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행문趙行汶거사, 숱한 고통 끝에 염불로 왕생하다
중국 청나라 조행문趙行汶 거사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작은 아버지 슬하에서 어렵게 자랐다. 작은 아버지 집안이 가난하여 여섯 살 때부터 일을 해야 했으며, 숙모한테는 갖은 서러움을 당하였다.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집안 형편 때문에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밥을 배불리 먹어 본 적이 없었다. 품성은 착하고 너그러워서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어떻게든 도와주려 애썼다.
28살 때 점포의 점원으로 취직이 되어 조금이나마 돈을 벌게 되었지만, 생활이 어렵고 궁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시 중국은 영국군이 쳐들어오고 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나는 등 나라는 그야말로 대혼란의 시대였다. 굶주린 사람들이 사람을 죽여서 먹는가 하면 부잣집과 고관들의 집이 수시로 약탈당하였고 관리들의 부패와 학정은 극에 달하였다.
조행문 거사는 이러한 세상에서 살고픈 생각이 들지 않을뿐더러 결혼하겠다는 뜻도 접었다. 대신 아무런 연고도 없는 먼 지방에 가서 막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10여년을 갖은 고생을 하면서 돈을 모아 그 돈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
어느 날 모처럼 집에 있는데, 탁발을 하던 어떤 스님이 조거사를 보더니 혀를 차면서 불쌍히 여기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 거사가 그 연유를 묻자, 그 스님이 “당신을 보아 하니 많은 풍파를 겪었소 그려. 하지만 앞으로도 10년은 더 고생을 해야 할 상相이오.” 그러면서 “전생에 닦아 놓은 공덕이 거의 없어 그러는 것이오. 그런데 3생生 전에는 높은 벼슬살이도 하였고, 공덕도 제법 쌓아 놓은 걸 보니 말년에는 좋은 일이 있을 것이오. 마지막으로 일러둘게 있소. 틈날 때마다 부처님 이름을 부르시오. 이왕이면 나무아미타불이 좋겠소. 그러면 필경 감응感應이 있을 것이오. 그대가 심성이 착하여 남을 도와주길 애쓰니 하늘이 그대를 돕는 거라오.” 하였다.
조 거사는 그 스님의 말씀을 뼈에 새기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 가면서 염불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모함으로 관청에 끌려가 매질을 당하기도 하였고, 산길을 걷다가 굴러 떨어지는 돌에 깔려 다리를 크게 다치기도 하는 등 고통은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 와중에서도 그는 부처님 명호를 입에서 놓지 않았고, 그의 나이 62세가 되던 어느 날, 그는 자기가 죽을 날짜를 명확히 알게 되었다. 게다가 호법신장들이 자기를 따라다니면서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를 보는 사람마다 그한테서 향기가 난다고 하였으며, 얼굴에는 알 수 없는 빛이 서려 있다고도 하였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더욱 열심히 부처님 이름을 불렀다.
임종이 다가오자 그는 모든 미련을 버린 채, 오직 부처님 이름만 불었다. 그리고 사람들한테도 부처님 이름을 늘 부를 것을 권하였다. 저 멀리서 부처님과 수많은 보살님들과 성중들이 자기를 맞이하러 오는 광경이 보였다. 옆에서 수발을 들던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는 온화한 표정을 지은 채 조용히 떠났다.
첫댓글 훌륭한 수행력 찬탄 합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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