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족혁명당을 중심으로 결집되었던 좌파의 조선민족전선연맹은 치장 회의 이후 분열되기 시작했다. 단일당 방식의 통일에 반대했던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청년전위동맹은 뤄양으로 이동해 한빈 등 일부 민혁당 탈당 세력과 함께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을 결성했다. 1939년 최창익과 김학무 등은 중국공산당 팔로군 지역의 옌안(延安)으로 북상했다. 또한 이후 80여 명의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1941년 6월 화북 팔로군 지역으로 북상했다. 이로써 민족전선은 사실상 붕괴되고 말았다.옌안으로 온 최창익 등은 항일군정대학에 입교했다. 당시 이 학교에 입학한 조선인은 30여 명이었다. 이들은 졸업 후 1940년 팔로군 전선으로 이동했으며, 이듬해 1월 태항산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결성했다. 연합회 강령은 중국 화북 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한인 청년들을 결집하여 조국 광복의 대업에 참여시키는 것을 제일의 목적으로 삼는다고 밝혔다. 연합회는 1941년 이후 조선의용대원들이 계속 북상해옴에 따라 처음에 이름지은 ‘조선청년연합회’의 ‘청년연합’이라는 표현이 부적합하다고 판단하여 1942년 7월 제2차 대회에서 ‘조선독립동맹’으로 개칭했다.조선독립동맹은 창립선언에서 당파를 망라하여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며, 중국 특히 중국공산당과 공동전선을 결성하여 항일전에 참가하고, 무장부대를 확충하며, 대중을 조직하고, 동방 피압박 민족해방운동 및 일본의 반전운동과 연계하겠다고 밝혔다. 또 강령에서는 일제의 조선 지배를 전복하고 보통선거에 의한 민주정권을 건립하며, 언론 · 출판 · 집회 · 결사 ·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일제 · 친일 대기업의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며, 8시간 노동제와 사회노동보험을 실시하고, 통일누진세제 · 의무교육제 등을 실시하겠다고 선언했다.이들의 신국가 건설 노선은 독립 · 자유의 조선민주공화국 수립과 반일민족통일전선의 건설,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반제반봉건민주혁명 노선이었다. 또한 자신의 성격을 한국 독립의 쟁취를 위한 지방단체의 하나로 규정하고 그 대중적 기반을 일제에 반대하는 노동자 · 농민 · 군인 · 학생 · 지주 · 기업가 등에 둠으로써 중국 관내의 한인혁명단체를 통일하는 데 목적을 둔, 화북 지역을 대표하는 지역 통일전선임을 명확히 했다.당시 독립동맹 주석에는 김두봉, 본부 집행위원에는 김두봉 · 무정 · 최창익 · 박효삼 · 김학무 · 채국번 · 김창만 · 한빈 · 이유민 · 진한중 · 이춘암 등 11명이 선출되었다. 중앙상무위원으로는 최창익 · 이유민 · 김학무 · 박효삼 · 김창만 · 무정이 선출되었다. 조선독립동맹은 처음에는 태항산에 본부를 두었다가 이후에는 옌안으로 이동했다. 조선의용군의 주력도 1943년 말까지는 태항산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는데, 1944년 초에 옌안으로 이동했다.당시 독립동맹은 네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째는 본래 중국공산당의 해방구였던 화북 옌안 지역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인 무정 · 박일우 · 진광화 · 이유민 · 장진광 등이다. 둘째는 중국 국민당 지구에서 활동했던 공산주의자들과 이들을 추종한 최창익 · 한빈 · 허정숙 · 김학무 · 김창만 등이다. 이 가운데 최창익과 한빈은 조선공산당 간부로 만주와 국내에서 활동하다 검거 · 투옥된 뒤 중국으로 망명하여 민족혁명당에서 활동했다.셋째는 본래 민족주의자로서 민족혁명당 당원으로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하다 화북 지역에 들어온 박효삼 · 양민산 · 이춘암 등이다. 그 밖에도 한글학자 김두봉과 윤세주 · 방우용 · 장중광 · 손일봉 등도 이에 해당된다. 넷째는 지원병 · 학병으로 일본군에 강제로 입대했다가 탈출한 이들과, 화북 지방으로 이주했다가 가입한 이들이었다.조선독립동맹은 공산주의 이념을 내세우지 않았고, 독립운동 세력의 대표성을 자임하지도 않았다. 스스로를 ‘조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하나의 지방단체’로 규정하면서 “계급 · 사상 · 신앙의 구별과 차이 없이 어제의 친일파라도 자기 과오를 청산하면 허용하고 쟁취하자”는 구호하에 세력을 규합했다. 그 결과 1943년 말에는 총 9개 지역에 분맹을 설치하고 175명의 맹원을 확보했으며, 1944년 말에는 화북 지역 일대에 10개 분맹을 설치할 정도로 성장했다.앞서 본 것처럼 1939년 조선의용대 일부 대원은 최창익을 따라 중국공산당의 근거지인 옌안으로 갔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1941년 1월 ‘화북조선청년연합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1941년 6월 화북의 국민당 지구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대 주력, 즉 제1, 2, 3지대 80여 명은 중국군사위원회의 동의 없이 공산당(팔로군) 지구로 이동했다.당시 이들은 국민당 지구에서 벌어지는 살벌한 반공운동을 보면서, 국공합작이 깨지면 조선의용대도 존속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았다. 화북으로 이동한 80여 명 가운데는 한빈 등 민혁당 이탈자나 김학무 · 왕자인 · 이익성 등 조선청년전위동맹 맹원도 있었지만, 윤세주 · 김세광 · 이춘암 · 양민산 등 김원봉 계열의 인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김원봉 등 조선의용대 본부는 국민당과 함께 치장을 거쳐 충칭(重慶)으로 이동했다.북상한 의용대원들은 팔로군 지역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던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인물들과 함께 1941년 7월 7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결성했다. 화북지대의 지대장은 박효삼, 부지대장은 이익성, 정치지도원은 김학무가 각각 맡았다. 제1대장은 이익성, 제2대장은 김세광, 제3대장은 왕자인이 맡았다. 이후 화북지대는 형식상으로는 충칭으로 간 본부의 지휘하에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화북조선청년연합회의 지도를 받게 된다.그 뒤 화북지대는 일본군을 상대로 태항산 일대에서 호가장(胡家庄)전투(1941. 12. 12.), 형태(邢台)전투(1941. 12. 26.), 편성(偏城)전투(1942. 5. 28.) 등을 치렀다. 그런데 편성전투가 있었던 1942년 5월 충칭에 있던 조선의용대 본부가 임시정부의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됨으로써 화북지대는 본부 없는 지대가 되고 말았다.1942년 7월 10일 화북조선청년연합회는 제2차 대회를 열고 연합회를 ‘조선독립동맹’으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칭했다. 대장에는 박효삼이 임명되었다. 조선의용군 화북지대가 조선독립동맹의 군대가 된 셈이었다.조선의용군은 화북 지방의 각지에 흩어져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첫째는 전지공작(戰地工作)으로, 일본군 점령 지구에 잠입하거나 전선에 접근하여 병사모집, 선전 활동, 첩보 활동 등을 전개했다. 둘째는 자급자족의 생산 활동으로서, 팔로군 지역은 토지가 척박해 생활물자가 궁핍했으므로 군인들이 밭을 일구어 농산물을 자급자족했다.
1943년 6월, 조선의용군은 일본군의 침공을 받아 팔로군과 함께 태항산 곳곳에서 이른바 ‘반소탕전’을 전개하며 용맹을 떨쳤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조선의용군을 옌안으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했다. 전쟁 후에 한국 통치의 주요 인물이 될 수도 있는 이들을 보호하는 것이 중국공산당에 유익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조선의용군은 1943년 12월부터 1944년 3월까지 옌안으로 이동했다.조선의용군은 옌안 교외의 라가평 마을에 주둔했다. 조선의용군 사령관은 무정이었지만 그는 팔로군 포병사령부의 책임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라가평에 있는 조선항일군정학교가 사령부 구실을 했다. 군정학교 교장은 김두봉이었고 부교장은 박일우, 학도대장은 박효삼이었다. 그 밑에 4개 구대가 있었다.조선의용군에는 라가평에 있는 병력 외에 산둥성에 이익성, 산시성에 김세광, 동북(만주) 지방에 이상조가 이끄는 선견대(先遣隊)가 별도로 있었다. 그들은 전선에서 일본군에 종군한 조선인 병사들을 모집하여 조선의용군의 병력을 증강하고 정보도 수집했다.이들의 병력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병력 150명 정도 외에 팔로군에 종군한 10명 내외, 1940년 최창익 · 허정숙과 함께 조선의용대가 구이린(桂林)에 있을 때 미리 온 18명, 김태준 · 김사량처럼 망명해온 인사, 그리고 각처에서 새로 모집한 인원을 300명 정도로 보면 모두 500명 정도가 된다.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고 한 달 뒤인 9월 15일, 팔로군의 동북 정진군이 편성되어 만주로 갈 때 조선의용군도 이들과 함께 옌안을 떠났다. 그들 중 일부는 북한으로 들어가면서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의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북한으로 들어간 조선독립동맹은 김두봉 · 한빈 등을 중심으로 조선신민당으로 개편해 활동했다. 한편 만주에 머무른 병력은 그곳에서 동포들을 모병해 부대를 증강하고 중국의 공산혁명전쟁에 참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