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1)
1. 1961년 카의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이루어진 6번의 강연은 현재까지도 지배적인 역사 인식에 대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카의 장점은 강단 역사학자로서의 경험뿐 아니라 외교관 활동으로 얻게 된 구체적인 역사에 대한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카는 첫 번째와 두 번째 강연을 통하여 역사의 기본적인 속성을 이야기한다. 모든 주장은 급작스럽게 등장하지 않는다. 새로운 주장은 과거의 생각에 도전하고 대립하면서 과거가 지닌 오류를 극복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카는 19세기를 지배했던 ‘사실’을 중시한 ‘실증주의 사관’을 비판한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게 하라’라는 랑케의 가르침은 근대 역사학계의 핵심적 전제였다. ‘실증주의 사관’ 또한 과거의 도덕적이며 관념적인 역사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도전에서 시작하였다.
2. 카는 ‘사실’만의 역사는 불가능하다고 단정한다. 과거의 잡다한 사실 중에서 역사가의 관심을 끌고 의미가 부여될 때만이 ‘역사적 사실’이 되며, 사실의 선택은 역사가의 개인적 선택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에 대한 정확한 점검과 사료에 대한 세밀한 분석은 역사가에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만으로는 ‘역사’가 될 수 없으며 역사를 발언하게 하는 것은 역사가의 발언과 저술을 통해서다. 카는 크로체와 콜링우드의 역사관을 소개하면서 20세기 들어서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역사에 대한 ‘현재적 관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크로체가 말한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라는 말은 역사가의 임무는 기록이 아니라 평가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3. 카는 ‘실증주의 사관’을 비판하는 동시에 역사의 의미는 사람들마다 다르게 해석된다는 점에서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역사적 ‘회의주의’ 또한 반대한다. 또한 지나치게 현대적 관점을 투영함으로써 현재의 목적에 도움이 되는 사실만을 취사선택하는 ‘실용주의적 관점’ 또한 비판한다. 역사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두 요소, 역사가와 역사적 사실 모두의 가치를 포함할 수 있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역사가는 사실과의 끊임없는 상호관계를 통해서 연구를 진행할 수밖에 없다. 역사가의 관점이 담긴 선택으로서 역사의 연구가 시작되지만 과거의 사실을 통해서 역사가 또한 변화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카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역사의 본질을 정리한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호작용의 과정으로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하겠습니다.”
4. 이러한 역사에 대한 정의로부터 역사에 영향을 주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 또한 정리된다. 카는 사회로부터 분리된 고립되고 추상적인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고 전제한다. 모든 개인은 탄생부터 죽을 때까지 사회 속에서 존재하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카는 유명 역사가들의 저술을 분석하면서 그들의 역사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어떤 사상과 태도를 지녔던 인물인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로마사의 대가 몸젠의 <로마사>가 로마공화정 이후의 역사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이유가 당시 독일 사회의 혼란을 안정시켜줄 로마 시대 카이사르와 같은 인물의 출현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또한 네이미어라는 영국의 보수적 역사가가 ‘1848년’의 혁명에 대한 연구에 집중한 이유도 혁명이 ‘지식계층의 혁명’이라는 성격을 강조하면서 정치에 사상이 침입했을 때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5. 객관적인 시각을 강조하는 역사가들의 연구도 개인적 관점이나 사회적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듯이, “역사는 위인들의 전기”라는 말처럼 역사적 위인들이나 악한들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카는 주장한다. 역사를 마치 소수의 영웅들의 결단과 행동을 통해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역사를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들의 관계를 파악하는 노력을 포기하고 단순하고 평이한 방식으로 역사를 이해하려는 게으름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개인의 의도가 반드시 원하는 결과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역사는 한 개인의 영향력이 부각되더라도 개인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추종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사건은 진행되지 않는다. 왜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사건이 발생했는가는 그 사회가 갖는 성격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6. ‘니체’는 19세기 학문과 철학에 대한 철저한 파괴자였다. 하지만 그러한 니체도 다른 사회에서는 등장할 수 없는 독일 사회의 산물이라는 점을 카는 강조하는 것이다. “그것(역사상의 사실)은 사회 속에서 모든 개인들의 상호관계에 관한 사실이며, 또한 개인 행위로부터 점차 행위자 자신이 의도하고 있던 결과와는 다른, 아닌 때로는 반대의 결과까지 초래하는 여러 가지 사회적 힘에 관한 사실인 것이다.” 이런 점검을 통해 카는 역사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역사의 이중적 기능이란 인간으로 하여금 과거사회를 이해하게 하고, 현재 사회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7. 카의 역사에 대한 진술은 역사와 관련된 중요한 요소들의 절충적인 관계를 중시한다. ‘역사가와 역사적 사실’과의 관계,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한쪽으로만 강조되는 시각은 역사의 핵심을 놓치게 되며, 역사가의 견해나 역사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관점에 대한 통합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개개인의 관점에서 독립된 사실이 존재할 수 없듯이, 사회 속에서 고립된 개인 또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게 역사에 관한 자료를 읽을 때, 우리는 자료의 객관적인 논리 뿐 아니라 그것을 쓴 사람의 사상과 태도를 파악할 필요가 있으며, 때론 저자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까지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역사는 현대의 관점이 투영된 역사이기 때문이다.
8. 카의 역사관은 역사의 본질을 정확하게 짚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의 주장 속에 는 몇 가지 문제점이 나타난다. 먼저, 역사를 ‘역사가’의 독점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가에 의해 선택된 사실만이 ‘역사적 사실’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역사적 사실’을 선택할 수 있는 특정한 집단이 있음을 설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아무나 특별한 훈련이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역사적 사실’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사실이 역사적 사실이 될 수 없듯이, 모든 역사적 연구가 중요한 역사적 연구가 되기 위해서는 역사가 집단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아마추어 역사가들의 연구는 중요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역사는 결국 전문가들의 폐쇄된 관점에서 통용되는 규칙에 매몰되는 것이다.
9. 또 다른 점은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상호적 관계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과거’ 그 자체의 핵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영역에 현재의 왜곡된 관점을 투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원시 기독교에 관한 연구에 있어, 예수의 활동이나 예수의 초기 추종자들의 활동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기독교적 필요성이나 강조점을 무시하고 당시의 시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수많은 원시 기독교에 관한 연구는 결국 카의 말처럼 현재의 필요에 의해 과거가 재단된 형태로 연구되었고 왜곡되었다. 카의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역사에 대한 정의는 역사의 하나의 측면을 말했다는 점에서는 동의할지라도, 이것이 모든 역사를 연구하는 기본적인 관점이라고 주장할 때에는 분명 커다란 문제점을 지닌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첫댓글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 ㅡ 역사가의 임무는 기록이 아니라 평가에 있음을 강조!!!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호작용의 과정으로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
내 삶의 역사!!!!!
또 다른 해석이 필요할지도... 자신과의 끝없는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