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22>]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저 너머의 나라
다섯 살 때 아버지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
가정에서 보고 배운 신앙이 결국 선교사로 이끌어
말콤 펜윅은 1889년 한국에 도착했다. 그는 신학 교육을 받은 적이 없지만, 캐나다에서 철물 사업자로서 그리고 평신도 전도자로서 쌓은 경험을 사역에 십분 사용하였다. 한국이 어디 붙은 나라인지도 모르던 그는 1889년 7월에 하나님이 자신을 그 곳의 선교사로 부르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거부했으나, 결국에는 “적어도 찌그러지고 누추한 양철통 정도는 되어 생명수를 전달할 수 있겠다”고 결심했다. 그로부터 넉 달 뒤 한국에 도착했다. 한반도 남부와 북부에서 동시에 사역한 펜윅이 세운 교회들은 한국인들의 수고에 힘입어 급성장한 결과 250개로 증가하는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들은 선교 열정에 달아올라 만주와 시베리아 한인 사회에까지 가서 교회를 세웠다. 1936년 펜윅이 죽자 그 교회들은 1950년까지 외국 선교사의 감독을 받지 않은 채 유지했다.
이번 호부터 펜윅 선교사가 직접 쓴 글을 토대로 한국으로 오기까지 과정과 한국에서 활동했던 사역을 정리해보았다. <편집자>
목자가 길 잃은 자기 양을 찾은 경위
하나님은 증인들을 필요로 하신다. 두렵게도 지구의 거민들 가운데 10억 인구가 아직 그리스도를 영접하거나 배척할 기회조차 가져본 적이 없다. 이교도로 태어나는 아이들이 ‘거듭난’ 자녀들보다 200배나 더 많다. 더 두려운 것은 교회가 1900년간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하나님을 증거할 충분한 수의 증인들, 길 잃은 영혼에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인정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과연 옳으셨음을 입증할 증인들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교회는 한국처럼 복을 풍성히 받은 나라에조차 증인을 한 명도 보내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을 쓰게 된 것을 굳이 변명하자면 이런 이유 때문이다. 글을 잘 쓰려고 해 봐야 결함투성이가 될 것을 잘 알기에 다른 사람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쓴다. 그러나 내 관심은 글을 쓰는 데 있지 않다. 변변찮은 이 사람에게 하나님이 넘치도록 베푸신 은혜를, 우리 주님이 여전히 다니시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못 자국 난 손을 내밀며 가리키시는 저 너머에 있는 교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일념만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어설픈 일꾼이 연장을 탓한다”고 말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보고 겪어서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은 노련한 일꾼이다. 그분은 사역을 하는 데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도구들을 한 번도 탓하지 않으셨다. 이 책이 나처럼 불완전한 증인이나, 한국인 전도자들처럼, 무학(無學)한 도구들을 주께서 기꺼이 쓰신다는 사실을 교회들이 믿도록 용기를 준다면, 이 글은 제 소임을 다하는 셈이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 맡기신 사역은 교파를 초월한 것이다. 한국 방방곡곡에서 영혼들이 주께 나오고 그들을 돌볼 감로들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교단 명칭을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하게 붙였다. ‘대한기독교회’(기독교한국침례회의 초창기 명칭)인데, ‘한국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뜻이다.
엄격한 집안의 규율
우리 조부모가 스코틀랜드 퍼스셔 피트케른을 떠나 당시 요크라고 하던 캐나다 토론토 땅을 밟으셨을 때, 토론토에는 ‘허드슨 만’이란 간판이 붙은 상점 한 곳, 제분소 한 곳, 철공소 한 곳, 그리고 술집 몇 곳이 전부였다.
아버지는 내가 불과 다섯 살 때 돌아가셔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를 칭송하는 이웃들과 아버지의 친구분들을 만나면 언제나 즐거웠다. 선교사가 된 뒤 마을 교회에서 처음 설교했을 때, 스코틀랜드에서 오신 인자한 노부인이 다가와서 “당신이 아치 펜윅의 아들이우?” 하고 물었다. 그렇다고 말하니 “아이구 그렇군. 아버지처럼 좋은 사람일 게야. 틀림없어”라고 했다. 사업에 성공하여 크게 유명해진 신사 한 분도 다가와서는, “난 당신 아버지를 존경하던 청년들 가운데 하나였지요. 아버지는 나나 다른 청년을 만나면 언제나 불러 세우고서 친절하게 이것저것을 물으시고 훌륭한 조언을 한 마디씩 해주셨지요” 하고 말했다. 아버지는 마을에 일이 있으면 언제나 앞장서셨다. 가정의 규율은 아주 엄하고 혹독했지만, 우리는 한결같이 아버지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어머니는 내가 집을 떠나 하나님을 찾고 찾으려 할 때, “아들아, 네가 예수님께 마음을 드린다면 너를 아무리 멀리 보내도 상관하지 않는다” 하시며 눈물로 간곡히 당부하시는 모습이 생각난다. 나는 그 말씀에 복받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기차를 타고 길을 떠나면서, 예수님을 알 때까지 찾고 또 찾으리라는 결심을 했다. 이후 내 나이 25세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되면서 한국 선교사로서의 삶을 다짐하게 되었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 침례교 믿음의 사람들 <2> 장일수 목사
* 침례교 믿음의 사람들 <3> 지대명 선교사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4>] 표현의 한계와 복음 전파의 어려움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5>] 한국 관습에 대해 조금 이해하다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5>] 한국 관습에 대해 조금 이해하다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7>] 매켄지 선교사의 용기와 기질을 보다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8>] 성탄절 무렵 첫 선교지인 소래 찾다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9>] 귀신 숭배 마을이 예배하는 장소로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0>] 한국인에게 사역을 맡기다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1>] 현지인에게는 현지 사역자가 필요함을 알다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2>] 내가 실패한 곳에서 본토인 목사가 거둔 성공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3>] 복음 전단지와 쪽복음서로 전도에 박차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4>] 그리스도의 일꾼 손 선생의 괄목할 성장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5>] ‘걸어 다니는 성구 사전’ 장석준 목사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6>] 장석균 선생의 고난과 복음 전도의 삶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7>] 두만강 접경 지역으로 전도에 나서다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8>] 아편 중독자도 전도자로 만드는 복음의 능력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9>] 미신에 붙잡힌 사람들을 믿음으로 잠재우다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20>] 적재적소에 일꾼을 예비하시다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21>] 한국인의 겸손과 인내를 사용하신 성령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22·끝>] 고결하고 훌륭한 한국 복음 전도자들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2>] 나는 부족하나 주님이 함께하시기에
한국이라는 나라 전혀 몰랐으나 부르심에 순종
선교는 오로지 주님만 의지하는 것임을 깨달아
1889년 7월, 한국으로 가라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소중한 내 친구 헤론(J. W. Heron) 박사의 아내가 한국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 조만간 교수형을 당할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이것은 큰 기삿거리가 되었고, 캐나다 신문들은 그 소식을 널리 전했다.
나도 다른 많은 사람과 다름없이 한국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그것이 지중해에 있는 어떤 섬인 줄로만 알았다. 지도를 보고서야 내가 생각한 섬은 코르시카고, 한국은 아시아 지역 끝에 붙은 반도로서, 한 면은 서해에 접해 있고 다른 면은 동해에 접해 있으며, 위도 35도에서 43도에 자리 잡은 나라인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선교가 뭔지 전혀 몰랐다. 그냥 막연하게, 하나님이 이교도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바라신다고만 알았다.
선교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얼굴을 검게 그을린 근엄한 선교사가 야자수 아래서 성경을 들고 서 있고, 곁에는 특이하게 생긴 원주민이 양산을 받쳐 들고 서 있으며, 주위에는 그에게 복음을 들으려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장면이 떠올랐다. 선교사가 가는 곳은 으레 무더운 지역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므로 한국이 연중 석 달 동안 눈이 120㎝나 내리는 나라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선교사들이 가는 곳은 모두 호랑이가 득실거리는 밀림인 줄로 알았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한국에 호랑이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별로 놀라지 않았다. 한국은 아프리카와 인도를 합친 지역쯤 되리라고 생각했다.
한국에 가기로 한 뒤에 나라가 온통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을 들었고, 나중에 와서 보니 사실이었다. 또 호랑이가 있다는 말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런 흥미로운 사실들을 빼놓고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전혀 몰랐다. 사실 선교 단체들과 편지를 주고받았고, 한국에 가 본 적이 없는 저자들이 쓴 한국 관련 서적 두 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도대체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명확히 알 수가 없었다.
부르심의 과정
하나님이 나를 흑암에서 그 아들의 찬란한 빛으로 불러내실 당시, 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철물 도매업이었다. 당시 나는 직원 40명을 거느린 창고 책임자였다. 나중에는 멀리 해안 지방에 자리 잡은 지사 겸 직판장 총책으로 승진했다. 그 무렵 나는 저녁 시간을 이용하여 성경을 공부하고 평신도로서 기회가 닿으면 어디든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나이아가라 사경회에서 멀리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나는 예전처럼 변명했다. “주님, 저는 사업가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더 잘 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라!”고 하셨다. “하지만 주님, 저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목사도 아닙니다. 신학교에 가 본 적도 없습니다.” 주님은 다시 “가라!”고 하셨다. “하지만 가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갈 마음이 생기도록 해주기를 바라느냐?” 주님은 말씀하셨다. “아닙니다. 그런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사흘째 되는 날 나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 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제게 그런 마음이 생기를 원하신다면 뜻대로 하십시오.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날 저녁 인도에서 온 윌더 형제에게 사막에서 물을 애타게 찾으며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윌더 형제는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에게 화려한 유리 주전자에 물을 담아 화려한 유리잔에 따라 주면 감사하게 받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더럽고 쭈그러진 양철통에 물을 담아 주더라도 감사하게 받아먹고 생명을 보존할 것이다.” 그렇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물이다. 이 간단한 예화를 듣고 난 뒤 마음속에 의지가 생겼다. 교육을 받지 못했느니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느니 하며 변명하던 과거의 태도를 단숨에 몰아냈다. 적어도 찌그러지고 누추한 양철통 정도는 되어 생명수를 전달할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두려움은 여전했다. 이 점에서도 윌더 형제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배에 올라 노를 젓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노를 저은 뒤에 배가 아직 선착장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일어나서 고물로 가 보니 배가 선착장에 묶여 있었고, 따라서 지금까지 헛고생해 가며 노를 저었던 것입니다. 칼을 꺼내 밧줄을 끊고 노를 저으니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내 경우와 꼭 맞아떨어지는 이야기였다. 선교는 어차피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면 모든 문제의 밧줄은 끊어질 것이다. 그 후 한국으로 부르신 그분의 뜻에 순종할 수 있게 되었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3>] 내륙을 향해 길을 떠나다
한국의 일상은 평온하고도 해맑아
언어 습득 위해 삶 속으로 뛰어들어
한국의 산들은 내가 그곳에 가기 직전에 나를 가로막던 난관들의 상징이 되었다. 그중에서 나를 가장 괴롭힌 산은 바로 ‘언어’였다.
다행히도 이 산은 너무 높았던 까닭에 그 뒤에 자리 잡고 있던 더 험준한 산들을 시야에서 가려 주었다. 한국에서 처음 열 달을 지내는 동안, 나는 한국어를 배우려고 각종 교과서와 지침서를 탐독했으나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기억력만큼은 자신이 있던 나는, 전혀 뜻 모를 글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는 책의 두 쪽을 반복해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암기했으나,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옛날 방식의 복습으로는 실제로 한국어를 구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 다음부터는 모든 어학 강의, 교과서, 영어 사용권 사람들의 조언을 포기하고 다만 한국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기로 결심했다. 그러고는 몇몇 한국 친구들과 함께 황해도 소래를 향해 떠났다.
소래는 서울에서 256㎞가량 떨어진 마을이다. 충직한 한국 조랑말을 타고 서울 시내를 통과하여 소래로 가는 동안 우리는 낯선 광경들을 자주 보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해태 석상 저편과 바깥 성곽 위에 세워진 망루 주변에는 흥미를 돋우는 많은 사람과 물건이 있었다. 궁궐 대문들 밖에는 하인들이 나귀들을 대기해 놓고 관리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다섯 사람이 새 성벽을 쌓기 위해 삽 한 자루를 가지고 진흙을 이기면서 협동의 힘을 과시하고 있었으며, 명절을 맞아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소년들이 조부모에게 인사하러 가고 있었다.
마침 나무꾼들의 긴 행렬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었다. 소나무 가지들을 소달구지에 싣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조랑말에 싣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가난하여 짐승을 부릴 수 없어서인지 집채만 한 나뭇짐을 등에 지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성문을 지나 확 트인 들판으로 나가니 다양한 광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시골 청년들은 해맑은 표정으로 한복을 입고 있었고, 시골 여인들은 1910년대 미국 여성들의 모자보다 훨씬 더 큰 모자로 아름다운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시골 선비들은 집 앞에서 애지중지하는 곰방대를 입에 물고 만족스럽게 앉아 있었다. 들판에서는 강인하고 건실해 뵈는 일꾼들이 일손을 멈추고 서서 우리를 지켜보았고, 농부는 밭을 갈고 있었는데, 솜씨가 아주 익숙했다. 사람들은 단음 가락으로 동양의 신비로운 노래를 하면서 집단으로 벼를 추수하였다. 노동 공동체는 한국에 크나큰 유익을 끼쳤다.
그것은 화폐의 필요를 줄였고, 노동자에게 급료를 받는 것 이상으로 자부심을 심어 주었다. 남자들, 그리고 때로는 여자들까지도 집단으로 잡초를 뽑고 벼와 다른 작물을 심고, 가락에 맞춰 즐겁게 일하였다. 한국인들은 매우 부지런히 일했다. 집단으로 일하는 그들의 관습은 개척 시대 미국 농촌에서 특히 벌목 인부들 사이에 성행했던 품앗이와 비슷하다.
한국의 가을 기후는 더할 나위 없이 쾌청했다. 특히 소래로 가면서 만난 시골 풍경은 아주 인상 깊었으며, 우리 일행은 엿새 동안 257㎞나 되는 길을 아주 즐겁게 여행했다. 소래에 있는 집들은 규모가 아주 작았다. 사방 210㎝를 넘는 방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집을 짓기로 했으나, 다음 봄까지 공사할 수 없어서 비좁은 방들에서 그럭저럭 겨울을 났다.
우리에게 방을 내준 안제경 선생과 서경조 선생은 서로 막역한 사이였으나, 상대방의 부인에게 말을 거는 일이 전혀 없었다. 부인들끼리도 아주 친하고 여러 해 동안 서로 집을 찾아다녔으면서도 말이다. 그곳에 와 있던 서양인 선생은 아직 한국 관습을 잘 몰랐고, 따라서 선비들에게 당신들이 만약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부인들도 선교사를 만나게 하여 서로 잘 알게 해 주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들은 큰 반대 없이 동의했고, 그날 밤 쉰 살 남짓한 두 여자는 난생처음으로 백인 남자와 대화를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식구 이외 다른 한국 남자와도 대화를 나누었다. 토론토와 디트로이트에 사는 친구들이 소포로 선물을 보내온 덕분에 나는 사람들을 대접할 수 있었다. 내가 정성스럽게 만든 ‘진수성찬’을 한국 여인들이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게도 아주 풍성했던 그 케이크를 여인들이 아주 맛있게 먹던 일은 잊을 수 없다. 저렇게 열심히 먹다가 체하지 않을까 염려할 정도였다. <계속>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4>] 표현의 한계와 복음 전파의 어려움
겸손하신 예수 설명하기 위해 언어와 씨름하다
종교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바꾸는 것 쉽지 않아
소래에는 기독교 사역이 아직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소년반을 하나 만들었고, 마을 여성 중에서 유일하게 글을 깨우친 안제경 선생 부인이 부인들과 소녀들을 가르치겠다고 약속해서 큰 만족을 얻었다. 나는 한국어로 찬송을 부르고 싶었고, 사람들에게 찬송을 가르치고 싶었다. 이 일은 찬송들이 번역되기까지는 할 수 없었다.
나는 한국어 어휘를 잘 모르는 까닭에 찬송 번역에 뛰어들기가 다소 겁이 났다. 그러나 “겁나는 게 있나? 그것이 자네를 겁내게 할 것”이라는 고향 친구의 말을 생각하고서 다소 어려움을 겪은 끝에 ‘예수 사랑하심은’, ‘나는 참 기쁘다’ 같은 간단한 찬송들을 번역했다.
‘겸손’이라는 관습 차이
그러나 본격적인 씨름을 한 것은 ‘보고 생명을 얻으라’는 찬송을 번역하면서 한국어로 표현하는 한국 관습과 부딪히면서부터였다. “너희에게 생명을 바치신다”는 문장이 문제가 되었다. 한국어에는 하인이 상전에게, 백성이 임금에게 어떤 것을 바칠 때를 제외하고는 바치는 것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었다.
한국 친구들 가운데 서너 명은 그 말을 듣자마자 “그거 가당치 않은 일이오” 하고 말했다. “왜 그렇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야 위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비천한 하인의 자리로 끌어내리고, 우리 같은 진토의 벌레들을 높은 자리로 끌어올리기 때문이오”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게 복음의 진리 아닙니까?” “아니오. 아니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형제 여러분, 그건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말씀을 제대로 배웠다고 할 수 없는 이 동양의 친구들은 계속 고집하기를, “하지만 하인이나 백성이 자기 임금에게 무엇을 바칠 때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바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 이제 여러분 나라의 관습을 이해할 수 있겠군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셔서 하인의 자리에 내려가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신다면, 우리로서는 겸손히 감사한 마음으로 그 놀라운 은혜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나라의 관습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우주의 왕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그래도 그들은 완강하게 대답하기를, “하나님이 하인의 자리를 취하셨다니 말도 되지 않습니다. 전혀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종’인 예수를 설명하다
나는 한자어 성경 빌립보서 2장을 펴서 5절 마지막 구절부터 11절까지 읽어 보라고 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전에 그들에게 로마서 6장 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라는 말씀을 가르친 적이 있었으므로 이 놀라운 성경 진리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비록 그리스도인들이라고 고백은 하였으나, 그 뒤의 행실로는 단지 종교적인 사람들임을 드러냈고, 그리스도 영광의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도록 사탄이 그들의 마음을 가려 왔음을 드러냈다.
세상 어디서든 ‘자연인’이 늘 그렇듯이, 그들에게는 복음보다 관습이 더 크게 보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선비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종의 형상을 입으셨다고 선언합니다. 오늘날 여러분의 하인들이 여러분에게 하듯 그분은 두 손을 뻗어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명을 값없는 선물로 ‘바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선물을 걷어찰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말했듯이, 진토의 벌레들과 같은 우리 앞에서 영광의 주님은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그분의 이름으로, 그리고 다음과 같은 찬송으로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선언합니다.
“생명을 여러분에게 ‘바치시네!’ 할렐루야!”
“하나님이 그 생명을 여러분에게 ‘바치시네.’”
그 때 나는 ‘바치다’라는 한국어에 위와 같은 히브리어의 벅찬 감탄사를 첨가하는 즐거운 특권을 누렸다. 그리스도가 전파되기 전까지 한국어에는 그런 용례가 없었던 것이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5>] 한국 관습에 대해 조금 이해하다
소래 생활 두 달 뒤 영어보다 한글 먼저 생각나
풍속과 법에 관한 차이 등 구별 여전히 어려워
내가 소래에서 언어를 공부한 이유는 비록 나는 영어 성경을 사용하더라도 그곳 한국인들에게는 한자 성경을 마련해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성경 장들의 수를 헤아리는 방식으로 성경 이 책과 저 책을 구분할 수 있었고, 한글 선생에게 부탁하여 영어 성경에 한글로 각 책 이름을 써넣었다. 그런 다음 각 장과 절에 해당하는 단어들을 익혔다. 숫자는 그전에 익혔다. 이런 방식으로 영한사전을 펴들고서, 이를테면 ‘속죄’라는 단어를 찾은 다음, 레위기 17장 11절을 펴서 다 함께 속죄라는 주제를 공부했다. 그들의 인내와, 부피가 큰 사전, 그리고 내 작은 인내에 힘입어 마침내 속죄의 큰 비밀을 담은 다음 절을 이해시킬 수 있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국인들은 미국인이나 영국인보다 제사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구약의 속죄 제사를 가르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단락별로 공부해 가면서 하나님이 속죄에 관해 하신 말씀을 익혔다. 한 주제를 마친 다음에 다른 주제를 택했다.
두 달 뒤 서울로 돌아왔을 때, 나는 나 자신이 한글로 생각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어떤 친구에게 영어로 말할 때 먼저 한글 단어를 생각하고 그것에 해당하는 영어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정도였다. 영어권에서 떠나, 자기들 말밖에 하지 않는 한국인들 틈에서 지낸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에, 한국어의 중추가 되는 관용어가 지워지지 않을 만큼 뇌리에 뚜렷이 새겨졌다. 한국어를 익히는 두 달 동안 잠시 불편을 겪고 사람들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을 뿐, 나 스스로 무슨 특별한 노력을 기울인 것도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한국어는 여전히 어렵다.
서울로 돌아온 지 며칠 있다가 한국 최초 그리스도인이자 그들 중 최고 연장자와 대화를 나눴다. 그에게 내가 한글로 번역한 ‘봄으로써 얻는 생명’이라는 찬송을 보여 주고서 견해를 물었더니, 그는 한 절씩 꼼꼼히 읽어 가면서 “잘하셨군요”라고 말했다. 물론 소래 사람들처럼 ‘바치다(offer)’라는 단어를 보기 전까지 말이다. 그 단어를 보더니 소래 사람들처럼 금방 글에서 눈을 떼고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하나님을 하인이라는 낮은 자리에 두다니 두려운 일”이라고 했다.
그런 뒤 소래에서와 마찬가지로 긴 변론이 있었고, 결국 이 귀한 한국인 형제에게 혹시 빌립보서 2장 6~11절의 말씀을 잊고 있는 게 아니냐고 묻고는 성경을 펴서 그 부분을 한번 읽어 보라고 했다. 그 부분을 읽은 그는 한동안 그 안에 담긴 진리를 생각하더니, “고맙소, 목자 양반” 하고 나직이 말했다. 그런 뒤 황인과 백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자신을 겸허히 낮추신 일을 말하는 감격스러운 사귐의 순간이 있었다.
한참 대화를 나누는데 내게 거처를 내준 이-그는 선교사였다-의 젊은 선생이 방으로 들어왔다. 한국에서는 감춰 놓지 않은 책은 모두 공동 재산이었으므로, 그 선생은 즉시 내가 번역한 찬송을 집어 들고서 읽기 시작했다. 한 마디 평가도 없이 읽어내려 가다가, 그도 ‘바치다’라는 단어를 만났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흥분하면서 분개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그 한국인 형제에게 대답해 주도록 부탁했다.
신약성경은 여전히 빌립보서 2장이 펼쳐져 있었고, 연로한 형제는 그 단락을 가리키면서 “이곳을 읽어 봤는가?” 하고 말했다. 젊은이는 입을 다물고 읽더니 조용히 걸어 나갔다. 문을 열고 돌아선 그의 얼굴에는 두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처음 보았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 말씀을 처음 읽었다는 말이었다. 그 찬송으로 이렇게 큰 체험을 한 나는 그토록 오르기에 높고 가파른 ‘관습’이라는 산을 이미 넘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가득히 밀려왔다.
한국에서는 ‘풍속’, ‘례’(원칙들과 관례), ‘법’(불문율) 세 가지 중에서 ‘법’이 가장 크다. 세 가지가 일반적이고 특수한 일들에 뒤섞여 있고, 용어들도 자주 바뀌어 쓰인다. 영어권에서는 대개 ‘관습’(custom)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하는 단어들이다.
그중에서 ‘법’은 이를테면 짐꾼을 부린 뒤 지불하는 삯에서부터, 죄수를 죽이고 살리는 판결에 이르기까지 대소 간의 법 절차와 거래에 해당한다. ‘법’은 한글에서 가장 강력한 단어다. 무엇을 가리켜 나라의 ‘법’이라고 하거나 가문의 ‘법’이라고 하면 모든 논쟁은 그것으로 끝난다. “그런 법이 어디 있소?” 하거나 “그건 누구나 다 아는 ‘법’이오”라는 말들은 상대방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통렬한 말이다. 한국은 계약과 협정의 나라가 아니다. 부동산에 관한 문서들과 현금 증서들, 그리고 결혼 증서를 제외하고는 문서로 남기는 계약이 거의 없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5>] 한국 관습에 대해 조금 이해하다
소래 생활 두 달 뒤 영어보다 한글 먼저 생각나
풍속과 법에 관한 차이 등 구별 여전히 어려워
내가 소래에서 언어를 공부한 이유는 비록 나는 영어 성경을 사용하더라도 그곳 한국인들에게는 한자 성경을 마련해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성경 장들의 수를 헤아리는 방식으로 성경 이 책과 저 책을 구분할 수 있었고, 한글 선생에게 부탁하여 영어 성경에 한글로 각 책 이름을 써넣었다. 그런 다음 각 장과 절에 해당하는 단어들을 익혔다. 숫자는 그전에 익혔다. 이런 방식으로 영한사전을 펴들고서, 이를테면 ‘속죄’라는 단어를 찾은 다음, 레위기 17장 11절을 펴서 다 함께 속죄라는 주제를 공부했다. 그들의 인내와, 부피가 큰 사전, 그리고 내 작은 인내에 힘입어 마침내 속죄의 큰 비밀을 담은 다음 절을 이해시킬 수 있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국인들은 미국인이나 영국인보다 제사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구약의 속죄 제사를 가르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단락별로 공부해 가면서 하나님이 속죄에 관해 하신 말씀을 익혔다. 한 주제를 마친 다음에 다른 주제를 택했다.
두 달 뒤 서울로 돌아왔을 때, 나는 나 자신이 한글로 생각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어떤 친구에게 영어로 말할 때 먼저 한글 단어를 생각하고 그것에 해당하는 영어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정도였다. 영어권에서 떠나, 자기들 말밖에 하지 않는 한국인들 틈에서 지낸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에, 한국어의 중추가 되는 관용어가 지워지지 않을 만큼 뇌리에 뚜렷이 새겨졌다. 한국어를 익히는 두 달 동안 잠시 불편을 겪고 사람들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을 뿐, 나 스스로 무슨 특별한 노력을 기울인 것도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한국어는 여전히 어렵다.
서울로 돌아온 지 며칠 있다가 한국 최초 그리스도인이자 그들 중 최고 연장자와 대화를 나눴다. 그에게 내가 한글로 번역한 ‘봄으로써 얻는 생명’이라는 찬송을 보여 주고서 견해를 물었더니, 그는 한 절씩 꼼꼼히 읽어 가면서 “잘하셨군요”라고 말했다. 물론 소래 사람들처럼 ‘바치다(offer)’라는 단어를 보기 전까지 말이다. 그 단어를 보더니 소래 사람들처럼 금방 글에서 눈을 떼고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하나님을 하인이라는 낮은 자리에 두다니 두려운 일”이라고 했다.
그런 뒤 소래에서와 마찬가지로 긴 변론이 있었고, 결국 이 귀한 한국인 형제에게 혹시 빌립보서 2장 6~11절의 말씀을 잊고 있는 게 아니냐고 묻고는 성경을 펴서 그 부분을 한번 읽어 보라고 했다. 그 부분을 읽은 그는 한동안 그 안에 담긴 진리를 생각하더니, “고맙소, 목자 양반” 하고 나직이 말했다. 그런 뒤 황인과 백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자신을 겸허히 낮추신 일을 말하는 감격스러운 사귐의 순간이 있었다.
한참 대화를 나누는데 내게 거처를 내준 이-그는 선교사였다-의 젊은 선생이 방으로 들어왔다. 한국에서는 감춰 놓지 않은 책은 모두 공동 재산이었으므로, 그 선생은 즉시 내가 번역한 찬송을 집어 들고서 읽기 시작했다. 한 마디 평가도 없이 읽어내려 가다가, 그도 ‘바치다’라는 단어를 만났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흥분하면서 분개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그 한국인 형제에게 대답해 주도록 부탁했다.
신약성경은 여전히 빌립보서 2장이 펼쳐져 있었고, 연로한 형제는 그 단락을 가리키면서 “이곳을 읽어 봤는가?” 하고 말했다. 젊은이는 입을 다물고 읽더니 조용히 걸어 나갔다. 문을 열고 돌아선 그의 얼굴에는 두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처음 보았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 말씀을 처음 읽었다는 말이었다. 그 찬송으로 이렇게 큰 체험을 한 나는 그토록 오르기에 높고 가파른 ‘관습’이라는 산을 이미 넘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가득히 밀려왔다.
한국에서는 ‘풍속’, ‘례’(원칙들과 관례), ‘법’(불문율) 세 가지 중에서 ‘법’이 가장 크다. 세 가지가 일반적이고 특수한 일들에 뒤섞여 있고, 용어들도 자주 바뀌어 쓰인다. 영어권에서는 대개 ‘관습’(custom)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하는 단어들이다.
그중에서 ‘법’은 이를테면 짐꾼을 부린 뒤 지불하는 삯에서부터, 죄수를 죽이고 살리는 판결에 이르기까지 대소 간의 법 절차와 거래에 해당한다. ‘법’은 한글에서 가장 강력한 단어다. 무엇을 가리켜 나라의 ‘법’이라고 하거나 가문의 ‘법’이라고 하면 모든 논쟁은 그것으로 끝난다. “그런 법이 어디 있소?” 하거나 “그건 누구나 다 아는 ‘법’이오”라는 말들은 상대방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통렬한 말이다. 한국은 계약과 협정의 나라가 아니다. 부동산에 관한 문서들과 현금 증서들, 그리고 결혼 증서를 제외하고는 문서로 남기는 계약이 거의 없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7>] 매켄지 선교사의 용기와 기질을 보다
동학군에 맞서 마을 전체 보호한 일에 감탄
일찍 세상 떠났지만 그 영향력은 계속 남아
소래를 두 번째로 떠난 뒤 동해안 원산에서 선교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곳에는 아직 프로테스탄트 선교부가 설치되지 않았다. 원산에서 사역을 마치고 6년 만에 고국을 방문한 뒤에야 비로소 내가 한국에서 처음 사역을 시작한 황해도 소래를 찾아가 보았다.
그동안 노바스코샤(캐나다)에서 온 매켄지 선생이 그곳에서 1년가량 지내며 내가 살던 집에서 살았는데, 아마 정원이 고향 냄새를 물씬 풍겼으리라 믿는다. 중국 의화단(義和團)과 마찬가지로 청일 전쟁을 틈타 한국에서 일어난 ‘동학군(東學軍)’이라는 두려운 집단은 소래 사람들에게 큰 불안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상황을 일하실 기회로 삼으셨음이 훗날 입증되었다.
매켄지 선생은 마을 사람들이 자기들의 물건을 보호해 달라는 부탁을 해올 만큼 큰 신망을 얻고 있었다. 그들이 가져온 물건들은 그의 집 둘레에 가득 쌓였고, 그는 그 위에 영국기와 자신이 고안한 깃발-흰 바탕에 빨간 십자가-을 꽂았다. 그 이래로 이 깃발은 한국 전역에 기독교 교회를 상징하는 깃발로 알려졌다.
‘동학군’이 매켄지 선생을 죽이고 그를 감싼 마을 전체를 쑥밭으로 만들려고 몰려온다는 소문이 여러 번 들렸다. 그러나 매켄지 선생은 용기와 지혜를 발휘해 마침내 그들의 병영을 찾아갔다. 이 반란군들과 조용하고 온화한 대화를 나눈 끝에 백인과 기독교 선교에 대한 악감정을 몰아냈다. 이 선교사에게 위탁한 재산들이 그대로 보호되었고, 매켄지 선생은 마을 사람들이 감사한 뜻으로 내놓은 선물의 한도 내에서 소래 지역에서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을 겪은 뒤 매켄지 선생은 안타깝게도 전염병에 걸려 하늘의 상급을 받으러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잡초를 뽑고 있을 뿐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곳에 씨를 뿌렸고 자신은 그 소산을 거둘 뿐이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그 큰 풍채를 여간해서는 놀려두는 법이 없었다고들 했다. 그는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다니면서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샀다. 그가 잠들자 주변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애도했고, 아주 큰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러 주었다. 고결한 사람! 그는 살아서 자신의 기도가 응답받고, 자기의 헌신이 보상받는 것을 지켜보지 못했으나, 남아 있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희생에 내리신 풍성한 보상을 지켜보고 있다.
매켄지 선생이 죽고 이듬해 봄이 찾아왔을 때, 나는 캐나다에서 원산으로 돌아왔다. 당시는 러일 전쟁이 벌어지던 때라 원산에 주둔한 일본군 기지를 일본군 초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내 숙소로 가려면 일본군 기지 곁을 지나가야만 했다. 내가 타고 온 증기선은 군수물자들을 적재한 배로서 뭍에서 5㎞ 밖에 정박했기 때문에, 나는 새벽 3시에 우편선을 타고 뭍으로 향했다. 우편물 담당자와 면식이 있는 덕택에 총에 맞지 않고 시내로 들어갔다. 기지 근처 초소를 지나기란 더욱 위험했다. “정지!” 하고 외치면서 즉시 총을 겨누던 초병들은 내가 일본어로 원산 거주자임을 설명하자 총을 거두고 통과시켜 주었다. 칠흑같이 캄캄한 새벽이었다.
소래에 다시 가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겨울 전에 맞춰 가기란 불가능했다. 원산에는 성탄절쯤이면 대개 눈이 내렸고, 따라서 눈이 내리기 전에 산맥 서편 기슭에 도착하든가 아니면 눈신을 신고 산을 넘든가 해야 했다. 한국 사람들은 15㎝가량인 버들가지들을 사슴 가죽끈으로 엮은, 지름 30㎝가량 되는 둥그런 눈신을 신는다. 깊은 눈을 헤치며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고생을 면하려면 원산에서 성탄절 만찬을 갖지 못하는 아쉬움을 감수해야 한다.
소래로 돌아가는 길 도중 우리는 어느 산중 마을에 머물렀다. 과거에는 예수 이름이 한 번도 선포된 적이 없던 그곳에서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 아들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두 남자를 만났다. 그곳에서 천사들도 부러워할 만큼 구속받은 사람들과 함께 성탄절을 보내게 된 것이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8>] 성탄절 무렵 첫 선교지인 소래 찾다
6년 전 처음으로 복음 전한 지역 다시 찾으니
구원받은 여러 가정이 사모함으로 펜윅 기다려
12월 25일. 시종(侍從)이라 하는 충직한 ‘소년’과 함께 거세게 쏟아지는 눈발을 맞으며 산길을 갔다.
처음 복음을 전한 황해도 소래에 가기 위해서였다. 북서쪽으로 돌아 서해안을 따라 내려갔으나 소래까지는 아직도 96㎞나 남아 있었다. 조랑말이 뒷다리를 절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주저앉고 말았다. 소들은 수숫단을 먹고 잘 자라지만, 말들은 그것을 너무 많이 먹으면 죽게 된다. 말이 주저앉은 곳 근처에 있는 마을에 호소하니 마을 사람들이 따뜻하게 환대해 주었다.
한국에서는 나그네를 언제나 그렇게 맞이하는데, 마치 한국인들의 혈관에 아랍인들의 피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마을 사람들은 즉시 가장 좋은 집을 비워 우리가 편히 쓰도록 해 주었고, 이 나라에서는 드문 일이긴 하나 주저앉은 말에게도 안락한 마구간을 제공해주었다. 이곳에서 사흘을 머물면서 구속의 사랑 이야기를 전하였다.
사흘째 되던 날 주인은 “사람들 가운데는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그게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하면서 사도행전 4장 12절을 보여 주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전하는 이 예수를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가엾은 사람! 나는 “온 땅의 재판장께서 공의를 행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에 관해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나는 로마서 2장을 인용하였고, 그가 좀 더 캐묻기에 시편 9편 17절을 인용한 다음 그들이 악한지 악하지 않은지 스스로 판단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그는 호통을 쳤다. “내 조상은 예수를 믿지 않고 죽었소. 예수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소. 만약 그들이 지옥에 간다면 나는 그들과 함께 가겠소.” 그때 내 심정이 어땠는지는 말로 형용할 길이 없다.
소래 지역 복음화되다
조랑말이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고, 하룻길을 더 가니 소래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질러가면 16㎞가 남은 셈이고, 해변 길로 돌아가면 48㎞가 남은 셈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눈길은 아무도 갈 수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나는 “그러나 나는 캐나다 사람으로서 눈을 이용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들은 무덤덤하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깊이 쌓인 눈을 헤치고 잠시 산을 오르다가 우리는 나무꾼의 샛길을 발견하였다.
미국 인디언들이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썰매에 겨울용 땔감을 싣고 끌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아름다운 고갯길 정상에 이르러 바위들과 상록수들, 눈과 급히 흐르는 여울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정경을 만났을 때, 앞에서 한 꼬마가 외제 손가방을 들고 오고 있었다. 그게 누구 가방인지 궁금해서 물었더니 내가 잘 아는 어느 관리의 아들 것이라고 했다. 그가 올라왔을 때 우리는 소래 사람들이 모두 안녕하다는 소식과, 안제경 선생과 서경조 선생이 뒤따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큰 바위 위에 올라서서 보니 두 양반이 등성이를 막 올라오고 있었다. “게 누구요?” 하고 소리치자, 내 모습을 본 그들은 눈을 헤치고 황급히 뛰어 올라와 나를 끌어안았다. 밝은 표정에서 그들의 정황을 읽을 수 있었다.
서 선생은 나를 보자마자 가슴을 치면서, “당신을 여기서 뵙다니 하나님이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제 죄를 용서해 주셨군요” 하고 말하면서, 안 선생을 가리키면서 “저 죄인에게도 주께서 자비를 베푸시고 그 죄를 용서해주셨고, 우리 마을 전체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셨습니다” 하고 말했다. 안 선생은 관청에 들러야 했으므로, 서 선생이 나와 함께 가게 되었다. 안 선생은 서 선생으로부터 나를 꼭 자기 아내에게 데리고 가겠다는 다짐을 받은 뒤에 길을 떠났다. 서 선생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잘 아시겠지만, 안 선생 부인은 지난 6년 동안 선생님을 다시 보내 달라고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했답니다.” 우리가 안 선생의 집에 도착했을 때 서 선생은 안 선생 부인을 불렀다. 그녀는 힘없이 뜰로 걸어 나왔다. 불구여서 지팡이에 크게 의지했기 때문이다. 나를 보자 곧장 다가와 내 손을 붙들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주여, 이제 당신의 여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군요, 제 기도를 들으사 선생님을 다시 보내 주셨습니다.”
나는 종종 그때의 광경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면류관을 장식할 보석을 얻는 데 들인 비용에 대한 대가치고는 참으로 풍성한 대가였다고 확신하곤 한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9>] 귀신 숭배 마을이 예배하는 장소로
마을 주민 300여 명, 죄를 회개하며 주께로
더 큰 역사 이룰 기회 놓친 것 후회스러워
지난날, 귀신 숭배가 그치고 주님을 예배할 장소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던 작은 숲이 눈에 들어왔다. 의젓하게 서 있는 나무들 앞에는 아름다운 기와지붕을 얹은 예배당이 서 있었다. 구속받은 마을 사람들이 세운 예배당이었다. 그날 밤 기도회 때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가 된 교인 300여 명 앞에서 기도와 찬송을 인도하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 뒤로 두 주일 동안 성경공부를 했는데, 아침과 낮은 남자들을 대상으로, 저녁 시간은 안 선생 집에서 여자들을 대상으로 했다. 안 선생 부인이 이 여자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데 크나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서로의 죄를 자백하다
열 이틀째 되던 날, 나는 오랜 친구를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우리 집회에 역사하고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내 눈에는 조금이라도 감격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죄인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들이 아무리 악해도 성령의 역사는 막을 수 없습니다. 이곳 신자 중에서 누가 서로 미워하는지 제게 말해 주십시오.”
그 사람은 엎드려 울면서 자기와 다른 두 사람이 서로 미워하게 된 가엾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나님께 사죄를 구하고 그들에게 가서 용서를 구하지 않겠느냐고 묻자,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는 하나님과 화목하고서 형제들과도 화목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 형제 중 한 사람은 마침 내 말(馬)에 편자를 달고 있었다. 내 친구가 그 사람에게 가서 연장을 집어주고 말의 발을 들어주는 등 도와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기뻤다. 기회가 생기자 그는 두 사람을 각각 찾아가서 지금까지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노라고 고백했다. 다음 날은 주일이었다. 제자 300여 명이 모였을 때 죄 씻음을 받은 교인이 그들 앞에서 간증하자 그들은 모두 자기 죄를 자백하면서 울었다.
며칠 뒤 동료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에게 그때의 정경을 말해 주니까, 그는 매우 가슴 아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형제, 수천 리를 걷더라도 죄 때문에 그렇게 운 한국인을 만나 보고 싶군요. 난 아직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소래 사람들은 내게 남아서 자기들의 목사가 되어 달라고 간청했다. 급료를 지불하고, 더 큰 집을 지어 주고, 하인들을 붙여 주고, 길 잃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돕겠노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거절했다. 이미 내가 없는 동안 다른 선교부가 소래 지역에서 이미 사역을 시작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에 열린 문을 통해 하나님과 함께 당당하게 들어가지 못하고 문제가 복잡해지는 걸 더 두려워했던 것을 나는 두고두고 후회한다.
만약 그때 이런저런 관습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더라면 주께서 예비하신 이 사람들에 의해 이 나라에 은혜의 역사가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다. 때로는 평화를 사는 데 지나치게 비싼 값이 들 때도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작별할 시간이 오자 사람들은 혼자 가겠다는 나를 만류하고서 가장 유망한 청년을 나와 함께 가게 했다. 그 청년에게 목회 훈련을 받게 하려는 뜻이었다. 그 밖에도 소책자들을 발행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돈을 내게 주었고, 40리 밖까지 배웅했다. 나는 다음 두 주일을 서울에서 그들의 사랑을 전하면서 보냈다. 그 소식은 동료 선교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었고, 오랜 친구들에게 새로운 힘을 북돋워 주었다.
근면하며 지적 능력이 뛰어난 한국 사람들
서양에서 한국에 운명을 걸고 온 학생들은 한국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들의 뿌리가 어디인지를 알고 싶어 한다.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몽골족에서 유래했고 아랍인의 피가 약간 섞였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으나, 확신할 만큼 충분하지는 않다. 아랍인들은 7~9세기에 한국에서 무역했는데, 아마 이때 그들의 몇 가지 관습을 이곳에 남긴 듯하다. 아랍인들의 매사냥은 심지어 매를 훈련하고 선별하는 것까지도 한국에서 똑같이 시행한다. 한국인들이 손님을 극진하게 환대하는 것도 이스마엘 자손들의 관습과 비슷하다.
생김새는 중국 사람들과 다르고, 일본 사람들과도 딴판이다. 일본 사람들보다 키가 훤칠하고 몸집도 크고, 지적으로도 더 우수하며, 일본 사람들에게 가득한 잔인한 말레이 족의 피가 조금도 흐르지 않는다. 한국 사람들은 명민(明敏)하여 어떤 가르침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고, 창의력이 있고, 근면하고, 고생과 시련을 거의 초인적으로 잘 참아 내며, 적자가 생존하는 야생 동물들과 비슷한 활력을 갖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아기를 낳아도 천연두에 면역되기 전까지는 자녀의 수에 넣지 않는다.
그들의 윤리는 주로 유교 윤리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아주 냉정하게 말해서 그리스도를 빼놓고 생각하면 중국과 한국 문화는 서양 문화보다 인류의 평화와 행복에 훨씬 더 많이 이바지해 온 게 사실이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0>] 한국인에게 사역을 맡기다
위험 요소 안고 현지인 사역자 세워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람임을 깨달아
1893년 나는 캐나다로 돌아갔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3년이라는 대기 기간을 주셨다. 당시에 나는 다른 선교부들처럼 한국에 여러 백인 선교사를 데리고 가라는 여론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으며, 오히려 교단의 ‘신조와 의식집’(Principles and Practices)에 본토인 신자를 설교자로 세우는 것을 금하는 문구를 삽입했다. 아무래도 본토인이 잘못된 교리를 전할 우려 때문이었다. 고국에 있는 동안 나는 영적으로 큰 복을 받았고,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일해 보고 싶었다. 마침내 가도록 허락을 받았다.
사역의 방향을 바꾸다
한국에 도착한 지 하루나 이틀 뒤에 드린 첫째 예배에서 7명이 그리스도께 신앙을 고백했다. 당시에는 그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기는 고사하고, 한 사람도 믿음을 견지하지 못했다. 그 뒤에 곧바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다시 한 번 사역을 시작하여 전도와 설득을 되풀이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은 신앙을 고백했으나, 목욕시킨 돼지처럼 즉시 진흙탕으로 다시 가서 뒹굴었다. 이렇게 좌절에 싸여 몇 년을 보내다가, 마침내 무슨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나와 만난 뒤 다른 선교부에 소속하여 한국에 왔던 미국 선교사들이 그 무렵에 불만을 느끼고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그 선교부 책임자가 선교부 재산을 내게 넘겨주었다. 또 같은 시간에 깨끗하지 않은 노란색 상복을 입은 키 작은 사람이 그리스도께 돌아와 훌륭히 신앙을 고백하는 일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사역을 맡기기로 하였다. 그에게 맡긴 지역은 내가 살던 곳에서 480㎞나 떨어진 곳이었고, 한국인에게 그렇게 먼 지역을 맡도록 보낸다는 것은 큰 호수를 헤엄쳐 건너려는 것처럼 무모하게 보였다. 나는 예수님이 자기 양들이 아무리 휘하의 목자로부터 480㎞나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그들에게 참으로 선하신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아직 체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차후 목사가 된 신명균 씨를 만나다
우리는 그 사람을 우리의 손이 직접 닿지 않는 먼 사역지로 보내면서 염려를 떨치지 못했다. 그는 그다지 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믿음’이 충분히 뿌리를 내렸다고도 할 수 없었으므로 그것은 훨씬 더 힘들었다. 그는 이미 아버지와 형과 갈라서는 시련을 잘 견뎌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집안은 그가 그리스도께 충성을 맹세했다는 말을 듣고는 그를 내쫓았던 것이다. 어머니와 아내는 그의 편에 섰다. 두 부녀가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구주가 자기들의 구주이고 그의 하나님이 자기들의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내용을 보았다.
신명균(초대 침례교인, 일본강점기에 순교)이라고 하는 이 사람은 맨 처음 주일예배에 참석했을 때 한국의 누런 상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관례에 따라 삼년상을 치렀고, 무덤에서 마지막 제사를 지낸 뒤, 집으로 향했다. 겉옷이 더 구겨지고 너덜너덜할수록 상(喪)을 잘 치렀다는 표시였다. 신 선생은 분명히 그 의무를 잘 이루어냈을 것이다. 우리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더없이 처량해 보이던 그 모습에서 그 사실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 귀신을 숭배할 때 입던 누런 상복을 벗고 그리스도의 의라는 흠 없는 흰 세마포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셔서 사람의 누추한 육체를 입고 타락한 인간의 원수들을 하나씩 정복하면서 살아가신, 온전한 삶이라는 실로 촘촘히 짠, 흠 없는 도포를 입은 것이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전10:20)
얼마나 훌륭한 구주이신가! 그 크신 은혜로 사람을 귀신에게 제사하는-그 누추한 일을 하느라 옷을 버려가면서-자리에서 이끌어내사 피로 깨끗하게 하시고, 십자가로 과거와 단절케 하시면서, 말씀으로 그 정신을 씻어내셔서, 당신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보게 하신다.
죄와 삶의 애환에서 맴돌던 사람은 목자를 발견하고 그 영광과 아름다움을 본 다음부터는 거룩한 사랑과 감사의 자리로 나가고, 은혜를 갚기 위해서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바치게 된다. 신 선생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이 일을 했다. 그리스도를 발견한 지 열흘이 되었을 때 주께 무릎을 꿇고서, 이제는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없고, 따라서 그것을 주께 드리고자 한다고 아뢰고, 주께서 그것을 기쁘신 뜻대로 써주시기를 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기술자가 도구를 사용하듯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간단한 사실과 신 선생이 특별한 사역을 위해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사람이라는 사실을 나는 깨닫지 못했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1>] 현지인에게는 현지 사역자가 필요함을 알다
성경 공부로 청년들 가르쳤으나 모두 떠나
외국인으로서 깰 수 없는 벽 있음 깨달아
신명균 선생(초대 침례교인)은 맡은 일을 썩 잘했으므로 감독할 필요가 거의 없었다. 사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보다 더 오랜 경험을 했고, 성경 내용에 좀더 익숙하고, 사람들을 다루는 데 좀 더 경험이 있었으므로 내 조언이 그에게 도움이 되었고, 그도 지칠 줄 모르고 내게 조언을 구했다. 신 선생이 내게 어려움을 끼친 게 있다면 그것은 그가 더 많은 권한을 차지하려고 한 데 있지 않고 오히려 내가 그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려 해도 잘 받아들이지 않은 데 있었다.
내 눈은 아직 감겨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나는 유망한 청년들을 발굴하여 목회자로 가르치고 훈련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당시에 태평스럽게 세상에 젖어 살던 청년들 가운데 세 명을 지켜본 나와 아내는 성경 학교를 개설하여 청년들을 목회자로 양성하기로 했다. 당시에 우리가 좀 더 지혜로웠다면, 그런 일을 시작할 만한 건물도 재정도 없는 어려운 현실에서 섭리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열심이 너무 앞섰고, 전통도 그것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우리는 보조 교사 한 명을 두고 청년 네 명을 대상으로 학교를 시작했다.
학생들을 현실과 동떨어진 사람들로 만들거나, 배운 사람이 육체노동을 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한국의 인습에 그냥 젖어 있게 하지 않겠다는 결심 하에, 우리는 교과 과정을 편성할 때 오전에는 작은 농장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오후에는 공부하도록 정했다. 또 하나 관심을 기울인 것은 교육이 한 분야에만 치우쳐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무지하게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교과목을 성경과 읽기, 쓰기, 셈으로 한정하였고, 교수 방식을 서양식보다는 동양식으로 하기로 했다.
성경 교육은 일정 본문을 자유자재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반복해서 읽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려면 학생들은 재능과 기억력 정도에 따라 20번, 25번, 30번을 읽어야 했다. 이런 방식으로 청년들에게 모세 오경을 철저히 읽게 했다.
고금을 막론하고 학생들이 늘 그렇듯이, 시험을 쳐 보니 수준이 제각각이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유월절’(출13장)에 관한 시험이다. 첫째 청년은 사내답게 곧장 정확한 해석을 말했다. 그는 교사로부터 복음을 전해 보라는 과제를 받았다. 교사가 자신을 복음을 모르는 사람으로서 정말로 하나님이 사람들의 죄들을 사하셨는지 알고 싶어하는 구도자라고 가정하고서 전도해 보라는 것이었다. 둘째 청년도 과제를 잘해냈으나, 셋째 청년은 전혀 다르게 함으로써 아직 복음을 깨닫지 못했음을 드러냈다.
우리는 바른길을 가고 있다고 믿었다. 청년들을 안전하게 지키고, 그들이 새 은혜 언약을 전하는 사역자들로 성장하도록 최선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이따금 교회로부터 그들이 독선적이라거나, 신앙 연륜이 더 깊은 교인들 앞에서 더 많이 아는 체한다는 비판들이 간접적으로 들려왔으나, 우리는 시기심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서 더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아래와 같은 일을 만나고 말았다.
지력이 뛰어난 보조 교사는 일반 사회에 나가도 쉽게 지도자가 될 만큼 많은 지식을 터득한 다음 돈을 벌기 위해 세상으로 나갔다. 첫째와 둘째 청년들은 4년 훈련을 마친 뒤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선교사에게 설득을 받고는 그에게 넘어갔다. 제칠일을 지키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는 말과, 만약 자기에게 오면 적잖은 급료를 지불하고 앞으로 더 올려 주겠다는 제의에 넘어간 것이다. 그들보다 어렸던 청년은 영어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뛰쳐나갔고, 넷째 청년은 일찌감치 지쳐서 세상으로 갔다.
원산의 믿지 않던 한국인들마저 우리에게 4년 동안 무료로 교육과 도움을 받고는 활동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떠나 버린 청년들을 크게 비판했다. 한국인들은 동족이 외국인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외국인이 보는 앞에서 그에 관해 이렇다저렇다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청년들이 떠나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이들이 백인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이 동족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데 부적합하다는 사실을 아주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이것은 매우 호된 교훈이었다. 그 일을 겪고 난 뒤 우리는 자주 눈물로 베개를 적셨고, 그들이 우리를 버린 일로 크게 상심했다. 이제야 우리는 다른 나라에서 온 외국인은 이 긴요한 사역에 최선의 도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부터 우리가 철저히 실패한 곳에서 신 선생이 눈부시게 성공을 거둔 이야기를 하려 한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2>] 내가 실패한 곳에서 본토인 목사가 거둔 성공
헌신적인 노력으로 제자와 교회 세워나가
동양적 방법으로 거둔 놀라운 성과에 감탄
<사진설명> 신명균 선생과 그의 제자들이 전도를 위해 집을 나서고 있다.
신명균 선생이 우리 집에서 수백 킬로 떨어진 새 지역을 맡고 나서 맨 처음 한 일은, 귀신들린 어떤 청년을 고치고 그를 집중적으로 보살핀 일이다. 이 청년의 부모는 점잖고 형편이 넉넉하고 가문도 좋은 분들로서, 거듭난 뒤에 하나님의 가문에 들어왔고, 14세 난 아들을 신 선생에게 보내 그의 제자가 되게 했다.
한국에서는 이런 계약을 맺고 나면 제자를 ‘사람으로 만드는’-한국인들은 그 일을 이렇게 표현한다-과정에 따르는 모든 문제에 스승이 부모를 대신한다.
신 선생의 가정은 예수를 믿는 문제로 불화가 일어나서 아버지와 아들, 형제와 형제, 남편과 아내가 갈라졌다. 신 선생의 아내는 처음에는 남편을 지지하다가 다시 식구들에게로 돌아갔다. 하지만 신 선생과 좋은 가문 출신인 그의 노모는 집을 나가 사방 180센티밖에 되지 않는 비좁은 방에서 살았다.
신 선생은 이 방에 ‘판순’이라는 어린 제자를 들였다. 나중에 이 식구는 사역지로 이사했으나, 거처는 작은 오두막에 불과했다. 흙벽에 초가지붕을 얹은 사방 180센티 방 하나에, 너비 90센티 툇마루와, 한쪽 끝에 장대들을 세우고 그 위에 밀짚을 얹어 만든 부엌이 전부였다.
서양인 처지에서 신 선생의 아내(이때는 그에게 돌아와 있었음)와 자녀, 그리고 어머니가 그 작은 방에서 지내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그런 가운데서도 신 선생과 그의 어머니 간의 애정만큼 모자간에 애정을 나누며 사는 모습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나는 그럭저럭 15달러를 만들어 그에게 보내 집수리하는 데 사용하라고 했다. 그런데 다음번에 그곳으로 내려갔더니 여전히 그 누추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당연히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지만, 그는 자꾸만 대답을 회피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작달막하지만 헌신적인 이 양반이 주변 마을들에 전도자들을 보내는 데 그 돈을 써 버렸다고 했다. 신 선생한테 그 돈은 특별히 집수리하라고 보낸 건데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목사님, 주변 많은 이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 채 죽어 가는 상황에서 도무지 그 돈을 나를 위해 쓸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멸망해가는 이들에게 십자가의 사자들을 보내기 위해 그와 가족, 그리고 학생들이 묽은 죽으로 연명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주께서 이런 헌신에 보상하지 않으실 리 없다. 신 선생은 곧 교회를 열두 곳에 개척했고, 조랑말을 타고 정해 놓은 시간에 교회들을 방문했다. 교회를 방문할 때는 학생들을 여럿 데리고 다녔는데, 학생들은 종종걸음으로 조랑말 뒤를 따라갔다.
학생들은 이런 방식으로 그를 따라다니면서 신체적, 영적, 실제적 강의를 동시에 받았다. 물론 이것은 우리 서양식이 아니라 동양식이지만, 동양인들에게는 훨씬 더 좋은 방법이다. 잘 익은 과일에서 겸양이라는 아름다운 꽃을 따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개척한 지 얼마 안 되어 박해를 받았는데, 그럴 때는 학생들을 모아 놓고 대적들이 자신과 화해할 때까지 간절히 기도했다. 그 중 한번은 학생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교훈거리가 되었다. 그때 마귀는 학생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신앙이란 백인에 대한 경외일 뿐이라는 말로 꾀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주변에 백인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고, 그 일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다.
신 선생과 그의 가족이 안락한 새 집에서 살게 되자 우리는 안심이 되었다. 신 선생은 120달러를 들여 그 집을 직접 지었다. 그렇게 작달막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사역을 완수하였는지를 생각하면 항상 신기한 생각이 든다. 그는 언제나 학생들에게 시험을 냈고, 학생들의 진보는 가히 놀랄 만한 것이었다. 신 선생이 백인 다섯 명 몫의 사역을 맡아 고생하고 있다는 말이 자주 들려 왔는데, 그런데도 모든 게 번성하는 듯했다. 그의 교회들은 예절과 교양의 산실이었다. 그들은 모두 동양의 고상한 윤리로 교육받았고, 그들을 가르친 이 작은 동포를 속일 줄 몰랐다.
나는 그의 사역지를 둘러볼 때마다 이런 객관적인 교훈들을 접하면서, 어느덧 교만하던 내 마음속에 동양 문화에도 좋은 점들이 있을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중에 가서는 방법까지도 동양이 서양보다 더 성경에 가깝다는 점을 수긍하게 되었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3>] 복음 전단지와 쪽복음서로 전도에 박차
현지인 전도자들의 활약으로 교회 31곳 세워
감독자 필요… 신명균 선생 초대 목사로 임명
우리는 출입이 허용된 여러 지역을 되도록 철저히 전도하려 했으나, 그때 사용한 방법은 간단한 것이었다. 먼저 성경반을 열고, 성경과 ‘쪽복음서’들을 비치하고, 경험 있는 사람에게 그 공부반을 맡기며, 그를 그 지역 지도자로 삼는 것이다. 그에게는 현지의 필요와 우리에게 있는 전도자들의 상황에 따라 전도자 10~20명가량을 배속한다.
아직 우리는 군(郡)마다 전도자 한 사람을 세울 정도가 되지 못했다. 전도자는 성경-한 달 동안 팔 분량-을 짊어지고 자기가 맡은 군으로 가서 읍과 촌락들을 두루 방문한다. 한 집도 거르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을 만나며, 만나는 사람에게 간절히, 때로는 눈물로 호소하여 온전히 복음을 전한다. 한 권에 0.5센트나 1센트 하는 복음서를 그들이 사지 않으려고 할 때는 요한복음 3장이 적힌 전단이나 성경 본문들을 적절한 주제에 따라 배열해 놓은 전단을 건네준다. 관할 구역을 다 돌아보기 위해서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이 일을 되풀이한다.
<사진설명> 신 목사의 새 집. 이 집을 짓는 데 120달러의 경비가 들었다.
예수의 영에 힘입어 이 일이 철저히, 진실하게, 반복해서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그 군이 복음화한 것으로 여긴다. 우리는 주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복음 전도를 쉬지 않고,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사람들은 주께서 자기 교회에 명령하신 바에 따라 복음을 전해들을 기회를 얻었다. 우리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를 전해 왔고, 죄를 씻고 청산케 하는 그분의 보혈과 십자가를 전해 왔다. 이렇게 위대한 구원을 등한히 할 때 어떤 결과들이 있었는지를 충실히 선포했다. 우리는 심판을 보고도 경고(警告)하지 않은 파수꾼에게 돌아갈 피의 죄책이 우리와 무관하다고 믿는다(겔33장).
교회 31개가 섰을 때, 우리는 사역을 한결같이 조직할 필요를 느껴 각자에게 임무를 맡겼다. 그동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도들의 지시를 귀담아들을 상황이 될 때까지 조직 문제를 미뤘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행6:3).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바울의 목회 서신들을 공부하면서 좀 더 구체적인 교훈들을 발견했다. 바울은 자신이 감독으로 임명한 디모데에게,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3:15) 하고 편지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임명한 또 다른 감독인 디도에게 편지할 때도,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찌라”(딛1:5~6) 하고 썼다.
우리는 조사(助事)들을 한 데 모으고,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 교육하기에 유익한’ 성경이 제시하는 방향이 되도록 가까이 가려는 뜻을 품고서 조직을 결성했다. 교회 회의가 열렸고, 모든 교인이 만장일치로 찬성하였으므로 형편에 따라 모든 교회에 십인 순장(반장)들, 오십인 순장(통장)들, 백인 순장(총장)들을 두기로 했다. 이들이 맡은 일은 집사들을 보조하는 것으로서, 집사들은 그들을 감독하고, 교회 재정을 관리하며, 신앙 감독도 하였다.
집사들 위에는 목사들이 임명되었는데, 이들에게는 조사(助事)들이 딸렸고, 조사들은 목사들의 감독 하에 담당 교회들을 돌아보았다. 목사들 위에는 감목 또는 치리 목사가 임명되었다.
목사들은 석 달에 한 번 담당 지역들에서 모임을 한다. 이 모임은 행정상 모임일 뿐 아니라 성경공부 모임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도 교회들은 주의만찬식을 거행하며, 지부 교회에서 순장들과 집사들로 임명받은 사람들을 연회에 보고한다. 목사들과 조사들은 감목이 임명한다. 실제로는 감목, 목사들 그리고 교인들은 임명 건들에 대해서, 성령이 교회의 문제들을 주관할 능력을 온전히 갖추고 계시다는 믿음을 가지고 모두 동의한다. 그리고 참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대한기독교회는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행13:2)라는 성령의 음성을 들어 왔다.
제1차 연회에서 성경이 규정한 요건들을 두루 갖추고 사역을 통해 자격을 충분히 드러낸 신 선생을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이방인들 가운데서 취하신(행15:14) 이 백성의 초대 목사로 임명하였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4>] 그리스도의 일꾼 손 선생의 괄목할 성장
신명균 목사가 훈련한 사람들과 내가 가르친 사람들 간의 차이가 있는데, 그의 학생들은 모두 유능하게 활동하지만 내 학생들의 활동은 모두 부진하다는 것이다. 신 목사는 자신이나 내가 가르친 학생들이 모두 하나가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단 몇 주만 내게 배웠을 뿐이다. 그가 백인과 너무 가까이 접촉하여 더 효과적으로 쓰이지 못하게 되기 전에, 하나님의 섭리로 그를 내게서 데려가신 것이다. 그가 멀리서 내게 훈련과 감독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이 그를 훌륭한 일꾼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외로운 상황이 그가 모든 조언을 기쁘게 듣게 해 주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신 목사 외에도 손 선생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도 훌륭한 사역자였다. 5년 전 나는 손 선생에게 침례를 베푸는 특권을 누렸다. 손 선생은 외모가 호감을 주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행동거지는 매우 교양이 있었으며, 침례 문답 때 그의 대답들은 아주 간결하고 정확한 데다 아주 영적이어서 나는 그에게 호감을 느꼈고, 장차 유용하게 쓸 재목이라고 생각했다.
일 년 뒤 그가 살던 지방에서 열린 사경회에 참석했을 때, 나는 신 목사에게 필사자 한 분을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손 선생을 불렀는데, 그의 필체는 아주 훌륭했다. 그가 글을 쓰는 동안 나는 그가 갖고 있던 신약성경을 집어 들었다. 한자 신약성경으로서, 중국에서 중국인들을 위해 번역 인쇄한 것이었다. 너무 많이 읽어서 책장이 거의 너덜너덜했고, 참 많이 사용했다는 표가 금방 났다.
“이 책을 읽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묻자, 그는 “조금 읽을 줄 압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에게 신약성경을 건네주면서 한 부분을 읽어 보라고 했더니, 마치 내가 영어 성경을 읽는 것처럼 조금도 막히지 않고 읽어 내려갔다. 한국에서는 한자를 익숙히 알지 못하면 학자 대접을 받지 못하므로, 나는 손 선생이 좋은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밖에 다른 흥미로운 자질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몹시 기뻤다.
<사진설명> 30명밖에 살지 않는 철도 마을 작은 시골 교회에 펜윅 선교사를 만나기 위해 인근지역과 먼 곳으로부터 신자들이 모였다.
우리 전도자들은 모두 성경들을 짊어지고 나가 팔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손 선생의 활동은 책 외판원으로는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영혼들을 얻고 교회들을 세우는 데는 탁월하였다. 그는 동료와 함께 짧은 기간에 여덟 교회를 세웠다. 그가 그 뒤에 내 눈에 띈 것은 2년 전 연회(年會)에서였다. 연회에서는 대개 참석자들에게 간증할 기회를 주는데, 이렇게 하는 목적은 다른 사람들이 그 간증을 듣고 유익을 얻고, 형제들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어떻게 자라가고 있는지를 알기 위함이다. 대략 스무 명이 간증을 한 다음 손 선생이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나직이 말했다.
“내 구원이 내게 달렸지 않다는 사실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목자께서 그 강하신 어깨에 나를 올려 태우고 가고 계십니다.”
단순 명료한 간증이었다. 성령께서 크게 역사 하시는 크고 작은 집회에서 교회의 위대한 설교자들의 설교를 듣는 것은 내 일생에서 크나큰 특권이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환한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시고, 피 흘리신 임마누엘의 다섯 군데 상처를 보이시고, 주께서 우리 가운데서 거니시며 왕의 옷깃 스치는 소리를 들려주실 때, 우리는 십자가의 노병(老兵)들, 강인하고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그 말씀의 사역자들이 머리가 하얗게 센 모습으로 눈물지으며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들었다.
손 선생이 간증할 때도 그러한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 글로 묘사하기는 어렵지만, 그 자리에서 간증을 들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는 그 역사를 직접 체험했다. 몇 달 뒤 다시 집회에 참석했을 때 손 선생이 다시 간증하였는데, 30초가량 명확하고, 간결하게 진행한 그의 영적인 간증은 마치 전류처럼 참석자들을 전율케 했다.
그는 조사(助師)로 임명되었다. 조사라는 직분은 당사자가 잘 감당해 내면 목사가 되는 디딤돌이다. 가르침이 필요한 해안 지방 교회로 내려간 그는 두 주일 뒤에 다음과 같은 보고를 보냈다.
“무자격한 제가 복된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된 것은 귀하신 우리 주께서 무한한 은혜로 베푸신 큰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역 결과 여덟 사람이 복음 전도자가 되기로 주께 헌신했습니다.”
그 뒤에 손 선생은 160㎞ 더 남쪽으로 파송되었다. 그곳은 정규 사역이 이루어진 적이 없는 곳이었다. 그는 이 사명을 수락하면서 한 달에 5달러밖에 안 되는 자신의 급료를 쪼개서 형제 한 명과 더불어 길을 나섰다. 두 사람 다 성경 꾸러미를 짊어졌다. 여섯 주가 못 되어 감동적인 편지가 왔다. 각각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한 교회씩 세웠다는 반가운 소식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또 다른 무리의 교회들을 돌볼 목사가 필요했으므로, 손 선생에게 그 교회들을 맡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그들은 이 제의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5>] ‘걸어 다니는 성구 사전’ 장석준 목사
신명균 목사에게 5년 동안 훈련받으며 성장
성경 각 장 주요 구절 암송… 순회 사역 동참
판순이는 대한기독교회(기독교한국침례회)에서 최초로 결혼한 청년이다. 그는 집사 아들로서 집사 딸과 약혼한 다음 고향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그 마을에서는 그것이 기독교 결혼식으로는 처음이었기에 마을 사람들이 전부 나와 구경했다.
나는 그날 모인 군중처럼 질서정연한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처녀가 친정과 부모를 떠나 시댁과 시부모에게 갈 때는 사실상 아내가 아니라 하인이 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신랑 부모에게 신부를 하인이 아닌 딸로 대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했다. 결혼 예식을 도와준 엠 이 선교회(M. E. Mission) 맥길 목사(Rev. W.B. McGill, M.D.)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이 신부를 위해 그 약속을 받아낼 때 신부가 얼마나 고마워하는 표정을 지었는지 보셨어야 했는데 그랬군요.”
한국 관습에 따라 판순이는 그날 이름을 석준으로 바꾸었고, 어른이 되었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를 장석준 선생이라 불렀다. 그가 신명균 선생과 함께 5년을 공부했다. 그는 주기적으로 우리 집에 와서 쉬기도 하고 공부도 하였다. 올 때마다 혼자서 씨름하던 문제들을 잔뜩 가지고 와서 질문했기 때문에 아주 흥미로운 학생이었다. 그러던 그가 신약성경에 대한 생생한 지식을 얻고,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주요 장들을 암송하고, 어떤 신약성경 구절을 듣더라도 성경책을 펴서 찾을 정도가 되었으므로, 나는 순회 목회하는 동안 그를 ‘걸어 다니는 성구 사전’으로 불렀다.
한번은 내가 다른 도시에서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 소속인 형제 한 분을 도와 부흥회를 인도하였을 때, 장 선생은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내 친구에게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그 형제 휘하 사람 중 일부는 신학교에 다니느라 떠나 있다가, 신선미를 잃고 마음만 성급해진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사진설명> 한국 본토 전도자 그룹
우리는 상담과 기도 끝에 오직 말씀을 전하는 일에 주력하기로 했다. 그것이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가장 효과 있는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나흘쯤 지나서 마침내 전환점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한국에서 유행하는 대로 자기 죄들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제재했고, 그릇된 일들을 바로잡겠다는 의지만 말하도록 했다. 죄는 하나님께만 은밀히 고백하라고 일렀고, 예수께서 명령하신 대로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잘못한 형제를 찾아가 용서를 구하라고 일렀다.
그들은 그렇게 하고 돌아와서는, 그 형제들을 찾아가는 것이 얼마나 곤욕스러웠으며, 일단 형제를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나니 참 쉽고 기뻤노라고 했다. 형제 집을 찾아갈 때 그가 자기들을 어떻게 맞이해 주었는지, 상대에게 저지른 잘못을 고백할 때 서로 얼마나 겸양의 태도를 보였는지 많은 사람이 말했다.
그들이 이렇게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난 뒤, 우리는 도시를 상세히 구분하고 그들을 둘씩 짝지어 각 지역으로 보내면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에게 전도지를 주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도록 권유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이들의 사역이 큰 성과를 거두게 됨으로써 집회 첫날 저녁에는 예배당뿐 아니라 넓은 마당까지도 복음을 들으러 온 불신자들로 붐볐다. 교인들은 얼마 전까지 서로 질시했으므로 외지인에게 설교를 맡기는 것이 최선책이라 여기고서 장 선생에게 설교를 부탁했다.
두 볼과 턱에 보조개가 들어간 장 선생은 언제나 점잖은 사람이었다. 나는 미소를 짓는 이 젊은이가 드센 북부 사람들을 상대할 만큼 강인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모든 것이 서양 개념과 정반대로 이루어지듯이, 그는 그 상황에 아주 걸맞은 ‘우레의 아들’임을 입증했다. 약 8일 만에 도시 전체에 복음을 전파하였고, 수많은 사람이 주께 돌아왔으며, 우리는 작별을 고하고서 남쪽을 향해 길을 떠났다.
장 선생은 남쪽 지방에서 각기 다른 여섯 지역에 거점을 둔 연속 집회들을 시작하였다. 가는 곳마다 똑같은 결과들이 발생했다. 방문하는 곳마다 사단이 그리스도인들을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에 불순종하게 하고, 서로 미워하라는 사단 자신의 해묵은 계명에 순종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으며, 그로써 성령을 근심케 하고, 하나님을 위한 모든 사역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6>] 장석균 선생의 고난과 복음 전도의 삶
고향에서 오히려 배척받았으나 이겨내고
결국 훌륭한 복음 전도자로서 인정받아
장석균 선생의 전도 간증 방법은 아주 흥미로웠다. 그는 성경을 펼쳐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도록 했는데, 그 방법은 모든 경우마다 똑같은 결과를 일으켰다. 즉, 서로 사랑하지 않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울면서 간절히 구하게 하는 것이다. 설교할 때마다 야고보서와 베드로서의 합성 본문을 가지고 전하여 일으킨 결과였으므로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5:8).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3:11~12).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자기 죄를 자백했고, 자기가 잘못한 사람에게 가서 용서를 구했으며, 그렇게 하는 동안 성령께서는 언제나 그들의 영혼을 빛과 기쁨으로 충만케 하셨다. 또 그들의 소원대로 그리스도와 그 백성과 즉시 사귐을 회복하셨다.
그런 뒤 장 선생은 둘씩 짝지어 읍과 주변 마을들로 보냈고, 그들은 가는 곳마다 사랑으로 말미암은 큰 기쁨을 갖고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향해 “오라”는 복음의 초대를 전달하였다. 수많은 사람이 집회에 참석하였고, 교인들은 예배당과 마당에 발 디딜 틈도 없이 들어찬 인파 때문에 밖으로 떠밀려나면서도 관대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그들을 맞이하였으며, 바깥에 서서 예배를 드렸다.
장 선생은 여섯 거점을 확보한 뒤에,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집회를 인도하기 전에 아버지 집에 이삼일 머물면서 쉬었다. 쉬고 있을 때 비단옷을 입고 스스로 선비들이라고 부르는 한국인 두 사람이 포졸 넷을 데리고 장 선생 아버지 집 마당에 들어섰다. 선비인 장 선생은 보조개를 띄우며 환히 웃는 얼굴로 나가 그들을 맞이하였다.
그 선비들은 “이 서양 귀족이 누구냐?”고 비웃는 말을 하더니, 포졸들을 돌아보면서 “이 자를 잡아 매우 치고 옷을 벗기라! 무슨 놈의 귀족이 서양 예수 교리를 가지고 여기에 왔단 말이냐?” 하고 말했다. 포졸들은 그를 때리고 옷을 찢고 밖으로 끌고 나가 살얼음이 낀 도랑에 내던져버린 채 갔다. 시린 겨울바람이 그를 뼛속까지 얼게 했다.
그 뒤로 장 선생은 하루도 건강한 날이 없었다.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뼈가 부러지고 몰골이 처참해진 그를 친구들이 집까지 부축했다. 그들은 모두 사도 바울이 가장 크게 평가한 것으로 충만했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고, 복음에 율법을 섞지 않고 은혜의 복음을 전하면서, 마지막으로 이런 말로 호소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6:17).
이틀 뒤 장 선생은 모든 만류를 뿌리치고 부러지고 상처 난 몸을 이끌고 마지막 집회에 참석했다. 사탄은 그의 사자들을 미리 보내어 나흘 동안 말씀 선포자와 그의 설교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분기점이 찾아왔다. 하나님을 모독하던 이 악인들이 그리스도께 인도받아 나온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바른 관계를 되찾고서 길 잃은 자들을 찾아 나선 결과, 마지막 집회는 가장 성공적인 집회가 되었다. 수십 리 밖에서까지 하나님의 사자가 전하는 복음을 들으러 사람들이 왔으며, 수많은 남녀가 주를 믿었다.
이 일이 있은 직후에 내 소중한 친구 윌버 채프먼(Wilbur Chapman)이 한국에 왔다. 나는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외로웠었다. 선교사들만 이해할 수 있는 외로움이었다. 채프먼은 나를 격려하였고, 서양에도 우리 사역의 진보에 깊은 관심을 두는 친구가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채프먼과 알렉산더가 주최한 파티는 그 자체만으로도 내게 유익을 주었으며, 함께 초대받은 모든 선교사가 그들의 방문에 대해 나와 똑같은 느낌이 들었으리라고 확신한다.
정킨 메모리얼 병원(Junkin Memorial Hospital)의 내과 겸 외과 의사 어빙(C.H. Irvin)은 장 선생이 부상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달려와서 그를 데려간 뒤, 그가 어느 정도 회복할 때까지 극진히 치료해 주었다.
그 뒤 장 선생은 새로운 선교 거점을 마련하는 임무를 띠고 사역지로 파견되었다. 미국 성서공회가 방 하나를 가득 채울 만한 분량의 성경책을 보내 주었다. 이 고마운 단체 덕택에 많은 사역을 한국에서 해낼 수 있었다. 우리는 전도자 12명을 장 선생의 지휘를 받게 했다.
1909년 11월 4일 이들을 주변 군(郡)들로 파송하였다. 각 군에 한 사람씩 파송하였는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한국의 군(郡)은 규모가 대개 미국이나 캐나다의 군과 비슷하지만 인구는 더 많다. 1910년 2월 28일 파송한 사람들에게 빠짐없이 보고가 들어왔는데, 불과 몇 달 사이에 새 교회 36개가 생길 정도로 사역이 강하게 펼쳐졌음이 밝혀졌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7>] 두만강 접경 지역으로 전도에 나서다
매서운 눈보라를 뚫으며 국경 지역에 복음 전해
위험요소 곳곳에 산재하지만 기쁨도 그만큼 커
어느 해 4월, 배를 타고 원산을 떠난 나는 한국 북단에 있는 항구에 닿았다. 우리 교회 초대 집사가 가게 문을 닫고 나를 따라왔으므로, 나는 그와 함께 인력거에 성경 상자들을 싣고 두만강 접경 지역으로 떠났다.
사흘째 되던 날, 우리는 한반도 동북단에서 한국과 중국을 가르며 흐르는 두만강 연안에 있는 가장 큰 도시에 들어가 거리를 누비며 전도했다. 가는 곳마다 운집한 온순하고 조용한 청중 앞에서, 나는 불과 800km 떨어져 있는 한국에서 25년이나 살면서도, 세상에 오사 그들을 구원하려고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전하러 찾아오지 않은 것을 용서해 달라고 했다. 우리는 노점을 2달러에 빌려 이 국경 도시에 서점을 내고 미국 성서 공회가 찍은 성경책을 팔았다. 우리 숙소는 노년기에 접어든 중국 산에 있었는데, 아침에 잠을 깨어 강 저편을 바라보니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길을 계속 가려면 세 가지 방법이 있었다. 조그맣고 약한 조랑말을 타거나, 크고 강한 황소 달구지를 타거나, 아니면 걷는 것이었다. 우리는 첫째 방법을 택해 길을 나섰다가 결국 마지막 방법을 의지했다. 만주 비옥한 땅에 서리가 내렸다. 이곳은 부식토가 많이 퇴적한 곳이어서 내 모자 빛깔만큼 검었다. 길은 빵 반죽처럼 질었다. 조랑말은 나를 태우지도 않았는데 거의 주저앉다시피 했고, 따라서 나는 양쪽에 너덧 근이나 되는 진흙이 달라붙은 가죽 장화를 신은 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눈이 녹아 실개천들을 이루고, 실개천들이 다시 모여 이룬 너비 180~240cm에 깊이 180cm나 되는 깊은 개울들이 광활한 충적토 지대를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땅이 너무 비옥해서 퇴비들이 오물처럼 버려졌다. 훗날 이 지역에서 자란 수수를 고향으로 가져갔는데, 비료 한 번 주지 않고 자란 이 수수는 수염뿌리가 50cm나 되었다. 그곳에서 감자도 먹었는데, 얼마나 푸짐하고 알이 많이 들어찼는지 눈을 감고 먹으면 속에 크림을 넣은, 으깬 감자 같았다. 비료 한 번 주지 않고 이렇게 풍성한 농작물을 거두다니 놀랄 만한 일이었다.
만주 지방에는 한국인 10~20만 명이 들어와 살고, 러시아 국경 저편에도 비슷한 숫자가 살았다. 우리는 한국에서 정북 방향으로 이 지방 한복판을 가로질러 올라간 뒤, 발길을 남으로 돌려 다시 두만강을 건넜다. 남으로 48km만 더 내려가면 서점이 있고, 강어귀는 훨씬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
눈보라가 매우 심해 국경 지방에서 이틀 동안 발이 묶였다가, 한국 쪽 산맥을 탔다. 이곳은 호랑이들이 출몰하여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곳이었다. 일행은 산맥을 넘기 전에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마부를 구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우리는 두만강 지류를 건너 산자락에 접어든 뒤 스물두 번이나 꼬불꼬불 산허리를 돌아 올라갔다.
정오가 되니 눈 녹은 물이 합류하여 큰 내를 이루는 바람에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됐다. 그때 육 척 장신에 풍채 당당한 산 사람을 만났다. 너무 닳아 빤질빤질해진 곤봉을 든 그는 우리 일행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국경 마을의 훌륭한 예의를 갖춰 우리를 대접했다. 나는 솔직히 그가 든 곤봉이 무서워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마음을 놓지 못했다.
아침이 되자 개울물이 줄어든 덕분에 무사히 건넜다. 숙식비를 내려고 하자, 집주인은 변경 마을 방식대로 돈 받기를 한사코 거절했다. 아주 정중하게 얼마라도 주려고 했더니, 그 사람은 육 척이나 되는 몸을 일으키고는, “서양 양반, 우리 북쪽 사람들은 그런 짓을 하지 않소. 우리는 양반들이오” 하고 말했다.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전에 백인을 본 적이 없었으나, 열려 있는 그들의 마음은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언제나 변경에 사는 개척민들을 좋아했고 꾸밈없이 선의를 베푸는 이 훌륭한 한국인들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깊은 눈 속을 헤치고 북쪽 기슭을 기어올라 국경선을 이루는 산맥 정상에 올라갔을 때 생소하고 경이로운 대자연이 우리를 맞이하였다. 길가에 움푹 들어간 작은 못에 식용 개구리 떼가 마치 남쪽 지방 늪지에서처럼 즐겁게 노래하고 있었다. 우리는 호랑이가 있는지 둘러보았다.
한국에는 “육 개월 동안에는 사람이 호랑이를 사냥하고, 다른 육 개월 동안에는 호랑이가 사람을 사냥한다”라는 말이 있다. 내 친구는 숲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호랑이 꼬리임이 분명했다. 호랑이는 마치 고양이가 새를 발견했을 때 그렇듯이, 꼬리를 앞뒤로 꼬고 있었다. 낙엽에 나타난 발자국을 따라간 친구는 그 거대한 짐승이 산마루에 있는 어떤 물체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묵직한 사냥총을 꺼내 그 짐승의 귀 뒤를 조준하여 쏘아 쓰러뜨린 뒤, 호랑이가 과연 무엇을 응시하고 있었는지 보려고 서둘러 뛰어갔더니, 불과 얼마 되지 않는 언덕 경사면에서 한국인이 땔감으로 쓸 나뭇잎을 모으고 있었다. 호랑이는 가죽도 엄청나게 커서,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무려 4m나 되었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8>] 아편 중독자도 전도자로 만드는 복음의 능력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예수 사랑 전하니 새사람 돼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 경험하며 오직 주께 감사
우리는 국경선인 산맥 정상에 있었다. 거기서 해안 쪽으로 내려갔다. 그런 다음 다시 북서쪽으로 발길을 돌렸고, 다시 한 번 두만강을 건넜다. 이번에 건넌 곳은 강어귀 쪽으로 160km 더 내려간 곳이었는데 강폭도 넓고 수심도 깊었다. 일행은 강을 건너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온종일 마차를 타고 달려 밤늦게야 아름다운 포셋(Posset) 만(灣)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부유한 한국인에게 후한 대접을 받은 뒤, 연안 기선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곳에서 또 다른 한국인에게 대접을 받고는 우편선을 타고 원산으로 향했다.
한국 쪽 산맥을 넘으면서 결혼 잔치가 벌어지는 마을을 지나갔고, 다른 마을을 지날 때에는 어떤 노인이 마침 환갑을 맞았다. 관습대로 노인을 위해 큰 잔치가 벌어졌고, 수십 리 밖에서 이웃들이 몰려왔다. 우리 일행을 본 노인은 반갑게 나와 내 손을 잡고 잔칫상 상석으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자기 산촌을 처음으로 찾은 백인에게 후한 대접을 했다. 마침 전도자 김 선생이 이 마을에 들른 바람에 그와 합류했다. 김 선생은 결혼 잔치가 열린 마을에 들어가 등짐 지고 간 성경책들을 모두 판 이야기와, 마을을 떠나려 하니 사람들이 옷자락을 붙잡으며 그 귀한 옛이야기를 더 들려달라고 간청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이 마을에서도 조랑말에 싣고 온 성경책들을 회갑 잔칫상 곁에 모두 뿌려 놓은 뒤 다 없어질 때까지 끈기 있게 팔았다.
김 집사는 원래 서점을 맡아 남아 있었으나, 여러 날 기다려도 서점에 와서 성경을 사가는 사람이 없자 서점 문을 닫고 성경을 보자기에 싸서 짊어진 다음, 성경을 팔며 전도하려고 주변 읍으로 떠났다.
그 읍에서 솜씨가 아주 뛰어난 갓장이를 찾아갔다. 그 사람은 한때 큰돈을 벌어 유복하게 살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중국인이 영국산 아편(이 수치스런 단어를 쓰자니 얼굴이 달아오른다)을 국경 지방에 보급할 때 한국 청년들이 그게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 모른 채 사서 남용하였는데, 갓장이는 처음에는 아편이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도 모른 채 남용한 그 청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술과 도박이 사람을 꽉 움켜쥔 채 끼치는 해악을 전부 합할 수 있다면, 거기에다 열, 열다섯, 스물을 곱해 보라. 그러면 아편의 해악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것이다. 아편은 조금만 피워도 활력이 우둔으로, 우둔이 탐욕으로 바뀐다. 아편에 한번 빠지면 거짓말하고, 저당을 잡히고, 필요하면 도둑질이나 살인마저 서슴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편 생각이 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얻어야 한다. 점차 소화기관들의 기능이 떨어지고, 자연의 보고(寶庫)인 육체는 목숨 하나만 겨우 보존하는 데 이용된다. 그러고는 곧 절망적인 상태에 다다른다. 피부가 마르고, 쪼글쪼글해지고, 빼빼 마른다. 야윈 얼굴은 석탄재 빛깔이 되고, 곧 종말이 찾아온다.
이 불쌍한 갓장이도 그렇게 되었다. 집사가 그에게 그리스도의 위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자, 그는 생전 처음으로 비할 데 없는 이름을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게 말해 봐야 소용없소. 나는 죄인이오.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을 뿐 아니라 이 나라의 법도 모두 어겼소. 나는 가문의 수치요, 마을의 수치요, 내 나라의 수치요. 식구들은 굶주리고 있고, 나는 죽어가고 있소.” 집사는 이 말을 듣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내게는 선생에게 소개해 줄 구주가 계시는데, 그분은 선생을 얽어맨 사슬을 끊고 자유롭게 풀어주실 겁니다. 아편 생각을 말끔히 씻어주실 겁니다. 그 귀한 피로 선생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만들어주실 겁니다. 선생이 그분을 구주와 주로 인정한다면 말입니다.” 집사는 이 말을 한 다음 성경을 펴고 사랑과 은혜와 능력이 담긴 위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렇게 절망 상태에 있는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는 그와 작별했다.
그러나 닷새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를 찾아갔다. 닷새째 되던 날, 아편의 노예였던 그 사람은 “그래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예수를 제 구주로 모시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런 다음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신앙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예수님은 저를 대신해서 죽으실 만큼 저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을 제 구주로 모시겠습니다. 그분이 저를 회복시켜 주실 것이고, 저는 그분의 종이 되겠습니다.”
들어보라! 아편 중독자가 이렇게 순식간에 중독에서 완전히 벗어나 전에 그처럼 연연하던 것을 아주 메스껍게 여기게 된 것이다.
놀랍게도 열흘이라는 기간에 그의 몸은 아기의 몸처럼 회복했다. 기력을 되찾았고, 그 능숙한 손재주를 다시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구원받은 이 사람은 천국의 불빛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읍내를 다니며 자기를 풀어 주신 권능의 구주를 생기 있게 전파했다. 그의 증거에 힘입어 우리 교단은 오늘날 그곳에 훌륭한 교회를 가졌고, 그곳 교인들은 낮에 하는 힘겨운 노동으로 아무리 지쳤어도 저녁이면 모여 밤이 이슥하도록 생명의 말씀을 상고하였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9>] 미신에 붙잡힌 사람들을 믿음으로 잠재우다
평소 친절하나 병자에게는 냉혹한 한국인들
아편 중독자 가족 병으로 죽자 불안에 떨어
한국에서는 나그네를 맞아들인 다음 그가 병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가련한 그를 거리로 내쫓는다. 그만큼 죽음을 두려워하고 미신에 꽉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 소식은 마을에 퍼지고, 마을 사람들은 자기 마을에서 객사한 사람 때문에 액운이 닥칠까봐 두려워서 제비를 뽑아 걸린 사람에게 병자를 업게 한 다음 인근 마을로 간다. 그러고는 들켜서 큰 싸움이 나지 않도록 몰래 버리고 도망친다.
그 마을 사람이 병자를 발견하면 그 마을 역시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이렇게 해서 병자는 밥도 물도 먹지 못한 채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옮겨 다니다가 결국 죽는다. 나도 그런 경위를 거쳐 동구 밖에서 얼어 죽은 사람을 본 적이 있다.
한때 아편 중독자였던 사람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가정에 들어왔을 때, 마을 사람들은 귀신들이 그를 쫓아다니며 식구들을 죽일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을 입증하기나 하듯 얼마 안 있어 그의 할머니가 죽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큰 굿을 벌여 귀신들을 달래라고 재촉했다.
그는 거절했다. 마을 사람들의 태도는 단호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는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라도 자기 백성을 넉넉히 건질 능력이 있으신 분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편 중독자를 구출할 만한 믿음을 가진 전도자 김 선생을 즉시 그에게 보내셨다. 김 선생은 딱한 처지에 놓인 그를 위로하고 격려했으며, 그 지방에서 최초로 기독교식 장례로 죽은 할머니 상(喪)을 치러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큰 불안에 휩싸였다. 귀신들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을 입증이나 하듯 그의 어린 자녀 중 둘이 악성 열병에 걸려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귀신들이 자네 식구를 전부 죽일 거라고 말하지 않았나? 이번에는 귀신을 달래는 식으로 장례를 치러야만 하네” 하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겠소. 나는 예수식 장례를 치를 거요”라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하지만 아이들이 죽는 걸 보지 않았나?”라고 말해도 그는 “나는 아이들이 죽기 전에 예수에 관해서 들은 걸 참 기쁘게 생각합니다. 구주를 모른 채 죽었더라면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을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번에도 김 선생은 그를 위로하였다.
그 일이 있고 난 지 얼마 안 된 어느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 포졸 둘이 예배당에 찾아와 집회 책임자가 누군지를 물었다. “내가 책임자요” 하고 김 선생이 말했더니, 포졸들은 “그래? 당신이 마을을 떠나 줘야겠소”라고 말했다. 김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그럴 수 없소. 내 주님이 나를 이곳에 보내셨으므로 내 마음대로 떠날 수 없소. 당신들이 나를 쫓아낼 권위가 있다면 그 권위를 행사하시오. 난 떠날 수 없소.” 포졸들은 그를 덮쳐 때리고 옷을 찢고 갓을 밟고 책들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갔다. 형제 몇이 내게 편지로 전도자가 겪은 시련을 알려왔다.
김 선생 자신이 쓴 편지도 그들의 편지와 동시에 도착했는데, 김 선생은 그 곤경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전도자들을 좀 더 많이 보내 주십시오”라고만 썼을 뿐이다.
그런 그가 병에 걸렸다. 소모성 질환의 일종이었다. 병세는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쉰 살 먹은 고결한 분으로서, 참으로 많은 희생을 감내한 분이었다. 그때 지난날 그 아편 중독자가 서점으로 내려가 그 죽어 가는 사람에게 “이곳은 불편하니 나와 함께 집으로 갑시다” 하고 말했다. 그런 뒤 그를 집으로 데려가 그 형제가 죽어 천국에 갈 때까지 좋은 대접을 하고 마치 그를 부모처럼 간호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죽자 예수식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리스도를 발견한 뒤 자기 집에서 치른 네 번째 장례였다.
원산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남부 지방에서 사경회를 열기로 했다. 며칠에 걸쳐 사경회를 은혜롭게 마친 뒤 전도자 오십 인을 세워 파송하였는데, 그 중 아홉 명은 두만강 지역을 맡았다. 그들은 안락한 가정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고향을 흔쾌히 떠났다. 한국인에게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백인이 고향을 떠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고생을 뜻한다. 헌신적인 이 전도자들은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 열 달 만에 교인 수가 평균 45명이 되는 건실한 교회 10개를 이 지역에 세웠다.
백인 선교사 아홉 명을 뉴욕이나 런던에서 두만강까지 보냈다면 3000달러가 들었을 것이다. 사역지에 도착했더라도 여러 해 동안 사역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가 되었을 것이고, 기껏해야 한두 명 정도가 쓸모 있는 종이 되었을 것이다. 일부는 죽고, 일부는 병에 걸리고, 일부는 주변 상황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백인 선교사 9명에게 언어와 관습 등을 가르치는 선교 교육을 했다면 4만 5000달러 이상이 들었을 것이다. 케리(Carey) 같은 위대한 선교사도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 한 사람의 개종자를 얻는 데 15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이제 다음과 같은 기막힌 사실들을 들어보라. 나는 산을 넘어 마을을 지날 때면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에 관해 들어 봤느냐고 물어보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한결같이 “아니오, 예수가 누구요?”라고 반문했다. “한국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있는 줄을 모르신다고요? 침례 받은 한국인들이 15만 명이 넘는 데도요?”라고 말하면 그들은 “아니오, 들어 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한국 대부분 지역이 철저히 미전도 지역이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20>] 적재적소에 일꾼을 예비하시다
열여덟 달 사이에 120여 교회 새로 세워
주께서 친히 일꾼을 교육하시고 파송하셔
하나님이 가르치신 뒤 우리는 기도했고, 하나님은 친히 일꾼들을 파송하셨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오래 참으시며 가르쳐 주신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해 온 일이 하나님의 사역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이끌어오셨음을 깨달았다. 그 자녀는 다만 톱, 망치, 쟁기, 쇠막대기, 양 뿔, 물매, 짐승 턱뼈로서 왕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되기도 하고 사용되지 않기도 하는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이 무한한 사랑으로 추수의 주인이 바로 당신이시고, 그 추수는 당신 것이라는 사실과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일꾼을 예비하시고 교육하시며, 배치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순종하고 기도하기 시작했다(마9:38).
우리는 희어져 추수해야 할 밭에 일꾼 100명을 보내 달라고 주인께 기도했고, 관대하신 주인은 일꾼 135명을 보내주셨다. 우리는 그들에게 국적을 제한하지 않았고, 그 결과 세상 사람들이 가난하고, 무익하고, 가련한 존재로 인식하던 한국인 지원자들이 모두 파송받게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다.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는 사람들을 당신의 사역자로 보내셨다. 마치 무슨 교훈을 주시려는 듯이 말이다.
즉 사람이 내세우는 업적이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하찮은 것이고, 사람이 하나님의 가정에 태어나 말씀을 전하는 도구가 되었다면 하나님은 그 도구가 어떤 것이든 신경을 쓰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시려는 듯이 말이다. 하나님은 그들 중 많은 이에게 한 달 생활비로 5달러씩 마련해 주셨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성경을 주시고 그것을 가지고 나가 팔도록 하였다.
<사진설명> 말콤 펜윅 선교사 부인 하인즈와 성경공부반
열여덟 달 전에 기도를 시작했을 때 우리 교단에 교회가 40개가량 있었으나, 이제는 162개로 불어났다. 교회 수가 하나님께 파송을 허락받은 일꾼 수와 정비례한다는 사실이 선교에 뜻을 둔 모든 이에게 생각거리를 던져 준다. 이 일꾼들이 교단에 부담을 주는 금액은 미국 화폐로 하루 16.5센트 정도이지만, 백인 선교사가 주는 부담은 하루 5달러나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왜 135명을 보내실 때 백인은 한 사람도 포함하지 않으셨을까?
불멸의 영혼들은 참으로 귀중하여 감히 달러로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없고, 게다가 주님께는 일꾼에게 하루 5달러를 주시든 16.5센트를 주시든 똑같이 쉬운 일인 데다가, 주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분임을 생각할 때 그런 의문이 생긴다.
황인은 백인을 경멸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하나님께 일꾼을 보내 달라고 기도할 때 인종이나 학력이나 그 밖의 업적을 조건으로 달지 않았다. 단지 하나님의 추수를 위해서 일꾼들을 양육하여 보내 달라고 간절히 구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장 목사와 손 목사를 크게 사용하여 일꾼들을 양육하셨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우리 눈앞에 기이한 일을 행하셨으므로, 우리는 다만 앉아서 매료된 채 바라보았을 뿐이며, 그 놀라운 은혜와 인자에 감사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 인도를 받았다. 나는 이 작은 책에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신 경위를 유치한 문체로 적으면서, 빈약하고 짧고 더듬는 혀로 찬송을 드린다.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사랑하는 우리 왕을 속히 뵙기를 앙망한다. 그날 우리는 어려운 사역을 담당해 주신 그분의 공로를 힘입어 그분처럼 한 점 흠이라도 벗겨질 것을 믿는다(살전5:23~24;엡 5:26~27).
아내와 나는 가끔 외로울 때도 있지만, 예수께서 오실 때 받을 은혜를 기대하며 소망을 품는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신 은혜에 조금이라도 올바로 감사할 수 있기 위함이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21>] 한국인의 겸손과 인내를 사용하신 성령
겸손하고 관대한 한국인 특성대로
가장 아름다운 방법으로 사용하셔
한국 전도자들의 증거가 큰 결실을 거둔 첫째 비결은 무엇보다 그들로 하여금 인내케 하신 성령 때문이다. 이것은 첫째 아담의 자손이 둘째 아담 안에서 거듭날 때, 그리고 ‘옛사람’ 바깥에서 죄를 깨닫게 하시던 성령께서 그 ‘새사람’ 안에 거하실 때, ‘옛사람’의 기능들에 일절 다른 것을 보태지 않으시고 ‘새사람’이 성령의 경고와 가르침에 순종하는 속도에 맞춰 그 기능들을 발휘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신자가 처음 배울 때 깨닫는 큰 교훈이다.
또 한 가지 살펴볼 것은, 성령은 사역자가 어떤 사람이든, 기능이 우수하든 열등하든 상관없이 그를 쓰셔서 순종하는 백성을 격려하고 기쁨을 주시며, 그동안 사역자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놀라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을 들어 쓰실 때 그들의 다양한 기능과 성격과 능력을 통해 일하신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이 자기 소양(素養, 평소 닦아 놓은 학문이나 지식)을 하나님께 드린 만큼 그것을 들어 쓰신다.
한국인은 인내와 겸손이라는 뛰어난 특성이 있다. 이런 훌륭한 특성 때문에 한민족은 오히려 온갖 정치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관대함도 빼놓을 수 없는 특성이다.
‘인내’ ‘겸손’ ‘관대함’. 성령께서 이렇게 풍부한 천연 광맥을 어떻게 처리하실지는 매우 자명하다. 이런 특성들을 하나님께 드리면, 성령께서는 저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 바울과 동일한 희생정신을 갖게 하신다. 세상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리스도가 세상에 대해서 못 박히신 줄을 안 사도는 그리스도 곧 자기 주님을 아는 훌륭한 것에 비할 때 다른 것은 모두 분뇨(糞尿, 배설물)와 다름없다고 간주했다.
오늘날은 이른바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곳에서도 그런 정신을 찾아볼 수가 없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철천지원수인 세상과 교회가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이라는 크나큰 특권 외에는 모든 것을 해로 여기게 해 주신 성령을 통해서 세상을 자기 발아래 두었다. 영생이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이 생명, 즉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하시는 아들과 사귄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들의 맏형인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아주 가까워졌다. 공손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사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자아와 세상을 버림으로써 그런 친근한 자리에 서게 되었다. 이것은 세상 기준으로 봤을 때는 부정적인 측면이다. 그들은 자기의 원수이자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들을 버린다. 그들이 버리는 것에는 모든 것-교육, 지위, 종교 열정, 권력, 명예, 부(富) 그리고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서 크게 보일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바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히 사귀는 것과 비교할 때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빌립보에서 왕의 신분을 지닌 친구와 친하다는 이유로 실라와 함께 옥에 갇힌 적이 있는 바울은 그곳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를 제외한 나머지 것들에 그 정도의 가치밖에 두지 않는다고 말한다.
부정적인 측면이 그러하니, 긍정적인 측면은 더욱 아름답다. 바울은 왕이신 이 예수의 사랑에 사로잡혀서 스스로 그의 종이라 부른다(롬1:1). 그는 예수와 사귀려고 모든 것을 버렸을 뿐 아니라, 밤이든 낮이든, 어느 때 어디서든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 예수께서 뜻대로 사용하시도록 자신의 최선을 드렸다. 그것은 긍정적인 희생이다.
희생이 지니는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면이 모두 희생의 성령께 속한다. 희생은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이다. 성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그 마음에 감화하사 아들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주실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지 희미하게나마 상상해 본다.
성령은 한국의 신자들 안에 계시고, 아주 아름다운 방법으로 자기를 내어주사 많은 열매를 거두신다. 친히 그들 안에서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이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22·끝>] 고결하고 훌륭한 한국 복음 전도자들
성경 공부하러 먼 길 마다 않는 근면성 뛰어나
가는 곳마다 교회 세우는 그들 열정에 탄복
내가 한국에서 캐나다로 떠나기 직전에, 여덟 사람이 내게 성경을 배우려고 80km나 되는 길을 왔다. 그들은 내가 480km 떨어진 곳에서 집회를 인도하기로 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는 크게 실망했다.
나는 출발을 이틀 미루고 그들을 가르쳤다. 그날 시내 우체국 앞에서 그 중 한 사람을 보았다. 스무 살 난 해맑은 청년이었다. 집집마다 다니면서 지고 온 마른 버섯을 팔고 있는 게 분명했다. 버섯 한 묶음은 길이가 70cm에 중심 두께가 20cm가량 되었다.
이튿날 그 청년에게 “어제 시내에서 당신을 보았소. 당신이 가져온 버섯을 내게 팔지 않겠소?”라고 말했다. 청년은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한 묶음에 얼마씩 받았소?” “10센트씩 받았습니다.” “10센트라고!” 나는 놀라서 말했다.
“산에서 버섯을 따는 데 며칠이나 걸렸소?” “열흘쯤 걸렸습니다.” “그러면 하루 일한 대가가 1센트인 셈인데, 너무 박하지 않소?” 그의 동료를 돌아보면서 나는 그가 성경을 공부하러 80km를 걸어올 때 가지고 온 돈이 그게 전부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그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직 버섯이 남아 있으면 다음번에 올 때 내게 가지고 오시오. 좀 더 값을 치러 드리겠소.” “왜 그러시지요? 목사님께서 버섯을 드시나요?” 그는 진지하게 물었다. “아, 저도 조금 먹을 수 있고, 우리 집 주변 한국 사람들은 더 많이 먹을 수 있지요. 그것을 가지고 오시오” 하고 말하자 그는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들 중 여섯 명에게 침례를 주었다. 훌륭하고 고결한 사람들이었다. 이 청년은 아직 머리를 땋아 뒤로 길게 늘어뜨린 모습으로 보아 미혼임이 분명했고, 따라서 아직 ‘소년’이었다. 그가 맨 처음 침례를 받았다. “사랑하는 형제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하고 묻자, 매우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던 그 청년은 돌아서서 내 눈을 쳐다보았는데, 초라하고 햇볕에 그을리고 천연두 흉터가 있는 그의 얼굴이 참 아름다워 보였다.
그는 내게 대답했는데, “예, 저는 믿습니다”라고 한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그것이 내가 한국에서 누린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거의 침례를 주지 않았다. 대신에 한국인 목사들에게 침례를 주도록 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때에 준 침례를 내 생애 가장 큰 특권들 중의 하나로 생각한다.
그 청년은 맨 처음 그리스도께 나올 때 큰 시련을 겪었다고 했다. 친척 중 여섯 집안이 그를 심하게 박해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열네 살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심으로써 그는 건실한 생활과 진실한 증거로 세 집안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
그를 비롯하여 그와 함께 공부하러 온 다섯 남자는 떠나기 전에 내게 말하기를, “목사님, 우리는 몹시 가난하여서 복음을 전하러 고향에서 멀리 떠날 수 없습니다. 고향 주변에는 신자가 한 사람도 살지 않는 마을이 100군데도 넘습니다. 저희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그들의 뜻을 가상하게 여긴다는 것과 각 사람당 한 달에 얼마 되지 않는 5달러라도 지원해 전도하러 보낼 형편만 된다면 참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우리는 이미 고정 급료를 받는 전도자를 72명이나 두고 있어서 우리에게는 더 지급할 비용이 없습니다.” 그들은 아주 슬픈 표정을 짓더니, 조금 후에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하고 물었다.
나는 그들에게 성경을 팔도록 대줄 수는 있다고 말하고, 그렇게 하면 한 달에 비용이 75센트나 1달러가량 생길 거라고 말했다. 그들은 기쁨에 겨워 “할렐루야!”라고 외쳤다. 그래서 이들은 각각 성경을 잔뜩 짊어지고 그러한 특권을 자부하며 길을 떠났다.
내가 미국에 가기 전에 첫 보고가 들어왔다. 그들 중 한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받아 교회를 설립했고, 버섯을 팔던 청년은 교회를 두 곳에 더 설립했다는 것이다. 희생하게 하시는 성령께 감화를 받은 결과다. <끝>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 은혜로운 찬양 목록
다섯 살 때 아버지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
가정에서 보고 배운 신앙이 결국 선교사로 이끌어
말콤 펜윅은 1889년 한국에 도착했다. 그는 신학 교육을 받은 적이 없지만, 캐나다에서 철물 사업자로서 그리고 평신도 전도자로서 쌓은 경험을 사역에 십분 사용하였다. 한국이 어디 붙은 나라인지도 모르던 그는 1889년 7월에 하나님이 자신을 그 곳의 선교사로 부르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거부했으나, 결국에는 “적어도 찌그러지고 누추한 양철통 정도는 되어 생명수를 전달할 수 있겠다”고 결심했다. 그로부터 넉 달 뒤 한국에 도착했다. 한반도 남부와 북부에서 동시에 사역한 펜윅이 세운 교회들은 한국인들의 수고에 힘입어 급성장한 결과 250개로 증가하는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들은 선교 열정에 달아올라 만주와 시베리아 한인 사회에까지 가서 교회를 세웠다. 1936년 펜윅이 죽자 그 교회들은 1950년까지 외국 선교사의 감독을 받지 않은 채 유지했다.
이번 호부터 펜윅 선교사가 직접 쓴 글을 토대로 한국으로 오기까지 과정과 한국에서 활동했던 사역을 정리해보았다. <편집자>
목자가 길 잃은 자기 양을 찾은 경위
하나님은 증인들을 필요로 하신다. 두렵게도 지구의 거민들 가운데 10억 인구가 아직 그리스도를 영접하거나 배척할 기회조차 가져본 적이 없다. 이교도로 태어나는 아이들이 ‘거듭난’ 자녀들보다 200배나 더 많다. 더 두려운 것은 교회가 1900년간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하나님을 증거할 충분한 수의 증인들, 길 잃은 영혼에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인정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과연 옳으셨음을 입증할 증인들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교회는 한국처럼 복을 풍성히 받은 나라에조차 증인을 한 명도 보내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을 쓰게 된 것을 굳이 변명하자면 이런 이유 때문이다. 글을 잘 쓰려고 해 봐야 결함투성이가 될 것을 잘 알기에 다른 사람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쓴다. 그러나 내 관심은 글을 쓰는 데 있지 않다. 변변찮은 이 사람에게 하나님이 넘치도록 베푸신 은혜를, 우리 주님이 여전히 다니시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못 자국 난 손을 내밀며 가리키시는 저 너머에 있는 교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일념만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어설픈 일꾼이 연장을 탓한다”고 말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보고 겪어서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은 노련한 일꾼이다. 그분은 사역을 하는 데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도구들을 한 번도 탓하지 않으셨다. 이 책이 나처럼 불완전한 증인이나, 한국인 전도자들처럼, 무학(無學)한 도구들을 주께서 기꺼이 쓰신다는 사실을 교회들이 믿도록 용기를 준다면, 이 글은 제 소임을 다하는 셈이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 맡기신 사역은 교파를 초월한 것이다. 한국 방방곡곡에서 영혼들이 주께 나오고 그들을 돌볼 감로들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교단 명칭을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하게 붙였다. ‘대한기독교회’(기독교한국침례회의 초창기 명칭)인데, ‘한국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뜻이다.
엄격한 집안의 규율
우리 조부모가 스코틀랜드 퍼스셔 피트케른을 떠나 당시 요크라고 하던 캐나다 토론토 땅을 밟으셨을 때, 토론토에는 ‘허드슨 만’이란 간판이 붙은 상점 한 곳, 제분소 한 곳, 철공소 한 곳, 그리고 술집 몇 곳이 전부였다.
아버지는 내가 불과 다섯 살 때 돌아가셔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를 칭송하는 이웃들과 아버지의 친구분들을 만나면 언제나 즐거웠다. 선교사가 된 뒤 마을 교회에서 처음 설교했을 때, 스코틀랜드에서 오신 인자한 노부인이 다가와서 “당신이 아치 펜윅의 아들이우?” 하고 물었다. 그렇다고 말하니 “아이구 그렇군. 아버지처럼 좋은 사람일 게야. 틀림없어”라고 했다. 사업에 성공하여 크게 유명해진 신사 한 분도 다가와서는, “난 당신 아버지를 존경하던 청년들 가운데 하나였지요. 아버지는 나나 다른 청년을 만나면 언제나 불러 세우고서 친절하게 이것저것을 물으시고 훌륭한 조언을 한 마디씩 해주셨지요” 하고 말했다. 아버지는 마을에 일이 있으면 언제나 앞장서셨다. 가정의 규율은 아주 엄하고 혹독했지만, 우리는 한결같이 아버지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어머니는 내가 집을 떠나 하나님을 찾고 찾으려 할 때, “아들아, 네가 예수님께 마음을 드린다면 너를 아무리 멀리 보내도 상관하지 않는다” 하시며 눈물로 간곡히 당부하시는 모습이 생각난다. 나는 그 말씀에 복받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기차를 타고 길을 떠나면서, 예수님을 알 때까지 찾고 또 찾으리라는 결심을 했다. 이후 내 나이 25세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되면서 한국 선교사로서의 삶을 다짐하게 되었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 침례교 믿음의 사람들 <2> 장일수 목사
* 침례교 믿음의 사람들 <3> 지대명 선교사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4>] 표현의 한계와 복음 전파의 어려움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5>] 한국 관습에 대해 조금 이해하다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5>] 한국 관습에 대해 조금 이해하다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7>] 매켄지 선교사의 용기와 기질을 보다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8>] 성탄절 무렵 첫 선교지인 소래 찾다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9>] 귀신 숭배 마을이 예배하는 장소로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0>] 한국인에게 사역을 맡기다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1>] 현지인에게는 현지 사역자가 필요함을 알다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2>] 내가 실패한 곳에서 본토인 목사가 거둔 성공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3>] 복음 전단지와 쪽복음서로 전도에 박차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4>] 그리스도의 일꾼 손 선생의 괄목할 성장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5>] ‘걸어 다니는 성구 사전’ 장석준 목사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6>] 장석균 선생의 고난과 복음 전도의 삶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7>] 두만강 접경 지역으로 전도에 나서다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8>] 아편 중독자도 전도자로 만드는 복음의 능력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9>] 미신에 붙잡힌 사람들을 믿음으로 잠재우다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20>] 적재적소에 일꾼을 예비하시다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21>] 한국인의 겸손과 인내를 사용하신 성령
*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22·끝>] 고결하고 훌륭한 한국 복음 전도자들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2>] 나는 부족하나 주님이 함께하시기에
한국이라는 나라 전혀 몰랐으나 부르심에 순종
선교는 오로지 주님만 의지하는 것임을 깨달아
1889년 7월, 한국으로 가라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소중한 내 친구 헤론(J. W. Heron) 박사의 아내가 한국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 조만간 교수형을 당할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이것은 큰 기삿거리가 되었고, 캐나다 신문들은 그 소식을 널리 전했다.
나도 다른 많은 사람과 다름없이 한국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그것이 지중해에 있는 어떤 섬인 줄로만 알았다. 지도를 보고서야 내가 생각한 섬은 코르시카고, 한국은 아시아 지역 끝에 붙은 반도로서, 한 면은 서해에 접해 있고 다른 면은 동해에 접해 있으며, 위도 35도에서 43도에 자리 잡은 나라인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선교가 뭔지 전혀 몰랐다. 그냥 막연하게, 하나님이 이교도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바라신다고만 알았다.
선교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얼굴을 검게 그을린 근엄한 선교사가 야자수 아래서 성경을 들고 서 있고, 곁에는 특이하게 생긴 원주민이 양산을 받쳐 들고 서 있으며, 주위에는 그에게 복음을 들으려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장면이 떠올랐다. 선교사가 가는 곳은 으레 무더운 지역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므로 한국이 연중 석 달 동안 눈이 120㎝나 내리는 나라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선교사들이 가는 곳은 모두 호랑이가 득실거리는 밀림인 줄로 알았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한국에 호랑이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별로 놀라지 않았다. 한국은 아프리카와 인도를 합친 지역쯤 되리라고 생각했다.
한국에 가기로 한 뒤에 나라가 온통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을 들었고, 나중에 와서 보니 사실이었다. 또 호랑이가 있다는 말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런 흥미로운 사실들을 빼놓고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전혀 몰랐다. 사실 선교 단체들과 편지를 주고받았고, 한국에 가 본 적이 없는 저자들이 쓴 한국 관련 서적 두 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도대체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명확히 알 수가 없었다.
부르심의 과정
하나님이 나를 흑암에서 그 아들의 찬란한 빛으로 불러내실 당시, 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철물 도매업이었다. 당시 나는 직원 40명을 거느린 창고 책임자였다. 나중에는 멀리 해안 지방에 자리 잡은 지사 겸 직판장 총책으로 승진했다. 그 무렵 나는 저녁 시간을 이용하여 성경을 공부하고 평신도로서 기회가 닿으면 어디든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나이아가라 사경회에서 멀리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나는 예전처럼 변명했다. “주님, 저는 사업가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더 잘 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라!”고 하셨다. “하지만 주님, 저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목사도 아닙니다. 신학교에 가 본 적도 없습니다.” 주님은 다시 “가라!”고 하셨다. “하지만 가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갈 마음이 생기도록 해주기를 바라느냐?” 주님은 말씀하셨다. “아닙니다. 그런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사흘째 되는 날 나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 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제게 그런 마음이 생기를 원하신다면 뜻대로 하십시오.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날 저녁 인도에서 온 윌더 형제에게 사막에서 물을 애타게 찾으며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윌더 형제는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에게 화려한 유리 주전자에 물을 담아 화려한 유리잔에 따라 주면 감사하게 받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더럽고 쭈그러진 양철통에 물을 담아 주더라도 감사하게 받아먹고 생명을 보존할 것이다.” 그렇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물이다. 이 간단한 예화를 듣고 난 뒤 마음속에 의지가 생겼다. 교육을 받지 못했느니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느니 하며 변명하던 과거의 태도를 단숨에 몰아냈다. 적어도 찌그러지고 누추한 양철통 정도는 되어 생명수를 전달할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두려움은 여전했다. 이 점에서도 윌더 형제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배에 올라 노를 젓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노를 저은 뒤에 배가 아직 선착장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일어나서 고물로 가 보니 배가 선착장에 묶여 있었고, 따라서 지금까지 헛고생해 가며 노를 저었던 것입니다. 칼을 꺼내 밧줄을 끊고 노를 저으니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내 경우와 꼭 맞아떨어지는 이야기였다. 선교는 어차피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면 모든 문제의 밧줄은 끊어질 것이다. 그 후 한국으로 부르신 그분의 뜻에 순종할 수 있게 되었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3>] 내륙을 향해 길을 떠나다
한국의 일상은 평온하고도 해맑아
언어 습득 위해 삶 속으로 뛰어들어
한국의 산들은 내가 그곳에 가기 직전에 나를 가로막던 난관들의 상징이 되었다. 그중에서 나를 가장 괴롭힌 산은 바로 ‘언어’였다.
다행히도 이 산은 너무 높았던 까닭에 그 뒤에 자리 잡고 있던 더 험준한 산들을 시야에서 가려 주었다. 한국에서 처음 열 달을 지내는 동안, 나는 한국어를 배우려고 각종 교과서와 지침서를 탐독했으나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기억력만큼은 자신이 있던 나는, 전혀 뜻 모를 글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는 책의 두 쪽을 반복해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암기했으나,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옛날 방식의 복습으로는 실제로 한국어를 구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 다음부터는 모든 어학 강의, 교과서, 영어 사용권 사람들의 조언을 포기하고 다만 한국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기로 결심했다. 그러고는 몇몇 한국 친구들과 함께 황해도 소래를 향해 떠났다.
소래는 서울에서 256㎞가량 떨어진 마을이다. 충직한 한국 조랑말을 타고 서울 시내를 통과하여 소래로 가는 동안 우리는 낯선 광경들을 자주 보았다. 궁궐 문을 지키는 해태 석상 저편과 바깥 성곽 위에 세워진 망루 주변에는 흥미를 돋우는 많은 사람과 물건이 있었다. 궁궐 대문들 밖에는 하인들이 나귀들을 대기해 놓고 관리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다섯 사람이 새 성벽을 쌓기 위해 삽 한 자루를 가지고 진흙을 이기면서 협동의 힘을 과시하고 있었으며, 명절을 맞아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소년들이 조부모에게 인사하러 가고 있었다.
마침 나무꾼들의 긴 행렬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었다. 소나무 가지들을 소달구지에 싣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조랑말에 싣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가난하여 짐승을 부릴 수 없어서인지 집채만 한 나뭇짐을 등에 지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성문을 지나 확 트인 들판으로 나가니 다양한 광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시골 청년들은 해맑은 표정으로 한복을 입고 있었고, 시골 여인들은 1910년대 미국 여성들의 모자보다 훨씬 더 큰 모자로 아름다운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시골 선비들은 집 앞에서 애지중지하는 곰방대를 입에 물고 만족스럽게 앉아 있었다. 들판에서는 강인하고 건실해 뵈는 일꾼들이 일손을 멈추고 서서 우리를 지켜보았고, 농부는 밭을 갈고 있었는데, 솜씨가 아주 익숙했다. 사람들은 단음 가락으로 동양의 신비로운 노래를 하면서 집단으로 벼를 추수하였다. 노동 공동체는 한국에 크나큰 유익을 끼쳤다.
그것은 화폐의 필요를 줄였고, 노동자에게 급료를 받는 것 이상으로 자부심을 심어 주었다. 남자들, 그리고 때로는 여자들까지도 집단으로 잡초를 뽑고 벼와 다른 작물을 심고, 가락에 맞춰 즐겁게 일하였다. 한국인들은 매우 부지런히 일했다. 집단으로 일하는 그들의 관습은 개척 시대 미국 농촌에서 특히 벌목 인부들 사이에 성행했던 품앗이와 비슷하다.
한국의 가을 기후는 더할 나위 없이 쾌청했다. 특히 소래로 가면서 만난 시골 풍경은 아주 인상 깊었으며, 우리 일행은 엿새 동안 257㎞나 되는 길을 아주 즐겁게 여행했다. 소래에 있는 집들은 규모가 아주 작았다. 사방 210㎝를 넘는 방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집을 짓기로 했으나, 다음 봄까지 공사할 수 없어서 비좁은 방들에서 그럭저럭 겨울을 났다.
우리에게 방을 내준 안제경 선생과 서경조 선생은 서로 막역한 사이였으나, 상대방의 부인에게 말을 거는 일이 전혀 없었다. 부인들끼리도 아주 친하고 여러 해 동안 서로 집을 찾아다녔으면서도 말이다. 그곳에 와 있던 서양인 선생은 아직 한국 관습을 잘 몰랐고, 따라서 선비들에게 당신들이 만약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부인들도 선교사를 만나게 하여 서로 잘 알게 해 주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들은 큰 반대 없이 동의했고, 그날 밤 쉰 살 남짓한 두 여자는 난생처음으로 백인 남자와 대화를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식구 이외 다른 한국 남자와도 대화를 나누었다. 토론토와 디트로이트에 사는 친구들이 소포로 선물을 보내온 덕분에 나는 사람들을 대접할 수 있었다. 내가 정성스럽게 만든 ‘진수성찬’을 한국 여인들이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게도 아주 풍성했던 그 케이크를 여인들이 아주 맛있게 먹던 일은 잊을 수 없다. 저렇게 열심히 먹다가 체하지 않을까 염려할 정도였다. <계속>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4>] 표현의 한계와 복음 전파의 어려움
겸손하신 예수 설명하기 위해 언어와 씨름하다
종교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바꾸는 것 쉽지 않아
소래에는 기독교 사역이 아직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소년반을 하나 만들었고, 마을 여성 중에서 유일하게 글을 깨우친 안제경 선생 부인이 부인들과 소녀들을 가르치겠다고 약속해서 큰 만족을 얻었다. 나는 한국어로 찬송을 부르고 싶었고, 사람들에게 찬송을 가르치고 싶었다. 이 일은 찬송들이 번역되기까지는 할 수 없었다.
나는 한국어 어휘를 잘 모르는 까닭에 찬송 번역에 뛰어들기가 다소 겁이 났다. 그러나 “겁나는 게 있나? 그것이 자네를 겁내게 할 것”이라는 고향 친구의 말을 생각하고서 다소 어려움을 겪은 끝에 ‘예수 사랑하심은’, ‘나는 참 기쁘다’ 같은 간단한 찬송들을 번역했다.
‘겸손’이라는 관습 차이
그러나 본격적인 씨름을 한 것은 ‘보고 생명을 얻으라’는 찬송을 번역하면서 한국어로 표현하는 한국 관습과 부딪히면서부터였다. “너희에게 생명을 바치신다”는 문장이 문제가 되었다. 한국어에는 하인이 상전에게, 백성이 임금에게 어떤 것을 바칠 때를 제외하고는 바치는 것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었다.
한국 친구들 가운데 서너 명은 그 말을 듣자마자 “그거 가당치 않은 일이오” 하고 말했다. “왜 그렇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야 위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비천한 하인의 자리로 끌어내리고, 우리 같은 진토의 벌레들을 높은 자리로 끌어올리기 때문이오”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게 복음의 진리 아닙니까?” “아니오. 아니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형제 여러분, 그건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말씀을 제대로 배웠다고 할 수 없는 이 동양의 친구들은 계속 고집하기를, “하지만 하인이나 백성이 자기 임금에게 무엇을 바칠 때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바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 이제 여러분 나라의 관습을 이해할 수 있겠군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셔서 하인의 자리에 내려가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신다면, 우리로서는 겸손히 감사한 마음으로 그 놀라운 은혜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나라의 관습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우주의 왕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그래도 그들은 완강하게 대답하기를, “하나님이 하인의 자리를 취하셨다니 말도 되지 않습니다. 전혀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종’인 예수를 설명하다
나는 한자어 성경 빌립보서 2장을 펴서 5절 마지막 구절부터 11절까지 읽어 보라고 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전에 그들에게 로마서 6장 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라는 말씀을 가르친 적이 있었으므로 이 놀라운 성경 진리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비록 그리스도인들이라고 고백은 하였으나, 그 뒤의 행실로는 단지 종교적인 사람들임을 드러냈고, 그리스도 영광의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도록 사탄이 그들의 마음을 가려 왔음을 드러냈다.
세상 어디서든 ‘자연인’이 늘 그렇듯이, 그들에게는 복음보다 관습이 더 크게 보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선비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종의 형상을 입으셨다고 선언합니다. 오늘날 여러분의 하인들이 여러분에게 하듯 그분은 두 손을 뻗어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명을 값없는 선물로 ‘바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선물을 걷어찰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말했듯이, 진토의 벌레들과 같은 우리 앞에서 영광의 주님은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그분의 이름으로, 그리고 다음과 같은 찬송으로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선언합니다.
“생명을 여러분에게 ‘바치시네!’ 할렐루야!”
“하나님이 그 생명을 여러분에게 ‘바치시네.’”
그 때 나는 ‘바치다’라는 한국어에 위와 같은 히브리어의 벅찬 감탄사를 첨가하는 즐거운 특권을 누렸다. 그리스도가 전파되기 전까지 한국어에는 그런 용례가 없었던 것이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5>] 한국 관습에 대해 조금 이해하다
소래 생활 두 달 뒤 영어보다 한글 먼저 생각나
풍속과 법에 관한 차이 등 구별 여전히 어려워
내가 소래에서 언어를 공부한 이유는 비록 나는 영어 성경을 사용하더라도 그곳 한국인들에게는 한자 성경을 마련해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성경 장들의 수를 헤아리는 방식으로 성경 이 책과 저 책을 구분할 수 있었고, 한글 선생에게 부탁하여 영어 성경에 한글로 각 책 이름을 써넣었다. 그런 다음 각 장과 절에 해당하는 단어들을 익혔다. 숫자는 그전에 익혔다. 이런 방식으로 영한사전을 펴들고서, 이를테면 ‘속죄’라는 단어를 찾은 다음, 레위기 17장 11절을 펴서 다 함께 속죄라는 주제를 공부했다. 그들의 인내와, 부피가 큰 사전, 그리고 내 작은 인내에 힘입어 마침내 속죄의 큰 비밀을 담은 다음 절을 이해시킬 수 있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국인들은 미국인이나 영국인보다 제사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구약의 속죄 제사를 가르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단락별로 공부해 가면서 하나님이 속죄에 관해 하신 말씀을 익혔다. 한 주제를 마친 다음에 다른 주제를 택했다.
두 달 뒤 서울로 돌아왔을 때, 나는 나 자신이 한글로 생각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어떤 친구에게 영어로 말할 때 먼저 한글 단어를 생각하고 그것에 해당하는 영어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정도였다. 영어권에서 떠나, 자기들 말밖에 하지 않는 한국인들 틈에서 지낸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에, 한국어의 중추가 되는 관용어가 지워지지 않을 만큼 뇌리에 뚜렷이 새겨졌다. 한국어를 익히는 두 달 동안 잠시 불편을 겪고 사람들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을 뿐, 나 스스로 무슨 특별한 노력을 기울인 것도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한국어는 여전히 어렵다.
서울로 돌아온 지 며칠 있다가 한국 최초 그리스도인이자 그들 중 최고 연장자와 대화를 나눴다. 그에게 내가 한글로 번역한 ‘봄으로써 얻는 생명’이라는 찬송을 보여 주고서 견해를 물었더니, 그는 한 절씩 꼼꼼히 읽어 가면서 “잘하셨군요”라고 말했다. 물론 소래 사람들처럼 ‘바치다(offer)’라는 단어를 보기 전까지 말이다. 그 단어를 보더니 소래 사람들처럼 금방 글에서 눈을 떼고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하나님을 하인이라는 낮은 자리에 두다니 두려운 일”이라고 했다.
그런 뒤 소래에서와 마찬가지로 긴 변론이 있었고, 결국 이 귀한 한국인 형제에게 혹시 빌립보서 2장 6~11절의 말씀을 잊고 있는 게 아니냐고 묻고는 성경을 펴서 그 부분을 한번 읽어 보라고 했다. 그 부분을 읽은 그는 한동안 그 안에 담긴 진리를 생각하더니, “고맙소, 목자 양반” 하고 나직이 말했다. 그런 뒤 황인과 백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자신을 겸허히 낮추신 일을 말하는 감격스러운 사귐의 순간이 있었다.
한참 대화를 나누는데 내게 거처를 내준 이-그는 선교사였다-의 젊은 선생이 방으로 들어왔다. 한국에서는 감춰 놓지 않은 책은 모두 공동 재산이었으므로, 그 선생은 즉시 내가 번역한 찬송을 집어 들고서 읽기 시작했다. 한 마디 평가도 없이 읽어내려 가다가, 그도 ‘바치다’라는 단어를 만났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흥분하면서 분개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그 한국인 형제에게 대답해 주도록 부탁했다.
신약성경은 여전히 빌립보서 2장이 펼쳐져 있었고, 연로한 형제는 그 단락을 가리키면서 “이곳을 읽어 봤는가?” 하고 말했다. 젊은이는 입을 다물고 읽더니 조용히 걸어 나갔다. 문을 열고 돌아선 그의 얼굴에는 두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처음 보았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 말씀을 처음 읽었다는 말이었다. 그 찬송으로 이렇게 큰 체험을 한 나는 그토록 오르기에 높고 가파른 ‘관습’이라는 산을 이미 넘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가득히 밀려왔다.
한국에서는 ‘풍속’, ‘례’(원칙들과 관례), ‘법’(불문율) 세 가지 중에서 ‘법’이 가장 크다. 세 가지가 일반적이고 특수한 일들에 뒤섞여 있고, 용어들도 자주 바뀌어 쓰인다. 영어권에서는 대개 ‘관습’(custom)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하는 단어들이다.
그중에서 ‘법’은 이를테면 짐꾼을 부린 뒤 지불하는 삯에서부터, 죄수를 죽이고 살리는 판결에 이르기까지 대소 간의 법 절차와 거래에 해당한다. ‘법’은 한글에서 가장 강력한 단어다. 무엇을 가리켜 나라의 ‘법’이라고 하거나 가문의 ‘법’이라고 하면 모든 논쟁은 그것으로 끝난다. “그런 법이 어디 있소?” 하거나 “그건 누구나 다 아는 ‘법’이오”라는 말들은 상대방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통렬한 말이다. 한국은 계약과 협정의 나라가 아니다. 부동산에 관한 문서들과 현금 증서들, 그리고 결혼 증서를 제외하고는 문서로 남기는 계약이 거의 없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5>] 한국 관습에 대해 조금 이해하다
소래 생활 두 달 뒤 영어보다 한글 먼저 생각나
풍속과 법에 관한 차이 등 구별 여전히 어려워
내가 소래에서 언어를 공부한 이유는 비록 나는 영어 성경을 사용하더라도 그곳 한국인들에게는 한자 성경을 마련해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성경 장들의 수를 헤아리는 방식으로 성경 이 책과 저 책을 구분할 수 있었고, 한글 선생에게 부탁하여 영어 성경에 한글로 각 책 이름을 써넣었다. 그런 다음 각 장과 절에 해당하는 단어들을 익혔다. 숫자는 그전에 익혔다. 이런 방식으로 영한사전을 펴들고서, 이를테면 ‘속죄’라는 단어를 찾은 다음, 레위기 17장 11절을 펴서 다 함께 속죄라는 주제를 공부했다. 그들의 인내와, 부피가 큰 사전, 그리고 내 작은 인내에 힘입어 마침내 속죄의 큰 비밀을 담은 다음 절을 이해시킬 수 있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국인들은 미국인이나 영국인보다 제사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구약의 속죄 제사를 가르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단락별로 공부해 가면서 하나님이 속죄에 관해 하신 말씀을 익혔다. 한 주제를 마친 다음에 다른 주제를 택했다.
두 달 뒤 서울로 돌아왔을 때, 나는 나 자신이 한글로 생각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어떤 친구에게 영어로 말할 때 먼저 한글 단어를 생각하고 그것에 해당하는 영어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정도였다. 영어권에서 떠나, 자기들 말밖에 하지 않는 한국인들 틈에서 지낸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에, 한국어의 중추가 되는 관용어가 지워지지 않을 만큼 뇌리에 뚜렷이 새겨졌다. 한국어를 익히는 두 달 동안 잠시 불편을 겪고 사람들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을 뿐, 나 스스로 무슨 특별한 노력을 기울인 것도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한국어는 여전히 어렵다.
서울로 돌아온 지 며칠 있다가 한국 최초 그리스도인이자 그들 중 최고 연장자와 대화를 나눴다. 그에게 내가 한글로 번역한 ‘봄으로써 얻는 생명’이라는 찬송을 보여 주고서 견해를 물었더니, 그는 한 절씩 꼼꼼히 읽어 가면서 “잘하셨군요”라고 말했다. 물론 소래 사람들처럼 ‘바치다(offer)’라는 단어를 보기 전까지 말이다. 그 단어를 보더니 소래 사람들처럼 금방 글에서 눈을 떼고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하나님을 하인이라는 낮은 자리에 두다니 두려운 일”이라고 했다.
그런 뒤 소래에서와 마찬가지로 긴 변론이 있었고, 결국 이 귀한 한국인 형제에게 혹시 빌립보서 2장 6~11절의 말씀을 잊고 있는 게 아니냐고 묻고는 성경을 펴서 그 부분을 한번 읽어 보라고 했다. 그 부분을 읽은 그는 한동안 그 안에 담긴 진리를 생각하더니, “고맙소, 목자 양반” 하고 나직이 말했다. 그런 뒤 황인과 백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자신을 겸허히 낮추신 일을 말하는 감격스러운 사귐의 순간이 있었다.
한참 대화를 나누는데 내게 거처를 내준 이-그는 선교사였다-의 젊은 선생이 방으로 들어왔다. 한국에서는 감춰 놓지 않은 책은 모두 공동 재산이었으므로, 그 선생은 즉시 내가 번역한 찬송을 집어 들고서 읽기 시작했다. 한 마디 평가도 없이 읽어내려 가다가, 그도 ‘바치다’라는 단어를 만났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흥분하면서 분개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그 한국인 형제에게 대답해 주도록 부탁했다.
신약성경은 여전히 빌립보서 2장이 펼쳐져 있었고, 연로한 형제는 그 단락을 가리키면서 “이곳을 읽어 봤는가?” 하고 말했다. 젊은이는 입을 다물고 읽더니 조용히 걸어 나갔다. 문을 열고 돌아선 그의 얼굴에는 두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처음 보았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 말씀을 처음 읽었다는 말이었다. 그 찬송으로 이렇게 큰 체험을 한 나는 그토록 오르기에 높고 가파른 ‘관습’이라는 산을 이미 넘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가득히 밀려왔다.
한국에서는 ‘풍속’, ‘례’(원칙들과 관례), ‘법’(불문율) 세 가지 중에서 ‘법’이 가장 크다. 세 가지가 일반적이고 특수한 일들에 뒤섞여 있고, 용어들도 자주 바뀌어 쓰인다. 영어권에서는 대개 ‘관습’(custom)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하는 단어들이다.
그중에서 ‘법’은 이를테면 짐꾼을 부린 뒤 지불하는 삯에서부터, 죄수를 죽이고 살리는 판결에 이르기까지 대소 간의 법 절차와 거래에 해당한다. ‘법’은 한글에서 가장 강력한 단어다. 무엇을 가리켜 나라의 ‘법’이라고 하거나 가문의 ‘법’이라고 하면 모든 논쟁은 그것으로 끝난다. “그런 법이 어디 있소?” 하거나 “그건 누구나 다 아는 ‘법’이오”라는 말들은 상대방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통렬한 말이다. 한국은 계약과 협정의 나라가 아니다. 부동산에 관한 문서들과 현금 증서들, 그리고 결혼 증서를 제외하고는 문서로 남기는 계약이 거의 없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7>] 매켄지 선교사의 용기와 기질을 보다
동학군에 맞서 마을 전체 보호한 일에 감탄
일찍 세상 떠났지만 그 영향력은 계속 남아
소래를 두 번째로 떠난 뒤 동해안 원산에서 선교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곳에는 아직 프로테스탄트 선교부가 설치되지 않았다. 원산에서 사역을 마치고 6년 만에 고국을 방문한 뒤에야 비로소 내가 한국에서 처음 사역을 시작한 황해도 소래를 찾아가 보았다.
그동안 노바스코샤(캐나다)에서 온 매켄지 선생이 그곳에서 1년가량 지내며 내가 살던 집에서 살았는데, 아마 정원이 고향 냄새를 물씬 풍겼으리라 믿는다. 중국 의화단(義和團)과 마찬가지로 청일 전쟁을 틈타 한국에서 일어난 ‘동학군(東學軍)’이라는 두려운 집단은 소래 사람들에게 큰 불안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상황을 일하실 기회로 삼으셨음이 훗날 입증되었다.
매켄지 선생은 마을 사람들이 자기들의 물건을 보호해 달라는 부탁을 해올 만큼 큰 신망을 얻고 있었다. 그들이 가져온 물건들은 그의 집 둘레에 가득 쌓였고, 그는 그 위에 영국기와 자신이 고안한 깃발-흰 바탕에 빨간 십자가-을 꽂았다. 그 이래로 이 깃발은 한국 전역에 기독교 교회를 상징하는 깃발로 알려졌다.
‘동학군’이 매켄지 선생을 죽이고 그를 감싼 마을 전체를 쑥밭으로 만들려고 몰려온다는 소문이 여러 번 들렸다. 그러나 매켄지 선생은 용기와 지혜를 발휘해 마침내 그들의 병영을 찾아갔다. 이 반란군들과 조용하고 온화한 대화를 나눈 끝에 백인과 기독교 선교에 대한 악감정을 몰아냈다. 이 선교사에게 위탁한 재산들이 그대로 보호되었고, 매켄지 선생은 마을 사람들이 감사한 뜻으로 내놓은 선물의 한도 내에서 소래 지역에서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을 겪은 뒤 매켄지 선생은 안타깝게도 전염병에 걸려 하늘의 상급을 받으러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잡초를 뽑고 있을 뿐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곳에 씨를 뿌렸고 자신은 그 소산을 거둘 뿐이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그 큰 풍채를 여간해서는 놀려두는 법이 없었다고들 했다. 그는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다니면서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샀다. 그가 잠들자 주변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애도했고, 아주 큰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러 주었다. 고결한 사람! 그는 살아서 자신의 기도가 응답받고, 자기의 헌신이 보상받는 것을 지켜보지 못했으나, 남아 있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희생에 내리신 풍성한 보상을 지켜보고 있다.
매켄지 선생이 죽고 이듬해 봄이 찾아왔을 때, 나는 캐나다에서 원산으로 돌아왔다. 당시는 러일 전쟁이 벌어지던 때라 원산에 주둔한 일본군 기지를 일본군 초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내 숙소로 가려면 일본군 기지 곁을 지나가야만 했다. 내가 타고 온 증기선은 군수물자들을 적재한 배로서 뭍에서 5㎞ 밖에 정박했기 때문에, 나는 새벽 3시에 우편선을 타고 뭍으로 향했다. 우편물 담당자와 면식이 있는 덕택에 총에 맞지 않고 시내로 들어갔다. 기지 근처 초소를 지나기란 더욱 위험했다. “정지!” 하고 외치면서 즉시 총을 겨누던 초병들은 내가 일본어로 원산 거주자임을 설명하자 총을 거두고 통과시켜 주었다. 칠흑같이 캄캄한 새벽이었다.
소래에 다시 가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겨울 전에 맞춰 가기란 불가능했다. 원산에는 성탄절쯤이면 대개 눈이 내렸고, 따라서 눈이 내리기 전에 산맥 서편 기슭에 도착하든가 아니면 눈신을 신고 산을 넘든가 해야 했다. 한국 사람들은 15㎝가량인 버들가지들을 사슴 가죽끈으로 엮은, 지름 30㎝가량 되는 둥그런 눈신을 신는다. 깊은 눈을 헤치며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고생을 면하려면 원산에서 성탄절 만찬을 갖지 못하는 아쉬움을 감수해야 한다.
소래로 돌아가는 길 도중 우리는 어느 산중 마을에 머물렀다. 과거에는 예수 이름이 한 번도 선포된 적이 없던 그곳에서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 아들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두 남자를 만났다. 그곳에서 천사들도 부러워할 만큼 구속받은 사람들과 함께 성탄절을 보내게 된 것이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8>] 성탄절 무렵 첫 선교지인 소래 찾다
6년 전 처음으로 복음 전한 지역 다시 찾으니
구원받은 여러 가정이 사모함으로 펜윅 기다려
12월 25일. 시종(侍從)이라 하는 충직한 ‘소년’과 함께 거세게 쏟아지는 눈발을 맞으며 산길을 갔다.
처음 복음을 전한 황해도 소래에 가기 위해서였다. 북서쪽으로 돌아 서해안을 따라 내려갔으나 소래까지는 아직도 96㎞나 남아 있었다. 조랑말이 뒷다리를 절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주저앉고 말았다. 소들은 수숫단을 먹고 잘 자라지만, 말들은 그것을 너무 많이 먹으면 죽게 된다. 말이 주저앉은 곳 근처에 있는 마을에 호소하니 마을 사람들이 따뜻하게 환대해 주었다.
한국에서는 나그네를 언제나 그렇게 맞이하는데, 마치 한국인들의 혈관에 아랍인들의 피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마을 사람들은 즉시 가장 좋은 집을 비워 우리가 편히 쓰도록 해 주었고, 이 나라에서는 드문 일이긴 하나 주저앉은 말에게도 안락한 마구간을 제공해주었다. 이곳에서 사흘을 머물면서 구속의 사랑 이야기를 전하였다.
사흘째 되던 날 주인은 “사람들 가운데는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그게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하면서 사도행전 4장 12절을 보여 주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전하는 이 예수를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가엾은 사람! 나는 “온 땅의 재판장께서 공의를 행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에 관해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나는 로마서 2장을 인용하였고, 그가 좀 더 캐묻기에 시편 9편 17절을 인용한 다음 그들이 악한지 악하지 않은지 스스로 판단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그는 호통을 쳤다. “내 조상은 예수를 믿지 않고 죽었소. 예수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소. 만약 그들이 지옥에 간다면 나는 그들과 함께 가겠소.” 그때 내 심정이 어땠는지는 말로 형용할 길이 없다.
소래 지역 복음화되다
조랑말이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고, 하룻길을 더 가니 소래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질러가면 16㎞가 남은 셈이고, 해변 길로 돌아가면 48㎞가 남은 셈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눈길은 아무도 갈 수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나는 “그러나 나는 캐나다 사람으로서 눈을 이용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들은 무덤덤하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깊이 쌓인 눈을 헤치고 잠시 산을 오르다가 우리는 나무꾼의 샛길을 발견하였다.
미국 인디언들이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썰매에 겨울용 땔감을 싣고 끌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아름다운 고갯길 정상에 이르러 바위들과 상록수들, 눈과 급히 흐르는 여울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정경을 만났을 때, 앞에서 한 꼬마가 외제 손가방을 들고 오고 있었다. 그게 누구 가방인지 궁금해서 물었더니 내가 잘 아는 어느 관리의 아들 것이라고 했다. 그가 올라왔을 때 우리는 소래 사람들이 모두 안녕하다는 소식과, 안제경 선생과 서경조 선생이 뒤따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큰 바위 위에 올라서서 보니 두 양반이 등성이를 막 올라오고 있었다. “게 누구요?” 하고 소리치자, 내 모습을 본 그들은 눈을 헤치고 황급히 뛰어 올라와 나를 끌어안았다. 밝은 표정에서 그들의 정황을 읽을 수 있었다.
서 선생은 나를 보자마자 가슴을 치면서, “당신을 여기서 뵙다니 하나님이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제 죄를 용서해 주셨군요” 하고 말하면서, 안 선생을 가리키면서 “저 죄인에게도 주께서 자비를 베푸시고 그 죄를 용서해주셨고, 우리 마을 전체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셨습니다” 하고 말했다. 안 선생은 관청에 들러야 했으므로, 서 선생이 나와 함께 가게 되었다. 안 선생은 서 선생으로부터 나를 꼭 자기 아내에게 데리고 가겠다는 다짐을 받은 뒤에 길을 떠났다. 서 선생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잘 아시겠지만, 안 선생 부인은 지난 6년 동안 선생님을 다시 보내 달라고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했답니다.” 우리가 안 선생의 집에 도착했을 때 서 선생은 안 선생 부인을 불렀다. 그녀는 힘없이 뜰로 걸어 나왔다. 불구여서 지팡이에 크게 의지했기 때문이다. 나를 보자 곧장 다가와 내 손을 붙들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주여, 이제 당신의 여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군요, 제 기도를 들으사 선생님을 다시 보내 주셨습니다.”
나는 종종 그때의 광경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면류관을 장식할 보석을 얻는 데 들인 비용에 대한 대가치고는 참으로 풍성한 대가였다고 확신하곤 한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9>] 귀신 숭배 마을이 예배하는 장소로
마을 주민 300여 명, 죄를 회개하며 주께로
더 큰 역사 이룰 기회 놓친 것 후회스러워
지난날, 귀신 숭배가 그치고 주님을 예배할 장소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던 작은 숲이 눈에 들어왔다. 의젓하게 서 있는 나무들 앞에는 아름다운 기와지붕을 얹은 예배당이 서 있었다. 구속받은 마을 사람들이 세운 예배당이었다. 그날 밤 기도회 때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가 된 교인 300여 명 앞에서 기도와 찬송을 인도하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 뒤로 두 주일 동안 성경공부를 했는데, 아침과 낮은 남자들을 대상으로, 저녁 시간은 안 선생 집에서 여자들을 대상으로 했다. 안 선생 부인이 이 여자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데 크나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서로의 죄를 자백하다
열 이틀째 되던 날, 나는 오랜 친구를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우리 집회에 역사하고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내 눈에는 조금이라도 감격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죄인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들이 아무리 악해도 성령의 역사는 막을 수 없습니다. 이곳 신자 중에서 누가 서로 미워하는지 제게 말해 주십시오.”
그 사람은 엎드려 울면서 자기와 다른 두 사람이 서로 미워하게 된 가엾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나님께 사죄를 구하고 그들에게 가서 용서를 구하지 않겠느냐고 묻자,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는 하나님과 화목하고서 형제들과도 화목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 형제 중 한 사람은 마침 내 말(馬)에 편자를 달고 있었다. 내 친구가 그 사람에게 가서 연장을 집어주고 말의 발을 들어주는 등 도와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기뻤다. 기회가 생기자 그는 두 사람을 각각 찾아가서 지금까지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노라고 고백했다. 다음 날은 주일이었다. 제자 300여 명이 모였을 때 죄 씻음을 받은 교인이 그들 앞에서 간증하자 그들은 모두 자기 죄를 자백하면서 울었다.
며칠 뒤 동료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에게 그때의 정경을 말해 주니까, 그는 매우 가슴 아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형제, 수천 리를 걷더라도 죄 때문에 그렇게 운 한국인을 만나 보고 싶군요. 난 아직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소래 사람들은 내게 남아서 자기들의 목사가 되어 달라고 간청했다. 급료를 지불하고, 더 큰 집을 지어 주고, 하인들을 붙여 주고, 길 잃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돕겠노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거절했다. 이미 내가 없는 동안 다른 선교부가 소래 지역에서 이미 사역을 시작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에 열린 문을 통해 하나님과 함께 당당하게 들어가지 못하고 문제가 복잡해지는 걸 더 두려워했던 것을 나는 두고두고 후회한다.
만약 그때 이런저런 관습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더라면 주께서 예비하신 이 사람들에 의해 이 나라에 은혜의 역사가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다. 때로는 평화를 사는 데 지나치게 비싼 값이 들 때도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작별할 시간이 오자 사람들은 혼자 가겠다는 나를 만류하고서 가장 유망한 청년을 나와 함께 가게 했다. 그 청년에게 목회 훈련을 받게 하려는 뜻이었다. 그 밖에도 소책자들을 발행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돈을 내게 주었고, 40리 밖까지 배웅했다. 나는 다음 두 주일을 서울에서 그들의 사랑을 전하면서 보냈다. 그 소식은 동료 선교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었고, 오랜 친구들에게 새로운 힘을 북돋워 주었다.
근면하며 지적 능력이 뛰어난 한국 사람들
서양에서 한국에 운명을 걸고 온 학생들은 한국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들의 뿌리가 어디인지를 알고 싶어 한다.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몽골족에서 유래했고 아랍인의 피가 약간 섞였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으나, 확신할 만큼 충분하지는 않다. 아랍인들은 7~9세기에 한국에서 무역했는데, 아마 이때 그들의 몇 가지 관습을 이곳에 남긴 듯하다. 아랍인들의 매사냥은 심지어 매를 훈련하고 선별하는 것까지도 한국에서 똑같이 시행한다. 한국인들이 손님을 극진하게 환대하는 것도 이스마엘 자손들의 관습과 비슷하다.
생김새는 중국 사람들과 다르고, 일본 사람들과도 딴판이다. 일본 사람들보다 키가 훤칠하고 몸집도 크고, 지적으로도 더 우수하며, 일본 사람들에게 가득한 잔인한 말레이 족의 피가 조금도 흐르지 않는다. 한국 사람들은 명민(明敏)하여 어떤 가르침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고, 창의력이 있고, 근면하고, 고생과 시련을 거의 초인적으로 잘 참아 내며, 적자가 생존하는 야생 동물들과 비슷한 활력을 갖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아기를 낳아도 천연두에 면역되기 전까지는 자녀의 수에 넣지 않는다.
그들의 윤리는 주로 유교 윤리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아주 냉정하게 말해서 그리스도를 빼놓고 생각하면 중국과 한국 문화는 서양 문화보다 인류의 평화와 행복에 훨씬 더 많이 이바지해 온 게 사실이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0>] 한국인에게 사역을 맡기다
위험 요소 안고 현지인 사역자 세워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람임을 깨달아
1893년 나는 캐나다로 돌아갔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3년이라는 대기 기간을 주셨다. 당시에 나는 다른 선교부들처럼 한국에 여러 백인 선교사를 데리고 가라는 여론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으며, 오히려 교단의 ‘신조와 의식집’(Principles and Practices)에 본토인 신자를 설교자로 세우는 것을 금하는 문구를 삽입했다. 아무래도 본토인이 잘못된 교리를 전할 우려 때문이었다. 고국에 있는 동안 나는 영적으로 큰 복을 받았고,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일해 보고 싶었다. 마침내 가도록 허락을 받았다.
사역의 방향을 바꾸다
한국에 도착한 지 하루나 이틀 뒤에 드린 첫째 예배에서 7명이 그리스도께 신앙을 고백했다. 당시에는 그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기는 고사하고, 한 사람도 믿음을 견지하지 못했다. 그 뒤에 곧바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다시 한 번 사역을 시작하여 전도와 설득을 되풀이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은 신앙을 고백했으나, 목욕시킨 돼지처럼 즉시 진흙탕으로 다시 가서 뒹굴었다. 이렇게 좌절에 싸여 몇 년을 보내다가, 마침내 무슨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나와 만난 뒤 다른 선교부에 소속하여 한국에 왔던 미국 선교사들이 그 무렵에 불만을 느끼고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그 선교부 책임자가 선교부 재산을 내게 넘겨주었다. 또 같은 시간에 깨끗하지 않은 노란색 상복을 입은 키 작은 사람이 그리스도께 돌아와 훌륭히 신앙을 고백하는 일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사역을 맡기기로 하였다. 그에게 맡긴 지역은 내가 살던 곳에서 480㎞나 떨어진 곳이었고, 한국인에게 그렇게 먼 지역을 맡도록 보낸다는 것은 큰 호수를 헤엄쳐 건너려는 것처럼 무모하게 보였다. 나는 예수님이 자기 양들이 아무리 휘하의 목자로부터 480㎞나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그들에게 참으로 선하신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아직 체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차후 목사가 된 신명균 씨를 만나다
우리는 그 사람을 우리의 손이 직접 닿지 않는 먼 사역지로 보내면서 염려를 떨치지 못했다. 그는 그다지 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믿음’이 충분히 뿌리를 내렸다고도 할 수 없었으므로 그것은 훨씬 더 힘들었다. 그는 이미 아버지와 형과 갈라서는 시련을 잘 견뎌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집안은 그가 그리스도께 충성을 맹세했다는 말을 듣고는 그를 내쫓았던 것이다. 어머니와 아내는 그의 편에 섰다. 두 부녀가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구주가 자기들의 구주이고 그의 하나님이 자기들의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내용을 보았다.
신명균(초대 침례교인, 일본강점기에 순교)이라고 하는 이 사람은 맨 처음 주일예배에 참석했을 때 한국의 누런 상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관례에 따라 삼년상을 치렀고, 무덤에서 마지막 제사를 지낸 뒤, 집으로 향했다. 겉옷이 더 구겨지고 너덜너덜할수록 상(喪)을 잘 치렀다는 표시였다. 신 선생은 분명히 그 의무를 잘 이루어냈을 것이다. 우리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더없이 처량해 보이던 그 모습에서 그 사실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 귀신을 숭배할 때 입던 누런 상복을 벗고 그리스도의 의라는 흠 없는 흰 세마포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셔서 사람의 누추한 육체를 입고 타락한 인간의 원수들을 하나씩 정복하면서 살아가신, 온전한 삶이라는 실로 촘촘히 짠, 흠 없는 도포를 입은 것이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전10:20)
얼마나 훌륭한 구주이신가! 그 크신 은혜로 사람을 귀신에게 제사하는-그 누추한 일을 하느라 옷을 버려가면서-자리에서 이끌어내사 피로 깨끗하게 하시고, 십자가로 과거와 단절케 하시면서, 말씀으로 그 정신을 씻어내셔서, 당신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보게 하신다.
죄와 삶의 애환에서 맴돌던 사람은 목자를 발견하고 그 영광과 아름다움을 본 다음부터는 거룩한 사랑과 감사의 자리로 나가고, 은혜를 갚기 위해서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바치게 된다. 신 선생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이 일을 했다. 그리스도를 발견한 지 열흘이 되었을 때 주께 무릎을 꿇고서, 이제는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없고, 따라서 그것을 주께 드리고자 한다고 아뢰고, 주께서 그것을 기쁘신 뜻대로 써주시기를 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기술자가 도구를 사용하듯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간단한 사실과 신 선생이 특별한 사역을 위해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사람이라는 사실을 나는 깨닫지 못했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1>] 현지인에게는 현지 사역자가 필요함을 알다
성경 공부로 청년들 가르쳤으나 모두 떠나
외국인으로서 깰 수 없는 벽 있음 깨달아
신명균 선생(초대 침례교인)은 맡은 일을 썩 잘했으므로 감독할 필요가 거의 없었다. 사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보다 더 오랜 경험을 했고, 성경 내용에 좀더 익숙하고, 사람들을 다루는 데 좀 더 경험이 있었으므로 내 조언이 그에게 도움이 되었고, 그도 지칠 줄 모르고 내게 조언을 구했다. 신 선생이 내게 어려움을 끼친 게 있다면 그것은 그가 더 많은 권한을 차지하려고 한 데 있지 않고 오히려 내가 그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려 해도 잘 받아들이지 않은 데 있었다.
내 눈은 아직 감겨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나는 유망한 청년들을 발굴하여 목회자로 가르치고 훈련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당시에 태평스럽게 세상에 젖어 살던 청년들 가운데 세 명을 지켜본 나와 아내는 성경 학교를 개설하여 청년들을 목회자로 양성하기로 했다. 당시에 우리가 좀 더 지혜로웠다면, 그런 일을 시작할 만한 건물도 재정도 없는 어려운 현실에서 섭리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열심이 너무 앞섰고, 전통도 그것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우리는 보조 교사 한 명을 두고 청년 네 명을 대상으로 학교를 시작했다.
학생들을 현실과 동떨어진 사람들로 만들거나, 배운 사람이 육체노동을 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한국의 인습에 그냥 젖어 있게 하지 않겠다는 결심 하에, 우리는 교과 과정을 편성할 때 오전에는 작은 농장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오후에는 공부하도록 정했다. 또 하나 관심을 기울인 것은 교육이 한 분야에만 치우쳐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무지하게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교과목을 성경과 읽기, 쓰기, 셈으로 한정하였고, 교수 방식을 서양식보다는 동양식으로 하기로 했다.
성경 교육은 일정 본문을 자유자재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반복해서 읽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려면 학생들은 재능과 기억력 정도에 따라 20번, 25번, 30번을 읽어야 했다. 이런 방식으로 청년들에게 모세 오경을 철저히 읽게 했다.
고금을 막론하고 학생들이 늘 그렇듯이, 시험을 쳐 보니 수준이 제각각이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유월절’(출13장)에 관한 시험이다. 첫째 청년은 사내답게 곧장 정확한 해석을 말했다. 그는 교사로부터 복음을 전해 보라는 과제를 받았다. 교사가 자신을 복음을 모르는 사람으로서 정말로 하나님이 사람들의 죄들을 사하셨는지 알고 싶어하는 구도자라고 가정하고서 전도해 보라는 것이었다. 둘째 청년도 과제를 잘해냈으나, 셋째 청년은 전혀 다르게 함으로써 아직 복음을 깨닫지 못했음을 드러냈다.
우리는 바른길을 가고 있다고 믿었다. 청년들을 안전하게 지키고, 그들이 새 은혜 언약을 전하는 사역자들로 성장하도록 최선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이따금 교회로부터 그들이 독선적이라거나, 신앙 연륜이 더 깊은 교인들 앞에서 더 많이 아는 체한다는 비판들이 간접적으로 들려왔으나, 우리는 시기심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서 더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아래와 같은 일을 만나고 말았다.
지력이 뛰어난 보조 교사는 일반 사회에 나가도 쉽게 지도자가 될 만큼 많은 지식을 터득한 다음 돈을 벌기 위해 세상으로 나갔다. 첫째와 둘째 청년들은 4년 훈련을 마친 뒤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선교사에게 설득을 받고는 그에게 넘어갔다. 제칠일을 지키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는 말과, 만약 자기에게 오면 적잖은 급료를 지불하고 앞으로 더 올려 주겠다는 제의에 넘어간 것이다. 그들보다 어렸던 청년은 영어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뛰쳐나갔고, 넷째 청년은 일찌감치 지쳐서 세상으로 갔다.
원산의 믿지 않던 한국인들마저 우리에게 4년 동안 무료로 교육과 도움을 받고는 활동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떠나 버린 청년들을 크게 비판했다. 한국인들은 동족이 외국인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외국인이 보는 앞에서 그에 관해 이렇다저렇다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청년들이 떠나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이들이 백인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이 동족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데 부적합하다는 사실을 아주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이것은 매우 호된 교훈이었다. 그 일을 겪고 난 뒤 우리는 자주 눈물로 베개를 적셨고, 그들이 우리를 버린 일로 크게 상심했다. 이제야 우리는 다른 나라에서 온 외국인은 이 긴요한 사역에 최선의 도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부터 우리가 철저히 실패한 곳에서 신 선생이 눈부시게 성공을 거둔 이야기를 하려 한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2>] 내가 실패한 곳에서 본토인 목사가 거둔 성공
헌신적인 노력으로 제자와 교회 세워나가
동양적 방법으로 거둔 놀라운 성과에 감탄
<사진설명> 신명균 선생과 그의 제자들이 전도를 위해 집을 나서고 있다.
신명균 선생이 우리 집에서 수백 킬로 떨어진 새 지역을 맡고 나서 맨 처음 한 일은, 귀신들린 어떤 청년을 고치고 그를 집중적으로 보살핀 일이다. 이 청년의 부모는 점잖고 형편이 넉넉하고 가문도 좋은 분들로서, 거듭난 뒤에 하나님의 가문에 들어왔고, 14세 난 아들을 신 선생에게 보내 그의 제자가 되게 했다.
한국에서는 이런 계약을 맺고 나면 제자를 ‘사람으로 만드는’-한국인들은 그 일을 이렇게 표현한다-과정에 따르는 모든 문제에 스승이 부모를 대신한다.
신 선생의 가정은 예수를 믿는 문제로 불화가 일어나서 아버지와 아들, 형제와 형제, 남편과 아내가 갈라졌다. 신 선생의 아내는 처음에는 남편을 지지하다가 다시 식구들에게로 돌아갔다. 하지만 신 선생과 좋은 가문 출신인 그의 노모는 집을 나가 사방 180센티밖에 되지 않는 비좁은 방에서 살았다.
신 선생은 이 방에 ‘판순’이라는 어린 제자를 들였다. 나중에 이 식구는 사역지로 이사했으나, 거처는 작은 오두막에 불과했다. 흙벽에 초가지붕을 얹은 사방 180센티 방 하나에, 너비 90센티 툇마루와, 한쪽 끝에 장대들을 세우고 그 위에 밀짚을 얹어 만든 부엌이 전부였다.
서양인 처지에서 신 선생의 아내(이때는 그에게 돌아와 있었음)와 자녀, 그리고 어머니가 그 작은 방에서 지내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그런 가운데서도 신 선생과 그의 어머니 간의 애정만큼 모자간에 애정을 나누며 사는 모습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나는 그럭저럭 15달러를 만들어 그에게 보내 집수리하는 데 사용하라고 했다. 그런데 다음번에 그곳으로 내려갔더니 여전히 그 누추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당연히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지만, 그는 자꾸만 대답을 회피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작달막하지만 헌신적인 이 양반이 주변 마을들에 전도자들을 보내는 데 그 돈을 써 버렸다고 했다. 신 선생한테 그 돈은 특별히 집수리하라고 보낸 건데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목사님, 주변 많은 이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 채 죽어 가는 상황에서 도무지 그 돈을 나를 위해 쓸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멸망해가는 이들에게 십자가의 사자들을 보내기 위해 그와 가족, 그리고 학생들이 묽은 죽으로 연명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주께서 이런 헌신에 보상하지 않으실 리 없다. 신 선생은 곧 교회를 열두 곳에 개척했고, 조랑말을 타고 정해 놓은 시간에 교회들을 방문했다. 교회를 방문할 때는 학생들을 여럿 데리고 다녔는데, 학생들은 종종걸음으로 조랑말 뒤를 따라갔다.
학생들은 이런 방식으로 그를 따라다니면서 신체적, 영적, 실제적 강의를 동시에 받았다. 물론 이것은 우리 서양식이 아니라 동양식이지만, 동양인들에게는 훨씬 더 좋은 방법이다. 잘 익은 과일에서 겸양이라는 아름다운 꽃을 따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개척한 지 얼마 안 되어 박해를 받았는데, 그럴 때는 학생들을 모아 놓고 대적들이 자신과 화해할 때까지 간절히 기도했다. 그 중 한번은 학생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교훈거리가 되었다. 그때 마귀는 학생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신앙이란 백인에 대한 경외일 뿐이라는 말로 꾀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주변에 백인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고, 그 일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다.
신 선생과 그의 가족이 안락한 새 집에서 살게 되자 우리는 안심이 되었다. 신 선생은 120달러를 들여 그 집을 직접 지었다. 그렇게 작달막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사역을 완수하였는지를 생각하면 항상 신기한 생각이 든다. 그는 언제나 학생들에게 시험을 냈고, 학생들의 진보는 가히 놀랄 만한 것이었다. 신 선생이 백인 다섯 명 몫의 사역을 맡아 고생하고 있다는 말이 자주 들려 왔는데, 그런데도 모든 게 번성하는 듯했다. 그의 교회들은 예절과 교양의 산실이었다. 그들은 모두 동양의 고상한 윤리로 교육받았고, 그들을 가르친 이 작은 동포를 속일 줄 몰랐다.
나는 그의 사역지를 둘러볼 때마다 이런 객관적인 교훈들을 접하면서, 어느덧 교만하던 내 마음속에 동양 문화에도 좋은 점들이 있을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중에 가서는 방법까지도 동양이 서양보다 더 성경에 가깝다는 점을 수긍하게 되었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3>] 복음 전단지와 쪽복음서로 전도에 박차
현지인 전도자들의 활약으로 교회 31곳 세워
감독자 필요… 신명균 선생 초대 목사로 임명
우리는 출입이 허용된 여러 지역을 되도록 철저히 전도하려 했으나, 그때 사용한 방법은 간단한 것이었다. 먼저 성경반을 열고, 성경과 ‘쪽복음서’들을 비치하고, 경험 있는 사람에게 그 공부반을 맡기며, 그를 그 지역 지도자로 삼는 것이다. 그에게는 현지의 필요와 우리에게 있는 전도자들의 상황에 따라 전도자 10~20명가량을 배속한다.
아직 우리는 군(郡)마다 전도자 한 사람을 세울 정도가 되지 못했다. 전도자는 성경-한 달 동안 팔 분량-을 짊어지고 자기가 맡은 군으로 가서 읍과 촌락들을 두루 방문한다. 한 집도 거르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을 만나며, 만나는 사람에게 간절히, 때로는 눈물로 호소하여 온전히 복음을 전한다. 한 권에 0.5센트나 1센트 하는 복음서를 그들이 사지 않으려고 할 때는 요한복음 3장이 적힌 전단이나 성경 본문들을 적절한 주제에 따라 배열해 놓은 전단을 건네준다. 관할 구역을 다 돌아보기 위해서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이 일을 되풀이한다.
<사진설명> 신 목사의 새 집. 이 집을 짓는 데 120달러의 경비가 들었다.
예수의 영에 힘입어 이 일이 철저히, 진실하게, 반복해서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그 군이 복음화한 것으로 여긴다. 우리는 주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복음 전도를 쉬지 않고,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사람들은 주께서 자기 교회에 명령하신 바에 따라 복음을 전해들을 기회를 얻었다. 우리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를 전해 왔고, 죄를 씻고 청산케 하는 그분의 보혈과 십자가를 전해 왔다. 이렇게 위대한 구원을 등한히 할 때 어떤 결과들이 있었는지를 충실히 선포했다. 우리는 심판을 보고도 경고(警告)하지 않은 파수꾼에게 돌아갈 피의 죄책이 우리와 무관하다고 믿는다(겔33장).
교회 31개가 섰을 때, 우리는 사역을 한결같이 조직할 필요를 느껴 각자에게 임무를 맡겼다. 그동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도들의 지시를 귀담아들을 상황이 될 때까지 조직 문제를 미뤘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행6:3).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바울의 목회 서신들을 공부하면서 좀 더 구체적인 교훈들을 발견했다. 바울은 자신이 감독으로 임명한 디모데에게,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3:15) 하고 편지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임명한 또 다른 감독인 디도에게 편지할 때도,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찌라”(딛1:5~6) 하고 썼다.
우리는 조사(助事)들을 한 데 모으고,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 교육하기에 유익한’ 성경이 제시하는 방향이 되도록 가까이 가려는 뜻을 품고서 조직을 결성했다. 교회 회의가 열렸고, 모든 교인이 만장일치로 찬성하였으므로 형편에 따라 모든 교회에 십인 순장(반장)들, 오십인 순장(통장)들, 백인 순장(총장)들을 두기로 했다. 이들이 맡은 일은 집사들을 보조하는 것으로서, 집사들은 그들을 감독하고, 교회 재정을 관리하며, 신앙 감독도 하였다.
집사들 위에는 목사들이 임명되었는데, 이들에게는 조사(助事)들이 딸렸고, 조사들은 목사들의 감독 하에 담당 교회들을 돌아보았다. 목사들 위에는 감목 또는 치리 목사가 임명되었다.
목사들은 석 달에 한 번 담당 지역들에서 모임을 한다. 이 모임은 행정상 모임일 뿐 아니라 성경공부 모임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도 교회들은 주의만찬식을 거행하며, 지부 교회에서 순장들과 집사들로 임명받은 사람들을 연회에 보고한다. 목사들과 조사들은 감목이 임명한다. 실제로는 감목, 목사들 그리고 교인들은 임명 건들에 대해서, 성령이 교회의 문제들을 주관할 능력을 온전히 갖추고 계시다는 믿음을 가지고 모두 동의한다. 그리고 참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대한기독교회는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행13:2)라는 성령의 음성을 들어 왔다.
제1차 연회에서 성경이 규정한 요건들을 두루 갖추고 사역을 통해 자격을 충분히 드러낸 신 선생을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이방인들 가운데서 취하신(행15:14) 이 백성의 초대 목사로 임명하였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4>] 그리스도의 일꾼 손 선생의 괄목할 성장
신명균 목사가 훈련한 사람들과 내가 가르친 사람들 간의 차이가 있는데, 그의 학생들은 모두 유능하게 활동하지만 내 학생들의 활동은 모두 부진하다는 것이다. 신 목사는 자신이나 내가 가르친 학생들이 모두 하나가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단 몇 주만 내게 배웠을 뿐이다. 그가 백인과 너무 가까이 접촉하여 더 효과적으로 쓰이지 못하게 되기 전에, 하나님의 섭리로 그를 내게서 데려가신 것이다. 그가 멀리서 내게 훈련과 감독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이 그를 훌륭한 일꾼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외로운 상황이 그가 모든 조언을 기쁘게 듣게 해 주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신 목사 외에도 손 선생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도 훌륭한 사역자였다. 5년 전 나는 손 선생에게 침례를 베푸는 특권을 누렸다. 손 선생은 외모가 호감을 주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행동거지는 매우 교양이 있었으며, 침례 문답 때 그의 대답들은 아주 간결하고 정확한 데다 아주 영적이어서 나는 그에게 호감을 느꼈고, 장차 유용하게 쓸 재목이라고 생각했다.
일 년 뒤 그가 살던 지방에서 열린 사경회에 참석했을 때, 나는 신 목사에게 필사자 한 분을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손 선생을 불렀는데, 그의 필체는 아주 훌륭했다. 그가 글을 쓰는 동안 나는 그가 갖고 있던 신약성경을 집어 들었다. 한자 신약성경으로서, 중국에서 중국인들을 위해 번역 인쇄한 것이었다. 너무 많이 읽어서 책장이 거의 너덜너덜했고, 참 많이 사용했다는 표가 금방 났다.
“이 책을 읽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묻자, 그는 “조금 읽을 줄 압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에게 신약성경을 건네주면서 한 부분을 읽어 보라고 했더니, 마치 내가 영어 성경을 읽는 것처럼 조금도 막히지 않고 읽어 내려갔다. 한국에서는 한자를 익숙히 알지 못하면 학자 대접을 받지 못하므로, 나는 손 선생이 좋은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밖에 다른 흥미로운 자질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몹시 기뻤다.
<사진설명> 30명밖에 살지 않는 철도 마을 작은 시골 교회에 펜윅 선교사를 만나기 위해 인근지역과 먼 곳으로부터 신자들이 모였다.
우리 전도자들은 모두 성경들을 짊어지고 나가 팔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손 선생의 활동은 책 외판원으로는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영혼들을 얻고 교회들을 세우는 데는 탁월하였다. 그는 동료와 함께 짧은 기간에 여덟 교회를 세웠다. 그가 그 뒤에 내 눈에 띈 것은 2년 전 연회(年會)에서였다. 연회에서는 대개 참석자들에게 간증할 기회를 주는데, 이렇게 하는 목적은 다른 사람들이 그 간증을 듣고 유익을 얻고, 형제들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어떻게 자라가고 있는지를 알기 위함이다. 대략 스무 명이 간증을 한 다음 손 선생이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나직이 말했다.
“내 구원이 내게 달렸지 않다는 사실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목자께서 그 강하신 어깨에 나를 올려 태우고 가고 계십니다.”
단순 명료한 간증이었다. 성령께서 크게 역사 하시는 크고 작은 집회에서 교회의 위대한 설교자들의 설교를 듣는 것은 내 일생에서 크나큰 특권이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환한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시고, 피 흘리신 임마누엘의 다섯 군데 상처를 보이시고, 주께서 우리 가운데서 거니시며 왕의 옷깃 스치는 소리를 들려주실 때, 우리는 십자가의 노병(老兵)들, 강인하고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그 말씀의 사역자들이 머리가 하얗게 센 모습으로 눈물지으며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들었다.
손 선생이 간증할 때도 그러한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 글로 묘사하기는 어렵지만, 그 자리에서 간증을 들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는 그 역사를 직접 체험했다. 몇 달 뒤 다시 집회에 참석했을 때 손 선생이 다시 간증하였는데, 30초가량 명확하고, 간결하게 진행한 그의 영적인 간증은 마치 전류처럼 참석자들을 전율케 했다.
그는 조사(助師)로 임명되었다. 조사라는 직분은 당사자가 잘 감당해 내면 목사가 되는 디딤돌이다. 가르침이 필요한 해안 지방 교회로 내려간 그는 두 주일 뒤에 다음과 같은 보고를 보냈다.
“무자격한 제가 복된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된 것은 귀하신 우리 주께서 무한한 은혜로 베푸신 큰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역 결과 여덟 사람이 복음 전도자가 되기로 주께 헌신했습니다.”
그 뒤에 손 선생은 160㎞ 더 남쪽으로 파송되었다. 그곳은 정규 사역이 이루어진 적이 없는 곳이었다. 그는 이 사명을 수락하면서 한 달에 5달러밖에 안 되는 자신의 급료를 쪼개서 형제 한 명과 더불어 길을 나섰다. 두 사람 다 성경 꾸러미를 짊어졌다. 여섯 주가 못 되어 감동적인 편지가 왔다. 각각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한 교회씩 세웠다는 반가운 소식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또 다른 무리의 교회들을 돌볼 목사가 필요했으므로, 손 선생에게 그 교회들을 맡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그들은 이 제의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5>] ‘걸어 다니는 성구 사전’ 장석준 목사
신명균 목사에게 5년 동안 훈련받으며 성장
성경 각 장 주요 구절 암송… 순회 사역 동참
판순이는 대한기독교회(기독교한국침례회)에서 최초로 결혼한 청년이다. 그는 집사 아들로서 집사 딸과 약혼한 다음 고향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그 마을에서는 그것이 기독교 결혼식으로는 처음이었기에 마을 사람들이 전부 나와 구경했다.
나는 그날 모인 군중처럼 질서정연한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처녀가 친정과 부모를 떠나 시댁과 시부모에게 갈 때는 사실상 아내가 아니라 하인이 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신랑 부모에게 신부를 하인이 아닌 딸로 대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했다. 결혼 예식을 도와준 엠 이 선교회(M. E. Mission) 맥길 목사(Rev. W.B. McGill, M.D.)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이 신부를 위해 그 약속을 받아낼 때 신부가 얼마나 고마워하는 표정을 지었는지 보셨어야 했는데 그랬군요.”
한국 관습에 따라 판순이는 그날 이름을 석준으로 바꾸었고, 어른이 되었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를 장석준 선생이라 불렀다. 그가 신명균 선생과 함께 5년을 공부했다. 그는 주기적으로 우리 집에 와서 쉬기도 하고 공부도 하였다. 올 때마다 혼자서 씨름하던 문제들을 잔뜩 가지고 와서 질문했기 때문에 아주 흥미로운 학생이었다. 그러던 그가 신약성경에 대한 생생한 지식을 얻고,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주요 장들을 암송하고, 어떤 신약성경 구절을 듣더라도 성경책을 펴서 찾을 정도가 되었으므로, 나는 순회 목회하는 동안 그를 ‘걸어 다니는 성구 사전’으로 불렀다.
한번은 내가 다른 도시에서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 소속인 형제 한 분을 도와 부흥회를 인도하였을 때, 장 선생은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내 친구에게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그 형제 휘하 사람 중 일부는 신학교에 다니느라 떠나 있다가, 신선미를 잃고 마음만 성급해진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사진설명> 한국 본토 전도자 그룹
우리는 상담과 기도 끝에 오직 말씀을 전하는 일에 주력하기로 했다. 그것이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가장 효과 있는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나흘쯤 지나서 마침내 전환점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한국에서 유행하는 대로 자기 죄들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제재했고, 그릇된 일들을 바로잡겠다는 의지만 말하도록 했다. 죄는 하나님께만 은밀히 고백하라고 일렀고, 예수께서 명령하신 대로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잘못한 형제를 찾아가 용서를 구하라고 일렀다.
그들은 그렇게 하고 돌아와서는, 그 형제들을 찾아가는 것이 얼마나 곤욕스러웠으며, 일단 형제를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나니 참 쉽고 기뻤노라고 했다. 형제 집을 찾아갈 때 그가 자기들을 어떻게 맞이해 주었는지, 상대에게 저지른 잘못을 고백할 때 서로 얼마나 겸양의 태도를 보였는지 많은 사람이 말했다.
그들이 이렇게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난 뒤, 우리는 도시를 상세히 구분하고 그들을 둘씩 짝지어 각 지역으로 보내면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에게 전도지를 주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도록 권유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이들의 사역이 큰 성과를 거두게 됨으로써 집회 첫날 저녁에는 예배당뿐 아니라 넓은 마당까지도 복음을 들으러 온 불신자들로 붐볐다. 교인들은 얼마 전까지 서로 질시했으므로 외지인에게 설교를 맡기는 것이 최선책이라 여기고서 장 선생에게 설교를 부탁했다.
두 볼과 턱에 보조개가 들어간 장 선생은 언제나 점잖은 사람이었다. 나는 미소를 짓는 이 젊은이가 드센 북부 사람들을 상대할 만큼 강인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모든 것이 서양 개념과 정반대로 이루어지듯이, 그는 그 상황에 아주 걸맞은 ‘우레의 아들’임을 입증했다. 약 8일 만에 도시 전체에 복음을 전파하였고, 수많은 사람이 주께 돌아왔으며, 우리는 작별을 고하고서 남쪽을 향해 길을 떠났다.
장 선생은 남쪽 지방에서 각기 다른 여섯 지역에 거점을 둔 연속 집회들을 시작하였다. 가는 곳마다 똑같은 결과들이 발생했다. 방문하는 곳마다 사단이 그리스도인들을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에 불순종하게 하고, 서로 미워하라는 사단 자신의 해묵은 계명에 순종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으며, 그로써 성령을 근심케 하고, 하나님을 위한 모든 사역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6>] 장석균 선생의 고난과 복음 전도의 삶
고향에서 오히려 배척받았으나 이겨내고
결국 훌륭한 복음 전도자로서 인정받아
장석균 선생의 전도 간증 방법은 아주 흥미로웠다. 그는 성경을 펼쳐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도록 했는데, 그 방법은 모든 경우마다 똑같은 결과를 일으켰다. 즉, 서로 사랑하지 않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울면서 간절히 구하게 하는 것이다. 설교할 때마다 야고보서와 베드로서의 합성 본문을 가지고 전하여 일으킨 결과였으므로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5:8).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3:11~12).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자기 죄를 자백했고, 자기가 잘못한 사람에게 가서 용서를 구했으며, 그렇게 하는 동안 성령께서는 언제나 그들의 영혼을 빛과 기쁨으로 충만케 하셨다. 또 그들의 소원대로 그리스도와 그 백성과 즉시 사귐을 회복하셨다.
그런 뒤 장 선생은 둘씩 짝지어 읍과 주변 마을들로 보냈고, 그들은 가는 곳마다 사랑으로 말미암은 큰 기쁨을 갖고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향해 “오라”는 복음의 초대를 전달하였다. 수많은 사람이 집회에 참석하였고, 교인들은 예배당과 마당에 발 디딜 틈도 없이 들어찬 인파 때문에 밖으로 떠밀려나면서도 관대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그들을 맞이하였으며, 바깥에 서서 예배를 드렸다.
장 선생은 여섯 거점을 확보한 뒤에,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집회를 인도하기 전에 아버지 집에 이삼일 머물면서 쉬었다. 쉬고 있을 때 비단옷을 입고 스스로 선비들이라고 부르는 한국인 두 사람이 포졸 넷을 데리고 장 선생 아버지 집 마당에 들어섰다. 선비인 장 선생은 보조개를 띄우며 환히 웃는 얼굴로 나가 그들을 맞이하였다.
그 선비들은 “이 서양 귀족이 누구냐?”고 비웃는 말을 하더니, 포졸들을 돌아보면서 “이 자를 잡아 매우 치고 옷을 벗기라! 무슨 놈의 귀족이 서양 예수 교리를 가지고 여기에 왔단 말이냐?” 하고 말했다. 포졸들은 그를 때리고 옷을 찢고 밖으로 끌고 나가 살얼음이 낀 도랑에 내던져버린 채 갔다. 시린 겨울바람이 그를 뼛속까지 얼게 했다.
그 뒤로 장 선생은 하루도 건강한 날이 없었다.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뼈가 부러지고 몰골이 처참해진 그를 친구들이 집까지 부축했다. 그들은 모두 사도 바울이 가장 크게 평가한 것으로 충만했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고, 복음에 율법을 섞지 않고 은혜의 복음을 전하면서, 마지막으로 이런 말로 호소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6:17).
이틀 뒤 장 선생은 모든 만류를 뿌리치고 부러지고 상처 난 몸을 이끌고 마지막 집회에 참석했다. 사탄은 그의 사자들을 미리 보내어 나흘 동안 말씀 선포자와 그의 설교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분기점이 찾아왔다. 하나님을 모독하던 이 악인들이 그리스도께 인도받아 나온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바른 관계를 되찾고서 길 잃은 자들을 찾아 나선 결과, 마지막 집회는 가장 성공적인 집회가 되었다. 수십 리 밖에서까지 하나님의 사자가 전하는 복음을 들으러 사람들이 왔으며, 수많은 남녀가 주를 믿었다.
이 일이 있은 직후에 내 소중한 친구 윌버 채프먼(Wilbur Chapman)이 한국에 왔다. 나는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외로웠었다. 선교사들만 이해할 수 있는 외로움이었다. 채프먼은 나를 격려하였고, 서양에도 우리 사역의 진보에 깊은 관심을 두는 친구가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채프먼과 알렉산더가 주최한 파티는 그 자체만으로도 내게 유익을 주었으며, 함께 초대받은 모든 선교사가 그들의 방문에 대해 나와 똑같은 느낌이 들었으리라고 확신한다.
정킨 메모리얼 병원(Junkin Memorial Hospital)의 내과 겸 외과 의사 어빙(C.H. Irvin)은 장 선생이 부상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달려와서 그를 데려간 뒤, 그가 어느 정도 회복할 때까지 극진히 치료해 주었다.
그 뒤 장 선생은 새로운 선교 거점을 마련하는 임무를 띠고 사역지로 파견되었다. 미국 성서공회가 방 하나를 가득 채울 만한 분량의 성경책을 보내 주었다. 이 고마운 단체 덕택에 많은 사역을 한국에서 해낼 수 있었다. 우리는 전도자 12명을 장 선생의 지휘를 받게 했다.
1909년 11월 4일 이들을 주변 군(郡)들로 파송하였다. 각 군에 한 사람씩 파송하였는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한국의 군(郡)은 규모가 대개 미국이나 캐나다의 군과 비슷하지만 인구는 더 많다. 1910년 2월 28일 파송한 사람들에게 빠짐없이 보고가 들어왔는데, 불과 몇 달 사이에 새 교회 36개가 생길 정도로 사역이 강하게 펼쳐졌음이 밝혀졌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7>] 두만강 접경 지역으로 전도에 나서다
매서운 눈보라를 뚫으며 국경 지역에 복음 전해
위험요소 곳곳에 산재하지만 기쁨도 그만큼 커
어느 해 4월, 배를 타고 원산을 떠난 나는 한국 북단에 있는 항구에 닿았다. 우리 교회 초대 집사가 가게 문을 닫고 나를 따라왔으므로, 나는 그와 함께 인력거에 성경 상자들을 싣고 두만강 접경 지역으로 떠났다.
사흘째 되던 날, 우리는 한반도 동북단에서 한국과 중국을 가르며 흐르는 두만강 연안에 있는 가장 큰 도시에 들어가 거리를 누비며 전도했다. 가는 곳마다 운집한 온순하고 조용한 청중 앞에서, 나는 불과 800km 떨어져 있는 한국에서 25년이나 살면서도, 세상에 오사 그들을 구원하려고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전하러 찾아오지 않은 것을 용서해 달라고 했다. 우리는 노점을 2달러에 빌려 이 국경 도시에 서점을 내고 미국 성서 공회가 찍은 성경책을 팔았다. 우리 숙소는 노년기에 접어든 중국 산에 있었는데, 아침에 잠을 깨어 강 저편을 바라보니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길을 계속 가려면 세 가지 방법이 있었다. 조그맣고 약한 조랑말을 타거나, 크고 강한 황소 달구지를 타거나, 아니면 걷는 것이었다. 우리는 첫째 방법을 택해 길을 나섰다가 결국 마지막 방법을 의지했다. 만주 비옥한 땅에 서리가 내렸다. 이곳은 부식토가 많이 퇴적한 곳이어서 내 모자 빛깔만큼 검었다. 길은 빵 반죽처럼 질었다. 조랑말은 나를 태우지도 않았는데 거의 주저앉다시피 했고, 따라서 나는 양쪽에 너덧 근이나 되는 진흙이 달라붙은 가죽 장화를 신은 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눈이 녹아 실개천들을 이루고, 실개천들이 다시 모여 이룬 너비 180~240cm에 깊이 180cm나 되는 깊은 개울들이 광활한 충적토 지대를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땅이 너무 비옥해서 퇴비들이 오물처럼 버려졌다. 훗날 이 지역에서 자란 수수를 고향으로 가져갔는데, 비료 한 번 주지 않고 자란 이 수수는 수염뿌리가 50cm나 되었다. 그곳에서 감자도 먹었는데, 얼마나 푸짐하고 알이 많이 들어찼는지 눈을 감고 먹으면 속에 크림을 넣은, 으깬 감자 같았다. 비료 한 번 주지 않고 이렇게 풍성한 농작물을 거두다니 놀랄 만한 일이었다.
만주 지방에는 한국인 10~20만 명이 들어와 살고, 러시아 국경 저편에도 비슷한 숫자가 살았다. 우리는 한국에서 정북 방향으로 이 지방 한복판을 가로질러 올라간 뒤, 발길을 남으로 돌려 다시 두만강을 건넜다. 남으로 48km만 더 내려가면 서점이 있고, 강어귀는 훨씬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
눈보라가 매우 심해 국경 지방에서 이틀 동안 발이 묶였다가, 한국 쪽 산맥을 탔다. 이곳은 호랑이들이 출몰하여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곳이었다. 일행은 산맥을 넘기 전에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마부를 구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우리는 두만강 지류를 건너 산자락에 접어든 뒤 스물두 번이나 꼬불꼬불 산허리를 돌아 올라갔다.
정오가 되니 눈 녹은 물이 합류하여 큰 내를 이루는 바람에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됐다. 그때 육 척 장신에 풍채 당당한 산 사람을 만났다. 너무 닳아 빤질빤질해진 곤봉을 든 그는 우리 일행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국경 마을의 훌륭한 예의를 갖춰 우리를 대접했다. 나는 솔직히 그가 든 곤봉이 무서워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마음을 놓지 못했다.
아침이 되자 개울물이 줄어든 덕분에 무사히 건넜다. 숙식비를 내려고 하자, 집주인은 변경 마을 방식대로 돈 받기를 한사코 거절했다. 아주 정중하게 얼마라도 주려고 했더니, 그 사람은 육 척이나 되는 몸을 일으키고는, “서양 양반, 우리 북쪽 사람들은 그런 짓을 하지 않소. 우리는 양반들이오” 하고 말했다.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전에 백인을 본 적이 없었으나, 열려 있는 그들의 마음은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언제나 변경에 사는 개척민들을 좋아했고 꾸밈없이 선의를 베푸는 이 훌륭한 한국인들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깊은 눈 속을 헤치고 북쪽 기슭을 기어올라 국경선을 이루는 산맥 정상에 올라갔을 때 생소하고 경이로운 대자연이 우리를 맞이하였다. 길가에 움푹 들어간 작은 못에 식용 개구리 떼가 마치 남쪽 지방 늪지에서처럼 즐겁게 노래하고 있었다. 우리는 호랑이가 있는지 둘러보았다.
한국에는 “육 개월 동안에는 사람이 호랑이를 사냥하고, 다른 육 개월 동안에는 호랑이가 사람을 사냥한다”라는 말이 있다. 내 친구는 숲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호랑이 꼬리임이 분명했다. 호랑이는 마치 고양이가 새를 발견했을 때 그렇듯이, 꼬리를 앞뒤로 꼬고 있었다. 낙엽에 나타난 발자국을 따라간 친구는 그 거대한 짐승이 산마루에 있는 어떤 물체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묵직한 사냥총을 꺼내 그 짐승의 귀 뒤를 조준하여 쏘아 쓰러뜨린 뒤, 호랑이가 과연 무엇을 응시하고 있었는지 보려고 서둘러 뛰어갔더니, 불과 얼마 되지 않는 언덕 경사면에서 한국인이 땔감으로 쓸 나뭇잎을 모으고 있었다. 호랑이는 가죽도 엄청나게 커서,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무려 4m나 되었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8>] 아편 중독자도 전도자로 만드는 복음의 능력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예수 사랑 전하니 새사람 돼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 경험하며 오직 주께 감사
우리는 국경선인 산맥 정상에 있었다. 거기서 해안 쪽으로 내려갔다. 그런 다음 다시 북서쪽으로 발길을 돌렸고, 다시 한 번 두만강을 건넜다. 이번에 건넌 곳은 강어귀 쪽으로 160km 더 내려간 곳이었는데 강폭도 넓고 수심도 깊었다. 일행은 강을 건너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온종일 마차를 타고 달려 밤늦게야 아름다운 포셋(Posset) 만(灣)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부유한 한국인에게 후한 대접을 받은 뒤, 연안 기선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곳에서 또 다른 한국인에게 대접을 받고는 우편선을 타고 원산으로 향했다.
한국 쪽 산맥을 넘으면서 결혼 잔치가 벌어지는 마을을 지나갔고, 다른 마을을 지날 때에는 어떤 노인이 마침 환갑을 맞았다. 관습대로 노인을 위해 큰 잔치가 벌어졌고, 수십 리 밖에서 이웃들이 몰려왔다. 우리 일행을 본 노인은 반갑게 나와 내 손을 잡고 잔칫상 상석으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자기 산촌을 처음으로 찾은 백인에게 후한 대접을 했다. 마침 전도자 김 선생이 이 마을에 들른 바람에 그와 합류했다. 김 선생은 결혼 잔치가 열린 마을에 들어가 등짐 지고 간 성경책들을 모두 판 이야기와, 마을을 떠나려 하니 사람들이 옷자락을 붙잡으며 그 귀한 옛이야기를 더 들려달라고 간청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이 마을에서도 조랑말에 싣고 온 성경책들을 회갑 잔칫상 곁에 모두 뿌려 놓은 뒤 다 없어질 때까지 끈기 있게 팔았다.
김 집사는 원래 서점을 맡아 남아 있었으나, 여러 날 기다려도 서점에 와서 성경을 사가는 사람이 없자 서점 문을 닫고 성경을 보자기에 싸서 짊어진 다음, 성경을 팔며 전도하려고 주변 읍으로 떠났다.
그 읍에서 솜씨가 아주 뛰어난 갓장이를 찾아갔다. 그 사람은 한때 큰돈을 벌어 유복하게 살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중국인이 영국산 아편(이 수치스런 단어를 쓰자니 얼굴이 달아오른다)을 국경 지방에 보급할 때 한국 청년들이 그게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 모른 채 사서 남용하였는데, 갓장이는 처음에는 아편이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도 모른 채 남용한 그 청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술과 도박이 사람을 꽉 움켜쥔 채 끼치는 해악을 전부 합할 수 있다면, 거기에다 열, 열다섯, 스물을 곱해 보라. 그러면 아편의 해악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것이다. 아편은 조금만 피워도 활력이 우둔으로, 우둔이 탐욕으로 바뀐다. 아편에 한번 빠지면 거짓말하고, 저당을 잡히고, 필요하면 도둑질이나 살인마저 서슴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편 생각이 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얻어야 한다. 점차 소화기관들의 기능이 떨어지고, 자연의 보고(寶庫)인 육체는 목숨 하나만 겨우 보존하는 데 이용된다. 그러고는 곧 절망적인 상태에 다다른다. 피부가 마르고, 쪼글쪼글해지고, 빼빼 마른다. 야윈 얼굴은 석탄재 빛깔이 되고, 곧 종말이 찾아온다.
이 불쌍한 갓장이도 그렇게 되었다. 집사가 그에게 그리스도의 위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자, 그는 생전 처음으로 비할 데 없는 이름을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게 말해 봐야 소용없소. 나는 죄인이오.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을 뿐 아니라 이 나라의 법도 모두 어겼소. 나는 가문의 수치요, 마을의 수치요, 내 나라의 수치요. 식구들은 굶주리고 있고, 나는 죽어가고 있소.” 집사는 이 말을 듣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내게는 선생에게 소개해 줄 구주가 계시는데, 그분은 선생을 얽어맨 사슬을 끊고 자유롭게 풀어주실 겁니다. 아편 생각을 말끔히 씻어주실 겁니다. 그 귀한 피로 선생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만들어주실 겁니다. 선생이 그분을 구주와 주로 인정한다면 말입니다.” 집사는 이 말을 한 다음 성경을 펴고 사랑과 은혜와 능력이 담긴 위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렇게 절망 상태에 있는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는 그와 작별했다.
그러나 닷새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를 찾아갔다. 닷새째 되던 날, 아편의 노예였던 그 사람은 “그래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예수를 제 구주로 모시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런 다음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신앙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예수님은 저를 대신해서 죽으실 만큼 저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을 제 구주로 모시겠습니다. 그분이 저를 회복시켜 주실 것이고, 저는 그분의 종이 되겠습니다.”
들어보라! 아편 중독자가 이렇게 순식간에 중독에서 완전히 벗어나 전에 그처럼 연연하던 것을 아주 메스껍게 여기게 된 것이다.
놀랍게도 열흘이라는 기간에 그의 몸은 아기의 몸처럼 회복했다. 기력을 되찾았고, 그 능숙한 손재주를 다시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구원받은 이 사람은 천국의 불빛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읍내를 다니며 자기를 풀어 주신 권능의 구주를 생기 있게 전파했다. 그의 증거에 힘입어 우리 교단은 오늘날 그곳에 훌륭한 교회를 가졌고, 그곳 교인들은 낮에 하는 힘겨운 노동으로 아무리 지쳤어도 저녁이면 모여 밤이 이슥하도록 생명의 말씀을 상고하였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9>] 미신에 붙잡힌 사람들을 믿음으로 잠재우다
평소 친절하나 병자에게는 냉혹한 한국인들
아편 중독자 가족 병으로 죽자 불안에 떨어
한국에서는 나그네를 맞아들인 다음 그가 병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가련한 그를 거리로 내쫓는다. 그만큼 죽음을 두려워하고 미신에 꽉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 소식은 마을에 퍼지고, 마을 사람들은 자기 마을에서 객사한 사람 때문에 액운이 닥칠까봐 두려워서 제비를 뽑아 걸린 사람에게 병자를 업게 한 다음 인근 마을로 간다. 그러고는 들켜서 큰 싸움이 나지 않도록 몰래 버리고 도망친다.
그 마을 사람이 병자를 발견하면 그 마을 역시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이렇게 해서 병자는 밥도 물도 먹지 못한 채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옮겨 다니다가 결국 죽는다. 나도 그런 경위를 거쳐 동구 밖에서 얼어 죽은 사람을 본 적이 있다.
한때 아편 중독자였던 사람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가정에 들어왔을 때, 마을 사람들은 귀신들이 그를 쫓아다니며 식구들을 죽일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을 입증하기나 하듯 얼마 안 있어 그의 할머니가 죽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큰 굿을 벌여 귀신들을 달래라고 재촉했다.
그는 거절했다. 마을 사람들의 태도는 단호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는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라도 자기 백성을 넉넉히 건질 능력이 있으신 분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편 중독자를 구출할 만한 믿음을 가진 전도자 김 선생을 즉시 그에게 보내셨다. 김 선생은 딱한 처지에 놓인 그를 위로하고 격려했으며, 그 지방에서 최초로 기독교식 장례로 죽은 할머니 상(喪)을 치러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큰 불안에 휩싸였다. 귀신들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을 입증이나 하듯 그의 어린 자녀 중 둘이 악성 열병에 걸려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귀신들이 자네 식구를 전부 죽일 거라고 말하지 않았나? 이번에는 귀신을 달래는 식으로 장례를 치러야만 하네” 하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겠소. 나는 예수식 장례를 치를 거요”라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하지만 아이들이 죽는 걸 보지 않았나?”라고 말해도 그는 “나는 아이들이 죽기 전에 예수에 관해서 들은 걸 참 기쁘게 생각합니다. 구주를 모른 채 죽었더라면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을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번에도 김 선생은 그를 위로하였다.
그 일이 있고 난 지 얼마 안 된 어느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 포졸 둘이 예배당에 찾아와 집회 책임자가 누군지를 물었다. “내가 책임자요” 하고 김 선생이 말했더니, 포졸들은 “그래? 당신이 마을을 떠나 줘야겠소”라고 말했다. 김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그럴 수 없소. 내 주님이 나를 이곳에 보내셨으므로 내 마음대로 떠날 수 없소. 당신들이 나를 쫓아낼 권위가 있다면 그 권위를 행사하시오. 난 떠날 수 없소.” 포졸들은 그를 덮쳐 때리고 옷을 찢고 갓을 밟고 책들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갔다. 형제 몇이 내게 편지로 전도자가 겪은 시련을 알려왔다.
김 선생 자신이 쓴 편지도 그들의 편지와 동시에 도착했는데, 김 선생은 그 곤경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전도자들을 좀 더 많이 보내 주십시오”라고만 썼을 뿐이다.
그런 그가 병에 걸렸다. 소모성 질환의 일종이었다. 병세는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쉰 살 먹은 고결한 분으로서, 참으로 많은 희생을 감내한 분이었다. 그때 지난날 그 아편 중독자가 서점으로 내려가 그 죽어 가는 사람에게 “이곳은 불편하니 나와 함께 집으로 갑시다” 하고 말했다. 그런 뒤 그를 집으로 데려가 그 형제가 죽어 천국에 갈 때까지 좋은 대접을 하고 마치 그를 부모처럼 간호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죽자 예수식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리스도를 발견한 뒤 자기 집에서 치른 네 번째 장례였다.
원산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남부 지방에서 사경회를 열기로 했다. 며칠에 걸쳐 사경회를 은혜롭게 마친 뒤 전도자 오십 인을 세워 파송하였는데, 그 중 아홉 명은 두만강 지역을 맡았다. 그들은 안락한 가정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고향을 흔쾌히 떠났다. 한국인에게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백인이 고향을 떠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고생을 뜻한다. 헌신적인 이 전도자들은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 열 달 만에 교인 수가 평균 45명이 되는 건실한 교회 10개를 이 지역에 세웠다.
백인 선교사 아홉 명을 뉴욕이나 런던에서 두만강까지 보냈다면 3000달러가 들었을 것이다. 사역지에 도착했더라도 여러 해 동안 사역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가 되었을 것이고, 기껏해야 한두 명 정도가 쓸모 있는 종이 되었을 것이다. 일부는 죽고, 일부는 병에 걸리고, 일부는 주변 상황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백인 선교사 9명에게 언어와 관습 등을 가르치는 선교 교육을 했다면 4만 5000달러 이상이 들었을 것이다. 케리(Carey) 같은 위대한 선교사도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 한 사람의 개종자를 얻는 데 15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이제 다음과 같은 기막힌 사실들을 들어보라. 나는 산을 넘어 마을을 지날 때면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에 관해 들어 봤느냐고 물어보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한결같이 “아니오, 예수가 누구요?”라고 반문했다. “한국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있는 줄을 모르신다고요? 침례 받은 한국인들이 15만 명이 넘는 데도요?”라고 말하면 그들은 “아니오, 들어 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한국 대부분 지역이 철저히 미전도 지역이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20>] 적재적소에 일꾼을 예비하시다
열여덟 달 사이에 120여 교회 새로 세워
주께서 친히 일꾼을 교육하시고 파송하셔
하나님이 가르치신 뒤 우리는 기도했고, 하나님은 친히 일꾼들을 파송하셨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오래 참으시며 가르쳐 주신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해 온 일이 하나님의 사역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이끌어오셨음을 깨달았다. 그 자녀는 다만 톱, 망치, 쟁기, 쇠막대기, 양 뿔, 물매, 짐승 턱뼈로서 왕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되기도 하고 사용되지 않기도 하는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이 무한한 사랑으로 추수의 주인이 바로 당신이시고, 그 추수는 당신 것이라는 사실과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일꾼을 예비하시고 교육하시며, 배치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순종하고 기도하기 시작했다(마9:38).
우리는 희어져 추수해야 할 밭에 일꾼 100명을 보내 달라고 주인께 기도했고, 관대하신 주인은 일꾼 135명을 보내주셨다. 우리는 그들에게 국적을 제한하지 않았고, 그 결과 세상 사람들이 가난하고, 무익하고, 가련한 존재로 인식하던 한국인 지원자들이 모두 파송받게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다.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는 사람들을 당신의 사역자로 보내셨다. 마치 무슨 교훈을 주시려는 듯이 말이다.
즉 사람이 내세우는 업적이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하찮은 것이고, 사람이 하나님의 가정에 태어나 말씀을 전하는 도구가 되었다면 하나님은 그 도구가 어떤 것이든 신경을 쓰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시려는 듯이 말이다. 하나님은 그들 중 많은 이에게 한 달 생활비로 5달러씩 마련해 주셨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성경을 주시고 그것을 가지고 나가 팔도록 하였다.
<사진설명> 말콤 펜윅 선교사 부인 하인즈와 성경공부반
열여덟 달 전에 기도를 시작했을 때 우리 교단에 교회가 40개가량 있었으나, 이제는 162개로 불어났다. 교회 수가 하나님께 파송을 허락받은 일꾼 수와 정비례한다는 사실이 선교에 뜻을 둔 모든 이에게 생각거리를 던져 준다. 이 일꾼들이 교단에 부담을 주는 금액은 미국 화폐로 하루 16.5센트 정도이지만, 백인 선교사가 주는 부담은 하루 5달러나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왜 135명을 보내실 때 백인은 한 사람도 포함하지 않으셨을까?
불멸의 영혼들은 참으로 귀중하여 감히 달러로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없고, 게다가 주님께는 일꾼에게 하루 5달러를 주시든 16.5센트를 주시든 똑같이 쉬운 일인 데다가, 주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분임을 생각할 때 그런 의문이 생긴다.
황인은 백인을 경멸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하나님께 일꾼을 보내 달라고 기도할 때 인종이나 학력이나 그 밖의 업적을 조건으로 달지 않았다. 단지 하나님의 추수를 위해서 일꾼들을 양육하여 보내 달라고 간절히 구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장 목사와 손 목사를 크게 사용하여 일꾼들을 양육하셨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우리 눈앞에 기이한 일을 행하셨으므로, 우리는 다만 앉아서 매료된 채 바라보았을 뿐이며, 그 놀라운 은혜와 인자에 감사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 인도를 받았다. 나는 이 작은 책에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신 경위를 유치한 문체로 적으면서, 빈약하고 짧고 더듬는 혀로 찬송을 드린다.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사랑하는 우리 왕을 속히 뵙기를 앙망한다. 그날 우리는 어려운 사역을 담당해 주신 그분의 공로를 힘입어 그분처럼 한 점 흠이라도 벗겨질 것을 믿는다(살전5:23~24;엡 5:26~27).
아내와 나는 가끔 외로울 때도 있지만, 예수께서 오실 때 받을 은혜를 기대하며 소망을 품는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신 은혜에 조금이라도 올바로 감사할 수 있기 위함이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21>] 한국인의 겸손과 인내를 사용하신 성령
겸손하고 관대한 한국인 특성대로
가장 아름다운 방법으로 사용하셔
한국 전도자들의 증거가 큰 결실을 거둔 첫째 비결은 무엇보다 그들로 하여금 인내케 하신 성령 때문이다. 이것은 첫째 아담의 자손이 둘째 아담 안에서 거듭날 때, 그리고 ‘옛사람’ 바깥에서 죄를 깨닫게 하시던 성령께서 그 ‘새사람’ 안에 거하실 때, ‘옛사람’의 기능들에 일절 다른 것을 보태지 않으시고 ‘새사람’이 성령의 경고와 가르침에 순종하는 속도에 맞춰 그 기능들을 발휘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신자가 처음 배울 때 깨닫는 큰 교훈이다.
또 한 가지 살펴볼 것은, 성령은 사역자가 어떤 사람이든, 기능이 우수하든 열등하든 상관없이 그를 쓰셔서 순종하는 백성을 격려하고 기쁨을 주시며, 그동안 사역자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놀라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을 들어 쓰실 때 그들의 다양한 기능과 성격과 능력을 통해 일하신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이 자기 소양(素養, 평소 닦아 놓은 학문이나 지식)을 하나님께 드린 만큼 그것을 들어 쓰신다.
한국인은 인내와 겸손이라는 뛰어난 특성이 있다. 이런 훌륭한 특성 때문에 한민족은 오히려 온갖 정치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관대함도 빼놓을 수 없는 특성이다.
‘인내’ ‘겸손’ ‘관대함’. 성령께서 이렇게 풍부한 천연 광맥을 어떻게 처리하실지는 매우 자명하다. 이런 특성들을 하나님께 드리면, 성령께서는 저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 바울과 동일한 희생정신을 갖게 하신다. 세상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리스도가 세상에 대해서 못 박히신 줄을 안 사도는 그리스도 곧 자기 주님을 아는 훌륭한 것에 비할 때 다른 것은 모두 분뇨(糞尿, 배설물)와 다름없다고 간주했다.
오늘날은 이른바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곳에서도 그런 정신을 찾아볼 수가 없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철천지원수인 세상과 교회가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이라는 크나큰 특권 외에는 모든 것을 해로 여기게 해 주신 성령을 통해서 세상을 자기 발아래 두었다. 영생이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이 생명, 즉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하시는 아들과 사귄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들의 맏형인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아주 가까워졌다. 공손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사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자아와 세상을 버림으로써 그런 친근한 자리에 서게 되었다. 이것은 세상 기준으로 봤을 때는 부정적인 측면이다. 그들은 자기의 원수이자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들을 버린다. 그들이 버리는 것에는 모든 것-교육, 지위, 종교 열정, 권력, 명예, 부(富) 그리고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서 크게 보일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바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히 사귀는 것과 비교할 때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빌립보에서 왕의 신분을 지닌 친구와 친하다는 이유로 실라와 함께 옥에 갇힌 적이 있는 바울은 그곳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를 제외한 나머지 것들에 그 정도의 가치밖에 두지 않는다고 말한다.
부정적인 측면이 그러하니, 긍정적인 측면은 더욱 아름답다. 바울은 왕이신 이 예수의 사랑에 사로잡혀서 스스로 그의 종이라 부른다(롬1:1). 그는 예수와 사귀려고 모든 것을 버렸을 뿐 아니라, 밤이든 낮이든, 어느 때 어디서든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 예수께서 뜻대로 사용하시도록 자신의 최선을 드렸다. 그것은 긍정적인 희생이다.
희생이 지니는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면이 모두 희생의 성령께 속한다. 희생은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이다. 성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그 마음에 감화하사 아들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주실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지 희미하게나마 상상해 본다.
성령은 한국의 신자들 안에 계시고, 아주 아름다운 방법으로 자기를 내어주사 많은 열매를 거두신다. 친히 그들 안에서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이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22·끝>] 고결하고 훌륭한 한국 복음 전도자들
성경 공부하러 먼 길 마다 않는 근면성 뛰어나
가는 곳마다 교회 세우는 그들 열정에 탄복
내가 한국에서 캐나다로 떠나기 직전에, 여덟 사람이 내게 성경을 배우려고 80km나 되는 길을 왔다. 그들은 내가 480km 떨어진 곳에서 집회를 인도하기로 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는 크게 실망했다.
나는 출발을 이틀 미루고 그들을 가르쳤다. 그날 시내 우체국 앞에서 그 중 한 사람을 보았다. 스무 살 난 해맑은 청년이었다. 집집마다 다니면서 지고 온 마른 버섯을 팔고 있는 게 분명했다. 버섯 한 묶음은 길이가 70cm에 중심 두께가 20cm가량 되었다.
이튿날 그 청년에게 “어제 시내에서 당신을 보았소. 당신이 가져온 버섯을 내게 팔지 않겠소?”라고 말했다. 청년은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한 묶음에 얼마씩 받았소?” “10센트씩 받았습니다.” “10센트라고!” 나는 놀라서 말했다.
“산에서 버섯을 따는 데 며칠이나 걸렸소?” “열흘쯤 걸렸습니다.” “그러면 하루 일한 대가가 1센트인 셈인데, 너무 박하지 않소?” 그의 동료를 돌아보면서 나는 그가 성경을 공부하러 80km를 걸어올 때 가지고 온 돈이 그게 전부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그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직 버섯이 남아 있으면 다음번에 올 때 내게 가지고 오시오. 좀 더 값을 치러 드리겠소.” “왜 그러시지요? 목사님께서 버섯을 드시나요?” 그는 진지하게 물었다. “아, 저도 조금 먹을 수 있고, 우리 집 주변 한국 사람들은 더 많이 먹을 수 있지요. 그것을 가지고 오시오” 하고 말하자 그는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들 중 여섯 명에게 침례를 주었다. 훌륭하고 고결한 사람들이었다. 이 청년은 아직 머리를 땋아 뒤로 길게 늘어뜨린 모습으로 보아 미혼임이 분명했고, 따라서 아직 ‘소년’이었다. 그가 맨 처음 침례를 받았다. “사랑하는 형제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하고 묻자, 매우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던 그 청년은 돌아서서 내 눈을 쳐다보았는데, 초라하고 햇볕에 그을리고 천연두 흉터가 있는 그의 얼굴이 참 아름다워 보였다.
그는 내게 대답했는데, “예, 저는 믿습니다”라고 한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그것이 내가 한국에서 누린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거의 침례를 주지 않았다. 대신에 한국인 목사들에게 침례를 주도록 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때에 준 침례를 내 생애 가장 큰 특권들 중의 하나로 생각한다.
그 청년은 맨 처음 그리스도께 나올 때 큰 시련을 겪었다고 했다. 친척 중 여섯 집안이 그를 심하게 박해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열네 살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심으로써 그는 건실한 생활과 진실한 증거로 세 집안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
그를 비롯하여 그와 함께 공부하러 온 다섯 남자는 떠나기 전에 내게 말하기를, “목사님, 우리는 몹시 가난하여서 복음을 전하러 고향에서 멀리 떠날 수 없습니다. 고향 주변에는 신자가 한 사람도 살지 않는 마을이 100군데도 넘습니다. 저희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그들의 뜻을 가상하게 여긴다는 것과 각 사람당 한 달에 얼마 되지 않는 5달러라도 지원해 전도하러 보낼 형편만 된다면 참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우리는 이미 고정 급료를 받는 전도자를 72명이나 두고 있어서 우리에게는 더 지급할 비용이 없습니다.” 그들은 아주 슬픈 표정을 짓더니, 조금 후에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하고 물었다.
나는 그들에게 성경을 팔도록 대줄 수는 있다고 말하고, 그렇게 하면 한 달에 비용이 75센트나 1달러가량 생길 거라고 말했다. 그들은 기쁨에 겨워 “할렐루야!”라고 외쳤다. 그래서 이들은 각각 성경을 잔뜩 짊어지고 그러한 특권을 자부하며 길을 떠났다.
내가 미국에 가기 전에 첫 보고가 들어왔다. 그들 중 한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받아 교회를 설립했고, 버섯을 팔던 청년은 교회를 두 곳에 더 설립했다는 것이다. 희생하게 하시는 성령께 감화를 받은 결과다. <끝>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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