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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이야기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프로이드가 인간의 심리 중에 하나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를 사용해, 오이디푸스하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생각난다.
콤플렉스라는 말은 흔히 ‘종합운동장’이란 뜻으로 사용한다. 즉 여러 가지 경기가 종합적으로 치러지는 곳이다. 그래서 종합경기장은 ‘복합적’이다. 어원적으로는 콤플렉스는 ‘서로(com) 꼬여 있다(plait)’는 뜻이다. 서로 꼬여 있기 때문에 한 가지로 똑 부러지게 설명하기 어렵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콤플렉스를 ‘마음의 내용물 속에 서로 꼬여 있는, 억압된 생각과 욕구의 덩어리’라고 설명한다. 어려운 말이다.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그리스 비극작가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 왕>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1-1. 오이디푸스의 가족관계
오이디푸스의 친아버지는 라이오스이다. 나중에 아들 오이디푸스에게 살해당한다. 오이디푸스의 어머니는 이오카스테이다. 이 어머니는 나중에 아들과 결혼한 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겨 자살한다. 이 어머니와 사이에서 자식을 4명 낳는다. 아들 두 명이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이다. 이 둘은 서로 대립한다. 아버지가 추방된 후 테바이의 왕위 자리를 놓고 전쟁을 하여 일대일 승부 끝에 서로를 치고 동시에 죽는다. 딸이 또 두 명 있다. 안티고네와 이스메네이다. 정의의 화신으로 나오는 안티고네는 적군으로 싸웠던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매장해준 죄로 붙잡혀 바위 동굴에 갇히는데 머지않아 자살한다. 가족관계에서 또 하나 알아 두어야 할 사람이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남매인 크레온이 있다. 오이디푸스 쪽에서 보면 외삼촌이다. 이 자는 아내 에우리디케 사이에서 아들 하이몬을 둔다. 안티고네의 약혼자였던 하이몬은 그녀의 뒤를 따라 자살한다. 아들 하이몬의 죽음을 알게 된 어머니 에우리디케도 자살한다.
1-2. 오이디푸스, 테바이의 왕자로 태어나지만 버려진다.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는 아름다운 여인 이오카스테를 아내로 맞는다. 그런데 왕비가 아기를 낳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라이오스는 델포이에 올라가 아폴론 신의 신탁을 알아보았다.
그 신탁의 내용이 놀라웠다. “아들은 낳지 않는 것이 좋다.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이 장차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의 아내와 같은 잠자리에 들 테니까.” 그 후 라이오스는 아들이 생기는 것이 마음에 걸려 아내와 잠자리를 하지 않고 미루었다. 그러나 금기는 깨지기 위해서 존재한다. 라이오스는 술김에 이오카스테와 동침하게 된다. 그 후 이오카스테는 아들을 낳는다.
왜 이런 해괴한 신탁이 라이오스에게 내려진 것일까? 라이오스가 테바이의 왕이 되기 전에(제우스의 아들 암피온이 테바이의 왕이었다.), 테바이를 떠나 피사 왕에게 신세를 지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 피사의 왕자를 숲 속으로 은밀히 데리고 들어가 ‘목을 졸라’ 죽였던 적이 있다. 건전한 이성 관계, 남성과 여성 간의 신성한 결혼의 수호신 헤라가 가만히 모르는 척 할 리가 없다. 헤라가 내린 벌이다.
신탁의 실현을 두려워 한 라이오스는 도망치지 못하도록 태어난 아들의 발뒤꿈치를 금실로 단단히 묶어 걸을 수 없게 만들어, 한 양치기에게 갓난아기를 키타이론 산에 버리라고 명했다. 라이오스의 명을 받은 ‘테바이의 양치기’는 갓난아기를 가엽게 여겨 라이오스의 명을 따르지 않고, ‘코린토스 양치기’에게 넘겨주었다. 그 아이는 마침 혈육이 없어 고민하던 코린토스의 폴리보스 왕과 메로페 왕비의 양자로 들어가 성장하게 된다. 이때 아이에게는 ‘부은 발’이라는 뜻을 가진 오이디푸스(Oidipous)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코린토스의 왕자로 자라면서, 오이디푸스는 가끔씩 자신의 출생과 이상야릇한 소문을 접한다. 산에서 잡아왔다느니,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느니 등등 말들이 많았다. 그래서 오이디푸스는 델포이 신전으로 찾아가 사실 여부를 묻는다. 그런데 델포이 신탁은 해괴망측하다. “너는 앞으로 너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취하게 될 것이다.” 충격을 받은 오이디푸스는 운명을 피하기 위해 코린토스로 돌아가지 않고 발길을 돌린다. 부모에게서 멀리 떠나 있으면 신탁을 모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1-3. 과연 신탁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인가?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친아버지를 죽이고, 친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다.
이리저리 방황 생활을 하던 중 오이디푸스는 좁은 삼거리에서 마차를 탄 노인과 부하 일행을 만나 서로 길을 비키라는 시비가 붙는다. 그런데 노인의 채찍에 얻어맞은 오이디푸스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노인 일행을 죽여 버린다. 그 노인은 다름 아닌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였다. 즉 자신의 친아버지였다. 그는 자신의 왕국에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히기에 델포이로 신탁을 구하러 가는 도중이었다.
방황을 계속하던 오이디푸스는 몇 개월 후 테바이에 이르게 된다. 테바이는 여전히 스핑크스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었다. 스핑크스(Sphinx)는 ‘목 졸라 죽이는 자’란 뜻의 이름으로 상체, 얼굴과 젖가슴은 여자, 하체는 사자의 몸에 날개가 달린 괴물인데, 지나가는 사람을 잡고 수수께끼를 내어 맞히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목을 졸라 죽이곤 했다. 테바이 왕가에서는 이 괴물을 없애주는 영웅에게 라이오스의 죽음으로 비어 있는 왕의 자리와 혼자가 된 왕비를 주기로 공약을 걸어놓고 있었다.
오이디푸스는 모험을 감행한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아침에는 네 다리, 점심에는 두 다리, 저녁에는 세 다리로 걷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것이었다. 답은 ‘인간’이었다. 인간은 갓난아기 때는 양 팔다리, 즉 네 다리로 걷다가 성인이 되면 두 다리로 걷고 늙으면 지팡이에 의지해 세 다리로 걷는다는 뜻이다. 오이디푸스가 답을 맞히자 스핑크스는 수치심을 못 이겨 그 자리에서 돌로 변한다. 오이디푸스는 왕가의 공약대로 친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고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맏딸 안티고네를 비롯한 2남 2녀의 자식을 두게 된다. 마침내 신탁이 이루어진 것이다. 운명의 장난이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 인간이라는 답을 맞히면서 스핑크스를 죽이는데 만족하지 말고 ‘인간의 운명’을 인간의 보편적인 운명 혹은 오이디푸스 자신의 운명으로 마땅히 인식했어야 했다.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스핑크스를 죽이고 테바이를 차지하고, 왕비 이오카스테까지 얻으니 오이디푸스는 얼마나 오만해졌을까? 그리고 영원히 자신의 권력이 지속되는 줄 알았을 것이다. 스핑크스는 오만한 폭군으로 만들려고 신들이 놓은 장치가 그의 신탁이었을까? 오이디푸스는 왔으면서 어디서 왔는지, 살면서도 누구와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오이디푸스는 살고 있으면서 어디에 사는지, 태어났으면서도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한동안 태평성대를 누리던 테바이에 돌림병이 돈다. 복수의 여신이 보낸 것이다. 우리는 저 깊은 저승의 어둠 속에서 때를 기다리며 웅크리고 앉아 있는 복수의 여신 에리니에스를 기억해야 한다. 이들은 ‘하데스의 암캐’라고 불린다. 신의 뜻에 어긋나게 사는 인간, 맹세를 어긴 인간, 뼈를 주고 살을 준 부모를 해코지하는 인간이 나타날 때마다 올올이 뱀인 머리를 틀고 손에는 횃불을 든 채 우르르 나타나, 이런 자들을 처단하는 기쁨에 못 이겨 통곡까지 하는 여신들이다. 세 자매로 이루어진 이 여신들이 가장 미워하는 죄인은 패륜아이다. 오늘날에도 패륜을 경계하는 말로 쓰이는 말이 ‘테바이 돌림병’이다.
델포이 신탁을 물어보니, 전왕 라이오스를 죽인 범인이 테바이에서 활개를 치고 있으니 그 자를 색출하여 내치라는 것이었다. 그가 누구인가? 정의감과 사명감에 사로잡힌 오이디푸스 왕은 집요한 조사 끝에 범인을 밝혀낸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이 저지른 범행임을 깨달아가는 과정은 세 단계로 발전된다. 처음으로 등장하는 사람이 장님 예언가 테이레시아스이다. 테이레시아스는, 나르키소스를 보는 순간 ‘저 자신의 모습만 보지 않으면 오래 살 아이’라고 그 운명을 한 마디로 예언했던 아테나의 예언자다. 그가 오이디푸스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제기한다.
그리고 ‘테바이의 양치기’에서 발이 부은 아기 오이디푸스를 넘겨받았다는 ‘코린토스 양치기’가 등장한다. 그는 양아버지 포리보스의 죽음을 전하러 온다.
세 번째로 오이디푸스를 버린 테바이의 양치기와 대면하는 순간 마침내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다. 이 전개 과정에서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허약함과 어리석음을 우리는 엿볼 수 있다.
자신이 그토록 피하려 했던 신탁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이루어져 있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충격을 받은 아내, 아니 어머니 이오카스테는 자살을 한다. 또한 오이디푸스는 이 엄청난 사실을 보고도 알지 못한 자신의 두 눈을 찔러 장님이 된다. “멀어라, 멀어라, 내 눈아 멀어라, 보고 싶어 하던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내 눈,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오래 본 내 눈아 멀어라.” 그리고 스스로 왕위를 버리고 죽을 때까지 떠돌이 생활을 한다.
<시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기능을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을 통하여 카타르시스를 유발하는 것이라고 해석한 바 있다. 좀 더 길게 설명해 본다. 왜냐하면 뚜렷한 악의 없이 저지른 행위로 인해 인생의 정점에서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오이디푸스의 운명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비극의 표본이기 때문이다.
카타르시스(Katharsis)란 ‘감정의 정화’를 뜻하는 말로 일종의 배설작용을 말한다. 그것은 소리 내어 실컷 울고 나면 온갖 복잡한 감정들이 눈물로 싹 씻긴 듯 속이 시원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효과에 비유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감정이 지나치게 부푸는 것을 억제하고 항상 마음의 평정을 유지시키는 기능이기도 하다.
▪ 연민의 감정은 부당한 불행을 바라볼 때 불러일으켜진다.
▪ 공포의 감정은 자신과 유사한 인물에게 닥친 불행을 바라볼 때 불러일으켜진다.
비극을 보며 관객은 뚜렷한 죄도 없이 불행을 겪게 되는 주인공의 운명을 바라보며 함께 슬퍼하며, 이 같은 불행이 자신에게도 닥칠지 모른다는 마음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다. 비극의 주인공은 비록 덕과 정의에 있어서 월등하지는 않으나 뚜렷한 악덕과 비행과도 거리가 먼 인물로서 어떤 과실 때문에 불행에 빠지는 운명의 소유자여야 한다. 왜냐하면 극단적인 선인이나 악인의 운명은 보통 사람들에게 연민도 공포도 불러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이야기에서 안타까운 부분은 신탁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길이 오히려 신탁의 실현을 돕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라이오스 부부가 신탁을 피하기 위해 자식을 버리는 바람에 양부모 슬하에 성장한 오이디푸스가 친부모를 몰라보고 죄를 지었으며, 오이디푸스는 또한 신탁을 피해 양부모 곁을 떠나는 길에 친아버지를 만나 살해하고 친어머니와 몸을 섞게 되지 않는가. 늪에 빠진 사람이 헤어나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점점 더 깊이 빠져드는 것처럼 신탁을 피해 가려는 인간의 몸부림이 도리어 그것의 실현을 촉진시키고 있다.
두 가지를 가정 해본다. 라이오스 부부가 오이디푸스를 버리지 않고 함께 살았다면, 그리고 오이디푸스가 신탁을 듣지 않았다면. 그러나 이 가정들이 헛된 것인 양, ‘한번 내려진 신탁은 인간이 아무리 애쓰더라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숙명인가?’ ‘인간에게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자유 의지가 없다는 것인가?’ 등 많은 질문들이 생긴다.
델포이 신탁은 어떠한 질문도 허용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질의응답이 없는 일방적인 통보인 셈이다. 신적 질서와 자연의 섭리는 인간들이 만든 선악의 잣대나 이성적 판단을 초월해 있다. 태풍, 지진, 화산, 폭발, 홍수, 가뭄 등과 같은 대자연의 무자비하고 예측 불가능한 힘을 인간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에겐 파괴적인 악으로 다가올지 모르지만 그것은 나름대로의 법칙과 질서에 따라 작동하는 순환작용이고 정화작용일 따름이다. 인간에게 닥치는 비극적 사건들이 인과 관계로 설명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오이디푸스가 겪는 비극의 원인은 그의 성격적 결함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대체로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욱’하는 격정으로 설명된다. 오이디푸스의 격정은 죄를 유발하고, 또한 그 죄를 드러내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 오이디푸스는 좁은 삼거리에서 라이오스 일행과 마주쳐 실랑이하던 중 격분에 사로잡혀 살인을 한다. 그는 델포이 신탁을 듣고 그것을 피해 가려고 여행길에 오른다. 그렇다면 냉정을 잃지 않고 상대가 누구든 간에 사람을 죽이는 일만은 철저히 경계했어야 한다. 그러나 격정이 이성을 지배했고, 그 순간 운명이 슬그머니 그를 지배해버렸다.
▪ 또한 그는 진실을 밝히기를 꺼려하는 테이레시아스를 향해 격정을 폭발시켜서 그로 하여금 오이디푸스의 죄를 말하게 했다.
두 번째로 부각되는 오이디푸스의 결함은 오만이다. 그 오만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었던 지혜에 대한 과도한 자부심에서 비롯된다. 사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맞힌 공적 때문에 친어머니 오이카스테와 혼인하는 근친상간의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괴물을 퇴치한 영웅이 되었다는 흥분감과 오만함이 진실을 읽어내는 마음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자신은 지혜롭고 완전무결하다는 미망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수수께끼의 해답은 ‘인간’이라는 간단한 답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하는 근본적인 의문에 대한 성찰을 기대한 것일 수 있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하다는 것을 알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성찰했어야만 한다.
궁극적으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혼인을 결행한 주체는 오이디푸스 자신의 의지와 행동이다. 비극적 운명은 신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가 어우러진 합작이다.
두 눈을 뜨고도 진실을 바라보지 못하던 오이디푸스가 눈을 잃어버리고 나서 혜안을 얻고 있다. 탐욕과 오만, 그리고 무지와 격정으로 번뜩이는 외형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되게 하고, 진실을 꿰뚫어 보는 마음의 눈을 밝힌 것이다.
소포클레스가 보여주는 오이디푸스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운명의 힘에 온몸으로 맞서 처절하게 투쟁하다가 장렬하게 파멸하는, 그렇지만 고통과 역경을 통해 혜안을 체득하고 의연히 일어서는 비극적 인물의 전형이다.
1-4.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프로이트는 이 개념으로 세 살에서 여섯 살 사이의 사내아이들이 무의식적으로 갖는 부모에 대한 상반된 욕망을 설명하려고 했다. 즉 이 시기에 이르게 되면, 사내아이는 이성인 어머니에 대해서는 에로스적을 욕망인 성욕을, 동성인 아버지에 대해서는 타나토스적 욕망인 살의를 각각 느끼게 된다는 설명이다. 어머니를 성적으로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면서 ‘방해꾼’같은 아버지를 적대시하고 죽이고 싶은 욕망 또한 분출하게 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 개념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신화 속의 인물 오이디푸스 왕의 운명에서 이론적 배경을 삼는다. <꿈의 해석>에 나오는 주장이다. 그는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것이 운명의 장난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어린 시절에 품었던 “원시적 소망”을 구현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오이디푸스의 운명이 우리의 내면에 숨어 있는 욕망을 끌어당기는 흡입력을 지녔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는다고 설명한다.
위에서 말한 “원시적 소망”은 사회적 삶과 문명화 과정 속에서 억압적 힘에 의해 정리되고 다듬어져 퇴행된 형태로 우리 마음속의 깊은 곳에 자리 잡게 된다. 다시 말하면, 꿈으로, 무의식으로, 잠재의식으로 퇴행되어 자리 잡는다. 사회적 삶 속에서 문명인으로 ‘속 편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원시적 소망이 의식화되고 실현되지 않도록 억압되어야 한다.
어린 시절 품었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거세에 대한 공포심을 통해 해소된다. 즉 사내아이는 자신이 품고 있는 검은 욕망이 발각되어 거세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욕망과 배치되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머니와 거리를 두고 아버지를 닮으려는 마음으로 선회하면서 욕망은 잠복기를 거친다. 이 시기에 사내아이는 활달하고 거친 행동과 놀이에 빠져들면서 ‘남성’으로 틀을 잡아간다.
또한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변화로 ‘초자아’의 발달을 꼽는다. 즉 아이들은 근친상간의 욕망을 억제하는 훈련을 통하여 다양한 형태의 폭력적인 충동을 누르고, 사회 문화적 관습과 도덕에 익숙해지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설명이다. 결국 콤플렉스 해소는 사회화와 문명화의 길로 통한다는 뜻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잠복기를 지나 청소년기에 이르러 다시 한 번 나타나 아이들을 반항과 번민 속으로 빠뜨렸다가 대개의 경우 성년이 되기 전에 완전히 해소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콤플렉스를 성공적으로 극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성인이 되어 이성 관계나 조직 생활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거나, 히스테리나 불안감 등 각종 신경 장애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여자아이가 거치는 동일한 콤플렉스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어머니를 살해하도록 동생 오레스테스를 부추긴 아가멤논의 딸 엘렉트라의 이름으로 개념화되어 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중에 자기와 동성인 아버지를 미워하고 이성인 어머니의 사랑을 구하려는 남성의 복잡한 마음 상태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반대로, 무의식 중에 동성인 어머니를 미워하고 이성인 아버지의 사랑을 구하려는 여성의 복잡한 마음 상태를 ‘엘렉트라 콤플렉스’라고 한다. 이 엘렉트라는 아가멤논의 살아남은 딸로, 어머니와 그녀의 정부가 아버지를 죽이는 장면을 목격하고, 동생 오레스테스를 부추기어 어머니를 죽이게 한다.
Tip 1 올림포스 산 도사, 장님 테이레시아스 이야기
- 눈을 감아야 사물의 본 모습을 볼 수 있다.
“비밀을 가르쳐 줄게. 아주 간단한 거야. 오직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어린왕자>)
테이레시아스가 어느 날 숲길을 걷다가 서로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말하자면 사랑에 빠져 있는 한 쌍의 뱀을 본다. 물론이 장님이 되기 전이다. 그런데 테이레시아스는 이걸 보고는 그냥 지나가지 않고 지팡이로 둘을 떼놓았다. 그 순간 테이레시아스는 여성이 되어버린다. 그는 여성인 채로 7년을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숲길을 걷다가 서로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한 쌍의 뱀을 또 본다. 여성인 테이레시아스는 그냥 지나가지 않고 또 지팡이로 둘을 갈라놓는다. 그러자 테이레시아스는 남성으로 되돌아온다. 양성을 다 경험한다.
테이레시아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도사이다. 그는 육안을 잃은 장님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는 마음의 눈, 심안을 얻은 것이다. 그가 예언 능력의 스토리를 이루는 것은 3번 나온다. 첫 번째가 라이오스 왕의 살해범으로 그 아들 오이디푸스를 지목한 경우, 둘째는 나르키소스를 보고, 저 자신을 알게 되면, 천수를 누리지 못한다고 예언한 경우, 세 번째는 이승을 떠난 뒤에 저승으로 찾아간 오디세우스의 미래를 예언해준다.
그가 눈이 멀게 되고, 이런 심안, 마음의 눈을 얻게 된 내력은 이렇다. 올림포스 산에서 어느 날 제우스는, 사랑에 빠지면 남자가 더 좋아한다느니 여자가 더 좋아한다느니 하는 문제를 놓고 아내 헤라와 가벼운 입씨름을 한다.
“사랑으로 득을 보는 것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일거요. 여자 쪽에서 보는 재미가 나을 테니까.”
제우스의 주장에, 헤라는 여자가 좋아하는 게 아니고 남자가 더 좋아한다고 우겼다. 제우스는 여자가 되어 본 적이 없고, 헤라는 남자가 되어 본 적 없으니 당연하다. 그 때 “그럼 테이레시아스에게 물어보자”라고 하였다. 그 때 테이레시아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남자는 사랑하되 그 마음으로 기다렸던 기쁨의 열 몫 중 하나밖에는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자에게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 이미 마음의 기쁨이 되니 열 몫을 다 누리는 것이지요.” 즉 사랑에 빠지면, 여자가 아홉 배쯤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왜 그런지 솔직히 잘 모른다. 그러자 헤라는 불같이 화를 내며 이 테이레시아스를 장님으로 만들었다. 제우스가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신들의 세계에서는 한 신이 매긴 죗값을 다른 신이 벗길 수 는 없다. 그래서 제우스는, 보는 능력을 빼앗긴 테이레시아스에게 대신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주었다. 다시 말해 육안을 잃고 장님이 되는 대신에 심안(마음의 눈)을 얻게 된 것이다. 재미나지 않습니까? 눈을 감음으로써, 즉 현상을 보고 있지 않아야 직관이 생긴다는 뜻이다. 즉 눈은 보이지 않아도 직관만 있으면 사물의 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남성인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여성적인 측면을 알 수 있다면, 여성들은 자신의 남성적인 측면을 알 수 있다면, 우리 자신에 관한 한, 신들이 아는 수준, 혹은 신들이 말하는 수준 이상의 수준으로 알기까지 이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신화학자 노스승 조셉 캠벨은 결혼을 통해서만 사람들은 그런 수준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결혼이라는 것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이성(異性)의 측면과의 만남이다.”(<신화의 힘>, p 368). 테이레시아스가 인간의 미래를 훤히 꿰뚫어볼 수 있는 것은 양성인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테이레시아스가 육안을 잃고 장님이 되는 대신 심안, 마음의 눈을 얻어 앞일을 헤아리게 된 사연의 또 다른 버전이 있다. 테이레시아스가 숲 속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아테나 여신의 알몸을 훔쳐보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신들의 세계를 기웃거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테이레시아스의 눈을 쓰다듬었는데, 그 때부터 테이레시아스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신은 장님이 된 테이레시아스가 측은했던지 다른 한 손으로 그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테이레시아스는 육신의 눈을 잃는 대신 마음의 눈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아테나 여신에게 드린 감사의 기도는 우리에게 살아가면서 감사해야 할 내용이 얼마나 많은가를 느끼게 한다. “영원한 파르테노스(성 처녀)시여. 한 손으로는 치시되, 한 손으로는 거두시니 감사합니다. 겉 보는 것을 거두어가시고 속 헤아리는 권능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육신의 눈동자보다 더 큰, 그리고 더 깊은 눈동자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잃고도 얻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테이레시아스는 ‘징조를 미리 읽는 자’, ‘선견자’, 즉 ‘미리 아는 자’라는 뜻이다. 그가 한 예언들은 신화의 곳곳에서 나온다. 나르키소스의 손을 한 번 만져보고는, “네가 너를 아는 날이 네가 죽는 날”이라고 예언 했고,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와 그의 아들 오이디푸스의 앞일을 예언했던 자이다. 그리고 뒷날 아르고 원정대가 테바이에서 만나게 되는 예언자, 저승에서 오디세우스에게 귀향길을 일러준 예언자이다.
Tip 2 카산드라와 시빌레 이야기
‘소원을 말해 봐’ 어느 아이돌 가수의 노래 제목이다. 어떤 사람이 소원이 무엇인지를 알면, 그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 알 수 있다. 소원이 없는 삶, 더 바랄 것이 없는 삶이 반드시 양질의 삶일 리야 없겠지만, 삿된 소원, 삿된 꿈은 우리를 누추하게 만든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서 신들에 의해 이루어진 소원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 인간들의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 만지는 물건은 모두 황금으로 만드는 능력을 받았다가 고생한 미다스(마이다스) 왕과 두 명의 무녀(점치는 여자)가 있다. 그 중 하나가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이고 쿠마이의 시빌레이다.
카산드라는 아폴론이 사랑하던 처녀였다. 그녀는 아폴론에게 예언하는 능력을 소원했다. 물론 아폴론이 그 소원을 이루어 준다. 하지만 카산드라는 아폴론이 원하는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폴론은 카산드라의 예언하는 능력 중에서 설득력을 한 번의 입맞춤으로 뽑아 버렸다. 이때부터 카산드라는 미래를 정확하게 예언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도 설득할 수 없었다. 카산드라가 자신의 나라 트로이의 멸망을 예언하고, 멸망에서 구하는 길이 무엇인지 일러 주려고 했지만 그 예언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산드라는 트로이 전쟁 중 갖은 고통을 다 겪다가 결국 아가멤논의 여자가 되었고, 후에 아가멤논의 조국 미케나에서 아가멤논과 함께 피살 되었다.
시빌레는 첫 구절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T.S. 엘리엇의 <황무지>라는 시의 머리말에 나오는 이 구절은 1세기 로마 시인 페트로니우스가 쓴 시의 한 구절이란다.
나는 쿠마이의 무녀가 항아리 달려 있는 것을 내누으로 보았소.
아이들이 시빌레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니
시빌레는 그리스 말로, ‘죽고 싶다’고 대답하더라.
아폴론은 시빌레에게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무엇이든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제 생일이 이 손 안의 모래알 수만큼 되게 하소서.”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 가지 큰 실수를 했다. 청춘이 자신에게 그대로 머물게 해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영원한 젊음을 요청하는 것을 그만 잊어버렸다. 따라서 한없이 늙어 가면서 죽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녀의 몸은 나이를 먹을수록 쪼그라들다가 끝내 몸이 쪼그라들어 항아리에 들어갈 정도였다. 살아 있지만 죽은 것과 같은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소원은 진짜로 죽는 것이었다. 죽어야만 재생의 희망이 있는 것이다.
엘리엇은 자신과 많은 현대인들이 이런 ‘삶 속의 죽음(Death in Life)’ 상태에 있다고 진단하고, <황무지>를 쓴 것이다. 엘리엇은 시 속에서, 매일매일 아무 생각 없이 오전 9시 출근을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의 행렬, 공허한 일상, 특히 사랑과 재생산을 위한 성(性)이 아닌, 육욕만을 위한 습관적인 성에 빠져 있는 모습들을 풍자하고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불모(不毛)의 ‘황무지’라는 것이다. 그런 황무지 주민들에게 4월의 봄비와 꽃향기가 주는 자극은 잔인하다. 고통을 동반한 각성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엘리엇은 부활을 위한 죽음의 필연성에 주목한 것이다. 정신적으로 반쯤 죽은 채 계속 살아가는 것은 쿠마에 무녀의 쪼그라드는 삶과 다를 바 없다. 정신의 완전한 죽음과 부활, 즉 고통을 동반한 성찰과 기존 관념의 전복과 깨달음이 필요하다.
다시 시빌레 이야기로 넘어간다. 무녀 시빌레는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되고, 그녀의 목소리만 남게 된다. 사람들은 그녀의 목소리만 존경하게 되는데, 그것이 그녀의 예언 능력이다. 시빌레는 동굴에 앉아, 숲에서 뜯어 온 나뭇잎 한 장 한 장에 사람의 이름과 그 운명을 기록했다. 이런 나뭇잎은 동굴 안에 잘 정리, 배열되어 있었다. 시빌레는 자기를 섬기는 사람이 찾아올 때마다 나뭇잎에 적힌 운명을 읽어주었다. 그러나 누가 문을 열 때 바람이 동굴 안으로 불어 들어 와 나뭇잎을 흩어버리면 시빌레는 두 번 다시 그것을 정리, 배열하려 하지 않는다. 시빌레의 예언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지금, 내 현실에 행복해 하고, 감사하여야 한다. 소원을 생각하다보면, 넉넉하고 행복하게 여겨지던 자신의 주위가 초라하게 보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