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 초에 장안에는 ‘관상감(觀象監) 터에서 성인(聖人)이 나온다’는 동요가 떠돌았고
‘운현궁에 왕기(王氣)가 서려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얼마 안되어 금상(今上)이 태어났다.”
-매천야록에서
운현궁(雲峴宮)은 조선 26대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의 저택으로서, 고종이 탄생하여 12세에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이기도 하다. 그 집은 배산임수가 아닌 의산방수 (依山傍水)로서,
산과 물길을 좌우로 끼고 함께 흘러가는 형태로 동향집으로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의 시류에 따라 파락호 행세를 하며 웅지를 감추고 생활했던 흥선군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운현궁이 자리한 구름재는 서울에서 제일 가는 터로 꼽힌다.
현재 그대로 남아 보존되고 있는 노안당(老安堂) 노락당(老樂堂) 이로당(二老堂)은
전형적인 남향의 사대부 한옥이다. 이들 한옥은 백악(白岳)을 주산으로 좋은 자리를 지키고있다.
그리고 좌우에 내룡맥(內龍脈)을 거느리고 있으며 내수(內水)도 실한 편이다.
풍수전문가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는 한국경제신문에 연재한 '최창조의 풍수산책'에서
운현궁의 풍수지리를 이렇게 평가했다.
조선 왕조의 궁궐은 정궁인 경복궁은 주산인 북악에 대하여 상극이 되고,
북악은 이궁인 창덕궁에 대하여 상극이다. 그 사이에 있는 운현궁은 수에 해당된다.
"동명연혁고"에 보면 운현궁 바로 남쪽에 있는 교동초등학교 뒤의 고개는 비만 오면 땅이
몹시 질척거렸으므로 구름재라 불렸다고 한다. 또는 진골(泥洞)이라고도 하였다.
질척거리는 땅에서 구른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다시 한자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엉뚱하게 운현(雲峴)으로 바뀌고 이것이 운현궁의 지명 연원이 된다.
어찌 되었거나 서울의 주산인 북악은 창덕궁에 대해서는 상극이고
경복궁은 북악에 대해서 상극인 꼴이 된 것이다.
주산과 명당 정혈이 상극이니 왕조의 집안꼴이 말이 아닐 것은 정한 이치이다.
오행상으로 말이다. 하지만 금생수(金生水)이니 운현궁 터는 북악과 잘 어울리는
꼴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운현궁의 주인은 왕조의 적손(嫡孫)이 아니었다.
조선 후기의 유명한 관상가 박유붕(朴有鵬 1806년 ~ ?)이다.
1859년 54살 때인 어느 날 운현궁을 지나다가 우연히 열린 대문 사이로 마당에서 놀고있던 아이를 봤다.
이 아이의 관상이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결례를 무릅쓰고 운현방(운현궁)으로 들어가서 놀고있던 아이의 관상을
자세히 살펴보던 그는 그자리에서 땅에 엎드리며서 큰 절을 올리고는 ''상감마마 문안인사 올립니다" 라고 하였다.
마당에서 일을 하던 하인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흥선군 이하응에게 작은 도령 명복 도령에게 상감마마라고 하면서
큰절을 올리는 사람이 있다고 아뢰었다. 하인의 말을 들은 흥선군은 하인에게 그사람을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흥선군 앞에 불려온 행색이 초라한 애꾸눈 박유붕에게 흥선군이 자초지종을 물어보자 박유붕이 말하기를
지금 마당에서 놀고있는 도령님은 임금이 되실 분으로 4년후에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하였다.
흥선군은 박유붕의 말에 반신반의 하면서 관상을 봐주었으니 복채를 줘야 하는데 흥선군은 당시에 돈도없는
궁핍한 생활을 하던 처지로 복채를 줄돈이 없으니 어찌하겠냐고 하였다.
그러자 박유붕은 제왕의 관상을 보았으니 적어도 3만냥은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흥선군은 자신의 아들이 임금이 될것이라고는 믿지않고 반신반의 하면서 그러게 하자고 하고는
약정서를 써주었다.
세월은 흘러서 1863년 12월 8일 철종이 후사를 남기지 않고 승하한다.
신정왕후 조대비는 흥선군 이하응과 반나절이 넘는 긴 독대끝에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12살 이희(李熙 : 고종)에게 왕권을 물려준다. 사람팔자 시간문제라고 대군(大君)도 아닌 흥선군 이하응은
박유붕의 말대로 대원군(大院君)에 올랐다.
이하응의 둘째 아들 12살 이희가 왕위에 오르고 몇일 후에 박유붕은 흥선군으로 부터 돈을 받아서 싣고 오기 위해서
당나귀 4마리를 끌고 운현궁을 찿아가서 흥선대원군 이하응에게 약속했던 복채 3만냥을 받으러 왔다고 말하면서
약정서를 내놓았다.
박유붕이 찿아오자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박유붕의 지인지감(知人之鑑)에 탄복해서 자신의 책사로 삼고
운현궁 옆에 45칸 저택을 마련해주고 혜화문 밖의 돈암동에 수천평의 땅을 하사하였다.이를 시작으로 박유붕은
흥선대원군의 책사로 발탁된다.
흥선대원군의 시중을 들던 4인방인 천하장안(千河張安 : 천희연(千喜然), 하정일(河靖一), 장순규(張淳奎),
안필주(安弼周)과 함께 대원군의 심복으로 대원군을 모시면서 자신의 호인 백운학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경북 청도태생의 박유붕은 젊은 시절부터 점술과 관상을 공부했다.
결혼 후에는 처가에 내려오는 비서(秘書)를 접하고 최고의 관상실력을 갖춘다. 박유붕의 처가는 임진왜란 때
이여송 참모로 따라 왔다가 조선에 눌러 앉은 명나라 무장 두사충의 후손이다. 두사충은 당대 풍수, 점술,
관상의 일가를 이룬 사람으로 관상과 풍수의 비서(秘書)가 후손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관상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눈이 애꾸가 되어야 비범한 능력이 생긴다는 걸 알고 스스로 송곳으로 찔러
애꾸가 되었다고 하고 담뱃불로 지져 애꾸를 만들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고종 등극 후 영의정에 오른 거의 유일한 안동김문의 김병학은 고종의 사저인 운현궁 노락당기에서 말하기를
"우리 성상께서 임금이 되실 운을 받으시고 잠저에서 생활하시다가 임금 자리에 오르시니 땅은 그 신령함을
다 하였고하늘은 임금이 되실 조짐을 보이셨다. 늘 상서로운 빛과 기운이 성상이 기거하시던 지역을 감돕고 있어
탁지부에 명하여 옛 터에다 새집을 짓도록 하시었다"하였다.
그런 기운이 이 운현궁에서 느껴지는 것은 분명하다.
인근 동쪽에 와룡동이 있고 인왕산이 빤히 바라다 보이니, 이는 청룡과 백호를 갖추었음이라
풍수 이론상 흠잡을 데 없는 곳으로 평가되고 있다.
운현궁의 이름은 서운관(書雲觀, 관상감의 별칭)이 있는 앞의 고개라 하여 운현(雲峴)이라 불렸다.
운현궁(雲峴宮)이란 궁호도 서운관이 있던 고개라는 뜻이니 조선시대 천문과 기상, 풍수를 담당하던
관청과 숙명적으로 운이 닿아 있다.운현궁에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과
안채인 노락당(老樂堂), 그리고 새로 지은 안채인 이로당(二老堂)이다.
전형적인 남향집으로서 풍수지리에서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자좌오향(子坐午向)집이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 중의 핵심은 노락당(老樂堂)이다. 이곳에서 며느리 간택이 이뤄졌고 왕비 수업과
고종의 혼례도 이곳에서 치뤘다.고종이 왕위 보좌에 오르는 데는 극적인 요소가 많다.
당시 흥선군은 왕위 서열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방계 왕족이었다.
게다가 흥선군의 가계는 세도가였던 안동김씨들이 궁도령 이라고 비하하여 놀려먹는 처지였다.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 3요소가 있으니 천시(天時)와 지리(地理)와 인사(人事)가 그것이다.
천시라 함은 사주팔자(四柱八字)를 말하고, 지리라 함은 땅의 지기인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말하며,
인사는 관상(觀相)을 말한다. 이 중 어느 한가지라도 결격이 되면 역적이 되거나 이무기가 되고 만다.
고종이 왕에 등극하는 데는 시대적인 배경이 있었다. 왕위계승서열에서 한참 멀리 있던 철종이
왕에 오른것이라든지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한 것과 당시 세도가인 안동 김씨에 의해 똑똑한 왕위계승자들이
일찌감치 제거된 것들이 시대가 뒤를 받쳐 줬기 때문이다.
이에 킹메이커가 등장했으니 바로 신정왕후 조 대비와 흥선군이다.
효명세자의 妃 이자 헌종의 어머니인 조 대비 역시 안동 김씨의 세도에 짓눌려 지내던 처지였기 때문에
이하응과 뜻을 같이 하였다. 그리고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을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
철종이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자 조 대비는 양자로 삼은 명복을 등극하게 하여
철종의 뒤를 이으니 제26대왕인 고종이다.
대원군 이하응으로 부터 복채로 45칸 저택과 땅을 받은 박유붕은 다음 해인 1864년
대원군에게 자신이 죽은 후에 지방(紙榜)에 현고학생부군(顯考學生府君)이라는 신위만 쓰이는 신세를
면할수있게 벼슬 하나를 내려달라고 부탁을 하자 대원군 이하응은 박유붕을 경상도 울주군 언양현감으로
제수를 했다가 곧 경기도 화성의 남양부사, 장단부사등을 제수하고 내직으로 불러들이고 여러 관직을 거쳤다.
1866년 3월 6일 선혜청낭청과 영주군수를 지낸 여흥 민씨 민치록의 여식 민자영을 왕비로 간택을 하면서
대원군은 박유붕에게 민자영의 관상을 보라고 하였다. 대원군의 명으로 민자영의 관상을 본 박유붕은
민자영이 왕비가 되면 장래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앞길을 막게 될 것이라고 여러번 반대를 했다.
박유붕이 여러 번 민자영이 왕비가 되는 것을 반대하자 대원군은 박유붕에게 역정을 내면서
1866년 3월 21일 민자영을 왕비로 삼았다.
1868년 4월 10일 운현궁에서 귀인 이씨 영보당이 아들 완화군(完和君)을 생산하자 대원군은 몹시 기뻐하며
완화군을 원자로 삼으려고 하면서 박유붕에게 완화군의 관상을 보라고 하였다.완화군의 관상을 본 박유붕은
완화군의 명이 짧다고 원자로 삼는 것을 반대했다.
완화군은 명성왕후의 반대로 끝내 원자로 책봉되지 못하고 박유붕의 말대로 1880년 1월 12일
13살 어린 나이로 죽자 생모 영보당 이씨도 충격을 받고 마음의 병으로 죽었다.
고종과 대원군은 완화군을 원자로 삼는것을 반대하는 박유붕을 명성왕후의 편을 든다고 관직을 삭탈하고
운현궁 출입도 막고 멀리하기 시작하였다.그 후에 박유붕의 집으로 여러번 명성왕후 측에서 사람을 보내서
명성왕후의 관상을 봐달라고 사정을 하자 박유붕은 이를 거절하기 위해서 자신의 한쪽 눈마저 불로 지지고
봉사가 되었다.명성왕후 측에서 관상을 봐주지 않고 맹인이 된 박유붕에게 앙심을 품고 사람을 보내서
박유붕을 죽였다고 전해진다. 언제 누가 죽였는지 또 사후의 일들은 전해지는게 없다.
풍수지리에서 발복의 수단으로 음택(陰宅)발복과 양택(陽宅)발복이 있다.
음택발복의 원리는 조상의 묘를 명당에 묻으면 명당의 지기가 유전자가 같은 후손에게 전달되어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하는 동기감응(同氣感應)의 이론이다.
양택발복의 이치는 잉태지, 출생지, 성장지, 거주지 등의 터가 좋으면 그 터의 기운이 작용하여
사람의 의식과 판단에 영향을 끼친다는 환경풍수(環境風水)의 작용이 그것이다.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
음택발복(陰宅發福) 이야기는 유명하다.제법 세간에 많이 알려진 흥선군의 부친인 남연군 묘의 이장(移葬)스토리가 바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