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중순부터 7월 초순 사이에 이제는 '향수100리'길로 유명해진 옛 국도 37호선을 따라가다 보면 노란 멜론을 볼 수 있다.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발길이 멈춰진 이곳이 군북면 국원리 늘티 마을이다. 이곳 주민 몇 명이 직접 농사를 지어 가판을 차려 놓고 판매하는데 우선 색깔에 현혹돼 멈춘 발걸음이 맛을 보게 되면 주저 앉게 된다. 국원리를 좀 둘러봐야 겠다 싶어 살펴보니 자연마을이 세 곳이나 되고 꽤나 멀리 떨어져 있다. 늘티 마을을 지나쳐 새로난 국도 37호선으로 진입하는 도로에 다다르면 주막말이 나온다. 마을길을 쭉 따라 올라가거나 석호리 들어가는 입구에 난 길로 조금만 올라가면 안말이 숨기고 있던 속살을 내보여 준다. 산골짜기에 있어 아는 사람이 아니면 발길이 닿기 쉽지 않은, 국원리의 본동이라 불리는 안말 부터 차근차근 국원리를 돌아봐야겠다. |
군북면 국원리는 국화 '국(菊')자에 들 '원(園)'자를 쓴다. 국원리라는 지명을 언제부터 왜 쓰게 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국원리라는 이름을 주민들은 아끼고 있다는 것. 일제 때인 1914년 행정구역 일제 재정비 때 '아홉 구, 수건 건'자를 써서 구건리(九巾里)로 지명을 변경해 써왔다. 이후 내내 구건리라는 지명을 써오다 1995년 안말 마을 서당 벽면에 '국원추전'이라는 본래 지명이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해 이듬해 군 지명위원회와 주민투표 등을 거쳐 국원리라는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현재 이 마을에는 24가구 4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산골짜기에 위치해 농경지도 넓지 않고 척박해 뚜렷한 소득 작목은 없지만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특화자금을 받아 20가구 가까이 포도 농사를 짓는 단지가 조성되기도 했다. 지금은 두가구가 복숭아 농사를 짓고 네가구가 벼농사를 짓는다. 주민들은 잡곡, 옥수수, 들깨 등을 재배하며 많은 것을 내다 팔지는 못해도 큰 욕심 없이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다. 매년 정월대보름에는 마을에 있는 돌탑에서 탑제를 지낸다. 풍년을 기원하고 마을의 안녕을 염원하는 탑제는 마을 주민들을 이어주는 작지만 중요한 축제이고 의식이다.
■ 우뚝 솟은 참나무재의 추억
마을을 찾은 4일 오후 주민들이 하나둘씩 마을회관 앞에 모였다. 금방 따온 쌉싸름한 나물에 된장을 찍어 안주로 삼고 소주 한 잔씩을 나눈다. 한창 밭일이 바쁜 그 즈음 일을 얼마나 했는지 무심한 듯 묻지만 서로를 챙긴다. 마을 이야기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분위기가 무르익자 그제서야 한 마디씩 거든다.
1988년까지 10년간 이장 일을 봤다는 배경권(78)씨는 마을의 자랑거리로 100년이 훨씬 넘는 참나무를 꼽았다. 마을길을 따라 산으로 쭉 올라가면 이평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나오는데 마을의 상징, 구심점 역할을 한 참나무가 나온다. 주로 고개 넘어 이평리에 살던 사람들이 드나들던 고개여서 대청댐 수몰 이후 왕래하는 사람이 이제는 거의 없지만 주민들은 저마다 나무에 추억을 담아두었다.
'우뚝 솟은 참나무재 뒤에다 두고 앞에는 이슬봉이 우뚝 서있네. 씩씩한 청년들아 일어섭시다. 우리는 국원동 굳센 방패다'라는 가사의 마을 주제가를 차종운(62)씨가 구성지게 불렀다.
"50여 년 전 학교 다닐 때였는데 동네 청년이었던 형들이 부르던 노래에요. 참나무 있는 고개를 참나무재로 불러요. 참나무재 얘기 하니까 생각나네요. 당시 청년들이 드셌어요. 밑에 마을 이름처럼 주막이 있던 곳이라 술 마시고 옥천읍 청년들과 많이 싸우기도 했었죠. 마을 청년들이 단결심을 고취하면서 부른 노래로 알고 있어요."
참나무재는 또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즐겨 찾던 소풍 장소이기도 했다. 당시 석호리에 있던 군북국민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은 그곳이 놀이터였고 아낙들은 봄놀이 장소였으며 마을 청년들은 노래하며 술 마시는 흥겨운 무대이기도 했다. 참나무는 언제나 그들 옆에서 함께 하며 추억을 선물했다.
안말 마을에는 오래된 나무가 한 그루 더 있다. 마을 이야기보따리를 잔뜩 풀어놓은 박희석(77)씨 집에 있는 나무다. 이 나무의 품종은 돌배나무이며 역시 100년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무 중간이 쪼개져 큰 구멍이 나 있지만 그래도 큰 나무의 위엄은 잃지 않았다. 박씨는 해방 때만해도 열매가 열렸지만 지금은 더 이상 열리지 않는다. 아쉬웠지만 두 나무 모두 주민들이 아끼는 나무임에는 틀림없었다.
■ 만대영화 터와 당대발복 터
마을은 300여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처음에는 김해김씨가 마을에 정착해 살았지만 더 이상 남아있지 않고 이어서 경주이씨가 13대째 마을에 거주하며 가장 오래된 문중을 이루고 있다. 이어서 밀양박씨도 6대손까지 내려오며 마을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현재는 더 분화돼 다양한 성씨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가장 먼저 정착한 김해김씨를 마을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된 데에는 다음의 전설이 전해진다. 김씨 성을 가진 주민이 안말에서 할미성으로 통하는 꽃밭재에서 밭을 매고 있었다. 마침 이곳을 지나는 스님이 식사를 청해 대접하게 됐다. 스님은 보답하기 위해 불편한 점은 없는지 물었지만 주민은 큰 어려움은 없다고 대답했다.
스님은 "그럼 묘 자리나 봐주고 가겠다"며 만대영화(萬代榮華) 자리와 당대발복(當代發福) 자리 중 한 곳을 택하라고 했다. 주민은 당장 먹고 살기 힘든 형편이라며 당대발복 자리를 택했고 스님은 꽃밭재에 터를 정해주었다. 그곳에 묘를 쓴 주민은 부자가 됐지만 자식을 얻지 못했던 그 문중은 이 마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됐다는 이야기다.
반면 만대영화 자리는 늘티마을 아래 야산으로 전해지는데 경주이씨가 전설을 믿고 문중의 묘로 써 300여 년을 이 마을에서 살아가고 있다. 안말에는 경주이씨 사당이 있고 해마다 문중의 번성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어 옛 전설을 뒷받침해주고 있기도 하다.
■ 유해조수로 인한 농작물 피해 '큰 걱정'
최근 안말 마을 주민들의 걱정은 유해조수로 인한 농작물 피해다. 얼마 전에는 논골에 있는 정영순(62)씨 밭의 더덕과 땅콩, 고추, 옥수수, 콩 등을 멧돼지와 고라니가 헤집고 다녔다.
"요새는 오죽 먹을 게 없는지 그동안 안 먹던 땅콩 이파리까지 먹더라고요. 멧돼지, 고라니 때문에 엄청 신경 쓰여요.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동물들이 하루저녁 왔다 가면 쑥대밭이 되어 있으니 누가 농사짓고 싶겠어요. 수확기 피해방지단에서 고라니 두 마리를 잡았다는데 그나마 고마운 일이지요. 하지만 매년 되풀이되는 피해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또 하나의 걱정은 추소리에 있는 폐기물종합처리장이다. 아주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처리장이 들어선 이후 너구리와 오소리의 출현이 잦아 농작물 피해도 많고 냄새도 많이 난다. 파리도 유난히 많단다. 지난해까지 써오던 지하수에도 영향이 있었는지 물이 좋지 않았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 반장일을 보고 있는 박성오(60)씨는 그나마 지난해 12월부터 상수도가 들어와 물 걱정은 사라졌다고 했다.
"수도 써보니까 좋더라고요. 이전에는 물 받아놓고 한참이 지나면 뭔가가 침전되기도 하는 등 주민들 사이에서는 처리장이 들어서면서 지하수가 오염됐다는 말이 많았거든요. 상수도가 진작 들어왔어야 했어요."
■ 참나무를 닮은 안말 주민들
하루하루가 고난이고 근심이 떠날 날이 없지만 국원리 안말 마을 사람들은 오래된 참나무처럼 우직하게 삶을 받아들였다. 또 좋은 이웃이 있어 그들의 삶은 빛났다.
마을 노래를 불렀던 차종운(62)씨는 17년 전 사고로 걷지 못한다. 그나마 널직한 사륜 구동 오토바이에 의지해 바깥 외출을 할 수밖에 없음에도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소식통'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이웃들도 동네일에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17년 전에 관정개발 공사현장에서 척추를 다쳤어요. 그 이후에 귀향해서 낙담하기도 했지만 어떡해요, 살아야 하는데. 방구석에만 있으면 답답해서 오토바이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거예요. 또 마을에 젊은 사람이 없다보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거드는 게 전부입니다."
박성오(60)씨 역시 이웃들의 칭찬이 자자하다. 6천611㎡(약 2천평)의 밭에 복숭아를 재배하면서도 반장을 맡아 마을 구석구석 굳은 일을 도맡아 한다. 나무 보일러 때는 분이 있으면 나무도 실어다 주고 재배한 마늘도 옮겨 준다. 또 농사철에는 논에 로타리도 쳐 주는 안말에 없어서는 안 될 박 반장이다.
"기쁜 마음으로 어르신들 도와드리는 거예요. 혼자 사시는 분들 그나마 젊은 제가 안 도와드리면 누가 도와주겠어요."
안남면 청정리가 고향인 정인순(68)씨는 친정의 중신으로 국원리로 시집을 왔다. 딸 셋, 아들 하나를 다 키워두고 이제 쉴 법도 하지만 농사일을 손에 놓지 않는다. 장야주공아파트단지에서 큰 딸이 운영하는 무지개마트에 농산물을 대주고 있기 때문이다. 가지수도 여러 가지다. 1천652㎡(약 500평)의 밭에 부추, 얼갈이배추, 오이, 파, 미나리, 가지 등 다양한 채소류를 재배한다.
"큰딸 마트를 이용하는 아파트 주민들이 신선하고 맛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준대요. 비결은 다른데 있는 게 아니라 나는 우리 가족들 먹는다 생각하고 더 정성스럽게 농사짓는 거 밖에 없어요. 마트 이용하는 분들이 딸과 함께 직접 밭에 오기도 해요. 현장도 보고 일도 거들어 주고 하면서 서로 믿는 거죠. 돈만 생각하면 못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