의 즐거움과 산행의 허기가 들어있는 참으로 값진 맛이 있다.
만복재를 지나 정령치를 넘는다. 정령치는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을 막기 위해 정 장군을 시켜 이 곳을 지켰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백두대간 동안 만나는 마을과 능선과 산들은 얼마나 많은 이름과 사연을 갖고 있을지....과거 우리네의 삶이 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그야말로 생활 그 자체였기에, ‘지리산’만 하더라도 이 자락에 터전을 펴고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바로 신화이며 역사이며 문학의 토대가 되었으리라.
고기리까지 이어지는 제법 긴 산행은 능선의 흐름을 알게 하는 듯, 적당히 오르고 내리고 하면서 걸었던 첫 구간이다. 적당히 지칠 때쯤 마을과 도로가 나타난다. 차를 타는 순간 첫 산행의 뿌듯함과 피로감이 아주 기분 좋다.
가을의 정경
2차 산행: 고기리에서 출발 가재마을 거쳐 수정봉(805미터)입망치 여원재 도착 4시간10분 산행
서울에 머물던 우리 부부는 새벽 4시30분에 서울 인터체인지를 벗어나 호남고속도로에 차를 올렸다. 부산에서 올라오는 일행과 만나기로 한 장소와 시각에 맞추기 위해 남편은 어둠을 뚫고 쌍 라이트를 켠 채 속력을 낸다. 종주를 위한 이 부지런함과 속력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앞으로 백두대간 종주가 우리생활에서 우선순위를 차지하는 항목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중간 윤 총무님과 연락을 하던 남편은 ‘버스가 마산 입구에서 속력을 내지 못한단다. 어제 넣은 기름이 불량인지, 차를 교체해야할 것 같다는.’ 우리는 아침밥도 굶고 열심히 달린 결과 이미 남원시 운봉읍에 들어선 시각이었다. 약속시간이 많이 남아 이 참에 남원에 있는 춘향이집에 가 보기로 했다. 넓은 공원에 광한루와 오작교, 춘향사당, 월매집이 띄엄띄엄 흩어져 있고 한 곳에서 머물기에 시간이 제법 걸렸다. 이도령과 춘향이의 그 영원한 고전적 사랑은 이른 아침부터 사람을 끌어 모으고 남원의 이름을 유명케 하는 문화상품이 된듯하다. 유유히 그들의 체취를 느껴보기도 전에 남편은 마음이 콩밭에 있는지 빨리 나갔으면 하는 몸짓이다. 나이가 들면 이도령도 춘향이보다는 친구를 더 좋아했겠지 싶어 아쉬움을 남기고 광한루를 떠났다. 만나기로 한 가재마을 보건소 앞에 차를 세워두고 일행을 기다렸다. 마을은 수수한 농촌 풍경에 가을의 모든 심상을 담고 있었다.
한적한 농가의 담장에 감나무가 걸쳐 있고, 저 멀리 냇가에 서 있는 미루나무는 햇살에 반짝이고, 가까이 보이는 나무들은 한 줄기 바람이 불자 현란한 색과 빛으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낙엽으로 흩어져 버린다. 들판에는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이 가을의 정물을 차 안에서 바라보니 알 수 없는 적요들이 흘러들어 행복하다가 또 알 수 없는 슬픔도 차오른다. ‘아, 가을이 가고 있구나’하는 느낌과 함께.
그렇게 분위기를 잡고 있는데 일행이 도착한 반가운 소리가 들린다.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마을의 신작로 앞 논과 밭을 지나 뒷동산을 오르는 기분으로 초입에 들어선다. 마을 밭 한 모서리에 무심히 있는 무덤 하나가 눈에 띤다. 무덤의 위치가 마치 낟가리를 쌓아놓은 듯 한, 아무런 경계가 없어 보이는 그 대접이 참 인상적이다. 무섭지도 외롭지도 않아 보이는. 오늘 종주는 참 수월하고 걷기 편안한 구간으로 소나무 숲길이 평탄하게 이어지고 긴장감 없이 느슨하게 걷고 있다가 보면 불쑥 만나는게 이런 무덤들이다. 수정봉 근처에서 만난 무덤은 떼도 다 벗겨진 마치 조그만한 암벽같은 무덤으로 낮아질 대로 낮아져서 소멸에 이르는 과정을 목격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무런 상석도 꾸밈도 없는 소박한 그 자체의 무덤은 마치 자연의 일부처럼 보인다.
점심은 라면이다. 가벼운 종주이니 가볍게 오라는 단장 지시대로 점심을 싸지 않는 짐은 홀가분했다. 대신 산행대장과 단장의 륙색은 라면에 생수에 거기다가 운봉 막걸리에 한 짐이다. 그야말로 그들의 륙색은 보급창고다. 일행은 어서 라면이 끓여져 자신 앞에 오기를 기다리며 받아먹는다. 쪽쪽대며 연신 맛있다며 입방아 찍으면서 먹는 모습이 좋은지 두 사람은 라면을 끓여대기가 바쁘다. 산행에서 라면 먹는 맛이 이렇게 기막힌지! 안 먹어본 사람은 모를 것이다.
라면 먹은 힘이 아직 거뜬한데 어느새 입망치를 거쳐 여원재에 도달했다. 산길이 예고 없이 뭉떵 끊기고 여원재의 고개마루가 나온다. ‘여원재 해발 470미터’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고 그곳에 우리가 타고 갈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원재 고개는 남원과 운봉 그리고 영남과 호남을 연결해 주는 주요 고개란다. 역사적으로는 백제와 신라의 국경 지대로 숱한 전쟁을 치른 곳이며 임진왜란 같은 전쟁이나 민란 때는 항상 쟁탈의 거점이 되는 곳이었다고 하니. 그래서 그 이름도 여원재라고 했을까? 지금 여원재 고개마루에는 이상하게 생긴 장승이 버티고 서 있고, 맞은 편 밭에는 알이 꽉찬 통통한 배추가 탐스럽다. 마지막에도 두 개의 봉분이 가는 걸음을 배웅하듯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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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틀 뒤 출발 할 5,6차 백두대간산행을 점검하려고 홈피를 여는 순간 ‘백두대간 종주기. 초록'이 라는 자막을 보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초록님이 백두대간 종주기를 하나 출산하면 얼마나 좋을까 내심 바랐는데 드디어 펜을 잡으셨으니 너무 기뻤고 서점에 넘치는 안내서 같은 종주기들보다 부동산 백두팀에서 제대로 된 종주기가 탄생 할 것 이라는 흥분 때문이었습니다. 종주를 끝낼 때 까지 초록님의 손에 들린 펜이 무겁지 않게 부동산 백두팀은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화이팅!!!
남편은 오짜를 수정해 주고, 능선따라님은 이렇게 격려해 주니 글힘이 생깁니다. 능선따라님의 그 유연한 필치와 섬세한 감성 앞에 제 글을 보이는 것도 사실 쑥스럽지만, 열심히 걷고 써겠습니다. (옆지기가 옆에서 하도 구시렁거려 그만 씀)
저는 촉록님
글이 
임다. 펜이 안 무겁도록 열심이 배경 사진을 찍어 올려 놓을 께요.
언제 부터인가 우리 사이트에 백두대간이라는 간판이 턱 붙어 있어 간혹 들어 와 보게 됩니다. 오늘도 잠간 틈이 나는 사이에 들어 와 보니 반갑게도 초록님의 미려한 글솜씨로 그려진 백두대간 종주기가 있어 단숨에 읽고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사나이들의 거칠고 힘찬 감성으로 보는 백두대간 초록님의 마음으로 보는 섬세하고 사려깊은 백두대간이 합쳐져 그야말로 적막강산이 금수강산이 되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저도 간혹은 참여하겠지만 제 못가는 구간에 키작은 예쁜꽃 피었거던 날 보듯 여기소서..^^ 능단장 영대장 곰돌이 외촌 윤풀 입이 벙글벙글 할 걸 생각하면
윤총무님께서 오려주시는 실시간대의 사진과 멘트가 글 쓰는데 도움이 됩니다. 메모없이 그냥 다니다가 기억이 메롱메롱하는데 충분한 자료가 됩니다. 고맙습니다.(근데 윤풀님 답글에 붙지않고 자꾸 엉뚱한데 가네요)
계속^^* 제가 행복해집니다 자난번 주신 수필"경험한 다는 것"을 읽고 많은 공감을 했는데..이번에 백두대간 종주에서 멋지고 아름다운 경험을 많이 하시길 기원합니다..아쟈 아쟈 파이팅 백두대간팀!!!!
호월님이 꽃에 다가가는 그 애정과 그 자세에 늘 자극을 받습니다. 백두대간 종주를 하면서 그런 마음으로 사물을 보며 글 쓰려고 맘 먹습니다. 많이 조언해 주세요.
초록님의 산행기에는 산천초목 외에도 백두대간 팀원의 헌신적인 모습이 숨어있고 흘러간 세월이 묻어있다.그리하여 팀원의 족적이 더욱 뚜렷이 각인 된다.
산행기를 보면서 거쳐간 산행길을 다시 돌아보는 즐거움을 주시는군요. 산행을 다녀오면 산행기가 기다려지고, 산행기를 보면서 또 산에 가는날을 기다립니다. 기다리는것도 즐거움입니다.. 남은구간이 많아서 더욱 기대됩니다. 아무쪼록 백두대간을 완주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