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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 영광이…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개역개정판 성경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오며, ○ 내 마음이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을 기뻐합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으니, ○ 이제부터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할 것입니다.
전능하신 분께서 내게 큰일을 행하셨으니 ○ 주님의 이름 거룩하십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 대대로 구원의 자비를 베푸십니다.
주께서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습니다.
굶주린 사람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 부유한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 주님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자비를 베푸십니다.
⊙ 영광이…— 성공회 기도서(2004)
묵주(默珠, 라틴어: rosarium) 또는 로사리오는 라틴어로 장미 화관을 뜻하는 ‘로사리우스’(Rosarius)[1]에서 유래한 말로, 가장 보편적이며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성물이다. 구슬이나 나무 알 등을 열 개씩 구분하여 다섯 마디로 엮은 환(環)으로 끝에 십자가가 달린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묵주를 이용하여 기도를 하는 신앙 예절은 묵주 기도라고 일컫는다. 넓은 의미에서 묵주와, 묵주를 갖고 소리 내며(또는 조용히) 기도문을 암송하며 묵상하는 행위 모두 로사리오라고 부르기도 한다. 기도는 주님의 기도를 암송하고 그다음에 성모송열 번 암송 그리고 영광송을 한 번 암송하는 식의 순서를 되풀이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때 암송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의 행적과 관련된 묵상과 신비의 회상을 덧붙인다.
전통적인 15단의 묵주 기도의 신비는 16세기에 완성되었다. 신비는 총 환희의 신비, 영광의 신비, 고통의 신비 세 가지로 분류되었다.2002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기존의 신비에 빛의 신비를 새로 추가함으로써 묵주 기도는 총 20단의 신비를 지니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마리아론에 관한 중점의 일부인 묵주 기도를 강조하고 있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 기도》(Rosarium Virginis Mariae)와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가 개척하여 확립시킨 ‘성모 신심’이 좋은 예가 되고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교회력으로 10월 7일을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지내고 있다.
묵주 기도는 성모 마리아와 함께 드리는 가톨릭교회의 공경 가운데 하나로 여러 교황에 의해 활성화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묵주 기도의 교황’으로 알려진 교황 레오 13세는 묵주 기도에 관해 열한 편의 회칙을 작성하였으며, ‘거룩한 묵주 기도의 모후’ 축일을 제정하였다. 교황 비오 5세는 가톨릭교회의 전례력에서 10월 7일을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로 제정하여 기념할 것을 선포하였다. 가장 최근인 2008년 5월 3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묵주 기도가 새로운 봄을 체험하게 하는 가장 감동적인 사랑의 표현 중 하나라고 밝혔다. 그는 “묵주 기도는 매일 다시 살아남을 만끽하는 기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매일 체험할 수 있는 심오한 방법”이라며 “온 정성을 다해 묵주 기도를 바치면 주님과 성모님께서 평화와 화해를 주신다.”라고 말했다. 그의 전임자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 기도》를 통해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가 개척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완전한 신심’을 확립하였다. 교황 비오 12세와 그의 전임자들은 루르드의 성모와파티마의 성모에 대한 공경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으며, 가톨릭교회 안에 묵주 기도의 재흥을 불러 일으켰다.
신학자 로마노 구아르디니는 가톨릭교회에서 묵주 기도를 중시하는 것을 “그리스도를 지향한 마리아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그의 주장은 그리스도론에 내재하는 마리아론에 동조하여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스도에게 이르는 길을 간다는 마리아론의 관점을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묵주 기도를 강력하게 지지하였던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와 같은 성인들도 표명하였다. 또한, 교황 레오 13세는 묵주 기도를 성모 마리아의 삶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에 이르는 길을 찾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수단으로 여겼다.
묵주의 정확한 역사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전통적으로 1214년 프루이유의 한 성당에 있던 성 도미니코 앞에 성모 마리아가 발현하여 이단인 알비파를 무찌르는 무기로 묵주를 주었다는 전승이 전해져 오고 있다. 성 도미니코에게 나타났다는 성모 마리아에게는 ‘로사리오의 성모’라는 칭호가 부여되었다. 기타 다른 설들은 묵주의 점진적이고 계통적인 발전 양상을 암시하고 있으며,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초세기의 수사들이 날마다 시편을 150번 외우며 기도하던 중에 이를 본 평신도들이 수사들을 흉내를 내려고 묵주와 비슷하게 구슬을 이용해서 기도하던 것이 습관화되어 오늘날의 묵주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당시 평신도 대부분과 일부 수사들은 글을 읽지 못하여 기도서를 봐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의 기도를 150번 암송하는 것으로 시편 암송을 대신하였으며, 때때로 정확한 계산을 위해 매듭과 함께 구슬 150개를 실로 이은 것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중세 동안 기도 알과 함께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암송할 것을 권하였다는 증거도 있다. 7세기, 성 엘리지오는 ‘마리아의 시편’의 성모송 150번 암송을 할 수 있도록 지인에게 150개 못이 박힌 의자를 선물했다고 기록했다.
묵상하는 동안 성모송 암송을 실행한 것은 카르투시오회의 수사 프로이센의 도미닉(1382-1461)의 가르침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묵주의 유래와는 상관없이 프랑스, 플랑드르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신심을 유포시키는 데 일조한 도미니코회 사제인 복자 로체의 알라노의 설교에 의해 1460년과 그가 선종한 1475년 사이에 크게 활성화되었다.
16세기 초에서 20세기까지 묵주 기도의 기본 구조는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은 채로 있었다. 15단씩 신비를 바치기 알맞게 열다섯 개의 묵주 알이 있었다. 20세기에는 묵주 기도 매 단이 끝날 때마다 파티마의 기도를 추가하는 것이 보편적이게 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가2002년에 빛의 신비를 제정하기까지 달리 어떠한 변경도 없었다.
17세기부터 묵주는 가톨릭교회의 마리아를 다룬 성 미술에서 주요 요소로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대개 성모 마리아를 묘사한 작품에서 많이 나타났다. 무릴료의 작품들인 스페인의 프라도 미술관에 있는 ‘로사리오의 성모’ 성화와 밀라노의 산 나자로 마조레 성당에 있는 ‘로사리오의 성모’ 성상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세계 각국의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한 가톨릭 성당 가운데 몇몇은 묵주 기도를 바치고 나서 이름을 지은 것들도 있다. 예를 들면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의 ‘로사리오의 성모 대성당’과 프랑스 루르드의 ‘로사리오 대성당’,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리의 ‘노사 시뇨라 두 호사리우’ 등이 그것이다.
묵주는 성모송을 바칠 때 그 횟수를 세는 데 사용하는 물리적 도구이다. 손가락은 기도문을 암송하면서 묵주 알을 따라 움직인다. 마음속으로 기도의 횟수를 세는 것을 계속 따라가지 않아도, 마음은 신비들에 관하여 더 잘 묵상할 수 있다. 다섯 개의 마디로 된 묵주는 작은 구슬 열 개로 이루어진 다섯 단(端)으로 되어 있으며, 각 마디 앞에는 큰 구슬 한 개가 추가되어 있다. 주님의 기도는 큰 구슬을 잡고 바치지만 성모송은 1단 안에 있는 열 개의 구슬을 넘기면서 열 번을 바친다. 그런 다음에 큰 구슬마다 순서대로 그날의 신비들을 깊이 묵상한다. 일부 묵주들, 특히 수도회에서 사용하는 묵주 중에는 전통적인 묵주 기도의 15가지 신비에 따라 15단으로 엮은 것들이 있다. 5단 묵주와 15단 묵주 모두 외가닥으로 꼰 짧은 끈 앞에 달린 십자고상을 정점으로 한 개의 큰 구슬과 세 개의 작은 구슬 그리고 둥글게 연결된 묵주의 나머지 부분 앞에는 한 개의 큰 구슬이 있다. 묵주 기도는 외가닥으로 꼰 짧은 끈 앞에 달린 십자고상에서 사도신경을 바치는 것을 시작으로, 첫 번째 큰 구슬에서는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다음 세 개의 구슬을 넘기며 각각 성모송을 바치며, 다음에 오는 큰 구슬에서는 영광송을 바친다. 그리고 1단의 신비 내용에 대한 깊은 묵상이 이어진다. 비록 묵주 기도를 할 때는 구슬들을 넘기면서 기도의 횟수를 세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반드시 구슬들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고, 어떤 식으로든지 기도의 횟수를 세기만 하면 된다. 예를 들면, 손가락으로 센다든지 아니면 아무런 도구 없이 스스로 세면서 기도할 수 있다.
통상 묵주 알은 나무, 뼈, 유리, 눌러 붙인 꽃, 준보석의 돌 이를테면 마노, 흑옥, 호박 또는 벽옥 또는 값비싼 재료를 함께 넣은 산호[2], 수정, 은 그리고 황금 등으로 제작하며, 때때로 장미 콩 씨앗이나 구슬나무로 만들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묵주 알의 대다수가 유리, 플라스틱 또는 나무로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묵주 재료로 원석을 이용하기도 한다.
특수한 묵주 알은 그에 맞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재료로 만들어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예컨대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에서 성 야고보의 유골을 모신 성당의 흑옥 또는 겟세마니의 올리브 씨앗이 그것이다. 때때로 묵주 알은 성유골이나 성수를 집어넣어 만들기도 한다. 모든 축복받은 묵주는 준성사에 해당한다.
일반적인 5단 묵주 말고도 다른 형태의 묵주도 있다. 반지 묵주는 한 개의 십자가와 열 개의 돌출된 혹 장식이 있는 반지 형태의 묵주이다. 팔찌 묵주는 대개 열 개의 구슬에 십자가나 메달이 함께 있는 팔찌 형태의 묵주이다.
묵주 기도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오늘날과 같은 형태가 정해진 것은 1569년 교황 비오 6세가 발표한 칙서에 의해서이다. 이 표준에 따르면 묵주 기도는 소리기도(염경기도)와 마음기도(묵상기도)로 구성되어 있다. 소리 기도로 성모송 열 번, 주님의 기도 및 영광송 각 한 번씩 한다. 이것이 1단(端)이며 한 꿰미(꾸러미)는 5단 또는 15단으로 이룬다. 그리고 마음 기도로는 ‘환희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 등 세 개의 신비로 되어 있는데, 각 신비는 다섯 개의 묵상 주제를 이루고 있어 한 주제를 한 단마다 묵상한다.[3]
여기에다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의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 기도》(2002년 10월)를 발표하여 묵주 기도를 많이 바칠 것을 권고하면서 기존의 15단으로 구성된 묵주 기도에 새롭게 예수의 공생활에 있었던 주요 사건들을 묵상하는 ‘빛의 신비’라고 이름 지은 추가 5단을 추천하였다. 이로써 묵주 기도는 총 20단이 되었으며, 이 20단을 모두 바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묵상 요일 | 빛의 신비 추가 | 빛의 신비 추가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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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 영광의 신비 | 대림시기부터 사순시기 전까지의 주일: 환희의 신비 |
월요일 | 환희의 신비 | 환희의 신비 |
화요일 | 고통의 신비 | 고통의 신비 |
수요일 | 영광의 신비 | 영광의 신비 |
목요일 | 빛의 신비 | 환희의 신비 |
금요일 | 고통의 신비 | 고통의 신비 |
토요일 | 환희의 신비 | 영광의 신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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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매듭(그리스어: Kομποσκοίνι, 러시아어: Чётки)은 나무 또는 실크 등의 재질로 만든 것으로 매듭이 있는 고리이다.
기도 매듭은 동방 정교회의 수사들과 수녀들(때로는 평신도들)이 휴대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며, 예수 기도 또는 경우에 따라서 다른 기도를 바칠 때 기도하는 숫자를 세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의 기도 매듭은 50번 내지는 30번 매듭을 짓지만, 역사적으로 기도 매듭의 전형적인 형태는 100번을 매듭짓는 것이다. 손가락에 걸고 기도하도록 10번 매듭진 기도 매듭도 있다. 주로 암자에 거주하는 은수자들은 대부분 300번 내지는 500번의 매듭이 있는 기도 매듭을 사용한다.
기도 매듭에는 매듭으로 이루어진 십자가와 매듭 고리가 이어져 있으며, 쉽게 셈을 할 수 있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보통 10매듭 내지는 25매듭마다 매듭과 매듭 사이에 구슬이 있다. 길이가 긴 기도 매듭은 주로 십자가 매듭 끝에 술이 달려 있다. 술을 단 목적은 자신의 죄를 뉘우친 후 마음에 감동을 받아 흐르는 눈물을 닦기 위한 것이다. 또 다른 의미는 십자가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하늘나라의 영광을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 기도(그리스어: Η Προσευχή του Ιησού)는 동방 정교회 내에서 가장 보편화되어 있는 짧은 기도이다. 기도문의 내용은 무척 짧고 단순명료한데, 다음과 같다.
“ | Κύριε Ἰησοῦ Χριστέ, Υἱὲ τοῦ Θεοῦ, ἐλέησόν με τὸν ἁμαρτωλόν. | ” |
“ |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 ” |
예수 기도는 동방 정교회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대중적인 기도이며, 종종 개인이 금욕 생활을 할 때 계속해서 암송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 기도는 헤시카즘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은수자들의 전통적인 기도 생활의 필수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예수 기도의 역사적인 기원은 시나이의 헤시카즘(Sinaite Hesychasm)에서 유래되었으며, 사막 교부들의 관상적 전통을 통해 전승되다가 14세기 전후 비잔틴 시대[1]에 제도권 동방 교회로 유입된 것으로 본다. 동방 정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 가운데에 헤시카즘이 포함됨에 따라 예수 기도 역시 헤시키아적 영성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수련 방안으로 권장된 것이다. [1] 동방 정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예수 기도의 성경적인 기원은 사도 파울로스의 초기 서신인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 기록되어 있는 "늘 기도하십시오"라는 권고에 따른 것이다.[2] 또한, 예수의 산상수훈 가운데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는 예수의 주문에 합치하기 위한 기도이기도 하다. [2] 절대적 고요와 평화의 상태인 헤시키아에 도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오는 기도는 빈말을 되풀이 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단순한 형식을 통해 마음의 단순성을 꾀하고 예수의 이름이 가진 능력을 힘입어 정념을 배제하여 단순한 마음 상태인 헤시키아에 돌아가게 도와주는 기도가 바로 예수 기도인 것이다.[1]
예수 기도의 형태가 최초로 형식화 된 것은 14세기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였던 칼리스토스 1세였다. 그가 헤시키스트를 위한 생활 규범에서 최초로 제시한 예수기도의 형태는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로서, 여기에서는 "죄인"(τον αμαρτωλόν)이라는 단어가 빠져 있었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 루가의 복음서 18장 13절의 기도문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와 자연스럽게 융합되어 "죄인"이 추가되었다.
1. 예수 기도는 신-인간이라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동시에 선언하고 있다.
즉, 기도의 전반부인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에서, 인간의 이름 "예수"는 마리아에게서 난 사람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표현하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통해 신의 아들로서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2. 삼위일체 세 위격을 암시한다.
삼위를 구성하는 성부와 성자가 기도에서 외현적으로 드러남은 분명하다. 한편, 사도 파울로스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2장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예수 기도의 전반부에 나오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분은 성령에 대한 암시를 포함하는 것이다.
3. 내향적이면서 외향적인 기도이다.
이 기도는 소리를 내어 반복되는 육체적 기도라는 점에서 외향적인 성격을 지니면서, 동시에 내향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쪽으로 편향되기 쉬운 외향과 내향 그리고 지성과 마음의 통합을 지향하는 묘미를 지닌 기도라고 할 수 있다
Frank Duf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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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vant of God Founder, Legion of Mary | |
Born | Francis Michael Duff 7 June 1889 Dublin, Ireland |
Died | 7 November 1980 (aged 91) Dublin, Ireland |
Venerated in | Roman Catholic Church, esp. among members of the Legion of Mary |
Servant of God Francis Michael "Frank" Duff (7 June 1889 – 7 November 1980) was a native of Dublin, Ireland, the eldest child of a wealthy family. He is best known for bringing attention to the role of the laity during the Second Vatican Council of the Roman Catholic Church, and for founding the Legion of Mary.
Frank Duff was born in Dublin in 1889, the eldest of seven children of John Duff (died 23 December 1918) and his wife, Susan Letitia (née Freehill; died 27 February 1950).[1] The family lived at St. Patrick's Road, Drumcondra, Dublin. Duff attended Blackrock College, and, in 1908, entered the Civil Service, and was assigned to the Irish Land Commission.[2]
Six years later, aged 24, he joined the Society of St. Vincent de Paul,[3] and was exposed to the real poverty of Dublin of that time. Many who lived in tenement squalor were forced to attend soup kitchens for sustenance, and some of the natural consequences of abject poverty, alcoholism and prostitution were rife in Dublin. Duff joined and soon rose through the ranks to President of the St. Patrick's Conference at St. Nicholas of Myra parish. Duff, having concern for the people he saw as materially and spiritually deprived, got the idea to picket Protestant soup kitchens[why?] and to set up rival Catholic soup kitchens. He and Sergeant Major Joe Gabbett[who?], who had already been working at discouraging Catholics from patronizing Protestant soup kitchens, over the years succeeded in closing down two of them.[4]
In 1916, aged 27, Duff published his first pamphlet, Can we be Saints?, in which he expressed the conviction that all without exception are called to be saints, and that through Christian faith all persons have available the means necessary to attain such sainthood.[2]
He briefly acted as private secretary to Michael Collins, the chairman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and Commander-in-chief of the National Army.[5] In 1924, he was transferred to the Department of Finance. He eventually retired from the Civil Service in 1934 to devote all of his time to the Legion of Mary.[6][7] [5]
Inspired by St. Louis de Montfort's True Devotion to Mary, he founded the Legion of Mary.[8] Along with a group of Catholic women and Fr. Michael Toher, a priest of the Dublin Archdiocese, he formed the first branch of what was to become the first praesidium of the Legion of Mary on 7 September 1921. From that date until his death, with the help of many others, he guided the world-wide extension of the Legion.[5]
On 7 September 1921, Duff founded the Legion of Mary. This is a lay apostolate organisation at the service of the Roman Catholic Church, under ecclesiastical guidance. Its twofold purpose is the spiritual development of its members and advancing the reign of Christ through Mary. The first legionairies were women. Today, the Legion of Mary has an estimated four million active members -- and 10 million auxiliary members -- in close to 200 countries in almost every diocese in the Catholic Church.[8]
In 1965, Pope Paul VI invited Duff to attend the Second Vatican Council as a Lay Observer.[2] Duff made promotion of devotion to the Sacred Heart of Jesus a part of the Legion's apostolacy. He took to heart the words of Our Lord to Saint Margaret Mary Alacoque: "My Heart is so inflamed with Love for men that it is no longer able to keep within itself the flames of its burning Love. It must make itself known unto men to enrich them with the treasures it contains".[9]
Duff wrote the following prayer:
Duff died at age 91 on 7 November 1980 in Dublin, and was interred in Glasnevin Cemetery, Dublin. In July 1996 the Cause of Duff's canonisation was introduced by the Archbishop of Dublin, Desmond Cardinal Conn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