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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심판석"
우리가 주와 더불어 영원히 함께 거하기 위해 휴거할 때에, “우리가 반드시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리라" (고후 5:10, 롬 14:10). 이 때는 마음을 감찰하는 때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라고 하는지 찾아 보기로 하자.
1.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이제 방금 인용한 두 참조 구절의 내용을 유의해서 읽어보며, 이 말들은 오직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쓰여진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죽은 불신자와 사악한 자들은 계시록 20:11-15절에 기록된 "크고 흰 왕좌"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죽은 불신자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지상 천년 통치 후가 되기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교회가 들림을 받을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가 일어나는" 순간에 "생명의 부활"이 있을 것이다. 우리 주께서 친히 요한복음 5:29절에서 언급한 "생명의 부활"과 "정죄의 부활" 이 두 부활사이에는 그리스도의 지상통치 1000년이 있을 것이다 (계시록 20장을 다 보되, 특히 5,6, 12-15절을 유의하라). 여기 보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릴 권능을 갖지 못하고“ - "사망과 지옥도 불 호수에 던져 졌더라. 이것은 둘째 사망이니라" (계 20:6,14).
교회가 들림을 받을 때 구속함을 받은 큰 무리들이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날 것이다. 왜 "심판석"이 있는가? 우리의 죄가 십자가에서 심판을 당하지 아니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죄를 영원히 기억도 하시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시지 아니하셨던가? 그렇다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제거하셨음이 사실이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우리의 죄와는 상관이 없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니 모든 죄들은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에 씻김을 받았다. 그렇다면 왜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야만 하는가? 그 해답은 아래에 명백히 들어나고 있다.
2. "그 불이 각 사람의 일이 어떤 종류인지 그것을 시험할 것이기 때문이라" (고전 3:13).
고린도전서 3:11-15절을 유의해서 읽어보라.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무슨 일이 일어 날까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다. 이 설명에서 구원 문제는 전연 없다. 그 큰 무리 가운데서 각인이 자신을 드러낼 것이다. 왜냐하면 각자의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기초" 위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11절). 그것은 상을 타느냐, 상을 잃느냐 하는 우리 행위의 시험의 때이다. 구원은 상급이 아니라 선물이다. 구원은 온전히 받는다고 하면 저 세상에 가서가 아니라 바로 여기 이 세상에서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까지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기초인 그리스도 예수 위에 세운 공력은 "금, 은, 보석, 나무, 건초, 짚"으로 비유된다. (고전 3:12). 그런데 "불이 시험할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의 불은 "나무, 건초, 짚"으로 된 모든 것을 불사를 것이다. 기독교의 이름을 빙자하여 내 자신의 영광, 내 교회의 영광, 그리고 내 가정의 영광을 위해 행한 모든 것이 다 불타게 될 것이다. 나는 지상에서 사람의 칭찬을 받는 등 나의 상을 이미 받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소위 기독교 봉사라는 것이 그 날에 가서 "자기 자신의 찬양"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일이다.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나는 금은 하나님의 신성과 영광의 상징이다. 은은 구속의 모형이니, 이스라엘은 언제나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은으로 속죄금을 지불했던 것이다. 그리고 보석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된 영혼을 가리킨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보석들을 만드는 그 날에 그들을 나의 소유로 삼을 것이요." (말 3:17).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을 가진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 높이 올리는 순간마다, 말하자면 금을 쌓는 일이니, 이것은 곧 기초 위에다가 불타지 않고 지속될 공력을 쌓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구속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마다, 우리는 그 기초 위에 은을 놓는 것이니 이 은도 불타지 않고 남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로 한 영혼이라도 인도해 오는 순간마다, 우리는 기초 위에 보석을 쌓는 것이니 이것도 불타지 않고 영원히 지속할 것이다. 그리하여 불 시험에 타지 않고 남아 있는 것도 주님의 영광을 찬양한 것이며 무궁세대까지 나아간다.
내 친구여, 묻노니, 그대는 하나님의 거룩한 불 시험에도 견디어 낼 수 있는 건물을 세우는 데에 어떤 종류의 물질을 투입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세상이 크다고 부르는 일거리를 구하시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물 한그릇 대접한 것도 잊지 않고 상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는 당신의 구원을 문제시 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는 구원을 받은 후에 하나님께 봉사할 겨를도 없었다. 주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기 이전에 우리 행한 모든 것을 일체 인정하시지 않으신다. 회개한 강도는 구원을 받았다. 그는 "구원은 받았으나 불 가운데서 얻는 것 같았다." (고전 3:15). 하기는 이 말이 위로가 되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일단 우리가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업을 믿고만 있다면 봉사에 관계없이 우리는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그 날에 가서 주님을 영화롭고 영예롭게 할 아무런 일거리도 없이 빈털털이로 만나는것이 그대는 기분이 좋은가? 몇년 전에 텍사스의 달라스에서 큰 호텔에 화재가 발생했다. 어떤 손님들은 짐꾸러기를 가지고 빠져나왔는가 하면, 또 어떤 손님들은 겨우 잠옷 바람으로 피신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옷을 모두 불태우지 아니하고도 거뜬히 안전하게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도 구원은 받았지만 상이 없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요, 구원도 받고 상까지 받을 자도 있을 것인데, 당신은 어떤가?
구주를 만나기는 하지만
상 받을 것은 어떤고?
우리가 주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한 이래로 우리의 모든 행위, 우리의 모든 말, 우리의 모든 생각이 그 날에 가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고전 4:5). 알려지지 않고 소리나지 않게 한 말과 자비의 행위, 조용한 찬양과 기도, 모든 이기적인 동기와 쓸데 없던 말씨와 추잡한 생각, 이 좋고 나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모든 것을 관찰하시는 눈 앞에 행렬을 짓고 지나갈 것이다. 이 얼마나 엄숙한 생각인고!
3. “어떤 사람이 그 기초 위에 세운 일이 남아 있으면 그는 보상을 받고” (고전 3:14)
내 친구여, 그대는 학교 시절의 시상일(施賞日)을 기억하는가?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 돌린 봉사에 대해 하나님이 친히 상급을 주실 날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우리는 그 상급을 한번 들추어보자.
(a) “생명의 관" (약 1:12)
“시험을 견디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단련을 받은 뒤에 주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관을 받으리라.” 주님께서 받았던 것과 같은 어려운 시험을 당하고 있는 분에게 내가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시험을 견디는 자는 복이 있도다!"
(b) "의의 관" (딤후 4:8)
바울은 이 세상을 떠날쯤 되어 이런 말을 기록했다. “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관이 예비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 내게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시리라.” 바울은 1800년 이상을 하늘에 있어 오지만 아직 그 의의 관은 받지 아니했다. 그럼 언제 그 의의 관을 받느냐? 그것은 "그날에" 가서 그에게 안겨질 것이다. 의의 관은 "그의 나타나심을 사모하고 신실히 봉사한 모든 사람의 상이 될 것이다.
(c) “썩지 아니할 관” (고전 9:25)
단일한 목적을 두고 그 목표에만 눈을 집중해서 그리스도인의 경주를 달리는 모든 신자에게 이 썩지 아니할 관이 수여 된다. 이렇게 하자면 "모든 일"에 절제해야 한다.
(d) “영광의 관” (벧전 5:4)
"하나님의 양떼"를 신실하게 먹여온 목자장 아래 있는 모든 목자들에게 이 상이 약속되어 있다. "그리하면 목자장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가 사라지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받으리라." 모든 목사, 복음전도자, 교회학교 교사, 아버지, 어머니, - 이와같이 각자에게 위임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먹여 준 그들에게 주님은 "사라지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승천하사 중재의 기도를 드리시고 나중에 재림하실 것이라는 이 사실, 이것이 곧 메시지다. 이 메세지를 전하고 가르친 일에 대해 약속된 것이 영광의 관이다. 그런고로 목사나, 교회학교 교사나, 가정에서 성경교사 노릇하는 양친부모가 된다는 것은 굉장한 일인 것이다! 이런 귀한 메세지 외에, 아무리 아름답고 친절한 메세지라 하더라도 그런 것을 전한 후엔 상을 받지 못할 것이다.
(e) 순교자가 쓸 생명의 관 (계 2:10)
"네가 죽기까지 신실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이 성경구절은 야고보서 1:12절과 흔히 관계하고 있는데 여기서 언급된 두개의 생명의 관은 작은 시련이든 또는 "죽기까지" 이른 시련이든 간에 하여간 시련을 견디고 온데 대해 수여되는 생명의 관으로 생각되어지고 있다. 여하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생명을 바친 사람들에게 특이한 방법으로 상 주심을 우리는 기쁘게 생각해 본다.
(f) "기쁨이나 환희의 관" (살전 2:19,20)
이것은 영혼구원에 대한 면류관이다. 이런 말씀을 기록한 사도 바울에게는 과연 이것은 어떠한 면류관일까! 데살로니가 교회뿐만 아니라 바울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 기타 다른 지방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분 앞에서" 바울의 기쁨이나 환희의 관이 될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나는 가사(家事)에 얽매여 꼼짝할 수 없으니 어떻게 밖에 나가서 전도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한다. 그러나 친구여, 묻노니 그대는 당신 집을 방문하는 이웃 사람이나, 배달하는 소년이나, 낯선 손님, 그리고 자기 가족에게 전도해서 몇 명이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했던가? 그리고 그대가 주님을 떠나 멸망받는 상태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목사의 말을 칭찬하시는 것만큼 역시 당신의 그런 간구의 기도도 칭찬하신다. "혼들을 얻는 자는 지혜로우니라... 지혜로운 자들은 궁창의 광채같이 빛나고 많은 사람을 의로 돌아서게 하는 자들은 별들과 같이 영원무궁토록 빛나리라." (잠 11:30, 단 12:3).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 나와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그것을 굳게 붙잡아 아무도 네 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계 22:12,3:11).
몇년 전에 어떤 도시에 어떤 사람이 거리 한 모퉁이에 서서 전도지와 기타 기독교의 발간물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노동복을 걸친 노동자가 이 전도지를 한장 받아선 읽고선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영접했다. 후에 이 사람은 자기를 구원하는 데에 인간적으로 도움이 되어준 그 사람에게 감사의 말을 드리러 다시 그 길 모퉁이로 갔건만 거기엔 그 사람이 있지 아니했다. 이에 생각하기를 아마 전도지를 배부하던 사람이 아프거나 또는 다른 곳으로 옮겨간 것으로 여기고, 자기가 이젠 그 알지 못하는 사람을 대신해서 그 곳에서 전도지를 분배하기로 했다. 일년 후에, 어떤 간증하는 모임이 있어서 이 사람이 자기의 회심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마침 그 청중 가운데 이 사람의 알지 못하던 친구가 거기 있었다. 그런데 청중 가운데서 간증을 듣고 있던 그가 일어나서 하는 말이 "오, 내 친구여, 나는 그 후 실망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대가 나의 면류관을 차지하셨군요"라고 했다.
나의 그리스도인 친구여, 당신이 정한 그 봉사 위에서 그대는 실망하고 있지는 않는가? "네가 가진 그것을 굳게 붙잡아 아무도 네 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예수님은 오신다.
그리고 "당신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를 주님은 잊으시지 아니하신다. (히 6:10).
4. 믿는 자에게 대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방법들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변호를 받을 것이다.
왜 하나님이 당신에게 허약한 몸을 주셨는지 알게 될 것이며, 또 왜 하나님이 당신에게 행운을 피하게 하셨는지, 그리고 왜 슬픔과 상심과 고통이 있게 되었는가를 당신은 그 때 가서 참으로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은 우리가 지금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보나 그때에는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며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 같이 나도 알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고전 13:12). 그 때는 모든 신비가 풀리며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된다. “생각하건대 이 현 시대의 고난들은 앞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도다.” (롬 8:18)
그리고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우리가 알아낼 것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에서 우리의 활동의 지위가 어떤 것인가를 아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5성을 다스릴 것이요, 또 어떤 사람은 10성을 다스릴 것이다. 우리의 봉사의 위치는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성공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신실성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께서 받아 주시는 자가 되려고 수고하노라. 우리가 반드시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리라." (고후 5:9,10)
"어린 양의 혼인 잔치"
교회의 휴거와 또 그리스도가 성도들을 대동하고 영광가운데 가시적 신체적인 모습을 가지시고 재림하는 이 두 사건 사이의 어느 때에 "어린 양의 혼인 자치"는 있을 것이다. (계 19:7-9를 보라). 이 혼인잔치는 그리스도의 심판석 다음에 올 것은 너무나 명백하게 보인다. 혼인잔치는 아마도 지상에서 다니엘의 70이레가 계속되는 동안의 교회휴거 기간 끝에 가서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과연 혼인잔치의 광경은 호화찬란하리라!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혼인잔치에서 신랑되신 그리스도에게 인도될 것이다. 계시록 19장이 하늘에서 울려나오는 "할렐루야!"로 시작됨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1. 그 신부(아내)가 "예비되었다." (계 19:7,8).
"그녀가 깨끗하고 희고 고운 아마포 옷을 차려입도록 허락하셨는데 그 고운 아마포는 성도들의 의(the righteousnesses)니라." 단어를 보면 "righteousnesses"(옳은 행실들)이다. 즉 복수다. 죄인이 구속받기는 그리스도의 때묻지 않는 의로 말미암지만, 이 성경구절에서 말하는 것은 믿는 자의 의로운 행실들(acts)이다. 즉 그것은 믿는 자를 더욱 더 그리스도를 닮게, 또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더욱 더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는 행실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앞으로 신부가 되어 혼인잔치에 이르려면 아마포를 입을 소망을 가져야한다. 신부는 신랑을 만나기 위해서 한 바늘 한 바늘 착실히 수를 놓고 조각을 부친 아마포 옷을 만든다.
이것이 계시록 19:7,8절의 의미에 대한 한 예이다. 우리는 소망의 상자를 가지면 하나님은 그 속에다 모든 의로운 행실을 빠뜨리지 않고 담으신다. 이 장면이 그리스도의 심판석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것이다. 당신과 내가 주 앞에 서고 우리의 상급이 전시될 때에, 우리도 주님 앞에 소개 되겠는데,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함이다.
당신은 소망의 상자에 오늘 아침까지 무엇을 담아 오고 있었는가? 어제는 무엇을 담았던가?
그 날에 우리는 아름다운 사람이 될 것이다. 첫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갈보리 사역을 믿는 순간 그리스도가 주신 그 의로 말미암아 아름다워질 것이요, 그 다음엔 주께서 오실 때에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칭찬 받게 되는" 의로 말미암아 또 아름다워 질 것이다.
2. “어린양의 혼인 만찬에 부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계 19:9)
"청함을 받은 자"는 누구냐? 신부가 "청함을 받는 것"은 아니다. 혼인 잔치의 손님들은 잔치에 초대받거나 "청함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면 여기 있는 청함을 받은 자란 누구를 하는 말이냐? 혹자는 이스라엘이 그 신부라 한다. 그러나 지금은 하늘의 장면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사실 지상의 백성이다. "청함을 받은 자"는 누구냐? 아담, 하와, 아브라함, 다니엘, 이사야, 예레미야, 다윗, 솔로몬등 기타 많은 구약의 성도와, 신랑의 친구였던 세례 요한, 기타 예언 하셨던 그리스도가 실제 역사적으로 나타나신바 그러한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오순절에 교회가 시작되기 전의 모든 사람들, 이들이 총합해서 "청함을 받을 자"의 무리가운데 속하는 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대 환란을 통과하면서 적그리스도를 경배하지 아니했던 대환란을 겪은 모든 성도,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당한 자들, 이들이 또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의 무리에 초청을 받는 자가 될 것이다.
갈보리에서 흘린 피로 우리의 옷을 정결케 씻기만 한다면 당신과 나도 거기에 있게 되겠는데, 그러나 우리는 그 잔치에 초대 손님이 아니다. 그럼 뭐냐?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의 일원이 될 것이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그분께 존귀를 돌릴지니" (계 19:7). 우리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볼 것이요,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될 것이다. 더 이상 죄도 없고, 더 이상 저주도 없다. 우리의 면류관들도 하나님의 영광의 찬양이 될 것이다.
아직도 구원 받지 못한 나의 친구여,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고대하고 있는 피로 깨끗하게 씻음을 받을 우리에 속하지 아니하려는가? 그대도 신부로서 지금은 물론 영원무궁토록 구속 받은 자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신부의 눈길은 예복에 있지 않고
사랑하는 신랑의 얼굴에 있도다
내가 영광을 바라보기보다
은혜의 왕을 더 바라보노라.
당신이 주신 면류관을 보기보다
당신의 상처 입은 손을 보노라
오, 임마누엘 땅에서
오직 어린양만이 영광스러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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