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안면도로 1... (대전IC를 떠나며)
신라 흥덕왕 때 장보고(張保臯)... 그는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장수로서 승승장구하였다. 하지만 당나라의 해적이 신라인을 노략하여 노비로 사고파는 행위가 빈번히 벌어지고 있었다. 이에 분개한 張保臯는 귀국하여 흥덕왕에게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여 승낙을 받았다. 그는 해적을 소탕하고 서남부 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다. 또한 당나라와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을 주도하였다. 그의 활동범위가 황해도 장산곶까지 이르렀다. 그 중앙에 견승포(지금의 안면도 방포)라는 기지가 있었다.
당시 견승포 기지사령관인 승언(承彦)... 그의 부인 '미도'와 금슬(琴瑟)이 매우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출정명령을 받고 떠난 承彦이 끝내 돌아오지 않자 그의 아내가 일편단심으로 해변에서 기다리다 죽어서 바위가 되었는데 이 바위가 ‘할미바위’다. 그 옆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또 솟아올랐으니 세상 사람들은 그 바위를 ‘할아비바위’라 불렀단다. 한편 장보고는 왕권 싸움에 휘말려 자객(刺客)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이 할미, 할아비 바위가 있는 안면도 꽃지해수욕장... 오래 전부터 주변에 해당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어 ‘꽃지’라 불렀다.
안면읍 소재지인 승언리에서 서남쪽으로 4㎞쯤 떨어져 있는 꽃지해수욕장... 길이 3.2㎞, 폭 300m의 백사장으로 모래는 규사로 되어 있다. 또한 해변의 경사가 완만하고 물빛이 깨끗하며 수온이 적당해서 해수욕장으로서의 입지조건이 아주 좋다. 물이 빠져 갯벌이 드러나는 낮에는 조개를 캐거나 갯바위에서 게를 잡으러 오는 사람들로 붐빈다. 해질녘이면 아름다운 낙조 풍경을 구경하러 온 이들로 북적거린다. 특히 해수욕장 오른편에 등을 나란히 하고 정겹게 있는 듯한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낙조는 꽃지해안공원과 연결되어 사시사철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안면도는 본래 곶(串)인 반도로서 육지인 남면과 연육(連陸)되어 있었다. 조선 인조 때에 지금의 안면읍 창기리와 남면의 신온리 사이를 절단하였다. 이 때 부터 안면곶이 섬이 되어 안면도(安眠島)라 호칭하게 된 것이다. 안면도는 북에서 남으로 길게 뻗어 있는 섬으로 천수만 쪽 바다의 북서풍을 막아주고 있다. 그래서 삼남지역의 세곡(稅穀) 조운(漕運)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바다 길을 열었다. 그래서 安眠島는 바다가 조용하고 조수가 편안하다는 뜻이다 11월 28일 대전IC를 떠난 여행길... 유성분기점에서 당진으로 달려 나간다.
태안 안면도로 2... (홍성을 지나며)
예산IC로 나가면 응봉면... 21번을 따라 가면 홍성군 홍북면이다. 이곳 출신인 최영(崔瑩)장군의 사당인 기봉사(奇峰祠)가 있다. 이곳 노은리에서 태어난 崔瑩은 어려서부터 기상(氣像)이 영민(潁敏)하였다. 남다른 용맹과 지모(智謀)가 있어 문무를 겸비한 비범(非凡)한 인물이었다. 새로운 왕조를 꿈꾸던 이성계(李成桂)는 군사실권을 쥐고 마지막까지 무력으로 고려를 지켰던 최영을 처형(處刑)하였다. 또한 고려의 정신적인 지주(支柱)였던 정몽주(鄭夢周)를 이방원을 시켜 회유(懷柔)하다가 선죽교에서 살해하였다.
근처의 노은단(魯恩壇)... 사육신 성삼문(成三問)의 사당으로 그는 외가인 이곳 박첨의 고택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공중에서 하늘이 “낳았느냐?”라고 세 번 묻는 소리가 났으므로 하늘이 세 번 물었다 하여 그의 이름을 삼문(三問)이라 이름을 지었다 한다.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고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던 그는 세조에 의해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다. 당시 성삼문 일가의 남자들은 모두 처형(處刑)되었으나 둘째딸이 이곳으로 내려와 부친의 제사를 지내며 일생을 보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그 후 숙종(肅宗) 때 복권(復權)되어 녹운서원(綠雲書院)을 사액(賜額)받아 매년 사육신을 봉사(奉祀)하였다. 그 후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書院이 철폐되자 사육신의 위패를 그 자리에 묻었다. 고종은 세종시 금남면 달전리에 족손(族孫) 주영을 봉사손으로 삼고 제사를 모시게 하였다. 이곳의 엄찬(嚴璨)고택... 성삼문의 외손이다. 마을 언덕에 배산임수(背山臨水)로 지어진 이 고택은 옛 양반집의 전형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가마솥에 불을 때는 아궁이 위에 방을 데우는 아궁이를 따로 두는 이중 구조를 띠고 있다.
최영장군과 사육신 성삼문의 출생지인 홍성군 홍북면... 충남 도청이 이전한 내포 신도시가 입지(立地)한 곳이다. 그간 홍성군은 김좌진 장군과 한용운 선사(禪師)를 위주로 축제를 벌여왔으나 최근 내포문화축제를 열면서 충절(忠節)위인인 최영 장군과 성삼문을 주제로 확대하여 열고 있다. 忠은 무민공(武愍公) 최영이다. 이는 외적(外的)으로 나라를 구한 무인(武人)의 강한 모습을 보였다. 節은 매죽헌 성삼문으로 설정, 훈민정음 창제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부드러운 학자적 기풍과 대쪽 같은 선비정신이 서린 선생을 부각시켰다. 이로서 홍성군은 위인 축제로서의 정체를 확실히 밝히고 있다. 홍성읍을 지난다.
태안 안면도로 3... (홍성을 지나며)
새로 개통된 홍성 남부 우회도로를 지나니 교통이 한층 편하다. 홍주현과 결성현을 합친 홍성군... 읍내에 가면 홍주성의 동문인 조양문(朝陽門), 홍주목 관아인 홍주아문(衙門), 홍주목의 동헌(東軒)인 안회당(安懷堂), 을사 늑약(勒約)에 결사(決死)반대하여 의병(義兵)을 일으켜 朝陽門에서 왜군(倭軍)과 싸우다 희생된 분들의 유해를 모신 의사총(義士塚) 등이 있다. 安懷堂의 이름은 논어(論語)의 ‘노자안지(老者安之) 소자회지(少者懷之)’에서 인용한 것으로, 노인들과 젊은 사람 모두를 위해 정사(政事)를 펼치겠다는 의미란다.
남부 우회도로를 지나는데 한용운 선사의 동상(銅像)이 있다. 독립운동가 겸 승려, 시인인 그는 일제 강점기 때 ‘임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임의 沈默’에서 임은 누구일까? 스님이었던 그로 볼 때는 불타(佛陀), 중생(衆生)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암흑 같은 일제 강점기로 볼 때는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을 뜻했을 것이다. 즉 조선의 독립을 갈구하는 자신의 심중을 은유적 수법으로 드러냈을 것이다.
남산 터널을 지나니 구항면(龜項面)... 거북의 목을 닮은 지형에서 부쳐진 이름이다. 이곳에 오면 남구만 선생이 생각난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를 지은 그는 숙종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냈으며 희빈 장씨(禧嬪張氏)사건에 연루되어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권농가(勸農歌)능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야 하라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동창'은 임금을, '노고지리'는 조정대신을, '우지진다'는 야단스럽게 우는 듯한 중신들의 모습을, '소'는 백성을, '아이'는 목민관을, '아니 일었느냐'는 난세에 복지부동하고 있는 관료들의 자세를 뜻하여 국정에 대한 염려와 경계를 비유하였단다.
홍성IC근처의 김좌진장군 생가를 지난다. 용봉산 여행일기에 남겼으므로 생략한다. 여행길은 궁리항을 지나 천수만 A지구 방조제를 지난다. 홍성군의 끝인 궁리항... 광활하게 펼쳐진 천수만을 앞에 두고 일몰(日沒)과 일출(日出)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이다. 폐선(廢船)으로 물막이를 마무리한 정주영... 그의 어록(語錄)은 ‘이봐 해봤어’란다. 이는 이건희 회장의 ‘자식과 마누라 빼고 다 바꿔라’ 김우중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와 더불어 우리나라 기업가 정신이다. 간월암(看月庵)을 지나면서 태안으로 진입한다.
태안 안면도로 4... (꽃지해수욕장에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창건한 看月庵...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바닷물이 들어오면 작은 섬이 되고 물이 빠지면 길이 열리는데 서해의 낙조가 장관을 이룬다. 이곳에서 수행(修行)하던 무학대사가 이성계에게 보낸 어리굴젓이 궁중의 진상품이 되었단다. 또한 굴의 풍년을 기원하는 굴 부르기 군왕제가 매년 정월 보름날 만조시에 간월도리 어리굴젓 기념탑 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국도 29번과 지방도 96번을 따라 가다보면 안면도로 가는 77번 국도를 원청사거리에서 만난다.
원청리에는 별주부마을이 있다. 자라바위, 용새골, 안궁, 궁앞, 묘샘, 노루미재 등이 우화 속 이름과 동일한 지명이 있으며 별주부전의 발원지란다. 자라바위의 너럭벼랑에는 거북이등에 올라타고 용궁을 바라보는 별주부상도 있으며 용왕제를 매년 지낸다. 이 마을은 이를 바탕으로 특별한 공연문화와 농어촌 체험 활동이 이루어진다. 이제 안면대교를 지난다. 이곳의 판목운하 유적지가 있다. 안면 곶이 안면도로 인공적으로 절단해 놓은 유적지다. 한편 이곳 창기리(倉基里)는 조세창고가 있었던 곳으로 한자로 표기된 것이다.
지나는 길에 이곳 향토음식인 게국지를 파는 식당이 많다. 여름 내내 먹다 남은 게장을 손질하여 신 김치로 간을 맞추어 끓인 김치찌개다. 꽃지 해수욕장에 도착한다. 비는 오락가락한다. 바람이 많이 부니 춥다. 추우면 남들은 ‘옷깃을 여민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추위와 상관없이 옷을 단정히 하라는 뜻이다. ‘옷깃을 여민다.’하니 ‘옷깃을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옷자락이나 옷의 소매는 스치기는 쉽지만 옷깃을 닿으려면 일부러 끌어안기 전에는 옷깃을 스칠 수가 없으니 잘못된 표현이다.
할미 할아비바위와 꽃다리를 배회하다 점심은 간판도, 가격표도 없는 포장마차에 가서 칼국수를 먹었다. 추울 때는 국수가 최고다. 가격을 물어보니 8,000원... 김치는 안주고 단무지만 준다. 국수에 넣은 바지락은 말라비틀어진 것이다. 항의했더니 그냥 가란다. 일인당 5,000원을 계산하고 불편한 마음으로 나왔다. 원유 유출 사고로 동정(同情)이 갖던 태안... 이제 경멸(輕蔑)로 바뀌었다. 하지만 원한은 강물에 뿌리고 은혜는 바위에 새기란다. 한편 칼국수에 칼이 없는 것처럼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고, 빈대떡에 빈대가 없다. 또 총각김치에 총각이 없고 곰탕에도 곰이 없단다. 오늘 여행을 마친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