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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스압주의
경성스캔들
1.
경성에서 가장 큰 댄스홀 파라다이스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왁자지껄했다. 국권 피탈이라는 암담한 시대 상황과 맞지 않게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스윙재즈 음악에 맞춰 신나게 몸을 흔드는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보였다. 삐까뻔쩍하게 갖춰 입은 채 본인의 모던함을 뽐내는 사람들 속에서도 지용은 단연 눈에 띄었다.
경성 최고의 모던보이, 파라다이스 댄싱킹, 사교계의 황태자 등등 권지용 이름 뒤에 붙는 수식어는 하나 같이 주인을 닮아 화려했다. 파라다이스를 자주 찾는 손님들이야 단번에 지용을 알아보았지만, 그를 처음 본 사람들은 예쁘게 가르마를 타 포마드로 손질하는 데만 한 식경이 넘게 걸렸던 머리에서부터 파리가 앉다 미끄러질 만큼 반질반질하게 잘 닦인 구두까지 지용을 위아래로 훑느라 정신없었다.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세빌 로우 양복과 동경에 있는 친구를 통해 공수해온 레이 밴, 알이 굵은 반지와 손목에서 번쩍이는 로렉스 시계까지. 과연 유행을 선도하는 모던보이 다운 차림새였다.
“아이고, 도련님. 안 그래도 잘나신 분이 세비루 뽑아입구, 라이방까지 쓰고 나니까 아주 인물이 훤해요.”
“오늘 파티에서도 우리 도련님이 최고로 멋질 거라니까.”
귀에 딱지가 박히게 칭찬하던 명빈관 기생들의 말처럼 댄스홀 내의 수많은 눈동자는 꼭 한 번씩은 지용을 거쳐 갔다.
“이게 누구야. 우리 모오던-뽀이 아니신가?”
그 때 꼬부라진 발음으로 지용을 부르며 다가온 낯익은 얼굴 하나가 웃으며 술잔을 건넸다.
“왜 이리 오랜만에 오셨어? 너 보겠다고 상경한 예쁜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허풍은.”
“눈이 있으면 둘러봐 인마. 다들 너만 보고 있잖아. 권지용 아직 안 죽었어.”
남자가 내민 위스키를 한 번에 털어 마신 지용은 입술을 닦으며 건조하게 대꾸했다.
“다들 많이 심심했나보군.”
아마도 내일 아침쯤이면 저잣거리가 꽤 떠들썩할 것이다. 남 얘길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느라 제 이름 석 자가 닳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무성한 추문들 중 대부분이 부풀려진 이야기거나 생전 듣도 보도 못한 헛소문이었고 사실은 극소수였다. 소문의 주인공이 되는 일이 잦아지며 지용은 때로는 아니 뗀 굴뚝에도 연기가 난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깨우쳤다.
서양 땅 밟고 온 인텔리라며. 집에 돈이 얼마나 많은지 과장 보태 경성 땅 반쪽이 그 애비 거라더라. 야들야들한 얼굴로 여인네들을 홀려서 눈물 쏙 빼게 하는 카사노바라지 뭐야. 모던보이는 얼어 죽을, 친일파 자식 주제에. 그를 칭하던 화려한 수식어들은 지용이 등을 돌린 순간 화살이 되어 날아왔다. 친일 사업가, 계급혁명에 반하는 부르주아, 비겁한 회색주의자. 이야기의 끝은 항상 저와 아버지 욕이었으나 전혀 억울하거나 분하진 않았다. 친일하는 아버지의 아들도 맞고, 돈이 차고 넘치게 많은 것도 맞고, 오는 여자 막지 않고 가는 여자 잡지 않는 바람둥이인 것도 맞으니 그 사실들을 바탕으로 무슨 이야기를 꾸며내건 그건 그대들의 자유일세 하고 말았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고 내일 또 오는 건 어떤가? 그러다 또 추문에 휩싸일라.”
“마음껏 씹어대라 그래. 이보다 좋은 공짜 안주거리가 또 있겠냐?”
“지금 자학하는 건가?”
“아니.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잠깐의 기쁨이라도 줄 수 있다면 기꺼이 안주상에 오르겠노라 선언 하는 거야.”
무심한 지용의 대답에 남자가 웃음을 터트렸을 때였다. 꺄악. 어디선가 높은 비명소리가 들리며 한 순간 음악이 뚝 끊겼다. 신나게 스윙댄스를 추던 사람들이 갑자기 멎은 음악에 당황하는 사이, 조명이 모두 켜지며 무장한 순사들이 들이닥쳤다.
“전부 멈춰!”
“아까 이 안으로 독립군이 숨어들었다는 제보가 있었다. 모두 머리에 손 올리고 벽으로 붙어!”
난폭하기로 소문난 종로 경찰서 놈들이었다. 낭패로군,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지용은 인상을 찡그리며 수사에 협조하기 위해 손을 들어올렸다. 순사들은 눈에 불을 켜고 댄스홀 안의 사람들을 꼼꼼하게 살펴댔다.
“이미 도망친 것 같습니다. 여기엔 없습니다.”
저 멀리 윗선에게 상황을 보고하는 순사부장을 가만히 응시하던 지용은, 유성기로 걸어가 레코드판 위로 바늘을 얹었다. 레코드판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경쾌한 스윙재즈가 흘러나왔지만 서슬 퍼런 순사들 눈살에 그 누구도 몸을 흔들지는 못했다. 이 넓은 댄스홀에서 음악에 맞춰 발재간을 부리는 것은 지용 단 한 명이었다.
“뭐하는 거야?”
“수사도 다 끝난 것 같은데 좀 놀면 안 됩니까?”
“이 빌어먹을 조센징 놈이!”
넋 놓고 지용이 하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던 순사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주먹을 높이 쳐들었다. 안 그래도 쫓던 독립군을 놓친 마당에 젖내 풍기는 조선인 사내까지 자신들을 농락한다 생각하자 약이 바짝바짝 올라서였다.
“무슨 일이야?”
실내가 시끄러워지자 순사부장과 이야기를 나누던 남자가 이 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아니, 글쎄 이 조센징 자식이,”
수하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제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남자와 지용의 시선이 천천히 겹쳐졌다. 그 순간, 시끄럽게 귓전을 때리는 음악 소리가 뚝 멎었다. 그토록 만나고 싶던, 그리고 절대로 두 번 다신 마주치고 싶지 않던 상대와의 조우라니.
“하.”
하고 싶은 천 마디의 말 대신, 간신히 입술을 비집고 나온 건 고작해야 바람 빠지는 탄식 소리였다.
“멀리는 못 갔을 거야. 나가서 역 중심으로 주변부 수색해.”
“알겠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있는 지용과는 달리 승현은 제 뒤를 쫓아온 순사부장에게 수사의 연장을 지시했다. 위압감을 주던 순사들이 건물을 빠져나가자 댄스홀은 다시 활력을 되찾았다.
“자, 자. 나으리, 여기서 이러시지 마시고. 두 분 말씀 나눠야하니 제가 조용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본능적으로 두 사람이 아는 사이라는 것을 눈치 챈 사장은 영업용 미소를 지어가며 지용과 승현을 귀빈실로 안내했다.
“때깔 좋아졌다.”
먼저 인사말을 건넨 것은 지용이었다. 사실 인사라기 보단 비난에 가까운 어투였다.
“오랜만이다.”
“내 앞에 있는 게 정말 너냐?”
“........”
“정말 최승현 너야?”
승현을 노려보는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 겉모습이 조금 바뀌다하여 그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10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던 얼굴이었으니까. 수도 없이 기다리고, 원망하고, 그리워하던 사람이니까.
“그래, 나야.”
무뚝뚝한 대답에 맥이 탁 풀렸다. 쓰러지듯 테이블에 기대앉은 지용은 제 눈앞에 있는 승현을 느리게 훑었다. 제가 참 좋아했던 단정하지만 서늘하던 얼굴도,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도 모두 그대로인데 어째서 그는 총독부의 제복을 입고 있는 걸까.
“그 대단하던 최승현이 변절자가 되어 총독부의 개 노릇이나 하고 있다니.”
“.........”
“이제야 내가 얼마나 엿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지 와 닿는다.”
시대적 비극이군. 씁쓸하게 중얼거린 지용은 문득 얼굴 하나가 더 떠올라 입술을 꽉 깨물어야 했다.
“그래, 나라 팔아서 뜨신 밥 처먹으니 좋으냐?”
“자, 자네 왜 이러는가. 나으리, 이 사람이 아까부터 많이 마시더니 취했나봅니다.”
여과 없는 지용의 말에 막 술과 안주를 내오던 사장이 화들짝 놀라 서투른 변명을 늘어놓았다. 평소엔 시큰둥하니 무기력한 모습을 보일 때는 많았지만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살가운 성격은 못 되어도 지용은 제게 도움이 될 인물 앞에서만큼은 장사치마냥 유들유들하게 구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입안의 혀처럼 사근사근하게 굴며 여인네들의 마음을 빼앗고, 외설적인 금발 미녀들이 헐벗고 있는 포리스 가제트로 젊은 사내들의 환심까지 사며 사교계의 황태자로 거듭난 그가 아닌가.
“네 놈 하나 잘 살겠다고 같은 민족을 제물로 바치니 속이 시원하냔 말이야.”
뜨악하고 놀란 사장은 승현의 눈치를 살피고는 괜한 불똥이 제게 튈까 서둘러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친일파 아버지 등에 업고 무위도식하는 네가 그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지.”
“뭐?”
“정작 하는 일 없이 한량처럼 살면서 말로만 민족, 조국하는 거 우습게 보인다.”
“........”
“네 푸념은 여기까지 들어주는 걸로 하고. 더 할 말이 없다면 그만 갈게. 피차 얼굴 맞대고 있기 껄끄러우니까.”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를 들으니 무언가가 울컥 차올랐다. 지용은 억지로 눈물을 삼키고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뗐다.
“하나만 더 묻자.”
“좋을 대로.”
“정말로 네가, 우리 형을 죽였냐?”
“........”
“정말 네가 동지들을 밀고하고, 우리 형을 죽였어?”
목이 콱 막혔다. 처음으로 흔들리는 승현의 표정을 보며 지용은 말아쥔 주먹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아니라고 믿었다. 널 다시 보기 전까지만 해도 내 생각은 같았어. 모두 너를 욕해도 나는 아니까, 다 아니까. 네가 그럴 녀석이 아니란 걸. 너는 우정을 위해 죽으면 죽었지 절대 동료를 배신하지 않는다고, 정의를 위해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신념을 꺾지 않는다고! 그렇게 믿었어. 우리 가족도 안 믿는 나지만, 그 믿음을 담보로 목숨을 걸라면 걸 수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내 앞에 나타난 너를 보니까 그 확신이 흔들려.”
“나는,”
“아니다, 그냥 대답 하지 마.”
“........”
“이 확신마저 무너지면 내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르겠어. 너를 기다렸던 시간들이, 너를 위해 지켰던 믿음이 거꾸로 쏟아져 내리는 거 원치 않는다. 너는 그 날 죽었고 나는 널 몰라.”
붉게 충혈된 눈으로 쉴 틈 없이 쏘아붙이던 지용은, 결국 떨어진 눈물을 서둘러 손등으로 훔치며 싸늘하게 읊조렸다.
“그러니 우리 가급적이면 다신 보지 맙시다. 나으리를 보고 있으니까 없던 애국심이 막 솟아나고 그러네.”
승현은 찬바람을 일으키며 나가버린 지용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붉게 물든 지용의 눈동자가 자꾸만 아프게 가슴을 콕콕 찔러댔다.
2.
이른 시각부터 바깥이 시끌벅적했다. 지용은 밤새 마신 술 때문에 핑핑 도는 머리를 붙잡고 일어나 방문을 열고 툇마루로 나왔다. 일찍부터 외출을 다녀온 건지 명빈관 기생 몇이 새로 산 장신구를 요리조리 살펴보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훤칠하니 잘생긴 것이 꼭 왕자님 같았다니까.”
“어쩜 그리 멋있으실까. 우리 가게 좀 자주 들러주시면 좋겠네.”
“아무리 미남이면 뭐하누. 일본 앞잡이 노릇이나 하고 있는데.”
“우리 같은 기생년들이 뭐 양반 상놈 가려가며 받는다니? 돈 많고 잘생기면 장땡이지.”
질리지도 않는지 또 남정네 얘기구만. 고개를 내젓던 지용은 기생 아이 한 명이 대야 가득 떠다준 세숫물로 꼼꼼하게 얼굴을 씻어 내렸다.
“뭐야, 무슨 얘기들 하고 있었어?”
“언니 아까 어디 갔었어요? 빨리 이리 와요, 글쎄 종로 서에 왕자님이 나타났다니까.”
“웬 왕자님?”
“보안과에 새로 오신 나리라는데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몸도 아주 그냥.”
“보안과? 어머, 너 혹시 그 새로 온 조선인 관리 말하는 거니?”
수다스러운 호들갑을 흘려듣던 지용의 손이 뚝 멎었다.
“어찌 아세요?”
“얘, 경성 바닥에 소문 다 났어. 사법과와 행정과 양대 고등문관 시험에 동시에 합격한 수재 중에 수재라더라. 오죽 똑똑했으면 조선인이라면 학을 떼는 보안과장이 그토록 예뻐하겠니.”
“그리 잘나신 분이 어째서 총독부에 들어가셨을까.”
“들리는 말로는 아주 피도 눈물도 없이 잔인하다던데. 하긴 그 자리에 올라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혔겠니? 그러니까 정신 차리고 조심해 이것들아.”
지용이 세숫대야를 집어던진 것은 그때였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가는 세숫대야 소리에 대화를 멈춘 기생들은 영문을 모르겠단 눈으로 씩씩거리는 지용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안 해? 시끄러워서 씻을 수가 없잖아!”
“어머, 우리 도련님은 갑자기 왜 또 심술이실까.”
“술이 덜 깨신 거예요, 잠이 덜 깨신 거예요?”
지용은 꺄르륵 웃는 기생들을 노려보다 쿵쾅대며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괜한 심술이었다. 본능적으로 그녀들이 말하는 왕자님이 승현이라는 것을 깨닫자 부아가 치밀어 애꿎은 세숫대야에 분풀이를 한 것이었다.
“아, 짜증나.”
저번 날 댄스홀에서 승현을 만난 뒤로 부쩍 신경이 곤두섰다. 떠오르는 잡념을 없애기 위해 술을 마시고, 잔뜩 취해 잠들었지만 다음 날이면 또 다시 천장 가득 승현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다시금 떠오른 옛날 생각에 지용은 결국 눈을 꽉 감아버렸다.
승현과 지용은 둘도 없는 동무였다. 승현이 기어 다닐 때 즈음, 소작농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일제의 부당함에 항거하다 순사가 휘두른 곤봉에 맞아 죽었다. 한순간에 지아비를 잃고 오갈 데 없어진 승현의 어미는 근방에서 제일 컸던 지용의 집에서 종살이를 했고 그 때부터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식모의 아들과 집주인의 아들이라는 경계는 두 사람의 우정에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같이 배우고 뛰놀며 해가 지날수록 둘은 더 돈독해졌다.
앞집에서 키우는 백구처럼 마냥 순둥이 같던 승현이 독기를 품게 된 것은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을 무렵이었다. 동척에서 근무하던 지용의 큰 형에게 도시락을 전해주기 위해 나갔던 승현의 어미가 일본인 관리에게 겁탈 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일어났다. 상을 다 치를 동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입만 꾹 다물고 있던 승현 대신, 지용이 탈수증에 걸릴 만큼 눈물을 쏟았다. 가련한 그의 인생이 아팠고, 제대로 울지도 못할 만큼 괴로워하는 동무가 가여워서였다. 며칠 앓던 승현은 자리를 털고 일어난 뒤, 미친 것처럼 공부만 했다. 아마 그 때부터였을 테다. 제 둘째 형과 승현이 부쩍 어울리게 된 것도.
지용에겐 형이 두 명 있었다. 장남인 큰 형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다니며 가난한 농민들의 고혈을 쥐어짰다. 둘째 형은 그런 친일파인 아버지와 큰 형을 경멸했다. 지용은 굳이 캐묻진 않았지만 형이 위험한 일을 벌인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일제를 비판하는 대자보를 붙였다는 죄목으로 승현이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며칠 뒤 형이 꽁꽁 감춰두었던 불온서적들을 승현의 방에서 발견했을 때,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걷는구나 하고 깨달았던 것 같다. 그 때까지만 해도 지용은 민족주의니 사회주의니, 해방이니 투쟁이니 하는 것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저 또래 아이들처럼 예쁜 여학생들 얘기를 즐겨하고, 공을 차고, 날이 더우면 멱을 감고, 아버지의 서슬 퍼런 호령을 피해 공부하는 척 책을 뒤적이는 철부지에 불과했다. 철부지 도련님인 지용과 달리 승현은 어릴 적부터 애늙은이 소리를 들을 만큼 어른스러웠다. 조숙하고 점잖기만 하던 승현도 유일하게 지용 앞에서는 그 나이 또래처럼 웃고 떠들었는데 지용은 제 앞에서만 무장 해제되는 그의 모습에 벅찬 기쁨을 느꼈었다. 부당함에 저항할 줄 아는 용기와 강단 있는 성격, 아닌 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니라고 말할 줄 아는 소신, 무뚝뚝함 속에 포장된 다정함. 누구라도 감춰진 그 모습들을 발견한다면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때문에 지용은 찬란하게 빛나던 그 시절 승현을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했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붙어있을 것 같던 두 사람이 떨어지게 된 것은 열여덟 무덥던 여름날이었다. 아버지의 뜻과 반대로만 나아가던 둘째 형이 먼저 동경으로 유학을 가겠노라 청해오자 아버지는 드디어 네 놈이 정신을 차렸구나 하고 기뻐하셨다. 형은 유학을 가는 조건으로 승현이의 동행을 제안했고 아버지는 흔쾌히 허락하셨다. 지용 또한 같이 유학길에 오르고 싶었지만 학업을 이어야했기에 그럴 수 없었다. 가장 친한 두 사람과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다. 그렇지만 지용은 제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며 봄이 되면 다시 돌아오겠다던 형과 돌아오는 날 같이 팥빙수를 먹으러가자던 승현의 약속을 떠올리며 서글픔을 꾹꾹 참아냈다.
그리고 형은 이듬해 봄에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다. 딱딱한 유골함에 담긴 채. 형의 유골을 들고 온 태수 형은 할 말을 잃어버린 지용을 붙잡고 서글프게 오열했다. 암살 작전을 나갔던 형이 총에 맞아 죽었다고, 최승현 그 자식이 모두를 배신했다고 엉엉 울며 믿을 수 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말 안 듣는 자식보다 본인의 부와 명예를 중시했던 아버지는 형이 독립군이었단 사실이 밝혀지면 제 사업에 불똥이 튈까 형의 죽음을 없던 일처럼 묻어두고 장례조차 치르지 않았다.
분명히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야. 내게도 말 못할 그럴 일이 있었을 거야. 이해하려 노력하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그를 기다렸지만 일본에선 그 어떤 연락도 없었다. 알고 있는 인맥을 총동원해 동경의 상황을 알아보아도 돌아온 것은 승현이 일본 고위 관료의 양자로 들어갔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뿐이었다. 그 날부터 지용은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폐인 같은 나날을 보냈다.
“도련님, 도련님!”
상념에 잠겨있던 지용은 다급하게 저를 부르는 소리에 엉금엉금 기어가 미닫이를 열어젖혔다.
“뭔데 소란이야?”
“큰일 났어요, 큰일!”
“왜? 또 네 귀걸이 한 짝이 사라지기라도 한 것이냐?”
바쁘게 뛰어왔는지 헉헉 숨을 고른 연향이가 손사래를 치며 대꾸했다.
“아니요, 영도 오라버니!”
“최영도?”
“네, 영도 오라버니가 아까 순사 놈들에게 끌려갔대요.”
발을 동동 구르는 모양새가 애처로웠다. 하여간 그 자식은. 문득 저번 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던 고위대작 암살 기사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파라다이스 사장이 아직까지 잡히지 않은 범인을 잡으려고 순사들이 밤낮으로 쪼아댄다며 울상을 지었던 것 같기도 했다.
“내가 가볼 테니까 진정하고 앉아 있어.”
지용은 울먹이는 연향을 안심시키고는 곧바로 옷을 챙겨 입었다.
3.
느리게 움직이는 시계바늘을 보며 지루한 기다림을 이어갈 때 쯤, 우뚝 솟은 머리통 하나가 나타났다.
“어이 도련님!”
빠른 걸음으로 휘적휘적 다가온 영도가 지용을 향해 손바닥을 척 내밀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냐?”
“일은 무슨. 내가 경성 동네북 아니오.”
지용이 물려준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그는 날이 선 눈으로 종로 경찰서 외벽을 노려봤다. 내선일체, 황국신민, 천황폐하만세. 커다랗게 나붙은 문구를 조용히 읊던 영도가 코웃음을 치며 감상평을 내뱉었다.
“꼴값들 떨고 있네.”
“조용히 좀 말하면 안 되나? 나오자마자 또 다시 끌려가고 싶지 않으면.”
“잡아 갈 테면 마음대로 하라지.”
개의치 않는다는 얼굴로 피 섞인 침을 퉤 뱉는 모습이 뒷골목 어깨들과 다를 바 없었다. 저 망아지 같은 자식. 지용은 혹 누가 볼까 두려워 서둘러 영도를 잡아끌고는 제 차 조수석에 집어넣었다.
“우리 모던보이께서 또 힘을 써주셨구만. 그래, 이번엔 얼마를 찔러줬나?”
“말하면 갚을 수나 있고?”
“나 돈 없는 거 잘 알잖소.”
실없이 웃는 얼굴에 불그스름한 멍이 가득했다. 거울로 망가진 얼굴을 이리 저리 비춰보던 영도는 연기를 깊게 빨아들이며 커다란 목소리로 투덜댔다.
“누누이 말하는 건데 어차피 빼내 줄 거 좀 일찍 오면 덧난 답니까? 얻어터진 다음에 오는 게 무슨 소용이오.”
“네 놈이 그 잠깐을 못 참고 순사들 성질을 긁어대니 맞은 거겠지.”
최영도는 종로 경찰서를 제 집처럼 드나드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중일 전쟁 이후로 더 잦아진 암살과 테러. 영도와 앙숙인 순사부장은 분명 영도가 그 사건들과 관련이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러나 심증은 확실한데 물증이 없으니 화가 나는 날엔 괜히 그를 끌고 가 오늘처럼 분풀이를 해댔다. 마음 같아서는 없는 죄라도 뒤집어씌워 감옥에 처박아두거나 없애버리고 싶었으나 영도의 든든한 뒷배인 지용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중추원 고관직을 지낸 할아버지와 기업을 운영하며 일본에 엄청난 세금을 바치는 아버지. 친일인사인 두 분 모두 각계에 알아주는 인맥들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 순사들도 지용을 함부로 대하진 못했다.
“이제 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때?”
“무얼.”
“정식 조직원 말이야.”
“그냥 우리 도련님은 편안하게 탱자탱자 놀다가 가끔씩 오늘처럼 돈이나 대주면 참 좋겠는데.”
히죽 웃는 얼굴이 오늘따라 더 얄미웠다. 독한 놈, 벌써 삼년 째 조르고 있는데 씨알도 먹히지 않는구나. 갑자기 떠오르는 그와의 첫 만남에 지용은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지용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형이 죽고 폐인 같은 나날을 보내다 강제적으로 떠나게 된 미국 유학이었다. 자신처럼 유학을 온 있는 집 자식들과 꼬부랑말을 쓰는 외국인들과 함께 어울려 매일 같이 술독에 빠져 살던 지용은 그 곳에서 승현과 비슷하게 생긴 벗 하나를 사귀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함대길. 진중한 성격의 승현과는 달리 그는 유쾌하고 밝았다. 때문에 처음 그가 조국 해방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고 있단 사실을 알았을 때 까무러칠 만큼 놀랐었다. 처음엔 호기심과 승현과 닮은 그에게 느끼는 막연한 호감으로 대길을 따라 비밀결사 모임을 몇 번 나갔던 것이 시초였다. 점차 지용은 머나먼 타국에서도 조국 해방을 꿈꾸며 결의를 다지는 그들에게 동화되어 갔고 자연스레 대길과 함께 모임에 참여하고, 객원 기자로 활동하며 독립 자금을 후원하는 역할까지 도맡았다. 그 후 아버지의 부름으로 조선에 돌아가게 된 지용이 대길에게 독립운동을 계속 돕고 싶다 청했고, 대길은 고민 끝에 영도를 만나보라며 그의 거처를 알려주었다.
조상 대대로 삼정승을 고루 지냈던 유서 깊은 선비 가문의 종손인 최영도는 애물단의 유능한 저격수로 활동했다.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을 주장하며 왜와 양을 배척하던 그의 조상들의 가르침을 받고 자란 그는 일제의 만행에 치를 떨며 독립투사의 길을 선택했다. 경성에서 보기 드문 커다란 덩치와 훤칠한 외모 덕에 그를 사모하는 여인들도 많았으나 그녀들은 괄괄한 그의 성격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나가기 일쑤였다. 순사부장이 찾아와 총구를 들이대고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나라 잃은 것도 서러운데 성마저 빼앗기니 야마가 돈다며 ‘야마도라’로 제 성을 개명한 일화는 경성 바닥 모두가 알 만큼 유명했다.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그를 산호랑이라 부르기도 했다.
“기껏 꺼내줬더니 혼자만 처먹고 앉았니?”
영도는 명빈관에 돌아오자마자 아침을 못 먹어 배가 고프다며 신발도 벗지 않고 수저를 들었다.
“응, 난 객원이랑은 겸상 안 해. 미안하게 됐수다.”
“그럼 나도 정식 조직원 시켜주면 되잖아.”
“나한텐 임명권이 없다고 몇 번 말해? 꼭 그것 때문이 아니더라도 내가 구식이라 아직도 급을 좀 따집니다.”
“친일파 아들이랑 밥 먹으면 내장이 뒤집어지기라도 한다던?”
“그런 것도 있지만 알잖아 나 양반인거. 말이 나와 하는 얘긴데 반상의 법도가 지긋하던 예전 같았으면 도련님 지금 나랑 눈도 못 맞췄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갑오개혁 이후 관존민비의 폐습을 타파하고 신분제를 철폐하며 법적인 평등사회를 구축하였으나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차별이 존재했다. 호적에 찍힌 붉은 점이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백정은 여전히 멸시 받았고, 상투를 자르고 갓을 벗어던졌음에도 양반은 여전히 대우 받았다. 영도는 양반가 중에서도 꽤 알아주는 가문의 자제였으니 그의 말처럼 만약 지금이 개화 전 조선이었다면 도련님 하고 고개를 조아려야 할 쪽은 제 쪽이었다.
“그 대단한 가문에서 어쩌다 너 같은 놈이 나왔나.”
“삼신 할매가 술 먹고 점지했나보지.”
으으, 저 얄미운 놈. 방싯방싯 웃는 얼굴을 한 대 갈겨주고 싶다는 충동이 발끝에서부터 솟구쳤다.
[애국, 애족, 애물을 넘어서 만물을 사랑하는 단체. 줄여서 애물단이야.]
처음 대길이 애물단을 알려주던 날만 해도 그 우스꽝스럽고 촌스러운 이름에 웃음을 터트렸었는데. 입단은커녕, 지용은 몇 년째 그 애물단의 빗장조차 열지 못하고 있었다. 저 능구렁이 같은 놈 고문을 받아 죽든지 말든지 신경 끄고 살 고 싶지만 애물단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꼭 영도의 도움이 필요했다. 국내 독립운동 단체들이 다 그렇다지만 그 중에서도 비밀암살단체인 애물단은 특히나 철저한 비밀결사조직이었다. 점조직 특성상 위에서 명령이 내려오면 여기저기 분포된 조직원들은 자신과 연결된 다른 조직원에게 작전을 전달하는 체제였다. 지용이 아는 조직원이라고 해봐야 애물단을 도와 잔일을 처리하는 기생 연향이와 명빈관 관리자로 위장 중인 영도뿐이니 좋던 싫던 지금은 그를 살살 구슬려야 했다.
“오라버니, 잠시만.”
저 멀리서 투닥이던 두 사람을 지켜보던 연향이 슬쩍 다가와 영도를 불렀다. 귓속말로 소곤대는 모양새를 보건대 필시 또 무슨 작전을 벌이려는 게 분명했다. 퉁명스레 제 방으로 들어가는 척 하던 지용은, 주위를 살피고는 두 사람이 사라진 뒷마당 별채 쪽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내일 밤 예정됐던 사냥은 취소됐네. 수장님 명령이야.”
“어째서요? 이미 준비까지 다 해놨는데.”
“며칠 전 식산은행장 암살 건으로 지금 총독부가 난리야. 야마구치도 암살대상 후보자들 명단에 올라서 수행원들이 붙었어. 설령 성공한다 해도 자네가 제일 먼저 의심 받을 걸세.”
암살, 요릿집, 축하연. 요즘 시장 바닥에서 악명이 자자한 악덕고리대금업자 야마구치가 다음 암살의 타깃인 듯 했다. 상인들에게 수탈한 돈의 일부를 총독부에 갖다 바치고 있기 때문에 윗선에서는 그의 불법 행위를 눈감아주고 있었다. 고위대작들의 자금줄을 끊어놓고, 상인들의 숨통을 트이게 하기 위해서라도 놈은 꼭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지용은 영도와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 나누는 대화를 놓치지 않으려 귀를 쫑긋 세우고는 담벼락에 바짝 몸을 밀착했다.
“경성에 언제부터 도둑고양이가 이리도 많았나.”
수상함을 감지한 영도는 소식통 할배에게 그만 가보라는 손짓을 하고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여 담벼락 쪽으로 다가갔다.
“게서 뭐하쇼?”
“아, 깜짝아.”
“배울 만큼 배운 분이 남의 대화나 엿듣고. 참 잘하는 짓이외다.”
저에게 들킨 것이 민망했는지 큼큼 헛기침을 두어 번 뱉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영도는 눈알만 데록데록 굴리고 있는 지용을 보며 혀를 쯧쯧 차다 발걸음을 돌렸다.
“그 사냥 놀이, 나도 좀 끼워줘.”
또 시작이다. 좀처럼 지칠 줄 모르는 도련님의 끈기에 영도는 혀를 내둘렀다.
[친일파 아들놈이 독립운동을 한다.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그러니까 하겠다고. 우리 아버지가 나라 팔아 번 돈, 아들인 내가 애국하는데 쓰겠다는 거요.]
[태극기 몇 번 흔든다고 다 독립투사가 되는 줄 아나. 설치지 말고 원래 살던 대로 편히 사쇼.]
끈질기게 조르는 모습이 연분홍 양복을 위아래로 빼입고, 경성에 딱 세 대 뿐인 시보레 차를 몰고서 명빈관 앞까지 찾아왔던 그 날의 지용과 겹쳐졌다. 그 때까지만 해도 영도는 지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귀티 줄줄 흐르는 부잣집 도련님 같은 행색으로 나타나 독립운동을 하겠다니. 그 말이 꼭 조국 해방에 목숨 거는 자신들을 놀려대는 것만 같았다. 부러 모질게 그를 내쳤지만 지용은 아예 거처를 명빈관으로 옮기고는 배 째라는 식으로 영도를 쫓아다녔다. 처음엔 지용을 상대조차 안하던 영도도 나라 팔아 번 돈 애국하는데 쓰겠다는 말을 증명하듯 군자금을 턱턱 내놓고, 종로서에 끌려 갈 때마다 순사들에게 돈을 먹여 오늘처럼 자신을 빼내주는 등 지용의 호의가 반복되자 서서히 마음을 열어갔다.
“도련님은 왜 그렇게 독립운동이 하고 싶습니까?”
“........”
“이상해서 그럽니다. 해방된 조국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싶어 투쟁하는 사람들은 이해하는데 도련님 같은 인텔리에 모던보이가 왜 굳이? 지금도 충분히 잘 살고 있으면서.”
“네 눈엔 내가 지금 잘 사는 것처럼 보이냐?”
“........”
“나도 죽지 못해 산다.”
지용의 입가에 걸린 씁쓸한 미소를 가만히 바라보던 영도는 한참 만에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그래도 안 돼.”
“왜? 내가 친일파 아들이라서?”
“.......”
“조선 총독부 건물이라도 날려버리면 그땐 받아 줄 테냐?”
우리말 우리글만 가르쳐도 불건전한 사상을 주입한다는 명목으로 잡아가는 시대에 총칼을 들고 하는 무장투쟁은 목숨을 내놓고 사는 것과 다름없었다. 투쟁을 하다 총에 맞아 죽는 것은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산 채로 붙잡히게 되면 차라리 죽여 달라 애원하고 싶을 만큼 끔찍한 일이 펼쳐졌으니.
달랑 전구 하나만 켜져 있는 어두컴컴한 취조실은 취조보다는 고문을 하는 장소에 가까웠다. 벽과 바닥에 얼룩진 핏자국들, 벽에 걸려있는 무시무시한 고문기구들, 사방에서 들려오는 고통에 찬 비명소리.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쉴 틈 없이 채찍질을 당하고, 물고문을 당하고.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러도 동지의 이름을 말하지 않기 위해 혀를 깨물며 지옥의 고통을 견뎌내야 하는 곳이었다. 온갖 고초를 겪어 다질 대로 다져진 건장한 저도 견디기 힘든 것이 고문인데 곱게 자란 도련님이 그 잔인한 시간을 버텨낼 리 만무했다.
“성공만 한다면야 정식 조직원이 다 뭐야. 애물단 수장 자리를 꿰차겠지.”
“오냐, 그 말 반드시 지켜라.”
빙글빙글 웃는 영도를 노려본 지용은 아까 들었던 소식통 노인과 영도와의 대화를 다시금 떠올렸다. 당장 조선 총독부를 폭파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일단은 작은 성과부터 달성해야 했다. 취소됐던 암살 계획을 단독으로 성공시켜 보인다면 그 비밀에 휩싸인 수장이라는 자가 저에게 먼저 연락을 보내올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일 밤, 축하연, 그리고 야마구치 암살. 지용은 머릿속에 정리된 단어들을 다시금 되짚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4.
타앙. 한 발의 총성이 어두운 밤을 뒤흔들었다. 생일을 기념하여 축하연을 끝내고 요릿집에서 막 나오던 고리대금업자 야마구치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이게 그 초심자의 행운이란 것일까? 유학 시절 재미 삼아 즐겼던 사격 놀이가 생각보다 큰 도움이 된 듯 했다. 자신이 쏴놓고도 여전히 믿기지가 않아 뻐근한 손목을 돌려대고 있을 때였다.
“저 쪽이다, 잡아라!”
갑자기 튀어나온 그의 수행원들이 지용을 향해 총구를 들이댔다. 지용은 아직 열기가 채 식지도 않은 권총을 아무렇게나 주머니에 쑤셔 박고서는 맹렬하게 저를 쫓는 그들을 피해 이를 악물고 달리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귀를 찔러왔다. 젠장, 순사들까지 대기하고 있을 줄이야. 한 때 사교계 인맥들과 뺀질나게 드나들던 동네라 지리가 익숙했기에 도주도 간단할 거라 착각했다. 비밀요정에 단속이 뜨는 날마다 뒷문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을 놓던 그때처럼 모든 일이 순조로울 줄만 알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잠깐 멈칫한 순간, 방향을 모를 곳에서 날아온 총알이 지용의 어깨를 스쳤다.
“으윽.”
생전 처음 겪는 고통에 무릎이 풀썩 꺾였다. 몇 번 더 들리는 총성이 그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죽을 수도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공포감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벌떡 일어선 지용은 뜨거운 피가 꾸역꾸역 솟아나는 상처를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살기 위해 또 다시 달렸다. 호각소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참을 수 없을 만큼 심장이 뛰었다.
“놈이 총에 맞았다. 멀리 가진 못 했을 거야!”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소매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이 원망스러웠다. 여기서 잡히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아버지는 절대 자신을 구해줄 위인이 아니었다. 이제 나도 형을 따라 가는 건가? 잡혀서 고초를 겪느니 차라리 지금 자살을 하는 게 나을까?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으며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읏,”
“쉿. 소리 낮춰.”
“너......”
단단한 팔 하나가 지용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정신 잃으면 안 돼. 조금만 버텨.”
익숙한 향기, 익숙한 목소리. 그리고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는 얼굴. 불빛 하나 없는 깜깜한 밤이었지만 지용은 단번에 저를 붙잡은 남자를 알아보았다. 그는 지용을 골목 안 쪽에 숨겨놓고는 빠른 속도로 바깥을 향해 걸어 나갔다.
“이 곳엔 없다. 반대편으로 도망친 것 같으니 그쪽으로 가봐. 난 근방을 더 수색하다 합류하겠다.”
지용은 자신을 죄어오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자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다 그런 자신이 우스워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삶에 더 이상 남은 미련도 없다 생각했는데 지금 그는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안도하고 있었다.
순사들을 보내고 다시 골목으로 돌아온 승현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지용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주위가 어두워 잘 보이진 않았지만 바닥에 흥건한 피만 보아도 출혈량이 꽤 많단 것은 확실했다. 흩어진 인력이 다시 모이기 전에 조금이라도 빨리 이 곳에서 탈출해야 했다. 승현은 제 겉옷을 벗어 지용의 어깨에 둘러주고는 급하게 가까운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쾅쾅쾅. 낡은 철문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무시하고 계속 잠을 자려던 훈은 좀처럼 멈추지 않는 끈질긴 두드림에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오밤중에 이게 무슨,”
“환자야. 급해.”
빼꼼 열린 문 사이로 구둣발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승현은 다급한 얼굴로 핏기 없이 하얗게 질린 지용을 훈 쪽으로 밀었다.
“총을 맞았어.”
“여기저기서 난리도 아니군.”
문을 열어준 훈이 발에 채이는 물건들을 발끝으로 쓱쓱 밀며 지용과 승현을 안내했다.
“너 뭐야?”
“.........”
“동정이냐?”
“.........”
“동정도 아니면 그럼 뭐야. 뭐가 진짜 너야?”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지용은 온 힘을 끌어 모아 승현에게 소리쳤다. 훈은 입을 꾹 다문 채 시선을 외면하는 승현을 대신해 지용을 붙잡아 침대로 끌고 갔다.
“싸움은 나중에 하고 일단 상처부터 봅시다. 사는 게 먼저니까.”
어깨에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자, 원래의 색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빨갛게 물들어있는 셔츠가 드러났다. 가위로 천을 찢어 환부를 살핀 훈은 익숙한 동작으로 수술도구를 꺼내며 승현에게 턱짓했다.
“스친 거야. 다행히 상처가 깊진 않네.”
“.........”
“걱정 말고 가 봐. 늦으면 괜히 의심받을 거 아냐.”
“부탁한다.”
얼핏 대화만 엿들어도 두 사람은 꽤 친한 사이 같았다. 종로 경찰서로 복귀하려는 승현을 붙잡아 사건의 진위를 하나부터 열까지 캐묻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당장 제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피를 많이 흘린 까닭인지 눈앞이 흐릿하고, 머리도 핑핑 돌았다.
“그 쪽은 깨있으면 시끄러울 것 같으니까 일단 좀 자.”
따끔한 통증과 동시에 얼마 있지 않아 눈꺼풀 위에 추를 달아놓은 것처럼 눈이 점점 무거워졌다. 이 돌팔이 같은 의사 놈이 뭔가 이상한 것을 놓은 게 아닐까? 잠들기 전까지 훈을 노려보던 지용은 결국 수면제에 취해 완전히 눈을 감았다.
“으.....”
지용이 다시 잠에서 깬 것은 어슴푸레한 새벽이었다. 다행히 의사 놈이 저를 죽이진 않은 모양이었다. 어깨 쪽에 감긴 붕대를 확인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 숨이 턱 하고 멎었다. 언제 왔는지 침대 옆 의자엔 승현이 앉아있었다.
그의 얼굴을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본 게 얼마만일까? 지용은 소리 죽여 잠든 승현을 관찰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반듯한 옆선은 그대로 드러났다. 날렵한 턱선, 도톰한 입술, 매끄럽게 뻗은 콧날과 뚜렷한 인중, 그리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눈. 시선이 위로 올라갈 때마다 학창시절 그를 훔쳐보던 때처럼 심장이 거세게 뛰어댔다.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까지 바라보고 있으려니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몸은?”
때마침 열린 입술에 지용이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다친 곳은 괜찮아?”
“........”
“다행히 피는 멎었다.”
잠을 많이 못 잤는지 승현의 얼굴 또한 까칠했다. 지용은 무겁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박이다 한참 만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넌 일제의 앞잡이잖아. 그런데 왜 날 도운 거냐?”
“.........”
“형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냐? 아니면 죽을 위기에 처한 내가 불쌍해서? 그것도 아니면 양심의 가책? 이유가 뭐야, 대체.”
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 한껏 격양된 목소리를 꾸며냈다. 정말 총독부의 개가 된 거라면 떵떵거리는 친일파들처럼 당당하게 굴 것이지, 마음껏 미워 할 수라도 있게. 멱살을 붙들고 소리치고 싶었다.
“앞잡이가 아니니까 도와줬지.”
대답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부스스한 머리를 꾹꾹 누르며 일어난 훈은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되게 떽떽거리네.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방금,”
“저 총독부 나리가 실은 앞잡이가 아니라고. 그래서 도와준 거잖아, 당신을.”
“박 훈.”
훈은 엄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승현의 목소리에도 굴하지 않고 이미 터져버린 주둥이를 마음껏 놀리기 시작했다.
“아, 이거 말하면 안 되는 거였어? 어쩌나. 그런데 뭐 이미 뱉어버린 말 주워 담을 수도 없고.”
“.........”
“보고 있으려니 답답해서 그래. 여기까지 데려 온 거면 이 사람도 같은 조직원이거나 우리랑 같은 길을 가는 사람 아냐?”
조직원? 같은 길? 퍼뜩 떠오른 생각 하나가 지용의 머리를 스쳤다.
“애물단?”
“맞았네, 내 추측. 인사해, 같은 조직원끼리.”
비밀암살단체인 애물단은 철저한 위장과 보안유지가 생명이었다. 때문에 같은 조직원이라도 자신과 연결되지 않은 이상, 상대를 알지 못했고, 얼굴을 아는 사람들마저도 그 신분이 확실치는 않았다. 잡혀서 고문을 당하는 상황에 대비한 술책이었다. 그런데 승현이 같은 애물단 조직원이었다니. 너무 큰 충격에 머리가 멍해졌다.
“그럼 두 분 인사 나누실 동안 나는 바깥에 좀 다녀올게.”
훈이 자리를 비켜준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두 사람 사이엔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설명해.”
“........”
“네 입으로 다 설명해.”
지용은 쉽게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다스리며 간신히 말을 뱉었다. 그가 애물단 조직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나도 많았다.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줘. 사람 미치게 하지 말고.”
물기를 잔뜩 머금은 눈이 승현을 붙잡았다. 예전부터 승현은 그의 부탁에 약했다. 지금처럼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주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까지 느꼈었다. 그는 다신 떠올리고 싶지 않던 과거를 머릿속으로 되짚으며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었다.
동경에서의 겨울. 그 추운 겨울은 좀처럼 끝나질 않았다. 그 때의 모든 기억들이 지금껏 자신을 혹독한 한파 속에 살게 했다. 지용의 형을 따라 동경으로 간 승현은 그 곳에서 형과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유학생 대부분은 소위 말하는 있는 집 도련님들이었는데 그들 중 절반은 시대에 맞춰 한 몫 챙겨보려는 친일파들이었고 나머지 부류들은 민중 계몽을 꿈꾸는 인텔리들, 계급투쟁을 주장하는 사회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 그리고 저와 같은 뜻을 가진 민족주의 무장 투쟁가들이었다. 형과 동료들은 국내외에서 가장 강력하게 독립 의지를 알릴 방법을 강구했고 애물단에 입단했다. 그 당시 가장 어렸던 승현은 애물단의 객원 조직원 자격으로 조직 내에서 비교적 덜 위험한 일을 맡았다.
1930년 겨울, 총독이 조선으로 떠나기 전 역에서 성대한 환송식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가 들어왔다. 조직 내부에서는 환송식을 거사일로 지정했고, 평소 사격에 능하던 형이 저격수로 뽑혔다. 그 삼엄한 경계를 뚫고 총독을 암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성공하더라도 목숨을 보장할 수 없고, 실패하면 무조건 죽음이었다.
“이건 자살과 다름없는 행위입니다. 백주대낮에 군사들이 쫙 깔린 그 곳에서 암살이라뇨. 불가합니다.”
“.........”
“설령 총독을 죽인다한들 뭐가 달라집니까? 일본은 또 다른 총독을 조선으로 보낼 것인데.”
승현은 거사 전 날까지 필사적으로 그를 말렸으나 형의 뜻은 완고했다.
“나도 안다. 당장 일본인 몇을 죽인다고 해서 나라를 되찾을 수 없다는 걸.”
“그럼 도대체 왜,”
“의지를 심어주고 싶다.”
“.........”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굳은 의지가 신념이 되고 신념이 자라나 희망이 되면 누군가는 우리처럼 움직일 거야. 그들이 움직이면 결국 세상은 변하게 될 것이야.”
형은 승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른스럽게 웃어보였다.
“잔잔한 물결이 모여 파도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승현아, 나는 그 파도를 만들어보려 한다.”
진중한 그 눈빛을 본 승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목숨을 건 신념이었다. 굳은 그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챘기에 승현은 거사가 성공하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거사 당일. 역에는 일장기를 흔든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덕배 아재가 폭탄을 터트려 주위를 분산시키면 혼란스러운 틈을 타 형이 총독을 암살하는 작전이었다. 초조한 얼굴로 퇴로를 탐색하는 승현에게 다가온 형은 그를 앞으로 잡아당겨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승현아, 네가 할 일이 있다. 저기 왼쪽 두 번째 줄 끝에 앉아있는 남자가 보이니? 콧수염을 기른 사람 말이야.”
“네.”
“잘 외워둬. 그 사람이 법무국장이야.”
“제가 무슨 일을 하면 되나요?”
드디어 형처럼 조직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형의 입에서 나온 지령은 총독 암살만큼이나 불가능한 것이었다.
“만일 일이 잘 못 될 경우, 너는 저 앞에서 법무국장을 호위해야해. 내가 그를 향해 총을 쏘면 넌 그걸 반드시 막아야 한다.”
“저보고 일본인을 호위하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형은 펄쩍 뛰는 승현의 말엔 대꾸도 않고 계속해서 말도 안 되는 명령을 이어갔다.
“저는 못 합니다.”
“아니, 해야 해. 명령이다.”
“........”
“그리고 만약 내가 산 채로 붙잡히게 되면 어렵겠지만 네가 목숨을 거둬줘. 아버지를 존경하진 않지만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 먼저 가는 것도 불효인데 더한 짐까지 얹어드릴 수는 없어서 그런다. 이건 부탁이야.”
역 내에 군가가 울려 퍼졌다. 모두가 즐거운 표정으로 일장기를 흔들었지만 승현은 도리질을 치며 눈물을 흘렸다.
“싫습니다, 못 해요. 형, 제발.”
“이런 시대에 무거운 짐을 진 채 살아가게 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넌 해낼 거야. 해내야 해, 네가 조국의 희망이고 미래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의 손이 승현의 어깨를 토닥였을 때, 커다란 굉음을 일으키며 소형 폭탄이 폭발했다. 형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지만 그는 기어코 뿌연 먼지를 뚫고 내달렸다.
영국에서 공수해온 폭탄은 그 위력을 반도 미치지 못했다. 가까이 앉아있던 간부 두 명은 황급하게 역 안으로 후송되었고, 폭탄과 함께 몸을 던진 덕배 아재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군인들과 경찰들은 군 수뇌부를 엄호하며 수상해 보이는 사람들을 닥치고 잡아들였다. 총구를 피해 도망치던 승현은 사람들 사이에 숨어있는 형을 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형은 간절한 그의 신호를 무시하며 빈틈을 파고들어 한걸음에 단상까지 달려갔다. 꽤 먼 거리였지만 형이 쏜 총알은 단번에 총독의 심장을 관통했다. 백발의 중년이 단상 위로 쓰러지고, 여기저기서 고함과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형과 눈이 마주친 승현은 저도 모르게 법무국장이 서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법무국장에게로 총구가 겨눠진 순간, 승현은 팔을 넓게 펼쳐 그의 앞을 막아섰다. 날아온 총알은 정확히 승현의 허벅지를 스쳤다.
“이 더러운 민족의 배신자!”
군사들에게 포위당한 형은 승현을 향해 일본어로 욕설을 퍼부으며 분하다는 듯 발을 굴렀다. 붉어진 그의 눈이 승현을 재촉했다. 승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품 안에 숨겨둔 권총을 꺼내 형을 조준했다. 이대로 경찰에게 끌려간다면 재판을 받기까지 얼마나 모진 고문이 이어질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질질 끌려가면서도 형은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대한독립만세!”
신호탄과 같은 함성이었다. 승현은 눈물을 꾹 참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형은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 저를 향해 환하게 웃어보였다.
승현 덕에 목숨을 부지한 법무국장은 승현이 고아라는 사실을 알고 그를 양자로 들였다. 어리고 충성스러운 개를 길러 훗날 요긴하게 쓰려는 수작이었다. 조직은 상황을 역 이용하여 승현을 일제에 협력하는 친일파로 위장시켰다. 다행히 형의 신분 또한 위장된 것이었고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기에 일본은 애물단에 관한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다.
그들은 성공적인 거사였다며 총독 암살을 자축했으나 승현에겐 모든 것이 실패였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던 스승을 잃었고, 사랑하는 동무의 형을 잃게 했다. 허벅지의 총상보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팠다. 그 날 이후 승현의 계절은 내내 겨울이었다.
혐오하는 일본인을 아버지라 부르고 일본 학교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온갖 멸시와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승현은 꿋꿋이 살아나갔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형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조국 해방만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그는 과거의 모든 기억을 잊고 독립만을 꿈꿨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단 한 명, 지용만은 여전히 잊을 수가 없었다. 반짝이는 모든 것들을 볼 때마다 조국에 있는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움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지는 날엔 자신을 채찍질하며 약해진 마음을 바로 잡았다.
“미안하다.”
미동도 없이 승현의 이야기를 듣던 지용은 입술을 말아 물고 울음을 삼켰다.
“왜 말하지 않았어?”
“.........”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구. 그것도 모르고 나는,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나는 네가 행복하길 원했다. 너는 편하게 살았으면 했어.”
“넌 지금 내가 행복해보이냐? 진짜 내 행복을 원했다면 그 때 돌아왔어야지. 적어도 나한테는 숨기지 말았어야지.”
“....그것 또한 미안하다.”
변명 하나 없는 사과에 결국 지용은 참지 못하고 서러이 눈물을 흘렸다. 미련하게 혼자 십자가를 짊어지고 고난의 길을 걸어온 그에게 느끼는 연민과 미안함, 원망. 빼앗긴 조국에서 살고 있는 슬픔과 일본에 대한 분노, 그리고 더 이상 승현을 미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 그러한 복합적인 감정들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5.
“사고 한번 제대로 치셨던데.”
이른 아침부터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훈의 집으로 찾아왔다. 울긋불긋한 멍을 달고 들어온 영도는 곧장 걸어와 지용의 침대 위로 호외를 던졌다. 신문 앞면엔 고리대금업자 야마구치 살해 기사가 커다랗게 실려 있었다.
“내 설마설마 했는데 진짜로 도련님일 줄이야. 그 덕에 아침부터 종로서 나들이 자알 하고 왔습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여 돌팔이가 도련님 좀 데려가 달라 사정을 해서 말이요.”
“돌팔이라니.”
훈은 푸석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영도를 향해 눈을 흘겼다.
“세브란스에서 최고로 잘 나가는 닥터 박 모르나? 나한테 진료 받으려고 줄 선 사람들이 지천인데.”
어의였던 증조부와 제중원 의학당에서 교수를 지냈던 아버지 그리고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훈. 사람들은 역시 타고난 의사 집안이라며 훈을 치켜세웠다.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의술 실력까지 가진 훈은 조선에서 가장 큰 세브란스 병원에 근무하며 고위 관료들을 전담해 정보를 캐내기도 했고, 다친 독립군들을 제 집에서 치료해주기도 하며 항일운동을 지원했다.
“나가면 치료해준 사례는 꼭 크게 하리다.”
“같은 조직원끼리 사례는 무슨.”
“아아, 이 도련님은 아직 정식은 아니야.”
지용은 얄밉게 말을 보태는 영도를 노려보며 그가 내미는 새 옷을 받아들었다.
“몸은 좀 괜찮고? 벌써 나갈 수 있겠소?”
“그냥 스친 거라서 괜찮아.”
“펜만 잡아본 샌님인줄 알았는데 총은 또 언제 배웠대.”
“원래 펜이 칼보다 강하다지 않더냐.”
“뭐 객원치고는 나쁘지 않았어.”
셔츠를 꿰어 입는 동작이 오늘따라 많이 더뎠다. 얇은 천이 상처를 건드릴 때마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지용은 꾹 참고 단추까지 반듯하게 채웠다.
“최승현은 어디 있어?”
“낸들 아오. 없어진 걸 보니 일찍부터 출근한 모양이지.”
편히 잠을 자지 못해 온 몸이 다 뻐근했다. 훈은 뻑뻑한 눈자위를 굴리며 시큰둥하게 말을 이었다.
“바깥에 순사들이 야마구치 암살범을 찾으러 혈안이 되어 있던데.”
“그렇겠지.”
“그렇겠지가 아니라. 웬만하면 다 낫고 찾아가는 편이 좋겠다는 거야. 큰 병원부터 동네 의원까지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니면서 총상 환자를 찾고 있어. 괜히 붙잡혀서 좋을 건 없잖아.”
승현이 있는 총독부로 곧장 향하려던 계획을 들켜버렸다. 뜨끔하여 서있자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혀를 쯧쯧 차던 훈은 쪽지에 무언가를 휘갈겨 지용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요?”
“적혀 있잖아. 집 주소.”
“.........”
“집으로 가서 기다리라구. 그 편이 안전할 테니.”
“신세를 여러 번 집니다.”
“잘 알고 있으니 됐네. 또 보고 싶은 얼굴은 아니니 다치지 말고 몸 잘 사려. 그 쪽은 너무 시끄럽거든.”
까칠한 게 흠이지만 나쁜 사람 같진 않았다. 훈에게 승현의 집 주소를 받아든 지용은 그에게 꾸벅 목례하고는 어질러진 방을 나섰다. 고작 하룻밤 같이 있었을 뿐인데 그 사이에 정이라도 들었는지 저만치서 손을 흔들며 배웅하는 흰 얼굴이 쉬이 잊힐 것 같진 않았다.
“너도 알고 있었지?”
“무얼. 아, 총독부 나리가 실은 애물단 조직원이었단 거?”
“다 알면서 어찌 나한테!”
“안 물어봤으니까. 그러는 도련님은 나으리를 어찌 아시오?”
“됐다.”
아무리 비밀결사대라지만 조직원들끼리는 좀 알고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괜히 화가 나 발걸음에 무게를 잔뜩 실었다. 그 모습이 우스워 영도는 미소를 잔뜩 머금고는 지용의 뒤를 쫓았다.
“그럼 다음 거사는 정말 총독부 폭파?”
“그 입!”
“왜 이렇게 화를 내실까.”
깐족대는 영도 때문에 상처가 더 콕콕 쑤셔오는 듯 했다. 지용이 짜증을 내든 말든 영도는 이때다 싶어 그를 방패삼아 거리에 쫙 깔린 순사들을 향해 걸쭉한 욕을 뇌까렸다.
“그러다 또 잡혀갈라.”
“그럼 도련님이 또 빼내주시겠지.”
“웃기는 소리. 이젠 너 아니어도 수장에게 닿을 방법은 많으니 꿈 깨라.”
“에이, 아닐 걸.”
의미 없는 말다툼을 더 벌일 생각은 없었기에 지용은 달라붙은 영도의 어깨를 밀어내며 조금 더 걸음을 빨리했다.
“도련님, 어디 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꽤 오래 기다려야 할 텐데. 나으리 만나려는 거 아냐?”
“알 거 없어.”
새침하기는. 느물스레 웃어 보인 영도는 몸을 살짝 틀어 지용이 지나갈 길을 내주었다. 말린다 한들 들을 성격이 아니란 건 그를 겪어오며 지독하게 깨달았던 사실이었다. 가끔 보면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하고 유약한 도련님 같다가도 한번 고집을 부리면 무섭게 앞만 보고 달려갔다. 남부럽지 않은 부를 누리면서도 당장 내일 죽어도 상관없단 사람처럼 삶에 미련 없는 태도도, 말초적 향락을 위해 사는 룸펜처럼 보이지만 실은 조국 해방을 꿈꾸는 독립투사라는 점도 모두 의외였다. 하여간 이상한 도련님이야. 멀어지는 지용의 뒷모습을 보며 영도는 좌우로 고개를 내저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하숙집으로 들어온 승현은 방 안에서 느껴지는 수상한 기운에 권총을 빼 들고는 방어 자세를 취했다. 숨을 참으며 잽싸게 문을 열고 총구를 겨눴다.
“나야, 나.”
총구 끝에 걸린 낯익은 얼굴을 보자 온 몸이 축 늘어졌다.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지 캐물을 힘조차 없었다. 그는 권총을 도로 집어넣고는 피곤한 듯 얼굴을 쓸었다.
“여러모로 놀라게 하는군.”
“아직 이야기가 다 안 끝났잖아.”
“그래, 말 나온 김에 마저 하자.”
가방을 내려놓고 지용의 앞에 선 승현은 냉담한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네놈 막 사는 건 진작 알았지만 대책 하나 없이 제정신이야? 퇴로 하나 만들어놓지 않고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해? 만약 잡히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
“네 그 오만한 치기 때문에 모두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어. 두 번 다시 그런 행동 하지 마, 절대 용서 안 한다.”
“그럴게.”
그가 하는 잔소리가 무척이나 그리웠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거린 지용은 반짝이는 눈으로 승현을 응시했다.
“앞으로 정말 최선을 다해서 잘할게. 그러니까 나도 정식 조직원으로 받아줘.”
“........”
“몇 년 전부터 용쓰고 있는데 아직도 객원 신세야. 영도 놈은 여전히 나 몰라라 하고 있고. 혹시 네가 수장한테 잘 말해준다면,”
“안 돼.”
“왜?”
도대체 애물단이 얼마나 대단한 조직이기에 진입 장벽이 이다지도 높은 걸까? 그동안 느꼈던 억울한 감정들까지 눈덩이처럼 커다랗게 불어났다.
“넌 도망치는 거잖아. 독립운동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지루하고 막막한 현실이 싫어서, 그럴듯한 핑계를 찾아 삶에서 도망치려고 하는 거잖아.”
지용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는 것을 보면서도 승현은 흔들림 하나 없이 건조하게 대꾸했다.
“애물단은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조직된 단체다. 너처럼 죽으러 오는 사람은 사양이야. 우리는 독립투사를 원하지 겁쟁이를 원하는 게 아니니까.”
“겁쟁이면 어때. 조국 해방에 보탬이 되는데 나를 쓰면 될 게 아니냐?”
“신념 없는 투쟁이 살인과 다를 것이 무엇이냐?”
“좀 솔직해지지 그래.”
“.........”
“죄책감 때문이지? 그래서 일부러 날 피해 다니고, 혼자 모든 걸 짊어지고 괴로워하고, 죄책감 덜려고 발악하는 거잖아. 내 말이 틀려?”
정곡이 찔린 승현은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가만히 고개를 떨어트렸다.
“너야 말로 도망치지 마.”
단호히 말하고 싶었으나 막상 뱉은 음성은 애원조에 가까웠다. 그가 당장이라도 등을 돌리고 달아날까 두려워 지용은 본능적으로 승현의 옷깃을 붙잡았다.
“나는 살아가는 것 자체가 빚이다.”
승현은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담담한 척 말을 이었지만 잔뜩 잠긴 목소리는 옅게 떨리고 있었다.
“형님에게 목숨을 빚졌어. 그 빚을 갚는 유일한 길은 조국해방 뿐이야.”
“그러니까 같이 해.”
“조국을 잃었고 형님을 잃었다. 너마저 잃을 수는 없어. 더 이상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아.”
“나도 마찬가지야. 다시는 너를 잃고 싶지 않아.”
지용은 멀찍이 서있는 승현을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어제 일, 반성은 하고 있지만 후회는 안 해. 그 덕에 다시 너를 얻었으니까. 이제 더 이상 널 미워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니까.”
“.........”
“승현아, 최승현.”
듣는 사람도 부르는 사람도 모두 그리웠던 목소리, 그리웠던 이름이었다. 지용은 망설임 없이 팔을 뻗어 가까이 선 승현을 끌어안았다.
“살아 있어줘서, 살아와줘서 고마워.”
“.........”
“형이 남긴 무거운 짐, 너 혼자 짊어지게 안 해. 내가 같이 할 거야. 같이 갚아나가자.”
눈물이 왈칵 치밀었다. 눈물을 참아내려 손등으로 눈가를 꾹꾹 눌러보아도 야속한 눈물은 좀처럼 들어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승현은 저보다 머리 하나 작은 지용의 어깨에 기대 서툴게 울음을 삼켰다.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에게, 그토록 듣고 싶던 위로를 받았다. 따뜻한 지용의 한 마디에 그 동안의 설움과 아픔이 모조리 씻겨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동그란 지용의 뒤통수를 감싸 안으며 힘겹게 입술을 뗐다.
“보고 싶었다.”
짧은 한 마디에 담긴 엄청난 무게를 알기에 지용은 말없이 손을 뻗어 그의 등을 토닥였다. 지금은 오직 눈물 한 방울 제대로 흘리지 못하고 타국에서 수년간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냈을 그를 위로해주고, 사랑해주고, 지켜주고 싶단 생각뿐이었다.
6.
“사격 배웠다며.”
총알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한 과녁을 들여다보던 영도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배운 거 맞아?”
“여심을 저격하는 것도 사격이라면 사격 아닌가?”
“말이나 못하면.”
장총은 긴 총신과 강신으로 사정거리가 길고 파괴력이 높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지용 같은 초보자가 다루기엔 아직 무리였다.
“도대체 야마구치는 어떻게 처리한 거야? 형편없잖아.”
영도는 지용이 들고 있던 장총을 빼앗고는 대신 한 손에 들어오는 권총을 건네주었다.
“이건 너무 폼이 안 나잖아.”
“독립 운동을 폼으로 하나. 잔소리 말고 그걸로 하쇼.”
“에이.”
“그거 도련님이 그렇게 좋아하는 신상이요. 내가 설계도면 보고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커츠탄 장전으로 파괴력도 끝내주고, 정확도도 높다고. 작다고 무시하지 마.”
영도는 마지못해 총을 받아든 지용을 제 옆에 세우고는 총을 잡는 법부터 사격 자세, 정확도를 높이는 법까지 세세하게 일러주었다.
“이것 봐, 많이 맞췄다. 내가 또 배우면 잘 해.”
“눈이 삐었어? 딱 두 개 맞춰놓고서는.”
“아까보단 낫잖아.”
같은 상황이었다면 승현은 분명 잘했다며 칭찬을 듬뿍 쏟아주었을 것이다.
“진지하게 충고하는데 도련님은 총보단 펜을 잡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첫 술에 배부르랴.”
“이번 생엔 정식 조직원 되기는 글렀다 생각해.”
저 싹퉁머리 없는 놈. 지용은 빈정대는 영도를 노려보며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오늘은 이만하고 돌아가자.”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주머니에 있는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 영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용의 뒤를 쫓았다.
“근데 참, 복장이 그게 뭐요. 꼭 구락부 놀러가는 제비처럼.”
“뭐. 독립 운동하는데 정해진 복장이라도 있냐?”
“도련님은 특히 요란해.”
파스텔 톤 쓰리피스 양복에 맥고모자까지 한 벌로 빼입은 지용을 위아래로 훑는 눈이 곱지 만은 않았다. 익숙한 시선이었다. 당장 거리로만 나가도 나라 잃은 백성이 상복을 입어도 모자랄 마당에 양복을 입고 돌아다닌다며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영도 이 자식은 은근히 보수적이야. 만약 그가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꽉 막힌 양반 놀음이나 하고 있을 게 뻔했다. 저 뺀질뺀질한 얼굴로 공자 왈 맹자 왈 읊어댈 그를 상상하자 피식 웃음이 터졌다.
“이것도 위장의 일부야.”
지용은 뻔뻔하게 대꾸하며 명빈관을 향해 차를 몰았다.
“명빈관으로 갈 거지?”
“아아, 난 오늘 들를 곳이 있어서. 명치정에 세워줘.”
“그곳엔 왜? 닥터 만나러 가?”
“응, 물어볼 게 있어서. 도련님은?”
“나도 약속이 있어서. 오늘은 늦을 거니까 기다리지 말고.”
가는 내내 산만하게 굴던 영도는 차가 멈추자마자 싸구려 양담배를 입에 물며 차에서 내렸다.
“제발 조심히 다녀. 네 놈 빼내러 종로서 가는 것도 이젠 이골이 난다.”
“도련님이야 말로 사고치지 말고.”
“썩 꺼져.”
“나으리랑 그거 꼬부랑말로 뭐라 하였지. 그래, 그 데이트 잘해.”
승현을 만난다고 한 적 없었는데 어떻게 알았지? 영도는 화들짝 놀란 지용에게 혀를 내밀어보이고는 시끌벅적한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귀신같은 놈.”
지용은 괜히 오싹해져 혼잣말을 늘어놓고는 총독부 건물 쪽으로 차를 몰았다.
전차와 인력거 자동차가 엇갈려 다니는 번잡한 경성의 밤거리. 그 중에서도 청계천 이남의 남촌은 특히나 작은 동경이라 불릴 만큼 발달되어 있었다. 밤이 되자 더 화려하게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이 경성의 거리를 밝혔다. 지용은 환한 총독부 건물을 들여다보며 꽤 오랜 시간 그 앞을 서성거렸다. 지루한 것은 딱 질색하는 그였지만 이상하게도 승현을 기다리는 일은 지루하다기 보단 설렜다. 웅장한 철문 밖으로 사람들이 나올 때마다 까치발을 들고 얼굴을 확인하느라 지루해 할 틈도 없었다.
“늦었네?”
평소처럼 늦은 퇴근을 하고 있던 승현은 정문 앞에서 불쑥 튀어나온 인영에 놀라 저도 모르게 주위를 살폈다.
“여긴,”
“걱정 마라. 위장 할 필요 없어. 어차피 요 건물에서 우리 아버지 돈 안 받아먹은 놈들은 없을 걸?”
“........”
“총독부의 개랑 친일파 아들이 붙어 다니는데 누가 의심하겠어?”
욕은 좀 얻어먹겠지만. 그는 머쓱하게 웃으며 여전히 멀뚱멀뚱 서있는 승현의 팔을 붙잡았다.
“밥은?”
“아직.”
“밥도 안 먹었어? 참 나. 양심 없는 놈들, 밥도 안 먹이고 이 시간까지 사람을 부려먹나.”
부러 과장되게 언성을 높이는 지용의 모습에 승현은 작게 미소 지었다. 제 편이 생겼다는 사실이 아직 제대로 실감 나진 않았지만 지용과 이렇게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더할 나위 없을 만큼 행복했다.
“반도호텔로 가서 스테키나 썰까? 아니면 요 근처 요릿집으로 갈래? 단골이라 잘 봐줄 거야.”
“........”
“왜 말이 없니? 먹고 싶은 거 없어?”
“하나 있긴 한데.”
“그래, 어디든 가줄테니 말만 해.”
뜸 들이며 고민하는 모양새가 나름 귀여웠다. 지용은 실실 나오는 웃음을 꾹 누르며 쾌활하게 말했다.
-
“음. 그러니까 저기를 들어가자구?”
“왜, 싫으냐?”
“아니다. 가자.”
종로의 구석진 뒷골목. 온갖 상가들이 줄 지어있는 번화가를 놔두고 승현은 굳이 빙빙 돌아 어둡고 좁은 골목을 택했다.
“다시 경성에 오게 되면 꼭 한 번 오고 싶었거든.”
허름한 국밥집 앞에 서서 중얼거리는 그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 씁쓸해보였다. 지용은 차마 문을 열지 못하고 어물거리는 승현을 대신해 힘차게 낡은 미닫이문을 열어 젖혔다.
“예, 어서 오세요.”
문이 열리는 소리에 서둘러 젖은 손을 닦으며 나오던 주인은 문 바깥에 서있는 승현을 본 순간, 부들부들 떨며 문 앞까지 달려왔다.
“오랜만에 찾아뵙습니다.”
“네 놈이 무슨 낯짝으로 여길 기어 들어와?”
“........”
“조국도 팔고, 친구도 팔고, 양심까지 팔고! 그러고도 낯바닥을 뻔뻔하게 들고 다니는구나. 그래, 대단한 총독부 나으리가 이런 낡아빠진 가게엔 뭣하러 찾아오셨대?”
중년의 여성은 눈에 눈물까지 매단 채 승현에게 악을 내질렀다.
“저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친구와 저는 국밥이나 한 그릇 할까 해서,”
보다 못한 지용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가게 주인을 진정시키려 말을 건넸을 때였다.
“당장 나가! 억만금을 준다 해도 네 놈들한테는 쌀 한 톨도 못 주니까 당장 내 가게에서 꺼져!”
억센 손이 지용과 승현을 문 바깥으로 떠밀었다. 그것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부엌으로 달려간 그녀는 바가지 가득 굵은 소금을 퍼와 두 사람을 향해 뿌렸다.
“얼씬도 하지 마. 나 원 참, 재수가 없으려니까. 퉤!”
쾅 소리가 나며 문이 닫혔다. 영문도 모르고 소금을 맞은 지용이 다시 가게로 들어가 항의하려던 때였다.
“그러지 마라.”
“왜?”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부터 어머니와 저에게 잘 대해주던 몇 안 되는 좋은 분이였다. 어머니가 변고를 당한 후에는 승현을 더 딱하게 여겨 배곯지 말고 언제든지 와서 편하게 밥 먹고 가라며 그를 다독이기도 했다. 독립운동을 하다 아들이 죽은 이후로 그녀는 일본이라면 치를 떨었다. 때문에 친아들처럼 아끼던 승현이 총독부 보안과로 발령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후 엄청난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억울하지도 않으냐?”
“감수해야지.”
승현에게서 이야기를 전해들은 지용은 허탈하게 한숨을 뱉었다. 국밥 한 그릇 얻어먹는 게 이리 힘든 일이었나? 조선인들에겐 변절자라 욕을 얻어먹고, 일본인들에겐 조센징이라 멸시받으며 두 집단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살아왔을 것이다. 조국 해방을 위해 가장 힘쓰고 있으면서 생색 한 번 낼 수 없는 그의 처지가 안쓰러웠다.
“그동안 혼자 얼마나 많은 소금을 맞은 거야?”
“그걸 다 기억하면 골 아파서 못 살지.”
“그것 참, 뭐 염전 밭도 아니고. 인생이 많이 짰겠어.”
승현은 손을 뻗어 지용의 머리에 묻은 소금들을 털어주었다.
“나랑 있으면 언제 어디서 또 소금이 날아올지 몰라. 그래도 괜찮으냐?”
“기꺼이. 소금이 아니라 총알이라 해도 감수하지.”
낮게 흩어지는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지용은 움푹 팬 그의 볼우물을 넋 놓고 바라보다 그와 보폭을 맞추며 물었다.
“그래서 함께 소금 길을 걷는 기분은?”
“밤하늘을 보며 걷는 것 같다.”
“어째서?”
“희고 반짝이는 건 같으니 소금이나 별이나 진배없지.”
“퍽 시적이군.”
은근히 스칠 때마다 닿는 어깨가 간질간질했다. 평소 같았더라면 넌지시 손이라도 한번 잡아볼 텐데 지금은 묘한 이 느낌이 좋아 지용은 가만히 걸었다.
“왜 이 일을 하는 거야?”
예상치 못한 승현의 질문이 날아왔다. 지용은 글쎄 하며 말끝을 흐렸다. 승현의 말처럼 도망치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깊게 와버린 걸까?
“모든 것을 버리고 싶어서 시작한 일인데 이상하게 지켜야 할 것들이 자꾸만 늘어가.”
“.........”
“그래서 지금은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한다. 뭐 대단한 신념 같은 건 없지만, 그게 내가 이 길을 택한 이유야.”
“그래서 자꾸 수장을 찾는 거야? 정식 조직원이 되기 위해?”
“응, 조르고 싶은데 만나기가 영 어렵네. 수장이 누군지 알고 있으면 네가 대신 전해줄 테냐?”
아무런 말 않고 입을 꾹 다무는 승현을 보며 지용은 비스듬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빈말이라도 절대 안하는 성격은 여전했다.
“난 네가 위험해지는 게 싫다.”
그의 표정만큼이나 무게가 가득 실린 음성이었다. 승현을 따라 우뚝 멈춰선 지용은 눈을 깜박이며 대답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
“그렇다한들 네가 이 일을 관둘 것도 아니잖아? 넌 그냥 네 할 일을 하고, 난 내 할 일을 하면 돼. 어차피 우리가 걷는 길은 같으니까.”
지용은 밝은 목소리를 꾸며내며 승현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니까 그만 밀어내고 네 옆에 있게 해줘. 꼭 정식 조직원이 아니라도 괜찮아. 지금처럼 객원 신분도 좋고, 친구도 좋다.”
“........”
“물론 연인이면 더 좋고.”
마지막으로 나온 말에 승현의 눈이 커졌다. 그는 아랫입술을 혀로 축이며 방금 지용이 한 말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분하기 위해 애썼다.
“무얼 그리 놀라. 왜? 사내끼리는 연애하면 안 돼?”
“........”
“싫음 말고. 데이트까지 해놓고 촌스럽게 굴기는.”
민망함이 귀 끝으로 몰려왔다. 지용은 빨개진 귀를 들키기 싫어 괜히 툭 쏘아붙이고는 승현을 지나쳤다. 하여간 목석같은 놈. 혼잣말로 툴툴대봤자 기분이 풀어질 리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 골목만 돌면 승현의 하숙집이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연약한 아가씨도 아닌 건장한 사내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있는 제 모습에 어이가 없어졌다.
“나 먼저 간다. 잘 들어가라.”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를 건넨 지용이 반대편으로 돌아섰을 때였다.
“싫다고 한 적 없어.”
“뭐?”
저도 모르게 지용의 손목을 움켜쥔 승현은 반대편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문지르며 느릿하게 대꾸했다.
“아까 네가 한 말. 그 연인이라는 거.”
“.......”
“싫지 않다고.”
머뭇거리는 모습이 막 첫사랑을 시작한 소년처럼 서툴렀다. 졸졸 뒤를 쫓아오며 머릿속으로 어떻게 말할지 고민했을 그를 상상하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너 연애 안 해봤지?”
지용은 승현을 보며 안쓰럽다는 얼굴로 쯧쯧 혀를 찼다.
“숙맥. 이제껏 연애 한 번 안 해보고 뭐했어?”
“너랑 하려고 아껴뒀다.”
지용은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승현은 그런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돌아섰다.
“잘 들어가.”
먹지 않아도 배부른 기분이 이런 것일까? 분명 뱃속은 텅 비어있는데 무언가가 꽉 들어찬 것 같았다.
“최승현!”
터벅터벅 걸어가는 승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일단 그를 불러 세웠다.
“네 어깨에 별가루 묻었다.”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어깨에 묻은 소금을 털어낸 승현은 저만치 달려가는 지용을 지켜보며 기분 좋은 듯 웃었다.
“누가 누구보고 숙맥이래.”
별을 쥔 것처럼 유난히 반짝이는 밤이었다.
7.
“여기 아예 눌러 앉을 생각인가보네.”
“이미 눌러 앉아있는데 뭘 새삼스레.”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총독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명빈관은 위장에 딱 적합한 장소였다. 고관대작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기 때문에 정보를 얻기에도 편리했고, 돈 깨나 써야 출입할 수 있는 고급 기방에서 독립 운동을 모의할 거란 생각을 하긴 어려우니 자연스레 단속도 뜸했다.
“도련님 부모님은 뭐라 안 하쇼?”
영도는 마루에 배를 깔고 누워 쿠키를 집어먹는 지용을 한심하단 눈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뭘 하든 신경 안 써. 독립운동만 안 하면.”
“참 대단한 아버지를 두셨어.”
“아침 댓바람부터 시비 걸러 왔냐?”
시큰둥한 지용의 반응에 어떻게 그를 골릴지 고민하는 사람처럼 눈매를 좁히던 영도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아침 먹으라고 깨우러 왔지.”
영도의 말이 거짓이 아니듯 기생 몇이 음식이 차려진 상을 들고 별채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웬 수고야? 생각 없대두.”
“에이, 그래도 아침을 먹어야 든든하니 힘이 나지요.”
나긋하게 웃으며 타이르는 말에 못 이겨 지용은 수저를 들어올렸다. 영도는 마루 끝에 걸터앉아 못마땅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다 냉큼 손을 뻗어 전 하나를 집어먹었다.
“안 먹겠다는 사람한테 그러지 말고 나한테나 이렇게 해줘봐라.”
“어휴, 저 가납사니. 얄미워 죽겠네.”
“정말 몰라서 묻는데 네들은 왜 이 궁도련님을 좋아하냐?”
질색하며 묻는 영도에게 눈을 흘긴 기생들은 수저를 놀리는 지용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덩치가 큰 것도, 선이 굵은 미남도 아니지만 그의 호리호리한 체형은 모던함을, 그가 즐겨 착용하는 금테 개화경은 이지적인 분위기를 더 해주었다. 게다가 지용에겐 남들한테는 없는 특별함이 있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모성애를 자극하다가도 어떨 땐 시대적 비극에 괴로워하는 시인 같기도 했고, 또 어떨 때는 소설 속 남자 주인공처럼 상대를 가슴 뛰게 만들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불완전하고 위태위태해 보이는 모습이 그가 가진 가장 큰 매력이었다.
“아무리 봐도 야들야들 곱상하게 생긴 것이 여인보단 사내에게 더 먹히게 생겼는데. 그렇지 않아?”
영도의 짓궂은 질문에 기생 하나가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지용이 짜증을 내며 숟가락을 높이 치켜들었을 때, 연향이가 별채로 황급히 달려왔다.
“언니들! 저기 패물장수가 왔대요.”
“뭐? 어디?”
연향이의 한마디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기생들이 서둘러 별채를 벗어났다. 연향 역시 지용의 눈치를 살피며 영도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달하고는 곧바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무슨 일 있는 거지? 다음 거사가 정해졌어?”
“하여간 냄새 하나는 기깔 나게 맡네.”
“지금이야 룸펜 신세지만 내가 출판 작업도 참여했었잖아. 특종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지.”
“그런데 객원에겐 비밀인데 어쩌지?”
“에라이, 치사한 놈.”
지용은 인상을 팍 쓰며 영도를 노려보다 작전을 바꿔 샐쭉 눈을 접었다.
“정식 조직원 시켜 달라 안 조를 테니 수장이 누군지만 알려줘. 나머지는 직접 만나서 내가 말할게.”
“뽀뽀 한번 해주면 알려주지.”
“뭐?”
“그 중한 정보를 입맞춤 하나 없이 알려줄 줄 알았나?”
“미친놈.”
낄낄대며 웃던 영도는 상을 물린 지용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당황해 눈을 크게 떴다.
“어어- 사내끼리 징그럽게 왜 이래!”
“내가 못할 줄 알았어? 지겹도록 하는 건데 그깟 입맞춤이 무슨 대수라고.”
“거 참 말 많네. 미싱이라도 배워야 하나, 요망한 주둥이 확 박아 버리게.”
이마를 밀치며 펄쩍 뛰는 모습을 보자 백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통쾌했다. 지용은 일부러 입술을 쭉 내밀며 도망가는 영도의 어깨를 잡아 당겼다.
“네놈도 완전 숙맥이네. 꽃밭에 살면서 여태껏 입맞춤 한 번 안 해봤어?”
“미쳤어? 빨리 안 떨어져?”
“앞으로 나한테 잘해. 말 안 들으면 뽀뽀해버린다.”
소리 내어 웃은 지용은 빨갛게 달아오른 영도의 뺨을 두드리며 상냥하게 협박을 늘어놓았다.
-
대단한 손님들이라도 온 건지 대문 앞부터 시끌벅적한 소음이 들려왔다. 곧장 영도를 찾아간 지용은 집에 들려 두둑하게 챙겨온 용돈을 내밀었다.
“낮부터 어딜 갔나 했더니.”
지용은 달에 한 번씩 만주로 보내는 군자금을 조달하고 있었다. 영도는 그가 건네준 돈을 받아들며 퉁명스레 말했다.
“나으리가 찾던데.”
“승현이?”
“응, 그래서 도련님 방 알려줬어.”
행여 아침처럼 기습 공격을 당할까 입을 꽉 틀어막고 서있는 영도를 비웃던 지용은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반색하며 곧장 별채를 향해 달려갔다.
“들어가서 기다리지 않고.”
“주인도 없는 방에?”
“예의 차리기는.”
지용은 가지런히 정리된 승현의 구두 옆에 신을 벗고는 폴짝 마루 위로 뛰어올랐다.
“안채에 총독부 놈들인 것 같던데. 너도 같이 온 거야?”
“응.”
“이런 자리 참석 안 하잖아.”
“여기 네가 사는 곳이라 그랬잖아. 너 보러 왔지.”
그에게는 꾸밈 하나 없는 말로 사람을 설레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지용은 동요하고 있단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정돈하고는 술상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내일은 뭐해?”
“일하지.”
“매일?”
“요즘 비상이라 어쩔 수 없다.”
“망할 자식들. 데이트 한 번을 못하게 하네.”
잔 가득 위스키를 채운 지용은 승현이 말릴 틈도 없이 그것을 꿀꺽꿀꺽 삼켰다.
“평소에 어떻게 데이트를 했는데?”
승현의 순수한 물음에 지용은 곰곰이 기억을 떠올렸다.
“까페에 가서 깔피스 한 잔 하기도 하구, 극장에 가서 영화도 보구. 아, 백화점 구경도 했지. 봄이면 창경원에 꽃놀이도 갔었어.”
“그 때처럼 댄스홀에서 춤도 추고?”
“뭐 가끔.”
“퇴폐적인 취미만 갖고 있네.”
“그럼 건전하게 여행이나 다녀올까? 아예 며칠 경성 밖으로 나가서 바다도 보고 오고. 어떠냐?”
“알잖아, 지금 경성을 비우진 못해.”
단호한 거절에 들뜬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그럼 네가 얘기해봐. 나랑 뭘 하고 싶은지.”
“난 그냥 이것도 좋아.”
“뭐가?”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그러니까 네가 하고 싶은 거 하자.”
“싱겁기는.”
지용은 피식 웃는 승현에게 툴툴거리고는 그가 따라준 위스키를 다시 입가로 가져갔다.
“왜 자꾸 웃어?”
“웃으면 안 돼?”
“네놈 웃기는 일이 일본군과 싸우는 것보다 어렵다더니 영도 자식 순 거짓말쟁이구나.”
그의 지적이 없었더라면 제가 웃고 있는 줄도 몰랐을 것이었다. 내가 원래 이렇게 잘 웃던 사람이었나? 승현은 자신을 되돌아보며 입안에 술을 머금었다. 이상하게 지용과 있으면 나사 하나 풀린 것처럼 웃음이 나왔다. 왜놈에게 짓밟혀 피 흘리는 조국이 아닌 꼭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처럼.
“산책 하고 싶어.”
한동안 말없이 술잔만 기울이던 지용은 풀벌레 울음소리가 나는 바깥을 가리키며 승현을 잡아끌었다.
“예서?”
“그래.”
“알았다, 가자.”
승현이 쪽마루에 걸터앉아 신발을 신을 동안 지용은 가만히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정말 많이 자랐구나. 두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도 이렇게 훌륭하게 잘 큰 그가 대견스러웠고 또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신 안 신어? 산책 가자며.”
“업어줘.”
“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자며. 업어줘.”
“애도 아니면서 어리광은.”
그의 말처럼 술 마신 것을 핑계 삼아 어리광 한 번 제대로 부려볼 심산이었다. 승현은 투박하게 핀잔을 놓으면서도 지용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지용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곧게 뻗은 그의 목을 감싸 안고서 어깨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아까 아침에 들었어. 거사가 있을 거라는 거.”
“.......”
“정확히 무슨 내용인지 나는 모르지만 분명 위험한 일이겠지?”
승현이 일정한 보폭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갈을 밟는 소리가 듣기 좋게 울렸다.
“너도 투입되는 거야?”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물었지만 떨리는 목소리까진 감출 수 없었다.
“지용아.”
지용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도 대답 않고 그의 향기를, 체온을 더 잘 느낄 수 있도록 깊게 승현을 끌어안았다.
“도망가자고 말하고 싶어.”
약해빠진 눈물샘이 또 제멋대로 시동을 걸었다. 지용은 손등으로 눈가를 꾹 누르며 심호흡했다.
“이대로 다 벗어던지고 멀리 멀리 떠나자고, 전쟁도 없고 투쟁도 없는 그런 곳으로 가서 우리 둘만 행복하게 살자고 조르고 싶다.”
“........”
“그런데 참을게.”
축축하게 젖어드는 셔츠만큼이나 물기 어린 목소리였다. 승현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지용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아프게 후벼 팠다.
“버릴 수 없지. 넌 조국을 절대 버릴 수 없으니까. 네가 조국해방만을 위해 살아가는 거 나도 다 아는데 그래도 가끔은 서러워.”
상대는 조국이었다. 감히 질투할 수조차 없는 거대한 존재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시작도 하기 전에 나가떨어진 기분은 생각보다 비참했다.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거 아니까.”
“........”
“그러니까 약속해.”
승현의 등에서 스르르 내려온 지용은 복잡한 얼굴로 서있는 승현을 제 쪽으로 돌려세웠다.
“혼자 달아나지 않겠다고. 소금이든 총이든 같이 맞겠다고 약속해.”
“.......”
“겁이 나서 그런다.”
이렇게 어리광이라도 부리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았다. 그와 있을 때마다 느끼는 행복 사이로 불안함이 스며드는 게 견디기 힘들만큼 괴로웠다. 승현은 눈물로 얼룩진 지용의 뺨을 쓸어주며 단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에겐 조국만큼이나 너도 소중해. 내가 사랑하는 이 땅에서 사랑하는 네가 조금 더 행복하길 바랄 뿐이야.”
“.......”
“이건 약속할게. 지금껏 독립만을 바라보며 살아왔어. 임무를 끝내고도 내가 그 때까지 살아있다면, 해방된 조국에선 너만을 위해 살아갈게.”
차분한 목소리가 요동치는 마음을 달래주었다. 실컷 울고 나니 어느덧 술기운은 다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부끄러움이 메웠다. 지용은 서둘러 승현의 손을 쳐내고는 별채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틀었다.
“업혀. 신도 안 신었잖아, 발 다친다.”
“됐어. 저 앞인데 뭐.”
“말 참 안 들어.”
지용을 번쩍 안아든 승현은 별채를 향해 멈추지 않고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내뱉는 숨이 그대로 얼굴에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지용은 힐끔힐끔 잘난 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창피해.”
“뭐가. 예쁘기만 한데.”
“놀리지 마!”
지용은 히죽 웃는 승현의 어깨를 주먹으로 세게 내려치며 씩씩댔다. 애처럼 질질 짜기나 하고, 투정이나 부리는 제 모습이 스스로 보기에도 꼴사나워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런데 너는 연애 많이 해봤나보다.”
지용을 마루 위로 안전하게 내려준 승현은 사과마냥 새빨개진 그를 보며 몰래 웃음 짓다 짐짓 퉁명스레 운을 뗐다.
“갑자기 왜?”
“아까 너 오기 전에 다 들었다. 네가 경성바닥 여인네들 마음 훔치는 도둑이라던데. 경성에서 알아주는 바람둥이라는 말도 있고.”
“어떤 자식이 그런 말을!”
지용은 예상가는 용의자를 머릿속으로 추리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니라며 반박하고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사교계를 드나들며 수많은 사람들과 데이트를 즐긴 것은 사실이었기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근데 네 마음 하나 갖는 건 왜 이리 힘이 드나.”
그는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 대신 푸념을 늘어놓으며 바닥에 철퍽 주저앉았다. 밝은 빛 아래서 보니까 아까보다 훨씬 더 잘생겼어. 이 와중에 눈치 없게 감탄이 튀어나왔다.
“네 마음은 언제 줄래?”
“이미 네가 가졌다.”
수많은 문학 작품 속 절절한 문장보다, 영화 속 주인공의 대사보다, 혓바닥에 버터를 칠한 사내들이 던지는 온갖 달콤하고 느끼한 말들보다 치장 하나 없이 담백한 승현의 고백이 더 가슴을 설레게 했다. 너무 좋아서 그런지 심장이 잠깐 멎었다 다시 뛰는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징그럽게.”
그러나 제 속내를 그대로 보여주기엔 무언가 부끄러워 지용은 마음에도 없는 불평을 늘어놓으며 술잔을 입으로 가져왔다.
“그만 마셔. 취할라.”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 거지.”
“취하면 또 울 거잖아.”
“내가 애야?”
입술을 삐죽이며 눈을 흘기던 지용이 시위 하듯 한 잔을 순식간에 비워냈다. 발갛게 부은 눈을 보니 어릴 적 장난감을 사겠다고 울며 조르던 어린 지용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릴 때부터 유달리 눈물이 많았던 그를 달래는 것은 늘 승현의 몫이었다. 문득 제가 없던 긴 시간동안 닦아주지 못했던 지용의 눈물들을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이 아려왔다. 자신이 느꼈던 고통만큼 형과 동무를 잃은 지용 또한 많이 괴로웠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몇 명이나 만났어?”
승현은 잠깐 머물었던 안쓰러운 시선을 거두고는 지용의 머리를 쓸어 올리며 짓궂게 물었다.
“누구를?”
“경성 황태자시라며. 몇 명이나 만났는데?”
지용은 슬금슬금 다가오는 승현을 피해 엉덩이 걸음으로 도망쳤다.
“그리 중한 정보를 입맞춤 하나 없이 말해줄까.”
“허.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 와서는.”
그가 짙은 눈썹을 살짝 구기며 낮은 목소리로 타박했다. 지용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입술 한 번 맞대는 것이 독립보다 어려울 줄이야.”
어려운 자식. 중얼대며 위스키 병을 붙잡았을 때였다. 지용의 손목을 붙잡아 병을 도로 상 위에 올려놓은 승현이 단숨에 지용을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는 지용의 턱을 가볍게 쥐고는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코끝이 스치고 마침내 입술이 닿았다. 맞닿은 입술이 불붙은 것 마냥 뜨거웠다. 노곤해지는 감각에 잠시 동안 숨을 몰아쉬던 지용은 팔을 들어 올려 승현의 목을 감쌌다. 진득한 시선이 서로를 향했다.
“어렵긴.”
달콤한 눈빛으로, 부드러운 음성으로, 따뜻한 체온으로. 지용은 너무 쉽게 단단한 마음을 녹이고, 멈춰있는 시간을 흐르게 하고, 얼어버린 제 계절을 허물어버린다.
“너에겐 항상 쉽다.”
8.
추적추적 장대비가 내리는 새벽이었다. 다급한 고함소리에 잠에서 깬 지용은 무슨 일이 벌어졌나 싶어 미닫이문을 열어젖혔다.
“도련님! 도련님, 큰일 났어요!”
땀과 빗물에 잔뜩 젖은 채로 달려온 연향이가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지용을 불러 세웠다. 평소와 다르게 그녀의 낯빛이 좋지 않았다.
“왜 그래?”
“영도 오라버니가 순사들에게 쫓기고 있어요. 어떡해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그녀가 결국 얼굴을 가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종로 경찰서 폭탄 의거는 폭탄 불발로 인해 허무하게 실패했다. 그 자리에서 붙잡힌 소식통 할배는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래도 입을 열지 않자 잔인한 순사들은 그의 네 살배기 어린 손녀를 끌고 와 협박했고 할배는 눈물을 흘리며 밤에 있을 고관대작 암살 계획을 자백했다. 할배가 말한 장소에 미리 잠복해있던 순사들은 조직원들이 나타나자마자 기습 공격을 퍼부었다. 그 자리에서 저격수 두 명이 목숨을 잃고 한 명이 붙잡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영도가 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가서 찾아보마. 혹시 모르니까 너도 잘 숨어있어.”
지용은 엉엉 우는 연향이를 달래고는 곧바로 겉옷을 챙겨 입었다. 총독부가 비상일 것은 안 봐도 뻔했기에 지용은 승현에게 가는 대신, 저번에 머물렀던 건물로 향했다.
“문 열어!”
누군가 대문에 주먹질을 해댔다. 훈은 청각을 곤두세우며 총을 들고 살금살금 현관으로 걸어갔다. 순사들이 아지트까지 알아챈 걸까 싶어 손바닥에 땀이 찼다. 가만히 문 바깥의 동태를 살피던 훈이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렸다.
“그 쪽이었어? 깜짝 놀랐잖아.”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비에 홀딱 젖은 얼굴이 보였다. 그제야 그는 굳은 표정을 풀고서 총을 뒷주머니로 가져갔다. 지용은 걸쇠가 풀리자마자 훈을 밀치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최영도!”
“도련님?”
의자에 앉아있는 영도를 보고 나서야 쿵쾅거리던 심장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오자마자 시끄럽네.”
훈은 지용에게 수건을 던지듯 건네주고는 다시 치료를 시작하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너 다쳤어?”
“어, 조금.”
“조금은 아니고 많이.”
탄탄한 근육질의 몸이 군데군데 피로 얼룩져있었다. 지용은 훈의 옆으로 다가가 엉망이 된 영도의 몸을 살폈다. 피를 잔뜩 흘린 그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얬다.
“총을 두 방이나 맞았어.”
훈의 말이 거짓이 아니란 걸 증명하듯 새빨갛게 물든 총알 두 개가 거즈 위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명색이 모던보이 꼬라지가 왜 그래? 물에 빠진 생쥐 마냥.”
“........”
“나 걱정했어? 그래서 이 비를 뚫고 달려온 거야?”
지금 그가 멀쩡한 상태였다면 능글맞게 웃는 얼굴에 주먹이라도 한 방 먹여 줄 텐데. 지용은 들고 있던 수건을 신경질적으로 던져버렸다.
“그래서 이제 어쩔 셈이냐?”
“순사들이 목숨을 걸고 날 쫓을 테니 경성 바닥에서 활동하긴 글렀고.”
“........”
“중경으로 가서 광복군에 합류할 생각이야.”
가을에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다는 소식은 들은 바 있었다.
“언제 떠나는데?”
“지금.”
경성은 위험하기 때문에 그가 거처를 옮길 거란 생각은 했지만 그 날이 오늘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갑작스러운 통보에 지용은 할 말을 잃고 입술만 달싹였다.
“너무 위험하지 않아? 너 지금 몸도 성치 않고, 게다가 검문도 심할 텐데.”
“여기 의사 양반이 도와주기로 했어.”
훈이 병을 고쳐준 환자 중에 선박을 운영하는 사업가가 있었다. 두 사람은 그의 도움을 받아 중국까지 밀항할 계획이었다.
“그러니 도련님도 설치지 말고 당분간은 몸 조심해.”
헌팅캡을 깊게 눌러쓴 영도는 외투 깃을 잔뜩 세우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 우리 도련님 놀리는 재미가 사라져서 어쩌나.”
“미친놈.”
“그만 떠들고 빨리 나와. 곧 출발해야 하니까.”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훈이 가방을 챙기고 바깥으로 걸어갔다.
“그 수장이란 작자는 대체 뭘 하는 놈이야? 일이 이렇게 틀어 질 동안 대체 무얼 했대.”
“모든 일엔 변수가 있는 법이지. 그리고 아, 이걸 알려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코앞에 수장을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니 답답해서 원.”
지용은 미간을 좁힌 채 쯧 하고 혀를 차는 영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네가 수장이란 말이냐?”
“그 먼 서양까지 유학을 다녀오면 뭘 해. 헛배웠네, 헛배웠어.”
“.........”
“나으리 말이요. 도련님이랑 붙어 다니는 그 최승현 나으리가 수장이라고, 이 답답한 사람아.”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충격에 휩싸인 지용의 뺨을 붙든 영도가 새삼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이 틀어졌으니 수장님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려 할 거야. 그 양반은 그러고도 남아.”
“.........”
“그러니까 도련님이 막아줘. 보시다시피 나는 그럴 상황이 못 되잖아.”
영도는 지용의 손바닥 위로 무언가를 올려놓고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잔뜩 뜸을 들였다.
“그동안,”
평소엔 뺀질뺀질 잘만 굴더니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마냥 입안으로 우물대는 꼴이 우스웠지만 이상하게 조그만 미소도 지어지지 않았다.
“고마웠어.”
그의 감사 인사가 꼭 영원한 작별처럼 느껴져 서글펐다. 왜 하필 이런 시대에 태어나서 고맙다는 말조차 웃으며 받지 못할까?
“어두운 취조실에 갇혀서 고문당하는 거 사실 많이 무서웠어. 아프고, 무섭고. 그럴 때마다 도련님이 나 빼내줘서 눈물 나게 고마웠어. 도련님 덕에 아직 내 명줄도 붙어있는 거야.”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차올랐다. 두 남자는 울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알면 잘 해.”
“내가 다시 돌아오면 밥이나 같이 먹읍시다.”
“겸상 안 한다며, 이 자식아.”
“생각이 바뀌었지. 물론 계산은 돈 많은 도련님이.”
그 사이에 미운 정이라도 든 모양이었다. 지용은 눈을 깜박여 그렁그렁 차오른 눈물을 떨궈내고는 영도의 등을 톡 두드렸다.
“다치지 말고 붙잡히지도 말고. 조심히 가.”
영도는 지용을 안심시키기 위해 씩 웃어 보이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해방된 경성에서 다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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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가 며칠 째 비상이었다. 애물단의 정체를 캐내기 위해 군인들까지 동원 되었다. 취조실이 모자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잡혀왔고 그들 중 대부분이 애물단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무지하다 하여 모진 고문을 피할 수는 없었다.
잇따른 승리로 기고만장해진 일본은 국가총동원령을 선포하며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신문을 폐지하고 자유와 사상을 억압하며 인적 물적 수탈을 일삼았다. 갈수록 심해지는 그들의 만행은 눈 뜨고 보기 힘들만큼 악랄했다. 이번 기회에 건방진 조센징들이 다시는 대일본제국에 도전할 수 없게 밟아버려라.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었다. 암살 실패 사건을 계기로 국내 항일운동의 기세를 꺾어버릴 생각인지 일제는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군인과 경찰들은 떼를 지어 경성 바닥을 이 잡듯 뒤지고 다녔다. 조금이라도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면 그 자리에서 체포당했다. 조선인 출신 관리들은 자연스레 수사에서 배제되었고 더 나아가 감시까지 받았다. 승현은 돌덩이가 올라간 것처럼 무거운 눈두덩이를 꾹 누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승현은 국내는 물론이요 국외까지 포함된 비밀결사조직인 애물단의 경성지역 수장이었다. 군대에 비하면 인원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학생부터 시작해서 상인, 기생, 인력거꾼까지 다양한 직업의 조직원들은 촘촘한 그물망처럼 전국적으로 잘 연결되어있었다. 그들은 위에서 내려오는 지령을 받아 임무를 수행하고 수장은 조직원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이번 거사 실패로 많은 조직원들이 잡히거나 목숨을 잃었다. 여기서 물러선다면 독립에 대한 희망은 꺾이고 그 빈자리엔 두려움과 절망이 들어앉겠지. 일제에 대한 두려움은 국내 투쟁이 어려워지는 결과를 낳게 할 것이 자명했다. 승현은 무언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서 거실로 향했다. 다이얼을 돌리는 손엔 망설임 따윈 없었다.
“모든 것은 예정대로 진행될 겁니다.”
“.....건투를 비네.”
결의에 찬 목소리를 들은 상대는 예상했다는 듯 초연한 태도로 행운을 빌어주었다. 자질구레한 이야기 없이 각자의 말만 전한 채 전화는 끊겼다. 국외에서 실력을 갈고 닦고 있는 우리 군대가 결전의 날 국내로 용이하게 진입하기 위해서는 국내의 뒷받침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승현은 구석에 세워진 폭탄이 든 가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일 아침 일찍부터 조선척식은행에서 기념행사가 열릴 예정이었다. 그 곳엔 총독은 물론 군 수뇌부와 중추원에 몸을 가담고 있는 친일 인사들까지 참석한다. 승현은 그 행사장을 마지막 거사 장소로 택했다. 애초 예정하고 있던 거사였지만 많은 조직원을 잃어 인력이 턱 없이 부족했다. 경비도 평소보다 훨씬 삼엄할 것이 분명했고, 도주로 또한 없었다. 작전에 가담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으라는 말과 같았기에 승현은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지기로 결심했다. 얼마 남지 않은 조직원들까지 사지로 몰아넣을 수는 없었다. 승현은 건물 내부의 설계도면을 꼼꼼하게 확인하며 내일 있을 거사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아직 위장이 풀리진 않았으니 자연스레 행사장으로 들어가 때를 기다리고, 폭탄을 터트리면 제 임무는 거기서 끝이었다. 끝. 이 지겨운 생활을 드디어 끝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는데 어쩐지 기분이 영 울적했다.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자꾸만 떠오르는 얼굴 때문이었다.
“내 생각해?”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승현은 책상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용이었다. 양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 나타난 그가 해사하게 웃으며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얼굴 보는 게 참 힘들어.”
“미안하다. 연락, 하려고 했는데.”
“바쁜 거 아는데 무얼.”
며칠 못 본 사이 많이 수척해진 승현의 얼굴이 안타까웠다.
“이제야 퇴근한 거야? 밥은? 굶고 있을까봐 뭐 좀 사왔다.”
“........”
“네가 그렇게 먹고 싶어 하던 국밥이야. 와서 들어.”
승현은 상을 차리는 지용을 물끄러미 보다가 천천히 그의 곁에 가 앉았다.
“조금 식어버렸는데. 다시 끓여올까?”
“됐어, 지금도 좋아.”
미지근한 국물 위로 둥둥 떠다니는 기름을 걷어낸 승현은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오늘도 소금을 맞았지 뭐야. 그 할머니 아직까지 용케 나를 기억하고 있더라구.”
“........”
“죽어도 안 팔겠다는 거 내가 막 억지로 사왔다? 그러니까 남기지 말고 다 먹어. 근데 그 할머니도 참 이상해. 죽어도 안 판다면서 고기는 왜 이리 많이 넣었대? 그래놓고 돈도 안 받더라. 더러운 돈 부정 탄다고. 참 웃기는 사람이야.”
승현은 괜한 감상에 젖는 것이 싫어 먹는 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춥고 배고프던 시절 먹었던 그 맛 그대로였지만 이상하게도 먹으면 먹을수록 배가 차긴 커녕 마음 한 구석이 뻥 뚫린 것 마냥 공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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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었던 식사가 끝나고 씻고 방으로 돌아온 승현은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있는 지용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워줘. 명빈관엔 순사들이 죽치고 앉아있어.”
“........”
“집엔 들어가고 싶지 않아.”
말을 이어가면서도 계속해서 지용의 눈은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방을 훑었다. 금방이라도 떠날 사람처럼 휑한 방을 보자 수장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할 거라는 영도의 말이 제대로 와 닿았다.
“그래.”
애써 밝은 척 하는 지용의 모습에 더 마음이 쓰였다. 문에 기대 서있던 승현은 한껏 몸을 옹송그려 앉은 지용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영도가 떠났어. 연향이도.”
“알아.”
“명빈관 기생들도 조사 받으러 끌려갔어. 아무 연관이 없어도 조사를 받으러 들어가면 몸 성히 돌아오긴 어렵다는데. 별 일은 없겠지?”
지용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아슬아슬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슬프다. 너무 슬퍼.”
“........”
“빼앗긴 조국에서 산다는 것이 이리 슬픈 일이었냐?”
처음 보는 지용의 표정에 그는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지켜보고만 있던 승현은 침을 꿀꺽 삼키며 지용의 손목을 잡아끌어 이불 위로 눕혔다.
“슬프지 않게 만들어줄게.”
내가 그리 해줄게. 다정한 목소리가 지용을 토닥였다.
“잘 자.”
승현은 흐트러진 지용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넘겨주며 지용의 얼굴 구석구석을 새기듯이 눈에 담았다. 눈을 깜박이는 찰나의 순간조차 아쉬웠다. 잊지 않으려 한참을 뚫어지게 보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지용의 이마에서부터 감은 눈, 코, 입술. 차례로 입을 맞췄다. 더 이상 미련을 가져서는 안 돼. 입술을 떼기가 무섭게 곧바로 그를 안고 싶다는 충동이 밀려왔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조금만 더 지용을 안고 있으면 정말 살고 싶어질 것 같아서였다.
밤새 내리던 비가 멎었다. 동이 트진 않았지만 방 안에는 주변의 사물이 어렴풋이 보일만큼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감돌았다. 지용은 눈을 떠 망부석처럼 앉아있는 승현의 손을 움켜잡았다.
“현아.”
“응.”
“나 다 알아. 네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지용은 영도가 전해준 거사 장소와 날짜가 적혀있던 쪽지를 떠올렸다. 바로 오늘이 그 대단한 거사일이었다.
“얼마 안 가서 일제는 패망할 거야.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 전쟁은 또 다른 전쟁을 낳고, 피는 피를 부르지. 놈들은 이미 스스로의 목을 죄고 있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날까지 기다리면 안 될까? 우리 조금만 더 기다리면 안 돼? 해방의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 힘들면, 조직원들을 다시 모을 때까지 조금만 더.”
지용은 잔뜩 잠긴 목소리로 애원했다. 떼를 써서라도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지용아.”
“응.”
“나는 내 신념은 항상 굳건하다 생각했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흔들림 없을 거라 그리 여겼다. 그런데 요즘은 잘 모르겠어. 모든 것을 잃어가면서까지 독립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
“........”
“동지들이 내 눈 앞에서 죽어나가는데 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내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 피 흘리는 그들을 외면하고, 그들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를 듣지 않으려 귀를 막지. 그 뿐이냐? 처형 명령이 떨어지면 난 지체 없이 내 동지를 향해 발포해야 해. 형을 그렇게 만들었던 그 날처럼.”
승현은 악을 내지르며 있는 힘껏 주먹으로 제 허벅지를 내려쳤다. 조국 해방이라는 커다란 대업을 위해 소중한 사람들을 너무 나도 많이 잃었다. 그런 일들이 수도 없이 반복될수록 왜, 무엇을 위해 이토록 독립을 부르짖는 건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나 힘이 들어. 더 이상은 자신이 없다. 그래서 도망치려는 거야.”
승현의 어깨가 잘게 떨려왔다. 지용은 흐느낌을 억지로 삼키며 눈물 맺힌 눈으로 쏴붙였다.
“그럼 나는?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나는? 네가 없는 이 땅에서 내가 웃으며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정녕 그래?”
“........”
“너도 겪어봤잖아. 혼자 남겨진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그걸 다 알면서 나 혼자 이 지옥에서 살아가라고? 독립이 된다한들 네가 곁에 없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 너를 잃어버렸는데 그게 어떻게 해방이야? 넌 그 지옥에서 내가 행복하길 바라는 거야? 잔인한 놈아.”
난 너에게서 독립 되고 싶지 않아. 목이 메어 듣기 싫은 쇳소리가 튀어나왔다.
“할 거면 같이 해. 난 너 혼자 절대 안 보내. 약속했잖아, 함께 하기로.”
“........”
“말했지? 난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고. 내 투쟁의 이유는 너다.”
“살아나갈 수 없어.”
“각오하고 있어.”
“고작 나 때문에 목숨을 버리겠다고?”
“세상엔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사랑도 있는 법이지.”
저 멀리서 이른 아침을 알리는 전차 소리가 들려왔다. 지용은 승현의 손을 붙잡고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
“나는 사랑하는 너와 함께 사랑하는 내 조국을 지키고 싶다.”
승현은 빨려 들어갈 것처럼 오묘한 지용의 눈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뺨에 손을 얹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이 맞닿았다. 격하고 집요한 입맞춤이었다. 몸을 틀어 승현의 무릎 위로 올라간 지용은 기다란 속눈썹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그의 등을 힘껏 껴안았다. 불규칙적인 호흡이 거칠게 얽혔다. 동이 틀 때까지 두 사람은 뜨거운 사랑을 확인하며 긴 새벽을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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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꼭 멋을 내야겠어?”
“생에 마지막 순간인데 가장 멋있어야지.”
오늘따라 유난히 더 고급스럽고 화려한 지용의 차림새를 훑던 승현은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내일이면 경성 바닥이 발칵 뒤집히겠지?”
“경성만 그러할까. 전국이 발칵 뒤집힐 거다.”
“친일파의 아들과 총독부 관리가 실은 독립투사였단 걸 알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한데.”
파장이 엄청 날 것이란 건 예상할 수 있었다. 그 충격적인 사실이 국내에 있는 수많은 독립투사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주길 바랄 뿐이었다.
“한날한시에 죽게 되면 다음 생에도 같이 태어날 수 있을까?”
“몰라.”
“저승사자를 만나거든 네가 말 좀 잘 해봐라.”
엉뚱한 지용의 말에 승현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폭탄을 터트리러 가는 사람들이라 아무도 의심할 수 없을 만큼 두 사람은 행복해보였다.
“다음 생에 같이 태어나면 무얼 하려고.”
“음, 그땐 조국도 해방되어 있겠지?”
“응.”
“그럼 해방된 조국에서 연애나 실컷 하자.”
비가 그친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승현은 가방을 들지 않은 손을 뻗어 은근슬쩍 지용의 손을 붙잡았다. 저 멀리 행사장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음 생에도 꼭 날 알아봐야 한다?”
“그래.”
“혹 네가 날 잊어버릴지도 모르니 암호라도 정해둘까?”
“무엇으로?”
눈썹을 치켜 올리며 진지하게 고민하던 지용은 마음에 든 암호가 생각났는지 개구지게 눈을 접었다. 그의 뺨 위로 여름을 닮은 싱그러운 웃음이 피었다.
“대한독립만세.”
지금 애타게 부르짖는 이 염원이 머지않아 현실이 되기를, 청춘을 바친 이 조국에 다시금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기를 기도하며. 조국 광복. 빼앗긴 빛을 되찾기 위해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빛을 삼켜버린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完.
(+)
드라마합작 때 썼던 탑뇽 경성스캔들이에요 ^.^
하드북에는 경성스캔들의 내용 중 수위상 삭제했던 부분들이 포함되어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 게시판에 올라오는 모든 글들은 하드북 프리뷰예요
좋은하루되세요 ♥
첫댓글 ㅠㅠㅠㅠㅠ 다시봐도 넘 좋아요 필굿님ㅠㅠㅠㅠㅠ 글 써주셔서 정말 늘 감사합니다ㅠㅠㅠㅠ 필굿님두 좋은 하루 되세요!!
어디선가 본 제목과글이여서 뭐지했는데 역시 다시보는거네요 ! ! ! 새해 첫날 행복한 하루보내세요!
잘보고가요 ㅜㅜ♡♡♡
헉... 마지막 부분에 너무 아련하네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7.01.07 23:27
넘 슬프네요.... 몰입감 대박이에요 ㅠㅠ
진짜 몰입해서 봤어요...최고에요..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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