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130) 순조 1 - 천주교 박해
(131) 순조 2 - 정순왕후의 정치
(132) 순조 3 - 홍경래의 난
(133) 순조 4 - 세도정치의 시작
(134) 순조 5 - 외세의 쓰나미
<조선왕조실록(130)> 순조 1
- 천주교 박해
순조가 등극했으나 나이가 어린 관계로 궁궐의 어른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순왕후는 왕의 즉위를 공포하는 글에서 '척사(斥邪)'를 표방 했는데, 이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예고하는 것 이었습니다.
- 지금 듣건대 사학{邪學, 천주교, 서학(西學)이라고도 함}이 불길처럼 번지고 있다.
- 수령들은 오가작통법을 닦아 밝혀 사학을 하는 자를 진멸(殄滅) 함으로써 남는 무리가 없도록 하라.
정순왕후의 말대로 이즈음 천주교는 더욱 확산되고 있었는데,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들어오는 등 교세는 더욱 팽창되어 전국에 신도가 1만을 헤아렸습니다.
정조 시절에는 노론 벽파가 여러 차례 천주교를 엄히 다스릴 것을 요구했으나, 정조는 한결 같았습니다.
- 정학이 바로 서면 서학은 힘을 못 쓰게 될것인 고로 정학에 힘쓰는 것이 해답이다.
대비(정순왕후)의 하교는 정조의 대책이 실패한 것임을 천명한 것으로, 이들의 천주교 박해는 아래와 같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 천주교는 군신간의 상하 관계를 중시하는 조선의 지배 윤리인 유교 윤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 천주교를 공부하거나 믿는 사람 중에 벽파의 반대파인 시파나 남인들이 많았으므로 정적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형조와 지방 관아에서는 곧 동시 다발적으로 천주교 신자들의 검거에 나섰고, 최초의 신부 이승훈, 정약용의 동생 정약종, 중국 신부 주문모 등 리더들과 일반 백성 등 수백 명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때 정약종의 사위 황사영이 중국으로 도망가다 붙잡혔는데, 북경의 주교에게 보낸, 글이 빽빽한 문서 한장이 조정을 경악케 했습니다.(이른바 ‘황사영 백서’)
- 청 황제를 통해 서양의 큰 배 수백척에 군사 5-6만을 보내 조선을 압박하거나 또는 조선을 직접 통치하여 서학을 자유로이 신봉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위와 같은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박해 는 더욱 가혹해졌고, 추가로 수백 명이 처형되었습니다.
대격변의 19세기를 조선은 천주교 박해로 열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131)> 순조 2
- 정순왕후의 정치
순조가 어린 관계로 수렴청정을 하게 된 정순왕후, 정순왕후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찬동하였던 벽파의 실세 김귀주의 누이로, 정권을 잡은 후 좌의정 심환지를 영의정으로 삼고 친정 6촌 오빠인 김관주를 이조참판직에 앉히는 등 벽파들을 대거 등용했습니다.
또한 함께 권력을 잡은 심환지 등은 정조의 탕평을 보좌하였던 인물들을 대거 죽이거나 쫓아내고 노론 벽파 정권을 수립하였습니다.
정순왕후는 정조가 설치했던 장용영[壯勇營~조선 후기 국왕의 호위를 맡아보던 숙위소(宿衛所)를 폐지하고 새로운 금위체제(禁衛體制)에 따라 조직·개편한 국왕 호위군대.]을 혁파하고, 규장각의 기능을 축소하는 한편, 정조도 사대부의 반발을 우려해 하지 못했던 내노비와 시노비, 즉 각 궁방, 종묘, 종친, 의정부 등에 소속된 6만 6천 여명의 노비들을 선왕 정조의 뜻이라며 해방시키는 큰일을 성사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종종 정순왕후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곤 합니다.
- 노론 벽파의 수장, 권력의 화신으로서 정조와 반대편에 서서 정조의 개혁을 방해하고, 더 나아가 심환지 등과 더불어 정조를 암살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순왕후의 구체적 정책을 살펴볼 때, 그녀는 노론 벽파에 기운 인사를 하기는 하였으나, 전체적으로 명분을 중시하고 절제를 알았던 여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선뜻 수렴청정을 거두고 물러난 점이나, 다시 수렴을 치고 등장했다가 시파 이시수의 반론을 그대로 수용해 조용히 물러난 것은 그녀의 이런 면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순왕후가 죽자 그녀를 따르던 노론 벽파는 다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실권을 잡고 있던 김관주는 정조의 뜻을 배신한 죄와 왕비의 삼간택 방해를 방조한 죄목으로 귀양 가다가 병사하고 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귀주는 이미 죽고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조를 해치려 한 죄목으로 역적의 율로 다스려졌습니다.
순조 즉위 이후인 19세기 조선은 격변의 시대였습니다.
이앙법의 보급 등으로 농업 생산력이 발전하고 화폐경제, 상품경제의 발전으로 신분제의 근본적 변화가 왔습니다.
자영농 중심의 농촌사회는 급격히 양극화의 길로 나아갔고, 자영농에서 부농으로 성장한 일부 평민들은 공명첩, 납속책 등을 통해 양반의 족보를 사 양반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이즈음에는 이미 양반이 전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양반이 아닌 백성들은 소작농, 광산 등의 임노동자 등으로 몰락해 살기가 점점 어려워졌고, 일부는 화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시대에 이르러 죽도록 일해도 먹고 살기가 어려워진 백성들이 집단적으로 관아에 대항하는 일이 발생했고, 조정은 백성들의 죽지 못할 사정을 헤아리기는 커녕 앞장선 사람들을 사정없이 효수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였습니다.
이 때 단순한 폭동 수준을 넘어 민란이라 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하니, 이것이 홍경래의 난입니다.
<조선왕조실록(132)> 순조 3
- 홍경래의 난
1811년 12월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평안도 가산에서 일군 의 무리들에 의해 저항의 기치가 올려졌습니다. 그 중심에 평서대원수라 불리던 나이 마흔의 홍경래가 있었습니다.
홍경래는 일찍이 평양 향시에 합격한 뒤 한양으로 올라와 대과에 응시했다가 낙방했습니다.
- 내 그럴줄 알았다. 합격자는 죄다 한양 권세가의 자제들. 썩어 빠진 세상이다.
홍경래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벗을 사귀고 뜻 맞는 이를 구했는데, 제일 먼저 가산 땅에서 서자 출신의 인텔리인 우군칙과 의기투합했습니다.
이어 대부호인 이희저를 끌어들이고, 인근의 부자, 지식인 장사들을 규합해 무기를 마련하고 가산의 다복동에 지휘부를 차려 은밀히 준비하더니, 이윽고 일어났습니다.
- 3년째 흉작인데다 역병까지 겹쳐 유랑자가 산천에 가득 하고 세상에 대한 원망이 하늘에 닿아있다.
이들이 광산 노동자를 구한다는 광고를 내니 굶주린 많은 유랑민들이 찾아 왔고, 그렇게 모인 이들이 초기 봉기의 주력이 되었습니다.
1811년(순조 11년) 12월 18일, 봉기군은 홍경래를 대원수로 삼고 평안도에 대한 차별과 안동 김씨, 반남 박씨 등 척족들의 득세를 규탄하면서 기치를 올렸습니다.
봉기군은 남북 진영으로 나누어 행동을 개시하였는데, 봉기 초반 봉기군의 기세는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일부가 한양으로 진격하면서 가산과 곽산 관아를 접수하였고, 관아의 창고를 열어 저장된 곡식으로 빈민들을 구휼(救恤)하고 무기 등을 빼앗아 전투력을 강화하였습니다.
그 이후 정주, 선천, 태천, 철산, 용천, 박천 등지를 접수 하였으나, 박천의 송림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봉기군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조정에서 대규모의 관군을 파견하였고, 여기 저기에서 패한 봉기군은 마침내 정주성으로 집결하게 되었습니다.
정주성에 집결한 홍경래의 봉기군은 이후 3개월 동안 처절 하고도 거칠게 저항했지만, 역량을 총집결시킨 정규 관군을 끝내 이겨낼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정주성은 함락 되었고 홍경래는 전사하였으며 악에 받친 관군은 닥치는 대로 봉기군을 학살하였습니다.
학살을 면하고 체포된 약 2,938명의 군민 중 여자와 10세 이하의 어린아이를 뺀 1,917명의 목이 그 자리에서 잘렸습니다.
홍경래의 난, 비록 궁극적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봉기였지만, 19세기 대격변의 바람이 조선 안에서도 불고 있음 을 실감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133)> 순조4
-세도정치의 시작
세도정치는 특정가문이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를 좌지우지 했던 순조 이후의 정치 형태로서, 특정 가문의 위세가 당파 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당파정치와는 구별됩니다.
또한 세도정치의 주체는 왕가와 혼인관계로 이어진 척신 가문으로서, 이런 점에서 세도정치의 조짐은 영조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나 영,정조 때 홍봉한, 김귀주, 홍국영 등의 척신이 권력을 잡기는 했으나, 이 때의 척신들은 영조나 정조의 카리스마에 눌렸다는 점과 순조 이후의 세도정치에는 벽파니 시파니 하는 당파적 색채가 소멸되었다는 점에서 그 성격이 다르다 하겠습니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순조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집권한 노론 시파는 벽파를 사실상 궤멸시켜 버렸는데, 이러한 시파의 중심에는 안동김씨, 그 중에서도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이 있었습니다.
안동김씨뿐만 아니라 온 조정이 그를 주시했고, 권력을 눈앞에 둔 김조순은 깊이 생각했습니다.
- 임금으로부터 그토록 총애를 받았던 홍봉한(사도세자의 장인)이나 김귀주(정순왕후의 동생) 가문이 왜 몰락하고 말았는가
- 모든 것을 독식하려 했기 때문이다.
왕의 국구 김조순은 실제로 순조 재위기간 내내 대제학, 병판, 이판 등 순조가 내리는 벼슬을 모두 사양했고, 원자의 유선과 요속을 추천해 올리라는 어명에도 다음과 같은 이유를 달아 바로 차자를 올렸습니다.
-신은 조정의 혹과 같은 존재로 은택이 과분하여 위아래에 미치지 못하옵고 좌우에 떳떳함이 없나이다. 추천에 참여 하라는 명을 거두어 주소서.
김조순은 이후에도 어떤 관직도 맡은 바 없었으나 이가 30년 동안 최강의 막후 실력자였음은 이론이 없습니다.
순조 32년에 그가 죽자 순조는 다음과 같이 그 죽음을 애통해 했습니다.
-그는 부지런하고 충성스러우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왕실을 위해 안으로는 지극히 정성을 다해 나를 올바르게 돕고 밖으로는 두루 다스려 진정시켜 시국의 어려움을 구했으니 나라의 오늘이 있도록 보호한 것이 누구의 힘이었는가.
죽은 그날로 순조는 그에게 영의정을 증직했고 문신으로는 최고의 영예인 충문공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습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이렇게 대접받은 신하는 조선에 없었으니, 이는 앞서 본대로 그의 남다른 처신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이와 같이 김조순이 안동김씨의 일원으로 세도정치를 편 원조이기는 하나, 세도정치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때는 김조순 사후부터입니다.
김조순이 죽자 그 아들, 조카들이 전면에 나서며 세도정치 는 막장으로 치닫게 됩니다.
<조선왕조실록(134)> 순조 5
- 외세의 쓰나미
벽파의 득세와 시파의 축출, 다시 그 반대의 상황 등 모든 과정을 지켜 본 순조는 청년기를 지나면서 어린시절 총기 와 큰 뜻을 잃고 맙니다.
순조는 더는 그 혼탁한 정치의 세계로 들어 가려하지 않았는데, 영조나 정조처럼 당파의 힘을 키웠다 죽였다 하면서 정국을 조절할 탕평의 길을 갈 자신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순조는 중요한 정치적 판단, 결정을 비변사에 모두 맡기고 정치 중심에서 한 발 뺀 채 민생이나 과거제도 개혁 등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조정을 틀어 쥐지 못한 채 벌이는 일들이 제대로 될 리가 만무했습니다.
순조는 체격이 크고 건장했지만 즉위 10년 즈음부터 자주 병에 시달렸고, 순조 20년 즈음부터는 경연도, 신하들을 불러 일을 보는 것조차 뜸해지니, 급기야 영의정 김재찬이 아래와 같이 아뢰기에 이르렀습니다.
- 한가로이 계실 때가 많지만 신하를 접견하는 일이 드물고,
- 경연을 여는 날이 적어서 책을 한 권 끝 맺을 기약이 없고,
- 백관이 나태해져서 한 가지 일도 진작시키지 못하고 각지 에 일이 산적해있으나 자문하는 것을 볼 수 없고,
- 벼슬을 위해 세도가를 찾아가는 습속이 굳어졌는데도 단속하는 바가 없으십니다.
이러한 순조에게도 즐거움이 있었으니 이는 그 아들 효명세자입니다.
순조는 효명세자의 배필로 풍양조씨 집안의 여식을 선택 했는데, 그 이후 안동김씨와 풍양조씨가 정치적 세력 투쟁 을 벌임으로써 정국이 혼란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됩니다.
한편 병약한 순조는 순조 27년에 열아홉 살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고 뒤로 물러나 나름대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효명세자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진 인재를 등용 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을 구현 하는데 노력을 기울였고, 순조는 이것이 기쁘고 고맙기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권력이 세자에게 쏠리는 것을 전혀 부담스러워하거나 질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4년 만인 스물둘에 죽으니 순조의 슬픔은 매우 컸고 용안에 웃음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졌으며 안 그래도 쇠약한 육신이 큰 슬픔을 감당할 수 없었는지 지병이 악화되어 병석에 누었다가 1834년 (순조 34년) 45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습니다. 참으로 존재감 없는 임금이었습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 연해에 이즈음부터 낯선 모양의 배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조선인들은 이 배들을 모양이 다른 배, 곧 '이양선(異樣船)'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이양선은 일찍이 산업혁명을 일으켜 부국강병을 이룬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서구 열강의 군함이거나 무장한 상선이었는데, 이양선의 조선 연해 출현은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의 세력이 동양으로 점점 밀려 옴)을 나타내는 현상이었습니다.
마침내 조선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아무런 대책이 없는 가운데 거대한 외세의 쓰나미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