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당하는 고통에는 견딜만한 고통도 있고,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도 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내 힘으로, 내 재주로, 내 능력으로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럴 때 만약 나를 도와줄 수 있는 구원자가 내 곁에 다가온다면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복음의 소식이겠습니까? 우리는 마땅히 그 구원자에게 도움을 빌어야 하고, 또 구원을 요청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종종 일어나는 두 가지의 비극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런 고통을 만날 때 누가 나의 구원자가 될 수 있는가, 또 구원자가 있어도 그 구원자를 구원자로서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없다는 비극입니다. 엠마오 길에서의 두 제자의 비극이 그런 유형에 속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절망과 체념 속에서 엠마오 길을 걷고 있던 두 제자 곁에 구원자이신 주님이 다가오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들의 눈이 열리기까지 그분을 주님으로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없었습니다.
또 하나의 비극은 구원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도움을 구하지 않는 비극입니다. 가룟 유다의 비극이 이 유형에 속합니다. 만약 그가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라고 도움을 요청했었더라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함이 항상 제 마음속에 있습니다. 제 마음에 있는 분명한 확신은 주님께서는 그를 받아주셨을 것입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자들을 향해 용서의 기도를 드렸던 주님께서 가룟 유다의 도움을 거절하셨겠습니까? 그런데 그에게는 뉘우침이 없었습니다. 주님 앞에 찾아가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많은 이야기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자존심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교만 때문입니다.
지난 수요일 장날에 나이 드신 할머니가 언양 시장에 오시려고 궁근정에서 버스를 탔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버스가 움직이는 바람에 할머니가 그만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버스에 탄 사람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할머니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는데 한 청년이 할머니에게 다가서며 “할머니, 괜찮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화를 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지금 그게 문제야? 쪽팔려 죽겠는데.”
종종 우리는 도움을 구하는 것이 하등의 부끄러움이 아닐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자존심과 교만 때문에 자기를 노출하고 도움을 구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성경적인 표현을 빌린다면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룻이라는 여인이 가지고 있었던 미덕 가운데 하나는 자기의 비참한 처지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은혜를 구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 2절의 말씀입니다. 본문 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룻의 이러한 마음은 13절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이런 마음이 룻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은혜를 구하는 태도가 룻이 직면하고 있었던 어둠과 고통의 인생 속에 은혜로운 새 아침을 가져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룻은 어떤 형편에 있습니까?
첫째로, 그녀는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남편조차 상실하고 시어머니를 따라 낯선 나라로 온 룻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방 사람이었습니다. 이방 사람이라는 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에서는 굉장히 비극적인 형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아침에 드리는 감사 기도의 내용 가운데는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저를 이방인이 아닌 선민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소외되고 천대를 받았던 사람들이 이방인이었습니다.
더구나 룻은 모압 여인입니다. 모압의 조상에 대해서는 첫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큰 딸이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 동침한 뒤에 낳은 아들이 모압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모세 율법에 보면, 애굽인이나 다른 이방인들은 어느 정도의 세월이 지나면 이스라엘 백성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 예배를 드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모압인들은 영원히 이스라엘의 백성이 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 여인, 그것도 모압 여인이었던 룻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도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특권에서도 배제되고 있었습니다. 본문 2절에서도 룻을 소개하면서 "모압 여인 룻"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철저히 이방인이었습니다.
둘째로, 그녀에게는 생존의 수단과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방 고향을 떠나 보리 추수가 한창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룻에게는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지금 룻 자신에게 있어서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는지 살 길이 막연했습니다. 시어머니를 따라 문자 그대로 빈손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생존의 수단과 방법이 전혀 없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내일에 대한 어떤 보장도 없었습니다. 지금 룻은 밖으로부터 오는 도움이나 밖으로부터 던져지는 은혜가 없이는 재기가 불가능한 그런 암담한 형편에 직면해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 룻의 처지와 모습은 하나님 없이, 또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전형적인 그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1절 이하에서 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살고 있었던 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1절과 1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것은 지금 룻의 모습을 얼마나 적절하게 그려주고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룻의 인생에 새 아침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 사람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의 이름은 보아스입니다. 보아스와의 만남이 한 순간 룻의 생애의 장면을 전격적으로 뒤집어 놓고 맙니다. 보아스에 관해서 룻기가 사용하고 있는 탁월한 표현 하나가 있습니다. 룻기 2장 20절의 말씀인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여기에서 “기업을 무를 자”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영어 성경에서는 “친척 구원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현대어 성경에서는 “우리를 떠맡아 주셔야 할 사람 가운데 한 분”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친척으로서 나를 구속할 수 있는 자, 친척으로서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내 삶을 새롭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구속자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룻기의 가장 중요한 사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먼저 우리는 여기에서 구속의 대상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려고 합니다. ‘구속’이라는 개념은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아 대가를 지불한 다음에 원래 상태보다 더 나은 상태로 돌려놓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서는 이 구속의 대상으로 세 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땅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영원히 잃어버린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매 7년의 안식년이나 50년이 되는 희년이 되면 그 땅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라도 누군가가 대가를 지불하면 언제든지 자기가 잃어버렸던 땅을 다시 되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그 땅을 구속한다.”고 말합니다.
둘째로, 노예입니다.
어쩌다가 노예가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럴지라도 누군가가 대가를 지불하면 그 노예된 자리에서 언제든지 풀려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얽매인 노예의 자리에서 다시 자유인의 신분으로 해방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들은 구속의 꿈과 희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셋째로, 과부입니다.
과부는 친척 중에서 구속을 합니다. 남편이 다시 살아서 돌아올 수는 없지만 친척 중의 한 사람이 같이 살아주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과부들은 종종 과부로서 노예가 되었습니다. 룻이 밭에 가서 일을 한다는 것은 비록 그 집에 속한 노예는 아니지만 노예와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지만 친척 중에서 누군가가 같이 살아주면 옛날의 삶을 다시 되찾을 수 있는 희망이 남아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구약성경에서 구속의 대상은 땅과 노예와 과부였습니다. 이 세 가지 대상을 구속하는데 있어서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꼭 그에 따른 값을 누군가가 치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값을 대신 치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구속자의 자격입니다. 구속자는 구속하기 위해서 세 가지의 자격을 갖추어야만 합니다. 이 자격이 없으면 어느 누구도 구속자가 될 수 없습니다.
첫째, 친척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나 돈을 냈다고 해서 그 땅을 다시 되찾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친척이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둘째로, 유력자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값을 치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자원해야 합니다. 친척이고, 값을 모두 치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구속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구속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드디어 룻의 고통과 절망과 저주의 인생을 구속할 수 있는 구속자가 등장합니다. 마치 룻기를 기록하는 기자는 이 구속자를 빨리 소개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어 하는 것 같습니다. 문학적으로 다소 기교를 부리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런 사건, 즉 아주 극적인 구원자가 나타나는 장면은 통상 마지막 장면에 등장시킵니다. 그래서 상황의 반전을 극대화시킵니다.
그런데 룻기의 저자는 마치 이 사람을 조금이라도 빨리 소개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아예 처음부터 소개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극적인 효과가 좀 감소됩니다. 그렇지만 그만큼 룻기의 밑바탕에는 이 구속자를 빨리 소개하고 싶어 하는 기자의 조급한 마음이 깔려 있습니다. 본문 1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룻기의 저자는 룻의 고통과 저주와 어둠을 해결할 수 있는 기쁜 소식이 있다는 사실을 소개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이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에 대한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내 삶에 영원한 새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빨리 전해 주고 싶은 구원자이십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빨리 전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심정이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여러분에게는 있는지요?
보아스가 룻에게 은혜를 베풂으로써 룻의 삶이 달라집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왜 그런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까? 물론 친척이고 유력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2장 12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다는 이 사실만으로도 베들레헴의 사람들에게는 이야기 거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아스는 룻이 어떤 여인인가를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룻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녀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그 감동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이 아름다운 표현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지금 보아스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보아스를 통해서 룻에게 은혜를 베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아스는 구속자의 놀라운 하나의 모형이 됩니다. 보아스는 신약에서 우리의 구속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속자로써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구속자로서의 세 가지의 자격을 모두 갖추고 오셨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친척이 되셨습니다.
신약성경의 중요한 선언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셨다.”는 성육신의 사건입니다. 인간으로서, 그리고 형제로서 우리의 구속자는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분은 친척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이 개념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2장 1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의 형제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범죄함으로 누더기 인생이 된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인간의 몸을 입고 형제처럼 우리들 곁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속자가 되십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구속의 능력을 소유하셨습니다.
구속자의 두 번째 자격은 유력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속할 대상의 구속의 값을 치를 수 있어야 했습니다. 신약성경은 인간의 근본적인 노예됨이 인간이 죄 아래 팔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죄에서 구속될 수가 있겠습니까? 죄 없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인간을 구속할 수가 없습니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할 때마다 흠과 티가 없는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그분만이 인간을 구속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십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자원하셨습니다.
구속자는 구속하는 일을 자원해야 합니다. 기쁘게 값을 치르기를 원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값을 치르기를 원하셨습니다. 히브리서를 통해 보여지는 예수님의 놀라운 선언 가운데 하나는 이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7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얼마든지 십자가를 피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자원해서 그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신이 십자가를 담당하지 않으면 구속의 희망이 전혀 없는 우리를 위해서 이 십자가를 스스로 지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을 ‘passion’이라고 합니다. passion이라는 말은 수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정열, 열정”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기쁘게 감당하셨다는 말입니다.
본문 3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이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성찰자는 이것을 ‘우연’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고 믿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우연이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서 이루어지는 필연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룻이라는 이 여인의 인생을 고치시기 위해 개입하십니다. 이 여인의 운명을 전환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이 여인의 발걸음을 보아스의 밭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쩌면 내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어찌 어찌해서 누구를 만나서 예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사람들은 우연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필연이었습니다. 그것은 내 삶을 경영하시고 주장하시는 그분이 내 운명을 고쳐주시기 위해서 예정하신 섭리의 발걸음이었던 것입니다. 룻과 보아스와의 우연에서 보이는 이 필연적인 만남은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온 이 여인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사전에 우연은 없습니다. 성경에서도 잠언 16장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룻은 보아스와의 만남의 사건을 통해서 자기의 생존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육체적으로 먹고 살게 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장차 룻은 보아스의 신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빛나고 영광스러운 사랑의 신부로 삼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저는 우리 기독교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단어 가운데 하나가 이 ‘은혜’라는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일방적인 호의”입니다.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영원히 어둠의 자녀로 살아야만 하는 우리가 빛의 자녀로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은혜를 아십니까?
교회에 출석은 하지만 아직까지 이 은혜라는 단어의 뜻을 모른다면 그는 은혜 안에 든 사람이 아닙니다. 은혜를 깨달은 사람만이 이 단어의 뜻을 압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체험한 사람만이 이 찬양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내 삶의 밑바탕을 보시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가장 비밀한 것을 파헤쳐 내 의식과 생각의 동기를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길이 전혀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러한 나에게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분이 보혈을 흘리심으로써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의 죄에 내려진 하나님의 저주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 와서 용서를 구하는 자마다 값없이 용서를 받을 수 있는 놀라운 은혜의 자리를 예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그 순간부터 평생을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리고 소유하는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어느 날 자기가 살아온 전 일생을 회고하면서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사랑하는 여러분, 묻습니다. 당신은 이 은혜를 체험하셨습니까?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 현대인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두 가지의 비극이 있습니다.
첫 번째 비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심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죄책과 무의미와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한 채 방황의 그늘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출석하면서도 예수님께서 구세주라는 사실을 관념으로 밖에 알지 못합니다. 이론상으로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삶의 깊은 곳에서 고백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기쁨을 누리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비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분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많은 원인들이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도움을 받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교만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자신의 힘으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자신의 힘만으로도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다 자신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구원의 문제에서만은 자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 인간의 본래 모습입니다. 죄로 그 마음과 생각이 어두워진 인간은 스스로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 어떠한 것도, 내 능력과 노력도 소용이 없는 철저한 자기 확인에 도달한 사람이어야 구원자를 찾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구원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십니까? 이 선물을 받아들임으로, 이 선물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 주님 앞에서 구원의 감격과 놀라운 은혜를 누리는 삶을 가지십시오. 룻처럼 자기의 구원자를 만나는 순간 그 발 앞에 엎드리십시오. 룻을 보십시오. 그녀가 어떻게 고백하는지를 말입니다. 본문 10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룻은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그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13절에서 이렇게 자신의 필요를 겸손하게 구하고 있습니다.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유명한 과학자 코페르니쿠스의 무덤 비석에는 그의 유언을 따라서 이런 비문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나는 바울의 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베드로의 능력을 구하지 않습니다. 오 하나님, 나는 회개하는 강도에게 주셨던 은혜를 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엎드리어 주님의 이 은혜를 체험했던 감격이 당신의 삶 속에 있는지요?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던 룻의 새 아침은 은혜의 아침이었습니다. 그것은 룻이 하나님의 집, 베들레헴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께로 나아오십시오. 주께로 돌아서십시오.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는 자는 은혜의 새 아침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순간부터 내 삶에는 은혜로운 날들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