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불이다
한 시인의 환상(幻想)에 의하면 꽃은 원초(原初)의 순수(純粹)한 불이다.
처음에 인간들은 이 불과 함께 살아왔다. 생명(生命)의 불이 타오르는 동안 인간은 영원(永遠)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죄를 지었고 그 죄로 생명의 불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불’과 사람 사이에는 두꺼운 벽이 생겨나고 역사(歷史)가 흐를수록 그것은 더욱 두꺼워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 불을 상실(喪失)한 뒤 인공(人工)의 불, 세속(世俗)의 불, 우리들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그런 문명의 불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 불은 육체(肉體)를 덥게 할 수는 있어도 영혼까지 따스하게 감싸줄 수 없었다.
또, 그 세속(世俗)의 불은 파괴성이 강한 광기(狂氣)를 가지고 있어서 도처에서 생명을 불태우고 녹이고 끝내는 전쟁(戰爭)을 불러일으켰다.
원초(原初)의 생명적(生命的인) 불은 평화(平和)와 영생(永生)의 힘이었으나, 더럽혀진 인간의 불은 전쟁과 파괴의 힘을 지니고 있었던 까닭이다. 모조(模造)의 불로는 살아가기 힘든다.
그래서 사람은 추위 속의 존재로 바뀌게 되고 그 원시(原始)의 생명적인 불로부터 완전히 차단되면 목숨을 잃고 소멸해간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지각(地殼) 위에 인간은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때 인간을 양생(養生)했던 그 생명의 불은 저 깊은 땅에서 겨우 타오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다행(多幸)스럽게도 어쩌다 흙으로 덮인 그 원초(原初)의 ‘불’ 이 두꺼운 땅껍질을 뚫고 솟아오르는 수가 있다. 그것이 바로 꽃인 것이다.
꽃줄기는 땅속에 숨겨진 그 신비한 불을 길어 올리는 지하(地下)의 관(管)이고 꽃은 바로 그 관 끝에서 터져 나온 지하(地下)의 불꽃이다. 그러기 때문에 가장 꽃다운 꽃은 튤립이나 장미의 경우처럼 붉은 빛으로 타오른다.
한 시인(詩人)의 환상(幻想)에 의하면 이렇게 꽃은 인간이 상실(喪失)했던 원초(原初)의 불이었고, 그러한 이유로 해서 우리는 꽃을 보면 그냥 즐거워지는 것이다.
추위 속에서 살고 있는 존재가 다시 광명(光明)하고 따스한 옛 세계를 추억할 수 있는 경우란 오직 원초의 그 불과 접했을 때이다. 꽃은 향내를 가진 불이며 동시에 손가락에 화상(火傷)을 입히지 않는 추상의 열도를 지닌 불이며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 꽃이다.
불순(不純)한 세속의 불과는 달리 그것은 연기 없는 불이며 소리 없는 불이며 화재(火災)없는 불이다.
조용한 불, 얼어붙은 불, 그러나 향기로 타오르며 번져가는 불…… 그것이 꽃이다. 이 신비(神秘)한 원초(原初)의 그 불에서 시인(詩人)은 생명(生命)의 언어(言語)를 배우고 있다.
지은이 : 이어령
출처 : 『문학사상』198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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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조용히 젖어드는/ 초가 지붕 아래서/ 왼종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월곡령 삼십 리/ 피는 살구꽃/ 그대 사는 마을이라/ 봄비는 와서//
젖은 담모퉁이/ 곱게 돌아서/ 모란 움 솟으랴/ 슬픈 꿈처럼.
박목월, 봄비
안녕하세요. 노경아입니다.
오늘은 서정시인 박목월의 ‘봄비’로 편지를 열었어요. 1946년 동인지 ‘죽순’ 창간호에 실린 시예요. 봄비 내리는 날, 하루 종일 초가지붕 아래 앉아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이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박목월답게 이 시 역시 7·5조 운율로 구성돼 시를 읊다 보면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아요. 꽃이 필 만큼만, 욕심 없이 내리는 봄비가 참 고맙습니다.
오늘은 다소곳하게 내리는 ‘봄비’ 이야기를 할게요.
봄비 봄비처럼 찾아오길 바라는 이가 있나요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 같은 봄비//
내가 좋아하는 시구입니다. 부천의 자랑 수주 변영로의 시 ‘봄비’ 속 한 구절이죠. 꽃이 필 만큼만 아주 조금 내리는 봄비가 그려집니다. 보고 싶은 누군가가 봄비처럼 찾아오기를 바라는 시인의 마음도 느껴져요.
들나물들에 단맛으로 스며든 봄비
은으로 짠 실처럼 가느다랗게 빛나는 봄비. 그 고운 비가 냉이 달래 쑥 등 들나물에 단맛으로 스며들었어요. 때를 놓칠세라 손맛 좋기로 소문난 ‘아내를 위한 레시피’의 저자 조영학은 들에서 캔 (잎에 붉은 기운이 도는) 냉이에 된장 고추장 들기름을 넣고 무쳐 뭇사람의 침샘을 자극했죠.
농부들 마음 바쁘게 하는 비… 도시 농부도 경작 본능 꿈틀대
이맘때 비가 내려 땅이 보드라워지면 농부들은 바빠집니다. 가래 써레 쟁기 괭이를 손보고, 논도 둘러봅니다. 그러곤 논둑을 부지런히 오가며 황금물결 풍년의 꿈에 흠뻑 젖지요. 집 근처에 작은 텃밭이 있는 지인도 경작 본능이 꿈틀대 온몸이 근질거린다고 하네요. 봄비가 제 몫을 톡톡히 한 덕이에요.
빗소리에 술꾼들이 막걸릿집으로 모여드는 이유
일만 하고 살 순 없는 법. 술꾼들에게 빗소리는 전 부치는 소리로 들립니다. 비가 내리기 전 하늘이 끄물끄물하면 막걸리 집으로 하나둘씩 모여드는 이유죠. 막 지진 뜨끈하고 바삭한 부침개에 막걸리가 빠질 순 없으니까요. 소리연구가 배명진 교수도 잘 달궈진 프라이팬에 밀가루 반죽을 넣을 때 나는 기름 튀는 소리는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소리와 진폭이나 주파수가 거의 흡사하다고 말합니다.
산수유 꽃이 비를 머금고 있어요. 이맘때 비가 내리면 농부들은 풍년을 꿈꾸며 마음이 바빠집니다.
흐린 날씨 ‘끄물끄물’…게으른 행동은 ‘꾸물꾸물’
끄물끄물은 비가 오려고 날씨가 몹시 흐려지는 모양입니다. 그물그물보다 센 말로 끄물끄물하다, 끄물거리다, 끄무레하다 등으로 활용할 수 있어요. 그런데 발음이 비슷해서인지 ‘꾸물꾸물’로 잘못 쓰는 이가 꽤 있어요. 꾸물꾸물은 굼뜨고 게으르게 행동하는 모습이에요. 바쁜 상황에 느릿느릿 행동하는 사람한테 “왜 그렇게 꾸물거려!” 하고 야단치는 장면을 떠올리면 구분하기 쉽답니다.
날씨·감정 모두 품은 "찌뿌드드하다·찌뿌듯하다·찌뿌둥하다"
찌뿌드드하다, 찌뿌듯하다, 찌뿌둥하다 역시 비가 올 것처럼 날씨가 궂거나 잔뜩 흐린 모양이에요. 날씨가 궂으면 기분도 좀 언짢은데, 그런 감정까지도 안고 있어요. 날씨와 감정 둘 다 표현할 수 있는 말이니 쓸 일이 많겠죠.
밭 갈던 시인은 어디로 갔을까
봄비에 화답하듯 꽃들이 흐무러져 천지가 꽃물결입니다. 나비와 벌이 정분나기 딱 좋은 시절입니다. 시인 김용택도 밭일을 하다 말고 집을 나갔다네요. “나 찾다가 텃밭에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예쁜 여자랑 손잡고 섬진강 봄물을 따라 매화꽃 보러 간 줄 알그라” (김용택, ‘봄날’)
* 날씨 관련 우리말
쟁명하다: 날씨가 깨끗하고 맑게 개어 있다
물쿠다: 날씨가 찌는 듯이 더워지다
느끄름하다: 날씨가 흐려 침침하다
너누룩하다:요란하고 사납던 날씨가 좀 수그러져 잠잠하다
푹하다:겨울 날씨가 퍽 따뜻하다
그물그물하다: 날씨가 활짝 개지 않고 몹시 흐려지다
지은이: 노경아 한국일보 어문기자
출 처: 한국일보 2024. 3.21, 노경아의 달곰한 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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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변영로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아려 ─ㅁ풋이 나는, 지난날의 回想같이
떨리는, 보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안에 자지러지노나!
아,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銀실 같은 봄비만이
노래도 없이 근심같이 내리노나!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봄비>
이 수복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
푸르른 보리밭 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에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랭이 타오르것다.
* 유정독서모임 4월 17일 수요일, 14시에 실레마을 김유정역, 김유정문학열차에서 진행됩니다.
이번 시간에는 김유정의 수필 < 조선의 집시> - 들병이 철학 을 함께 읽습니다.
꽃향기 넘쳐 흐르는 계절, 김유정문학열차에서 뵙겠습니다.
2024.4.15 강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