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시 평거동에는 토지라는 막걸리 집이 있다. 제삿상에 오르는 잡고기와 말린 고추전을 넣어 푹 끓인 걸뱅이탕과 말린 명태 조림이 일품인, 낡은 거문고와 자존심 센 여주인이 있는, 생긴지 이십년이 다 되어가는 술집이 있다. 술을 좋아하고, 집이 그 동네인 나는 날마다 그 집앞을 지나다니면서도 그 집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달을 다니다, 문득 그날 출근 무렵 읽고 있던 책을 마저 읽고 싶은 유혹을 떨칠수가 없어, 그 바쁜 토요일날 전화 한통 해주지 않고 출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길로 미안한 마음에, 낡은 간판이 화단에 세워져 있는 그 집앞을 지나다니지도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집에 일을 간지 몇일 않되어 그집 화단에 밥 숟가락으로 이랑을 내고 심어 놓은 꽃씨였다. 화단이 처마에 가려진 탓에 빗물을 받아먹지 못하는지 바싹 말라들어가는 꽃 나무 두어그루가 서있는 입구의 황량함에 맘이 쓰여 손님이 없는 틈에 호스로 수돗물을 대어 뿌리고 꽃씨를 심었다. 사실 어느 직장을 가도 한 달 이상을 잘 못 버티는 내가 그집 화단에 꽃씨를 심는 기분은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사과 나무를 심겠다는 사람의 마음과도 어느 정도는 닮아 있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별로 달라질 것 없는 인생에겐 오늘은 피지 않는 꽃이 내일은 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꽤나 화려한 희망이 된다. 내일 그곳을 그만두더라도 어쩌면 내일 꽃이 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가슴 뛰는 일이다. 저녁 일곱시에서 새벽 다섯시까지 이어지는 야근속에서 졸음을 쫓으려 문밖을 나서면 설레이며 바라볼 화단이 생기는 것이다. 어린 꽃들이 태어나는 산도인 화단에 무심코 버려지는 담배며, 아이스 바 막대기와 과자 껍데기들을 치우게 만들고, 행여나 오줌을 누려고 바지춤을 흔드는 행인들을 내버려두지 않게 만든다. 그곳에 심은 패랭이와 금잔화와 채송화와 나팔꽃, 해바라기들을 마치 내 뱃속에 임신한 것처럼 그 화단에 좋은 것만 주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늦봄이나 칠팔월에 핀다는 그 꽃들이 새 순 한촉 내밀어 보기도 전에, 나는 그집 지붕에 뜬 달과 함께 퇴근하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 이후에 그집이 문을 열지 않는 시간에 몰래 꽃이 태어났나 보러 가기도 하고, 술에 취하는 날엔 건너편 길에 서서 꽃들의 출생을 확인하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야들야들한 채송화들의 손가락이 제 노란 꽃을 가리키며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나는 그 꽃들이 다 피고 질때까지 그 집을 다니겠다는 주인과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지만, 꽃들은 칠팔월에 피겠노라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 나는 스피노자가 될 수 없다. 만약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나는 아무 꽃도 심지 않을 것이다. 내일 아무도 볼 사람도 없는데 뭣하러 쓸데 없는 고생을 하겠는가? 내일 내가 그 집 밖을 서성이는 죄송한 인간이 될지라도, 그 꽃이 피는 것을 지켜 볼, 그 집 주인이 있고 그 집의 손님들이 있고 그 집을 지나다니는 행인들이 있어 나는 기꺼히 꽃을 심고 내일을 초대하는 것이다. 그 후로 나는 어떤 식당에 취직을 했는데 그곳에서도 꽃씨를 뿌렸고, 꽃이 피는 것을 보기 전에 그 곳을 그만 두었다. 단 몇뼘의 땅일지라도 내가 뿌린 씨앗으로 지구를 내일 꽃이 피는 유정란으로 만든다는 사실이 나를 감격스럽게 만들었다. 그대여, 박봉에 가난해서 희망을 가질 수 없는가? 꽃씨 한 봉지 오백원이다. 오천원이면 열개다. 마당이 없는가? 나만 보려니까 마당이 없는 것이지 함께 보려면 지구 전체가 마당이다. 희망이란 물건은 왜 그렇게 거창하고 멀어야만 하는가? 꽁초와 깨진 술병과 버려진 운동화가 쳐박힌 그 자리에 심을수도 거둘수도 있는 것이 희망이라고 말하면 나는 참으로 덜떨어진 낭만으로 패잔병 같은 내 생의 터진자리를 기우려고 하고 있는것인가? 어느 직장을 가나 아무 연고도 없는 이들과 정을 붙여야하고, 그들이 꽃이 아닌 까닭으로 꽃피우는 허물들과 싸워야하고, 그들이 꽃이라면 저지르지 않을 과오들과 씨름해야 한다면, 나는 또 한 봉지의 꽃씨를 햇빛의 발치에 뿌리며 연고를 만들고,
이 지상에 아름다운 시민들의 쪽수를 늘여야하리, 이렇게 직장을 옮기고, 그만두고, 꽃씨를 뿌려대다보면 진주 시내 모든 밥집과 막걸리집과 까페들이 내가 뿌린 저렴한 희망에 감염 될 것 같기도 하다. 꽃씨를 어디 화단에만 뿌리랴. 터부룩한 식사 끝에 말 없이 뽑아다 주는 자판기 커피는 200원짜리 꽃씨다. 이쑤시개 끝에 고추가루보다 몇 만배 커다란 웃음이 피어 날 것이다. 얼떨결에 들켜버린 남의 허물들을 기억속에서 깨끗이 지워보라. 이 침묵은 돈 한푼 들이지 않고 뿌리는 꽃씨다. 떠들며 피는 꽃이 있든가? 세상 꽃들이 품은 모든 고요가 우리에게 꽃 피어 올것이다. 지금은 백수다. 종일 모니터에 씨앗을 뿌려대는 시간이다. 꽃씨 뿌린 흙을 꾹꾹 다지듯
자판위를 누르는 손가락들이 바쁘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꽃씨를 뿌린다. 필 땅도 피어서 볼 사람도 없는 곳에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데, 나에게는 내일이 아직 남아 있는 게 거의 확실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