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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일 완역 Hyperreflexivity 변역--원문Fuchs(2010).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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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speculative philosophy, vol. 24, no. 3, 2010 Copyright © 2011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University Park, 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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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fuchs
The Psychopathology of Hyperreflexivity
Thomas Fuchs
universität heidelberg
The structure of human embodiment is fundamentally characterized by a polarity or ambiguity between Leib and Körper , the subjective body and the objectified body, or between being-body and having-a-body.
인간 결합성(human embodiment)의 구조는 주관적인 몸(subjective body, Leib)과 객관화된 몸(objectified body, Körper), 또는 존재하는-몸(=살아가는 몸, being-body)과 소유하는 몸(having-a-body) 간의 양극성 또는 모호성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This ambiguity, emphasized, above all, by Helmuth Plessner and Maurice Merleau-Ponty, is also of crucial significance for psychopathology.
모두를 통털어서, 특히 Helmuth Plessner와 Maurice Merleau-Ponty에 의해 강조된 이 모호함은 또한 정신병리학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Insofar as mental illnesses disturb or interrupt the unhindered conduct of one’s life, they also exacerbate the tension within embodiment that holds between being-body and having-a-body.
정신질환이 개인의 삶의 방해받지 않는 행위를 교란하거나 방해하는 정도만큼, 정신질환은 살아가는 몸과 소유하는 몸을 묶어주는(=잡아주는, holds) 결합성 내의 긴장을 증가시킨다(exacerbate).
In mental illnesses, there is a failure of tacit mediations upon which one’s bodily being-toward-the-world is based.
정신질환의 경우, 그것을 통해(upon which) 개인이 몸으로 세상을-향해-존재하는 기초가 되는 무언의 중재(tacit mediations)의 실패가 있다.
Instead of serving as a medium of relating to the world, the body makes itself noticeable as disturbing or resistant.
세상과 관계하는 매개체로 기능하는(serving) 대신에, 몸은 그 자체를 명백히 교란시키거나 저항적인 것으로 만든다.
What was taken for granted suddenly becomes unfamiliar or strange; what was implicit becomes explicit and enters the focus of attention.
어떤 것이 갑자기 친숙하지 않거나 낯선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또한 암묵적인 어떤 것이 명백해지고 주의의 초점에 들어온다.
This explication of the implicit always means a certain estrangement from oneself and, as such, already results in increased self-observation.
암묵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분석(explication)은 항상 자신으로부터의 어떤 소외(estrangement)를 의미하며, 마찬가지로, 이미 증가된 자기-관찰의 결과이다.
It is even intensified by processes of reflection that revolve around the lost sense of self-congruence and in which the patients try to bridge over or compensate the break incurred.
이것은 심지어 자기-일치감을 공전하는(revolve around) 자각의 과정을 증폭시키며, 그 속에서 환자는 초래된 붕괴를 타개하거나 보상하기 위해 노력한다.
In fact, they generally only achieve the very opposite.
사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매우 반대되는 것을 성취할 뿐이다.
Self-centeredness and hyperreflection are thus, on the one hand, the result of the illness, but on the other hand, they often additionally contribute to it.
자기-중심성과 고조된 자각은 따라서 한편으로 병의 결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종종 그것에 추가적으로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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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s, explication of the implicit, self-alienation, and hyperreflexivity are fundamental phenomena in psychopathology.
따라서 암묵, 자기-소외, 그리고 고조된 자각의 분석(explication)은 정신병리의 근본적인 현상이다.
In order to explore their connection in more detail, in what follows, I first explain the implicit or, as one can also say, the transparent structure of embodiment and its relation to reflexive consciousness.
그들의 연결성(connection)을 보다 세부적으로, 또한 어떤 일이 뒤이어 일어나는지를, 탐색하기 위해, 나는 먼저 암묵적인 것, 또한 누군가 말할 수 있는, 결합(embodiment)의 투명한 구조(transparent structure)에 대해 설명하고, 그것과 자각적 의식(reflexive consciousness)의 관계를 설명한다.
In the second part, I will describe the phenomena of explication and hyperrefl ection by means of psychopathological examples.
두 번째 파트에서, 나는 분석(explication)과 고조된 자각의 현상을 정신병리학적 사례의 수단으로 기술할 것이다.
The Implicit Structure of the Body
몸의 암묵적 구조
The implicit structure of embodiment may be explained in the following way: The intentional arc of our perception or of our action is aimed at what is in the focus of our attention. 1
결합성(embodiment)의 암묵적 구조는 다음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우리의 지각 또는 우리의 행위의 의도적 아크(arc)는 우리의 주의의 초점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주 1) (?)
This arc is formed by the combination and integration of individual elements—for example, of the letters of which a read text is composed, the individual facial features from which a complete mimic impression results, or of the individual movements that altogether lead to the complete acts of cycling or dancing.
이 아크(arc)는 개별적인 요소들의 결합과 통합에 의해 형성되는데, 예로써 읽는 책을 구성하고 있는 문자들의, 그것으로부터 전적으로 흉내내는 인상이 초래되는 개별적인 얼굴특징들의, 또는 순환하거나 춤추는 완전한 행위를 다함께 가져오는 개별적인 움직임의 결합과 통합에 의해 형성된다. (?)
It is this integration of single elements into gestalten of perception or movement that is realized in the medium of the body, without the need for an awareness of the individual elements.
이것이 몸이라는 매개체(medium) 속에서, 개별적인 요소들에 대한 인식의 필요 없이, 단일한 요소들을 인식되는 지각 또는 움직임의 게슈탈트 속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Thus the body forms the intentional arc of each perception and action in a tacit and implicit manner.
따라서 몸은 무언의 암묵적인 방식으로 각각의 지각과 행위의 의도적 아크(arc)를 형성한다.
In other words, it is transparent with regard to their intentional object.
달리 말하자면, 이것은 그것의 의도적 대상과의 관계에서(with regard to) 투명하다.
Michael Polanyi (1967) has analyzed this structure of embodiment as “implicit” or “tacit knowledge.”
Michael Polanyi(1967)는 결합성의 이 구조를 “암묵적” 또는 “무언의 지식”의 구조로 분석하였다.
It is based on processes of gestalt formation that enable us to understand wholes and meaningful complexes instead of individual elements.
이것은 개별적인 요소들 대신에 전체적이고 의미있는 복잡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슈탈트 형성의 과정에 기초한다.
We understand the facial expression of another person directly without being able to say which features it amounts to.
우리는 타인의 얼굴표정을 그것의 총합이 어떤 특징인지를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이해한다.
We hear and understand the sentences someone speaks but not the individual sounds; in other words, we hear the sounds as sentences.
우리는 누군가가 말하는 문장을 개별적인 소리들로써가 아니라 문장으로 듣고 이해한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소리를 문장으로 듣는다.
Similarly, we feel the structure of an object by perceiving our feeling fingertips as the surface we are feeling.
유사하게, 우리는 대상의 구조를 우리가 느끼는 손끝의 느낌(our feeling)에 대한 지각에 의해 느낀다.
A blind man feels Braille print as words; he reads with his feeling fingers.
시각장애인은 점자를 단어로 느낀다. 즉 그는 그의 손가락 느낌으로 읽는다.
That is, in Polanyi’s terms, through the proximal, which remains in itself implicit or transparent, we are directed to the distal in the focus of our awareness.
즉 Polanyi의 용어로, 그 자체가 암묵적이거나 또는 투명한 채 남아있는 근접한 것(proximal)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인식의 초점에 있는 멀리 있는 것(distal)을 지향한다.
Embodied consciousness, by means of a concept of Helmuth Plessner’s, can also be characterized as “mediated immediacy” (vermit- telte Unmittelbarkeit ).
결합된 의식은, Helnuth Plessner의 용어에 따르자면, 또한 “중개되는 즉각성” (vermit- telte Unmittelbarkeit )으로 특징화될 수 있다.
The body mediates between us and the world b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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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mains transparent itself, and thus, our relationship to the world becomes immediate.
몸은 우리와 세상을 중개하지만 그 자체는 투명한 채로 남아있으며, 따라서 세상에 대한 우리의 관계성은 즉각적이 된다.
On the other hand, this mediation cannot be taken for granted; it is rather prone to various disorders.
한 편으로, 이 중개는 부여되는 것을 받지 못한다. 즉 그것은 다양한 장애들이 되는 경향이 있다.
Mere clumsiness or inability in dealing with objects makes us conscious of the body as a cumbersome instrument.
대상을 다루는 단순한 서투름 또는 무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성가신 도구로서의 몸을 의식하게 만든다.
In illness, the body makes itself felt in an unpleasant way, as a burden or as an obstacle: The otherwise transparent medium becomes opaque.
질병에서, 몸은 그 자체를 마치 짐이나 또는 방해물처럼 불쾌한 방식으로 느끼도록 한다. 즉 다른 경우에는(otherwise) 투명한 매개체(medium)가 불투명한 것이 된다.
Sensory impairments or motor paralyses, indeed even brain lesions of the most varied kinds, can reduce or remove certain means of access to the world that the body otherwise opens up.
감각 손상 또는 운동 마비는, 사실 심지어 가장 변화무쌍한 종류의 뇌 병변(brain lesions) 조차도, 다른 경우에는(otherwise) 개방되어 있는 세상에 대해 접근하는 어떤 수단을 감소시키거나 제거시킬 수 있다.
After all, serious mental illnesses can disturb the mediating function of the body and its overall transparency.
결국, 심한 정신질환은 몸과 그것의 전반적인 투명성의 중개기능(the mediating function)을 혼란되게 할 수 있다.
In that case, the immediacy of the relationship to the world is lost, and a more or less profound alienation arises. 2
그 경우에, 세상에 대한 관계성의 즉각성(immediacy)은 상실되며, 다소간에 심각한 소외(alienation)가 발생한다. (주 2)
Reflexive consciousness, that is, self-directed deliberation, serves basically to close the gap that has emerged in the implicit mediations by means of new connections—and to repair the breaks, so to speak, that have occurred in embodiment.
자각적 의식은, 즉, 자기-지향적인 숙고(deliberation)는 새로운 연결의 수단에 의해 암묵적 중개 속에서 출현하는 틈을 기본적으로 근접시키는 기능을 하며, 그리고 이른바 결합 속에서 발생하는 깨어짐(the breaks)을 수리하는 기능을 한다.
Conscious awareness can establish and guide new ways of dealing with the world until they have taken on the character of habits and have “become second nature to us.”
의식적 인식은, 그것이(=세상에 대처하는 새로운 방식이) 습관의 특징을 취하고 “우리에게 이차적인 속성이 되게” 될 때까지, 세상에 대처하는 새로운 방식을 확립하고 인도할 수 있다.
By means of exercise and accustoming oneself, the body incorporates new abilities.
연습과 자신에게 익숙해지는 방법(means)에 의해, 몸은 새로운 능력을 일체화한다(incoporates).
Characteristic of success is an experience of spontaneity or “on its own,” which allows one to dedicate oneself to bodily enaction, to surrender, so to speak, to one’s own embodiment.
성공의 특징은 자발성 또는 “그것 자체에 입각한” 경험이며, 이것은 자신을 몸적인 규칙화(enaction)에, 이른바, 자신의 결합성에 헌신하게 허용한다.
The dancer has learned a new figure and can dedicate herself to it completely.
댄서는 새로운 모습을 학습하며 자신을 그것에 완전히 헌신하게 할 수 있다.
The pianist has practiced a new passage that he can now modulate freely, listening to himself, so to speak.
피아니스트는 새로운 악절을, 말하자면, 그가 듣기에, 그가 이제 자유롭게 조율할 수 있게 연습할 수 있다.
Forgetting oneself is the mark of successful bodily enaction.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은 성공적인 몸적인 규칙화(enacting)의 표식(mark)이다.
The body has become transparent for a new ability, so that focal consciousness can withdraw from the action and can be directed toward the distal aim.
몸은 새로운 능력에 투명하게 되며, 그래서 초점적 의식은 행위로부터 철수될 수 있고 원거리 목표(distal aim)를 지향할 수 있다.
“It is a general principle in psychology,” as William James writes, “that consciousness deserts all processes where it can no longer be of use” ([1890] 1950, 496).
William James가 쓴 것처럼, “의식은 더 이상 소용없는 모든 과정을 버린다는 것이 심리학의 일반원리이다.” ([1890] 1950, 496).
Thus, under conscious guidance, new capabilities are acquired until one has fi nally forgotten how exactly one does what one does.
따라서, 의식적인 지도하에서, 새로운 역량(capabilities)이, 최종적으로 자신이 행한 것을 자신이 정확히 어떻게 했는지 잊어버릴 때까지, 획득된다.
On the other hand, reflexive consciousness, the turning back of attention to the process of life itself, can also exercise an analytical, decomposing effect, as it were, on the implicit couplings of embodiment.
한 편으로, 삶 자체의 과정으로 주의를 되돌리는, 자각적 의식은 또한,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as it were), 결합의 암묵적 짝짓기에 분석적이고 분해하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Then we can literally not see the forest for the trees—a phenomenon that I would describe as the explication of the implicit.
그렇다면 우리는 나무의 숲을, 즉 내가 암묵에 대한 분석이라고 기술했던 현상을, 문자적으로 볼 수 없다.
Let us look at some examples.
몇 가지 예를 보도록 하자.
If we pronounce a familiar word a few times and, at the same time, pay attention to the mouth movements or syllables, it suddenly seems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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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 meaningless.
만일 우리가 친숙한 단어를 몇 차례 발음하면서, 동시에, 입 운동과 음절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것은 갑자기 낯설거나 의미 없이 느껴진다(seems).
The implicit coupling between syllables and meaning has been transitorily dissolved.
음절과 의미 간의 암묵적 짝짓기는 덧없이 용해된다.
A perceived facial expression is lost or distorted if one pays attention to single emerging features.
만일 우리가 출현하는 하나의 특징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면, 지각된 얼굴표정은 사라지거나 왜곡되게 된다.
If one examines a text for printing errors, one can scarcely pay attention to the meaning of the text at the same time.
만일 우리가 책에서 인쇄오류를 검토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책의 의미에 주의를 좀체로 기울일 수 없게 된다.
Similarly, if we concentrate too much on it, a body part no longer functions as an element of implicit ability.
유사하게, 우리가 그것에 지나치게 집중하면, 몸의 부위는 암묵적 능력의 요소로써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한다.
A musician who pays attention to his individual fingers during a passage will easily make a mistake, just as one can stumble if one is overly concerned with the individual steps when walking downstairs.
악절을 연주하는 동안 자신의 개별적인 손가락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음악가는 쉽게 실수를 할 것이며,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계단을 내려갈 때 개별적인 발걸음에 지나치게 관심을 두면 우리는 넘어질 수 있다.
In general terms, the backward turn of attention from the distal to the proximal, from meaning to the carrier of meaning, frequently leads to a disintegration of habitual, natural enactions.
일반적인 말로 하자면, 멀리 있는 것(distal)으로부터 가까운 것(proximal)으로, 의미로부터 의미의 전달수단(carrier)으로, 주의를 반대로 돌리는 것은 종종 습관적이고 자연적인 규칙화(enactions)의 분열을 가져온다.
The transparency of the bodily medium gets lost, and the familiarity of the things, the readiness to hand in the accustomed dealings, gives way to irritation and alienation.
몸적인 매개체의 투명성의 상실, 그리고 사물의 친숙성, 익숙한 조치들에서 손의 준비성의 상실은 초조(irritation)와 소외(alienation)의 방식을 가져온다.
Focused attention can be particularly detrimental if directed at bodily enactions that are not subject to conscious control and, as such, cannot be “made.”
초점화된 주의는 의식적 통제에 속하지 않는 그리고, 이런 식으로, “만들어”질 수 없는 몸적인 규칙화(enactions)를 지향할 때 특히 해롭다.
Examples are falling asleep, laughing and crying, sexual arousal, and even giving birth.
예를 들자면 잠들기, 웃고 울기, 성적 흥분, 그리고 심지어 출산하기이다.
They happen “by themselves,” that is, they arise from a source of embodied spontaneity. 3
그것들은 “그 자체에 의해” 발생하는데, 즉 그것들은 결합된 자발성의 원천으로부터 일어난다. (주 3)
Volitionally one can, at best, bring about a situation in which such enactions come about.
의지적으로는 우리는, 기껏해야, 이러한 규칙화(enactions)가 나타나는 상황을 가져올 뿐이다.
If they are directly intended, this usually leads to their inhibition or blockage.
만일 그것이 직접적으로 의도된다면, 이것은 항상 억제 또는 방해를 가져온다.
A further insight is to be gained here: reflexive consciousness is not capable of, so to speak, going back to the source of embodied enactions, either spatially or temporally.
추가적인 통찰은 여기에서 얻어진다. 즉 자각적 의식은, 말하자면, 공간적이거나 또는 시간적이거나 간에, 결합된 규칙화(embodied enactions)의 원천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다.
Spatially the directions of the body start from a source that cannot be localized.
공간적으로 몸의 방향은 그것이 위치할 수 없는 원천으로부터 출발한다.
My body always remains the zero or central point of orientation in space; I am unable to bring it before me.
내 몸은 공간 내에서 지향의 영점 또는 중심점에 항상 위치한다(remains). 즉 나는 그것을 내 앞으로 가져올 수 없다.
I never see myself as someone seeing.
나는 결코 누군가가 보듯이 나 자신을 볼 수 없다.
Moreover, I also never see myself as others see me.
더욱이, 나는 또한 결코 타인이 나를 보듯이 나를 볼 수 없다.
Kleist, in his writing “Über das Marionettentheater” (“On the Marionette Theater”), relates a story of how the glance of the other brings about a break in embodiment and cancels the naturalness of prereflexively being oneself. 4
Kleist는, “마리오네트 극장에서”라는 그의 저서에서, 어떻게 타인의 시선이 결합성을 붕괴시키고 전자각적인 자신의 존재의 자연스러움을 취소시켰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주 4)
Similarly, Luigi Pirandello describes in his novel One, No One and One Hundred Thousand (1992) a grave psychic crisis into which the protagonist gets when he becomes aware one day of the fact that how his face is seen is completely up to others and that for himself he must always remain different from how he appears to others.
유사하게, Luigi Pirandello는 그의 소설 “하나, 하나도 아니지만 수 억 개의 하나”에서 주인공이 어느 날 그의 얼굴이 보여 지는 방식이 전적으로 타인에게 달려있고 그 자신의 경우에는 자신이 타인에게 보여진 방식과는 다르게 남아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경우의 심각한 정신적 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But also in temporal terms, conducting one’s life eschews direct personal observation and always antecedes any reflexive account.
그러나 또한 시간적인 용어 속에서, 자신의 삶을 수행하는 것은 직접적인 개인적 관찰을 피하고 항상 어떠한 자각적 고려에 선행한다. (?)
Particular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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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our bodily feelings of hunger, thirst, pain, freshness, or tiredness we experience that we are never completely in control of ourselves, that something essentially shapes us that we, however, cannot enact or produce ourselves.
특히 배고픔, 갈증, 통증, 신선함, 또는 피로에 대한 우리의 몸적인 느낌들에서, 우리는 결코 전적으로 우리자신의 통제 하에 있지 않다는 것을 경험하는데, 아무튼 우리는 우리자신을 규칙화(enact)하거나 생성할 수 없는 어떤 것이 필수적으로 우리를 형성한다는 것을 경험한다.
We experience in ourselves a source of becoming, an origin of spontaneity and movement that we cannot put our finger on.
우리는 우리자신에게서 되어가는 것의 원천, 자발성의 기원 그리고 우리가 손 댈 수 없는(cannot put our finger on) 움직임을 경험한다.
Life is something that has affected us before we are able to seize it, understand it, and answer to it.
삶은 우리가 그것을 움켜잡고, 이해하고, 그것에 응답할 수 있게 되기 이전에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어떤 것이다.
We always remain withdrawn from ourselves.
우리는 항상 우리자신으로부터 물러서 있다.
Because of this spatial and temporal withdrawal from oneself, the attempt to seize the conduct of one’s life in a self-reflexive manner must basically fail.
우리자신으로부터의 이러한 공간적 시간적 철수 때문에, 자기-자각적 방식 속에서 자신의 삶의 수행을 움켜잡으려는 시도는 기본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Once the spontaneity and transparency of the body are disturbed, the refl exive consciousness works itself off on the disorder and gets entangled in empty hyperreflection, fruitless brooding, or compulsive personal observation.
일단 몸의 자발성과 투명성이 동요된 후에는, 자각적 의식은 그 자체를 장애에 빠트리며(work off) 공허한 고조된 자각, 무익한 생각, 또는 강박적인 개인적 관찰 속에 얽혀들게 한다.
This additionally promotes the explication of the implicit and frequently leads to vicious circles of self-observation and self-alienation.
이것은 암묵에 대한 분석(explication)을 추가적으로 증진하며 자기-관찰과 자기-소외의 유해한 순환을 빈번하게 이끈다.
I have, by this means, presented some basic structures of the relationship of embodiment and reflexive self-awareness.
나는, 이러한 방식으로, 결합성과 자각적 자기-인식의 관계의 일부 기초적인 구조를 제시했다.
In what follows, I will, on this basis, consider various psychopathological manifestations of hyperreflexivity.
이 기초에 후속하여 나오는 것들 속에서, 나는 고조된 자각의 다양한 정신병리적 표현양상을 검토한다.
Psychopathologies of Hyperreflexivity
고조된 자각의 정신병리
A. Sleep Disorder
A. 수면장애
Let us start with the everyday example of sleep disorder.
매일의 수면장애의 예로 시작해 보자.
An insomniac has lost confidence in the bodily self-activity of sleep.
불면증은 수면의 몸적인 자기-활동에서 신뢰를 상실하게 한다.
When it is time to go to bed, his dread of the next sleepless night seizes him; he becomes restless and, for that reason alone, cannot fall asleep.
잠자러 가야할 시간이 되면 다가올 불면의 밤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붙잡는다. 그는 안절부절하게 되며, 그 이유 하나 만으로, 잠들게 될 수 없다.
Then he begins to observe himself, and he pursues what is happening in himself in a stressed, overly attentive manner.
그 다음에 그는 자신을 관찰하기 시작하며, 그는 스트레스적이고 지나치게 세심한 방식으로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추적한다.
At the same time, the fleeting time is foregrounded, the hands of the clock, the minutes, or the hours.
동시에, 쏜살같은 시간, 즉 시계의 손잡이, 분, 또는 시가 전면에 등장한다.
The insomniac tries at all costs to induce sleep—thus preventing it more surely.
불면증은 수면을 유도하기 위해 모든 대가를 치르는데, 따라서 수면을 보다 확실히 막는다.
We fall asleep, as the language says so beautifully, and whoever wants to seize it only manages to drive it away.
우리는 잠에 빠지는데, 마치 언어가 그토록 아름답게 말하는 것처럼, 누구도 그것을 단지 관리하려고 붙잡음으로써 그것을 쫓아버리기를 원치 않는다. (?)
It seems natural that therapy should aim at replacing the compulsive intention to sleep by an opposite intention, such as getting the patient to practice a relaxation technique in the evening without being allowed to fall asleep.
치료가 잠들기 위한 강박적인 의도를 반대되는 의도로, 예로써 환자로 하여금 저녁에 잠에 빠져들도록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완기법을 실천하도록 하는 것처럼, 반대되는 의도로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같다.
In this way he can learn to forget falling asleep again, thus letting it happen of its own accord.
이 방식에서 그는 잠에 빠지는 것을 또 다시 잊어버리는 것을, 따라서 그것을 그 자체에 일치되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을 배울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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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Compulsive Disorder
B. 강박장애
Viktor Frankl gives a good example of hyperreflection on the basis of a compulsive personality, and he has also developed the technique of “de-refl ection” and “paradoxical intention” for the treatment of such disorders.
Viktor Frankl은 강박적 성격의 기초에 자리잡은 고조된 자각의 좋은 예를 제시하고 있고, 그는 또한 이 장애의 치료법으로써 “반-자각”과 “역설적 의도”의 기법을 개발하였다.
A twenty-one-year-old, perfectionist patient, always top pupil and best in the class, began a career as a bookkeeper after his final exam.
항상 최우수 학생이고 학급에서 최고인 21세의 완벽주의 환자는 그의 마지막 시험 후에 부기계원(bookkeeper)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He soon noticed, however, that his writing was not always legible.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필체가 항상 명료하지는 않다는 점에 주목했다.
When his boss made him aware of this, he tried to improve it and sacrificed all his time to learning to write well.
그의 상사가 그것에 주의하도록 했을 때, 그는 그것을 개선하려고 노력했고 그의 모든 시간을 보다 더 잘 쓰는 법을 배우는데 투자했다.
He tried to copy letters from his friend’s handwriting but soon did not know which letters to use anymore or how he should write.
그는 자신의 친구의 필체로부터 글자를 모방하려고 노력했지만 곧 어떤 글자를 사용해야 할지 더 이상 알지 못했고 그가 어떻게 써야할 지 알지 못했다.
Since he was now completely concentrated on his handwriting, he could no longer write in front of other people, developed worries about their observing him, and had to give up his job.
그가 이제 전적으로 자신의 글씨쓰기에 집중했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 앞에서 쓸 수 없었고,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관찰에 대한 걱정이 생겼고, 자신의 직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It was possible to cure the disorder within three weeks with the guideline of the paradoxical intention: “I’ll scrawl something for that person, I am only writing to scrawl, only to get stuck 30 times” (Frankl 2007, 198).
다음과 같은 역설적 의도의 지침으로 3주 안에 장애의 완치(cure)가 가능했다. “나는 그 사람의 어떤 점에 대해 휘갈겨 쓸 것이다. 나는 단지 휘갈겨 쓸 뿐인데, 30번만 진지하게 그렇게 하자(get stuck)" (Frankl 2007, 198).
We see here very clearly how the backward turn of attention to bodily enaction can lead to the dissolution of an implicit ability, reinforced by dread and shame in front of others.
우리는 여기에서 몸적 규칙화(enaction)에 주의를 되돌리는 것이 어떻게 암묵적 능력의 분해를 가져오는지, 타인 앞에서의 두려움과 수치심을 강화시키는지를 명백히 본다.
At first the outward form of the writing itself replaces the intended contents.
가장 먼저 쓰기 그 자체의 외적인 형태가 의도적 내용으로 대체된다.
That would in itself not do any damage since conscious practice could, of course, lead to an improvement in the writing.
그 자체 속에는 어떠한 손해도 없는데, 왜냐하면 의식적인 연습이 당연히 쓰기의 개선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The compulsive neurotic, the perfectionist, however, as soon as he has given up taking his bodily enaction for granted, never gets back to it.
그러나 강박신경증, 완벽주의는 곧바로 자신의 부여받은 몸적인 규칙화(enaction)를 취하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고, 그것으로 결코 되돌아갈 수 없었다.
He wants to do everything deliberately and can allow nothing just to happen for fear of losing control and letting himself go.
그는 모든 것을 신중히 하기를 원했고 통제를 잃어버리고 자신을 내버려 두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일어나도록 아무 것도 허용할 수 없었다.
The paradoxical therapeutic instruction allows him just this and picks up on his secret rebellious wishes: for once in his life to be able just to scrawl, indeed “to scrawl something for his boss.”
역설적인 치료적 지시는 그에게 이것을 허용했고 그의 비밀스러운 반항적 소망을 집어들었다. 즉 휘갈겨 쓰는 것이, 사실 “그의 상사에게 무엇인가 휘갈겨 쓰는 것”이 이제(just) 그의 삶에서 일단(once)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By this means, the “crump of reflection” is dissolved, and the patient gets back his confidence in his implicit bodily abilities.
이러한 방법으로 “자각의 폭격”은 분해되었고, 환자는 그의 암묵적 몸적 능력에서의 확신으로 되돌아 왔다.
C. Hypochondria
C. 건강염려증
The paradigm of pathological reflection on the body is hypochondria.
몸에 대한 병리적 자각의 패러다임이 건강염려증이다.
The hypochondriac has also lost confidence in her natural bodily processes and seeks in vain, by means of more exact medical supervision, to secure the reliable performance of her body.
건강염려증은 또한 자신의 자연적인 몸적 과정에 대한 확신을 상실하고, 보다 정확한 의료적 지도의 방법으로, 자신의 몸의 믿을만한 수행에 대해 확신하기 위해, 공허 속에서 헤맨다(seeks),
However, by these very means, she cancels the inconspicuousness of her bodily enactions and disturbs the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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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ntaneous activity.
그러나, 바로 이러한 방법들에 의해, 그녀는 자신의 몸적 규칙화(enactions)의 눈에 띄지않음(inconspicuousness)을 취소하고, 그것의 자발적인 활동을 방해한다.
By means of her suspicious self-observation, she herself reinforces or produces unusual bodily sensations that she then interprets as threatening symptoms.
자신의 의심스러운 자기-관찰의 방법에 의해, 그녀는 스스로 비통상적인 몸적 감각을 강화하거나 산출하며, 그 뒤에 위협적인 증상으로 해석한다.
That is how a patient of mine was frightened by a tumor that might cause him to lose his eyesight.
그것이 그의 시야를 잃게 할 수 있는 종양 때문에 내 환자가 놀랐던 방식이다.
He was constantly observing his ability to see and registered his ocular sensations in a tense manner, thus evoking only additional tensions, negative feelings, and tear secretions.
그는 항상 자신의 시각능력을 관찰하였으며 긴장된 방식으로, 따라서 추가적인 긴장과, 부정적인 느낌, 그리고 눈물 분비가 되는 방식으로 눈의 감각을 기록하였다.
Indeed, his attention was also typically directed back from the distal to the proximal, from the seen to seeing, to the eye itself.
사실, 그의 주의는 또한 원위(distal)로부터 근위(proximal)로, 보여짐으로부터 봄으로, 눈 그 자체로 전형적으로 뒤쪽을 지향하였다.
However, already the loss of confidence in one’s own body has to do with refl exively gained knowledge.
아무튼 이미 자기 자신의 몸에 대한 확신의 상실은 자각적으로 획득되는 지식과 함께 한다 (?)
Indeed, in the background of hypochondria is the consciousness that as a physical human being one is prone to illness and vulnerable to being mortal, with the result that every banal pain can basically indicate the possibility of a lethal illness.
사실, 건강염려증의 배경은, 모든 평범한 통증이 치명적인 질병의 가능성을 기본적으로 시사해줄 수 있다는 결과와 함께, 신체적 인간으로서 개인은 질병에 걸릴 수 있고 죽음에 취약하다는 것에 대한 의식이다.
The more sensitive a hypochondriac is about the vulnerability of her physical existence, the more unbearable it is for her.
건강염려증에 보다 더 민감하다는 것은 그녀 자신의 신체적 존재의 취약성에 대한 것인데, 그녀에게는 이것이 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이다.
That is why she tries to keep at bay the fear of sickness and death that she constantly experiences up close to her by worryingly observing all her physical processes.
그녀가 궁지 속(at bay)에서 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그녀가 자신의 신체적 과정 모두를 걱정스럽게 관찰하면서 지속적으로 자신을 밀접하게 경험하기 때문이다.
Her body increasingly becomes a quasi-erotic object that places the world in the shade instead of being transparent for it.
그녀의 몸은 점차적으로, 그것에 투명한 것으로 존재하는 대신에, 응달 속에서 세상에 자리잡은 유사-성적인 대상이 되어간다.
One’s own and, ultimately, any medical professional’s care for the body now replaces what gets lost in social relations.
자기자신의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몸에 대한 어떤 의료전문가의 보살핌이 이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상실한 것을 대체한다.
Medicine and doctors are supposed to close the crack that has emerged in the person’s existence—as if the basic fact of the vulnerability and mortality of the human body could be cancelled by the body being constantly observed, examined, and forced into diet rituals.
의료와 의사는 개인의 존재(existence)에 출현한 틈을 좁혀주는 것으로 가정되는데, 마치 인간 몸의 취약성과 죽음(mortality)이라는 기본적인 사실이 지속적으로 관찰되고, 검사되고, 강요되는 규정식 의식(diet rituals)을 따르는(being) 몸에 의해 취소될 것이라고 가정된다.
The hypochondriac represents the natural scientific aspiration to absolute control of the body, but nevertheless she cannot deny the fact of sickness and death.
건강염려증은 몸에 대한 절대적인 통제를 향한 자연적인 과학적 열망을 대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질병과 죽음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Hypochondriac neurosis often becomes a lifelong battle against a basic condition of existence that is not recognized and is negated.
건강염려증적 신경증은 종종 인식되지 않는 그리고 부인되는 존재의 기초적 조건에 대항하는 전생애에 걸친 전쟁이 되어간다.
De-reflection is also therapeutically necessary here, to turn one’s attention away from the body to the outside, above all to others.
반-자각이 또한 여기에서 치료적으로 필요한데, 개인의 주의를 몸으로부터 외부의 다른 모든 것들로 돌리기 위해서이다.
D. Body Dysmorphic Disorder
D. 신체기형장애
Another form of hyperreflexivity can be found in body dysmorphic disorder or dysmorphophobia (“fear of deformation”), the exaggerated or delusional idea that an objectively inconspicuous body part, above all the face, the nose, the mouth, or the skin, is deformed or ugly.
고조된 자각의 또 다른 형태는 신체기형장애 또는 신체기형공포증 (“기형에 대한 공포”)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객관적으로 두드러지지 않는 신체 부위, 특히 얼굴, 코, 입, 또는 피부가 변형되었거가 추하다는 과장되거나 또는 망상적인 생각(idea)이다.
In the patient’s experience,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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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dy part in question protrudes as deformed or sticks out, as the constant object of one’s attention and concern.
환자의 경험에서, 의문 속에서 몸의 부위가 변형되거나 또는 두드러지는 것으로써, 개인의 주의와 관심의 지속적인 대상으로써 불쑥 튀어나온다.
Characteristic of this are feelings of shame, fear of being visually exposed, and the feeling that one is being observed, stared at, or secretly laughed at.
이것의 특징은 수치심, 시각적으로 노출되어 있다는 두려움, 그리고 자신이 관찰되고, 주목받고, 또는 은밀하게 비웃음 당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This fearful shame makes spontaneous physical behavior impossible and can escalate to paranoid ideas of reference.
이 두려운 수치심은 자발적인 신체적 행동을 불가능하게 하며 관계망상사고를 확대할 수 있다.
Cosmetic operations that the patients often have carried out on themselves do not usually change anything in the serious underlying destruction of their sense of self-worth.
환자들이 종종 자신을 위해 행하는 화장술은 심각한 자기-가치감의 기저의 파괴에 대해(in) 일반적으로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In contrast to hypochondria, body dysmorphic disorder is a question of showing oneself or being seen in one’s own bodily form, of displaying one’s body image (Fuchs 2002, 2010).
건강염려증과 비교하여, 신체기형장애는 자신을 보는 것 또는 자신의 몸 형태에서 보여지는 존재, 자신의 몸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의문이다.
The potential self-alienation that can be triggered by the other’s gaze was famously analyzed in detail by Sartre (1956).
타인의 시선(gaze)에 의해 촉발될 수 있는 잠재적인 자기-소외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famously), Sartre에 의해 자세히 분석되었다.
The pre-reflexive body thus receives an outside; it becomes an unprotected, stared at, or bared body, a “body-for-others,” the object of their evaluation or possible refusal.
전-자각적 몸은 따라서 외부를 받아들인다. 즉 그것은 비보호적이거나, 응시되거나, 벌거벗겨진 몸, 즉 “타인을-위한-몸”, 즉 평가 또는 잠재적 거부의 대상이 된다.
This is the origin of self/other-related emotions, especially of embarrassment and shame.
이것이 자기/타인-관계 정동, 특히 당황과 수치의 기원이다.
A person struck by shame is placed into the center of attention and is painfully touched by centripetal directions of being looked or pointed at for which he would like to sink into the ground (Fuchs 2002).
수치에 의해 얻어맞은 개인은 주의의 중심 속에 자리 잡고 바닥으로 가라앉은 것 같은 시각과 지점에서 내부지향적인 존재의 방향에 의해 고통스럽게 접촉한다.
The flushing or burning of his face corresponds to the embarrassment of being seen: The person who is ashamed feels himself at the hot point of attention.
얼굴의 붉어짐과 달아오름은 보여지는 당황과 일치한다. 즉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자신을 주의의 뜨거운 초점으로 느낀다.
His movements become clumsy, and his posture, unnatural.
그의 움직임은 서투르게 되고, 그의 자세는 자연스럽지 못하게 된다.
Connected with this is a self-alienation or dissociation at that moment.
이것과 연관된 것은 자기-소외 또는 그 순간의 해리(dissociation)이다.
The person affected looks, so to speak, through the eyes of others at his own bodily self, which has been shamed and ridiculed.
영향을 받은 개인은, 말하자면, 자신의 몸적 자기에 대해(at) 타인의 눈을 통해, 수치스럽고 비웃음거리가 된 그것을 본다.
He is simultaneously the one who sees and is seen.
그는 동시적으로 보는 그리고 보여지는 사람이다.
Shame is thus the central emotion of disorders of body image, particularly of body dysmorphic disorder.
수치는 따라서 몸 이미지 장애, 특히 신체기형장애의 핵심 정동이다.
Characteristically, the disorder usually arises in adolescence when one’s own body is changing and, as a result of sexual changes, develops a new external appearance.
특징적으로, 이 장애는 일반적으로 청소년기에 발생하는데, 이 시기에(when) 성적 변화의 결과로써 자신의 몸이 변화하며, 새로운 외적인 모습이 발달한다.
Insecurity, hurts, and lack of self-esteem trigger the disorder then.
불안정, 상처, 그리고 자부심의 부족은 그 때(then) 장애를 촉발한다.
Spontaneous physical presence gets lost or cannot be developed at all.
자발적인 신체적 현존(presence)은 사라지거나 또는 전혀 발달하지 않는다.
Instead of that, the body that one considers to be deformed comes into the limelight, that is, the proximal replaces the distal.
그 대신에, 개인이 변형되었다고 간주하는 몸이 각광(limelight) 받게 되는데, 즉 근위(pooximal)가 원위(distal)을 대체한다.
The body appears reified as an object, around which the patient revolves in his hyperreflexive brooding.
몸은 대상처럼 구상화(reified)되는데, 이것을 중심으로 환자는 자신의 자각적 숙고(blooding)를 반복한다(revolves in).
Quite frequently this leads to a manifest depersonalization in which one’s own body feels strange, numb, or without feeling.
매우 빈번하게 이것은 명백한 이인화를 가져오는데, 그 속에서 개인 자신의 몸은 이상하거나, 마비되거나 또는 느낌이 없는 것으로 느껴진다.
Again a vicious circle of ashamed self-observation and alienation arises that the patient is no longer able to break through.
부끄러워하는 자기-관찰과 소외의 유해한 순환은 또 다시 헤치고 나아가는 것을 더 이상 불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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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Schizophrenia
E. 조현병
Probably the most far-reaching dissolution of taking oneself for granted bodily and of one’s spontaneity is found in schizophrenia.
아마도 부여받은 몸적 자기와 자신의 자발성을 취하는 것의 가장 멀리-나아간 분해(dissolution)는 조현병에서 발견된다.
Particularly in the basic and early stages of the illness, schizophrenic patients experience a loss of implicit ability and tacit knowledge, which can also be described by the concept of “common sense”: It means our basic familiarity with the world and with other people, which is bound up with the medium of the body.
특히 질병의 기초적이고 초기 단계에서, 조현병 환자들은 암묵적 능력과 무언의 지식의 상실을 경험하는데, 이것은 또한 “상식”이라는 개념에 의해 기술될 수 있다. 즉 상식이란 세상에 대한 그리고 타인에 대한 기초적인 친숙성을 의미하며, 몸이라는 매개체(medium)와 함께 튀어 오른다(bound up).
In phenomenological psychopathology, schizophrenia is also described as a “disembodiment” (Fuchs 2005a; Fuchs and Schlimme 2009; Stanghellini 2004).
현상학적 정신병리학에서, 조현병은 또한 “비결합성”으로써 기술된다.
It consists of a creeping disintegration of bodily habits and actions, which especially makes what we take as natural and everyday seem more questionable.
이것은 몸적인 습관과 행위의 은근한 분해(disintegration)를 가져오는데(consists of), 이것은 특히 우리가 자연적이고 일상적인 것으로 취하는 것을 보다 의문스럽게 보이도록 만든다.
This explication of the implicit seizes, as we will see, increasingly proximal areas of bodily actions until these are experienced as completely alien to the ego and, indeed, finally driven from the outside.
암묵(implicit)에 대한 이 분석(explication)은, 우리가 잠시 후에 검토할 것인데, 점차적으로 신체행위의 근접영역을 움켜잡게 되는데, 결국(until) 신체행위가 에고에게 전적으로 이질적인 것으로, 최종적으로는 외부로부터 움직이는 것으로 경험된다.
Let us look at some examples of early stages of this disorder:
이제 이 장애의 초기단계에 대한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
• A schizophrenic patient of Minkowski’s was no longer able to read because “he becomes attached to a word, a letter, and does not attend to the meaning of the sentence. He examines whether all the ‘i’s have dots over them, whether there are accents where needed, whether all the letters have the same form” (Minkowski and Targowla 2001, 273).
• Minkowiski의 조현병 환자는 더 이상 읽을 수가 없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그는 단어, 즉 글자에 고착되었으며, 문장의 의미에 주의를 기울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i'자마다 그 글자 위에 점이 찍혀있는지, 필요한 곳에 액센트가 찍혀 있는지, 모든 글자들이 동일한 형태를 갖고 있는지를 점검하였다” (Minkowski and Targowla 2001, 273).
• “At times, I could do nothing without thinking about it. I could not perform any movement without having to think how I would do it. . . . Sometimes I would think about words and wonder why ‘chair’ now means ‘chair,’ for example, or such things” (remarks from a schizophrenic patient treated in the Psychiatric Department of Heidelberg University).
• “때로, 나는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는 어떤 움직임도 수행할 수 없었다. 때때로 나는 단어에 대해 생각하곤 했으며, 예로써 왜 ‘의자’는 지금 ‘의자’를 의미하는지, 또는 그러한 것들이 어리둥절했다” (Heidelberg 대학교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치료받은 조현병 환자의 예를 인용).
• “If I do something like going for a drink of water, I’ve to go over each detail—find cup, walk over, turn tap, fill cup, turn tap off, drink it” (Chapman 1966, 239).
• “만일 내가 물을 마시러 가는 것과 같은 어떤 일을 할 때, 나는 각각의 세부사항들을 넘어야만 했는데, 즉 컵을 찾고, 걸어가고, 수도꼭지를 틀고, 컵을 채우고, 수도꼭지를 잠그고, 물을 마셨다” (Chapman 1966, 239).
Here the implicit couplings or sensorimotor syntheses of the body break down and must be replaced by conscious planning and execution.
위의 예에서 암묵적 짝짓기 또는 몸의 감각운동 통합은 깨어졌고 의식적 계획과 실행으로 대체되어야만 했다.
The patients no longer manage to carry out a unified arc of action or use their body naturally for this.
환자는 더 이상 행위의 단일한 아크(arc)를 수행해 나가거나 또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사용할 수 없다.
This leads to a loss of spontaneity, to increasing self-observation, and to hyperreflection.
이것은 자발성의 상실, 자기-관찰의 증가, 그리고 고조된 자각을 가져온다.
Every action, however trifling, requires targeted attention and action of the will, as it were, a “Cartesian” impact of the Ego on the body.
모든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초점화된 주의와 의지의 작용(action), 즉 이미 설명했듯이(as it were), 에고와 몸에 "데카르트적“ 충돌(impact)을 요구한다.
It is not for nothing that the patients of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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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ak of a break between themselves and their body, feel hollowed out or like lifeless robots.
이것은 환자가 종종 자신과 자신의 몸 간의 분열이라고 말하는, 구멍이 난 또는 살아있지 않은 로봇 같이 느끼는 것 바로 그것이다(it is not for nothing).
This is because the feeling of being alive consists in being an incarnated self, which can direct itself naturally through its body to the world: “I am like a robot which someone else can use, but not me. I know what has to be done but cannot do it” (Chapman 1966, 231).
왜냐하면 살아있는 존재라는 느낌은 육체를 가진 존재로 구성되는데, 이것은(육체를 가진 존재는) 그 자체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몸을 통해 세상을 지향할 수 있다. 즉 “나는 내가 아니라 누군가가 사용하는 로봇과 비슷하다. 나는 무엇이 행해지는가를 알지만, 그것을 행할 수는 없다” (Chapman 1966, 231).
The disorder of usual bodily dealings with the world can manifest itself in a subtle alienation of everydayness, as Blankenburg (1971) has impressively described it.
Blankenburg(1971)가 인상적으로 기술했듯이, 세상에 대한 통상적인 몸적 거래(dealingas)의 장애는 그 자체를 미세한(subtle) 일상성의 소외로 표현한다.
It also affects the habitual intercorporal contact with others.
이것은 또한 타인과의 습관적인 육체간의 접촉에 영향을 미친다.
Precisely those things become a problem “which cannot rationally be unequivocally defined, which are a matter of tact”: which dress one wears, how one addresses someone, how one apologizes, and so on.
엄밀하게 그러한 것들은 “이성적으로 명료하게 정의될 수 없는, 감각(tact)적인 것”의 문제로 되게 된다. 즉 우리가 어떤 옷을 입는지, 우리가 누군가에게 어떻게 말을 거는지, 우리가 어떻게 사죄하는지, 등등.
The loss of innate naturalness “makes itself noticed, above all, . . . in the innumerable little happenings of everyday life, but, beyond that, seizes one’s whole life orientation” (Blankenburg 1971, 82).
생득적인(innate) 자연성의 상실은 “그 자체를 부각되게(noticed) 하는, 모든 것들 중에서... 일상생활의 무수한 사소한 사건들 중에서... 예외적으로(but), 그것을 넘어서, 개인(one)의 전체 삶의 방향(orientation)을 움켜잡는다.
Whatever the healthy person has forgotten because he was used to it, before he could ask about it, imposes itself as an unavoidable problem on the patient: recognizing how it is possible to be in the world, to act—-how it is possible to live.
건강한 사람이 잊어버린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물어보기 이전에, 그가 그것을 사용해 왔기 때문인데, 그것이 무엇이든 환자에게는 그것 자체가 피할 수 없는 문제를 부과한다. 즉 그것이 세상에 어떻게 해서 존재할 수 있는지, 어떻게 행위(act)할 수 있는지, 달리 말해서(--), 살아 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인식하는 것이.
It is precisely what is forgotten, that is, what we are accustomed to through our implicit bodily memory, that is no longer at the disposal of the patient.
이것이 정확히 잊어버린 것인데, 즉 우리가 우리의 암묵적인 몸적 기억을 통해서 익숙해져 있는 것, 그것이 더 이상 환자의 처분(disposal)에 달려 있지 않다.
In contrast to what it is like in the case of neurotic disorders, which we looked at before, we must assume a deeper-reaching cause for these phenomena of schizophrenic alienation.
이것이 우리가 이미 살펴본 신경증적 장애의 경우와 어떤 점이 비슷한지를 비교하자면, 우리는 조현병적 소외 현상의 경우에는 보다 더 심층적인-도달 원인을 가정해야만 한다.
Recent phenomenological psychopathology works from a disorder of basic bodily self-experience that underlies all life conduct and imbues it with mine-ness and self-coherence (Parnas 2000; Sass and Parnas 2003).
최근의 현상학적 정신병리학은 기초적인 몸적 자기-경험의 장애로부터 시작되는데, 이것은(몸적 자기-경험은) 모든 삶의 행위(conduct)의 기저에 자리 잡고 있고 내것-임과 자기-응집성에 이것이(몸적 자기-경험에) 스며들어 있다 (Parnas 2000; Sass and Parnas 2003).
It is, so to speak, most proximal, that is, at the core of all intentional acts.
이것은, 말하자면, 가장 근위의, 즉 모든 의도적 행위의 핵심에 위치한다(is).
The disorder of this pre-reflexive self-awareness thus permeates all areas of experience and cannot be compensated reflexively: “I constantly have to ask myself who I actually am. It is hard to explain . . . most of the time I have this very strange thing: I watch myself closely, like how am I doing now and where are the ‘parts.’ . . . I think about that so much that I cannot do anything else. It is not easy when you change from day to day. As if you were a totally different person all of a sudden” (de Haan and Fuchs 2010, 329).
이 전-자각적 자기-인식의 장애는 따라서 모든 경험의 영역에 스며들어 있고 자각적으로 보상될 수 없다. 즉 “나는 지속적으로 내가 실제로 누구인지 나 자신에게 물어야만 한다. 이것은 설명하기 어려운데... 거의 모든 시간 동안 나는 이 매우 낯선 일(thing)을 경험한다(have). 즉 나는 나 자신을 면밀히, 예로써(like) 내가 지금 어떻게 행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부분’은 어디에 있는지를 지켜본다... 나는 그 이외의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것에 대해 생각한다. 당신이 매일 매일 변화할 때 이것은 쉽지 않다. 마치 당신이 갑자기 완전히 사람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de Haan and Fuchs 2010, 329).
A further example of compulsive self-observation is quoted by Parnas and Handest:
Parnas와 Handest는 강박적인 자기-관찰의 추가적인 예를 인용하고 있다.
If a thought passed quickly through his brain . . . , he was forced to direct back his attention and scrutinize his mind in order to k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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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actly what he had been thinking.
만일 어떤 생각이 그의 뇌에 순간적으로 지나가면... 그는 자신의 주의를 애써(forced) 거꾸로 돌리고 그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정확히 알기 위해서 자신의 마음을 면밀히 조사한다.
In one word, he is preoccupied by the continuity of his thinking.
한 마디로, 그는 자신의 생각의 연속성에 집착한다.
He fears that he may stop thinking for a while, that there might have been “a time when my imagination had been arrested.” . . . He wakes up one night and asks himself: “Am I thinking? Since there is nothing that can prove that I am thinking, I cannot know whether I exist.”
그는 자신이 잠시 생각하기를 멈출까봐 두려워하는데, 즉 “나의 마음(imagination)이 정지된(arrested) 때”가 있었을 수도 있다고 두려워한다... 그는 하루 밤을 깨어 있으면서 자신에게 묻는다: “내가 생각하고 있나? 내가 생각한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나는 내가 존재하는지를 알 수 없다.”
In this manner he annihilated the famous aphorism of Descartes. (2003)
이러한 방식 속에서 그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격언을 무효로 만든다.
In vain, the patient tries to banish his existential fear of losing himself by constantly reassuring himself.
헛되이, 환자는 지속적으로 자신을 재확인함(reassuring)으로써 자신을 잃어버릴까 하는(of) 실존적 두려움을 추방한다.
This explicit turn backward does not, however, reach the source of thinking, which should imbue it with a sense of “mine-ness” (or self-ownership).
이 명백한 뒤쪽으로의 선회는 그러나 사고의 출처(source)에 도달하지 않는데, 이것은(사고의 출처에 도달하는 것은) “내것-임” (또는 자기-소유권)의 감각에 그것이 스며들어야만 한다.
If the intentional act is no longer embedded in self-awareness, it remains unrealized and has to be repeated emptily.
만일 의도적 행위가 더 이상 자기-인식 속에 결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현되지 않고(unrealized) 남아있게 되며 공허하게 반복되게 된다.
Let us take a look at a more detailed exemplary case.
이제 보다 자세한 전형적인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자.
A thirty-two-year-old patient reports that at the age of sixteen, he had become more and more uncertain about whether his personal things really belonged to him or had somehow been exchanged by others.
32세인 환자는 자신이 16세 때에 점점 더 자신의 개인적인 것들이 정말로 자신에게 속해 있는지 아니면 영문은 모르겠지만(somehow) 타인들에 의해 뒤바뀐 것인지 불확실해지게 되었다고 보고하였다.
When buying books, he was not sure if the salesman had not secretly replaced the ones he had chosen; so he had to give them away and always buy new ones.
책을 살 때, 그는 자신이 고른 것을 판매원이 몰래 바꿔치기하지 않았다는 걸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책들을 버리고 언제나 새 책을 사야만 했다.
When leaving things on his school desk inattentively, he later began to doubt whether they were still the same and had to throw them away.
자신의 학교 책상에 부주의하게 남겨둔 것들이 있을 때, 그는 뒤에 그것들이 여전히 같은 것인지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것들을 내다버렸다.
More and more he lost trust in his environment.
점점 더 그는 자신의 환경에 대해(in) 신뢰를 상실했다.
At the age of twenty-one, during his studies at the university, he could not trust his own notes anymore.
21세 때, 대학에서 공부하는 시절에(during), 그는 자신의 노트를 더 이상 믿을 수 없었다.
Finally, he began to doubt whether it really was his own arms or somebody else’s that did the job that he was actually occupied with.
결국 그는 그것이 정말로 자신의 팔인지 아니면 자신이 실제적으로 종사하고 있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누군가 다른 사람의 팔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He had to carefully observe his arms from the hands up to the body in order to make sure that they were his own, and he repeatedly looked behind himself in order to see if there was not somebody else who moved them.
그는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기 위해서 손부터 몸까지 자신의 팔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만 했으며, 자신을 움직이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없는지를 확인하기(see) 위해서 자신의 뒤에서 반복적으로 지켜보았다(looked).
Now he could not trust his own hands anymore and was in doubt about the simplest actions.
이제 그는 자신의 손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으며 가장 단순한 행위에 대해서도 의심하고 있다.
He took endless time to dress, since he had to touch the clothes several times and had to consciously repeat his movements again and again to make sure that they were his own.
그는 옷을 입는데 엄청난 시간이 걸리는데, 왜냐하면 그는 옷을 여러 번 만져봐야만 하고 그것들이(움직임들이) 자신의 것이라고 확신하기 위해서 자신의 움직임들을 수없이 반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He did not know whether he held his trousers the right way and in which order to dress.
그는 자신이 바지를 올바른 방법으로 입었는지를 알지 못하며 옷을 입는 순서를 알지 못한다.
Every movement was like an arithmetic problem that had to be pondered with extreme concentration.
모든 움직임은 엄청난 주의집중을 갖고 깊이 생각해야만 하는 수학문제 비슷한 것이었다.
So he became stuck in his everyday performances and felt more and more desperate (Bürgy 2003).
그래서 그는 자신의 매일의 수행에 매였고 점점 더 절망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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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undamental self-alienation of the patient, at first, manifests itself in his mistrust in the belonging of his property.
환자의 근본적인 자기-소외는, 처음에는, 자신의 물건(property)의 소유권(belonging)에 대한(in) 그의 불신으로(in) 표현되었다.
The reliability of his personal belongings is of existential import for him, because the continuity of the external environment should compensate the felt fragility of self-coherence.
그의 개인적 소유권에 대한 신뢰성은 그에게는 실존적 의미(import)가 있는데, 왜냐하면 외부환경의 연속성이 자기-응집성의 허약감(the felt fragility)을 보상해줘야만 하기 때문이다.
But the familiarity of things cannot be reproduced, and the personal environment seems increasingly alienated.
그러나 사물(things)의 친숙성은 재생될 수 없으며, 개인적 환경은 점점 더 이질적인 것처럼 보인다(seems).
Ultimately the sense of agency is lost from his own actions, and habitual action units dissolve.
결국 행위자감(sense of agency)이 자신의 행위로부터 상실되고, 습관적 행위단위들이 분해된다.
In order to compensate this loss, the patient has to consciously prepare and execute every movement by using his body like an external instrument.
이 상실을 보상하기 위해서, 환자는 자신의 몸을 외부도구처럼 사용함으로써 모든 움직임을 의식적으로 준비하고 실행한다.
But even so he cannot be sure that the movement was not executed by someone else.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움직임이 누군가 다른 사람에 의해 실행되지 않는다는 점을 확신할 수 없다.
Natural embodied know-how is lost, and as such, the intentional arc of directed action breaks down.
자연적으로 결합된 노하우는 사라지고, 마찬가지로, 지향적 행위(directed action)의 의도적 아크(arc)는 붕괴된다.
The only remaining options are powerless self-observation and hyperreflection.
남아 있는 유일한 대안은 힘없는 자기-관찰과 고조된 자각이다.
As alienation and explication of embodied intentionality increase, finally the act of perception as such can become an object of awareness.
소외(alienation)와 결합된 의도성에 대한 분석(explication)이 증가하고, 결국 이와 같은 지각행위는 인식의 대상이 되어갈 수 있다.
In this case the patients become observers of their own perceptions:
이 사례에서 환자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지각의 관찰자가 되어갔다.
I become aware of my eye watching an object. (Stanghellini 2004, 113)
나는 내 눈이 대상을 보고 있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Stanghellini 2004, 113)
I saw everything I did like a film camera. (Sass 1992, 132)
나는 내가 마치 영화카메라인 것처럼 모든 것을 보았다. (Sass 1992, 132)
For me it was as if my eyes were cameras, and my brain was still in my body, but somehow as if my head were enormous, the size of a universe, and I was in the far back and the cameras were at the very front. So extremely far away from the cameras. (de Haan and Fuchs 2010, 329–30)
내게 있어서, 그것은 마치 내 눈이 카메라인 것 같은 것이었는데, 내 뇌는 여전히 내 몸에 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somehow) 마치 내 머리가 거대해서, 크기가 우주만 한 것 같았고, 그리고 나는 멀리 뒤에 있었고 카메라가 바로 정면에 있었다. 그렇게 카메라로부터 엄청나게 멀리. (de Haan and Fuchs 2010, 329–30)
The perceiving subject gets into a position external to the world; he becomes a homunculus who looks on his own perceptions like pictures.
지각하는 주체는 세상의 외부 위치로 간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지각을 마치 그림처럼 바라보는 어떤 존재(homunculus)가 된다.
This extreme alienation, indeed contortion of the bodily medium, also changes the things perceived into mere appearances or phantom pictures.
이 극단적인 소외는, 사실 몸적 매개체의 왜곡인데, 또한 단순한 겉모습이나 환영사진으로 바꿔버린다.
That is the core of the artificial, mysterious, and uncanny alienation from the environment in the early stages of acute psychosis, which Jaspers (1963) describes as “delusional mood.”
그것이 급성기 정신병의 초기단계에서 인위적이고, 불가사의하고, 그리고 기이한 환경으로부터의 소외의 핵심인데, 이것을 Jaspers(1963)는 “망상적 기분”이라고 기술했다.
Instead of constituting an objective, common world, schizophrenic perception is caught in a subjec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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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adic view: it is no longer transparent in relation to the world; rather, it is opaque (Fuchs 2005b).
객관적인 상식적(common) 세상을 구성하는 대신에, 조현병적 지각은 주관적인 단세포적 관점을 포착했다(caught in). 즉 그것은 더 이상 세상과의 관계에서 투명하지 못하다. 대신에 그것은 불투명하다 (Fuchs 2005b).
A final stage is reached when the dissolution of the intentional arcs of perception, thinking, and action is so far advanced that the remaining fragments of perception, thought, or movement take on a strange, object-like character and finally appear to be imposed on the patient from the outside:
최종단계는 지각, 생각, 그리고 행위의 의도적 아크(arcs)가 엄청나게 진보하는데, 지각, 사고, 또는 움직임의 잔여파편들이 생소하고, 대상-같은 특성(character)을 취할 정도로 그리고 결국에는 외부로부터 환자에게 부과되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진보한다. 즉(:),
“I could no longer think the way I wanted to. It was as if one could no longer think oneself, as if one were prevented from thinking oneself. As if the ideas came from outside. . . . I began to wonder am I still that person or am I an exchanged person” (Klosterkötter 1988, 111).
“나는 더 이상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one) 더 이상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며, 마치 누군가가(one)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막혀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마치 생각들(ideas)이 외부로부터 오는 것 같은데... 나는 내가 여전히 그 사람인지 아니면 내가 교체되어버린 사람인지 어리둥절하기 시작했다” (Klosterkötter 1988, 111).
It is not hard to see how typical ego disorders such as thought insertions or verbal hallucinations can develop from such forms of experience.
어떻게 사고주입 또는 언어적 환청과 같은 전형적인 자아 장애가 이러한 형태의 경험으로부터 발달하는지 알게 되는 것(to see)은 어렵지 않다.
To sum up, in schizophrenia the transparency of the body is so reduced that it can no longer function as a medium of turning to the world.
요약하자면, 조현병에서 몸의 투명성은 감소하며 더 이상 세상을 향하는(turning to) 매개체로서 기능하지 못한다.
The disturbance of basic self-experience alienates the person from her bodily enaction, and the “mediated immediacy” of the relation to the world is corroded.
기초적인 자기-경험의 혼란은 개인을 자신의 몸적 규칙화(enaction)로부터 소외시키며, 세상과의(to) 관계에서의 “매개된 즉각성”이 약화된다.
This results in a “disembodiment,” a pathological explication of the natural, implicit functions of the body.
이것은 “비결합성”, 즉 몸의 자연적인 암묵적 기능에 대한(of) 병리적인 분석(explication)을 초래한다.
In vain, the patients try to compensate for this by means of compulsive self-observation, ritualized making-sure-of-themselves, and hyperreflexivity.
헛되이, 환자는 이것을 강박적인 자기-관찰, 의례적인 자신에-대한-확신-만들기, 그리고 고조된 자각의 방법으로 보상하려고 시도한다.
In the end the intentional arc is disintegrated, and its pieces appear to the patient as strange, thinglike fragments of feeling, thought, and movement.
결국, 의도성의 아크(intentional arc)는 분해되고, 그 조각들은 환자에게 감정, 사고, 그리고 움직임의(of) 생소한 유사사물 파편들처럼 보여진다.
Therefore, instead of functioning as a transparent medium of being-in-the-world, the bodily organization of the schizophrenic increasingly distorts perceived reality and finally entangles him in a delusional view of himself.
그러므로 세상-속-의-존재에 대한 투명한 매개체로 기능하는 것 대신에, 조현병의 몸 조직은 점차 지각된 현실을 왜곡하고 결국 그를 자신에 대한 망상적 관점 속에 얽혀들게 한다.
The body he lives becomes an alienated, outwardly body machine that, in the end, appears to no longer be moved by the patient himself but, rather, driven by anonymous and strange powers.
그가 살고 있는 몸은 결국에는 더 이상 환자 자신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익명의 생소한 힘에 의해 작동하는(driven) 소외된 외부방향적인(outwardly) 몸 기계가 되어간다.
We can nowhere recognize so clearly what it means to be an incarnate bodily being as in the case of schizophrenia, in which the self is, so to speak, no longer at home in its body. 5
조현병의 사례에서처럼 육체를 가진 몸적 존재로서 존재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가 이렇듯 명백히 인식할 수 있는 경우는 어디에도 없는데, 이것에서(조현병에서) 자기는, 말하자면, 더 이상 자신의 몸에 자리 잡고(at home) 있지 않다.(주 5)
Conclusion
결론
We have examined some of the ways the psychopathology of hyperreflexivity manifests itself.
우리는 고조된 자각의 정신병리가 그 자체를 표현하는 몇 가지 방식을 검토하였다.
One could add further examples to these, for example,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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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oding directed back to the past and the tormenting personal reproaches of depressive patients.
우리는 이것에 추가적인 예를, 예로써, 우울증 환자의 과거로 되돌리는 방향의 숙고(blooding)와 괴롭히는 개인적 비난을 덧붙일 수 있다.
However, the forms here presented should suffice to draw some conclusions:
그러나 지금까지(here) 제시했던 형태들은 몇 가지 결론을 내리기에 충분하다.
1. Mental illnesses represent disorders or holdups in conducting one’s life directed at the world and into the future.
정신질환은 개인의 삶을 세상과 미래를 향하도록 인도하는 것(conducting)에서의 장애 또는 억류를 대표한다.
As such, they are connected with increased self-observation and self-evaluation, with a narrowing of attention to one’s own person, to the deficits or symptoms experienced, and finally, with the backward turn of thinking to what has already been done or has happened.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증가된 자기-관찰 및 자기-평가와 연결되어 있고, 그(one) 자신으로서의 사람에 대한, 경험되는 결함들 또는 증상들에 대한 주의의 축소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미 행해진 또는 일어났던 것들을 되짚어서(backward turn) 생각하기와 연결되어 있다.
These phenomena can be summed up in the concept of hyperreflexivity.
이러한 현상들은 고조된 자각의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다.
2. The disorder of enaction is manifested also in a dissolution of the habits, gestalt units, and implicit couplings on which the body’s intentionality is based.
규칙화(enaction)의 장애는 또한 몸의 의도성의 기초가 되는 습관들, 게슈탈트 단위들, 그리고 암묵적 짝짓기들의 분해로 표현된다.
Comprehensive intentional arcs of perception and action are dissolved, so that single elements appear disturbingly in the foreground.
지각과 행위의 포괄적인 의도적 아크들(arcs)이 분해되며, 따라서 개별적인(single) 요소들이 전면에 어지럽게 나타난다.
I have called these phenomena the explication of the implicit or pathological explication.
나는 이러한 현상들을 암묵의 분석(explication) 또는 병리적 분석(pathological explication)이라고 불렀다.
3. Hyperreflexivity and explication condition and reinforce one another reciprocally.
고조된 자각과 분석(explication)은 서로가 서로의 상호적인 조건이 되고, 서로가 서로를 상호적으로 강화한다.
What was taken for granted up to now becomes questionable, the familiar becomes alienated, but the brooding self-reflection triggered by this contributes additionally to this disorder.
부여받은 것으로써 취해지던 것은 이제 의문스럽게 되어가고, 친숙한 것은 생소한 것(alienated)이 되어가지만, 이것에 의해 촉발되는 숙고적인 자기-자각은 이 장애에 추가적으로 기여한다.
Vicious circles of self-observation and self-alienation arise from this.
자기-관찰과 자기-소외의 해로운 순환은 이것으로부터 일어난다.
The anthropological basis of these phenomena can be localized in the destabilization that the natural enaction of life undergoes through the self- relationship of the person:
이러한 현상들의 인류학적 기초는, 개인의 자기-관계성으로부터(through) 삶의 자연적인 규칙화(enaction)가 영향을 받는(undergo), 탈안정화(destabilization)에 국한될 수 있다.
The “ex-centric position” (Plessner 1975) that a human being takes toward herself by seeing herself from the outside and with others’ eyes always already implies a component of self-alienation.
인간이 자신을 외부로부터 타인의 눈을 통해 보는 “외부-중심적 위치”(Plessner 1975)는 이미 항상 자기-소외의 요소를 시사해준다.
It also manifests itself in the ambiguous structure of embodiment, insofar as our bodily nature is not only something that we are but also something that we have.
그것은 또한 그것 자체를 결합성(embodiment)의 모호한 구조 속에서 표현하는데, 우리의 몸의 속성(nature)이 단지 우리인 것(something that we are)만이 아니라 또한 우리가 가진 것(something that we have)인 한 그러하다(insofar as).
Similarly, mental illness means more than simple suffering from certain states or symptoms.
유사하게, 정신질환은 어떤 상태들 또는 증상들을 단순히 겪는 것(suffering) 이상을 의미한다.
It also always implies a self-alienation or self-separation of the person.
그것은 또한 개인의 자기-소외 또는 자기-분리를 시사해준다.
Something in myself faces me, withdraws from my access, or dominates me, whereas I try in vain to get back my command of myself, whether it be a panic attack, a depressive mood, a compulsive impulse, or audible thoughts.
내 자신 속에 있는 어떤 것이 내게 얼굴을 내밀거나(faces), 나의 접근으로부터 물러나거나(withdraws), 또는 나를 지배하는데, 그에 반하여(whereas) 나는 나 자신의 지배력(command)으로부터 헛되이 후퇴하는데, 그것이 공황발작이든, 우울기분이든, 강박충동이든, 또는 청취사고이든 간에 그러하다.
Functions or impulses that were integrated up to now become independent or particularized and are derailed from my control.
통합되어 있던 기능들 또는 충등들은 이제(up to now) 독립적이거나 또는 특정화되어 가며 나의 통제로부터 이탈한다.
Being mentally ill touches the person centrally, in other words, in her self-relationship.
정신질환자가 되는 것은 개인을 중심에서(centrally), 달리 말하자면, 그녀의 자기-관계성을 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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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this reason the relation of the patient to his self represents a constantly effective component of the course of the illness.
이러한 이유로, 자기에 대한 환자의 관계성은 질병의 경과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대표한다.
Every psycho-pathological state is characterized by a certain relationship that the person affected assumes to it-—he can suffer it passively, give in to it, act it out, brood about it, fight against it, and so on.
모든 심리-병리적 상태는 영향을 받는 개인이 그것에 대해 가정하는 어떤 관계성에 의해 특징지어지는데, 즉 그는 그것을 수동적으로 겪고, 그것에 굴복하고, 그것에 반항하고(act out), 그것에 대해 숙고하고(brood), 그것과 싸우고, 등등.
These different ways of behaving oneself are in themselves significant features of an illness.
자신에 대해 행하는(behaving oneself) 이러한 서로 다른 방식들은 그 자체가 질병의 중요한 양상(significant features)이다.
The most radical manifestation of the relationship to self (and, as such, one possibility only given to the human being) is represented by suicide, to the extent that it means a patient’s final statement of opinion on his situation.
자기에 대한 관계성(그리고 마찬가지로 인간존재에게만 유일하게 주어지는 한 가지 가능성)의 가장 급진적인 표현양상은 자살로 대표되는데, 이것이 자신이 상황에 대한 환자의 최종적인 견해의 진술을 의미하는 경우에 그러하다.
Of course, we should not forget that major therapeutic means of treatment are based on the personal relation to oneself.
물론 우리는 대다수 처치의 치료적 수단은 자신에 대한 개인적 관계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만 한다.
Among these are reflection on one’s own path in life and relations to others as well as directing attention toward new behavioral patterns or exercises in mindfulness.
이들 중에는 자신의 삶의 경로에 대한, 타인들과의 관계에 대한, 또한 새로운 행동패턴이나 마음챙김의 실천(exercises)을 향한 지향적 주의(directing attention)에 대한 자각(reflection)도 포함된다.
Especially mindful, nonevaluating, and nonintervening observation of one’s own condition leads to a distancing from oneself that makes this state bearable and, at the same time, surreptitiously changes it.
특히 자기 자신의 상태에 대한 마음챙김적인, 비판단적인, 그리고 비개입적인 관찰은, 이 상태를 견뎌낼 수 있는 동시에 은밀하게 그것을 변화시켜 주는, 자신으로부터 거리두기(distancing)를 가져온다.
Under therapeutic guidance consciousness can ultimately become a tool for overcoming pathogenic relationships and patterns of behavior; for to be changed, they need to be made explicit in therapy.
치료적 지도하에서 의식은 궁극적으로 병리적 관계성과 행동패턴을 극복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즉 변화되기 위해서, 그들은(병리적 관계성과 행동패턴은) 치료에서 명백하게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As such, the polarity of the explicit and the implicit that results from the personal relationship to oneself brings with it the potential for illness as well as healing.
이와 같이 자신에 대한 개인적 관계성으로부터 초래되는 명백과 암묵의 양극성(polarity)은 질병의 가능성을 가져오면서 마찬가지로 치유(healing)의 가능성도 가져온다.
notes
주
1. The phrase “intentional arc” was coined by Merleau-Ponty (1962, xvii, 137, 243) as a means of referring to the natural underlying intentionality of the body that is not subject to ego activity.
“의도성의 아크(intenional arc)"라는 문구는 자아활동의 주체가 아니라 몸의 자연적인 기초적 의도성을 나타내는 의미로 Merleau-Ponty (1962, xvii, 137, 243)로부터 인용하였다.
2. Of course, the body can become conspicuous in a plethora of pleasant or pleasurable experiences as well; see, e.g., Shusterman 2008, 15 ff.
물론 몸은 또한(as well) 기쁨 또는 즐거운 경험의 과잉(plethora)으로(in) 두드러질(conspicuous) 수도 있다.
3. In the last analysis, this holds for all embodied enactions. For if I intentionally lift my arm, the origin of its movement remains inaccessible to me: Volitionally I can only release the movement, just like one shoots an arrow by letting the bowstring loose.
최종분석에서, 이것은 모든 결합된 규칙화들(enactions)을 갖는다. 예로써(for) 만일 내가 의도적으로 내 팔을 올릴 때, 그 움직임의 기원이 나로서는 접근할 수 없는 것(inaccessible)으로 남아있는 경우이다. 의지적으로 나는 단지 그 움직임을 방출할 수 있을 뿐인데, 마치 활시위를 놓쳐서 화살을 발사한 것과 같다.
4. In this story, a young man loses his extraordinary natural grace through an inconspicuous event: After taking a bath together with a friend, in the mirror, he notices himself performing a spontaneous gesture, which reminds them both of a classical sculpture.
이 이야기에서, 청년은 눈에 뜨지 않는 사건을 통해 엄청난 자연적 은총을 잃었다. 즉(:) 친구와 함께 목욕을 하고나서, 거울 속에서, 그는 자발적인 자세를 취하는 자신에 주목했는데, 그것은 그들 둘 다에게 고전적인 조각작품을 생각나게 했다.
His attempts to reenact the gesture that has now become conscious turn into an empty pose and fail awkwardly:
이제는 의식적으로 되어버린 자세를 재규칙화(reenact)하기 위한 그의 시도는 공허한 포즈로 변질되거나(turn into) 또는 서투르게 실패한다. 즉(:),
“From that day, from that very moment, an extraordinary change came over this boy. He began to spend whole days before the mirror. His attractions slipped away from him, one after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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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 An invisible and incomprehensible power seemed to settle like a steel net over the free play of his gestures. A year later nothing remained of the lovely grace which had given pleasure to all who looked at him” (Kleist 1961).
“그날 이후로, 바로 그 순간 이후로, 엄청난 변화가 이 소년을 덮쳤다. 그는 하루 온종일을 거울 앞에서 보내기(spend) 시작했다. 그의 매력은 그로부터 빠져나와 타인의 앞에 놓였다. 보이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힘이 그의 자유로운 자세 취하기 앞에 철조망처럼 자리 잡은 것 같았다. 한 해가 지나서, 그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던 사랑스러운 은총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Kleist 1961).
5. It is not possible to address in more detail therapeutic interventions. These consist mainly of methods from movement, dance, or art therapy that aim at furthering the experience of self-efficacy and the grounding in embodied enaction.
보다 더 자세한 치료개입들을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이것들은(치료개입들은) 자기-효능감의 경험을 촉진하고 결합된 규칙화(enaction)의 토대를 만드는 움직임, 춤, 또는 예술치료의 방법을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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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Sass와 Parnas 논문> 이해에 도움이 되십사고 <번역물> 한 편을 더 올립니다. 오늘 올린 3편의 번역물은 아직까지 최종완성된 상태가 아닙니다. (하지만 오역은 거의 없을 것이며, 상당한 정도로 완성되어 있습니다.) 향후에 번역을 점검하여 최종완성본을 올릴 것입니다. 또한 조만간 시간을 내어서 이 번역물들의 <요약소개문>을 별도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