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베스트에세이10선]
탈각 / 강천
호랑나비가 우화했다. 생사를 오가는 날개돋이 과정을 거치고서 드디어 세상의 밝은 빛을 보게 되었다. 애벌레 시절의 생김새와는 전혀 다른, 화려한 날개를 가진 새로운 몸을 얻었다. 나비가 껍질을 벗어던지고 나서 제일 먼저 내지른 고고의 일성은 ‘찍’하고 과거를 털어내는 오줌 한 방울이었다. 그리고는 두어 시간 날개를 말린 다음 드넓은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나비는 완전변태를 하는 곤충이다. 애벌레에서 번데기로 용화 되었다가 성충으로 탈바꿈한다. 같은 곤충이라도 불완전탈바꿈을 하는 메뚜기나 사마귀들은 어릴 때부터 성체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에 반해 나비는 상상하기 어려운 외양의 변화과정을 거친다. 외모만 그런 것이 아니다. 애벌레는 나뭇잎을 갉아먹지만 나비로 변태한 후에는 꿀이나 수액을 대롱 같은 주둥이로 빨아먹는다. 그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번데기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분명히 벌레가 번데기로 굳어졌는데,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은 액체에 가까운 원형질 상태라고 한다. 보름 남짓한 기간에 몸이 완전히 녹아내려 나비로 재조립되는 것이다.
애초에 알이 있었다. 나비가 초피나무 잎사귀 뒤편에 남긴 것이다. 그것은 그저 둥근 모양의 알일 뿐이었지 꿈틀꿈틀 기어 다니는 버러지가 아니었다. 기묘하게도 알 속에서 단백질이 일정한 법칙으로 반응해 머리가 되고 몸통이 되더니 다리가 되었다. 유전자의 지령이 이끌어낸 요소들의 조합작용 때문이었다. 이제 알은 알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죽었다. 애벌레는 알과 아무 관련이 없는 독립체가 되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부화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모태의 껍질을 씹어 삼켜 흔적을 없애는 일이었다. 완전범죄를 꿈꾸며.
벌레는 허물을 벗으며 덩치를 키웠다. 새똥처럼 생긴 일령에서부터 뿔 달린 오령까지 탈피 과정을 거칠 때마다 다른 몸을 받았다. 내가 보기에는 단순히 옷을 바꾸어 입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개체로의 재탄생이었다. 그것이 지난 생의 연장이었을까. 아니면 전혀 새로운 삶이었을까. 어찌 되었든 오령 애벌레는 제 할 바를 다했다. 죽음을 앞두고는 스스로 무덤 자리를 만들었다. 벌레는 죽었다. 영원한 안식을 꿈꾸며.
번데기는 먹지도 않았다. 그저 근 보름을 꼼짝하지 않고 매달려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유전인자라는 녀석이 또 상상을 초월하는 조화를 부려 호랑나비라는 얼토당토않은 생명체를 만들어 놓았다. 번데기는 과연 자기가 하늘을 날아다닐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과거와는 일촌도 닮지 않은 나비는 뒤돌아보는 법 없이 떠났다. 껍질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시골 마을의 빈집처럼 반쯤이나 허물어진 채 버려졌다. 실오라기 같으나마 나의 근원이라는 기억으로 이어져 있었다면 정녕 이러지는 못했을 터인데. 나비는 날아가 버렸다. 일탈을 꿈꾸며.
이런 일련의 변화가 한 생명체에서 일어난 성장 과정이었는지, 별개의 유전자가 서로를 이용해 상생하는 방식이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내 눈으로 보았음에도 그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냥 형태의 연장이 아닌, 전혀 다른 물질로 재탄생했기에 더욱 모호하다. 알과 애벌레가 연관은 있지만 서로 다른 개체이듯 애벌레 또한 나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물은 그 이름이 붙여지는 순간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고유의 속성을 가지게 된다. 가령, 장차 이 몸으로 세포 분열할 아버지의 정자도 그저 생식세포이었을 뿐이지 내가 아니었던 것이 확실하다. 내가 그것에서 비롯되었지만 나를 세포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정자는 유전자로부터 부여받은 제 할 일을 다 하고 생을 마감했다. 그 가느다란 인연을 빌미로 나를 생식세포와 동일시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은 곧 내가 되어버리게 된다. 따지고 보면 서로 연관성이 없는 물질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알과 애벌레와 번데기와 나비는 같은 듯하지만, 다른 이름을 가지고 다른 시간을 살아간 각자의 실체이다.
알에서 나비로의 조홧속은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일련의 과정이다. 다만 그 주기가 짧아 내 눈으로 확인이 가능했을 따름이다. 알과 애벌레는 모양과 형태뿐만 아니라 물리적 성질까지 엄연히 다 실재다. 두 물체의 인과를 이어주는 고리가 있다면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언제든 진화해버릴 이기적 유전자에 조작당하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변덕쟁이 유전자조차도 벗어날 수 없는 일관된 법칙이 있으니 바로 ‘변화의 영속성’이다. 불가에서는 이것을 일러 아마 ‘연기緣起’라 한다고 했지. 하나의 사멸은 곧 다른 인연의 탄생으로 갈아타는 일이기에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주기가 조금 길어서 직접 느끼지는 못하지만 내 육신도 물질로 이루어진 이상 이 변화를 피해 갈 수는 없다. 오늘도 그 과정 위에 서 있다. 몇십 년짜리 영화 필름 중에 화면에 비치는 한 컷이 지금이다. 조금 후는 분명히 다른 장면이 보일 테고. 나라고 생각하는 형상의 인두겁은 개념조차도 불확실한 ‘현재 이 순간’이라는 시간을 스쳐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 알은 애벌레가 잎을 갉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고, 벌레가 나비의 날갯짓을 꿈에도 모르듯 나도 이 몸을 탈각한 이후의 세상을 전혀 알지 못한다. 잠시 형상을 꿰맞추고 있는 신체라는 물질이 분해되어 풀이될지 지렁이가 눈 똥으로 변해 있지를 누구라서 알겠는가.
오늘, 그래도 나비는 힘차게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