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주(無住)란?
‘머묾 없다’ 혹은 ‘머물지 않는다’고 번역될 수 있는 ‘무주(無住)’ 혹은 ‘무소주(無所住)’의 불교에서의 의미는 불교의 핵심인 깨달음, 해탈, 열반, 반야, 연기, 중도, 공, 무애(無礙), 자재(自在) 등을 나타내는 말이며, 법계의 실상(實相)을 가리키는 말이다. ‘머문다’는 것이 ‘반연(攀緣)한다’, ‘집착한다’, ‘애착한다’, ‘묶여 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것은 곧 이름과 모양을 분별하여 분별된 이름과 모양에 머물러 집착하고 묶여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이름과 모양에 머물러 집착하고 묶여 있는 것은 바로 중생심의 특징으로서 번뇌, 고(苦) 등으로 불리는 불행하고 불만족한 삶이다. 불교는 이러한 번뇌와 고로부터의 해탈을 목적으로 한 가르침이고 공부이다. 석가모니가 깨달은 해탈의 길에서 석가모니는 지금까지 머물러 집착했던 대상인 이름과 모양이 실체가 아니라 허망한 가상(假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허망한 가상이므로 머물러 집착할 것이 없고, 허망한 가상에 머물러 집착하기 때문에 번뇌가 있는 것이다.
이 허망한 이름과 모습은 분별심으로 말미암아 생겨나지만, 실재로는 생겨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다. 곧 ‘이것’을 분별하면 동시에 ‘저것’이 분별되고, ‘저것’을 분별하면 동시에 ‘이것’이 분별된다. 분별이란 ‘이것’과 ‘저것’이 언제나 동시에 나타나고 동시에 사라지는 것이다. 이처럼 분별되어 이름과 모양으로 나타나는 개별적 대상은 언제나 상호 인연이 되고 상호 의지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분별되어 나타나는 삼라만상은 언제나 단독으로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일이 없고, 반드시 다른 것들과 동시에 나타나고 동시에 사라진다. ‘이것’이라는 이름과 모양이 나타나면, 동시에 ‘이것 아님’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나타남에는 ‘이것 아님’이 그 배경이 되고, 동시에 ‘이것’은 ‘이것 아님’의 배경이 되어서, 나타나면 같이 나타나고 사라지면 같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비록 ‘이것’과 ‘이것 아님’이 나타나고 사라지며 삼라만상의 세계가 성립되고 있지만, 세계 속에 있는 개별자들은 결코 홀로 독립하여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삼라만상은 자성(自性)이 없다.
이처럼 세계는 분별의 세계로서 분별된 하나하나의 이름과 모습은 언제나 다른 이름과 모습과 서로 의존하여 동시에 나타나고 동시에 사라진다. 마치 호수의 물결이 수 없이 많지만 모든 물결이 서로서로 마루가 되고 골이 되며 함께 나타나고 함께 사라지는 것과 같다. 이렇게 ‘이것’과 ‘이것 아님’이 서로 연관되어 함께 나타나고 함께 사라지며 개별적으로는 독립된 자성이 없는 것을 일러 연기(緣起) 혹은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한다.
세계를 구성하는 만법은 서로 인연(因緣)이 되고 서로 반연(攀緣)하여 함께 나타나고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연기된 세계이며 만법은 연기된 법으로서, 개별적으로는 실재(實在)하는 자성(自性)이 없다. 실재하는 자성이 없기 때문에 세계는 나타나 있지만, 동시에 공(空)이다. 즉 연기된 세계요 공인 세계는 나타나지만 나타남이 없고, 사라지지만 사라짐이 없는 것이다. 생멸(生滅)하는 세계이면서 동시에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세계가 곧 세계의 실상(實相)이다.
그러나 중생의 분별심은 세계와 만법의 이러한 실상에 어두워서[無明], 생멸하는 하나하나의 만법이 제각각 따로 독립하여 자성을 가지고 생멸한다고 여기고는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려 하고,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얻으려 한다. ‘이것’이라는 배경을 버리고 ‘이것 아님’을 얻으려 하고, ‘이것 아님’이라는 배경을 버리고 ‘이것’을 얻으려 하는 것이 바로 중생의 어리석음이다. 이처럼 ‘이것 아님’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이것 아님’은 버리고 ‘이것’을 얻으려 든다면, 빛을 버리고 그림자를 얻으려는 것처럼, 혹은 물결의 마루를 버리고 골을 얻으려는 것처럼 허망한 일일 뿐이다. 이런 허망한 일에 몰두하므로 고와 번뇌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번뇌는 머물러 집착함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분별된 하나하나의 이름과 모양에 머물러 집착함으로 말미암아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번뇌에서 해탈하려면 머물러 집착하는 일이 없어져야 한다. 어떤 이름과 모양에도 머물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의식적으로 분별하여 성취되는 일이 아니라, 깨달음으로 얻어지는 지혜이다. 의식적으로 분별하게 되면, 이름과 모양에 머물지 않는 것은 곧 허무한 공무(空無)에 떨어져서 헤매거나 무분별(無分別)의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리킨다.
의식은 언제나 흑백논리의 분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물결은 허망하므로 물결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 의식은 곧 물결이 없는 순수한 물만을 취하려 한다. 물론 이것은 성취될 수 없는 일이고 도리에 맞지 않는 어리석음이다. 이처럼 하나를 취하며 하나는 버리는 것이 곧 중생의 분별심의 특징이다. 허망한 물결에 속지 않고 진실한 물을 깨닫는다는 것은 물결을 버리고 물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취함에도 머물지 않고 버림에도 머물지 않는 중도(中道)이다.
진실한 물을 깨닫는다는 것은, 물결 하나하나을 분별하여 이것을 취하고 저것을 버리고 했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이지, 물결(假相)을 버리고 물(實相)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즉 물결에도 머물지 않고 물에도 머물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물결은 물결대로 하나하나 분별되지만, 그 분별된 물결은 언제나 한결같이 물이고, 한결같이 물밖에 없지만 모든 물결 하나하나는 역시 항상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가 곧 모든 것들이고 모든 것들이 곧 하나로서, 하나에도 막히지 않고 모든 것들에도 막힘이 없다. 즉 일즉일체(一卽一切)요 다즉일(多卽一)로서 원융무애하여 장애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것’에도 머물지 않고 ‘이것 아님’에도 머물지 않아서 ‘머묾 없음에 머무는[住無所住]’ ‘무주(無住)’이다. 그러므로 ‘무주(無住)’는 법계의 실상(實相)이요, 해탈이요, 열반이다.
이러한 ‘무주’를 『아함경』에서는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의 소멸이라 하고, 『반야경』에서는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의 실행이라 하고, 『중론』에서는 연기(緣起)․중도(中道)․공(空)․희론적멸(戱論寂滅)이라 하고, 화엄종(華嚴宗)에서는 법계연기(法界緣起)라 하고, 천태종(天台宗)에서는 공가중(空假中) 삼제(三諦)라 하고, 『유마경』과 선종(禪宗)에서는 근본(根本)이라 하고, 유식학(唯識學)에서는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이라 하고, 『열반경』에서는 법성(法性)이라 한다.
다만, ‘머문다’와 마찬가지로 ‘머물지 않는다’, ‘머묾 없다’도 일반적으로 주어(主語)로 사용되는 개념이기 보다는 서술어(敍述語)로 사용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단독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예컨대, ‘반야바라밀다는 머묾도 없고 머물지 않음도 없는 무주(無住)이다’라거나, ‘중도란 머묾 없음에 머무는 것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반야바라밀다와 중도를 주로 언급하고 무주를 언급하지는 않으나, 그러한 용어들의 실 내용은 곧 무주인 것이다.
김태완/ 무심선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