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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062. [역경의 열매] 김인문 (1-10) ‘무대서 죽겠다’ 각오로 40년 배우 생활
“배우는 무대에서 죽어야 한다.”
40년 넘게 배우로 살아온 나의 신념이다. 갑자기 이런 말을 왜 할까. 나는 지금 투병 중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이 길 역시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며, 그분이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사명의 길임을….
1년 전이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화창했다. 배우로서 꼭 해보고 싶었던 작품, 그러나 생애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를 영화 ‘독 짓는 늙은이’의 제작발표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현장은 기적의 자리였다. 화사한 분홍색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지팡이를 짚은 채 주변의 도움을 받아 주연배우로 무대에 올랐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마침 오랜 시간 부부로 호흡을 맞춰온 탤런트 전원주씨는 내가 이렇게 무대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럽다며 나를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일어나기를 몇 차례. 2005년엔 아예 병원에서 활동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모든 걸 버려야 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나는 다시 일어섰다. 말은 어눌했지만, 그럼에도 영화와 CF에 출연했고, 연극 무대에도 올랐다. 이게 배우다. 힘든 것을 감수하는 게 배우다. 안 되는 일을 되게 함으로써 꿈을 심어주는 게 배우다. 어떠한 시련이나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투혼을 불사르는 게 배우다. 그렇게 오뚝이처럼 일어선 나 김인문은 세상에 희망을 주는 배우이고 싶다.
당시 영화는 30% 정도 촬영을 마친 상태였다. 신예 소재익 감독은 누구보다 이 영화를 감각적으로 만들었다. 1940∼70년대 한국의 모습과 장인의 삶을 통해 본 동양의 신비, 한국영화의 새로운 면모를 소 감독은 잘 담아냈다. 후배 연기파 배우 안병경씨는 극중에서 ‘웽손이’를 맡아 리얼하게 초반 영화작업을 마무리했다. 그에게 특히 감사한 게 있다. 한때 어려움을 겪고 방송을 잠시 떠나 있다가, 이 영화에 합류하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거다. 그는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성경공부와 기도모임에 참석했고, 지금은 경기도 성남시 선한목자교회에서 열심히 믿음을 키워가고 있다.
나는 신인의 마음으로 여름쯤 시작되는 나의 촬영분을 기다렸다. 불편해진 나의 한쪽 팔 때문에 극중 내 역할 ‘송 노인’은 한 손으로 독을 빚는 장인으로 묘사되었다. 감독과 상의해서 내가 독 짓는 연습을 할 수 있도록 장소도 물색해 놓았고, 배우들과의 리딩도 준비해 두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변을 보는데 피가 비쳤다. 검붉은 피의 양은 갈수록 늘어갔다. 검사 결과 방광암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하늘이 노랬다. 이미 뇌경색으로 몇 차례 수술을 받았기에 더 이상의 수술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아내는 그저 울기만 했다.
소속사 대표인 손녀에게 전화했다. “할아버지, 마음을 담대하게 가지셔야 해요. 당황하지 말고 먼저 기도하세요.” 마침 중국 출장 중이던 손녀는 이내 귀국해 내 손을 꼭 잡고 기도해주었다. 그럼에도 하찮은 인간인지라, 참으로 불안했다. 그렇게 며칠을 보냈을까. “나의 믿음의 분량이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싶어 다시금 나를 돌아보게 됐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 [역경의 열매] 김인문 (1) '무대서 죽겠다' 각오로 40년 배우 생활
* [역경의 열매] 김인문 (2) 마지막 촬영 앞두고 ‘너를 사랑한다’ 음성
* [역경의 열매] 김인문 (3) ‘배우 되겠다’ 공무원 그만두고 무작정 상경
* [역경의 열매] 김인문 (4) 거장 김수용 감독 앞에서 ‘배우론’ 들먹여
* [역경의 열매] 김인문 (5) 촬영장서 잔심부름하며 연기공부 열정
* [역경의 열매] 김인문 (6) ‘빵점 남편’ 믿음 가진 후 조금씩 변화
* [역경의 열매] 김인문 (7) 연예인선교단 만들어 군 선교 앞장
* [역경의 열매] 김인문 (8) 주님 멀리하다 다섯번 쓰러지고야 회개
* [역경의 열매] 김인문 (9) “내가 너를 써야겠다” 생생한 주님의 음성
* [역경의 열매] 김인문 (10·끝) 가장 어렵던 ‘순종’… 이젠 좀 알겠다
◇김인문 집사=1939년 경기도 김포에서 출생. 68년 영화 ‘맨발의 영광’으로 데뷔.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몽실언니’ ‘첫사랑’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 여의도순복음교회 집사.
***[역경의 열매] 김인문 (2) 마지막 촬영 앞두고 ‘너를 사랑한다’ 음성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사 41:10). 손녀인 디앤지스타 김은경 대표는 걸을 때도, 식사할 때도, 잠잘 때도, 이 말씀을 암송하라고 알려줬다. 수십 번 되뇌었다. 그리고 마음에 결단을 내렸다. “일단 영화에 최선을 다하자. 주님께서 받으실 줄 믿고 힘차게 걸어가자.”
영화 ‘독 짓는 늙은이’에 대한 나의 집념은 강했다. 식이요법을 하며 견뎌냈다. 하지만 어느새 몸이 점점 말을 듣지 않고 급기야 또다시 쓰러졌다. 그때가 지난해 5월이었다. 영화를 대본대로 촬영하는 게 불가능했다. 게다가 투자도 막혔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정적일 때 기적을 보여주는 분이 아니던가.
처음 ‘슛’ 들어갈 때도 그랬다. 눈 내리는 화면을 담아야 하는데, 2월 중순에 눈을 구경한다는 게 힘들었다. 그런데 촬영 당일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게 아닌가. 스태프들마저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고백했다. 처음에 한국도자기 회장님인 이의숙 권사님이 제작비를 지원하시며 “영화를 통해 귀하게 쓰임 받기를 원한다”고 격려해 줬고, 마무리 작업에선 한 장로님을 통해 후원하게 해주셨다.
나도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다. 소재익 감독은 대본을 수정해 지금의 상황들을 그대로 영화에 담자고 제안했다. 나는 조금이라도 힘이 있을 때 모든 걸 끝내고 싶어 서둘렀다. 그러나 이런 간절함과 달리, 결국 마지막 촬영을 앞두고 구급차에 실려 가고 말았다.
이젠 말할 기력도 없었다. 그저 눈만 맞출 뿐이다. 차츰 호흡도 가빠졌다. 누님, 목사님, 사랑하는 가족, 장애우와 창신대 제자들,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이들이 보고 싶었다. 그때 명확한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이제야 주님께 쓰임 받는구나’라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이렇게 누워 있는데, 어떻게 주님을 위해 일하지? 조금만 더 빨리 주님을 따르고 순종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안타까워만 할 수는 없었다. “지금부터라도 그 순종의 길을 걸어가자.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시는 이 은혜의 끈을 놓치지 말자.”
2011년 1월 말, 입원한 병원에서 마지막 촬영을 진행했다. 처음 촬영 때처럼 눈이 내렸다. 감독이 외쳤다. “선생님, 슛 들어갑니다.” 환자복을 입고 휠체어를 탄 채 식사를 위한 콧줄을 달고 있는 나의 모습을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기운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긴장한 탓인지 무릎에 놓인 대본을 만지작거리는 나의 손이 떨렸다. 아내가 “당신은 할 수 있어요. 당신은 최고의 배우예요”라며 붉어진 눈으로 나를 응원했다. 영화에서 아내 역을 맡았던 서단비도 “선생님 파이팅”을 외쳤다. 내가 많이 힘들어 보였나 보다. 대사도 없는 신인데 말이다.
“주님, 제게 힘을 주세요.” 그리고 잠시 후 “컷!”
이제 모든 게 끝났다. 피곤이 몰려왔지만 나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었다. 끝까지 남아 스태프들과 기념촬영도 했다. 나는 영화가 어떻게 편집되었는지 모른다. 손녀와 감독에게서 다만 영화제들에 출품되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영화 ‘독 짓는 늙은이’는 하나님께서 연출하셨고, 나는 순종했다는 거다. 주님의 뜻대로 이 영화가 사용되길 기도한다.
***[역경의 열매] 김인문 (3) ‘배우 되겠다’ 공무원 그만두고 무작정 상경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달란트를 주셨다. 그 달란트는 눈에 보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분명한 건 복음을 전하는 데 달란트를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받은 달란트는 연기다. 크리스천 연예인으로서 세상에 그리스도의 영향력을 끼치는 것. 하지만 이를 깨닫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학에서 농업을 전공한 나는 고향인 경기도 김포의 한 면사무소에서 근무했다. 공무원 생활은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허송세월을 하는 것 같았다. 나의 꿈은 영화배우였다. 젊은 날을 이렇게 마냥 흘려보내는 게 안타까웠다.
결국 1963년 짐을 챙겨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부모님은 “정신 나간 놈”이라고 만류했지만, 배우가 되고픈 나의 열정을 꺾지 못하셨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도착한 서울, 마땅히 머무를 곳이 없었다. 여관보다 방값이 싼 근로자합숙소에 있으면서 배우의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날만 밝으면 영화감독들의 집으로 향했다. 당대 유명한 A감독, B감독, C감독을 찾아갔다. 처음 간 곳이 A감독의 집이었다. 며칠 동안 초인종을 눌렀지만 인기척조차 없었다. B감독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은 점점 흐르고, 어느새 가지고 있던 돈도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 합숙소로 돌아갈 수 없어 서울에서 가장 높은 남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 숲 속에서 잠을 청할 심산이었다. 남산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야경은 그야말로 보석을 뿌려놓은 듯 아름다웠다.
“저렇게 많은 집들이 있건만, 내 한 몸 쉴 수 있는 공간이 없구나. 어쩌다 내가 이런 모습으로 노숙을 하게 되다니….” 서러움의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내가 선택한 길이었다. “끝까지 헤쳐 나가야 한다”고 굳게 다짐하며 눈물을 닦았다.
남산에서 지낼 땐 한 푼도 없었다. 하도 배가 고파 수돗물로 배를 채우기를 몇 차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서대문에 있는 적십자병원으로 갔다. 당시에는 한 번 피를 뽑으면 3000원을 받았다. 우선 그것으로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다.
먹지도 못한 상태에서 피를 뽑으니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머리가 ‘핑’ 하고 돌았다. 생전 처음 피를 팔아 번 돈을 꼭 쥐고 찾아간 곳이 남대문시장 난전. 그곳에서 20원짜리 가락국수로 쓰린 속을 달랬다. 이렇게 사먹는 국수 두 그릇이 하루 끼니의 전부였다.
인생 밑바닥을 기면서도 배우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계속 유명 감독을 만나기 위해 주린 배를 움켜잡고 하루 종일 충무로 거리를 헤맸다. C감독의 집으로 갔다. 초인종을 누르니 누군가 대답했다. 그러나 문이 열렸다는 기쁨도 잠시, 감독님은 지방 촬영 중이라고 했다. 일단 나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김인문이라고 합니다. 그럼 내일 또 오겠습니다.” 이튿날 다시 찾아갔다. 역시 안 계시다고 했다. 김인문이라고 인사만 하고 다시 돌아왔다. 다음날, 그 다음날도, 그렇게 7개월 정도 매달렸다. 가락국수로 끼니를 때우며 근로자합숙소와 남산에서 지내 왔으니 나의 행색은 남루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몸과 마음이 서서히 지쳐갔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다시 C감독을 찾아갔다.
내 귀를 의심했다. “감독님이 들어오시라네요.” 마치 화석이라도 된 듯 몸이 굳었다. “드디어 감독님이 나를 만나주시는구나. 나를 불러들이시는구나!” 배우란 꿈을 다 이룬 것 같았다.
***[역경의 열매] 김인문 (4) 거장 김수용 감독 앞에서 ‘배우론’ 들먹여
“이봐! 자네 그 얼굴로 배우를 한다고? 배우는 아무나 하는 줄 아나? 미남도 아니고, 개성도 없잖아!”
감독님은 벅찬 마음으로 감사인사를 하려는 나를 향해 다짜고짜 호통부터 쳤다. 미남이 아니어서 넌 배우를 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아니, 내 얼굴이 어디가 어때서? 그리고 배우가 얼굴을 팔아먹고 사는 건 아니지 않은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나도 모르는 새 감독님을 향해 따지듯 생각들을 털어놓고 있었다.
“감독님! 스타니슬라브스키의 배우론을 보십시오. 그는 배우로서 가장 대성할 수 있는 외양적 조건은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이라고 했습니다. 차이를 만들어내는 건 단지 그 사람의 상상력뿐이라고요.”
감히 내가 감독님 앞에서 스타니슬라브스키를 얘기하다니…. 러시아 태생의 연출가 겸 배우로서 배우론을 정립한 콘스탄틴 스타니슬라브스키(1863∼1938)에 대해 거론하자, 감독님은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아마 연기 좀 해보겠다며 껄렁대는 불량한 청년 정도로 나를 생각했던 모양이다.
순간 나도 움찔했다. 그러면서도 나의 의견들을 굽히지 않고 밝혔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왜 유독 미남 미녀들을 찾는 겁니까? 주변을 한번 보십시오. 그렇게 잘난 사람들만 사는 게 아닙니다. 제가 주인공을 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저처럼 평범한 사람을 연기하고 싶습니다. 누군가는 그런 역할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어느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
언뜻 감독님의 표정을 살폈다. 표정이 살짝 풀린 듯했다. ‘어, 이놈 봐라?’란 모습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보기보다 뚜렷한 목표와 당돌하기까지 한 나를 감독님은 잘 본 듯했다. 그날 첫 만남에서 4시간 가까이 감독과 대화를 나눴으니 말이다. 대화는 마치 면접시험을 보는 것 같았다. 감독이 질문하면,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동원해 자유롭게 대답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감독은 어떻게든 어려운 질문을 해서 나를 떼어내려 했지만 나는 죽기 아니면 살기란 심정으로 감독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형태였다.
이윽고 감독님이 나직이 말했다. “좋아. 자네는 내일부터 우리 영화 촬영장을 따라다니며 열심히 배워 봐. 내일 아침 6시 충무로에 있는 스타 다방으로 나와. 조감독을 보낼게. 그리 알고 가 봐.”
짜릿한 감동이었다. 감독님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를 유심히 보는 듯했지만, 그는 나의 내면에 숨겨둔 집념과 열정을 본 것이다. 그토록 열망했던 배우의 길이 트이는구나 싶어 염치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엉엉 울고 말았다. 이날 나에게 배우의 첫 걸음을 떼게 해준 그 분이 바로 데뷔작 ‘맨발의 영광’을 연출한 김수용 감독님이시다.
내 삶에서 감독님과의 만남은 정말 기적이다. 하나님께서 ‘김인문’이란 연기자를 만들기 위해 혹독하게 단련시키셨고, 결국엔 이 같은 아름다운 만남으로 인도해주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나의 꿈이 다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틈틈이 극장가를 누비며 영화를 보고 분석하고, 도시의 모습들을 관찰하면서 나의 머릿속에 하나 둘씩 입력해두었다. 그렇게 나는 ‘기적의 주인공 김인문’을 만들어갔다.
요즘 젊은 후배들을 보면 돈 없고 백 없다면 금세 포기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그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꿈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기적을 만들어주신다.”
***[역경의 열매] 김인문 (5) 촬영장서 잔심부름하며 연기공부 열정
서울 충무로의 스타 다방은 당대 유명 배우들이 집결했던 곳이다. 그곳에서 지금은 은퇴하신 조문진 감독님(당시 조감독)을 처음 만났다. 그는 “아침 먹고 촬영장으로 가자”며 앞장서 다방을 나갔다. 우리가 간 곳은 충무로의 유명한 설렁탕 집. 이미 스태프 100여명이 왁자지껄하며 설렁탕을 비우고 있었다. 그들 틈에서 설렁탕 한 수저를 뜨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드디어 영화 밥을 먹는구나’ 생각하니 감격스러워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하루에 가락국수 두 그릇으로 끼니를 때웠으니 허겁지겁 먹을 법도 한데, 전혀 그러지 못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촬영장은 나에게 배우로서의 전초전이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배우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당시에는 조감독이 대사를 읽어주고, 그것을 받아 배우가 연기했다. 내 생각에 이것은 정석이 아니었다. 영화계에 막 뛰어든 신인이 이런 상황을 이야기할 입장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몇 번 반론을 제기했다. 물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촬영장에서 나는 누구보다 부지런히 움직였다. 한번은 미리 스태프들이 점심식사를 하러 가는 장소를 알아뒀다. 식사를 하자는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식당으로 달려가 감독님 자리에 방석을 깔아놓고 기다렸다. 그리고 식당으로 들어서는 감독님을 맞으며 벗어놓은 구두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자리도 안내했다. 서둘러 밥을 먹고는 감독님 앞에 신발을 놓아드렸다. 스태프들의 심부름도 곧잘 했다. 촬영장을 철수할 땐 먼저 나서 카메라나 조명기기 등을 챙기는 것을 도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김수용 감독님이 나를 불렀다. “인문아, 내일까지 이 대본을 읽어보고 여기에 체크되어 있는 인물에 대해 분석해 와라.”
떨리는 두 손으로 처음 대본을 받아들었다. 읽기를 반복하며 완전히 머리에 입력시켰다. 이튿날 감독님 앞에서 나름 분석한 인물에 대해 차분히 말씀드렸다. 그러자 감독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네가 그 역을 할 수 있겠니?”라고 물으셨다. “예! 잘할 수 있습니다.”
그 작품이 내 생애 첫 영화 ‘맨발의 영광’이다. 1968년 이 작품으로 한국 영화계에 ‘김인문’이라는 이름 석자를 알렸다. 영화를 찍으면서 조감독이 읽어주는 대사를 전혀 받지 않았다. 사전에 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했고, 대사를 모두 외웠기 때문이다. 카메라나 조명감독들이 이 같은 나의 열정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연기인생은 탄탄대로였다. 잘 생긴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구수한 인상 때문에 주조연급으로 맹활약했다. 당시 나는 지금은 작고한 김승호 허장강 박노식 최남현 주선태 선배들의 연기를 유심히 보고 배웠다. 그들의 몸짓, 말씨, 표정 하나하나를 마음에 새겼다. 그러면서 스스로 나에게 맞는 배우론을 정립했다. “배우는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정확하며 깊은 관찰력을 가져야 한다.”
특히 부지런하기 위해 노력했다. 부지런해야 남보다 하나라도 더 배울 수 있고, 그럼으로써 더 많은 수확도 거둘 수 있었다. 성경에도 부지런함에 대한 교훈이 잠언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나오지 않는가. 내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부지런히 생활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이 원리를 따를 때, 인생은 더 풍요로워진다.
***[역경의 열매] 김인문 (6) ‘빵점 남편’ 믿음 가진 후 조금씩 변화
“여보, 정신이 들어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가 또 얼마 동안 깊은 잠에 빠졌었나 보다. 이번엔 또 며칠이었을까. 가냘프게 눈을 뜨자, 내 손을 꼭 쥐고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괜찮아”라는 말을 그저 눈으로 대신했다. 아내 역시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내를 만난 게 언제였던가. 우리는 둘 다 김포 토박이로, 부모님끼리도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아내는 나를 ‘삼촌’이라고 불렀다. 누가 먼저 좋아했다기보다 우리는 만나면 마냥 편했다. 즐겁게 대화를 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저만치 흘러갔다.
1970년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날짜가 가물가물하다. 함박눈이 펑펑 내렸지만, 날은 따뜻했다. 그날 우리는 결혼했다. 당시 나는 서른두 살, 아내는 스물네 살이었다. 나이 차는 많이 났지만, 오히려 아내는 나보다 훨씬 생각이 깊었다. 바쁘게 촬영장을 오가느라 제때 식사를 하지 못하는 내 생활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아내는 일부러 영양식단을 짜서 도시락을 챙겨주곤 했다. 그 모습에 흠뻑 빠졌는지도 모른다. 그런 아내가 차려주는 따뜻한 밥을 먹고 싶었다.
하지만 신혼의 단꿈을 펼치기엔 우리의 형편은 어려웠다. 결혼식 후 신혼여행도 동료 연기자인 고(故) 남성훈씨가 직접 운전해 북악스카이웨이를 한 바퀴 돈 게 전부였다. 이런 곳에 처음 와봤다며 눈이 휘둥그레져 창 밖을 보던 아내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우리는 서울 창신동에 6평짜리 월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모든 걸 혼자 감당해야 했던 시절, 아내는 나의 매니저요 코디 역할까지 했다. 오로지 연기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아내는 두 아이 교육도 홀로 감당했다. 살면서 나는 아들의 친구 이름은 뭔지, 학교 선생님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몇 학년 몇 반인지조차 모르고 지냈다. 결과적으로 나는 빵점짜리 남편이었고 아버지였다. 연기 외에는 가족과 함께한 것이 없다.
한번은 초등학생이었던 두 아들과 함께 목욕탕을 가기로 약속했다. 며칠 전부터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아이들, 그러나 방송 스케줄 때문에 결국 지키지 못했다. 아내가 남자아이들을 데리고 목욕탕에 갔다는 이야기를 한참 후에 전했다. 그때 아내는 “아이들도 엄마와 목욕탕에 가니 민망해했다”며 “적어도 아이들과 한 약속은 꼭 지켜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 후에 아마 창경원에 갔던 것 같다. 곰곰 생각해 봐도 정말 가족과 함께 오붓하게 시간을 보낸 기억이 없다. 그런 우리 가족이 함께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신앙을 가지면서부터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시간만큼은 아내, 아이들과 함께했다.
아내와 두 아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옆에서 성경을 읽어주고, 찬송을 불러주며 나를 격려해 주고 있다. 끝까지 나를 믿고 사랑해 주는 가족이 있기에 나는 힘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요즘 꿈을 꾸는 게 하나 있다. 아내와 함께하는 멋진 여행을 구상 중이다. 내가 다시 건강하게 일어선다면, 성지순례를 꼭 떠나고 싶다. 내 삶의 동역자로 함께해 온 아내와 예수님, 그 제자들이 걸은 길을 따라가 본다는 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럽다. 아내와 손을 꼭 잡고 기도하면서 걷고 싶다. 주님께서 나에게 그런 기회를 주실는지….
***[역경의 열매] 김인문 (7) 연예인선교단 만들어 군 선교 앞장
담배와 술을 유난히 즐겼던 나였다. 오죽했으면 2005년 처음 뇌경색으로 쓰러지고도 몸이 조금 회복되자마자 바로 담배를 찾았을까. 아내는 건강이 염려된다며 담배라도 끊으라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이것들 때문에 나는 넘어지고 깨지고 말았다.
배우가 되고 싶어 무작정 상경, 오랜 기다림 끝에 배우가 됐고, 그야말로 화려하게 1970년대를 보냈다. 그런데 인간이기에 너무 자만했던 것일까. 80년 어느 날, 무면허에 음주운전으로 큰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어쩌면 연기 인생이 끝날지도 모르는 그런 순간이었다. 몸을 회복하는 것보다도 이것 때문에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때 나를 잡아준 이가 지금은 고인이 된 문오장 목사다. 그는 당시 주변 연예인들을 전도하는 데 참 열심이었다. 후에는 탤런트로서 목사안수까지 받고 군 선교, 연예인 선교에 앞장섰다. 낙담해 있던 나의 손을 꼭 잡고 “교회에 가자”고 이끌었다. 솔직히 그때는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 듯, 아내와 아이들까지 데리고 문 목사를 따라 여의도순복음교회 문턱을 처음 넘었다. 이곳은 영원한 내 마음의 안식처나 마찬가지다.
고(故) 최자실 목사님과 조용기 원로목사님도 직접 만나 인사드렸다. 매주일 듣는 그분들의 말씀은 자양분이었다. 한번은 최 목사님이 나와 문 목사를 불렀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을 향해 “서민의 삶을 대변해주는 타고난 배우”라고 격려해주셨다. 그날 목
사님은 다음의 이야기를 하시려고 우리를 부른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달란트로 복음을 전하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나는 두 사람이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되길 바라요.”
결코 사양할 수 없는 목사님의 권면이었다. 어쩌면 문 목사는 이 말씀 때문에 배우를 포기하고 목회자의 길을 택했는지 모른다. 그럼 나는 어떠한가. 그때는 무조건 따르겠다고 약속했다. 믿음보다는 막연히 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그렇게 순종했는지 모른다. 나는 최 목사님을 영적인 어머니로 생각했고, 목사님 역시 나를 아들처럼 챙겨주셨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내 삶엔 수차례 우여곡절이 생겼다. 쉽게 말해, 배우로서 잘 나갈 땐 예수님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시련이 닥치면 다시 주님을 찾았다. 그런 삶이 반복될 때마다 최 목사님의 말씀이 귓전을 때렸지만, 늘 고개를 흔들고 잊어버렸다. 결국 나는 ‘돌아온 탕자’였다. 지금은 이렇게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았으니 말이다.
문 목사와 나는 연예인선교단을 조직했다. 어떻게 하나님께선 그렇게 멋진 믿음의 파트너들을 만나게 해주셨는지. 신소걸 고운봉 문혜원씨 등이 우리와 함께했다. 최 목사님이 부르면 어디든 달려갔다. 특히 군 선교에 앞장섰다. 최 목사님은 이렇게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연예인 용사들을 불러 “너희들의 믿음이 비둘기 같다”고 아낌없이 칭찬해주셨다.
82년엔 최 목사님의 삶을 다룬 영화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에도 출연했다. 잠시 사고 후유증이 있긴 했지만, 80년대 나는 누구보다 바쁘게 보냈다. 해마다 서너 편, 많게는 예닐곱 편의 영화와 드라마를 찍었다. 이렇게 점차 일이 많아지자 주일성수를 제대로 못했다. 선교활동에도 빠지는 횟수가 많아졌다. 급기야 89년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최 목사님이 돌아가시자 나의 신앙은 뿌리째 흔들렸다.
***[역경의 열매] 김인문 (8) 주님 멀리하다 다섯번 쓰러지고야 회개
빈 깡통 같은 믿음이었다. 영적인 내 어머니 최자실 목사님께서 돌아가신 뒤 나는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갔다. 세상에 젖어드는 건 쉬웠다. 문오장 목사가 그런 나를 붙잡기 위해 애썼지만, 그럴 때마다 스케줄 핑계를 댔다.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한 드라마 ‘첫사랑’에 출연했을 때다. 당대 최고의 젊은 배우들과 호흡을 맞췄다. 내가 맡은 역은 주인공 삼남매의 아버지. 누나 송채환, 장남 최수종, 차남이 배용준이었다. 한번은 연기를 하다 장남을 업고 넘어져 가파른 곳에서 구른 적이 있었다. 스태프들이 굉장히 놀라 뛰어왔다. 혹시나 내가 크게 다친 건 아닌지 염려가 됐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약간의 찰과상만 입었을 뿐 큰 외상은 없었다.
그 장면은 후에 많은 시청자들을 눈물짓게 했다. 그림을 그리던 장남이 다리를 다쳐 아비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리를 다친 장남이 둑에서 굴러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 것. 울면서 장남의 이름을 안쓰럽게 부르는 아비는 가냘픈 등으로 그 아들을 업었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내가 넘어졌을 때 하나님도 그런 안타까운 마음으로 나를 업으셨는데 말이다.
이 드라마로 훗날 ‘욘사마의 아버지’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배용준이 내 아들로 출연했기 때문에 일본 팬들이 그렇게 지어준 것이다. 몇 해 전까지는 일본에서 나를 만나기 위해 팬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이 같은 흔적들도 하나님의 작품인데 감사하지 못했다.
한번은 고속도로에서 아찔한 순간을 경험했다. 매니저도 없이 바쁜 일정 속에서 혼자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깜빡 졸았는지 순간 급정거를 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려보니,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가 눈앞에 들어왔다. 조금이라도 브레이크를 늦게 밟았다면 어찌 됐을까. 이뿐만이 아니다. 1992년과 96년 잇따라 쓰러졌다. 과로하지 말자며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하나님의 사인이었다. 그것을 직감했어야 했는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스스로도 ‘교회에 나가야 한다’는 신호로 여겼다. 그러나 바쁜 스케줄 때문에 도저히 주일을 지킬 수 없었다. 주일성수를 까마득하게 잊고 연기를 마친 뒤 동료들과 술 한 잔을 할 때면 최 목사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목사님이 마치 나에게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인문아, 너 그러면 안 된다. 교회는 꼭 나가야지. 십일조는 꼭 드려야 한다.”
대체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그 많은 돈을 벌어 무엇을 했던가. 십일조를 드렸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그러다 2005년 드디어 모든 걸 버려야 할 위기에 처했다. 90년부터 몸담아온 장수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를 촬영하던 중 쓰러진 것이다. 병원에서 뇌경색이라고 처음 진단받았다. 병원에 누웠는데, “아! 이제 주님이 정말 나를 부르시는구나”라고 온몸으로 느꼈다. 그럼에도 며칠 쉬면서 치료를 받은 덕에 몸은 정상적으로 돌아왔고, 다시 바쁜 일상으로 빠져버렸다.
2006년 초 두 번째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완악한 나의 마음은 요동치고 있었다. “이번에도 괜찮아. 걱정하지마”라는 사단의 음성에 놀아나고 있었다. 또다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그렇게 놓쳐버렸다. 급기야 주님은 아예 나를 넘어뜨리셨다. 그해 세 번째 뇌경색으로 쓰러진 것이다. 이번엔 회복되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 김인문 (9) “내가 너를 써야겠다” 생생한 주님의 음성
“넌 원래 좋은 놈이야. 내가 너를 좀 써야겠다.” 2006년 뇌경색으로 세 번째 쓰러졌을 때, 내 귀에 생생하게 들린 주님의 음성이다. 그때 받은 말씀이 있다.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 58:11)
아내와 평소 알고 지내던 교회 권사님을 따라 기도모임에 나갔다. 교회에도 열심히 출석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며 울면서 매달렸다. 그런데 나의 이런 불편한 모습을 보이는 게 싫었다. 기도해도 회복되지 않는 현실에 상심은 더 커졌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획사를 운영하는 먼 친척 되는 손녀가 오랜만에 나를 찾아왔다. 기독교 마인드로 디앤지스타를 운영하는 김은경 대표다. 나의 상태도 모른 채 한 영화감독의 부탁을 받고 출연 요청을 하러 온 것이다. 김 대표는 세 번째 뇌경색으로 쓰러져 재활치료 중인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할아버지,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어요. 용기를 잃지 마세요.” 김 대표의 말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그냥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싶었다. 손녀의 손을 꼭 잡고 지난날을 이야기하며 계속 눈물을 흘렸다.
“하나님이 한번만 더 고쳐주시면, 옛날 군선교 다니던 때보다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싶어. 그런데 지금은 교회를 나갈 수 없어. 나를 데리고 갈 사람이 없어. 가끔 알던 교회 분들을 따라 기도회에 참석하면 사람들의 수군대는 소리가 너무 부담스러워.”
그러자 손녀는 다음 주일부터 “남편과 함께 교회를 모시고 가겠다”며 나를 데리러 왔다. 또 김 대표가 봉사하는 군선교찬양단과 함께 선교도 다녔다. 매주 토요일 서울 대학로에서 거리공연을 펼치는 데도 동참했다. 다시 신앙의 불꽃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2007년 김 대표와 함께 KBS 기독신우회 예배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수십년 만에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님을 만났다. 목사님께서 지팡이를 짚고 있는 나를 한번에 알아보시며 이내 눈물을 글썽이셨다. “네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 너는 꼭 낳는다. 믿기만 해라.” 그리고는 나를 꼭 안아주셨다. 목사님의 품 안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마치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의 품에 안긴 것 같았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김 대표가 목사님 비서실로 안수기도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비서는 오래 기다려야 한다고 했지만, 바로 다음날 오전 비서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단다. 기독신우회 모임이 있으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오라고…. 그리고 목사님은 나를 잊지 않고 자신의 옆자리에 내 의자를 준비해놓고 기다려주신 것이다.
그날 목사님은 민수기 21장의 말씀을 들려주셨다. “인문아, 놋뱀을 바라보라.”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바로 예수님을 상징한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바로 그분을 바라보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런 자는 죄 사함을 받고, 치유함을 받고, 영원한 새 생명을 누리는 축복을 받는다.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는 성도들 중에 혹여 나처럼 절망에 빠졌거나, 원망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는가. 나처럼 후회하는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늦었다고 해서 또다시 절망할 필요는 없다. 나는 지금도 이 말씀을 꼭 붙잡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 이 모습으로 나의 삶을 전하는 것도 기적이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김인문 (10·끝) 가장 어렵던 ‘순종’… 이젠 좀 알겠다
매주 수요일이면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강민휘와 길별은. 내가 사랑하는 제자들이다. 조금 전에 이들이 왔다 갔다. 나를 위해 기도하고, 멋진 플루트 연주도 들려줬다. 오늘은 좋은 소식도 갖고 왔다. 5월에 방송되는 SBS 특집드라마 ‘유쾌한 삼총사’에 출연하게 됐단다. 또 최근 첫 촬영을 마쳤다고 했다. 예뻐라, 기특한 녀석들. 어서 일어나 우리 애들이 연기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데….
아이들을 만난 건 축복이다. 민휘는 다운증후군 연기자로 이미 영화에서 주조연으로 출연한 바 있다. 별은이는 지체장애우다. 처음 아이들을 만났을 때, 김 대표는 이런 질문을 해왔다. “할아버지, 우리 아이들이 정말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럼. 이 아이들이야말로 최고의 배우가 될 거야. 대한민국 방송문화의 세계화에 기여할 거야. 은경아, 할리우드 대작들을 보렴. 진짜 장애인 배우들이 얼마나 연기를 멋지게 하는지. 그건 분장으로 안 돼. 우리 애들 충분히 할 수 있어.”
긍휼, 사랑, 그 아이들과의 동질감이 느껴졌다. 누군가를 보면서 이런 마음이 든 건 처음이었다. 2007년부터 장애인 배우들을 직접 가르쳤다. 매주 2∼3회씩 연기지도를 했다. 후천 장애를 입은 나와 민휘, 별은이는 마음이 잘 통했다. 꾸밈없이 연기하고 웃었다. 때론 목놓아 울기도 했다. 문득 이들과 무대에 서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2008년 서울 노원문화회관에서 ‘날개 없는 천사들’이란 작품을 올리게 됐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배우들이 함께하는 무대에서 나는 교장선생님 역을 맡았다. 민휘와 별은이도 마음껏 연기했다.
이 일을 계기로 장애인 배우들을 키우고 싶다는 비전을 갖게 됐다. 그러던 중 사단법인 한국장애인방송연기자협회를 설립하게 됐고 초대회장을 맡았다. 정말 생각지도 않게 제자들을 만날 수 있는 길들이 열렸다. 경남 창원시 창신대에 연극영화과를 개설하는데, 나를 초대 학과장으로 앉히고 싶어 했다. 아니, 이렇게 불편한 몸으로 어떻게 지방을 오간단 말인가. 그때 깨달은 말씀이 이사야 41장 10절이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이번엔 학과장으로서 학교를 홍보해야 했다. 말도 어눌한데 학생들 앞에서 우리 학교를 어떻게 홍보하지? 무조건 기도했다. 때마침 당시 유명한 ‘SHOW’ CF에서 피노키오 할아버지를 맡아 다시 방송에 얼굴을 알렸다. 그런데 이 CF의 영향이 어찌나 컸던지, 홍보를 위해 학생들 앞에만 서면 “와, 피노키오 할아버지다!”라며 환호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합이니이까 자기이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1∼3)
역경의 열매를 통해 꼭 같이 읽고 싶었다. 하나님만 바라보며 무조건 순종하고 믿기 바란다. 보고 믿든, 안 보고 믿든 꼭 믿어야 한다. 믿으면 소생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면을 연재하는 중에 격려해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1990년 ‘수탉’이란 작품으로 나와 함께 몬트리올 영화제에 참석했던 김동호 집행위원장, 창신대 강병도 총장님, 나의 손과 발이 되어 준 박재우 교수님…. 그대들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천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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